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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00><colcolor=#fff> 에도 막부 제15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徳川慶喜 | |||
출생 | 1837년 10월 28일[1] | ||
무사시국 도시마군 에도 미토 도쿠가와 저택 (現 도쿄도 분쿄구) | |||
사망 | 1913년 11월 22일 (향년 76세) | ||
도쿄부 도쿄시 고이시카와구 (現 도쿄도 분쿄구) | |||
묘소 | 야나카레이엔(谷中霊園) | ||
재임기간 | 제9대 히토츠바시 도쿠가와 당주[2] | ||
1847년 9월 1일 ~ 1866년 8월 28일 | |||
제2대 쇼군 후견직[3] | |||
1862년 5월 9일 ~ 1864년 3월 24일 | |||
제15대 정이대장군[4] | |||
1866년 8월 29일 ~ 1867년 11월 19일 | |||
내대신 | |||
1867년 11월 18일 ~ 1868년 1월 24일 | |||
초대 도쿠가와 요시노부 당주[5] | |||
1902년 ~ 191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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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 | 시치로마로(七郎麻呂) | ||
별칭 | 히토츠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 | ||
자 | 시호(子邦) | ||
호 | 코우잔(興山) | ||
신장 | 약 150cm[7] | ||
부모 | 아버지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 어머니 요시코 여왕(吉子女王) | ||
형제자매 | 22남 15녀 중 7남 | ||
부인 | 정실 이치조 미카코(一条美賀子) 측실 4명 | ||
자녀 | 10남 11녀 | ||
작위 | 공작 | }}}}}}}}} |
▲ 말년의 도쿠가와 요시노부[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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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막부의 제15대 쇼군이자 일본사의 마지막 쇼군. 그리고 일본사 최후의 전근대적 통치자이다.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족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도쿠가와 종가와는 따로 떨어져 새롭게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을 창설했다. 정실 도쿠가와 미카코(德川美賀子)[10] 외에도 측실로 잇시키 스가(一色須賀), 신무라 노부(新村信), 나카네 사치(中根幸), 오요시(お芳) 등을 두고 총 10남 11녀를 낳았다.
7남 요시히사의 차녀 도쿠가와 키쿠코는 다이쇼 천황의 셋째 며느리가 되었으나, 자녀를 낳지는 못했다. 남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 동성애자라서 그랬다는 소문이 있다.
▲ 말년에 손녀 도쿠가와 키쿠코를 안고 있는 도쿠가와 요시노부.[11] |
가문은 증손자인 요시토모(慶朝, 1950~2017) 때까지 이어졌고, 요시토모에게 자녀는 있었으나 전 부인과 이혼을 할 당시 자녀들이 어머니를 따라가 도쿠가와 가문을 이탈했기 때문에, 요시노부의 가문은 끊어졌다. 유언으로 맏누이의 딸 야마기시 미키(山岸美喜)를 지명했다는 것이 2023년 1월 밝혀졌는데, 미키는 이를 밝히며 동시에 절가(絶家)를 발표.주간문춘[12]
증손녀 마사코(眞佐子, 1944~)는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일본 내각총리대신의 양손자 히라누마 다케오와 결혼했다.
이치조 가보에 따르면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마츠다이라 노부야스의 여계 후손이며#, 센히메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한다.#
4. 연표
<rowcolor=#fff> 연도 | 사건 |
1837년 (1세) | 음력 9월 29일/양력 10월 28일, 미토 번 제9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일곱째 아들로, 에도 고이시카와 미토 번 가미야시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리스가와노미야 요시코, 아명 '시치로마로'(七郎麻呂) |
1838년 (2세) | 4월 28일, 미토에서 양육되기 위해, 미토성에 들어갔다. |
1847년 (11세) | 8월 20일, 히토츠바시 당주 마사마루(2세) 사망. 9월 1일, 히토츠바시 집안의 양자가 되어 가독(家督)을 상속했다. 10월 25일, 미토 번저택에서 히토츠바시 저택으로 옮김 12월 1일, 히토츠바시 시치로마로 등성관례(登城元服), 종3위 좌근위 중장에 서임, 요시노부로 개명했다. |
1848년 (12세) | 12월 4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에게 대납언[大納言] 이치조 타다카(一条忠香)의 딸 치요(千代)와의 약혼을 명령했다. |
1853년 (17세) | 2월 6일, 천연두에 걸린 치요와의 약혼을 파기했다. 5월 1일, 타다카의 양녀 미카코(美賀子)와 약혼했다. |
1856년 (20세) | 12월 3일, 도쿠가와 요시노부(20세), 이치조 미카코(22세)와 결혼, 산기(参議)에 임명되었다. |
1857년 (21세) | 3월 24일, 막부 비장의 라이플총을 빌려본다. 10월 16일,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慶永)가 막부에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후계 결정을 촉구하는 건언서를 제출했다. |
