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0:38:32

다이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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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무로마치 시대 ~ 센고쿠 시대4. 에도 시대5. 메이지 유신 이후6. 일과표7. 목록8. 매체에서9. 한국 정치에서의 비유적 의미

1. 개요

다이묘([ruby(大,ruby=だい)][ruby(名,ruby=みょう)])는 중세 일본의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2. 설명

다이묘라는 칭호는 본래 '오오나누시'([ruby(大,ruby=おお)][ruby(名,ruby=な)][ruby(主,ruby=ぬし)])라는 단어가 변화하여 생겼다. '나누시'란 말 그대로 '이름을 가진 자', 즉 봉건사회에서 제대로 된 성씨를 칭할 수 있는 한 마을의 실권자를 뜻하고, 여기에 '크다'는 의미가 붙어 규모가 커지면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는 호족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1] 이것이 막부가 성립하고 무가사회가 되면서 많은 봉토와 부하를 거느리는 무사를 가리키는 의미가 되었다. 일정한 크기의 영토 이상을 소유하지 못한 작은 지역의 영주는 '쇼묘'(小名)라고 불렸다.

다이묘는 다스리는 영지의 쌀 생산량으로 구분되는데 이를 '고쿠다카'(石高, 석고)로 부르고,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고쿠다카 1만 석 이상은 다이묘, 그 미만은 하타모토(旗本)라 부르게 되었다. 1석은 쌀 150 kg 으로 통상 성인 1인의 연간 쌀 소비량으로 여겨진다. 영주가 농민으로부터 징수하는 세율은 센고쿠 시대에는 약 2/3(67%)로 대단히 세율이 높았다. 에도 시대에는 이 세금의 절반 정도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에게 바치고, 나머지 절반으로 영지와 군사를 운영했다. 즉 농민:영주:쇼군이 1/3씩 분배한 것. 나중에 평화가 정착되자 6공 4민으로 낮아지고 안정으로 인구가 늘고 경제가 좋아지자 번에 따라서 5공 5민이나 에도시대 말기에는 4공 6민이 확산되었다. 그래서 에도시대에 4공 6민하는 번은 선정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30% 정도로 낮아졌다.

1만석의 다이묘는 약 250명의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사정에 따라 군사력은 편차가 커서 평화시에는 100명 정도로 낮을 때도 있었다. 대략 성인 인구의 1~2.5%를 징병했다고 볼수 있다. 1석을 생산하는 토지는 현재가치로 약 10만 엔의 값으로 거래되었다. 1만 석의 토지면 약 10억 엔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이묘가 거느린 사무라이는 다이묘로부터 봉급을 받았다. 대략 10% 정도는 고위 관료로 직접 다이묘의 영지의 일부를 할당받아 그 영지에서 나는 쌀과 농작물을 받을 수 있었고, 80% 정도는 매년 3차에 걸쳐 다이묘의 창고에서 쌀 섬을 분배받았으며, 10~20% 정도의 하급무사는 금화 등 돈으로 봉급을 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인자가 되어 처음 일본 전국의 생산량을 조사했을 때 일본의 고쿠다카 총합은 대략 1,850만 석이었다고 한다. 또 전력을 다해 병력을 끌어 모으면 대략 30~40석당 병사 한 명이 나왔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대한민국 국군 수준으로 병력 밀도가 높아져 생업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100석당 병사 한 명선을 유지했다.[2]

3. 무로마치 시대 ~ 센고쿠 시대

무로마치 막부는 개개의 쿠니[国]를 막부에서 임명한 슈고 다이묘에게 찢어 주고, 막부가 있는 교토에서 거리가 먼 지역에는 넓은 범위를 통솔하는 탄다이(探題, 탐제)를 두었다. 또 중앙 교토에는 쇼군 다음가는 간레이(관령)를 두고, 간토(관동)에는 쇼군 대신 간토를 다스리는 간토 쇼군[4](관동 장군)을 두고, 간토 간레이(관동 관령)로 보좌하게 했다. 그러다 오닌의 난 등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지방 통치 능력이 쇠락함에 따라 이들 슈고쇼쿠(守護職, 수호직)를 부하이자 대리인인 슈고다이(守護代, 수호대)나 여타 다른 이유로 그 지방에서 힘을 얻은 세력이 힘으로 쳐 없애거나 실권이 없는 괴뢰를 옹립했다가 자기가 센고쿠(戦国) 다이묘에 오르는 이른바 센고쿠시대가 시작되었다. 드물지만 천황이 임명한 지방관인 고쿠시가 다이묘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센코쿠 다이묘로 등극하는 경로를 간략히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타케다는 헤이안 시대, 카와치 겐지 일족 신라사부로히타치 지역으로 온 뒤, 그 후손임을 자청하는 히타치노쿠니 타케다 영지의 호족 타케다 미나모토노아손 노부요시(武田-源朝臣-信義)가 카이 슈고에 임관된 것을 시조로 삼는 카이 겐지의 후손이다. 다케다 가의 다른 일족은 주고쿠의 아키 국, 호쿠리쿠의 와카사 국의 슈고를 지내기도 했다. 타케다 노부요시는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관동 겐지의 패권을 두고 다툰 인물 중 한명으로, 매우 유서 깊은 가문이다. 신라사부로의 자손 중 히타치에 남은 후예가 히타치 슈고 사타케씨다. 두 가문은 자기들이 요시미츠의 정통 후계자라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굳이 족보를 따지자면 사타케는 요시미츠의 장남의 후손, 타케다는 3남의 후손이 세운 가문이었다.

