최근 수정 시각 : 2021-06-22 02:48:26

아이작 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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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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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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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벤팅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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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게오르그 솔티
(1971)
시드니 포이티어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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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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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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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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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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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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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로버트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6위7위8위9위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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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2위13위14위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16위17위18위19위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21위22위23위24위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26위27위28위29위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31위32위33위34위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36위37위38위39위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41위42위43위44위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46위47위48위49위50위
보이 조지 더글라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51위52위53위54위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56위57위58위59위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루스 에드워드 엘가
61위62위63위64위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66위67위68위69위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71위72위73위74위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76위77위78위79위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81위82위83위84위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86위87위88위89위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91위92위93위94위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96위97위98위99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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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Isaac Newton
PR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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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국적 파일:그레이트브리튼 왕국 국기.png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출생 1643년 1월 4일그레고리력 / 1642년 12월 25일율리우스력[2]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주 울즈소프
사망 1727년 3월 31일그레고리력 / 1726년 3월 20일율리우스력(향년 84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미들섹스 켄싱턴
직업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철학자[3], 신학자, 연금술사, 탐정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Isaac_Newton_signature_ws.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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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colbgcolor=#fff,#2d2f34>웨스트민스터 사원
신장 168cm
종교 개신교(성공회)[4]
작위 기사 (Knight Bachelor)[5]
학력 더 킹스 스쿨 그랜섬 (졸업) (1655년-1659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University_of_Cambridge_coat_of_arms_official.svg.png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B.A) (1661년-1665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University_of_Cambridge_coat_of_arms_official.svg.png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M.A) (1667년-1668년)
경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University_of_Cambridge_coat_of_arms_official.svg.png 케임브리지 대학교 특별연구원 1667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University_of_Cambridge_coat_of_arms_official.svg.png 케임브리지 대학교 전임특별연구원 1668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University_of_Cambridge_coat_of_arms_official.svg.png 케임브리지 대학교 루카스 석좌교수[6] 1669년
영국 의회 하원의원 1688년
조폐국 감사 1691년
조폐국장 1699년
왕립학회1703년
부모 아버지 이삭 뉴튼 시니어 (1606-1642)
어머니 한나 에이스코 (1623-1679)
}}}}}}}}} ||

1. 개요2. 생애3. 과학적 업적
3.1. 고전물리학의 정립3.2. 뉴턴식 망원경3.3. 라이프니츠와의 미분 논쟁
3.3.1. 변분법과 최속강하곡선
3.4. 기타 / 역설
4. 초상화5. 일화
5.1. 신학자 뉴턴5.2. 조폐국 감사, 국장으로서의 뉴턴
6. 흑역사7. 명언8. 후세 인물들의 평9. 대중문화에서의 뉴턴

[clearfix]

1. 개요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라는 거대한 대양이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 껍질을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7]

과학혁명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한 과학자이다. 고금 3대 수학자 중 한 사람, 2대 케임브리지 대학교 루카스 석좌 교수[8], 그리고 마지막 르네상스인이자 최후의 연금술사인 동시에 신학자이며 종교학자이다.

사후 30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인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다. 수학에서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 뉴턴 역학 체계 확립, 이것에 표시된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후 뉴턴 역학(고전역학)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등장 전까지 과학계의 가장 큰 거목으로 자리잡게 된다.

좀 더 설명하자면 아인슈타인절대로 뉴턴 역학을 뒤집지 않았다. 다만 질량과 시간, 공간의 정의를 다시 함으로써 뉴턴 역학을 보완하였다. 상대성 이론의 내용은 질량과 시공간의 정의를 자기가 말하는 방식대로 다시 하면 뉴턴 역학과 맥스웰 전자기학의 결과를 모순 없이 합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물리학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시공간과 물질은 바로 물리학의 주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을 한바탕 뒤집은 것이 맞다. 정리하자면,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을 뒤집기는 했지만 뉴턴 역학을 뒤집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이는 물리학 교과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고등학교, 대학교에서는 먼저 뉴턴 역학을 배운다. 아직까지도 실생활에 관련된 계산은 대부분 뉴턴 역학에 근거한다. 심지어는 미시 세계인 분자 계산에서도 거대 분자를 다룰 때에는 양자역학보다는 뉴턴 역학을 쓴다. 일단 양자역학은 계산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거대분자에서는 뉴턴 역학과 별 차이도 없다. 우리의 생활에 가장 영향을 끼친 물리학자를 들라면 아인슈타인보다는 뉴턴이 더 적합하다. 극도로 적은 오차도 문제를 일으킬 만큼 정밀하게 계산해서 띄워야 하는 인공위성이나 우주 정거장도 어지간하면 그냥 뉴턴 역학 돌린다.[9] 만약 뉴턴을 능가하는 자가 후에 나온다면, 그 인물의 업적은 이론 물리학의 궁극적인 목표인 모든 것의 이론을 단신으로 완벽히 정립하는 수준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10]

이외에도 뉴턴은 고전 광학의 확립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그로 인해 광학이 물리학의 영역에 포함되게 된다. 그는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이기도 했다.[11]

뉴턴의 물리학 체계를 집대성한 명저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가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단위로 힘 (force)의 단위인 뉴턴(N)이 있다. 1kg의 물체를 1m/s2으로 가속시킬 때 드는 힘이 1N. 간단하게 느낄려면 약 100g짜리 물건을 들어올렸을때 손에 느껴지는 힘이 약 1N[12]이다.

17-18세기에 살았음에도 84세까지 매우 오래 살았으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는데, 심지어 취미도 없이 연구에만 매진했다고 한다. 뉴턴의 조수였던 험프리 뉴턴은 "내가 알기론 그는 어떤 오락을 즐기거나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연구 외에는 그 어떤 생각도 헛된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긴 생애 만큼이나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친구 에드먼드 핼리[13]도 뉴턴보다 1살 더 많은 85세까지 장수했다.

2. 생애

유년기는 불행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난 그 다음 해[14]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사이 밤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미 죽어 유복자였고 1개월 일찍 태어난 미숙아라 몸이 양말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3살에 어머니 한나(Hannah Ayscough)가 재혼을 해 집을 떠나는 바람에, 뉴턴은 외할머니 마저리(Margery Ayscough)의 집에 남겨지게 되었다. 외삼촌인 목사 윌리엄(William Ayscough)도 그를 자주 돌봐주었다.

새아버지 바나바스 스미스는 뉴턴의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교구 목사였는데 의붓 아들인 뉴턴과 갈등이 심했다. 이러한 점이 뉴턴의 괴팍한 성격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15] 새아버지를 매우 증오하여 때때로 그를 죽이는 상상을 하고, 집을 불태우겠다고 협박과 폭언도 일삼았으며, 새아버지가 죽자 매우 기뻐했다는 말도 있다. 다만 의붓동생들과의 사이는 좋아서 자주 놀아주곤 했다고 한다.

뉴턴은 처음부터 공부에 두각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처음 입학하였을 때 뉴턴의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는데, 당시 뉴턴보다 조금 더 성적이 나았던 한 학우와의 다툼 후에 그에게 경쟁심을 가져 공부를 진지하게 시작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학우는 따라잡았으나, 이미 뉴턴은 공부에 재미를 붙여 그 뒤로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고, 케임브리지를 다녔던 삼촌의 조언을 따라 케임브리지 입학 시험을 보고 1660년에 18살의 나이로 케임브리지에 입학하게 된다.