1859년 (23세) | 6월 23일, 이이 나오스케를 문책했다. 7월 5일, 막부 등성 처분 발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등성 정지,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근신, 마츠다이라 슌가쿠는 강제 은거. 미토 번내의 인사권이 정지되면서 편지 왕복이 금지되었다. 이후 안세이 대옥 사건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은거, 근신 처분을 받았다. |
1860년 (24세) | 6월 24일, 아버지 도쿠라와 나리아키, 미토 성안에서 급사했다. 열공으로 시호됨. 9월 4일, 막부로부터 은거 근신을 해제받았다. |
1862년 (26세) | 5월 7일,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츠다이라 슌가쿠 등성,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배알했다. 7월 1일,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쇼군 후견직에 내명, 마츠다이라 슌가쿠는 정사 총재직에 내명됨. 7월 6일, 쇼군 후견직에 임명되었다. 11월 1일, 중납언[中納言]에 임명되었다. 12월 15일, 교토에 들어갔다. |
1863년 (27세) |
|
1864년 (28세) | 2월 16일, 조의참예 모임에서 일부러 만취한 척하며 슌가쿠, 히사미츠, 다테 무네나리를 맹비난했다. 3월 9일, 조의참예 사임. 참예회의 붕괴. 3월 25일, 금리어수위 총독 취임. 셋츠 해 방위를 지휘했다. 6월 16일, 도쿠나가 요시노부의 심복,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가 게이센혼도리에서 암살됨. 7월 17일, 금문의 변에서 여러 번을 지휘해 조슈군을 토벌했다. 11월 29일, 텐구당 토벌 원서를 조정에 제출했다. 12월 3일, 텐구당 토벌을 위해 교토에서 출발해 12월 26일 귀경했다. |
1865년 (29세) | 할복까지 거론하며 <안세이 5개국 조약> 비준의 칙령을 받아냈다. |
1866년 (30세) |
|
1867년 (31세) |
|
1868년 (32세) |
|
1869년 (33세) | 9월 28일, 메이지 덴노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죄를 용서한다는 조칙을 내려 근신이 해제되었다. 10월 5일, 호다이인 히가시콘야쵸 구 막부대관소 터로 이사했다. |
1872년 (36세) | 1월 6일, 종4위에 서위되었다. |
1877년 (41세) | 5월 14일, 정2위로 승서되었다. 5월 26일, 기도 다카요시가 지병으로 사망. 향년 43세. 9월 24일,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이난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할복했다. 향년 49세. |
1878년 (42세) | 5월 14일,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당했다. 향년 47세. |
1888년 (50세) | 3월 6일, 콘야쵸에서 니시쿠사후카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6월 20일, 종1위에 서위되었다 |
1893년 (57세) | 1월 27일, 어머니 요시코 여왕이 사망했다. 향년 90세. |
1894년 (58세) | 9월 11일, 정실 이치조 미카코가 사망했다. 향년 60세. |
1897년 (61세) | 11월 19일, 도쿄 스가모로 이사했다. |
1898년 (62세) | 3월 2일, 황궁 입궐. 30년 5개월만에 메이지 천황을 만났다. 입궐 후 히카와초, 가쓰 가이슈의 집을 방문했다.[18] |
1900년 (64세) | 6월 22일,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들이 받는 사향간지후를 수여받았다. |
1901년 (65세) | 12월 24일, 도쿄 코히나타다이로쿠텐쵸우 마을로 이사했다. |
1902년 (66세) | 6월 3일, 공작 작위를 받았다. 도쿠가와 종가와는 별도로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의 창설이 허가되었다. 귀족원 의원에 취임했다. |
1908년 (72세) | 4월 30일, 대정봉환의 공으로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다. |
1912년 (75세) | 7월 29일, 메이지 덴노가 요독증으로 붕어. 향년 59세. |
1913년 (76세) | 11월 12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11월 22일,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이 추서된다. 11월 30일, 야나카레이엔 묘지에 묻혔다. |
5. 평가
마지막 쇼군으로 유명하지만, 생애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정작 이 사람의 정치적 리즈시절은 전임 쇼군 이에모치의 섭정이자 교토 조정의 총독으로서 공무합체파 정권을 이끌던 시점이다. 오히려 요시노부의 쇼군 취임은 이에모치의 급사로 공무합체가 붕괴하고 막부가 거의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망조가 든 시점에서 일종의 파산관리인으로 앉혀진 것이었다.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라 이미지는 썩 안 좋지만[19] 의외로 유능했던 인물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막번체제 이후의 구상력을 가지고 있었고, 카리스마도 있었으며, 날카로운 정보 분석에 의한 정치력을 겸비했었다.#
카츠라 코고로는
"요시노부는 이에야스의 재림이다(慶喜は、徳川家康の再来なり)"
라고 평가했고, 사카모토 료마도 대정봉환 이후에 요시노부가 정권을 주도하는것을 구상했을 정도였다.[20] 또 이토 히로부미는
