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100 Greatest Britons | ||||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rowcolor=#ffe>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윈스턴 처칠 |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 다이애나 스펜서 | 찰스 다윈 | 윌리엄 셰익스피어 | |
<rowcolor=#ffe>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아이작 뉴턴 | 엘리자베스 1세 | 존 레논 | 호레이쇼 넬슨 | 올리버 크롬웰 | |
11위~100위 | |||||
<rowcolor=#ffe>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어니스트 섀클턴 | 제임스 쿡 | 로버트 베이든 파월 | 알프레드 대왕 | 아서 웰즐리 | |
<rowcolor=#ffe>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마거릿 대처 | 마이클 크로포드 | 빅토리아 여왕 | 폴 매카트니 | 알렉산더 플레밍 | |
<rowcolor=#ffe>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앨런 튜링 | 마이클 패러데이 | 오와인 글린두르 | 엘리자베스 2세 | 스티븐 호킹 | |
<rowcolor=#ffe>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윌리엄 틴들 | 에멀린 팽크허스트 | 윌리엄 윌버포스 | 데이비드 보위 | 가이 포크스 | |
<rowcolor=#ffe>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레오나르드 체셔 | 에릭 모어캠브 | 데이비드 베컴 | 토머스 페인 | 부디카 | |
<rowcolor=#ffe>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 토머스 모어 | 윌리엄 블레이크 | 존 해리슨 | 헨리 8세 | |
<rowcolor=#ffe>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찰스 디킨스 | 프랭크 휘틀 | 존 필 | 존 로지 베어드 | 어나이린 베번 | |
<rowcolor=#ffe>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보이 조지 | 더글러스 베이더 | 윌리엄 월레스 | 프랜시스 드레이크 | 존 웨슬리 | |
<rowcolor=#ffe>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아서 왕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 로버트 스콧 | 이넉 파월 | |
<rowcolor=#ffe>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클리프 리처드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 프레디 머큐리 | 줄리 앤드류스 | 에드워드 엘가 | |
<rowcolor=#ffe>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조지 해리슨 | 데이비드 애튼버러 | 제임스 코널리 | 조지 스티븐슨 | |
<rowcolor=#ffe>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찰리 채플린 | 토니 블레어 | 윌리엄 캑스턴 | 바비 무어 | 제인 오스틴 | |
<rowcolor=#ffe>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윌리엄 부스 | 헨리 5세 |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 로버트 1세 |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 |
<rowcolor=#ffe>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무명용사 | 로비 윌리엄스 | 에드워드 제너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찰스 배비지 | |
<rowcolor=#ffe>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제프리 초서 | 리처드 3세 | J. K. 롤링 | 제임스 와트 | 리처드 브랜슨 | |
<rowcolor=#ffe>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보노 (아일랜드인) | 존 라이든 | 버나드 로 몽고메리 | 도날드 캠벨 | 헨리 2세 | |
<rowcolor=#ffe>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 J. R. R. 톨킨 | 월터 롤리 | 에드워드 1세 | 반스 월리스 | |
<rowcolor=#ffe>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리처드 버튼 | 토니 벤 | 데이비드 리빙스턴 | 팀 버너스리 | 마리 스톱스 | |
출처 | |||||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colbgcolor=#000><colcolor=#ffdab9> 제1대 브론테 공작 호레이쇼 넬슨 Rt Hon. Horatio Nelson | |||
KB | |||
출생 | 1758년 9월 29일 |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노포크 주 번햄소프 | |||
사망 | 1805년 10월 21일 (향년 47세) | ||
스페인 트라팔가르 곶, HMS 빅토리 함상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 <colbgcolor=#000><colcolor=#ffdab9> 작위 | 제1대 넬슨 자작 (1st Viscount Nelson)[1] 제1대 브론테 공작 (1st Duke of Bronte)[2] | |
묘소 | 영국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 ||
부모 | 아버지 에드먼드 넬슨 어머니 캐서린 수클링 | ||
형제자매 | 11남매 중 여섯째 | ||
배우자 | 프랜시스 니스벳 (1787년 3월 11일 결혼) | ||
자녀 | 양자 조시아 니스벳 | ||
학력 | 파스턴 문법 학교 에드워드 6세 문법 학교 (~1770) | ||
신장 | 164cm[3] | ||
종교 | 성공회[4][5] | ||
복무 | 영국 왕립해군 | ||
1771년 ~ 1805년 | |||
최종 계급 | 중장 | ||
근무 | HMS 빅토리 HMS 로웨스토프 HMS 아가멤논[6] HMS 캡틴[7] HMS 테세우스[8] HMS 뱅가드[9] HMS 엘리펀트[10] HMS 푸드로이언트[11] | ||
주요 참전 | 미국 독립전쟁 세인트빈센트 곶 해전(1797) 아부키르 만 해전 코펜하겐 해전 트라팔가르 해전 | ||
문장 | |||
서훈 | 바스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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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고 영국 본토를 위협할 때 트라팔가르 해전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12]를 무찌르고 전사한 명장이다. 넬슨은 당시 적수가 없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를 물리친 몇 안되는 군인이다.[13]서양의 명제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고 당시 영국 국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은 전쟁 영웅이다. 런던 중심지인 트라팔가 광장이 그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곳이고 넬슨 동상이 세워져 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과 부상
HMS 로웨스토프에서 근무할 당시 그려진 초상화. 그에게 아버지와도 같았던 상관 윌리엄 로커를 위해 그려진 것이다. |
세인트 빈센트 백작 존 저비스 경.[15] 넬슨은 세인트 빈센트 해전 당시 저비스 휘하에서 복무하며 큰 전공을 세웠다. 저비스는 평생 동안 넬슨에게 좋은 상관이자 스승으로 남았다. |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에서 산 니콜라스 함의 항복을 접수하는 넬슨.[16] |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 당시 영국 함대는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는데[17] 넬슨이 저비스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자신의 함선인 캡틴 함[18]을 변침시켜 스페인 함대의 집결을 저지한 덕택에 영국 함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넬슨은 직접 함상 전투에 뛰어들어 스페인 함대의 산 니콜라스 함[19]와 산 호세 함[20]을 나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넬슨의 행동은 엄연한 항명이었지만 넬슨의 항명 덕분에 승리했으므로 아무도 넬슨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 직후 넬슨을 만난 저비스는 그를 힘껏 안아줬으며 항명을 지적하는 보좌관에게서 넬슨을 두둔해주었다고한다. 같은 해 4월 넬슨은 영국 해군에서 9번째로 높은 청색 해군 소장(Rear Admiral of the Blue)직에 올랐다.
