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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시나카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源義仲
파일:미나모토노 요시나카.jpg
<colbgcolor=#021f70> 출생 1154년
사망 1184년 1월 20일
참전 겐페이 전쟁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거병2.3. 카와치 겐지의 불안한 동맹2.4. 쿠리카라 고개의 싸움2.5. 헤이케의 교토 탈출2.6. 기소 요시나카의 상경2.7. 미즈시마 전투2.8. 홋슈지 전투2.9. 우지가와 전투2.10. 요시나카의 최후
3. 평가4. 기타5.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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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

통칭 기소 요시나카(木曽義仲) 또는 아사히노[1] 쇼군(朝日将軍 또는 旭将軍)으로 불린다.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호쿠리쿠(북륙) 지방에서 거병하여 카와치 겐지 측에 선 무사들을 이끌고 헤이케교토(당시 일본의 수도)에서 쫓아내는 큰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고시라카와 법황, 그리고 가마쿠라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대립하면서 입지가 약화되었다. 결국 요리토모의 대군을 이끈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게 패배하여 죽었다.

2. 생애

2.1. 출생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세이와 겐지의 본가인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為義, 1096 ~ 1156)의 차남 미나모토노 요시카타(源義賢, ? ~ 1155)의 차남으로 1154년에 태어났다. 미나모토노 요시카타의 형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1123 ~ 1160)였는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아버지였다. 즉, 요시나카는 요리토모, 요시츠네 형제의 사촌이었다.

《존비분맥》(尊卑分脈)이라는 책에 따르면 요시나카의 어머니는 유녀(창녀, 기생 등)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요시나카가 태어난 이듬해인 1155년 8월 16일, 요시나카의 아버지 요시카타는 무사시국 히키군(武蔵国比企郡)[2]에 있는 오오쿠라(大倉)의 저택에서 형 요시토모(義朝)의 장남인 미나모토노 요시히라(義平)에게 습격당해 살해되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요시카타는 형인 요시토모의 집안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영지 관련으로 마찰이 있었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요시히라는 화근을 없애기 위해 어린 사촌인 요시나카까지 죽이려고 했으나, 고아가 된 요시나카는 시나노 국(지금의 나가노 현)의 호족 나카하라 카네토오(中原兼遠, ?~ 1181)에게 맡겨졌다. 이 사람은 요시나카의 유모의 남편이었다. 근데 이 나카하라 카네토오가 살았던 신슈 기소 골짜기(信州木曽谷)라는 곳은 나가노 현의 남서부로 일본알프스라 불리는 산골짜기 지방이었다.

간단히 설명해서, 혼슈 지도를 보면 도쿄 서북쪽으로 혼슈가 불룩하게 부풀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 한 가운데 있는 곳이다(…). 즉, 요시나카가 처음에 이 산골짜기에 숨어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동족인 겐지에게 쫓겼기 때문이었다.

요시나카가 5살이었던 1159년, 헤이지의 난이 일어났다. 카와치 겐지 일족은 헤이케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참패하여 몰살되었고, 요시토모와 요시히라 부자도 목이 뎅겅 날아갔다. 요시나카는 이제 동족인 카와치 겐지에게 쫓길 염려는 없어졌으나, 헤이케의 세상이 되었으므로 오랫동안 산속에 머무르게 되었다.

2.2. 거병

1180년, 미나모토노 요시마사(源頼政)와 모치히토 왕(以仁王)[3]이 헤이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두 사람은 곧 헤이케에 밀려서 패망했으나 모치히토 왕이 각지에 내려보낸 명령이 카와치 겐지 일족에게 헤이케 타도의 명분을 주게 되었다. 8월에 간토에서 사촌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하여 승리를 거두자, 요시나카 역시 이에 자극을 받았다. 같은 겐지 일족으로서 라이벌 의식을 느꼈으며, 동시에 요리토모는 아버지 요시카타의 원수인 요시히라의 동생이기도 했으므로 적어도 요리토모와 동등한 '쇼군'으로서 활동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1180년 9월 7일, 요시나카는 형제처럼 자란 나카하라 카네토오의 자식들과 함께 거병을 하여 시나노국의 무사들을 모으고 있었다. 이에 헤이케 측의 호족이었던 카사하라 요리나오(笠原頼直)는 기소에서 벌어지는 불온한 움직임을 알고 토벌군을 움직였다. 이에 겐지 측의 호족인 무라야마 요시나오(村山義直)가 맞서 이치하라(市原)에서 싸우게 되었다. 요시나카는 이치하라 전투가 벌어진 뒤에 1,000여 명의 군세를 이끌고 지원에 나서 카사하라 요리나오의 헤이케 군대를 물리쳤다.