"어젯밤 대담에서 완전히 감복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昨夜の対談で全く感服してしまった。実に偉い人だ。)"
라고 말하기도 했다. 막부의 신하로서 요시노부를 섬겼던 실업가이자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 역시 요시노부를 높게 평가하며 평생 그를 모셨다. 그는 증손자이자 시부사와 가문 4대 당주였던 마사히데에게 "요시노부공의 명예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편찬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에서는 "모욕을 당해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돌보지 않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평가하고 최고의 경의를 표하며 끝맺고 있다.[21]#게다가 1868년의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에도 진격을 서둘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요시노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어떻게 반격할지 모른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고 한다. 요시노부가 에도성으로 돌아온 이후에 고향의 미토에 폐거한 요시노부를 "미토보다 슨푸성이 좋다"라고 하며 요시노부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것이 도막파의 일원 중 한 명이었던 이와쿠라 토모미였다. 이후 오쿠보 도시미치는 보신전쟁에서 요시노부를 이용하는 것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만큼 상대방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패장이었다. 쇼군 취임 당시 만났던 서양의 공사들도 요시노부를 고평가하기도 했다.
에도에서 교토로 거점을 옮긴 1863년 이후의 요시노부의 정치적 수완은 확실히 뛰어났다. 시마즈 히사미츠 등 유력 다이묘의 정치력을 꺾으면서, 1864년에는 중요 인물로서 '금리어수위 총독'에 임명되어 고메이 천황의 측근이 되었다. 같은 해의 금문의 변에서는 당초 신중파였지만, 일전해 군세를 지휘하여 죠슈 번병을 격퇴했다. 다음해인 1865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 등에 대한 칙허를 얻어 약 7년에 걸친 현안을 해결했다.
결단력도 빨라서, 1866년에는 스스로 주도하고 있었던 제2차 조슈 정벌을 중지했다. 그 후 제15대 정이대장군에 취임했고, 막부의 군제 개혁(게이오의 개혁) 등을 가속화했다. 영국과 프랑스 공사 등 구미 공사들과 오사카성에서 회견해, 외교 성과를 보여주어 개국파 지도자로서의 인상을 주었다. 계속해서 주저했던 효고 개항도 요시노부가 실현시켰다. 이후 국내에서는 막부 타도 계획에 대항해 대정봉환을 실행시켜서, 삿초 동맹 등 무력을 사용해 막부 토벌을 진행하려고 했던 토막파의 노림수도 무너뜨렸다. 왕정복고의 쿠데타도 사전에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굳이 보고만 있었고, 우발적인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교토에서 오사카성으로 피신했다. 요시노부는 무력 충돌을 피하면서, 오사카성의 막부 군사들을 배경으로 압력을 계속 가하고 있으면 정세가 유리하게 호전한다고 읽고 있었다.
항상 상대의 한 수 앞을 읽어, 임기응변으로 뜻밖의 묘수를 만들어내는 수완은 훌륭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안도 유이치로(安藤優一郎)는 요시노부의 결점으로 "자신의 강한 정치 기반을 갖지 못한 것"을 꼽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나카네 쵸쥬로(中根長十郎, 1794 ~ 1863),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 1822 ~ 1864), 하라 이치노신 등 그가 아꼈던 심복들이 모두 암살되었다. 요시노부의 히토츠바시 가문은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창설했으며 가신단은 막부에서 파견된 출향자들로 구성되었다. 막부 인사의 사정으로 교체되어, 다이로도 막부 직책의 하나로, 수년 정도 맡으면 전임해 갔다.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히토츠바시 가문에서 점점 발탁되어 프랑스에서 가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다른 번의 색을 띠지 않은 유능한 젊은이였던 시부사와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요시노부는 아이즈 번과 쿠와나 번과 제휴했지만, 군사면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안도 유이치로는 "요시노부는 막부 내부에 강한 반발을 사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약 5년이나 에도에 돌아오지 않고, 행선지인 칸사이에서 제멋대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불만이 에도성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고 한다.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 유일하게 에도성에 들어가지 않은 쇼군이었다. 교토에서 취임해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 에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쇼군이 아니었다.