시마즈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오랜시간 같은 사쓰마 지방을 지배한 드문 케이스이다. 전국시대에 위기도 몇 번 있었지만[8] 처신을 잘 해서 넘어갔다. 시마즈가 속한 고레무네 씨족은 겐지나 다이라, 후지와라 등에 비하면 다소 밀리긴 하지만 역시 그 역사와 전통은 남들에게 밀리지 않는 헤이안 시대부터의 명문이었다.

오우치는 모두가 겐지와 헤이시를 자청하던 시대에 대단히 특이하게도, 백제 부여씨의 왕손임을 자청하는, 타타라노 쿠다라노코니키시(스오우노쿠니 타타라 지방에 영지를 받고, 백제건길지라는 카바네(골품)를 받았다는 뜻) 가문의 일파라고 주장한다. 오우치 문서 참조.

이마가와는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 義兼)의 후손 키라 오사우지(吉良長氏)가, 미카와 지방 이마가와 영지에 봉해지면서 분가한 명문으로 스루가 슈고며, 시조의 이름에서 딴 우지氏를 돌림자로 삼았다. 단, 요시모토義元는 쇼군가문의 돌림자인 요시義를 막부로부터 받아 썼다. 키라씨는 이시도씨, 시부카와씨와 함께 무로마치 막부의 3대 가문 중 하나였는데, 정확히는 막부 성립 이전의 당주였던 제4대 야스우지의 두 형제가 각각 미카와 키라씨와 오슈 키라씨로 분가를 이루었고 이마가와는 이 중 미카와 키라씨의 초대 당주였던 키라 오사우지의 차남인 쿠니우지의 대에서 시작하는 가문이었다. 사실상 야스우지의 아들 대에서 분기한 시바씨나 잇시키씨 등을 제외하면 무로마치 3관령가의 일원이자 아시카가의 분가였던 호소카와씨나 하타케야마씨보다도 아시카가 종가(쇼군가)에 가까운 일족이었다.

다테씨는 초기에는 지역의 유력 무사였으나, 다테는 가마쿠라 막부 시기부터 역사에 기록된 가문으로 오슈 탄다이 직과 무츠 슈고직 등의 관직을 역임해왔기에 실질적으로는 슈고 다이묘가 센고쿠 다이묘가 된 경우에 가깝다. 세력권이 오슈인 만큼, 오슈 후지와라의 후손을 자칭한다. 다만 다테 다네무네 대에 우슈의 요네자와시 일대를 획득하자 이곳으로 본거를 옮겨, 다테 마사무네가 잇키를 선동했다가 적발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몰수될 때까지 있었다.

호조 우지야스의 할아버지 호조 소운은 무로마치 막부의 간토 통치 기구라 할 수 있는 간토 구보 내에 내분이 일어나자 쇼군과 이마가와 집안의 도움을 받아 간토 구보의 일종인 호리고에 구보를 제거하고 세력을 쌓았으며, 아버지 호조 우지쓰나 대에 이마가와 집안에서 독립하고 점차 세력을 키워 마침내 호조 우지야스 대에 남아 있는 간토 구보인 고가 구보[9]간토 간레이[10]를 모두 몰락시켰다.

간토의 우에스기 겐신은 원래 나가오 가문[11]으로 에치고 슈고를 세습하는 에치고 우에스기 가문[12]의 슈고다이 집안이었는데, 아버지 나가오 다메카게가 주인 우에스기 후사요시를 쳐 없애고 우에스기 사다자네를 허수아비로 세워 센고쿠 다이묘화했다. 나중에 멸망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당주가 망명해오자 겐신이 그의 양자로 들어가서 우에스기 성[13]을 획득했다.

오다씨는 본래 에치젠 지방의 신관 가문 출신[14]으로 오와리와 에치젠을 다스리던 슈고 다이묘 시바씨의 당주가 당대 신관의 아들을 가신으로 삼아 오와리 지방의 슈고다이를 맡겼다. 이후 그 자손들은 여러 계통으로 쪼개져 자기들끼리 싸우면서도 슈고인 시바씨의 실권을 빼앗고 괴뢰로 만든 뒤 오와리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 시바씨의 가신 출신으로 에치젠을 빼앗은 게 아사쿠라 요시카게로 유명한 아사쿠라 가문이었다. 이쪽은 일찌감치 오닌의 난 때 동군과 에치젠 슈고직을 대가로 배반하는 약속을 맺은 것을 바탕으로 아예 에치젠 슈고직을 탈취했기 때문에 슈고 다이묘로도 취급된다.