테네리페 전투에서 오른팔을 잃는 넬슨. |
2.2. 아부키르 전투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프랑스 기함 오리앙 함의 폭발을 목격하는 넬슨.[22] |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넬슨이 탑승했던 기함 HMS 뱅가드 |
그러나 넬슨은 다시 심기일전하여 이집트 원정을 떠난 나폴레옹을 섬멸하는 임무를 맡는다. 당시 프랑스 함대를 이끌던 프랑수아 브뤼예 제독은 전열함 13척을 난공불락인 위치에 줄지어 배치해놓았다.[23] 이 곳은 포함과 해안 포대의 보호까지 받는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만약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대와 똑같은 숫자의 전열함으로 정석이자 유일한 공격 방법인 횡대 항해를 시전했을 경우 전투는 영국이 큰 피해를 입고 간신히 승리하거나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정이 단 하나의 닻만 내리고 있다는 부분을 주목했고 함정과 모래톱 사이에 일정 정도 개방된 물길을 발견하였다.[24] 난공불락 요새의 약점을 파악한 함장들은 넬슨의 지시를 기억하며 물길 속을 파고들었고 여러 함정이 그 뒤를 따랐다. 영국 함대의 대담한 기동은 곧 승리를 불러왔다. 들어가는 중간에 함선 1척이 좌초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다른 함정들은 잘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영국 함대가 발포를 시작하자 프랑스 함대는 마치 샌드위치처럼 양쪽에서 포격을 받게 됐는데 방어적인 배치가 오히려 움직임을 틀어 막는 독이 된 셈. 그리하여 우선 횡대를 이뤘던 3척의 프랑스 함정이 박살났다. 120문의 함포를 탑재한 프랑스의 오리앙(L'Orient) 호는 강력했으나 불행하게도 갑판 위 일부 페인트 통에 불이 붙어 화약고가 폭발해버렸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될 무렵에 프랑스 함대는 전열함 3척을 제외한 모두가 항복했는데 나머지 3척 중 2척은 도망갔고 1척은 좌초된 뒤였다. 심지어 함선의 피해를 제외하고 봐도 영국 측은 사상자가 천 명도 되지 않은 데 반해 프랑스 측은 포로까지 합하면 최소 수천에서 최대 1만에 달하는 피해를 봐야 했다.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화약고 유폭으로 폭발하는 프랑스 기함 오리앙 |
비록 나폴레옹을 붙잡지는 못했지만 넬슨은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면서[25] 이 전공으로 넬슨은 나일의 남작(Baron Nelson of the Nile)[26]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며 군 경력의 정점을 찍는다. 이후 넬슨은 나폴리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나폴리 국왕이 하사한 브론테 공작 작위를 받았고 또한 영국 정부로부터 해군 서열 7위인 적색 해군 소장(Rear Admiral of the Red), 해군 서열 6위인 청색 중장(Vice Admiral of the Blue)직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2.3. 코펜하겐 전투
영국-덴마크 사이에 벌어진 코펜하겐 해전(1801). 영국 해군은 이 전투를 통해 덴마크가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27][28] |
영국 정부는 하이드 파커 경이 지휘하는 함대[30]를 덴마크로 보내 무력 시위를 하도록 했다.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함대는 영국 함대와 비교하면 수도 적고 훈련도도 낮았지만 해안 포대의 엄호를 받고 있어서 손을 쓰기가 까다로웠다. 때문에 전투는 치열한 포격전으로 점철되었다. 한편 넬슨은 이번 작전에서 엄청나게 애를 먹고 있었다. 지휘관인 파커 경은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돌적이고 모험을 좋아하는 넬슨과는 상성이 최악이었다. 넬슨이 보기에 공격을 조금만 지속하면 승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파커 경은 깃발 신호를 보내 넬슨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파커 경이 깃발 신호로 퇴각을 재촉하자 참다 못한 넬슨은 실명한 눈에 망원경을 갖다 대고 부관에게 말했다.[31]
'(깃발)신호가 보이지 않는구만.'
치열한 전투 끝에 덴마크는 영국에게 굴복했고 무장 중립 동맹은 깨졌다. 덴마크는 이 전투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고 러시아의 차르는 시해당했다. 결과적으로 유럽 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넬슨은 코펜하겐 해전의 승리로 자작에 서임되었다. 2.4. vs프랑스
한편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영국 본토를 침공할 대규모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불로뉴 항에 상륙정들을 집합시키게 했다. 기겁한 영국 정부는 넬슨을 파견해 불로뉴 항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고 넬슨은 저돌적인 성격답게 불로뉴 항의 프랑스 함선들을 탈취할 작전을 내놓았다. 하지만 넬슨의 작전은 실패했고 영국 함대는 물러나 프랑스 항구들에 대한 봉쇄에만 주력했다.불로뉴 항 공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과 프랑스는 숨고르기 목적으로 1802년 3월 25일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한다. 두 국가 사이의 충돌이 잠시 완화되자 넬슨은 본국으로 돌아가 여행을 즐겼고 요양차 버밍엄에 머물렀다.
하지만 아미앵 조약은 1803년 5월 18일을 기해서 무효화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전쟁에 돌입한다. 넬슨은 새로운 기함으로 빅토리 함[32]를 받았고 해군 서열 5위인 백색 중장(Vice Admiral of the White)의 직위에 올라 프랑스의 지중해 항구인 툴롱의 봉쇄 임무를 수행한다.[33][34]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상대한 피에르 빌뇌브 제독. |
이런 상황에서 전공에 목말랐던 넬슨이 대형 사고를 저지른다. 넬슨은 자신이 맡고 있던 툴롱의 봉쇄망을 느슨하게 해 프랑스 함대를 유인하는 계책을 썼는데 이게 잘못되어 툴롱을 빠져나온 프랑스 함대를 아예 놓쳐버린 것. 당황한 넬슨은 급히 프랑스 함대를 뒤쫓았으나 결국 붙잡지 못했고 책임을 지기 위해 함대를 반납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영국 해군성에서는 프랑스 항구들에 대한 봉쇄를 풀고 탈출한 빌뇌브 함대를 잡아 족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영국 함대들이 봉쇄를 풀고 사라지자 프랑스 함대는 항구에서 기어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넬슨의 실수 덕에 프랑스 해군은 전력을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했으나[36] 나폴레옹의 요구대로 영불 해협을 향해 항진하지는 않았다.[37] 지휘관인 빌뇌브는 결전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38] 한편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격멸할 기회[39]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소극적인 자세 탓에 실패했고 답답해진 영국 해군성은 넬슨을 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빌뇌브가 함대를 끌고 카디스에 틀어박히자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한 상륙 작전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하고[40] 불로뉴의 군대를 오스트리아 전선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빌뇌브에게 지중해를 통해 나폴리로 항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빌뇌브가 움직이지 않자 분개해 프랑수아 로실리 제독을 빌뇌브의 후임으로 카디즈에 파견한다. 당황한 빌뇌브는 급히 카디즈를 출항했고 트라팔가르 곶에서 넬슨이 이끄는 27척 전열함 규모의 영국 함대와 마주치게 된다.
2.5. 트라팔가르
넬슨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무찔렀으나 전투 도중 프랑스 해군 전열함 르두터블 함의 마스트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고, 전투가 끝나기 직전 사망했다. 현재도 보존되어 있는 HMS 빅토리 함에 넬슨 제독이 총에 맞은 장소가 표시되어 있는데, 위치는 후갑판의 타륜 앞부분이다. 허파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힌 총탄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죽어갈 때 군의관에게 자신의 치료 대신 다른 부상자의 구호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남겼다고 한다.관련 기록화에서는 갑판에 쓰러진 넬슨 주위에 여러 장교들이 모여서 임종을 지키는 모습으로 나올 때가 많은데 실제로는 부상을 입은 직후 하갑판의 부상자 수용실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사망했다.[41] 당시 빅토리와 르두터블 사이의 교전이 워낙 치열해서[42] 넬슨의 부하 장교들은 잠깐씩 하갑판으로 내려오는 거지 계속 넬슨 옆에서 머무를 수는 없었다.
