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11:11:52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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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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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black><colcolor=#fff>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ames Clerk Maxwell
FRSE FRS FKC
파일:16459386878_321d94b4d2_o.jpg
본명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ames Clerk Maxwell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831년 6월 13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에든버러
사망 1879년 11월 5일 (향년 48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케임브리지
직업 학자, 교수
분야 물리학, 수학
서명 파일:James_Clerk_Maxwell_sig.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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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white> 학력 <colbgcolor=#fff,#191919>에든버러 대학교 (철학 / 중퇴)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수학 / 학사)
경력 메리셜 컬리지[1] 교수
킹스 칼리지 런던 교수 • 학장[2]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수상 에든버러 왕립학회 회원
왕립학회 회원
스미스 상 (1854년)
애덤스 상 (1857년)
럼포드 메달 (1860년)
키스 상 (1869년, 1871년)
종교 개신교(장로회)
배우자 캐서린 클러크 맥스웰 (1858년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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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물리학자, 수학자.

현대 인류 문명의 밑바탕이 된 전기문명의 근간인 전자기학을 정립한 위대한 물리학자로 평가받는다. 전자기학 뿐만 아니라 맥스웰-볼츠만 분포같이 열역학, 통계역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어머니가 40대에 얻은 늦둥이 외동아들이었던[3] 맥스웰은 어린 시절부터 타고난 호기심으로 주변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했다. 움직이고 빛나고 소리가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질문했다고 한다.

맥스웰의 어머니는 맥스웰이 여덟 살때 암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어머니가 사망한 그날 어린 맥스웰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 정말 기뻐.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학창시절에는 언제나 친절하고 쾌활하였으며, 종종 비교되곤 하는 뉴턴 등 괴팍한 물리학자들과 달리 매우 친절하고 예의바른 신사였다. 동시에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는데[4], 한 선교단체에서 '뛰어난 물리학자인 그가 신앙을 간증한다면 굉장히 설득력 있을 거다'하고 간증을 부탁했으나, 맥스웰은 '신앙은 각자의 내면 안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며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비상한 두뇌를 드러냈는데, 불과 14살에 "타원 곡선과 다초점 곡선에 대한 설명"라는 제목의 첫 논문을 작성했다. 데카르트가 17세기에 이러한 다초점 타원의 특성을 연구했기 때문에 완전히 독창적인 논문은 아니었으나, 해당 구상을 단순화했다는 학술적 성과를 거뒀다. 불과 14살에 말이다. 이 논문은 당시 맥스웰이 너무 어렸기에 에든버러 대학 자연철학과의 James Forbes 교수가 에든버러 왕립 학회에 대신 발표했다.

1847년, 열여섯 살에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했고, 18세에 논문 두 개를 더 썼다.[5] 이 때에도 직접 연단에서 발표하기는 너무 어리다고 취급되어서 튜터 Kelland가 논문을 왕립 학회에 대신 전달하였다. 이후 1850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으로 이적했고, 1854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를 수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이 때 일화로, 케임브리지 졸업시험(mathematical tripos)을 치르고 하인에게 결과를 알아보라고 했을 때, 맥스웰은 자신이 당연히 1등을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인이 돌아오자 "누가 2등했어?"라고 물었는데, 하인은 "주인님이오"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맥스웰이 아닙니다. 이것은 맥스웰과 오랜 시간 교류했던 윌리엄 톰슨(켈빈 경)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수학 1등(Senior Wrangler)은 뛰어난 수학 지도로 유명한 수학자 에드워드 루스(Edward J. Routh)가 차지했다.