이외에 아예 모반하여 모시던 주군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올라앉는 것을 '게코쿠죠'(하극상)라고 한다. 이것으로 유명한 자가 사이토 도산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의 다이묘들이었다. 또한 이들 센고쿠 다이묘 중 상당수는 지방의 이름없는 호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정통파로 취급되는 겐지(원씨, 미나모토씨), 헤이케(평가, 다이라씨) 등의 족보를 거짓으로 가져다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겐지나 헤이케는 무사 집안이지만,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천황가와도 인연이 닻기 때문에 전통적인 권위가 엄청나기 때문이었다.[15]

가이 다케다 가문은 전통적인 권위가 있는 슈고였지만 오닌의 난 전후 무렵에 슈고였던 당시의 당주가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한때 호족들에게 주도권을 뺏겨 바지사장으로 전락했다가 다케다 신겐의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의 대에 주도권을 되찾으며 권위와 실권을 회복했다. 그래서 신겐은 라이벌인 우에스기 겐신이 주인을 쳐 없앤 센고쿠 다이묘인 주제에 막부에게서 권위를 인정받아 슈고의 상위 직책인 간토 간레이로 임명되자 자존심이 상해서 평생 우에스기씨(본래 간토 간레이인 우에스기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로 부르지 않고 계속 원래 성인 나가오씨로 불렀다고 할 정도이다.

한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로 대군을 이끌고 진공한 것은 이마가와씨가 아시카가 쇼군가의 분가 중 하나로서 쇼군 계승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오와리를 넘어 교토까지 진군하여 정권을 획득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다이묘들의 존재를 알고 있어서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조선에선 다이묘를 클 거 자와 우두머리 추 자를 써서 '거추'(巨酋)라 기록했고, 이들이 보낸 사신을 '거추사'(巨酋使)라고 기록했다.[16]

4. 에도 시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중앙집권 권력을 강화하고, '막번 체제'를 만들었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는 고쿠다카가 1만 석 이상인 봉지가 있고[17] 쇼군으로부터 직접 영지를 하사받는다는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세력이 큰 다이묘의 가신 중에는 다이묘로부터 하사받은 봉지가 1만 석 이상이 될 수도 있지만[18] 쇼군에게 직접 하사받은 게 아니라 다이묘가 재분배한 것이기 때문에 다이묘라고 하지 않는다. 쇼군에게 직접 봉지를 받았지만, 영지가 만 석 미만인 자들은 하타모토(旗本)라고 한다. 이들은 쇼군의 직속가신[19][20]이며, 쇼군을 직접 알현할 자격이 있었다. 더욱이 다이묘의 가신들이 아무리 봉지로 받은 땅이 많다고 하더라도, 고쿠다카가 20~30석에 불과한 하타모토보다도 원칙적으로는 낮은 신분이었다. 아무리 적은 고쿠다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쇼군이 직접 임명한 영주이기 때문이다. 하타모토 밑에는 고케닌(御家人)이라는 계급이 있었다.

다이묘의 영지를 가리키는 비공식적인 용어로 이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에도 막부 시절 대부분에는 통칭에 머물러 쇼군은 번이 아닌 다이묘 본인이나 다이묘 가문에 명령을 내렸지만, 판적봉환-폐번치현 사이의 2년 동안에는 공식적인 용어가 되었다.

에도 막부의 다이묘는 세 가지 구분이 있었다.
  • 신판(親藩) 다이묘
    한국식 독음으로 친번 다이묘라고도 하며, 이들이 다스리는 번을 (도쿠가와) 친번이라고 한다. 도쿠가와씨, 마츠다이라씨 등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계에 속하며 군사적 요충지를 영지로 장악한 영주들이었다. 이 신판 다이묘 중에서도 특히 중요성이 높은 다이묘들이 이른바 고산케로, 쇼군의 후계자를 정할 수 없을 때에 후계자를 배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21]
  • 후다이(譜代) 다이묘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에 속했거나, 신판이나 도자마가 아닌 다이묘이다. 후다이 다이묘들은 영지 자체가 크지는 않았지만[22], 막부의 고위 관료직인 로주 자리를 자주 차지하는 등 막부 실무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았다. 신판 다이묘와의 차이점이 이것으로 신판 다이묘는 종친이였기 때문에 격 문제나 견제 등으로 인해 이런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 도자마(外樣) 다이묘
    모리, 시마즈 등 도쿠가와에 저항하던 적대 다이묘 또는, 비교적 최근에 복속한 이들로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을 근거로 하였다. 위험분자들을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 혹시 모를 반란에 대비할 시간을 확보할 의도라는 설이 있지만 정작 조슈의 모리, 사쓰마의 시마즈 등은 원래 센고쿠 시대부터 자리잡았던 본거지를 유지하여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23][24]

