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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볼츠만

루트비히 볼츠만
Ludwig Boltzmann
파일:Boltzmann2.jpg
본명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
Ludwig Eduard Boltzmann
출생 1844년 2월 20일
오스트리아 제국
사망 1906년 9월 5일 (향년 62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트리에스테 두이노
국적
[[오스트리아 제국|]][[틀:국기|]][[틀:국기|]]
직업 물리학자
모교 빈 대학교
수상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1899)
서명 파일:루트비히 볼츠만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주요 업적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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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ath(S=k \log W)]
볼츠만의 엔트로피 공식. 빈에 위치한 무덤에도 이 공식이 새겨져있다.

오스트리아 제국 출신의 물리학자로, 고전 통계역학을 정립한 인물이다. 엔트로피통계역학적 개념으로 정립하고, 맥스웰-볼츠만 분포를 도입했다.

2. 생애

빈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1866년 졸업 후, 2년간 ‘슈테판-볼츠만 법칙'의 실험적 발견자인 요제프 슈테판의 지도하에 수학하였다. 이때 슈테판은 볼츠만에게 맥스웰의 기체 운동 속도에 관한 영어 논문을 공부하도록 권했고, 볼츠만은 그에 관한 연구를 1868년 빈 과학원 회보에 발표했다.[1] 이후 맥스웰-볼츠만 분포곡선 등의 기체분자운동론을 제안하였다.

1869년 그라츠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교수를 시작으로, 빈 대학교 수학교수, 뮌헨 대학교 이론물리학부 학장을 지냈고 1894년 빈 대학교로 돌아와 슈테판의 후임으로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와 함께 연구를 진행했던 사람으로는 스펙트럼을 연구한 로베르트 분젠, ‘키르히호프의 법칙’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키르히호프, 헬름홀츠 방정식 및 정리를 제시한 헤르만 폰 헬름홀츠 등이 있었다. 그가 가르쳤던 제자로는 아레니우스[2], 발터 네른스트[3], 파울 에렌페스트[4], 리제 마이트너[5] 등 쟁쟁한 물리학자들이 있다.[6]

다만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상당히 불행하다. 볼츠만이 주장한 기체분자운동론은 원자론과 분자론을 기본으로 만들어졌으나, 당대의 철학자들, 특히 과학철학자 에른스트 마흐[7]는 그 이론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의견이 계속 묵살당하자 볼츠만은 원자론자와 비원자론자 간의 타협안을 만들려는 시도까지 하였으나 양측 모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특히 비원자론자들은 볼츠만의 업적인 통계역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여 볼츠만은 이때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볼츠만 생전에는 모든 물리적 운동을 원자와 분자 없이 전자기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학계의 주류였으며, 통계역학은 그 자리를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다.[8] 철학에 대한 관심도 이때부터로,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마흐가 빈 대학교의 교수직을 퇴임하자 빈 대학교로 돌아가 자신이 철학자가 되어 통계역학의 정당성을 확립하고자 했다.[9] 그러나 이 시도는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하였고, 그의 우울증은 점점 심각해졌다. 끝내 그는 1906년 여름 휴가지에서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0][11]

3. 주요 업적

볼츠만의 업적은 열적 현상과 고전적 입자의 운동, 혹은 더 나아가 거시적 현상과 미시적 현상을 연결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19세기 말의 물리학계(특히 독일어권)에서는 원자를 단지 이론적으로 유용한 가정일 뿐,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했다(위에서 언급된 마흐를 비롯하여 오스트발트가 대표적이며, 로슈미트, 체르멜로도 각론 부분에서 강력한 주장을 폈다.). 당대 주류의 이론은 맥스웰에 크게 영향을 받아 현상을 전자기적 상호작용으로 설명하고자 했는데, 특히 물질이 공간상에 연속적이라는 철학적 시각이 깔려 있었다. 그러므로 관찰가능한 값은 열역학적인 값으로써, '거시적' 또는 계 전체(조금 더 엄밀히 하면 물성이 존재하는 전체 공간의 열린부분집합)에 할당되는 연속적인 값이었다. 볼츠만은 이러한 거시적(열역학적) 관찰값이 셀 수 있고 불연속적인 미시적 상태, 즉 입자의 상태로 환원될 수 있음을 동역학과 확률이론을 활용하여 주장했다.