요시나카는 이후 아버지 요시카타의 영지였던 고즈케(上野)국의 타고군(多胡郡)(지금의 군마현이다.)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사촌인 요리토모가 이미 간토에서 세력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에. 막 봉기한 겐지 세력들끼리 충돌할 우려가 있었다. 요시나카는 타고군을 점령하는 것을 포기하고, 무사들만 모은 다음 다시 귀환하여, 호쿠리쿠 지역의 세력권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1181년, 신슈의 북쪽인 에치고국(越後, 니가타 현)의 호족 조 나가모치(城 長茂)가 헤이케의 명령을 받아 요시나카 토벌에 나섰다. 요코타가와라(横田河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적의 병력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요시나카는 책략을 사용했다. 별동대에게 겐지를 상징하는 하얀 깃발 대신에 헤이케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을 들고 도강을 하여 우회공격을 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헤이케군은 붉은 깃발을 보고 아군으로 착각하여 공격을 하지 않아 도강과 우회기동을 허용해버렸고, 이 순간 별동대는 갑자기 깃발을 바꿔들고 공세를 퍼붓는 한편 요시나카 역시 공격을 개시했다. 요시나카는 이 요코타가와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에치고국(越後, 니가타현)은 헤이케에서 이탈하여 요시나카에게 복속되었고, 여기에 놀란 에치젠국(越前, 후쿠이현 북부) 및 엣츄국(越中, 도야마현)까지 요시나카 측으로 붙게 되었다.

2.3. 카와치 겐지의 불안한 동맹

1183년 3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동생이었던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行家)가 조카인 요리토모와 대립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유키이에는 도망쳐서 또 다른 조카인 요시나카에게 의지해왔다. 요시나카는 유키이에를 보호했고, 자연히 요리토모와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요리토모가 위협을 가하자 요시나카는 장남인 요시타카(義高)를 인질로 보내고 협상을 했다. 결국 요시나카는 요리토모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요시타카는 요리토모의 장녀인 오오히메와 결혼을 하여 일단 카와치 겐지는 서로 화평하고 헤이케에 대항하게 되었다.

2.4. 쿠리카라 고개의 싸움

1183년 4월 17일, 헤이케는 호쿠리쿠 지역의 카와치 겐지 세력을 토벌하려고 했다. 이에 타이라노 코레모리(平惟盛)가 무려 100,000명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진격을 시작했다. 드디어 지역 호족이 아닌 헤이케 중앙군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4월 26일, 헤이케군은 요시나카의 지배하에 있던 에치젠 지역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히우치 성(火打城)에 가로막히게 되었다. 히우치 성에서는 헤이케의 대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강에 둑을 쌓고, 인공호수를 만들어 일단 진격을 막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성 내에서 대군을 보고 겁을 먹은 배신자가 발생했고, 인공호수를 무너뜨리는 방법을 밀서로 헤이케 진영에 전달하여, 결국 히우치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5월 3일, 카가국(加賀)이 헤이케군에 점령되자, 도야마 현과 이시카와 현의 경계에 있는 쿠리카라 고개(倶利伽羅峠)에서 요시나카는 5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헤이케의 대군 100,000명에 맞서게 되었다. 요시나카는 낮에는 싸움을 피하고, 한밤중에 군을 본대 40,000명, 분대 10,000명으로 나눈 다음, 분대를 우회시켜 배후에서 야습을 걸었다. 요시나카의 본대 및 후방에서의 분대에 포위되고, 북쪽이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헤이케군은 남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것은 요시나카의 계략이었다. 남쪽에는 쿠리카라(倶利伽羅)라는 계곡이 있었던 것이다. 한밤중이라 골짜기를 미처 보지 못한데다가 포위야습으로 극심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던 헤이케군은 자기들 스스로 어둠 속의 계곡으로 다이빙해버렸다.

해가 뜨고 보니 계곡 밑에 쌓여 있는 병사의 수가 자그만치 70,000명에 달했다. 헤이케군은 하룻밤만에 100,000명이나 되는 대군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다만 양측의 병력이 5만 vs 10만이란 건 가능성이 낮은 기록이고, 요시나카군은 기록에 따라 5천에서 3만, 헤이케군은 4만에서 7만 정도로 보는 편이다.