도자마 다이묘의 경우 출신 성분이 성분인 만큼 막부의 탄압을 받았다. 가령 명목상 서군 총대장을 맡았던 모리 가문은 120만 석을 29만 8천 석[25]으로 감봉되는 처벌을 받았다.[26] 이는 조슈 번이 막말 토막파의 선봉에 서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모든 도자마 다이묘가 조슈처럼 박한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에 서는 등 도쿠가와와 직접적으로 적대한 적이 없는 도자마 다이묘들은 준 후다이, 신판 대접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카가 번 100만 석으로 유명한 마에다 가문이나 다테 마사무네의 다테 가문. 마에다 가문은 아예 의전서열에서 고산케, 고산쿄 바로 다음에 위치해 마츠다이라 친번 다이묘들까지도 뛰어넘는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사쓰마의 경우 다소 애매한데, 막부 초기에는 박한 대우를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모리처럼 영지를 대폭 뜯긴 것은 아니었던 데다, 막부 후기로 갈수록 나름대로 좋은 관위나 예우를 받고 막부의 외척이 되기도 하는 등 완전히 푸대접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주로 규슈를 비롯한 서남부나 도호쿠 등 에도와 먼 곳에 자리잡은 도자마 다이묘들은 이미 개발된 간토나 키나이 등 막부 직할령, 신판/후다이 다이묘령에 비해 명목상 석고는 낮았지만 큰 개발 잠재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조슈 번은 명목상 30만 석 정도였다가 모리 가문의 지속적인 개발로 막말에는 실질 100만석의 강력한 번으로 성장했으며, 다테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에게 100만 석을 주겠다는 약속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센다이 번을 실질 100만석으로 키워내기도 했다. 막부에서도 이를 좌시하지는 않고 중규모 영주에 대해서는 개역이나 전봉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견제했으며,[27] 20만 석 이상의 도자마 다이묘들은 영지가 에도로부터 멀긴했지만 에도성 방문 때 별도로 특별대우를 받는 등 표면상으로는 막부 내내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고키시치도에서 율령국 하나 이상을 통째로 영지로 가진 다이묘들을 고쿠슈(국주, 国主) 또는 혼쿠니모치(본국지, 本国持), 율령국 하나를 지배하지는 않지만 고쿠슈와 비슷한 힘을 가진 다이묘들을 타이신 쿠니모치(대신국지, 大身国持), 고쿠슈에 준하는 격의 10만 석 수준의 다이묘들을 준쿠니모치(準国持) 또는 준고쿠슈(準国主)로 따로 예우하기도 했다. 마에다, 시마즈, 모리 등 고쿠슈 10~12가문,[28] 다테, 호소카와, 나베시마 등 타이신 쿠니모치 약 10가문, 타치바나, 니와 등 준쿠니모치 3가문이 있었으며 일부 마쓰다이라 가문들을 제외하면 모두 도자마 다이묘에 해당했다.[29] 이들은 최소 10만 석, 보통 20만 석 이상을 석고로 가졌고 고쿠슈, 타이신 쿠니모치-준고쿠슈-성주(城主)-성주격(城主格)-무성(無城)으로 이어지는 에도 막부 다이묘 서열에서 최고위에 위치하는 대가문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율령국의 태수(고쿠시, 国司)를 자칭하는 특권을 가지기도 했다.

다이묘들이 쇼군을 알현할 때의 대기실인 시코세키(伺候席)를 예로 들면, 가장 상석에 해당하는 오오로카세키(大廊下席)를 고산케, 고산쿄 등 쇼군가와 가장 가까운 친족들이 채웠고, 마에다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로서는 유일하게 종3위 참의 관직을 받고 오오로카세키에 포함되었다. 아이즈, 타카마츠 등 일부 마츠다이라 가문과 후다이 다이묘의 필두격인 히코네 이이 가문 등은 고쿠슈 다이묘들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관위를 가졌고 쇼군의 집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타마리즈메(溜詰)에 따로 배정되어 쇼군의 최측근으로서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그 다음으로 높은 관위 및 의전을 받은 것이 종4위하(従四位下) 관위를 부여받은 고쿠슈 가문들로, 오오히로마세키(大広間席)를 배정받았다. 고쿠슈 다이묘들은 다른 다이묘들과 달리 가독을 상속하자마자 종4위하를 보장받았다.

영지의 삭감이나 개간으로 인해 구체적인 수치는 달라지지만, 에도 막부의 쇼군의 경우 대략 300~400만 석에 이르는 영지를 직할로 다스렸다. 게다가 수족과 같이 부릴 수 있는 하타모토들에게 나눠준 영지가 300만 석 정도였으니, 실질적으로는 600만 석 이상의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 반면 가장 넓은 영지를 보유했던 몇몇 다이묘들의 영지는 100만 석 정도였으니[30] 일개 다이묘로서 쇼군에게 반항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면 영지를 몰수당하는 게 일상다반사였는데 그나마 막부가 정착하면서부터는 죽이거나 평민으로 강등하지는 않고 영지 몰수 뒤 그대로 무사 지위를 유지하게 하는 게 일반적이며,[31] 운이 좋으면 중앙으로 불러 하타모토로 삼았다. 다만 이것은 비교적 세력이 작으면서 에도와 긴키에서 멀지않은 지역의 다이묘들 이야기이고 막부 극초기를 제외하고 20만 석 이상의 도자마 다이묘가 전봉되거나 가이에키된 사례 자체가 없다. 사실 막부 역시도 가이에키를 자제해야 했는데 왜냐면 가이에키 한번 할 때마다 대량의 실업자, 그러니까 로닌이 발생하는데 이 로닌들은 막부에 대한 불만이 커서 틈만나면 반란을 일으켰기에 에도시대 내내 사회문제였다.