이후 광학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망원경을 발명해낸 업적을 인정받아, 1669년에 신학에 투신하기로 뜻을 굳힌 아이작 배로우의 후임으로서 입학 후 약 10년 만에 케임브리지의 루카스 수학 석좌 교수직으로 올라서게 된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말년에 성질이 더러워져서 성질 괴팍한 노인네라고 불렸다고. 그래도 전해오는 말로는 제자들이 "선생님이 한 업적이 많습니다."라고 말하자 피식 웃으면서 하던 명언이 있다. (하기 명언 문단 참조)

죽은 뒤에는 영국의 위인들이 잠든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안장되었다. 함께 사원에 안장된 과학자로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찰스 다윈, 찰스 라이엘 등이 있다. 석관 위에는 그가 자신이 쓴 저서들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몸을 기댄 모습이 조각되었으며, 연구에 사용했던 망원경과 프리즘 등의 기구가 묘사되었다. 라틴어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파일:attachment/아이작 뉴턴/뉴턴묘비명.jpg H. S. E.
ISAACUS NEWTON Eques Auratus,
Qui, animi vi prope divina,
Planetarum Motus, Figuras,
Cometarum semitas, Oceanique Aestus.
Sua Mathesi facem praeferente
Primus demonstravit:
Radiorum Lucis dissimilitudines,
Colorumque inde nascentium proprietates,
Quas nemo antea vel suspicatus erat, pervestigavit.
Naturae, Antiquitatis, S. Scripturae,
Sedulus, sagax, fidus Interpres
Dei O. M. Majestatem Philosophia asseruit,
Evangelij Simplicitatem Moribus expressit.
Sibi gratulentur Mortales,
Tale tantumque exstitisse
HUMANI GENERIS DECUS.
NAT. XXV DEC. A.D. MDCXLII. OBIIT. XX. MAR. MDCCXXVI
이곳에 아이작 뉴턴 경이 묻혀 있으니, 하느님과 같은 정신력에 의하여 그가 발견한 수학적 원리로 행성의 운행, 혜성의 경로, 바다의 조석을 처음 밝혔으며, 일찍이 어떠한 학자도 의심하지 않고 있던 광선의 본성을 발견하였다. 또한 자연, 고대, 성서에 관하여 세밀하고 예민하며 확실하게 해명하여 전능하신 하느님이 존엄하심을 철학적으로 증명하였다. 인류가 하느님 곁에 이토록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실로 우리의 큰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642년 12월 25일 출생, 1727년 3월 20일 사망.[16]

하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뉴턴의 묘비명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알렉산더 포프가 뉴턴을 칭송한 글귀다.[17] (하기 후세 인물들의 평 문단 참조)

3. 과학적 업적

3.1. 고전물리학의 정립

페스트런던에 퍼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피난하던 시기(1664~1666)의 산책 중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야사가 있는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우선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고 알려진 만유인력의 존재 자체를 뉴턴이 발견한 것은 아니다. 지구 상에서 측정되는 중력과 천체운동에 필요한 구심력이 같은 것이라는 정도의 개념은 당시 학자들도 다들 알고 있었으며, 문제는 그 끌어당기는 힘의 크기가 얼마이며, 그것이 행성 운동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느냐였다. 행성의 공전 주기니 궤도니 하는 것은 이미 전에 요하네스 케플러 등에 의해 관측되어 케플러의 3대 법칙으로 정립되었는데[18], 뉴턴이 한 것은 이를 갈릴레이 역학으로부터 발전시킨 뉴턴 역학(뉴턴의 운동법칙)과 미적분이라는 수학적 도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만유인력을 수학적 표현으로 정립해낸 것이다.[19]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겼구나!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는구나!"라고 했다는 것은 초딩용 위인전에나 나오는 얘기. 참고로 Why?책에서도 뉴턴이 중력을 발견했다고 나온다.[20]

인생 말년에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뉴턴 본인이 직접 언급한 바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에 대한 영감을 받았는지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유인력과 사과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져서 이제는 진위 여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심지어 그의 모친의 자택에 있던 사과나무를 여러 번 옮겨 심은 사과나무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기증받아 심어져 있다. 국내에만 11곳 이상에 심겨졌으며(다만 일부는 고사했다.), 접목이므로 종자는 원본과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참고로 원본 나무도 놀랍게도 여전히 살아 있다.

16세기 잉글랜드의 천문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 모양으로 돈다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수학으로 계산하려들면 이상하게도 공전주기 계산이 맞지 않아 당대 수학계의 난제로 유명했었다. 그러다 에드먼드 핼리, 크리스토퍼 렌(1632~1723, Sir Cristopher James Wren)[21], 그리고 아이작 뉴턴의 최악의 라이벌 로버트 훅, 이렇게 셋이 누가 먼저 지구의 공전주기 계산을 정확히 해내나 내기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핼리는 같은 왕립협회 회원이던 아이작 뉴턴을 캠브리지 대학에서 만난 자리에서 우연치 않게 이 문제를 털어놓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뉴턴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20년 전에 계산해 봤더니 원이 아니고 타원이던데?"
말 그대로 핼리는 정줄을 놨고, 뉴턴에게 이걸 왜 발표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20년 전에 왕립 협회에서 로버트 훅과 크게 다툰 이후로 침묵하게 됐다는 것.[22] 결국 1684년에 핼리의 권유로 프린키피아를 발표한다. [23]

거두절미하고 이론의 전개에 대해서 살펴보면, 뉴턴은 물체의 운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의 연구결과를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정리하고, 이를 통해 구심력을 정의했으며, 행성의 궤도가 원뿔곡선이고 태양이 초점 중 하나에 있으며, 궤도에서 케플러 제3법칙이 성립하면 중력은 거리의 역제곱꼴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도출해냈다. 현재의 고등학교 물리Ⅰ 수준에서는 케플러 제1법칙에 의해 행성의 궤도는 타원 궤도이고, 케플러 제2법칙에 의해 행성의 공전 속도는 태양에 가까울수록 빨라지지만, 물리Ⅱ에서는 그냥 등속 원운동 취급한 상태로 역제곱꼴이라면 궤도에서 케플러 3법칙이 성립한다는, 진행방향이 다른 전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다.

그렇게 갈릴레오 갈릴레이요하네스 케플러를 거친 고전 물리학은 뉴턴에서 집대성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공로 때문에 지금까지도 뉴턴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제임스 맥스웰과 함께 물리학의 3대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리학의 1/3(고전역학)은 뉴턴이, 1/3(전자기학, 통계물리)은 맥스웰이, 1/3(양자역학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완성했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24]

3.2. 뉴턴식 망원경

기존의 볼록렌즈 두 개를 합쳐 증폭시키는 방식과 다른, 반사경을 이용한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지금도 반사경을 이용한 망원경을 뉴턴식 망원경이라 부른다.

뉴턴이 반사망원경을 실제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광학 분야의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기 때문. 실제로 반사 망원경은 뉴턴식 이전에 그레고리식 반사 망원경이 설계 개념으로 먼저 나와 있었는데, 당시 광학기술로는 만들 수 없는 곡면거울을 요구했기 때문에 뉴턴은 당시의 기술로 만들수 있는 방식을 계산, 제시한 것이다.[25]

당대 '빛은 순수한 백색이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을 때, 그는 프리즘 연구를 통해 다양한 색의 빛의 굴절과 반사 등을 실험해보았고, 다른 색의 빛은 다른 굴절률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굴절 망원경이 색수차가 발생한다는 것을 예측했다.[26] 하지만 반사는 이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색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반사 망원경을 발명하게 된다. 상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점[27]과 같은 구경의 굴절 망원경보다 상이 어둡다는 점[28]을 제외하고는 제작하기도 훨씬 쉽고 싸다는 장점이 있다.[29]

망원경 중앙에 반사용 평면거울, 즉 반사경이 있어 상을 가릴 것 같은데, 반사경이 상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사경이 "가리는" 빛의 구간이 확대되기 이전의 부분, 즉 빛을 모으는 부분이기 때문. 개구면의 일부를 가린다 해도 가려지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통해 들어온 빛만 모아 상 전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반사용 평면경이 개구면의 일부를 가리더라도 상의 전체적인 밝기가 줄어들 뿐, 상의 일부가 가려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단, 반사 망원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초점이 맞지 않는 부분의 상 흐려짐 현상이 도넛 모양이 되는 특성이 있다. 소위 '도넛 보케[30]'라고 하며, '보케'가 개구면의 형상대로 형성되는 광학적 원리 때문에 생긴다.