졸업 후 몇 년간 트리니티에 더 남아서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 때 유색 팽이를 통한 실험으로 "Experiments on colour, as perceived by the eye, with remarks on colour-blindness"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백색광이 적색, 녹색, 청색광의 혼합으로 생성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논문부터 맥스웰이 직접 왕립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1856년 11월, 재능을 인정받아 불과 25세의 나이로 Marischal College의 교수직을 맡아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당시 마리셸에서 맥스웰 다음으로 젊은 교수가 40세였다고 한다. 맥스웰의 아버지는 이 때 맥스웰의 교수 임용 지원을 위한 참고 문헌을 정리해주는 등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나, 합격 결과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후 맥스웰은 마리셸 칼리지의 교장인 다니엘 듀어 목사와 친분을 쌓았고, 그의 딸이자 7년 선배인 캐서린 메리 듀어와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1860년, 마리셸 칼리지가 '킹스 칼리지 애버딘'과 합병하여 애버딘 대학교(University of Aberdeen)을 형성하는데, 이 때 맥스웰은 명성이 상당했음에도 자연 철학과 교수 자리가 부족해 해임당했다. 이 때 천연두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다 회복했고, 런던으로 이사해 킹스 칼리지 런던[6]에서 자연철학 학과장을 맡게 된다.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그는 경력의 최전성기를 보낸다. 전기력자기력의 특성을 조사해 전자기 유도에 대해 연구하여 전자기학의 토대를 설립한 것이 바로 이 때이다. 이외에도 빛의 편광과 정전기, 변위 전류 등 다방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1865년에는 5년간 맡은 킹스 칼리지 런던의 학장직을 사임하고 아내와 함께 글렌레어로 돌아가 몇 편의 논문을 더 저술했다. 이 때 그는 처음으로 차원 분석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였으며, 논문 "On governors"로 증기 기관의 속도를 제어하는 장치인 '거버너'의 동작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며 제어공학의 이론적 기반을 세웠다.

1871년에는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최초의 캐번디시 물리학 교수(일종의 선임교수직)로 임명되었다. 이후 헨리 캐번디시의 연구를 정리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은둔형 외톨이 기질이 있어 인간관계도 협소하고 연구 결과를 발표도 하지 않고 서랍에 처박아두던[7] 캐번디시의 연구 성과가 사후에라도 조명된 것은 맥스웰이 그의 성과를 정리한 덕이 크다.

1879년 4월부터 위암 증세가 본격적으로 드러나 음식을 삼키는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같은 해 11월에 안타깝게도 48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친구였던 의사에게 '그래, 이제 며칠이나 남았나?'라고 물어보았으며 사망 당일에는 조용히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맥스웰의 어머니도 위암으로 사망했는데 이를 볼 때 가족력일 가능성이 있다.
  • 여타 일화들
    당시 다수의 과학자들이 괴팍한 성격으로 많은 괴담을 만들었던 것에 반해, 맥스웰은 선하고 쾌활한 인품으로 많은 미담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교육에 대한 열정이 커서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을 위해 야간 학교 강사를 무보수로, 시간을 쪼개가며 꾸준히 해 주었다. 다만 그의 교육 방식에 대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열정적이긴 한데, 이해는 안 된다.'고 평하였다. 어떤 분야의 천재라 해도 정작 그 지식을 남에게 가르치는 데에는 능숙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맥스웰도 그런 타입이었던 듯하다.
유산으로 상당한 면적의 땅을 물려받아서 시골 마을의 지주기도 했는데, 매년 일정 기간은 마을로 돌아가 지역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주민들을 위한 학교와 교회를 자비를 들여 건설하는 등의 행보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도 평판이 좋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연상의 부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 병약한 부인 옆에서 매일 저녁 책을 읽어주는 것이 일과였다. 이 사랑과 일과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맥스웰의 친구인 Lewis Campbell은 그의 사랑을 두고 '비할 데 없는 헌신(unexampled devotion)'이라 할 정도였다.
흥미롭게도 그가 수학적 재능을 이용해 큰 도움을 주었던 마이클 패러데이 역시 독실한 개신교인이자 훌륭한 인품으로 칭송받았다. 패러데이가 맥스웰보다 무려 40살 연상이었기에 둘은 친하다고 할 수는 없는 관계였으나 서로를 깊이 존경했다고 한다. 전자기학의 시작을 연 두 위인의 소소하지만 훈훈한 일화이다.
맥스웰의 아내 캐서린 클러크 맥스웰(Katherine Clerk Maxwell)은 가정에서의 내조뿐만 아니라 직접 남편의 색각 실험, 가스 점도 실험을 돕는 등 몇몇 연구에 조수로 참여했다. 말년에는 건강이 많이 나빠져서 맥스웰이 직접 간호하는 일이 많았고, 맥스웰 본인이 사망하기 전에도 아내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 맥스웰이 사망한 뒤 캐서린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캐서린은 남편이 죽고 7년 뒤, 1886년 12월에 사망했으며 남편과 같은 곳에 묻혔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식은 없기 때문에 맥스웰의 직계 후손은 없다.