또,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미츠 때부터 일종의 인질제도인 참근교대라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수도에 다이묘의 가족을 모아놓아[32] 반란을 통제했고[33] 1년을 주기로 다이묘 본인이 일정기간 에도에 머무르며 쇼군을 알현하고 정무를 보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게 했다. 이것은 다이묘 돈을 소모하며 영지와 수도를 오가게 하여 그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다.[34] 이러한 경우 인질이라고 하더라도 높은 신분 간 거래에 가까웠기 때문에 인질의 취급이나 대우가 상당히 정중했고, 일정구역 안에서는 불편함 없이 살곤 하였다.[35]

그런데 이런 다이묘의 에도 행차 행렬은 일종의 다이묘들의 세력과시이기도 해서 다이묘들은 수천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화려한 행차를 해서 재력을 과시했다. 오히려 막부에서 지나친 재력과시 경쟁을 막기위해 번의 고쿠다카에 따라 수행원의 규모를 제한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러한 다이묘의 행차의 정례화와 과시는 지방과 에도 사이의 교통과 문화와 경제 교류를 증대시키고 행차가 지나가는 역참지마다 상업을 번성하게 하고 에도의 소비문화를 꽃피우는 등 긍정적 효과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적으로 막부가 약해지자 지방 번들이 점점 강해지면서 이전처럼 다이묘들에게 강경책을 쓰기는 점점 어려워졌고[36],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감시하기에도 불리해지는 역효과가 있었다. 결국 막부 말기로 가면 다이묘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참근교대 등의 규제도 완화하는 식으로 타협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막말의 시마즈, 야마우치 등 도자마 다이묘들은 정작 친 막부 성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이미 도쿠가와 쇼군가와의 혼맥으로 막부에서도 권세가 있는 가문이었고 다이묘들의 본가는 이미 오랫동안 에도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다이묘 자리를 물려받으면 일정기간씩 영지로 내려가서 집무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번의 하급무사들과는 인식의 차이가 상당히 있었다.

5. 메이지 유신 이후

막부에서 어느정도 타협을 했음에도 유력 다이묘들은 막부 전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앙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야심을 표출하게 되었다. 결국 미토학으로 대표되는 존황양이 이념을 내세운 조슈, 사쓰마, 도사 같은 대형 도자마 다이묘들이 거느린 번의 하급 무사들(下士)들과 결합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후일 에도 막부 타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메이지 신정부는 하급 무사들이 장악했으니 죽 쒀서 개 준 꼴로도 볼 수 있다. 신정부에서는 판적봉환 이후까지 다이묘들이 갖고 있던 각 번의 지사직을 폐번치현으로 몰수하고 도쿄로 소환했으며 대신 중앙에서 현령(후에 현지사로 바뀜)을 임명하게 되었다.

이는 다이묘들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니였다. 지속되는 참근교대로 인해 번의 재정은 상당히 고갈된 상태였고, 무엇보다 참근교대와 함께 정식부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소생들은 에도의 인질로 보내진 반면 번에는 첩을 두면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소생들간 내분이 생기기도 했다. 친자녀들과 서자들 모두 계승권을 갖고 있어 번주 사망시 후계자 지위를 두고 에도에서 자란 정실 소생과 함께 지내왔던 가신들의 파벌과 첩의 소생과 가까이하던 가신들로 분열되어 내분을 겪기도 했다. 그런 여러 애로사항이 존재했기 때문에 수많은 다이묘들이 지번사 직책을 미련없이 반납했다.

대신 예전에 모신 주군들에게 공작, 후작 등 화족 작위를 수여하는 등 어느 정도 대우는 해 주었고, 각 번의 빚은 중앙정부에서 탕감해주고 구 번 수익의 일부(10%)를 구 다이묘들의 몫으로 인정해 주었다.

대형 번으로 공후백 급 상위 작위를 받은 가문들보다도, 지방에서 작지만 알짜배기 가업들을 대물림하며 지방 유지가 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방 토호로 이름을 떨치는 가문들도 많다. 그중에서는 지역의 참의원, 중의원 등에 출마하여 일본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사타케 노리히사 현지사를 배출한 아키타현의 사타케 가문을 들 수 있다. 사타케는 원래 히타치 54만 석을 다스리는 가문이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참가, 패전 후 아키타현 20만 석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무진전쟁 때는 처음에는 막부군을 편들다가 나중에 정부군으로 전향한 이후 화족이 되었고, 현재까지 위세를 누리고 있다.

다이묘 후손들의 근황들을 모은 글 링크 모음

6. 일과표

  • 다이묘를 비롯한 전국시대 무장들의 하루 일과표이다.
시간 업무가 있는 날 업무가 없는 날
오전 4시 기상
오전 4시 30분 순찰
오전 5시 간단하게 몸을 씻고 예불을 한다.[37]
오전 5시 30분 몸단장을 하고 가신에게 업무를 지시한다.
오전 6시 출근한다.[38]
업무 내용이나 업무 시간은
직무, 신분에 따라 다양하다.[39]
출근하지 않는다.
오전 8시 아침 식사
오전 9시 신분이 높은 무장
● 영지 관리
● 잡무
● 초대 손님 접대
신분이 낮은 무장
● 잡무
● 식량을 얻기 위한 부업[40]
오후 2시 저녁 식사[41]
오후 6시 문을 닫고 방문객을 받지 않는다.
오후 7시 저택 내부를 순찰하고 불씨를 관리한다.
오후 8시 취침

다이묘들은 심하면 새벽 2시 30분 정도에 기상하는 경우가 있고 늦어도 새벽 5시 이전에는 무조건 기상하는 대신 취침시간이 매우 빨랐다. 그 이유인 즉 언제 야습을 당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42] 휘하 아시가루들은 오늘날 현대인과 비슷한 일과시간을 보내지만, 사무라이 이상이면 이렇게 취침시간과 수면시간을 아시가루들보다 앞당겼다.