3.3. 라이프니츠와의 미분 논쟁

미분[31]을 누가 먼저 발명했나 하는 문제로 라이프니츠와 크게 싸웠었다.

라이프니츠는 이 문제를 영국 왕립과학협회에 제소하여 공정한 판결을 받고자 했고 뉴턴은 회장 권한으로 이 문제를 '공정한 위원회'를 구성해서 조사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독일 출신 위원에게는 아예 의견 개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게다가 위원회 최종보고서는 남몰래 뉴턴이 직접 썼으며, 이 보고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써서 익명으로 왕립과학협회 회보에 싣기까지 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죽었을 때는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뉴턴이 여러 외압을 넣은 결과와 동일하게, 실제로도 뉴턴 쪽이 라이프니츠보다 명백하게 먼저 발명했다. 그가 미분을 발명한 것은 1665~6년으로, 1676년에 발명한 라이프니츠보다 10년이나 빠르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주거나 연구에 사용하기만 했으며, 1671년 작성한 미분에 대한 논문도 발표하지 않았다. 논문이 정식으로 발표된 것은 60년 후였는데, 이때는 이미 뉴턴이 사망하고도 10년이 지난 후였다.

사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분쟁에는 매우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미분 자체를 발표하기 전에 서로에게 자기 결과를 자랑했다는 점. 두 명 모두 미분을 발명했지만 서로 그것을 모르던 상태에서 먼저 뉴턴이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분의 기본 개념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 막연한 개념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를 본 라이프니츠는 답장에서 뉴턴에게 자신의 미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편지를 보냈다. 따라서 누가 미분을 발명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자기 지도를 받아서 미분을 재구성한 주제에 자기가 먼저 미분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배은망덕한 찌질이라고 생각했고, 라이프니츠는 기껏 존경하는 과학자에게 자기 결과를 설명했더니 그걸 싹 빼앗아가고는 오히려 자기를 악당으로 모는 파렴치하고 권위적인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히 누가 진정한 발명자인가를 넘어선 깊은 감정의 골이 패이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라이프니츠도 뉴턴의 편지를 받기 전에 이미 미분을 생각해낸 것으로 보지만,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편지에서 영감을 얻어서 불완전한 상태이던 미분을 완성했을 수도 있기는 하다. 뉴턴도 이때까지 미분을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므로, 사실 라이프니츠의 연구 결과를 보고 자신의 미분을 다소 손질했을 가능성도 있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뉴턴이 먼저 발표를 냈고 그 뒤로 라이프니츠가 자신이 발견한 미분을 발표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뉴턴이 먼저 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미분과 뉴턴의 미분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했다. 그런데 후에 어느 영국 수학자가 '이것은 뉴턴의 표절이다'라는 의견을 내며 일이 커졌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저 둘은 가만히 있었는데 제3자가 일을 크게 만들었다는 소리. 저 의혹이 생기기 전까지는 둘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표절 의혹으로 영국 학계와 독일 학계는 대판 싸움이 났다.

추가로, 뉴턴이 단순히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당대의 대학자라서 라이프니츠가 영국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욕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 이전에 흔히 라이프니츠는 라이프니츠 급수[32]라고 불리는 식을 1674년에 발견했는데, 문제는 이미 제임스 그레고리라는 당대의 영국 수학자가 1671년에 발견했던 식이었기 때문에[33] 라이프니츠가 이 식을 독자적으로 발견했음에도 이때 영국인들의 뇌리에는 '라이프니츠=표절범'이라는 의심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뒷배경과 뉴턴의 언플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당시의 영국인들에게 라이프니츠는 표절이나 일삼는 파렴치한이 되었다. 더 안습한 사실은, 이미 madhava라는 인도의 수학자가 약 200년쯤 전에 아크탄젠트 급수를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촉발된 논쟁은 예상치 못하게 큰 여파를 불러일으켰는데, 영국 학회와 독일 학회의 싸움으로 인해 양국간의 학문적 교류가 중단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수학계는 얼마간[34] 대륙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었다고.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표절 문제를 명확히 한 현대의 논문 체계가 등장하게 된다.[35]

미분의 발명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해석에서는 다소 의견이 갈린다. 뉴턴이 먼저 발견하기는 했지만, 많은 수학자들의 견해는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각각 독립적으로 발명했으니 두 사람 모두 발명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미분법이 완전히 무에서 독자적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 페르마가 접선의 기울기를 구하는 불완전한 방법을 연구한 적이 있고, 뉴턴의 스승인 아이작 배로는 '미적분학의 기본정리'의 일반화된 형태를 증명했다. 당대에 나름 싹이 틀 만한 토양이 갖춰져 있던 셈이며, 따라서 두 사람이 각자 독립적으로 개발했다 하더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뉴턴의 각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승자는 라이프니츠가 되었다. 물리학자인 뉴턴의 방식보다는 수학자인 라이프니츠의 방식이 더 수학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어서 현대의 미분은 거의 라이프니츠의 기호 방식을 따르고 있다. 뉴턴은 물리학자답게 속도와 가속도의 개념을 연구하다가, 라이프니츠는 기하학에서 접선을 연구하다가 각각 미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dy/dx 방식이 바로 라이프니츠 방식이고, 뉴턴의 방식은 y˙\dot y처럼 함수(변수) 위에 점을 쓰는 방식이다. 흔히 말하는 dot notation. 다만 f(x)라는 기호를 처음 쓴 것은 오일러이므로, 뉴턴이 현대처럼 f'(x)라고 썼을 리는 없다.[36] 고등학교에서 미분을 배워 본 학생이라면 합성함수의 미분[37]을 할 때 라이프니츠와 라그랑주 방식이 얼마나 편리한지, 그리고 뉴턴 방식이 얼마나 결과가 더럽게 나오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뉴턴 방식으로 쓴 공식을 볼 기회는 거의 없지만 외국에서 쓴 미적분 책에는 간혹 나오고, 물리학을 한다면 시간에 대해 미분한 양으로 다른 양을 미분해야 하는 경우[38]처럼 역학 문제에서 시간에 대한 미분이 잔뜩 들어 있는 미분방정식을 풀어야 할 때 쓰는 양을 줄이려고 쓴다.

3.3.1. 변분법과 최속강하곡선

미분과 관련한 뉴턴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바로 변분법이다.(뉴턴만의 업적은 아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방정식이 조건을 만족하는 변수를 구한다면, 변분법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를 구한다. 좋은 예시가 바로 최속강하곡선(사이클로이드) 문제로, "어느 고정된 두 지점을 연결된 궤도 위를 물체가 중력 가속도에 의해 이동할 때, 가장 빨리 도착점에 도달하는 궤도는 무엇인가?"를 구하는 문제다. 쉽게 설명하자면, 출발점과 도착점이 정해져 있을 때, 가장 빨리 도착점에 도착하는 미끄럼틀 모양을 구하는 문제로도 볼 수 있다.

뉴턴은 이 문제를 하위헌스의 법칙과 논증 기하학을 이용하여 답을 구했다. 당시 라이프니츠는 뉴턴과 미적분학 관련 논쟁이 있었고 베르누이는 뉴턴을 시험해보기 위할 겸 이 문제를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들에게 답을 구하라고 한 것이다.(라이프니츠와 베르누이의 풀이를 보면 미적분학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뉴턴은 이런 의도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미적분학으로 풀지 않고 기하학적 기법으로 답을 구하였다.(프린키피아도 스스로 고안한 미적분학 기법보다는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해나간다.)

이때 뉴턴은 익명으로 답을 제출했지만, 풀이가 워낙 뛰어나고 독창적이라 이름이 저절로 밝혀졌다. 베르누이는 해답을 보자 “발톱 자국을 보아하니 사자가 한 일이다.”라고 평했을 정도.