유언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의무를 다했습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유언'.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내 말 잘 받아 적었는가? 내가 뭐라고 했는가?", 또는 "내 할머니가 자네보단 키스를 잘하겠네" 둘 중 하나라고 한다. 실제로 저 공식적인 유언을 남긴 이후 넬슨 제독은 몇번이나 자신의 말을 받아 적었는지 확인했고 심지어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도 깨어나서는 확인했다고 한다.[43]
그의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럼주에 담겨 7일 만에 영국에 도착했는데, 이 때 당시 럼주가 그의 피에 의해 붉게 물든 일화에서 따와 붉은색 럼주를 '블러디 럼'이라 부르게 된다. 참고로, 그 때 당시 그 럼주는 애도의 의미로 사람들이 나눠 마셨다든지, 선원들이 몰래 럼을 빼 마시느라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통 안에 럼주는 남아있지 않았고 시신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이다.[44]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독의 관까지 건들 정도로 영국 해군이 막장이지는 않았다. 무슨 해적도 아니고... 심지어 그 해적들도 엄격한 규율과 질서로 유지되었으니 말이다.#
영국 해군의 전통적인 관례 중 하나가, 복무 중 사망한 사람의 시신은 본국으로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장사를 지낸다는 점이다.[45] 즉 넬슨도 원래는 수장을 해야 하는데 수장하지 말아달라 부탁했기 때문에 본국으로 시신을 옮겼다. 이는 영국 해군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에 해당한다.
넬슨의 장례식은 국장으로서 32명의 제독과 100명의 함장들, 1만명의 수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렸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와 넬슨의 사망 소식을 모두 접한 조지 3세는 우리가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크다고 말했다고 한다.
3. 이순신과의 비교
넬슨은 역사상 최고의 명제독을 가리는 자리에서 그 이름이 빠지지 않는 인물이며 침략자에 맞서 조국을 지킨 해군 제독이라는 점에서 이순신과 자주 대응된다. 둘은 거대한 강적에 맞서 독보적인 분투를 했고, 적의 해상 작전을 모조리 돈좌시키는 점에서 비슷하다. 군사 사학을 전공한 레딧의 한 유저가 육해공별 명장 순위를 정한 적이 있는데 해군 순위에서 이순신이 1위, 넬슨이 2위를 차지했다.하지만 넬슨과 이순신을 같은 급으로 놓기는 힘든데 당연하지만 전투 환경이 너무 달랐다. 프랑스의 결전 회피 성향 때문에 넬슨은 그 유명세와 다르게 실제로 대형 해전을 치른 적은 딱 3번뿐이다. 그나마도 한번은 사실상 패전한 것을 상대측 섭정 왕자를 겁줘서 간신히 휴전을 맺은 걸 승전으로 포장한 것이다. 이때 상대측 지휘관은 무시하고 일부러 섭정 왕자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는데, 거의 승기가 거의 적에게 넘어가기 직전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국 해군이라도 유럽국가가 본진에서 지형+본진 버프 받고 싸우는 걸 이길순 없었다. 반면 이순신은 말할 것도 없는 백전 백승의 명장인 것은 물론이고 여러차례 국운을 건 회전을 치러야 했다. 이런 회전에서 대승을 치른 것도 모자라, 아예 전황의 흐름을 꺾고 육군에 도움을 주기 위해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항만과 요새들을 포격하기도 하면서 왜군의 해상 보급로에 큰 차질을 주었다. 또 결정적인 차이는 조국의 지원 여부.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중에 영국 본토에서 싸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본토의 행정력과 생산력은 멀쩡했고, 이를 바탕으로 넬슨에게 지원해줄 수 있었다. 반대로 조선은 개전과 동시에 본토가 휩쓸렸고, 전라를 제외한 전 국토가 황폐화 되었다. 이 때문에 조정이 지원은커녕 당장 눈앞에 오는 적을 막기 위해 해군 전력까지 빼가는 등, 이순신은 오히려 공출 당하는 입장이었다.
넬슨은 해군성에게 반쯤 찍힌 상태였지만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굉장했기 때문에 지원을 제대로 못받은 적은 없었다. 반면 이순신은 지원은커녕 모든 걸 이순신 혼자서 다 해야했다.[46] 넬슨이 군항에만 들어가면 보급품을 빵빵하게 받아먹을수 있었다면 이순신은 당장 쌀 한톨부터 자기 손으로 구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생산에 투입하거나 병력으로 훈련시키고 싸워야 했다.
군사적 능력 이외의 부분에서 차이점을 찾자면 윗선의 명령을 대하는 자세도 있다. 이순신은 상부의 어이없는 명령에도 어떻게든 따르는 구색 자체는 갖췄고 불합리한 명령들은 항상 자연스럽게 회피했다. 반면 넬슨의 경우 거의 매회 전투마다 명령 불복종이 섞여 있을 만큼 제멋대로였다. 심지어 몰타 포위전 때는 해밀턴 부인과 만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냥 사랑을 나누러 갔다. 그 외에도 명령 불복종이 계속되어 상부와의 관계가 굉장히 나빴고 오죽했으면 지휘관인 키스 자작이 "헤밀턴 부인은 이미 충분히 함대를 지휘했으니 이제 그만해라."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할 정도였다. 특히 계속된 월권 행위와 명령 불복종으로 인해 넬슨은 군 생활동안 상부와 관계가 나빴으며 상부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47] 단, 조선과 영국의 국가적 차이를 감안하면 이순신이 넬슨처럼 했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험한 처지였으니 자신의 상황에 맞는 처신을 했다고 볼 수 있다.[48]
여기까지는 호레이쇼 넬슨이 이순신에 비해 유리했던 여건에 대해 서술했지만, 반대로 이순신이 넬슨보다 더 유리한 여건을 가진 부분도 있었다. 우선 이순신은 양반가 출신이다. 즉, 조선 지배층(무려 사대부 집안) 출신[49]인데, 넬슨은 평민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능력을 인정받고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던 반면에[50] 평민 출신이었던 넬슨은 아부키르 만 해전 같은 대승을 거두고도 약소하기 그지 없는 보상만 받아야 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이순신이 넬슨보다 더 마냥 불리한 여건에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넬슨 보다 훨씬 사정이 나은 부분도 있었고, 이 부분 때문에 이순신이 조금은 저평가 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당시 조선은 아시아 최강급 함대를 보유한 해군 강국이었으며, 상대인 일본은 해군 약소국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강국과 약소국이란, 규모가 아닌 질과 역량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가 이순신이 반드시 저평가 되어야할 이유로 귀결 되는 것은 아니며, 이에 대한 내용은 뒤에서 다루도록 한다.