사실 일본 다이묘들의 수면시간은 그 당시 기준으로는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동시기 조선에서도 임금은 보통 밤 11시에 자서 오전 5시쯤에 일어났으며, 선비들은 밤 9시쯤 잠자리에 들어 오전 2-3시에 일어났다. 농부들도 보통은 오전 4시에는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수도자들은 빠르면 오전 2시, 늦으면 4시쯤 일어났고, 소작농들도 오전 3-4시에 일어났다. 현대보다 밤이 어둡고 밤을 보낼 만한 놀거리도 별로 없는 시대라 현대인들보다 훨씬 일찍 자서 일찍 일어나는 것이 그 시절에는 기본이었다. 말 그대로 해가 떠 있는 시간에만 사람들이 활동했다. 오히려 당시 시대 기준으로는 다이묘들이 일찍 자는 것이 아니라 아시가루들이 늦게 자는 셈이다.[43]

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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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매체에서

  • 스타워즈 시리즈의 등장인물, 보바 펫타투인 행성을 이전 지배자[44]로부터 빼앗고는 타투인의 다이묘라 스스로를 칭한다.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받은 스타워즈 시리즈다운 부분.
  • 게임 포 아너에서는 몇몇 다이묘들이 혼란기를[45] 틈타 군세를 일으키는 바람에, 이들을 제압 및 회유하는 것이 사무라이 진영 캠페인의 주된 스토리다.
  • 2024년에 개봉한 파묘의 오니는 원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사한 어떤 다이묘란 설정이다. 생전에 맹장으로 이름을 떨쳐 사후에 신으로 모셔지다가, 이후 여러 사정으로 한국에 유해가 옮겨지며 백두대간의 지박령으로 전락해버렸다.

9. 한국 정치에서의 비유적 의미

한국 정치에서 특정 지역구에 여러번 당선되어 해당 지역 내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거나, 비슷한 경력을 가진 부모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당선되거나 하면 다이묘라고 빗대기도 한다. 이런 다이묘 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낙선하면 그만큼 지역의 정치 성향에 큰 변화가 있거나, 소속된 정당이 민심을 크게 잃은 등의 증거로 제시될 수 있다. 반대로, 정당과 상관없이 선수를 쌓아온다면 이 '다이묘'에 요건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는데, 당적을 변경한 조경태나 두 차례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윤상현 등이 예시로 꼽힌다.