볼츠만의 주요 업적으로는 기체운동론의 확립을 들 수 있다. 기존 맥스웰이 속도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대칭성에 대한 주장에서 출발해 폈던 기체의 속력분포를 볼츠만은 분자가 실재한다는 가정을 포함한 몇 가지 조건들[12]을 통해 일반화 하였으며, 이를 확장하며 볼츠만 방정식을 세웠다.[13] 초기의 저작들은 입자의 동역학에 보다 중점을 두고 거시적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볼츠만은 기체운동론을 확률적으로 기술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특히 볼츠만 방정식으로부터 H-정리를 유도한다. H-정리는 기체 분자가 볼츠만 방정식에 따라 계속 충돌하면, 특정 물리량 H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감소한다는 것이다. 이는 열역학 제2 법칙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정확한 증명은 아니다) 시간 비대칭성에 대한 가장 초기의 수학적 기술 중 하나다. 이후 시간의 비대칭성과 관련한 동료 물리학자 및 철학자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과정을 통해 볼츠만의 대표적 업적인 엔트로피로 확장되었다.

빈에 있는 볼츠만의 묘비에는 엔트로피의 공식이 새겨져있다. 이 공식([math(S= k_{\rm B}\ln W)])[14]을 통해 볼츠만은 엔트로피의 절대적인 총량을 나타냈다. [math(W)]는 독일어로 '확률'을 의미하는 Wahrscheinlichkeit의 약어로, 특정한 거시상태에 연관된 모든 미시상태의 수를 말한다. 볼츠만 이전까지는 반응이 일어날 때 엔트로피의 변화량만 잴 수 있었을 뿐, 절대적인 엔트로피의 총량은 잴 수 없었다.

양자역학의 역사를 다룰 때, 종종 볼츠만은 에너지가 불연속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편 첫 현대의 학자로써 언급되기도 한다. 불연속적인 에너지는 H-정리와 관련해 조합론적인 접근법을 취하면서 볼츠만의 논문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플랑크와 직접적으로 '원자화 된'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 오스트발트에 의해 알려져 있다. 일부 과학사학자는 불연속적 에너지와 관련하여 상태 공간을 유한크기의 부분으로 나눠 미시상태의 수를 세는 볼츠만의 접근법 등이 이후 하이젠베르크 등이 양자역학을 구성할 때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4. 여담

볼츠만은 물질이 공간상에 불연속적이라는 주장, 즉 원자론을 믿었다. 물질이 공간상에 연속적이라는 실재론적 주장이 마흐와 오스트발트 등을 비롯, 당대의 주류였기 때문에, 학문적 충돌이 동료들과 빈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시간의 비대칭성에 대한 주장은 당대에나 현대에나 많은 물리학적, 혹은 철학적 논의를 낳고 있다. 그러나 볼츠만은 그가 스스로 기록하거나 주변인에게 전했던 것처럼 학계에서 배척당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많은 기록을 살펴볼 때, 볼츠만은 격렬한 논쟁을 즐겼다고 한다. 그가 묘사한 '학계의 적대적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게, 학문적으로 대립한 학자들 중 몇몇은 볼츠만과 거의 평생에 걸쳐 교류한 동료들(오스트발트, 로슈미트, 체르멜로)[15]로, 이후에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도 많은 경우 볼츠만이 먼저 공격적인 주장을 던지며 '싸움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자인 파울 에렌페스트도 스승과 비슷한 불운한 생을 살았다. 다만 에렌페스트는 말년에 학문적 의욕을 잃어버리면서 우울증을 앓게 되었고, 심지어 막내아들이 다운 증후군 판정을 받으면서 심각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 당시 독일을 지배하던 나치는 독일 내 장애인들을 멸절하겠다는 프로젝트[16]를 조금씩 시행하는 중이었고, 그 마수는 에렌페스트의 아들에게도 미쳤다. 결국 1933년에 병원에 입원 중인 아들을 총으로 쏜 뒤, 자신도 따라 자살하면서 생을 마감한다.[17]