조선이 수백년간 평화로웠다는 인식은 거의 맞는 말이지만, 국경지역을 한정하자면 이는 틀린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함경도-평안도 지역 육군과 조선 해안의 수군들은 왜란 직전까지 각각 여진족과 왜구들을 상대로 실전 경험을 여러차례 겪고 있었다.[51]침략자들 모두 백병전에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이민족들 이었기에,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조선은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명나라 보다 더 심할 정도로 강력한 화력에 집착했다. 그만큼 조선 수군 또한 체계적인 해군 교리와 화력 체계들을 확보 해놓은 상태였고, 이들도 마찬가지로 백병전에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 강력한 화력과 뛰어난 방호력의 판옥선으로 그들을 수장 시키는 것을 최선의 대응책으로 삼았다.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모든 면에서 조선과 상황이 정 반대였다. 제대로된 중앙집권의 역사가 거의 없었으며, 역대 쇼군과 막부들이 내전을 통해 성립되거나 무너질 정도로 정국이 평화롭지 못했다. 때문에 내륙전만 주구장창 해댔고 해군을 양성할 여력이 없었다. 해양 진출을 시도해봤자 동쪽은 끝도없는(줄 알았던) 대양이요, 서쪽은 한반도와 중화 대륙이, 남쪽은 오키나와 세력(예: 류큐 왕국 등)과 필리핀 같은 섬 국가들이 틀어막고 있으니 더욱 해양 진출을 꿈꾸기가 힘들다. 거기다 다이묘들이 통치하는 번으로 국가 행정과 경제가 쪼개져 있었기 때문에 통합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았다. 아니, 해군이라는 개념 자체가 마땅히 없었다. 기껏해야 잘 나가는 번이나 왜구들이 전투 보다는 수송을 위해 수송선을 위주로 여러대의 배를 운용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백년이 흘러 전국시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의 종식 시킨 직후[52]가 바로 임진왜란 시기였다. 여전히 수송선이 대다수였고, 여전히 해군의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급조된 해군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러다보니 육지에서 최고의 명장이었던 일본 장수들은 이순신 앞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속절없이 깨지기도 했다.[53]
물론 이러한 관점도 어디까지나 임진왜란 초기까지 해당되는 내용이다. 임진왜란은 무려 7년간의 장기전이자 대전쟁이었다. 전쟁사에서 단 몇년(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몇개월)만에 군사력이 역전되거나 전황이 변하는 것은 흔한 일이고, 군인들의 실전 역량도 전쟁 1년차 정도를 넘어서면 비약적으로 빠르게 쌓이기 시작한다.[54] 적 보다 더 뛰어난 실전경험이나 훈련역량으로 우세를 점하는 것도 어느 정도까지일 뿐, 적이 일정 수준의 역량을 갖추기 시작하면 더 이상은 이것이 유의미한 비교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조선은 육군의 역량이, 일본은 수군의 역량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왜군은 그동안 이순신에게 여러 차례 깨지며 패배에 통탄했지만, 이미 수많은 전쟁을 치러왔던 그들이 쉽게 낙담할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배를 더 생산한 것은 물론, 조선 수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전투 함선도 나름대로 급조해 만들어냈으며, 비교적 작은 크기의 배들을 여러척 운용하는 점을 이용해 수적 우세를 점하고, 속도의 이점을 살려 적의 측후방을 포위하고, 조총 사격과 백병전을 유도하거나 방화를 저지르는 나름의 전술적 노하우를 쌓기도 했다.[55] 그리고 이러한 노하우는 이순신이 경질되어 백의종군 하던 시기에 절정에 이르고 마는데, 그것의 결과가 바로 칠천량 해전이다.
이순신/평가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 범장설(속된말로 장비빨이라는 설)을 반박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원균이 이끌었던 칠천량 해전이다. 비록 희대의 폐급이라는 원균이 지휘한 수군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조선의 판옥선과 화포들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오버 테크놀리지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는 사례인 셈이다. 원균의 무능하고 성급한 지휘로 인해 왜군은 마음껏 판옥선 진열을 무너뜨리고 포위했으며, 조총과 화포(혹은 화포에 준할 정도로 큰 조총 등)사격, 월선과 방화로 판옥선과 거북선을 불태우거나 수병들을 살상했다. 급조된 해군에 불과했던 그들이 당대 아시아 최강 수군의 주력 함대를 무력화 시킨 것이다. 이순신이 복귀한 이후 조선 수군은 해체 수순까지 거론될 정도였으나, 이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단 13척의 배로 또 다시 국운을 건 결전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넬슨이 당대 최강국이었던 프랑스를 상대로 전승을 기록한 해전 명장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명량 해전과 같은 드라마틱한 회전과 전과는 넬슨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쉽게 치를 수 있는 게 아니다. [56] 이순신 본인 조차도 명량 해전에서 죽을 각오를 했고, 그의 휘하 장수들 조차도 그렇게 떠받들던 이순신을 처음으로 불신 했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순신과 넬슨은 여러 차이점이 있고, 서로가 각자 더 수월했던 점, 불리했던 점 등이 있다. 오히려 이순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순신처럼 견제를 받다 전사한 네덜란드의 미힐 더라위터르가 더 닮았다 할 수 있다.
4. 기타
- 트라팔가르 전투 직전에 "잉글랜드는 귀관 전원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는 말을 남긴 게 굉장히 유명하다.[57] 다만 직접 입으로 했다는 건 아니고, 깃발 신호로 전 함대에 보낸 것이다. 신호의 편의를 위해서 깃발 신호에 자주 쓰는 단어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England 'confides that", "할 것이라고 자신한다(믿는다/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보낼 생각이었으나, 깃발 신호 단어집에는 confide와 duty라는 단어가 없었다. 한 글자씩 일일이 올리기에는 번거로웠고, 이 최후의 격려 문구를 보낸 직후 바로 작전지시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도 부족해서 confide 대신 들어간 것이 '예상한다'라는 뜻의 'expects'(문맥상 의미는 바란다/기대한다). duty는 대체할 만한 단어도 없고 너무 길지도 않아서인지 일일이 한 철자씩 깃발을 올렸다. 그래서 위의 신호기가 'd u t y'라고 하나씩 올라와 있는 것이다. 출처
참고로 두 단어의 뉘앙스가 상당히 다른데, 전자는 장병들에 대한 신뢰가 느껴지지만 후자는 일단 이런 식의 문장은 잘 안 쓰므로 어색하고, 조금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느낌마저 든다.[58] 때문에 함장들은 이 문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넬슨을 숭배하다시피 했을 뿐 아니라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깃발 신호에 익숙했던 장병들은 당연히 본래 의미를 눈치껏 알아듣고 환호했으며, 이 위엄돋는 문구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압도적인 승리와 넬슨 제독의 전사라는 드라마틱한 배경과 어우러져서 전설이 되었다.
- 넬슨도 한때 하프페이 함장으로 지냈다. 1789년 영국 해군이 평시 편성으로 전환되어 지휘할 함선을 배정받지 못해 몇 년 간 급여를 절반 밖에 받지 못하는 예비역이 되었으나 프랑스 혁명 기간 중 프랑스 해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1793년 아가멤논 호의 함장 직책을 배정받고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였다.