《겐페이 성쇠기》에서는 요시나카군이 수백 마리의 암소의 뿔에 햇불을 붙여 돌격시키는 계책을 써서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의 명장 전단이 썼다는 화우지계를 본뜬 것으로, 꼬리에 불을 붙이는 본래의 화우지계와는 달리 뿔에 햇불을 달면 소가 불을 무서워해서 제대로 돌진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어 창작된 이야기로 여겨진다.

2.5. 헤이케의 교토 탈출

아무튼 이 쿠리카라 고개 전투에서 유래없는 참패를 당한 헤이케군은 패주했고, 6월 1일 카가국 시노하라(篠原)에서 추격을 받아 더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6월 6일에 헤이케의 패잔병이 교토에 귀환했고, 요시나카는 교토 코 앞에 있는 오미국(近江国)까지 진출했다.

규슈에서 반란을 진압한 타이라노 사다요시(平貞能)가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올라왔지만 병력은 고작 1,000기에 불과했다. 병력 소집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요시나카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던 헤이케는 교토를 포기하고 도주하기로 결정했다. 7월 25일 헤이케는 어린 안토쿠 덴노를 데리고 교토를 탈출하여 서국으로 향했다.

7월 28일, 기소 요시나카가 교토에 입성했다. 헤이케를 따라가지 않고 남아있었던 고시라카와 법황이 요시나카에게 헤이케 토벌 명령을 내리는 등 요시나카의 위세는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2.6. 기소 요시나카의 상경

요시나카는 교토에 상경했다. 드디어 겐페이 전쟁에서 카와치 겐지로서는 처음으로 군사력을 통해 수도를 제압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당시 교토 일대는 기근으로 황폐화되어 있었다. 인구 150,000명 가운데 아사자가 40,000명이나 나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요시나카는 헤이케를 몰아내기 위해서 엄청난 대군을 몰고 교토에 올라와버렸다. 하지만 교토에는 식량이 없었다.[4]

화려한 교토를 기대하고 호쿠리쿠의 산골에서 올라온 요시나카군은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인지라 밥이 없으면 먹고 살 수 없었고, 손자병법》에 따라 보급품을 현지조달하기 시작했다. 요시나카군은 교토에 입성하자 폭도화 해버렸다. 군량을 얻기 위하여 민가를 함부로 약탈했고, 수확하기 전의 밭에 말을 풀어서 먹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창고를 터는건 아직 그렇다고 해도, 심지어 노상강도를 하고 까지 빼앗는 경우까지 나와서 교토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헤이케가 아니면 사람도 아니다."
면서 헤이케 정권에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헤이케가 아직 나았다. 옷까지는 안 벗겼다."
면서 요시나카군에 불만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니까 헤이케 재평가행 하지만 요시나카는 이를 제대로 저지하지 않았다. 요시나카로서는 헤이케를 물리치려고 싸우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요시나카 자신도 바보 취급을 받았다. 아직 철없는 2세 시절에 시골 호족으로 자란 요시나카는 수백년 동안 발전해온 교토의 귀족 문화, 복잡한 예절, 엄격한 관례 같은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5] 요시나카는 교토의 귀족들, 즉 공경들 사이에서 어이없고 무례한 행동을 반복하는 얼빠진 시골뜨기로 취급받았고, 결국 분노를 사게 되었다. 《헤이케모노가타리》 같은 당대의 군담소설에는 이에 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다.
  • 우차 사건
    높은 관직을 얻은 기소 요시나카는 갑옷 대신 귀족의 의복을 입고 모자를 썼으나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귀족들이 타는 우차를 타게 되었는데, 우차의 소치기가 헤이케의 제2대 도료 타이라노 무네모리(平宗盛)를 모시던 사람이라 요시나카를 싫어했다. 소치기는 일부러 난폭한 소를 골라서 요시나카를 태우고 나서 일부러 소가 폭주하도록 만들었다. 요시나카는 우차를 타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차 안에서 넘어져 데굴데굴 굴러다니다가, 소치기가 말하는 대로 난간을 잡고[6] 겨우 우차를 탈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뒤에서 타서 앞으로 내린다는 작법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뒤쪽에서 내려 비웃음을 샀다고 전해진다.
  • '네코마'님 사건
    '네코마'(猫間)라는 츄나곤(中納言) 벼슬에 있는 사람이 있었다.[7] 네코마가 쥬에이(寿永) 2년인(1183년) 요시나카의 거처를 방문하자, 요시나카는 네코마가 사람의 이름이라는걸 알아듣지 못하고
    "교토에서는 고양이가 사람을 만나는가!"