변분법은 라그랑주 역학으로 이어지게 되며, 라그랑주 역학은 해밀턴 역학을 거쳐 슈뢰딩거 방정식, 양자역학까지 이어지게 된다.

3.4. 기타 / 역설

  • 구멍-반점 이론
    뉴턴은 빛의 부분 반사에 관한 이론중 하나인 '구멍-반점 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구멍-반점 이론이란, 유리나 물 등의 물체에서 빛이 일부는 투과되고 일부는 반사되는 부분반사현상을 구멍에서 빛이 통과되고 반점에서 빛이 반사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뉴턴은 "어떤 유리라도 깨끗하게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간단하게 설명하였는데, 이는 뉴턴이 유리를 '닦는다'라는 행동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유리를 닦는다는 것은 미세한 가루들을 문질러 유리면을 긁어내는 것으로 미세한 흠집이 생기는데, 이 미세한 흠집을 빛이 통과한다는 것은 구멍-반점 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뉴턴-랩슨 방법
  • 유율법

4.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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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 가장 잘 알려진 초상화. 1702년.[39]

사실 뉴턴 본인은 1689년에 그려진 초상화를 싫어했고, 1712년의 초상화가 로마 시대의 귀족처럼 그려졌다며 좋아했다. 하지만 1689년작 초상화는 뉴턴의 천재적 이미지를 극대화한 모습 덕분에 그의 사후에 아이작 뉴턴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이 되었다. 출처 뉴턴이 장수한 인물임에도 이 초상화로 인해 젊은 모습이 더 각인된다. 젊은 시절에 상대성 이론을 정립한 아인슈타인이 노년에 사진을 주로 찍은 까닭에 늙은 모습으로 각인되는것과 대조된다.

1980년대 초반의 금성사 위인전기는 1702년작 초상화를 표지로 사용하여 뉴턴하면 이 초상화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파일:external/www.1st-art-gallery.com/Portrait-Of-Sir-Isaac-Newton-1642-1727-C.1710.jpg 파일:external/www.1st-art-gallery.com/Portrait-Of-Sir-Isaac-Newton-1646-1727-1726.jpg
1712년. 1726년.[40]

5. 일화

  • 여러모로 독특한 행동으로도 유명한데, 학생 시절 돈이 없어 부유층 자제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동전 몇 닢을 모아 생활했다든가[41], 어렸을 때 자기를 괴롭혔던 이웃집 애를 딱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서 다시는 건드리지 못하게 본보기를 보여줬다든가, 근육 사이를 탐험한답시고 바늘로 눈구멍과 눈알 사이를 깊숙이 찔렀다든가,[42] 평생 연금술에 심취해 있었다는 일화부터 정말 특이한 일화가 많다.
  • 크롬웰이라는 이름을 가진 폭풍이 잉글랜드를 덮쳐서 큰 피해가 난 적이 있는데[43], 고향에 있던 10대 후반 뉴턴이 살던 곳에서도 폭풍우로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뉴턴은 바람이 부는 바깥으로 나와 널뛰기를 하면서 바람의 강도를 측정했다고. 이웃 사람들은 "바람이 마구 부는데 홀로 널뛰기나 하고 미쳤나?"라며 어이없어 했던 일화도 있다.
  • 밤하늘을 관측할려고 연에 등불을 달아 올렸다가 난데없이 밤중에 혜성이 떨어지네 뭐네 이웃들이 놀라[44] 난리를 피웠다가, 자세히 보고 혜성이 아니라 누가 에 등불을 매달아 올린 곳임을 알아차려 연을 날린 뉴턴은 호되게 혼난 적도 있다.
  • 평생 동정이었다. 뉴턴 자신도 동정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을 정도. 여성혐오증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기에게 여자를 소개해준 친구에게 절교하는 편지를 보냈을 정도였다. 그 친구와는 몇 년 후 화해하여 관계를 회복했다. 후대의 같은 잉글랜드인 수학자이자 전산학의 아버지인 앨런 튜링도 여성혐오자였지만, 튜링처럼 동성애자이기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모친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뉴턴의 아버지가 죽은 뒤 뉴턴을 낳고 3살 무렵에 집을 나가 11살에 새아버지와 동생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모친, 새아버지와 평생 사이가 소원했다고 전해지며[45], 자식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행복만을 찾는 어머니를 보고 결혼 제도 자체를 혐오했을 가능성도 높다. 다만 여자를 싫어했지만 자신의 조카가 집안일과 빨래를 도와주는 건 흔쾌히 찬성했다고 한다. 또한 동생들과의 사이도 그럭저럭 좋았다고.
  • 물리학보다 연금술, 성경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연구했다고 한다. 사실 그것들이 본업이고 물리학은 취미 생활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후대에 소위 이단으로 간주되는 학자로 고대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톨릭이 전부 없애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연금술, 성경 연구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들을 왕창 연구했다. 실제로 그의 연구 노트 90%는 그쪽 주제였다.[46] 덕분에 친구인 핼리가 뉴턴의 관심을 물리학으로 돌려놓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사실 연금술을 연구하고도 장수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연금술에서는 수은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시절에 물질의 특성을 확인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직접 먹어보는 방식이었다. 뉴턴은 특별한 부작용은 겪지 않았던 것 같지만, 말년에 우울증에 걸린 것이 수은 중독 탓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사실 주식이 떡락해서 이 시기는 사실상 연금술이 유행한 마지막 시기로, 과학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찰스 2세도 열심히 연구하다가 말년에 맛이 좀 갔다고 한다.*명예혁명 직후(1688) 대학 대표로 국회의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47] 투표에는 빠짐없이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은 당시 속기록에 딱 하나만 있다고 한다. "거, 바람 들어오니 창문 좀 닫아주시오."*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그는 고양이를 길렀는데, 지나다니기 쉬우라고 문아래 작은 여닫이문을 하나 달아 놓았다. 그런데 새끼를 낳으니까 옆에 작은 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친구가 보다 못해 "어미가 문 연 거 그대로 따라가게 하면 되잖아"라고 하니까 당황했다는 일화.*그 밖에 연구에 열중하는데 배가 고파 간식으로 달걀을 삶아서 먹으려고 주섬주섬 책상을 손으로 더듬어보다 손에 잡힌 대충 둥근 걸 펄펄 끊는 냄비에 넣고, 나중에 달걀이 다 삶아졌나 하여 꺼내 보니 달걀은 온데간데없고 책상에 두었던 회중시계가 냄비에서 나오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페스트 치료를 연구하려고 두꺼비를 이용해서 약으로 만드려는 기록이 있다.

5.1. 신학자 뉴턴

뉴턴은 과학 분야보다 오히려 더 많은 분량의 신학 관련 문헌을 남겼다. 그는 당대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전문 신학자로 간주될 정도로 신학 전문가로 인정받았고, 많은 사상가들과 신학이나 종교에 관한 의견을 지속적으로 주고받았다. 뉴턴은 표상과 이데아 사이의 일치성을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어받았고, 이것은 고전~중세 신학의 연구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일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본인이 종교에 대한 의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부정하였고, 더 나아가 기독교가 삼위일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 본문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삼위일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후 요한 1서 5장 8절에 의도적으로 첨가된 구절도 뉴턴이 증명한 것들 중에 하나이다. 이는 영국 국교회의 견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고, 당시 이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행위는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감옥에 갇히거나 까딱하다가는 사형까지 당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뉴턴은 자신이 공들여 쓴 '삼위일체 반박 논문'의 출판을 생이 끝날 때까지 주저하였다.[48]

결국 그가 죽은 후에 방대한 종교 문헌 중 4가지만 사후에 출판되었고, 나머지 원고는 20세기 들어 경매를 통해 비로소 세상으로 나오게 됐다.[49] 경매 이후 뉴턴의 신학과 종교, 연금술에 관한 원고는 전 세계에 분산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측정과 연구가 어려운 상황이다.