- 그가 노예 무역의 옹호(적극적 지지, 방관)자였다는 점에서 넬슨 동상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출처 실제로 넬슨이 노예 무역에 관여했다는 점은 전공자가 아닌 이상은 거의 알지 못하는 내용이다.[59] 하지만 기사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영국 사회에서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기사가 쓰여지고 약 3년 후,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의 여파로 비록 영국 본토는 아니지만 바베이도스에 있는 그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 그의 유산에 대해서는 굉장히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이 부러움을 준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 가보면 그의 동상이 기함이었던 HMS 빅토리호의 돛대 높이와 같은 55m 높이의 기둥 위에 서서 영불 해협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넬슨 기념탑)
그가 최후를 맞았던 HMS 빅토리 함과 관련된 것들도 매우 잘 보존이 되어 있다. 현재 HMS 빅토리 함은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의 모습으로 복구되어 영국 포츠머스의 히스토릭 독야드에 있는 드라이 독에 영구보존되어 있으며, 내부는 당시 해군 장병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박물관 함의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놀랍게도 또한 근처의 건물에는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사용되었던 돛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 점[60]도 전시되어 있다. 이때 주의할 것이 하나 있는데 HMS 빅토리 함은 입장권 하나로 단 한 번만 입장이 가능하다. 즉, 입장했다가 나오면 다시 들어가기 위해선 표를 다시 사야 한다. 그외 몇몇 시설도 이와 동일한 제한이 걸려 있다.
참고로 HMS 빅토리 함은 비록 명예직에 가깝지만 아직도 영국 해군의 함적에 남아있다. 미 해군 역시 1797년에 건조된 자국의 대형 프리깃 USS 컨스티튜션 함을 현역함 명부에 남겨두고 있다. 차이라면 빅토리는 영구적으로 정박 상태로 묶여 있지만 컨스티튜션은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치면서 여전히 항해 가능 상태로 남아 있는 '진짜 현역함'이라는 것이다.
- 눈과 팔을 잃은 것을 포함해서 군 생활 동안 중상이 많았다. 오른쪽 눈을 잃었고[61], 오른팔을 자르기까지 한데다[62] 나일강 해전에서는 프랑스 해군의 포탄에 이마를 맞아 뼈가 드러날 정도로 부상을 입었다. 그 겁없는 성격의 넬슨도 이때 죽는 줄 알았을 정도.
그런데 현대적인 의학적 치료법과 위생 개념이 자리잡지 못했던 당시는 간단한 상처도 제대로 치료를 못해 감염으로 죽는 시기였다. 넬슨은 큰 부상을 여러 차례 입은 것치고는 명운이 좋았다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질병도 자주 앓았는데 우선 뱃멀미가 심했고 말라리아로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우울증도 있었다.
- 넬슨 사후 태어난 폴란드 태생의 영국을 대표하는 문학 작가인 조지프 콘래드(해양 문학의 걸작 The Nigger of the Narcissus를 집필했다)는 영국 해군의 어떤 영광도 넬슨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고 넬슨을 극찬했다. 실제 조셉은 영국 출신은 아니지만 영국으로 귀화해서 영국 해군 장교가 되기도 했다.
- 2002년 영국의 BBC가 10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 투표에서 무려 9위를 차지했다. 이 순위는 장군, 제독으로 한정하면 1위로서 나라를 위해 마지막 전투에서 비장하게 순국한 긍정적 이미지가 같이 결합되어 동시대 나폴레옹을 물리친 진짜 주역인 웰링턴 공작보다 조금 앞선 순위이다.[63] 당연하지만 넬슨은 생전에도 부하들은 물론 국민들[64], 나아가 나폴레옹을 두려워 한 유럽에서도 영웅으로 대접은 확실히 받았다.
- 넬슨과 동일한 시기 활약한 영국이 자랑하는 명장 웰링턴 공작을 1805년 런던서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처음엔 넬슨이 웰즐리를 못 알아봐 거만하게 굴었지만 그의 신분을 안 후엔 즐겁게 대화했다고. 두 사람은 모두 국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후 세인트 폴 대성당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 양파 애호가였다. 양파 자체를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파가 건강에 직결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 경험일 수도 있고 그저 양파의 강한 향 때문일 수도 있을텐데, 어쨌거나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양파를 잔뜩 사들여 선원들에게 양파를 가능한 날것으로 먹도록 지시하고 전사하기 11일 전 쓴 편지를 보면, 다른 함장들에게도 이를 따를 것을 권유했다.
- 넬슨의 군사적인 장점과 단점을 꺼내자면 단연코 과감함과 저돌성이 나올 것이다. 넬슨은 지휘권이 없을 때조차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는 일이 빈번했다. 일례로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은 넬슨이 멋대로 스페인 함대의 침로를 가로막아 대승한 전투다. 비록 승리를 가져왔으나 넬슨의 이러한 행동은 명백히 규율 위반이었다. 하지만 도박이 성공해서 더 좋은 결과를 불러왔기 때문에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만 봐도 이때 넬슨 휘하의 장병들은 맨 먼저 스페인 전열함 2척을 나포할 수 있었다. 또한 넬슨은 휘하 함장들에게도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했다.[65] 넬슨은 늘 함장들에게 작전에 얽매이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취할 것을 주문했다("Never mind manoeuvres, go straight at 'em." 함대 기동 같은 건 신경쓰지 말게. 그냥 돌격 앞으로).
- 뛰어난 능력에 비해 공격적이고 욕쟁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기분 나쁜 독설을 거침없이 하고, 상관들의 말을 자주 무시했기에 대인관계가 좋지 못했다. 다만 상관이랑 사이가 안 좋았지 오랜 세월 함께한 함장들과 부하들에게는 수호신같은 존재였다. 특히 수병들의 복지에 신경쓰고 사소한 부탁도 들어주려 해서 꽤 친근한 이미지도 있었다. 하여튼 적이 많았으며 시칠리아의 반왕당파 반란에 개입했고 거기서 벌어진 학살극에 연관되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논란거리이다.