    라며 놀랐다. 그때가 정오였으므로 요시나카는 네코마에게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다. 당시의 귀족은 1일 2식을 했으므로 네코마는 거절을 했으나 요시나카는 그것을 몰라 식사를 하도록 강요했다. 요시나카가 대접한 요리는 이빨이 빠진 낡은 그릇에 수북하게 쌓아놓은 밥, 그리고 '소금을 치지 않은' 느타리버섯 국물[8][9]로 교토의 귀족들은 먹지 않는 음식이었다. 네코마는 매우 기분이 나빴지만 조금 먹고 그만두었다. 그러자 요시나카는
    "고양이가 먹고 남기는 것 같다."

    면서 농담을 걸었고, 네코마는 황급히 돌아가 버렸다.
  • 타이라노 토모야스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타이라노 토모야스(平知康, ?~?)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북(鼓)의 명수라서 '북판관'(鼓判官)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토모야스는 북면무사로서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근이었는데, 교토에서 요시나카의 병사들이 난폭하게 구는 것을 그만두게 하라는 명령을 전하러 요시나카를 방문했다. 그런데 요시나카는 토모야스와 대화를 하다가
    "당신은 '북판관'이라고 불리는데, 동네북 같은 사람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가?"

    라고 농담을 했다. 이에 격노한 토모야스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기소 요시나카를 토벌해야 한다고 진언했다.[10]

결정적으로 기소 요시나카는 황위 계승에도 관여하려 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 각지의 겐지들에게 처음 헤이케 추토의 영지를 내려 겐지들의 거병을 촉구한 모치히토 왕(以仁王, 1151~1180)의 3남이었던 호쿠리쿠노미야(北陸宮, 1165~1230)를 모시고 있었는데, 그를 다음 덴노로 삼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추천했던 것이다. 호쿠리쿠노미야는 기소 요시나카가 거병의 명분으로 삼았던 황족 모치히토 왕의 아들이기는 했으나, 모치히토 왕은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이긴 해도 황태자는 커녕 친왕으로도 책봉받지 못했었고,[11] 호쿠리쿠노미야는 황족으로서 아무런 책봉을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덴노에 즉위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당시 교토에는 헤이케가 규슈로 낙향하면서 (삼종신기와 함께) 모셔간 안토쿠 덴노나 모리사다 친왕 형제 말고도 선제 다카쿠라 덴노의 아들 두 명이 더 남아 있어서 굳이 호쿠리쿠노미야를 덴노로 즉위시킬 명분이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덴노의 계승은 황족과 극소수의 최고위 귀족만이 논의할 수 있었던 중대한 사안이었고, 그걸 결정하는 것은 일본 왕실의 최고 당주로 '치천의 군'이라고도 불리던 고시라카와인이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자리를 잡고 나면 막부가 사실상 덴노 계승에도 관여하게 되지만 아직은 그런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요시나카가 아무리 세력과 공적이 크다고 해도 하급 귀족인 무사로만 여겨지던 상황에서 공적 좀 세웠다고 황위 계승에까지 개입하려 드니, 고시라카와인이나 교토 귀족들은 당연히 '무사 주제에 감히!'라는 식으로 분노하게 되었다. 결국 고시라카와 법황의 의향에 따라 안토쿠 덴노의 동생인 고토바 덴노가 황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이에 요시나카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여 불쾌하게 여겼다.