뉴턴이 남긴 기록을 단어 수로 본다면 과학과 수학에 관해서는 100만 단어, 연금술에 관해서는 55만 단어, 신학과 종교에 관해서는 140만 단어로 추정된다. 양으로만 따지면 과학자가 아니라 신학자라 불러야 할 수준. 뉴턴의 학문적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어서 과학, 신학뿐 아니라 철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50]

5.2. 조폐국 감사, 국장으로서의 뉴턴

1696년 조폐국 감사 자리를 시작으로[51] 1699년부터 조폐국장의 자리를 25년이나 맡았는데, 임기 중에 금속 비율 등을 바꾸어 화폐를 개혁하기도 했다. 특히 동전의 테두리를 깎아 팔아먹거나 동전을 하나 더 만드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52] 동전에 테두리와 톱니를 만들어 넣은 것은 이 사람의 업적.

뉴턴이 조폐국장을 맡은 일화 또한 흥미롭다. 원래 뉴턴과 친분이 있던 재무대신 찰스 몬태규가 월급 많이 주는 대신 할 일 별로 없는 명목상의 자리로 조폐국 감사 자리를 하나 줬는데, 그가 조폐국 감사 자리에 엄청난 열의를 보이게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예 거처를 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옮기고는 자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조폐국 업무에 몰두했다고 한다. 당시 유명했던 화폐 위조범 윌리엄 챌로너를 잡기 위해 정보원을 고용하고, 이러한 정보원과 만나기 위해 변장을 하고 술집에서 접선을 하기도 했다고. 또한 조폐국장이 되고 싶어 이런저런 정치적 뒷공작도 했다고 한다. 결국 전임 조폐국장이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자 후임 조폐국장에 임명되었다.

다만 조폐국장으로서의 업적은 후세에 긍정적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당시 영국은 금과 은을 모두 본위금속으로 사용하는 이중본위제였다. 이 경우 금과 은의 법정 교환비가 실제 시장에서의 교환비와 다르면, 실제 가치보다 고평가된 금속만이 유통되게 된다. 당시 영국은 실제 시세보다 법적으로 을 고평가하고 있었다. 결국 금화가 은화를 구축하여 이후 영국의 화폐 제도가 한참 동안 꼬여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당연히 뉴턴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환비율 조정을 시도했지만, 이는 금화를 소유하고 있던 자산가들의 자산 가치를 줄여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반발을 사 실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뉴턴은 위조화폐 방지 업무에만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에서는 금화만이 유통되게 되었고, 법적으로 저평가된 은화는 외국에서 금화로 바꿔오게 된다. 문제는 금이 그 가치가 너무 컸기 때문에 소액화폐 수요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폐 활성화로 해결하기 전까지는 영국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다만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힘든 것이, 역설적으로 지폐 도입을 앞당기는 효과를 가져왔고 지폐를 사용하면서 신용화폐로의 발전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뉴턴 시기에 금을 고평가하여 사실상 금은 이중본위제를 포기하고 금본위제를 채택하였는데, 이중본위제 자체가 유지/관리하기 너무 어려운 체제이다 보니 단일 본위제를 채택한 것이 결국 금융업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게 된다. 또한 은본위제를 채택하여 국제 시세보다 은을 고평가하고 있던 중국과의 국제무역이 촉진되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어차피 영국 국내에서는 은이 저평가되는데, 중국에서는 오히려 국제 시세보다 은이 고평가되다 보니, 중국과의 무역이 수지타산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편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중국이 엄청난 규모의 무역을 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시대가 지나 영국이 세계 최강국이 될 무렵이 되면 영국 중심의 금본위제가 세계 금융시장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된다.

뉴턴의 조폐국 감사와 국장 시절을 다룬 책인 <뉴턴과 화폐위조범: 천재 과학자, 세기의 대범죄를 뒤쫓다(Newton and the Counterfeiter: The Unknown Detective Career of the World's Greatest Scientist)>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6. 흑역사

잘 알려지지 않은 중대한 흑역사가 있는데, 바로 숫자 조작이다. 인디애나 대학 교수이자 과학협회장을 역임한 웨스트폴이 <뉴턴과 그의 조작요소들>에서 이 부분을 밝혔다.

글에 따르면, 뉴턴은 자신이 주장한 이론에 맞지 않는 관찰값이 나오면 원하는 관찰값이 나올 때까지 변수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뉴턴의 만유인력과 관련된 이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변수 간의 상관관계를 자신의 이론에 맞춰 주작했다는 것. 문제는 웨스트폴이 밝혀낸 것은 뉴턴의 글이 쓰이고 300년이 지나서이고,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가지고 뉴턴이 비도덕적이었다는 비난을 하기는 어렵다. 확률과 오차를 통해 실험 결과를 분석하는 실험 방법이 등장한 것은 한참 후이다. 애초에 확률과 오차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미적분이 필요한데, 미적분 자체가 뉴턴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니. 거기다 이러한 실험은 엄격한 변인 통제와 분석이 필요한데, 변인 통제를 하기 위해서는 이 실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를 최대한 고려하여 실험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런데 '실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요소'를 가장 처음으로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 뉴턴이다. 그러니 실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요인에 대해 아예 모르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실험은 태생적으로 부정확하다. 이 때문에 뉴턴은 분명히 맞는 것 같은데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맞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봤던 것이다. 변인 통제와 실험 방법론 등 실험의 기본 개념이 막 등장하던 시기였고, 실험 환경을 갖춘다는 인식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뉴턴은 역사학 관련 책도 집필한 적이 있었는데,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을 연구한 적이 있다.

시(詩)를 "일종의 천재적인 궤변"(a kind of ingenious nonsense)라고 했다.

6.1. 남해거품사건

"내가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할 수가 없다."
이익실현 후에도 남해회사의 주가가 더 오르는 것을 보고, 전 재산을 주식 투자에 다시 꼴아박기 직전에 남긴 말
역사상 최초로 발생한 버블경제인 남해거품사건에서 합계 40~50억에 달하는 주식을 투자했다가 몽땅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금액은 뉴턴 보유 자산의 80~90%라고 한다.

초반엔 막 오르고 있는 사우스 시 주식을 매입하고 더 오르자 처분해, 주식 투자에 적절히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서 존버하고 있던 주변인들이 쾌재를 부르자,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 불안하고 배가 아파서 다시 주식에 도전한다. 하필 그가 다시 주식 투자를 시작한 시기는 주가가 피크였던 시점이었고, 이후 거품이 꺼지며 주가가 폭락하여 거진 전 재산을 날려먹었다.

놀라운 것은, 주가가 확실히 떨어지고 있음에도 손절매를 하긴 커녕 오히려 돈이란 돈은 대출을 동원해 다 끌어모아, 떨어지고 있는 주식에 물타기를 했다는 점이다. 메피스토에게 현혹 당한 파우스트나 다름없다.

역사상 다시 없을 것 같은, 하늘이 내려주셨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천재가, 주변인들에 대한 질투로 다시 주식에 손을 대고, 주식이 떡락 중일 때 거의 전 재산을 주식에 넣고 버티다가 템스강 정모 각을 봤다는 것은 기이한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또, 인류 최고의 지성으로 칭송받는 뉴턴도 주식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7. 명언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53]
난 겨우 꼬맹이에 지나지 않고, 내가 한 업적이라는 건 그 꼬마가 바다에서 주운 조개껍질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네. 바다에는 더 많고 더 엄청난 업적이라는 게 많으니 자네들도 그 꼬마의 조개껍질을 덮는 엄청난 발견을 할지 누구도 모르는 일 아닌가?
- 말년에 제자들이 "선생님이 한 업적이 많습니다."라고 말하자 피식 웃으면서 한 말.
진리를 찾아 다니는 꼬맹이였지만, 내가 찾은 건 고작해야 바다에서 조개껍질 한 줌을 주웠을 뿐, 결코 진리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진리를 찾아 바다에서 더 크고 더 많은 무엇을 줍거나 발견할지 모른다. 그것이 뭔지 나도 모르지만 이 바다에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넘치고 많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 다른 버전으로 이렇게 유언을 책자에 쓴 경우도 있다.