또한 안도는 "자신의 주장을 표변[22]시키는 장면도 여러 번 있었다"고 지적했다.[23] 또한 그의 최대 결점으로 "설명 책임의 결여가 결정적이었다. 진의를 설명하지 않고 사전 공작도 하지 않아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상당히 독단적이었다는 것이다. 과묵했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오히려 동시대 누구보다 그는 웅변적이었다. 논리가 명쾌했고, 언어도 명료했으며 유력 다이묘와의 회의나 교토고쇼 내의 조의 등에서의 논의는 거의 불패였다고 한다.[24] 그러나 상대를 승복시키는 것과 진정으로 납득시키는 것은 미묘하게 달랐다. 오랜 맹우였던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도 종종 그의 저의를 의심했다고 한다. 마츠다이라 슌가쿠는 요시노부를 "100가지 재주와 꾀가 있으나 단 한 가지의 담력도 없다(百の才能や智略があるが、ただ一つの胆力もない)"라고 평하기도 했다.##
역사학자 이에치카 요시키(家近良樹)는 "에도막부 말기 정치의 중심 교토에서 정치적 경험을 쌓았고 권모술수에도 뛰어났던 그의 능력은 돋보였다. 요시노부는 신하나 주위에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고고한 쇼군이었다. 그러므로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이 에도막부 말기 정치 사상 최대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정봉환이다. 요시노부라는 개성(個性)이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요시노부에 이상하리만치 부족한 것이 있었다. 막신이나 민중에 대한 관심, 배려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막부에서 조정으로 정치를 반납하면 당연히 많은 막신이 실직한다. 하지만 대정봉환을 결단함에 있어, 요시노부가 막신의 기분이나 생활에 고민하고 배려하거나 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보신전쟁 때 너무 쉽게 전쟁을 포기했다라며 아군(구 막부군)은 물론 적군(신정부군)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다.[25] 더욱이 장병들에게 싸우라고 엄명해 놓고, 자신은 몰래 야반도주했다.##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부터 내려오던 우마지루시[馬印]인 금부채는 잃어버렸지만[27] 애첩은 소중히 챙겨왔다는 썰이 있었을 정도. 그러나 어차피 막부 중심의 개혁이라는 건 조선의 동도서기와 청나라의 양무운동에서 보듯이 한계가 명백했던데다 서방 여러 국가들이 본격적인 개입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지속할 경우 후에 일어날 일은 일본의 식민지화였으니[28] 대국을 고려하여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그런 식으로라면 본인이 쇼군이었으므로 아예 그 자리에서 개혁을 수행하면 그만 아니냐, 혹은 요시노부가 진심으로 대정봉환의 의사가 있었다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알아서 다 바치고 기었으면 되므로 보신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복잡한 측면 때문에 극과 극을 달리는데, 아는 건 많지만 유약한 엘리트이거나 심하면 약삭빠르고 치졸한 배신자 혹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묘사될 때도 있고, 극도의 현실주의자이거나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며, 고도의 정치적 감각을 보유한 현자로 묘사될 때도 있다. 강경파가 많았던 막부측 인사들은 후일 막부를 엎고 수만 명의 신하(특히 아이즈 번)를 희생시킨 주제에 홀로 유유자적하게 취미생활을 즐기며 우아한 신사로 인생을 마친 그를 경멸해, 그의 이야기가 나오면 불쾌감을 숨기지 않거나 아예 일체의 연락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29] 이렇게 유유자적 말년을 보낸 그에게 실망하여, 신하였던 이타쿠라 가쓰키요(板倉勝静)는 "요시노부공과 행동을 같이 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시대를 제대로 읽고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만일 요시노부가 권력을 탐하여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끝까지 내전을 벌였다면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는 더욱 늦춰졌거나 아예 실패로 끝나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했을지 모를 일이다.[30] 역사학자 마치다 아키히로(町田明広)는 그의 행적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하기도 했다.#
"요시노부는 근세인(近世人)이면서도 현대인과 같은 논리성과 사고력을 갖추고, 게다가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뛰어나고, 타인을 압도하는 인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자신의 말로 상대에게 전하는 것을 생략해, 직감과 신념으로 신속히 행동했기 때문에, 그 동향은 이해하기 어렵고, 단지 '고집'이라고 보였을 때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근세인이며, 가장 조정을 준봉(遵奉)하고 고메이 천황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했다. 근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너무 일찍 태어난 현대인"