이처럼 요시나카는 난폭하게 굴며 민폐를 끼쳤고 조정 귀족들, 그리고 고시라카와 법황과 사이가 나빠졌다. 사실 교토의 귀족들은 딱히 민생 같은 거 신경 쓰는 놈들이 아니었지만(…), '천박한 시골뜨기 무사'가 상경하여 설치는 것에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리고 이러는 사이에 사이고쿠(西國)로 낙향했던 헤이케가 서서히 그들의 힘을 회복하면서 슬슬 교토로 치고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시나카에게 헤이케 토벌 명령을 내려 서쪽으로 쫓아내는 한편, 요시나카의 라이벌인 간토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접촉했다. 일설로는 2살 때부터 산속 시골에서 자라서 완전히 귀족에서 이탈한 '토호' 요시나카와는 달리, 그나마 12살 때까지는 교토에서 자라서 '귀족'의 말예로 여겨졌던[12] 요리토모에게 더 호감을 느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요리토모 역시 교토의 기근, 나아가 자신을 쓰고 버리는 도구로 취급하는 쌍륙의 말 정도로 취급하는 고시라카와인의 속셈을 알고 있었으므로 당장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요리토모는 좀 더 좋은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도, 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게 대군을 줘서 서서히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요리토모 입장에서는 '(카와치) 겐지의 수장', '무가의 동량'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데 현재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독자적인 기반과 군사력을 가지고 교토에서 헤이케를 몰아내는 대공을 세운 사촌 요시나카였으며, 요시나카가 섣부른 행동으로 조정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지금이 적기였다. 잠재되어 있었던 요시나카와 요리토모 간의 반목이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2.7. 미즈시마 전투

헤이케 토벌을 위하여 진군하던 요시나카는 군대를 나눠서 일부만 진격시키고, 자신은 교토로 귀환했다. 10월 1일, 500척의 배에 나눠 타고 출항한 요시나카군을 1,000척의 배에 탄 헤이케군이 공격해왔다. 하지만 상황은 요시나카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전부터 세토내해의 해상 무역을 꽉잡고 있어 수운에 뛰어났던 헤이케군은 자연스럽게 해상전에도 능숙했다. 반면 호쿠리쿠 지방의 산골 출신으로 구성된 요시나카군은 일단 배에는 탔지만 수상전 경험이 부족해서 헤이케군에게 고전하게 되었다. 해상전에서 고전하던 요시나카군이 후퇴하여 육지로 돌아가려 하자, 헤이케군은 미리 헤엄에 능숙한 말을 준비해두었기 때문에 배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해안에 상륙, 곧바로 전투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하니 얼마나 양군 사이에 차이가 컸는지 알 만하다.

이 격전 중에 겐지 측의 아시카가 요시키요(足利義清(또는 源義清), ? ~ 1183)와 운노 유키히로(海野幸広, ? ~ 1183)가 전사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때, 갑자기 일식이 일어났다. 헤이케군은 음양사를 동원[13]했는지 이를 미리 알고 있어 동요가 없었으나 요시나카군은 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이 어두워지자 크게 놀라 당황하여 패주하고 말았다.

전투의 결과는 요시나카군의 참패였고, 헤이케는 이로써 얼마동안 세력을 온존하게 버틸 여력을 마련하게 되었다.

2.8. 홋슈지 전투

자신이 교토를 떠난 사이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측에 접근했다는 것을 알게 된 요시나카는 격노했다. 법황은 요시나카에게 교토를 떠나지 않으면 토벌령을 내리겠다고 위협했고, 격분한 요시나카는 1183년 11월 18일, 법황이 머물고 있었던 홋슈지(法住寺)를 공격했다. '북판관' 타이라노 토모야스가 무사와 승병을 모아 홋슈지를 지키고 있었으나 요시나카가 이끄는 7,000명의 군세에 패배했고, 법황은 유폐되었다. 이 싸움에서 고시라카와인의 아들로써 승려로 출가했던 엔에 법친왕(円恵法親王)이나, 엔랴쿠지의 주지이자 천태좌주[14] 묘운 등 많은 고승이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 시기에 전해지는 에피소드로, 요시나카가 연회를 열고 기뻐하며,
"덴노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상 내가 덴노나 법황이 되어야 할 것인데, 법황이 되려면 머리를 밀어야 하고, 덴노가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으니 관백(칸파쿠)이나 되어야겠다."

고 말했다고 한다. 기소 요시나카는 어리석은 인물이라고 조롱하기 위한 내용으로 보인다.

1184년 1월 11일,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을 협박하여 반강제로 정이대장군(세이이다이쇼군)의 지위를 얻었고[15] 아사히 쇼군(旭將軍)이라 칭했다. 하지만 동시에 법황은 간토의 요리토모에게 요시나카 토벌 명령을 내렸고, 요리토모는 이에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교토로 진군시켰다.

2.9. 우지가와 전투

20일, 요시츠네군이 교토에 도착했다. 요시나카는 우지가와(宇治川)에서 다리를 무너뜨렸으나, 요시츠네군은 도하에 성공하여 교토를 공격해왔다. 60,000명에 달하는 가마쿠라의 군대에 7,000명밖에 되지 않는 요시나카의 호쿠리쿠 군대는 격렬하게 맞서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전했고, 일세를 풍미한 맹장 요시나카는 최후를 맞게 되었다.