3. 업적

아이작 뉴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현대물리학의 근간이 되는 고전물리학에 제일 많은 기여를 한 사람들로 평가받는다.[8] 그 중 맥스웰은 특히 전자기학에서 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3.1. 전자기학

3.1.1. 전기자기의 개념 통합, 전자기력 정립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것들 중에 하나가 "달라보이는 현상들의 통합"이다. 맥스웰은 패러데이, 암페어 등의 업적을 기반으로 서로 전혀 관계가 없어보였던 전기와 자기를 통합하였다.

과거 전기력자기력은 서로 전혀 다른 힘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외르스테드가 전기자기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서로 다른 두 힘이 무언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뒤, 패러데이가 '전기와 자기를 직접 설명하지 말고 전기장, 자기장과 전기력선, 자기력선으로 설명하자'라는 아이디어와 '전기와 자기는 서로 짝을 이룬다'라는 아이디어를 들고 나왔고, 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자기도 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내었다.

다만 패러데이의 아이디어만으로는 전기와 자기를 완전하게 통합할 수 없었고, 그는 수학을 잘 몰랐기에[9] 수학적으로 아름답게 정리해 낼 수는 없었다. 이때 혜성처럼 맥스웰이 나타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하나 더 추가함과 동시에 기존의 아이디어들과 패러데이의 아이디어들을 수학적으로 깔끔히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 전자기학의 출발점이다. 이런 맥스웰의 재능에 대해 패러데이는 맥스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수학적 재능에 감탄했다고 말했을 정도.

3.1.2. 맥스웰 방정식


맥스웰 방정식은 전자기학에서 전기장과 자기장에 관한 4개의 연립방정식을 의미한다.[10] 그 형태는 다음과 같다.


[math(\displaystyle \begin{aligned}
\oiint_{\partial V} \mathbf{E} \boldsymbol{\cdot} {\rm d}\mathbf{a} &= \frac{Q_{\text{enc} }}{\varepsilon_0} \\
\oiint_{\partial V} \mathbf{B} \boldsymbol{\cdot} {\rm d}\mathbf{a} &= 0 \\
\oint_{\partial S} \mathbf{E} \boldsymbol{\cdot} {\rm d}\mathbf{l} &= - \frac{\rm d}{{\rm d}t} \iint_S \mathbf{B} \boldsymbol{\cdot} {\rm d}\mathbf{a} \\
\oint_{\partial S} \mathbf{B} \boldsymbol{\cdot} {\rm d}\mathbf{l} &= \mu_0 I_{\text{enc}} + \varepsilon_0 \mu_0 \,\frac{\rm d}{{\rm d}t} \iint_S \mathbf{E} \boldsymbol{\cdot} {\rm d}\mathbf{a}
\end{aligned} )]


[math(\displaystyle \begin{aligned}
\boldsymbol{\nabla} \boldsymbol{\cdot} \mathbf{E} &= \frac{\rho}{\varepsilon_0} \\
\boldsymbol{\nabla} \boldsymbol{\cdot} \mathbf{B} &= 0 \\
\boldsymbol{\nabla} \times \mathbf{E} &= -\frac{\partial\mathbf{B}}{\partial t} \\
\boldsymbol{\nabla} \times \mathbf{B} &= \mu_0\mathbf{J} + \varepsilon_0\mu_0 \frac{\partial\mathbf{E}}{\partial t} \\
\end{aligned} )]


위의 네가지 식들은 적분형이며, 아래의 네가지 식들은 미분형이다. 아무래도 일반인이 이해하기엔 어려운 내용들이기 때문에 이 영상을 보는 것이 좋다. 유도 과정이 궁금하다면 여기로.

맥스웰 방정식이 중요한 이유는 이 방정식이 전자기학의 기초 전반을 맡고 있으며, 전기와 자기의 현상을 하나로 통합하여 설명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방정식은 전자기학, 전자기파, 전자기장, 전자기 기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적인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맥스웰 방정식엔 다음과 같은 중요성이 있다.

1. 전기와 자기의 통합: 맥스웰 방정식은 전기장과 자기장 간의 상호 작용을 포함하고 있어, 전기와 자기를 별도로 다루는 대신 통합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전기와 자기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현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2. 전자기파의 존재와 성질 설명: 맥스웰 방정식은 전자기파의 존재와 그 성질을 예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나중에 라디오, 마이크로파,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X선 및 감마선과 같은 전자기파의 이해와 응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3. 전자기장의 특성: 맥스웰 방정식은 전자기장의 발생, 변화 및 전파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이는 전자기장을 통한 에너지 전달 및 전기기기의 동작 원리 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4. 평면파의 속도 예측: 맥스웰 방정식은 자유 공간에서 전자기파의 속도를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은 빛의 속도를 예측하는 데에도 사용되며, 광학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기초를 제공한다.