이후 객관적인 평가가 증가해 온 메이지 시대인 1880년대 무렵부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재평가론이 높아졌다. 요시노부가 철저하게 공순근신(恭順謹慎)해 에도 무혈개성 등을 단행함으로써 막부군과 정부군의 전면 내전을 피해 비교적 원활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대 일본의 독립성이 지켜지고, 메이지 유신에 대한 공적이 크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역사학자 하기노 요시유키(萩野由之)는 요시노부가 고분고분히 명령을 따라 교토나 에도가 초토화되는 것을 모면했으며, 또 프랑스의 원조를 거절했기 때문에 외국의 개입이 없었다고 해 유신 최대의 공로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토리가야베 슌테이(鳥谷部春汀)는 제2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은 요시노부의 공적이라는 등 극찬하기도 했다.#
역사학자 이시다 미치후미(磯田道史)는 라고 평가했다.#
▲ 다이쇼 시대의 교과서 → 2019년의 교과서 |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한 평가는 시대가 변하면서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일본의 교과서에서 볼 수 있다. 다이쇼 시대의 교과서에서는 그에 대해 '도망쳤다' '죄를 사죄했다'라고 삿초동맹군과의 싸움에 패해 도망친 끝에, 성을 내준 겁쟁이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2019년 기준 역사 교과서를 보면 '프랑스군의 군사원조를 거절해 외국의 개입을 막고 일본의 독립을 지키는 것으로 이어진 명군'이라고 쓰여져 있다.# 타임슬립 닥터 진이나 바람의 빛 같은 막부 말기를 다룬 만화에서도 취급이 좋다. 특히 바람의 빛에서의 요시노부는 그야말로 상당히 유쾌한 청년. 하지만 요시노부가 모티브로 추정되는 은혼의 히토츠바시 노부노부는 취급이 영 좋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막부를 없애고 신정부를 수립하면서 요시노부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한 유신 삼걸(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은 비참하게 요절했으나[32], 정작 요시노부 본인은 다이쇼 시대까지 살면서 그 천수를 누렸다. 그의 처세가 쇼군 입장이 아닌 개인으로선 현명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6. 여담
- 그는 말년에"과거 죽을 각오를 한 적이 세 번 있었다"
고 술회했는데, 그 중 하나가 '금문의 변'에서의 초슈 토벌이었고, 또 하나는 신정부군이 에도에 진군해 왔을 때였다. 오사카성에서 도망쳐 돌아온 요시노부는 우에노 간에이지 대자원에서 근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할복 발언을 한 장기간에 걸쳐 문제가 된 조약 칙허의 해결때의 일이었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단행하자 사카모토 료마는 요시노부에게"쇼군님의 심중을 깊이 헤아린다. 용케도 단행되었다. 나는 맹세코 이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고 적어 편지를 보냈다. 료마는 이 편지를 보내고 한 달 뒤 암살되었다.# 참고로 당시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카모토 료마가 누군지 몰랐었다.
- 건강을 챙기고 몸을 가꾸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50세가 넘은 요시노부에게 자전거 타기는 신체를 단련하는 운동의 하나였고, 게다가 카메라를 비롯한 서양의 물건에 관심이 있었다.#
- 약학서를 기초로 스스로 약을 조제해, 컨디션에 따라 복용하고 있었다고 한다.[33] 식생활도 보리밥에 된장 등 건강식만 먹었다고 한다. 유약해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식성도 엄청 좋았다고 하며 참치, 장어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개양환'으로 시나가와 바다에 도착한 요시노부는, 정월 12일 아침에 상륙해 하마고텐에 들어가자, 푸성귀와 같은 안색의 막각(막부의 최고 수뇌부)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하인을 불러들여 '긴 수도 생활과 유람으로 몸의 지방이 빠져 뼈가 산산조각 나 버린 것 같다. 장어구이를 사 오너라'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레이칸지마(霊岸島)에 있는 다이코쿠야(大黒屋)에서 구입하라'고 가게까지 지정했다고 한다.('도쿠가와 가문에 전해지는 도쿠가와 400년의 뒷면 양생훈'에서)#
▲ 당시 자전거를 즐겨 탄 요시노부를 그린 그림 |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이 도쿄에 자전거를 주문해, 그 후 타고 다니고 있다"[34]
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하인들이 쓴 《가부일기》에 의하면, 요시노부가 자전거에 빠진 것은, 40대 후반부터 50대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일기에는 자전거를 타는 행위를 오늘도 자전거로 운동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많이 먹지 않았던 돼지고기를 즐겨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부타이치토노"(豚一殿)였다. 당시 일본인은 공식적으로는 육류를 먹지 않았다. 당당하게 먹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보고 사람들이 놀래서 지은 별명이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걱정하지 않았고, 요코하마 항구가 개방되면 재빨리 고기를 주문했다고 한다.#
- 그는 검은콩을 매일 아침 100알(200알이라는 설도 있음) 먹고 우유를 마시기도 했다. 이는 히토츠바시 가문에 양자로 보낸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다수 보낸 편지 중에 검은 콩은 하루에 200알씩 먹고 우유도 먹으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던 건강법임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의 우유는 일반적인 일본인에게는 그다지 친숙하지 않았던 음료였다. 그런데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미토 번에 목장을 만들 계획을 일찍이 세우고 우유를 원료로 한 버터 등의 가공품도 개시했다.