- 넬슨과 내연관계이던 엠마 해밀턴은 유부녀로 넬슨의 상관인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인이었는데, 넬슨을 아끼고 그 가능성을 높게 본 윌리엄 해밀턴은 자기 후배이자 부하가 아내와 사귀는 것을 묵인했을 뿐더러 심지어 세 사람이 한 집에서 함께 살기까지 했다. 해밀턴 경의 임종 때에도 엠마와 넬슨 두 사람이 나란히 함께 지켜보았다. 이런 관계가 가능했던 건 해밀턴과 엠마의 결혼이 해밀턴의 조카 찰스 그레빌(Charles Greville)을 지키기 위한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이다. 그레빌은 명문가의 자손이며 국회의원이었는데, 엠마와 동거했었으나 그레빌은 신분이 낮은 엠마와 결혼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고, 돈도 궁해서 부자집 딸과 결혼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런 이유로 엠마가 거추장스러워지자, 그레빌이 자신의 삼촌인 해밀턴 경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결혼 당시 엠마는 26세이고 해밀턴 경은 60세였으며, 평생 해로했던 부인과 사별한 이후였다. 엠마를 떠안은 해밀턴은 한참 어린 부인에게 집착하지 않았고 넬슨과 바람을 피우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세 사람의 관계가 대중들과 사교계에 스캔들이긴 했다. 넬슨이 남긴 유언 중에는 딸 호레이샤 넬슨도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게 있었는데 영국 정부가 철저히 무시해 엠마는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다.[66]
넬슨의 유일한 혈육 호레이샤 넬슨(Horatia Nelson) |
- 넬슨과 엠마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 호레이샤는 고모들이 데려다 키워서 엄마처럼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다만 하층민으로 태어나 순전히 타고난 미모 하나로 그 자리까지 올랐던 엄마의 미모를 전혀 물려받지 못하고 아버지 넬슨의 외모만 물려받아서 외모 문제로 좀 구설수에 시달렸다. 남아 있는 젊은 시절의 초상화는 굉장히 못생긴 걸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로 못생긴 건 아니고 평범한 외모였는데 어머니가 워낙 소문난 미인이어서 후대에까지 구설수가 되고 있다. 어머니 엠마는 호레이샤가 15살 때 사망했는데 호레이샤는 죽을 때까지 엠마를 자신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 생모 손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했으니 애정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엠마가 남긴 빚이 너무 많아서 그걸 피하기 위해 부인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어쨌든 호레이샤는 동네 목사와 결혼하여 조용히 살면서 10명의 자녀를 낳았고, 지금까지 그녀의 자손은 이어지고 있다. 넬슨은 영국에서는 남작(1798년) 작위를 받았다가 1801년 자작으로 승격되었고, 양시칠리아 왕국에서는 1799년에 무려 브론테 공작(Duke of Bronté) 작위를 받았지만, 호레이샤는 적자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넬슨 백작으로 승격된 작위와 함께 양시칠리아의 브론테 공작위도 형 윌리엄이 계승하게 된다. 다만 브론테 공작위는 여성 승계가 가능해서 현재 두 작위는 각각 다른 사람이 보유하고 있다.[67][68]
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
- 미국에서 만든 1941년 영화 '레이디 해밀턴'[69]에서 당시로서는 영화계의 뉴비인 로렌스 올리비에[70]가 비비안 리와 함께 공연했다. 이 둘은 실제 신혼부부였는데, 영화 역시 엠마와의 절절한 로맨스가 강조되었다.
- 프랑스 영화 "아우스테를리쯔 대전투(1960)"에서 앞 부분에 잠깐 나온다.
- 피터 핀치, 글렌다 잭슨 주연의 1973년도 영화도 넬슨과 엠마 해밀턴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에서는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잭 오브리가 넬슨 밑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그의 입으로 넬슨이 어땠는지 묘사되며[71] 영화에서 자주 언급된다.
5.2. 소설
- 수잔 손탁의 "화산의 연인들"은 엠마와 넬슨의 연애담을 그린 작품.
- 소설 혼블로워의 주인공 혼블로워는 넬슨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 테메레르에서는 간간이 이름을 비치고,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사망이 오보로 나온다. 적 용이 돛에 불을 붙여 돛에 깔렸는데, 이때 훈장이 가슴에 눌어붙게 된다. 그리고 본토를 침공한 프랑스군과의 마지막 결전에서 함대를 이끌고 철수하는 프랑스군과 교전하던 중 배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테메레르에게 노에제 옹호하고 용들을 함부로 대한다면서 비판 받는다.
5.3. 게임
- 토탈 워 시리즈에서는 엠파이어: 토탈 워에서 일단 대영제국 고유 유닛으로 HMS Victory가 나왔다가, 나폴레옹: 토탈 워에서 본인이 직접 등장했으며 능력치는 캐사기적으로 능력치를 의미하는 별이 하늘을 찌른다. 게다가 122문 1급함을 타고 있어서 전함 몇 개는 다 쌈싸먹는 체급인데 그런다고 막 굴리다 죽으면 영국 유저는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 영국 외 타국가로 플레이시 가장 골치아픈 존재이기도 한데 그나마 유럽 캠페인에는 테크를 끝까지 올릴 수 있기에 성능좋은 전함을 조합해서 넬슨의 함대를 격파할 수 있지만 이집트 캠페인에는 올릴 수 있는 테크가 제한되어 명함조차 못 내밀 소형 전함밖에 못뽑아 아예 건드리지도 못한다. 이 작품에서는 나폴레옹이 주인공이라 역사적 전투를 모두 프랑스군으로 플레이하는데 DLC로 특별히 워털루 전투를 영국군으로 플레이할 수 있게 해놨지만 넬슨이 지휘하는 나일 해전과 트라팔가르 해전은 끝내 영국 시점 플레이가 나오지 않았다. 워털루 전투의 경우에는 적장이 무려 끝판왕인 나폴레옹에 보병 최강인 근위대까지 있고 구원병으로 오는 프로이센군은 역사와는 달리 도움이 안되기에 영국군 시점에서 어려운 플레이를 해야 하는 반면 해전들의 경우 적장이 넬슨과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허접하기에 너무 쉬운 전투가 되어 흥미를 끌기 어려운 면이 있어서이다.
-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서 영국의 역사적 제독 중 하나로 등장한다. Europa Universalis IV에서도 이 게임에서 셋밖에 없는 최고급 능력치의 제독으로 등장했다. 나머지 한 명은 이순신이다.
- 문명 6에서 위대한 제독으로 등장한다. 효과는 항만 특수지구에 조선소 즉시 건설.
5.4. 만화
-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에서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빌뇌브 제독의 해군과 격돌하는 건 동일하지만 여기서는 빌뇌브에게 패배했다고 언급된다.
- 한국에선 절판되어버린 비운의 만화 진정남 나폴레옹에서도 트라팔가르 해전 파트에서 당연히 등장한다.