요시나카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타카는 이때 가마쿠라에 있었다. 요리토모는 조카뻘이자 사위였던 요시타카를 살려두려고 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요리토모의 딸이며, 요시타카의 아내인 오오히메가 요시타카를 가마쿠라에서 탈출시켰다. 그러나 결국 요시타카는 요리토모가 보낸 병사들에게 붙잡혀 죽게 되었다. 크게 상심한 오오히메는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2.10. 요시나카의 최후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는 요시나카의 최후가 극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요시나카는 고작 13기를 이끌고 도망치다가, 비와호 부근에서 젖형제였던 이마이 카네히라(今井兼平)가 이끄는 50기와 합류했다. 요시나카와 카네히라가 모이자 흩어져 있었던 군사들이 모여서 약 300기를 겨우 이루게 되었다. 요시나카와 카네히라는 전투를 거듭하며 고작 5기만 남을 때까지 싸웠다.

이때, 카네히라의 여동생으로 요시나카를 수행한 용맹한 여장군 토모에 고젠도 곁에 남아 있었다고 이야기된다. 요시나카는 이제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토모에 고젠에게 도망치라고 명령했다. 토모에는 오빠처럼 죽을 때까지 요시나카를 수행하겠다고 했으나, 요시나카는 이 요시나카 장군이 마지막 싸움에서 여자를 데리고 간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들을 것이라고 설득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여 토모에 고젠을 떼어놓았다. 토모에는 마지막 봉공으로 적진에 돌격하여 적장의 목을 베고 갑옷을 벗으며 도망쳐 전장을 벗어나 고향으로 달아났다.[16]

최후까지 격렬하게 싸우던 요시나카는 말이 진창에 빠지자 할복을 준비했고, 이마이 카네히라는 요시나카의 할복을 지켰다. 그러나 화살이 날아오자 문득 카네히라가 걱정되어 고개를 들었을 때 이마에 화살을 맞고 죽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요시나카와 함께 싸우던 카네히라는 형제처럼 함께 자랐던 주군 요시나카의 최후를 목격한 후, 스스로 입에 칼을 물고 엎어져서 자결했다.

3. 평가

역사의 패배자가 되기는 했으나, 호쿠리쿠의 호족들을 모아 거병하여 헤이케의 대군을 물리치고, 교토에 상경하여 헤이케를 서쪽으로 쫓아내버린 만큼 요시나카 역시 뛰어난 장군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교토에서 갈팡질팡하며 온갖 무리수를 쓰다가 패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한 사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며, 군사적으로는 겐페이 전쟁 후반부에 헤이케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여 헤이케 토벌에서 결정적인 전공을 세운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게 가려지고 있다.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일견 거칠게 보이지만 인품은 소탈하고 정직한 인물로서, 지방인들을 시골뜨기로 무시하는 수도 교토의 오만한 기풍과 번잡스러운 의식을 중시하는 헤이안 시대 말기 조정의 꽉 막힌 분위기, 그리고 순박한 요시나카와는 달리 노회한 고시라카와 법황과 교활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정치적 야심에 휘둘리다가 희생된 존재로 보기도 한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요시나카는 헤이케와 겐지의 세력차가 가장 클 때 결정적인 역전승을 거뒀고, 이로서 겐지의 승리가 확정되었으므로 사실 요시나카가 헤이케 토벌에 가장 큰 공적을 세운 것이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사실 헤이케 토벌의 결정적인 공적을 세운 겐지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겐페이 전쟁 시기에 타이라노 키요모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등의 강렬한 인물이 많다보니 묻히는 인물에 가깝다. 헤이케 측에서 보면 요시츠네가 나오기 전의 중간보스(…), 요시츠네 측에서 보면 헤이케를 상대하기 전의 중간보스(…) 취급이라 결국 뭘 해도 중간에 몰락하고 마는 중간보스(…)밖에 되지 못한다는 게 문제점이다.

4. 기타

대중문화적으로는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마지막 최후 장면이 참 비참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이 부분도 인기가 좋다. 사실 전설상에서 기소 요시나카는 난폭하고 거친 인물로 그려지지만 동시에 교토에서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생활을 하는 모습은 마치 전형적인 '시골뜨기가 도시에 올라와서 쩔쩔매는 모습'으로 보여서 뭔가 해학적이다. 마지막 결말은 그와 함께 최초로 거병한 동료들이 모두 죽어가고, 젖형제였던 이마이 카네히라와 함께 마지막 최후를 맞는다는 점에서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주제인
'번성한 자 반드시 망한다'
'성자필멸'(盛者必滅)
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평가이다.