- 일본 대중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반응으로는 쇼군으로서 전쟁을 포기하고 도망을 쳤다는 부정적인 반응과 일본 전체로 보면 내전을 크게 만들지 않았고, 프랑스나 영국 등의 서양 열강들의 개입에 의한 영향도 최소한으로 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뉜다. 심지어 그를 애국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일본 대중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인물 중 한 명이다.
- 제일국립은행의 초대 행장이자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막부 말기에 근황파의 지사로 활동을 시작하여 8월 18일 정변 후에 요시노부를 섬겼다. 마침내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었을 때 시부사와도 막신[幕臣]이 되었다. 대정봉환 이후 귀국한 시부사와 에이이치에게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제 네가 좋아하는 길을 가라'고 말하며 독립시켰다. 시부사와는 요시노부가 퇴위한 이후 메이지 시대에 들어가서도 요시노부와 관계를 계속 가진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36] 이들의 관계는 대하드라마 청천을 찔러라에서 잘 그려졌다. 시부사와는 요시노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활동을 계속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이후 일본 은행이나 도쿄증권거래소 등을 설립했다. 일본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기틀을 잡아 현대에 와서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지게 된다. 요시노부가 발탁한 인재 중 최고의 아웃풋이라고 볼 수 있다.[37]내가 옛 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의 전기를 편찬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나는 히토츠바시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가신은 아니다. 또, 그 녹을 받았다고 해도, 그 기간은 겨우 5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죽음을 각오한 생명을 요시노부공에 의해서 구하여, 내가 오늘 있는 것은, 오로지 히토츠바시 사관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큰 은혜를 차마 잊을 수 없고, 또 세간에서 요시노부 공을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혹시 잘못해서 후세에 전하게 되기라도 한다면 참으로 안되고 유감스럽고 후세를 그르치는 일도 많을 것 같아 내가 기꺼이 요시노부 공의 전기를 편찬하기로 한 것이다.
-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저술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徳川慶喜公伝)에 의하면 나이가 들어도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기억이 명확한 것이 놀라울 뿐'이라고 적혀있다.
- 말년에는 황태자였던 다이쇼 천황과 친해져서 '케이키씨' '전하'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거의 매년 한 번은 만나는 사이였다고 한다.# 다이쇼 덴노는 요시노부가 가진 서양총을 마음에 들어 '제발 양보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요시노부가 그 총을 좋아했기 때문에 비슷한 것을 어딘가에서 구입해서 진상했다고 한다.#
- 후년에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요시노부의 전기 편찬을 목표로 해, 요시노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는 좌담회를 실시했다. 이때 요시노부는"죠슈는 처음부터 적대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지만 사쓰마는 배신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長州は最初から敵対していたから許せるが、薩摩は裏切ってゆるせない)"
고 말했다.#
-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키는 150cm 전후였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에도 시대 남성들의 평균 키가 155cm였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은거하면서 그린 그림[38]# |
▲ 금리어수위 총독 재임 당시 촬영한 사진 |
- 쇼군 사임 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사진촬영을 즐기게 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사진 촬영을 시작한 계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마지막 미토 번의 번주로, 형제 중 가장 사이가 좋았던 이복동생 도쿠가와 아키타케(徳川昭武)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하인에 의해서 기록된 《도쿠가와 게이키 가부일기》(徳川慶喜家扶日記)에 의하면, 1893년 이후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진 촬영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시즈오카에 사진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었던 사진가 도쿠다 코키치(徳田孝吉)를 자택으로 불러, 사진 촬영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시즈오카 구노야마 산과 시미즈 항, 아베 강 등에서 빈번하게 사진 촬영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복동생 아키타케와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다녔다고 한다.