[1] 영국 작위[2] 시칠리아 왕국 작위[3] 키가 5피트 4인치(164cm)라고 기록되어 있다.출처[4] "Who was Nelson?", rmg.co.uk[5] "Nelson: the man of prayer", 「The Church Times」, 2006.11.2.[6] 64문 3등급 전열함. 넬슨이 정식 함장 자격으로 처음 부임한 함선이다. 넬슨은 개인적으로 아가멤논 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7] 74문 3등급 전열함.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 당시 넬슨의 전함이었다.[8] 74문 3등급 전열함.[9] 74문 3등급 전열함. 아부키르 만 해전 당시 넬슨이 탑승했던 함선이며 영국 함대의 기함이었다.[10] 74문 3등급 전열함. 영국-덴마크간에 벌어진 코펜하겐 해전 당시 넬슨이 탑승했던 전함.[11] 80문 3등급 전열함.[12] 이 당시 스페인은 영국과 전쟁을 벌일 만큼 원수진 일이 없었지만 나폴레옹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코가 꿰인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수적으로 영국 해군을 압도하기 위해 스페인 해군도 동원했다.[13] 다만 프랑스 해군과 영국 해군의 수준 차이가 많이 나긴 했다. 나폴레옹이 뼛속까지 육군이다보니 해전에서 어떤 작전을 펼쳐야 하는지 몰랐기도 하고..[14] 배멀미는 오랜시간 배를 타도 적응되는 감각이 아니라서 그렇다. 실제로 해군복무를 하게 되면 함상생활을 몇십 년 했어도 배멀미로 고통받는 부사관이나 장교를 흔히 볼 수 있다. 병들이야 함상생활을 6개월만 하면 육상근무로 전환해 전역할 수 있지만 부사관이나 장교는 생계를 위해 참고 근무하는 수 밖에 없다. 넬슨 역시 12살 때부터 배를 탔어도 유독 심한 배멀미를 평생 했다.[15] John Jervis, 1st Earl of St.Vincent[16] 넬슨이 적함 장교로부터 칼을 건네받고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유럽 해전에서의 항복 의례였다. 해전뿐망 아니라 육전에서도 항복 의례가 지휘관의 칼을 넘겨주는 것이었다.[17] 영국 함대의 전력은 전열함 15척, 프리깃 5척이었고 스페인 함대의 전력은 전열함 24척, 프리깃 7척이었다. 다만 스페인 함대는 뭉치지 않고 2개의 함대로 분산되어 있었다.[18] 이 당시 영국 함대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74문 3등급 전열함이다.[19] 80문 3급 전열함.[20] 112문 1급 전열함.[21] 오늘날 골절상은 수술을 통해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지만 이 당시에는 그런 수술 개념이 없었다. 부목으로 자연 치유가 되지 않는 한 썩어가기에 무조건 그 부위를 절단하는 수밖에 없었고 마취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영어 관용구 중에 'Bite the bullet(입에 총알을 물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당시 골절로 인해 절단 수술을 할 때 마취 없이 총알을 깨물며 고통을 참는 모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근데 문제는 저 시대 총탄은 통짜 납덩어리였다.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이 건강에 좋을 리가 없었다. 수술 후에도 과다출혈이나 쇼크로 사망하는 사람이 비일비재했다. 넬슨의 경우는 아니지만, 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에 그런 수술이 잘 묘사되어 있다.[22] 그림에서 넬슨이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는데 이는 전투 중 적탄을 이마에 맞아 피부가 벗겨지는 부상을 당해서 그렇다. 하지만 비교적 작은 부상이었으므로 붕대를 감고 곧바로 다시 전투를 지휘했다.[23] 함대의 전열 한 쪽은 해안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무리해서 파고들다가는 함선이 모래톱에 좌초할 위험성이 있었다. 따라서 전열의 한 쪽 면은 아예 공격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24] 전열함 1척이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다만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함대가 이 틈을 파고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25]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전멸당하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었고 프랑스가 야심차게 준비한 이집트 원정은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소수의 측근들만 데리고 탈출하는 굴욕을 당한다.[26] 사실 이 호칭은 넬슨의 전과에 비하면 약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 당시 영국 정부의 방침이 총사령관이 아닌 인물은 남작보다 높은 작위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하여서 넬슨은 귀족 출신도 아니었고 정부에 이렇다할 연줄도 없었다. 그러니 당시 상황에서는 영국 정부가 넬슨에게 가능한한 최고의 영예를 베풀어주기는 한 것.[27] 그러나 해전 이후 덴마크는 오히려 영국에 대한 반감만 커지다가 결국 나폴레옹의 편에 붙는 나비 효과가 되어버렸다.[28] 참고로 안데르센이 쓴 홀거 단스케(동화)에도 언급되는 전투다. 문서 참조.[29] 첫 번째 무장 중립 동맹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을 견제하고자 결성되었다.[30] 전열함 12척, 프리깃 5척 규모였다.[31] 사실 이 전투 말고 평상시에도 안 보이는 눈에 망원경을 대고 '적군이 안 보인다'는 농담을 했었다고 한다.[32] 새로 건조한 것이 아니고 퇴역하다시피 한 함선을 전면 수리해서 재취역시킨 것이다. 다만 감안해야 하는 것이 빅토리 함은 원래부터 잘 뽑힌 축에 속했고, 당시에는 목조 범선 특성상 같은 설계로 만들어도 같은 성능이 나온다는 보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평판이 좋은 배는 수리를 해서라도 계속 쓰는 것을 선호했다.[33] 이 당시 영국 해군은 함대를 동원해 프랑스의 항구들을 모조리 봉쇄함으로써 프랑스 함대가 한 곳으로 뭉치는 것을 막았다. 아무리 프랑스 함대의 수준이 허접이라고 해도 일단 뭉치면 위협적인 전력이 되기 때문이다.[34] 또한 영국 해군은 규모면에서 매우 거대했으나 그만큼 지킬 영역이 많았고 함대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함대에 봉쇄당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럽에 함대 전력을 집중시킬 여력이 있었다.[35] 영국 함대의 봉쇄망은 가히 난공불락이라 할만했다. 저비스 제독은 1801년 영국 해군성에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군이 영국 본토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데요, 다만 걔네들이 바다를 통해서 오지는 못한다고 말씀드릴 뿐입니다.'라고 썼다.[36] 이 과정에서 스페인 해군의 전력까지 흡수해 트라팔가르 해전 즈음에는 전열함만 33척 규모인 대함대가 되었다.[37] 빌뇌브가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카디즈(Cadiz) 항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했다.[38] 이는 빌뇌브가 단순히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기를 거치면서 해군장교 및 숙련된 선원이 단두대 등으로 날아가 버려 프랑스 해군의 숙련도가 처참했기 때문이다. 빌뇌브 본인 자체가 아부키르 만 해전을 겪으면서 이런 현실을 뼈아프게 다시 한번 절감했으니 말이다.[39] 로버트 칼더(Robert Calder) 제독이 지휘한 피니스테라 곶 해전.[40] 영불 해협은 영국에서 가장 거대한 함대 중 하나인 해협 함대(Channel Fleet)가 틀어막고 있었다. 아무리 나폴레옹이라도 전함의 호위 없이 병력을 실은 수송선만으로 상륙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41] 넬슨을 다룬 영상물에서는 부상자 수용실로 옮기는 장면이 꼭 나온다.[42] 특히 빅토리는 르두터블의 돗대에서 쏟아지는 총알과 수류탄을 뒤집어쓰던 판국이라 상갑판 전투는 확실히 영국군이 밀리고 있었다.[43] 갑자기 '할머니' 운운한 건, 죽기 직전 빅토리의 함장 하디(Thomas Hardy)(넬슨은 빅토리 함에 탑승하기는 했으나 총 지휘관인 '제독'이고 빅토리 함 자체를 책임지는 함장은 하디였다)에게 키스해 달라고 한 다음 하디 함장이 키스하자 남긴 말이라고 한다. 하디는 넬슨의 오랜 친구였고 넬슨이 엠마를 책임져달라고 쓴 문서의 증인 중 한 사람이었다.[44] 급행으로 런던까지 이동할 때 부패를 막으려 럼주에 담겨 보내진 건 맞다. 