또한 미녀 여성 무장 토모에 고젠과의 로맨스가 주목을 받는다. 요시나카 주변에는 이상하게 미녀 무장에 대한 전설이 많은데, 토모에 고젠 외에도 요시나카의 아내라는 야마부키 고젠(전설에 따라 토모에 고젠이 아내로 나오기도 한다), 아오이 고젠 등의 이름이 나온다. 뭐지? 하렘물?

여담으로 자라난 곳이 지금도 여전히 그야말로 산속 깡촌인 '기소'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야생아'라는 농담이 있다(…).

그의 가신 중의 한 사람인 데즈카 미츠모리(手塚光盛)는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의 만화가인 데즈카 오사무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사무의 <불새>에 나온 요시나카는 한없이 난폭하고 오만한 인물로 나오며 교토를 약탈과 폭정으로 다스리다가 요시츠네에게 패배하고 주인공 벤타의 친구인 호롱박에게 죽는다.

5. 창작물에서

<원평토마전 2>에서 요시츠네를 제치고 주인공의 호적수 포지션으로 등장한다. 주인공과 유사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어째서 원수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위해 싸우는지는 불명이다.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 PK>에서 특전신무장으로 등장한다. 통솔 77 무용 95 지략 24 정치 43 의리 52 로 무력이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보다 높다.

<토탈 워: 쇼군2/사무라이의 태동>에서도 플레이어 가문으로 등장한다.

<Fate 시리즈>에서 먼저 실장된 아내에게 자주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금슬 좋은 부부로 나오며 실제 역사랑 다르게[17] 성격은 나쁘지 않게 나오고 있다.[18] 베니엔마가 토모에의 엉망진찬인 요리도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이쪽도 역시 미나모토노 가문 아니랄까봐 아내에 대한 애정이 상당한 듯하다. 이래저래 토모에나 다른 서번트 통해 언급이 많이 된 것을[19] 보면 추후 실장될 가능성 있다. 아내와 감동의 재회! 하지만 불구대천의 원수도 대면할 수 있다.[20] 토모에의 막간에서 토모에가 요시나카의 아이를 배고 있었기 때문에 요시나카와 마지막까지 함께 싸우려 했던 토모에에게 살아남으라고 부탁했고, 토모에는 혼자 살아남아 와다 요리모리의 첩이 되면서 요리모리와의 협력 하에 요시히데를 요리모리의 아들로 위장해 오니가 되지 않고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갔다고 한다.[21] <지옥계만다라 헤이안쿄>에서 카게키요의 육신으로 쓰인 요시츠네의 회상으로도 언급되는데, '나를 죽인다고 전쟁이 끝날 거 같냐? 요리토모의 적은 헤이케와 나만이 아닐 터. 다음은 너야.'라는 말을 건넸다. <Fate/Samurai Remnant>에서 등장 하는 떠돌이 세이버의 진명으로 추측되고 있고, 결국 확정됐다.

<노을빛 세계에서 너와 노래를…>에서도 시골 청년으로 등장한다..