[1] 본래 성씨란 중국, 한국과 같은 방식이었고, 헤이안 시대의 성씨들은 대개 미나모토(겐지), 타이라(헤이시) 하는 식으로 그저 성씨일 뿐이었지만, 봉건사회가 성립되면서 서양에서처럼 자신이 소유한 장원과 영토의 이름을 따서 성씨를 지었다. 본래 쓰이던 성씨가 씨(氏)라면 새로 등장한 봉건사회의 이름은 '묘지'(苗字)라고 불렸고, 이후 성씨는 아주 고상하게 이름을 부를 때나 사용되었다. 가령 겐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옛날스럽게 호칭하면 '미나모토노 이에야스'다. 일본인의 성씨에 밭 전(田)이나 들판 원(原) 같은 한자가 많은 것도 이렇게 지명에서 유래한 '묘지'이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홍길동이란 성명은 족보상이나 공식 석상에서나 쓰고 평소에는 본관을 성씨 대신 써서 남양길동이라 불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2] 좀 더 세심하게 따져보면, 당시 일본에서 쌀 1석은 성인 남성 1명이 1년간 먹는 양에 해당하는 단위였으므로 고쿠다카 1석은 곧 인구 1명의 부양력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다. 이 기준에서 보면 100석당 병사 한 명(인구의 1%) 선이던 평시의 병력 비율이야말로 대한민국 국군 수준(인구 5천만 중 현역 48만명)과 비슷한 수준이고, 전력을 다해 30~40석당 한 명 기준으로 끌어모을 경우 병력 비율이 인구당 2~3% 수준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병력 밀도보다 훨씬 높고, 북한군의 병력 밀도(인구 2,500만 중 128만명 추정)에 상당히 근접한다.[国] 당시 일본에서의 이 글자의 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주권국이 아닌 '도' 정도의 의미에 가까웠다.[4] 간토 쿠보(관동 공방), 가마쿠라 쇼군(쿠보)이라고도 한다.[5] 원래는 보소 헤이시 방계 에치고 나가오 가문.[6]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가.[7] 단,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데뷔 장소는 이즈 반도[8] 규슈 통일을 눈 앞에 뒀다가 도요토미군에게 항복할 때,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 정국에서 하마터면 몰락할 뻔 했다.[9]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가문[10] 야마노우치·오기가야쓰 양 우에스기 가문.[11] 간무 헤이시 타카모치류 반도 헤이시 8분가(카즈사씨, 치바씨, 미우라씨, 카지와라씨, 치치부씨, 오오바씨, 도히씨, 나가오씨) 중 하나. 본디 사가미 지역 나가오 장원에 봉토를 받아 거기서 성씨를 따왔지만, 후손들이 흘러흘러 에치고에 정착했기에 에치고 나가오씨라고 부른다. 타카모치류 간무 헤이시는 반도8헤이시 이외에도 이세 헤이시의 일파가 칸사이에 정착한 후쿠하라 헤이케, 쿠니카(国香)류 나오카타(平直方)가 타카타군 북조 지역에 정착한 걸 기원으로 삼는 카마쿠라 싯켄 호죠 가문을 포함하는 등, 도저히 한 가족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다.[12]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지류.[13] 본래는 교토 후지와라 홋케(北家)의 방계귀족 칸슈지(勧修寺)류의 일파로, 카마쿠라 막부 6대 쇼군과 함께 관동으로 왔다가 무사로 변신해 관동에서 눌러 앉은 것을 기원으로 한다.[14] 후쿠이 현에 있는 츠루기 신사로 오늘날에도 존재한다.[15] '신적강하'라고하여 천황가의 인물이 결혼 등의 이유로 본적을 이탈하거나 일정 촌수 이상 떨어진 방계가 되면 미나모토(겐지)나 다이라(헤이케) 등의 성씨를 택하고 가문을 새로 건립했다. 그렇다보니 같은 겐지씨라도 세이와 겐지, 무라카미 겐지 등 서로 별개의 가문이었으며, 또 같은 계열 출신이더라도 근거지로 삼은 지역에 따라 파벌이 나뉘어졌다.(대표적으로 세이와 겐지는 카와치 겐지, 셋츠 겐지, 카이 겐지 등으로 나뉘어졌다.) 물론 혈연적으로는 상당히 멀어서, 사실상 덴노가와 인연이 있는 별개의 가문들이다. 그래서 천황가와 연이 닻는 가문이라 할지라도 몇 대 정도 내려가면 조정에서의 위치도 같이 내려갔다.[16] 이들 다이묘들은 조선에 선물을 바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태종-세종의 골칫거리였던 코끼리가 있다.[17]고쿠다카가 0인 다이묘가 하나 있었다. 홋카이도 남부 마츠마에 번을 다스린 마츠마에 씨로, 홋카이도 기후 특성상 당시 농법 기준으론 쌀이 자라지 못해 쌀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재는 고쿠다카는 無였다. 그러나 아이누들과의 교역으로 수익을 냈기 때문에 1만 석 격(格)의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그 외에도 쓰시마 섬을 다스리는 소(宗)씨도 실제로는 쓰시마가 원체 험한 산지라 고쿠다카가 1만 석보다 훨씬 적었지만 마찬가지로 조선과의 무역을 사실상 독점했기 때문에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또한 키츠레가와(喜連川) 번을 다스렸던 아시카가씨는 5천석에 불과해 하타모토급이었지만, 막부에서 옛 무로마치 쇼군에 대한 예우로 10만 석 격 다이묘로 인정해주었다.[18] 다이묘마다 제각각이긴 하지만 다이묘의 영지 내에서도 다이묘가 직할하는 경지는 전체의 20%에서 아주 많아야 50% 미만이었다.[19] 다이묘도 형식상으론 쇼군의 가신이다. 쇼군을 대통령이라고 놓고 본다면, 각부에 장관들을 임명하여 보내듯 다이묘들이 각자 맡은 영역에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반면 대통령의 업무를 직속 보좌하기 위한 청와대 수석들이 있듯, 하타모토들이 쇼군을 곁에서 보좌한다. 대외적으로는 장관(=다이묘)들의 명망과 지위가 훨씬 높으나, 주요 업무 수석(=쇼군 직속 하타모토)들이 권력 최측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듯, 서로 동렬에 놓고 평가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20] 이들이 지방을 다스린다는 점에서는 다이묘는 시장, 하타모토는 군수로도 비유할 수도 있다. 시가 군보다 더 많은 인구와 발전된 지역을 담당하며 시 중에서 일부 읍면동은 군보다도 더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지만 원칙상 군은 아무리 인구가 적더라도 시와 동급의 기초자치단체다.