▲ 이복 동생 도쿠가와 아키타케(徳川昭武) |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찍은 도쿄의 아이들[39] | ▲ 사진을 찍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뒷모습을 찍은 이복 동생 도쿠가와 아키타케 |
-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아버지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지시한 농민에게 감사를 담아 기도하는 것을 매일의 습관으로 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상 위에 둔 농인형에 한 젓가락의 쌀을 올려 손을 모으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그의 심복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에게 식사 시중을 드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에서"시동(小姓 귀인 곁에서 시중을 든 소년)의 직장은 밥상의 사환을 시작으로 하여 머리 묶는 법까지 터득해야 하는데, 히라오카 엔시로의 처음 시종을 배명케 할 때에는 무엇 하나 익숙해지지 못하고 (중략) 공(요시노부)께서 보시어 식사 시중을 드는 법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에게 국자를 잡고 그릇을 들고 그 모양을 보여 자세히 가르쳐 주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재미있는 점은 고죠(小姓)라고 시중드는 하인인 히라오카 엔시로가 1822년생으로, 1837년생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보다 열 다섯 살이 많았다. 어린 소년인 요시노부가 어른인 엔시로에게 식사 시중을 드는 예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실은 엔시로는 요시노부의 친부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아들이 잘못을 지적해 줄 수도 있는 가신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판단해서 측근인 후지타 토코(藤田東湖)에게 부탁해서 뽑은 인재였다. 엔시로는 상급무사 하타모토 집안 출신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고 평가한 두뇌명석한 수재로 그가 암살당해서 죽기 전까지 요시노부의 지혜주머니 제갈량 역할을 했다. 암살당한 이유도 그가 요시노부의 곁에 있으면 곤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대 기준에도 준수한 외모였다. 당시 요시노부는 미청년으로 오오쿠들로부터도 '미려하다'라고 칭찬이 자자할 정도의 잘생긴 외모였다.# 주일영국공사 어니스트 사토는 요시노부를"쇼군은 내가 지금껏 본 일본인 중에서 가장 귀족적인 용모를 갖춘 사람으로, 피부가 희고 앞이마가 빼어나며 뚜렷한 콧대를 가진 훌륭한 신사였다.(将軍は、私がこれまで見た日本人の中で最も貴族的な容貌をそなえた一人で、色が白く、前額が秀で、くっきりした鼻つき——の立派な紳士であった)"
라고 평가했다.
- 요시노부와 일본 철도에 대해 이런 일화가 남아 있다. 동사의 토요시마선(이케부쿠로-타바타=현야마테선의 일부, 1903년 개업)은 스가모에 있는 요시노부의 저택 앞에 노선을 깔아, 정거장(=역)도 설치하게 되었다. 요시노부는 개업 1년 반 전에 약 2km 떨어진 코이시카와에 이사해 버렸다. 현재 JR 스가모역 앞의 요시노부 저택 터에 서 있는 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이사하는 것은) 바로 옆을 철도가 다니도록 결정되어, 그 소음을 싫어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당시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는 수많은 연기와 소리를 내었고 정거장에는 인파가 몰렸다. 《그 후의 요시노부》를 쓴 이에치카 요시키 오사카 경제대 명예교수는 소리에 대한 감각은 당시와 현대는 놀랄 정도로 달랐다. 고요한 삶에 익숙해진 기쁨을 견딜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요시노부는 13년 전에도 비슷한 형태로 이사를 겪었다 .쇼군 퇴위 후의 20년 남짓, 은거 생활의 장소로서 온 시즈오카 저택이, 도카이도 본선 연장으로 개설되는 시즈오카 역의 눈앞이 되었기 때문이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시즈오카를 떠난 후 그의 남은 저택을 매입해 호텔로 짓기도 했다. 호텔의 이름은 아오이 호텔(葵ホテル). 1900년 11월 25일에 개업했으나 1905년 11월 8일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전쟁터에서 입었던 진바오리 '白羅紗葵紋付陣羽織'. 현재 도쿄 에도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 2015년 일본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요시노부를 실제로 봤다고 주장하는 105세의 노인이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10년생 여성으로 어린 시절 도쿄 니혼바시에서 요시노부가 행렬을 따라 걸어가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문가(대하드라마의 시대 고증도 한 사이토 요이치)에 의하면, 이 무렵 말년의 요시노부는, 니혼바시를 방문했거나 니혼바시의 문자의 휘호를 하고 있거나 하는 등 니혼바시와 관계가 깊어,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하는 간접적인 증거로서, 이 증언은 확실한 사료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덧붙여서 이 방송은 이 증언에 도달하기 위해서 100세가 넘는 고령자들을 닥치는 대로 인터뷰했기 때문에, 다른 역사 인물들(오쿠마 시게노부나 더글러스 맥아더)의 목격 정보나, 관동대지진이나 중일전쟁 등의 증언들도 손에 넣고 있어 예능 프로그램답지 않은 엄청난 역사 프로그램이 되었다. 그래서 이 방송은 극찬을 받아 갤럭시상을 받기도 했다.
- 2018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인 이데 쿠미코(井出久美子)가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의 생활을 엮은 자서전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 자서전은 손녀의 시선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을 적었고, 전쟁 이전까지 살았던 약 3,000평의 넓은 부지에서의 생활과 남편과의 사별, 전후 일변한 일상생활 등을 적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거처로 하고 있었던 도쿄시 코이시카와구 코히나타 다이로쿠텐쵸우(현재의 도쿄도 분쿄구 카스가)의 저택에서 자랐다. 광대한 부지에 지어진 저택에는 가족을 포함해 50명이나 되는 동거인이 있었다고 한다.#
▲ 후케츠루(浮月楼) |
- 이바라키현 미토시에 동상이 2개가 있다. 미즈호은행 미토 지점 앞에 동상이 있으며#, 센바공원(千波公園) 안에 요시노부의 아버지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요시노부의 동상이 있다.# 두 개의 동상 모두 어린 시절의 요시노부의 모습을 동상으로 재현했다.