8. 후세 인물들의 평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감싸여 있었도다. 주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매 모든 것이 밝아졌도다.
- 알렉산더 포프, 아이작 뉴턴의 묘비명으로 쓴 글. [54]
뉴턴은 광학에 종사하는 동안 거의 전적으로 포도주을 먹고 살았다.
- 현대 생리학의 창시자인 Haller의 증언. 또한 볼테르는 뉴턴의 동물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
뉴턴은 이성의 시대를 연 최초 사람이라기보다는 최후의 마법사, 마지막 바빌로니아인이자 수메르인, 약 1만 년 전에 인류의 지적 유산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던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가시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바라보았던 마지막 위대한 정신.
- 존 메이너드 케인스[55]
“그(뉴턴)는 인류 지성사의 전환점이었다. 뉴턴 이전에는 경험 세계의 심오한 특성들을 표현해줄 수 있는 물리적 인과율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서양식의 사유와 연구, 실험방법을 결정해준 사람은 뉴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으며 오직 뉴턴이 그 길을 제시했다. 그는 핵심이 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그 시대에 이용 가능했던 실험 데이터를 독창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세세한 증명방법에 대해서도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뉴턴의 생애는 과학과 더불어 신학과 연금술이 평생 동안 함께 얽혀 있었다. 오히려 분량으로만 따지면 신학 관련 저술이 더 많다. 오늘날 알려진 여러 자료들을 취합해보면 신학적 연구를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천문학에 손을 댔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56] 천문학을 위해서 물리학 연구를 했고, 물리학을 위해 수학을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진지하게 본업이 뭔지 따지면 오히려 종교와 신학 쪽이 더 맞는 것. 이것은 케인즈가 거시경제학 이론을 만들다 여름에 심심해서 뉴턴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알려지고, 유명해진 내용이다.

9. 대중문화에서의 뉴턴

대항해시대 5에서는 라몬의 해도에 감춰진 비밀을 찾기 위해 항해하는 주인공 일행이 갈릴레이의 추천을 받아 찾아갔는데, 뉴턴은 해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면서 쫓아냈지만 나중에 해도의 비밀을 통해 지도를 바꿔 플리머스에서 단숨에 해로로 런던을 오는 현상을 보여주면서 주인공 일행이 말하는 해도의 비밀에 대해 믿게 된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나침반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있던 것인데도 새 것처럼 있다고 했으며, 연구에 흥미가 생겼다면서 연구를 위해 나침반을 양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주인공의 아버지인 라몬의 유품이라 건네받지는 못했다. 자신이 연금술을 연구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 나침반은 현자의 돌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고 그 나침반은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빼앗으려 할 수 있다면서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이후에도 주인공 일행으로부터 해도와 관련된 항해에 대해 보고를 받기도 하며, 원래 세계에는 당시의 기술 수준을 뛰어넘는 유물도 존재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이집트에 가는 것을 권하면서 힘을 쌓고 자신을 연마하라면서 자신도 조사하기로 하며, 주인공 일행에게 편지를 보내 런던으로 오도록 해서 편지를 전해준다. 주인공 일행이 오자 나일강 북부1의 지도를 주면서 피라미드를 조사하는 것을 의뢰하기도 하며, 주인공 일행이 피라미드에 가져온 진주를 가져오면 그런 것은 역사학에 능통한 사람에게 조사하라고 한다.

주인공 일행이 떠나자 드레이크에게 무언가를 꾸미고 있냐고 하면서 그에게 경고를 하는 것을 통해 단순히 연구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드러낸다. 주인공 일행이 아프리카 남단을 항해하고 유럽으로 돌아오면서 뉴턴이 의뢰를 하는데, 아프리카 남단 사막 근처에 있는 불모 지대에서 꽃밭이 펼쳐졌다가 어느 사이에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며, 현자의 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인공 일행에게 조사하도록 시킨다. 주인공 일행이 전설의 섬 오르가나에 대한 것을 조사하다가 수수께끼의 해적 함대와 전투를 벌여 물리쳤는데, 오스만이 아테네 근해를 봉쇄하는 것을 주인공 일행에게 물리쳐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드레이크에게 요청받으며, 뉴턴은 이를 수락하면서도 항상 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다.

주인공 일행이 카리브 해에서 라몬에 대한 조사를 하는 사이에 쥬피톨에게 주인공 일행을 몰래 도와주라는 의뢰를 했다는 것,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 본래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다가 이를 주인공 일행이 발굴한 대서양 중부의 해룡의 동굴 앞 거점에 있는 헤라클레스 신전의 동상에서 잃어버렸다고 한다. 현자의 돌에 대해 세상의 이치를 방해하는 물건으로 자신이 가진 것 이외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주인공 일행이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이 돌의 행방을 모두 공개했다가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봉인해야 한다면서 연구가 진행되면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면서 자신이 맡고 있겠다고 한다.

주인공 일행이 황금 양털을 찾기 위한 모험을 한 것을 엠마로부터 듣고서는 주인공 일행에게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의뢰한다.

마젤란이 차원의 틈에 갇혀지내다가 자신의 세계로 귀환하는 영웅의 귀환 퀘스트에서 데비 존스가 생각보다도 자제심이 대단하다고 평가한다. 주인공의 부관 니나가 무의식적으로 현자의 돌의 힘을 과다사용한 반대급부로 존재가 소멸하고 남은 잔재의식이 차원의 틈에 갇히게 되는데, 데비 존스는 '그 뉴턴이라는 놈은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 이런 위험성을 눈치채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자제심이 대단한 놈이다' 라고 말했다. 다만, 프렌시스 드레이크가 주인공의 멱살을 잡고 니나가 소멸한 일을 추궁할 때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데비 존스가 주인공이 일종의 닻 같은 존재라서 비정상적으로 주인공세계에 위인들이 동시대에 많이 존재한다고 언급했던 것에 대해 논리적인 분석을 해서 롯코 알렘켈이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해주세요'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드레이크, 메르카토르, 롯코 등이 니나의 소멸에 대해서 감정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 사람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해서 뼛속까지 연구자라는 느낌을 준다.

다빈치 코드》의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사과도 같이 등장.

드라마 《닥터후》에서도 언급이 된다. 거기서 4대 닥터가 그에게 중력을 발견하도록 나무 위로 올라가 사과를 떨어뜨렸는데, 뉴턴은 그걸 보더니 닥터 보고 나무에서 꺼지라고 했고, 결국 같이 저녁 먹으면서 말로 설명해 줬다고 한다.

록맨 X 시리즈 중 하나인 록맨 X6에 등장하는 과학자 아이조크의 모티브가 아이작 뉴턴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불타는 성전에 등장하는 나그란드 지역에서는 공중에 떠 있는 섬들 중 한 곳에 나무에 기댄 상태로 죽어있는 해골과 사과 나무, 근처에 떨어진 사과가 있다. 중력을 무시하고 공중에 뜬 섬이나 사과 나무 등으로 미루어 봐서는 아이작 뉴턴에 관한 짓궂은 이스터 에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의 최종보스인 도른커크의 본명이 아이작이며 지구에 있을 때의 직업은 과학자 겸 철학자, 만유인력의 법칙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봐서는 아마 이 인물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이작 뉴턴 본인이라거나.

타임보칸 시리즈에서도 나왔다. 도론죠 일행과 아웅다웅하다가 사과나무를 걷어차는 바람에 우루루 떨어진 사과에 파묻히면서 진리를 깨달았다.

제임스 대시너의 SF소설 메이즈 러너의 등장인물 뉴트의 이름은 뉴턴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이름의 유래를 언급했다.