[21]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이렇게 해서 쇼군이 되었다.[22] 가장 강력한 후다이 다이묘였던 이이 가문의 히코네 번의 명목 석고가 30만 석이었고, 쇼나이나 히메지 코리야마 등 그 다음으로 큰 후다이 번들은 명목 석고가 20만 석에 채 미치지 못했다.[23] 시마즈 같은 경우 오히려 너무 멀어서 세력권을 인정해주는 선에서 타협한 것으로 볼 수 있다.[24] 다만 모리는 조슈를 전에도 영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 서쪽에 있는 영지는 전부 몰수했다.[25] 이후 1610년 검지에서 36만 9천 석으로 재조정[26] 실제로는 무능한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 배신자 킷카와 히로이에, 배신자가 길 막고 있다고 도시락 먹는다는 핑계를 대다 도망간 모리 히데모토 등 모리 가문은 오히려 동군의 완승에 일조했다. 하지만 실제 전과와 별개로 엄연히 이들은 적군 수뇌부였다. 이에야스는 원래 모리 가문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고, 가이에키(개역)까지 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킷카와 히로이에와 도쿠가와 세력 간 밀약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모리 가문을 가이에키하고 히로이에에게 모리의 옛 영지 상당 부분을 떼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를 안 히로이에가 자신이 받기로 되어있던 영지를 데루모토에게 돌리면서까지 그를 살리려고 노력하였기에 가이에키까지는 가지 않았다. 모리에게 남겨진 조슈 번은 원래는 이에야스가 히로이에에게 주려고 했던 영지였다.[27] 가문 총 영지가 수십만 석에 달하는 대형 번의 경우 상속 시 형제간의 다툼 방지, 혹은 번 행정 합리화 등을 목적으로 가문 내에서 분할상속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중앙에서 쇼군은 이를 용인하였다가 나중에 꼬투리를 잡아 영지를 조금씩 뜯어가며 대형 도자마 가문들을 견제하기 일쑤였다.[28] 에도 시대를 거쳐 도도 다카토라의 후손인 츠 번 도도 가문, 마쓰에 마쓰다이라 가문 등 2가문이 추가되었다.[29] 이들 중 대부분이 명예 칭호로 마쓰다이라 성씨를 수여받았다.[30] 명목상 석고는 마에다 가문의 카가 번이 유일하게 102만 석으로 100만 석을 넘었고, 친번, 도자마, 후다이를 안 가리고 나머지는 모두 75만 석을 넘지 못했다. 메이지 시대에 측정된 실제 석고로 따져도 카가 번과 다테 가의 센다이 번, 모리 가의 조슈 번 셋만이 100만 석 규모였다. 그나마 이에 준할 만한 번도 시마즈 가의 사츠마 번, 고산케의 일원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의 오와리 번, 나베시마 가의 사가 번 정도고 나머지는 50만 석은커녕 10-20만 석인 번도 태반이었다. 다만 재미있는 점은 유력 도자마 다이묘의 경우 친번이나 후다이보다 세력이 큰 데다 영향력도 강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주로 큐슈 등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묘들이 해당되었다.[31] 이 경우도 당사자는 할복해야 했다. 보통 끌고 와서 참수하고는 그냥 서류에만 할복으로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이는 당시 제대로 할복할줄 아는 사람이 적어서였다.)[32] 따라서 막부 시절 초기 다이묘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다이묘들의 고향은 '에도'였다.[33] 한국에서는 신라상수리제도, 고려기인제도가 이와 비슷하다.[34] 물론 괴롭히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실제로 이 과정에서 전국으로 물자가 돌기 때문에 그만큼 지역 불평등이 완화(?)되는 효과가 있었다.[35]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이런 형태의 인질은 많지만 양측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나빠지지 않는 이상 최상급 대우를 받으면서 지내고 최고급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는 인질을 잡고 있는 입장에서도 잘 대우해 주어서 인질이 가독을 계승했을때 자신의 영지나 국가보단 인질로 지낸 지역에 애착을 가지게 되고 동맹세력이 되기 때문이었다.[36] 오히려 후기로 갈수록 도자마 다이묘들은 막부가 먼 지방을 통치하는 데 중요한 기둥 역할을 하게 된다. 막부에 저항한 조슈 번(長州藩)을 토벌했다고 해서 여러 세대 동안 에도에 거주한 영향으로 비교적 친막부 성향에 가까워 지방을 통제 가능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모리 가문을 가이에키 한다는 것을 막부가 상상하기 힘든 입장이 된다.[37] 고니시 유키나가 같이 종교가 가톨릭인 다이묘는 예불 대신 미사를 가졌다.[38] 이 때문에 업무가 있는 날 다이묘는 항상 도시락을 싸갖고 출근해야 했으며 이것만 전담하는 전속 요리사를 두는 다이묘도 있었다.[39] 로주나 봉행 같은 중앙 관료는 중앙 또는 근무지로 출근해서 일본 전체에서 자신의 분야에 해당되는 업무를 담당한다.[40] 농담이 아니라 농사는 사무라이들의 부업 중에서도 높은 축에 속했다. 사농공상의 신분사회에서 상업을 천하게 취급했기 때문이다.[41] 점심이 아니라 저녁인 이유는 당시 다이묘를 비롯한 무장들은 극단적일 정도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다.[42] 때문에 더 나아가 잠자리도 매일 바꿨다. 가장 신임하는 부하가 아니면 어디서 자는지 알 수 없었고, 부하가 잠자리를 마련해도 갑자기 다른 방에서 자는 등 극단적으로 위치가 새어 나가는 걸 방지했다.[43] 다만 오후 2시에 저녁을 먹는 지배층들은 세계적으로 다이묘들 외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조선에서 임금은 왕은 하루 5끼를 먹었는데 이른 점심, 저녁을 정식 수라로, 그 전후 및 사이 3끼는 간단히 먹었다. 보통 사람들은 아침과 저녁 2끼로 현대인이 먹는 패턴과 비슷하게 먹었다.[44] 오리지널 트릴로지에서도 나왔던 빕 포르투나다.[45] 바이킹의 약탈과 기사단의 침공으로 덴노가 죽고, 영역의 상당 부분을 잃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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