[1] 그의 묘소가 오쓰의 아사히산에 있는 것에서 유래했다.[2] 지금의 사이타마현의 중소도시로 당시 이름을 계속 쓰고 있다.[3]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4] 사실 이것이 헤이케가 교토를 버린 이유 가운데 하나로 추정되기도 한다. 긴키(근기) 지방의 기근으로 식량난이 있어 군사를 모으기 어려웠다는 것이다.[5] 헤이케는 무사였지만 다이라노 기요모리 이하 일문 사람들이 교토에 거주하면서 귀족들과 통혼하고 관직을 얻어서 나중에는 무가인지 공가인지 모를 정도로 귀족화되어 있었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어려서 교토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 교토의 예법을 어느 정도는 체득하고 있었다.[6] 우차에서 내리자마자 소치기에게 "이 난간 아니었으면 내가 아주 큰일날 뻔했다. 이거 니가 만든 거냐?"라며 소치기를 칭찬했단다. 소치기가 뒤로 비웃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7] 원래 이름은 후지와라노 미츠타카(藤原光隆, 1127 ~ 1201)였다. 저택 주변에 고양이가 많이 살아서... 하지만 이 사람은 당시 5명의 덴노를 섬긴 원로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사람을 모욕했기에 당시 고시라카와 법황으로부터 분노를 사게 되었다.[8] 요시나카 본인이 즐기던 식단이기도 했는데, 특히 버섯국에 소금을 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신선한 버섯을 구해왔으니 먹어보라는 의미에서 마련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즉, 전형적인 의도는 좋았다의 사례일 수도 있다는 것.[9] 염장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신선한 수산물에나 쓰이는 말을 대충 주워 듣고 굳이 소금에 절일 필요도 없는 버섯에다 그 표현을 써먹음으로서 무식함의 극치를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도 한다. 마침 요시나카는 내륙 산골짜기 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만큼 그런 정보에 관해서는 무지했을지도. 혹은 이마저도 음해라는 해석도 있다.[10]차나왕 요시츠네》에서는 이 '북판관'(츠츠미 판관)이 기소 요시나카로부터 '병사들이 약탈 좀 하면 어때'라는 소리를 듣고 어이를 잃는 데다가, 위의 네코마 사건까지 당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래서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기소 요시나카를 토벌해야 한다고 호소한다.[11] 모치히토 왕의 영지에는 겐지의 거병을 촉구하면서 "옛날 덴무 덴노께서 행하신 것을 본받겠다" 운운하는 구절이 들어있었는데, 이는 겐지의 군사력을 빌어 헤이케를 타도하고 나면 모치히토 왕 자신이 덴노로 즉위할 것이라는 의미였기에 그것도 고시라카와인이 굉장히 불쾌해했다고 한다. 인세이 시기에는 인세이를 행하는 '치천의 군'이 차기 덴노로 지명한 사람과 그 후손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이 당시의 원칙이고 관습이었기 때문에, 태자 책봉은 고사하고 친왕선하도 받은 적 없는 일개 왕자가 "내가 다음 덴노가 될 거다"고 나대는 것이었으니까.[12] 교토의 귀족들 입장에서는 난폭한 '아즈마에비스(東夷)'들 사이에서 교토 말씨를 쓰며 교토의 예법에 맞춰 인의 사자를 대우하니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13] 일본 조정의 음양사들은 근대가 될 때까지 달력을 제작하고 있었고, 당연히 천문 지식이 있어 일식 등을 예보할 수 있었다. 헤이케는 얼마 전까지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교토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음양사를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요시나카군은 호쿠리쿠의 시골 호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이런 '첨단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14] 천태좌주는 천태종의 최고 종정으로 비유하자면 바티칸의 로마 교황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인물을 요시나카는 "내가 알 게 뭐냐"라며 목을 쳐서 강에 던져 버렸으니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15] 기존에는 정이대장군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근래에는 새롭게 발견된 문서로 인해 '정북대장군'이 아닌가 하는 설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16] 이 고향이란 그들이 함께 자란 기소의 땅이다.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토모에는 오빠들, 그리고 형제처럼 함께 자란 - 아마도 사랑하는 - 주군 요시나카를 잃고 쓸쓸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서글픈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이다.[17] 실제 요시나카는 성격이 난폭한 편이다.[18] 다만 현재 요시나가에 대한 묘사는 메가데레인 토모에의 시점 위주로 전개되기 때문에 객관적인 묘사라 보기 힘든 점도 있다. 게다가 토모에의 감성은 오니의 혈통의 영향인지 정상인과는 다른 점도 있다. 때문에 요시나가의 성격이 토모에가 아닌 외부인이 보기에 난폭했다고 묘사해도 딱히 어색하지 않다.[19] 무사시, 베니엔마, 야규 무네노리[20] 이미 아내의 대사에서 어떤 참극이 빚어질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마이룸에서 시종일관 나긋나긋 사근사근, 상냥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는 토모에가 목소리 착 깔고 "노리요리, 요시츠네, 그리고 요리토모 공. 그러한 분들과 혹시 만난다면, 토모에는 스스로를 다스릴 자신이 없습니다. 아마도 거기에는 오니가 나타나겠지요." 쉽게 말해서 만나면 죽여버리겠다는 말이다. 금슬 좋은 부부였던 걸 생각해도 아내가 저러는데 본인이 가만히 있을 리가(...).[21] 만약에 요시나카가 죽는 모습을 봤다면 완전한 오니가 되어 애정과 살의가 반전돼 요시히데를 잡아먹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토모에를 다른 의미로도 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