볼츠만을 동경하여 만나고 싶어했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볼츠만이 자살하자, 그 충격으로 빈 대학교 물리학과를 목표로 공부하던 걸 포기하고 베를린 공과대학교를 갔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수를 보고 대학을 가는 성향이 있는지, 훗날 수학원리(Principia)를 읽고 그 저자가 강사로 있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트리니티 컬리지[18]에 찾아갔다가 버트런드 러셀[19]을 만났다.


[1] 열평형과 엔트로피는 무엇인가? Top class : 2020.03.11[2] 산·염기에 대한 연구, 그리고 활성화 에너지[3] 열역학 제3법칙[4] 에렌페스트 정리[5] 초창기 핵분열 연구[6] 다만 아레니우스는 화학에서 더 유명하긴 하다. 활성화에너지도 다루지만...[7] 물체의 속력을 음속과 비교해 나타낸 단위의 그 '마하'다. 돌턴의 원자론을 죽을 때까지 거부했다고.[8]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기적의 해' 1905년에 브라운 운동을 분자론으로 설명하고, 이것이 실험적으로 검증됨으로써 원자/분자론이 과학계에서 정설이 된다.[9] 보다 정확하게는, 볼츠만은 1893년 뮌헨에서 빈의 교수직으로 옮긴다. 이는 볼츠만의 지도교수인 요제프 스테판의 은퇴 후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다. 마흐는 빈에서 1895년부터 과학사 및 과학철학 교수직을 맡기 시작했다. 물론 볼츠만과 마흐가 철학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었던 것은 유명하며, 특히 마흐가 1897년 볼츠만의 강연 이후 던진 공격적인 발언(난 원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데!)은 잘 알려져 있다. 이후 볼츠만은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오스트발트의 초청으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머무르다 마흐의 은퇴 후 빈으로 돌아온다.[10] 자살하는 순간 부인과 딸은 별장 밖에서 즐겁게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밖에서 신나게 놀고 들어왔는데 남편이 목을 매달고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11] 지겨운 열역학 강의 도중 주의를 환기하려는 일반물리학 교수님들의 단골 레퍼토리로 고인드립 당한다. 교수님의 세부전공이 열역학과 크게 상관이 없다면 거의 100%.[12] 이상기체에 대한 조건, 충돌 수 가설 풀이(Stoßzahlansatz; SZA)를 사용했다. 이후 에르고드 가설(ergodic hypothesis)도 포함한 논문도 보인다.[13] 이 볼츠만 방정식은 후에 아인슈타인이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는 토대가 된다.[14] 단 이 표기는 국제적으로 약속된 기호를 쓴 경우이며 볼츠만의 묘비에 적힌 실제 표기는 [math(S = k\log W)]로, [math(\log)]가 상용로그가 아닌 자연로그를 의미한다.[15] 이들과 나눈 논쟁은 과학사에서 볼츠만을 다룰 때 자주 언급된다.[16] 1933년에는 아직 본격적인 T4 작전이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미 1930년부터 장애인들을 안락사 혹은 불임시키는 행위를 장려해 왔다고 한다. 당시 나치가 장애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고려하면, 차라리 고통없이 죽는 게 나은 수준이었다.[17] 이 이야기는 후일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Caltech) 교수 데이비드 굿스타인의 통계역학 저서 <물질의 상태(States of Matter)>의 서문에 적혀 화제가 된다.[18] 당시 비트겐슈타인은 현 맨체스터 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인 맨체스터 과학기술대학교의 기계공학과 대학원생이었다.[19] 원래는 공저자이면서 러셀의 스승이자 트리니티 선배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를 만나러 간 건데, 하필 그가 약 반년쯤 전에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교수가 되어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떠났었기에 못 만났고 그 제자이자 공저자인 러셀을 만난 것이다. 수학원리를 주도적으로 쓴 사람은 화이트헤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