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도시에 대한 내용은 아시카가시 문서 참고하십시오.
[ruby(足,ruby=あし)][ruby(利,ruby=かが)][ruby(氏,ruby=し)] 아시카가씨 | |
<colbgcolor=#6c2c2f> 아시카가 가문의 가몬 | |
아시카가 두 개 줄 足利二つ引 | |
본성 |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카와치 겐지) 요시쿠니류(義国流) |
가조 | 아시카가 요시야스(足利義康) |
종별 | 무가(武家) 화족(華族)(자작) |
출신지 | 시모츠케국 아시카가군 아시카가 장원 (下野国足利郡足利庄) |
근거지 | 야마시로국 교토시 가미교구 사가미국 가마쿠라 |
지류 분가 | |
당주 | 키츠레카와계 : 제27대 아시카가 코헤이(足利浩平) 히라시마계 : 제29대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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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이와 덴노의 아들들이 신적강하해서 만들어진 세이와 겐지의 일족 중 카와치 겐지 가문의 방계이다. 시조는 세이와 덴노의 8세손인 미나모토노 요시야스(源義康, 1127 ~ 1157).[1]8대 동량인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시작으로 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마지막으로 무로마치 시대와 전국시대에 일본을 지배했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가문이었다.
2019년 12월 기준 약 3,400여명이 사용 중인 성씨다.
1.1. 실존 인물
-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들에 대해서는 역대 무로마치 막부 쇼군 틀 참고.
1.2. 가공 인물
2. 후예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마지막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한 후, 요시아키의 두 아들이 모두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고 환속(還俗)하지 않은 채로 사망함으로써 요시아키의 직계 혈통은 끊어졌다. 그러나 요시아키 직계는 단절되었지만 키츠레카와, 히라시마 같은 아시카가의 분가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3. 분가
- 어일가(御一家)[5]
- 키라(吉良): 3대 동량 요시우지의 아들 오사우지(長氏)의 자손(미카와 키라)과 요시쓰구(義継)의 자손(오슈 키라).[6]
- 시부카와(渋川): 4대 동량 야스우지의 아들 요시아키(義顕)의 자손.[7]
- 이시도(石塔): 4대 동량 야스우지의 손자이자 양자 요리시게(頼茂)의 자손.
- 삼관령(三管領)[8]
- 시바(斯波): 4대 동량 야스우지의 아들 이에우지(家氏)의 자손.
- 하타케야마(畠山): 2대 동량 요시카네의 아들 요시즈미(義純)의 자손.
- 호소카와(細川): 초대 동량 요시야스의 아들 요시키요(義清)의 손자 요시스에(義季)의 자손.
- 사직(四職)[9]
- 그외
[1] 호겐의 난에서 공적을 세워 관위가 종5위하까지 상승했지만 몇 개월만에 병으로 31세에 급사했다.[2] 본명 아시카가 스미레[3] 본명 아시카가 하츠나[4] 대외적으로는 아시카가 오우카이나 스스로는 무라사키 가문의 오우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어서 무라사키 오우카가 본명에 가깝다.[5] 아시카가 쇼군가에 다음가는 가격을 지니고 본가인 아시카가 가문의 대가 끊길 시 계승 서열이 최상위인 가문. 삼관령가보다도 격이 높은 가문들이었으나 때문에 정치 관여나 영지 세습에는 제한을 받았다.[6] 하타케야마씨와 함께 호조슈 직위를 세습했다.[7] 이마가와 사다요의 해임 이후 규슈 단다이직을 세습했다.[8] 무로마치 막부에서 쇼군 다음가는 역직인 관령직에 임명될 수 있던 3개의 가문. 이들 중에선 종법 질서상 호소카와의 가격이 가장 낮았으나 후일에는 호소카와씨가 아예 관령직을 세습할 정도로 실권은 호소카와가 필두였다.[9] 막부의 군사와 치안 담당기구인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장관직에 임명될 수 있던 4개의 가문.[10] 나머지 사직 가문은 아시카가의 지파가 아님.[11] 사직(四職)이나 막부 정치 참여가 인정된 7개 가문인 칠두(七頭)에 종종 포함되기도 한다. 도토미와 스루가국의 슈고직을 세습했다.[12] 우슈 단다이직을 세습했다.[13] 오슈 단다이직을 세습했다. 허나 이후 다테씨에게 지위를 빼앗기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