그러나 럼주만 넣은 게 아닌 장뇌와 좀약을 잔뜩 넣고, 거기에 관이 놓인 메인 마스트 밑에서 해병대원들이 경계 근무를 했다. 럼주 문서의 여담 참고.[45] 이 때문에 한때 영국에게 점령당했던 거문도에 영국 수병의 묘가 남아 있다.[46] 사실 넬슨 같이 국가에서 휘하 장성들이 제대로 싸울 수 있게 지원해주는 것이 당연한 거다. 반대로, 이순신의 평가가 드높은 이유도 이렇게 당연하지 않은 상황을 거의 홀로 타파했기 때문이다.[47] 월급이 반으로 깎인 것은 영국 해군성에서 평시에 장교들에게 지급되는 월급을 반으로 깎아 재정 절약을 도모한 하프 페이(Half-Pay) 제도를 잘못 이해한 것 같다. 보직 해임은 '해임'이라기보다 본인이 자진해서 보직을 '반납'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툴롱에서 빌뇌브 함대를 놓쳤을 때) 다만 넬슨이 '평민' 출신이었기에 전과에 비해서 항상 부족한 보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48] 전체적으로 동양 국가들은 서양의 전제군주제는 애들 장난 취급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절대왕정을 유지하고 있었던데다, 특히 조선은 쿠데타로부터 잉태된 나라였기 때문에 병권에 대해서 왕실이 지나칠 정도로 견제를 일삼았다. 이순신이 윗선의 명령을 따르는 '구색'이라도 갖추지 않았으면 당장 그 선조와 조정이 이것을 뭐라고 받아들였겠는가. 반대로 영국은 장교들에게 최대한 재량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 당시 영국은 국왕 조지 3세가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를 통해서 통치하는 구조였으므로 (제임스 2세가 폐위된 이후 영국은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자리잡았다.) 조선과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49] 몰락한 양반가 출신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음서로 관직을 얻을 수 있었을 만큼 제대로 된 양반가문 이었다.[50] 다만 이순신의 승진이 조선 기준으로도 파격적이라 불릴 만큼 빨랐던지라 조정에서도 이건 너무 빠르다며 취소하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51] 대표적인 사례로 니탕개의 난과 을묘왜변, 삼포왜란 등이 있다. 특히 니탕개의 난 당시에는 이순신을 비롯, 김시민, 신립, 이일 등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무관들이 상당수 참전했었다.[52] 동서전쟁까지 전국시대로 포함하는 관점도 있기에 '거의 종식 시켰다.' 라는 표현으로 타협을 보기도 한다.[53] 흥미로운 점은 이순신도 본래 육군 출신이고 북방지역에서 근무하며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바다에서는 패전의 기록이 없으나, 육지에서는 한번의 패전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많은 나라들이 육.해군 지휘관을 처음부터 분리해서 전문 양성 하지는 않았고, 육지에서 경험을 쌓다가 바다로, 바다에서 경험을 쌓다가 육지로 가능 경우가 흔했다. 전라병사 김준룡의 경우 육지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실전을 치르고 수군에서 화포술을 익혔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병자호란 시기에 일어난 광교산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54] 대표적인 예시가 독소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6.25 전쟁, 척계광의 왜구 토벌전 등이 있다. 주로 한쪽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건 물론 훈련 체계조차 미흡한 상황이었고, 한쪽은 뛰어난 훈련체계를 바탕으로 실전경험도 많이 쌓아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나머지 한쪽의 역량도 수년만에 빠르게 성장했고, 더 이상 이것만으로는 우세를 점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55] 비록 배가 작은 탓에 화력은 약했고 이 점 때문에 매번 이순신에게 깨졌지만,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56] 이러한 명량 해전의 조선 수군과 어느정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정 반대의 결과로 이어진 사례로는 나선 정벌에서 패배한 루스 차르국의 해군이 있다. 이들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놓여있었으나, 당시 동아시아 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유럽제 신식 함선과 화포, 그리고 신식 총기였던 플린트락 머스킷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함선들(11척)은 당시 파병 나온 조선군과 청나라군(총 47척의 함선들)에 의해 모조리 불타버렸고,(어쩌다보니 조청연합군은 임진왜란 왜군들이 쓰던 방식을 그대로 루스 해군에게 써먹는 양상이 되었다.) 조총간의 사격전에서도 조선군 조총대의 활약으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제 아무리 신식 무기로 무장한 부대라 하더라도, '비교적' 구형 무기로 무장한 적에게 절망적인 열세 상황으로 몰릴 경우에는 이렇게 지는것도 일반적인거고, 사실 그렇게 굴욕적인 패배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순신은 명량에서 이것보다도 더 압도적으로 불리한 수준의 열세를 지형지물과 해류를 활용해 극복한 것이다.[57] 다만 잉글랜드 지방만이 아닌 영국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영국/국호 참고. 18세기 이전 국명이 잉글랜드였으므로 깃발 신호의 의미는 여전히 잉글랜드였을 수도 있다.[58] confide를 쓴 경우에는 "잉글랜드는 제군이 의무를 다할 것이라고 믿는다."가 되어 신뢰의 표현이 된다. expect는 "잉글랜드는 제군이 의무를 (당연히) 다할 것으로 기대한다."라는 뜻이 되어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나라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라는 강경한 뉘앙스가 있다. 말하자면 expect는 "잉글랜드 제군이랍시고 싸우는 너희들인데 당연히 의무를 다하겠지~?"하는 뉘앙스다(...)[59] 다만 넬슨처럼 당시 막 식민지 개척이 이뤄지는 시대에는 노예 무역이 잘못되었다는 상식 자체가 전무했어서 대부분의 서양인들, 심지어 지식인들마저 노예 무역을 방관했다. 넬슨과 동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위인, 정치인, 학자들이 같은 케이스이다.[60] 포어 탑세일이며 HMS 빅토리 함에 달린 돛 중 두 번째로 큰 돛이었다.[61] 안대(eye patch)를 한 그림이나 영상이 많은데 실제로는 외관상 그렇게 눈이 흉하지 않아 착용하지 않았다.[62] 장애인이 되고 나서 넬슨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해져 이때부터는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63] 군인 출신까지 따진다면 1위를 차지한 윈스턴 처칠이 더 높지만, 처칠은 군인보다는 정치가로서 더 유명한 인물이고 엉터리 작전으로 갈리폴리 전투를 대차게 말아먹은 바 있어 군인으로서의 자질은 매우 형편없기 그지없었다.[64] 트라팔가르 해전에 나설 때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고 "지금까지는 그들의 갈채만 받았는데 이제는 마음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또 넬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국왕부터 시민들까지 모두가 애도했다.[65] 이건 사실 넬슨만의 군사적 특징이라기보다는 이 당시 영국 해군의 방침이 그랬다.[66] 정확히 말하자면 해밀턴 경의 유산이나 넬슨 개인이 준 재산도 꽤 많았다. 엠마의 낭비벽이 워낙 심하고 주위 사람에게 돈을 주다보니 말년엔 정말 가난해졌다. 영화 '레이디 해밀턴'에선 알코올 중독으로 망가진 엠마를 그려서 논란이 됐었다.[67] 제3대 브론테 공작때 서로 분리되어 현재 제4대 브릿포트 자작 알렉산더 넬슨 후드가 당주다.[68] 브론테 공작위는 넬슨의 형 윌리엄의 딸이, 넬슨 백작위는 누나인 수잔나의 아들 즉 조카가 승계받았고 성까지 넬슨으로 바꾸었다.[69] 노골적인 영국 찬양과 전쟁 참가 독려로 고립주의 당시의 미국에서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70] 영화에서는 뉴비라서 대부분 원거리 촬영이 많았다.[71] 항상 저돌적으로 전투에 임했다는 것, 그리고 어느 추운 날에 부하가 코트를 입으라고 했을 때 애국심 때문에 안 춥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