5. 전자기장과 물질의 상호 작용: 맥스웰 방정식은 전자기장과 물질 사이의 상호 작용을 설명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전기 유전체 및 자기 유도 등과 관련된 다양한 물리학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맥스웰이 초기에 고안한 식은 비교적 덜 다듬어져 관련 식이 20개나 되었는데, 이후 올리버 헤비사이드가 4가지로 간결하게 정리함으로써 현재의 맥스웰 방정식이 완성되었다. 맥스웰은 전자기학을 창시하면서 많은 것들을 이루어 내었다. 문자 그대로 시작이 반이 된 셈. 이외에도 빛이 전자기파의 일종일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는 피츠제럴드와 헤르츠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었다.

한편, 맥스웰 방정식에 포함된 장(Field)이라는 개념은 그 당시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추상적이었다.[11]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에테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비록 에테르 개념 자체는 마이컬슨-몰리 실험으로 부정되지만) 물리학에서 추상적 개념이 도입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3.2. 열역학

열역학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열역학에서 그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만 해도 열역학 퍼텐셜 사이의 관계식인 맥스웰 관계식과 일반적인 입자의 속도 분포에 쓰이는 맥스웰-볼츠만 분포의 2가지가 있다. 특히 후자는 통계역학의 언어로 열역학을 설명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물론 실질적으로 완성한 것은 볼츠만이지만. 한편 1876년에 열역학 제2법칙을 작살내는 가상의 악마를 가정한 사고실험인 맥스웰의 악마를 고안하기도 했다.

3.2.1. 맥스웰 관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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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맥스웰-볼츠만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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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맥스웰의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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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기타

  • 14살 때 핀 2개와 실을 이용해 타원을 작도하는, 당시에는 아주 독창적인 작도 방식에 대한 논문을 냈다. 예전에도 데카르트 등이 같은 모양의 타원을 작도하는 방법을 발표했으나 맥스웰의 방식이 더 간편했다.
  • 파일:attachment/제임스 클러크 맥스웰/first_colour_photograph.jpg
    1849년 컬러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지만 영구 보존에는 실패한 프랑스의 알렉상드로 에드몽 베퀴에렐 이후 10년이 지난 뒤 제임스 C. 맥스웰은 컬러사진에 대한 이론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861년에 합성 컬러사진을 선보였다. 간단하게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필터를 앞에 끼고 사진을 찍은 것.[12]
  • 이 외에도 회전혼합을 발견하는 등 색채학에도 기여했고, 헨리 캐번디시의 유고를 정리하는 작업을 맡기도 했다.

4. 여담



[1]애버딘 대학교[2] 직위명: The Chair of Natural Philosophy.
King's People - James Clerk Maxwell 참고.
[3] 엘리자베스라는 누나가 먼저 태어났으나, 유아기에 사망했다.[4] 맥스웰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 즉 기독교 중에서도 신교며, 북유럽의 대세 루터교와는 다른 계파다.[5] "탄성 고체의 평형에 대하여", ''롤링 커브 이론에 대하여"[6] 마리셸과 합병한 위의 킹스 칼리지는 애버딘에 있는 대학으로, 킹스 칼리지 런던과는 이름만 같은 다른 대학이다.[7] 심지어 쿨롱 법칙은 캐번디시가 샤를 드 쿨롱보다 10년이나 먼저 발견했으나, 연구 결과물을 서랍에 그냥 처박아둔 탓에 다른 과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영광을 가져갔다. 이외에도 옴의 법칙, 물 분자의 구성, 그리고 각종 원소들을 발견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발표하지 않고 처박아 두었기에 대부분 다른 과학자의 업적으로 기록되었다.[8] 각각 고전역학, 상대성 이론, 그리고 전자기학.[9] 마이클 패러데이는 제도권의 과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평민인 제본소 알바 출신이었다.[10] 연립 형태로 있는 경우도 있고, 따로따로 있는 경우도 있다.[11] 전기장과 자기장이라는 게, 그냥 3차원 공간에 펼쳐져 있는 전기적, 자기적 함수라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반면 뉴턴 역학의 개념들은 질량, 힘 등처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다수였다.[12]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컬러사진 - 사진으로 보는 총천연색 세상 (발명상식사전, 2012. 1. 10., 박문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