천재소년 지미 뉴트론의 주인공 지미 뉴트론도 뉴턴을 오마주한 캐릭터다. 키가 작다는 것하고, 뉴트론이라는 성도 뉴턴과 비슷한데다 지미 뉴트론의 미들네임(middle name)도 아이작(Issac)이다.

NELL의 정규 6집 앨범의 제목이 Newton's Apple이다.

천문학자 이강환 박사의 뉴튼과 뉴튼역학 오디오강의 PLAY

가면라이더 고스트의 주인공 라이더 고스트가 사용하는 고스트 아이콘 중 하나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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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코믹스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이어온 지구를 지키는 과학자들이 모인 비밀 조직의 수장이자, 에인션트 원의 부재 시에 소서러 슈프림이었으며, 하이드라 멤버인 괴상한 인물이다. 그 외에 스승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라이벌인 로버트 훅, 라이프니츠, 블레즈 파스칼, 존 로크 등을 본인이 직접 살해하고, 노스트라다무스에게 죽지 않는 약을 주사해서 고문까지 할 뿐만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전쟁까지도 벌였다.[57]

2017년에는 뉴턴과 사과나무(ニュートンと林檎の樹)라는 야겜의 히로인으로도 등장했다. 이 작품의 뉴턴은 금발 로리 미소녀이며 여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라 신분을 성인 남성으로 속이고 아이작 뉴턴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다.


[1] President of Royal Society의 약자로 왕립학회 회장임을 뜻한다.[2]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12월 25일을 역학절이라고도 부르자는 농담도 있다.[3] 자연철학은 그 당시 과학의 다른 이름이며, 뉴턴 사후 1세기가 지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자연과학이 확립된다.[4] 밑에 자세히 기술되어있지만, 뉴턴을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뉴턴은 삼위일체를 비롯한 핵심 기독교 교리들을 부정했으며, 성공회 측의 경고에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뉴턴이 신앙적인 문제로 교회와 갈등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고, 당시 성공회가 국교회로서 뉴턴과 같은 국가적인 위인을 안고 가야 하니까 적당히 경고로 넘어간 것이지, 가톨릭이나 장로교회였으면 바로 파문을 당했을 사안이다. 일단, 공식적으로 성공회 교인이었던 것은 맞다.[5] 1705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knight)에 서훈되었는데, 이는 과학적 업적으로 과학자가 작위를 받은 첫 번째 사례였다.[6] 역사상 두번째 루카스 석좌교수다. 스티븐 호킹, 마이클 그린 등도 거쳐간, 영국 물리학자들에겐 가장 영예로운 직위다.[7] "I do not know what I may appear to the world, but to myself I seem to have been only like a boy playing on the sea-shore, and diverting myself in now and then finding a smoother pebble or a prettier shell than ordinary, whilst the great ocean of truth lay all undiscovered before me."#[8] 초대 석좌교수는 아이작 배로. 직위에 있었던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은 스티븐 호킹.[9] 물론 지구접근천체 같은 경우는 반드시 상대성이론을 사용해야 한다. 약간의 오차로 인류가 멸망하는 일이 없어야 하므로.[10] 이는 아인슈타인이 죽기 직전까지 일생을 다 바쳐 연구했음에도 이루어내지 못했다.[11] 물론 뉴턴이 왕립학회의 회장을 역임한 선배 과학자라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12] 정확히는 0.98N[13] 핼리 혜성으로 유명한 그 핼리가 맞다.[14] 서기로는 같은 해로 기록되었지만, 당시 영국은 그레고리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즉, 그레고리력을 적용하면 해를 넘기게 된다. 그래도 바로 그 다음 해에 또 하나의 위대한 과학자가 뒤를 이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고, 가끔 혹자는 갈릴레이 전생설을 주장하기도.[15] 다만 2000년대 이후의 뉴턴 연구에서는 그를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의 정신과 의사가 당대로 타임슬립해서 뉴턴을 진단하지 않는 이상은 모를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16] 현대 날짜 기준으론 1643년 1월 4일 출생, 1727년 3월 31일 사망했다.[17] 사원 내부의 기념물에 새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18] 뉴턴 이전에는 이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해 "케플러의 3현상"이라고 불렀다. 법칙으로 불리게 된 것은 뉴턴 이후.[19] 그러나 일견 작아 보이는 이 업적이 인류 지성사를 새로 쓰게 만든 것이다. 서양 전통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서 천계는 지상계와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케플러 등은 이러한 생각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의구심만 던져놓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한방에 정리한 것이 뉴턴의 역학이다. 캐플러의 법칙(천상계의 원리)과 갈릴레이의 역학(지상계의 원리)이 완벽히 동일한 수식을 통해 작동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천계와 지계의 원리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라고 증명해낸 것이다! 장장 2천 년 가까이 인류를 지배해오던 우주관을, 뉴턴은 수학이라는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반박한 셈이다. 이후의 모든 과학자는 "수학으로 과학을 증명"함으로써 뉴턴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수학적 계량을 도입해 연금술을 현대 화학으로 발전시킨 앙투안 라부아지에 역시 뉴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20] 이 말을 한 건 누군지 모른다. 다만 일설에는 볼테르가 "사과라도 떨어진 것을 보고 쓴 거 아닐까?" 하고 농담조로 한 말이 알려졌다고 한다. 그래서 볼테르는 세월이 지나서 이 말이 유명해진 것을 보고 "나 죽으면 뉴턴이 저 세상에서 헛소리했다고 화날지도 모르겠군." 하며 황당해했다고 한다.[21] 천문학자인데, 영국의 세인트 폴 대성당을 설계한 건축가로 더 유명하다.[22] 뉴턴의 광학 연구는 훅의 연구를 일부 참고했으나 뉴턴은 이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훅의 업적은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무시했으며(1679년 훅은 두 물체 사이의 인력이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출판하며 이 내용을 참고했지만 훅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이에 훅이 반발한 것이다.), 훅과 뉴턴의 이러한 관계는 당대에도 유명했는데 왕립 협회가 이전할 때 회장이 뉴턴이었는데, 역대 협회장의 초상화 중 로버트 훅의 초상화만 사라지는 일이 있어서 뉴턴이 몰래 치워버렸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23] 사실 핼리가 물어봤을 때 계산한 종이를 찾지 못해 그를 집에 돌려보내고 수 개월에 걸쳐 산뜻한 풀이방법을 찾아 보낸 것이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에 관하여'라는 9쪽짜리 논문이고, 이 논문을 출판한 것이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 즉 프린키피아이다. 토마스 에디슨프린키피아를 읽고 수학을 포기했다[24]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양자역학을 반대하는 반대파 수장이었다. 양자역학 지지파 수장 닐스 보어와 세기의 논쟁을 여러 차례 벌이며 양자역학의 오류를 찾기위해 오랜시간 연구하였고 닐스 보어에게 날카로운 지적을 수차례 던졌지만 닐스 보어가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슬기롭게 반박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양자역학이 더욱 지지를 받고 과학계 표준으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즉, 아인슈타인이 본인이 직접 양자역학을 완성했다기보다는, 양자역학을 부정하기 위한 아인슈타인의 노력이 오히려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양자역학에 논쟁거리를 만들어주며 과학자들 사이에서 핫한 이론으로 급부상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25] 렌즈보다는 반사경을 만드는 것이 훨씬 어렵다. 반사경은 볼록렌즈와 같은 수준의 성능을 얻기 위해 6배는 더 정밀하게 가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결이 이는 연못을 들여다보면 연못에 비친 상은 크게 일그러지지만 연못 바닥은 비교적 잘 보이는 현상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26]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무지개를 만드는 것을 떠올려 보자. 빛이 혼합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바로 이 실험에서였다.[27] 굴절 망원경과는 달리 개방된 경통 구조를 가지므로, 개방된 공간 내 공기의 대류에 의해 상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현상이 있다. 내부가 밀폐, 진공처리된 굴절 망원경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이 불안정하다.[28] 이는 당시 기술의 한계 때문이다. 유리 표면에 반사율이 높은 은이나 알루미늄을을 입혀 만든 현대의 반사경도 두 번 반사되면 빛의 양이 처음의 80~90% 정도로 줄어들어서 상이 약간 어두워지는데 그 당시에는 반사율이 낮은 청동거울로 반사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같은 현상이 더 심하게 나타났다. 때문에 같은 구경의 굴절망원경보다 집광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이 같은 문제는 후대에 은을 이용한 유리거울 반사경이 도입되면서 거의 해소될 수 있었다.[29] 어두운 별을 볼 수 있도록 더욱 많은 빛을 모을 수 있는 망원경을 제작하려면 망원경의 구경이 커져야 한다. 그러나 렌즈는 유리를 연마하여 제작하므로, 대구경의 구면을 가공하는 것은 어렵다. 반면 금속 반사경은 그냥 붙이거나 작은 평면거울을 다닥다닥 붙이는 방법으로 크게 만들 수 있다.[30] 일본어이다.[31] 적분은 고대 이집트까지 올라가는, 미분과는 별개로 전혀 상관없는 학문으로 발달한 것이다. 하지만 미적분학의 기본정리가 발견되면서 미분과 적분이라는 학문이 서로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고 서로 연관성이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이다.[3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e804b8a1a11e442be93fed1d52205a9.png[33] 정확히 말하자면 그레고리가 발견한 식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0045c226e7d06865ca4d0302a629c6.png였는데, z에 1을 넣으면 라이프니츠 급수가 나오기 때문에 의심받을 만했다.[34] 100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35] 헬 헬먼, '과학사 속의 대논쟁', 이충호 역, 가람기획, 2000, p74-75[36] 점 대신 y'으로 prime 기호를 넣은 것은 라그랑주 방식이며, 오일러는 미분이 선형변환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Df(x)으로 썼다. 실제 수학을 할 때는 1변수의 경우 라이프니츠와 라그랑주 방식이 선호되고, 고차원을 다루거나(편미분이 필요하니까) 해석적 분석을 할 때는 오일러 식과 [math(\partial)]를 이용한 라이프니츠-콩도르세 식, [math(nabla)]을 이용한 해밀턴 식을 꽤 섞어 쓰는 편이다. 뉴턴 방식은 수학에서는 보기 힘들고 역학에서 자주 본다.[37] ( f ∘ g )′(x) = ( f( g(x) ) )′ = f′ ( g (x) ) g′(x)[38] 라그랑지안 역학. F= 꼴의 운동방정식을 에너지(정확히는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의 차이)에 최소작용원리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구하는데, 이 원리의 표현에 변수를 시간에 대해 미분한 값으로 전체를 미분하는 항이 포함된다.[39] 가발이다. 이 시대 고위층 유럽인들은 전부 가발을 쓰고 다녔다.[40] 사망하기 1년 전의 마지막 초상화이다.[41] 정말로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새아버지가 의붓아들에게 유산으로 대학 등록금을 내라고 막대한 액수의 돈과 토지를 주었지만, 뉴턴 본인은 새아버지를 싫어해서 그 돈을 방구석에 처박아두고 없는 돈 취급해서 수중에 돈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럼 등록금을 어디서 마련했냐면, 부잣집 애들의 뒤치다꺼리로 번 돈으로 사채업을 해서 마련했다고 한다(...). 주 고객은 뉴턴 자신처럼 돈이 없는 학생들이었다고.[42] 기적적으로 눈에는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더러운 바늘로 쑤신 덕분에 감염으로 한동안 앓아누웠다고는 하지만, 눈을 잃지 않은 것 자체가 기적이다.[43] 그 유명한 올리버 크롬웰의 이름에서 따온 것 맞다. 크롬웰이 집권했을 때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는 공화정이었는데, 그가 죽고 찰스 2세가 즉위하면서 왕정이 부활하자, 이를 원통하게 여긴 크롬웰의 원혼이 잉글랜드에 강력한 폭풍을 일으켰다는 미신이 민중들 사이에서 퍼졌다.[44] 뉴턴이 어릴 적인 17세기만 해도 혜성은 불길한 존재였다. 하물며 작은 시골마을인 고향이라면 더더욱.[45] 뉴턴의 새아버지는 사이가 소원하다던 의붓아들을 위해 땅을 상속해주기도 했고, 종교적으로도 뉴턴에게 무지막지한 영향을 끼쳤긴 했다. 뉴턴 본인은 새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아내에 대한 책임감이든 사회적 도덕감에 의해서든.[46] Alan Sokal, 'Fashionable Nonsense: Postmodern Intellectuals' Abuse of Science', picador, 1999.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그 노트를 연구(!)하고 뉴턴을 중세의 마지막 마법사라고 한 바 있다.[47] 제임스 2세 통치 시기 꽤나 살벌하던 제임스 2세에게 직언을 자주 해 꽤나 인기가 높았다.[48] 하지만 영국 국교회 측도 뉴턴의 신학 이론이 자신들의 견해와 불일치한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다만 이전에 존경받던 대과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교황청 측의 총애를 받다가 단 한 번 가톨릭 측의 견해와 반대되는 저작을 썼다는 이유로 한 번에 매장된 일이 워낙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자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막고 자국이 낳은 걸출한 천재를 자기들 스스로 매장해버리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으려고 그에게 경고만 주고 눈감아줬을 뿐이다.[49] 이때 산 사람이 경제학자 케인즈다.[50] 이와 비슷한 사례로 경제학자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도덕 철학자였던 아담 스미스가 있다.[51] 이 직위는 정부에서 발행한 통화를 감독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위조화폐를 통해 경제를 혼란케 하는 위조범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형사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감사 직위를 얻은 까닭에 뉴턴의 경력에 탐정이 추가되었고, 당대 최강의 화폐 위조범이었던 윌리엄 찰로너(William Chaloner, 1650~1699.3.22)라는 사람은 이 당시 뉴턴과 치열한 추격전과 법정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였던지라(...) 결과는 뉴턴의 압승으로 끝났으며 찰로너는 감옥에 갇힌 뒤 1699년 3월 22일에 교수형을 당했다. 여기에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52] 이른바 클리핑(clipping)이라고 한다. 여기서 클립은 종이 클립이 아니라 손톱깎이(nail clipper)의 그 클립이다. 동전의 테두리를 조금씩 깎아 이득을 취하는 방법으로, 실제 옛날에는 동전을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으로 만들었고, 이런 금속들은 상대적으로 무른 종류였기에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이 외에도 동전을 자루에 넣고 흔들어 떨어져 나오는 금속 부스러기들만 긁어모으는 스웨팅(sweating. 땀을 흘린다는 뜻이 있다.) 등의 수법이 성행했다. 관련 내용은 이곳도 참고하는 것이 좋다.[53] 뉴턴 자신 이전의 많은 과학자들을 묶어 추상적으로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보통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말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사실 이 '거인의 어깨' 개념은 중세 때부터 이미 흔한 개념이었고, 키가 작았던 로버트 훅을 의식한 말이라고도 한다. 워낙 폭풍 간지가 넘치는 말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인용해서 쓰는 말이 되었다.[54]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55] 경제학자로서 가장 유명하지만 아이작 뉴턴 재조명의 선두 주자이기도 하다. 그는 경매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미출간 저작을 구매하여 읽을 정도로 뉴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를 검토한 끝에 케인스가 내린 평가가 바로 이것.[56]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 이전에는 별자리를 이용하는 '분석점성술'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57] 마블 코믹스 내에 나오는 위인들은 대체로 스펙이 뛰어난 위인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브루드의 침공을 막아낸 임호텝, 크리 센티널을 거대로봇으로 조종해 부순 아르키메데스, 셀레스티얼을 말로 처리한 장형, 소서러 슈프림이었던 장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