- 니혼바시 다리에 걸린 간판의 글씨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쓴 것이다.# 초대 니혼바시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인 요시노부에게 휘호가 부탁했다. 당시의 도쿄시장인 오자키 유키오가 "에도로부터 도쿄로 전쟁을 겪지 않고 무혈 개성할 수 있던 것은 오로지 굴욕을 참아, 패를 인정하고 공순 자세를 관철한 요시노부공의 덕분이다. 말하자면 도쿄의 제일가는 은인이야말로 휘호를 기원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요시노부에게 의뢰를 했다고 한다.#
- 요시노부의 하녀 코지마 이토(小島糸)의 회상에 의하면, 현미빵에 관심을 가져, 먹지도 않으면서 자주 사러 가게 했다고 한다. 또 반합으로 밥을 짓는 데 열중했는데 알루미늄이 인체에 해롭지 않을까 의심해 은제 제품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7. 창작물에서
-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고 굵직한 사건에 관여했기 때문에 일본 근대사를 다룬 사극에선 단골로 등장하는데, NHK 대하드라마에선 1968년 <료마가 간다>부터 2021년 <청천을 찔러라>까지 총 11편이나 등장했다. 대하드라마에서 최초로 이 역할을 맡은 이는 가부키 배우 오노에 타츠노스케(초대)이며, 이후 츠가와 마사히코[40], 이토 타카오, 미타무라 쿠니히코, 모토키 마사히로, 이마이 토모히코, 히라 타케히로, 고이즈미 고타로, 마츠다 쇼타, 쿠사나기 츠요시 등 쟁쟁한 배우들이 이 역할을 거쳤다.
▲ 모토키 마사히로가 연기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
막말시기를 막부와 요시노부의 관점에서 바라본 정치드라마로 아버지인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살아있을 때는 그다지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으며 에도 환락가들을 잠행하는 모습을 보이나 아버지와 정적이었던 이이 나오스케 사후에는 각성하고, 쇼군 후견직에 오르면서는 복잡한 정세 속에도 양이와 개국을 오가는 과감하고도 현실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이에모치 사후에 쇼군이 되어 어떡하든 막부를 지키고자 신헌법 초안을 지시하고 임시방편으로 대정봉환도 단행하나, 대정봉환에 분개한 막부군의 편을 들어 조정에서 역적 취급을 받자 에도로 돌아가며 쇼군직을 사직하고 여생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인생과 막부 말기의 상황을 잘 그려낸 명작이라고 볼 수 있다. 기획의도를 번역한 글
▲ 쿠사나기 츠요시가 연기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
-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해 쓴 소설 중 가장 유명한것은 일본 역사 소설의 거장 시바 료타로가 저술한 소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最後の将軍 徳川慶喜)다. 누계 발행 부수는 240만 3,000부로 크게 성공한 베스트셀러다. 요시노부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원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하드라마의 원작으로는 분량이 짧은 소설이라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쓴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도 참고했다. 시바 료타로는 요시노부를 지식이 풍부한 인물이지만, 감정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인물로 해석했다.
- 하야시 마리코의 소설 《세고돈》에서도 그를 다뤘고, 이케맨 시리즈의 하나인 러브 인 교토의 등장 캐릭터이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이케맨 막말) 참조.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갑툭튀한 조선 국왕에 의한 나비효과로 얻은 경제적 반사이익 덕분에 결국은 삿초동맹을 이겼고,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의 자리를 지켰다. 다른 열강과의 불평등조약 때문에,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통한 무역으로서만 일본의 산업기반이 유지되는 상황. 거기다 여전한 반막부파의 존재로 인해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일단 일본을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2인자로 유지시키면서, 훗날 일본의 외교적인 입지를 위해 해군력의 증강 및 극동보건기구의 일본 유치, 조약기구 합종군 파견 등의 활동을 하는 중이다. 도쿠가와 요시노부(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문서 참조.
- 《고종, 군밤의 왕》에서 조선이 파견한 수신사가 불러온 나비효과 덕분에 보신전쟁이 무승부로 끝이 나 쇼군직을 반납하고 막부를 해체한 이후에도 동일본의 좌장으로 군림하면서 신정부의 정책을 도울 것은 돕고 막을 것을 막았다. 그리고 대정봉환 딱 30년만에 대일본연방의 초대 민선 총리가 되어 10년 동안 집권했다. 마지막 쇼군이자 최초의 총리라는 해괴망측한 타이틀을 얻게 된 셈이다. 마침 조상님인 이에야스도 비슷하게 30년 견디고 쇼군이 된 적이 있기에 절묘하다는 평.
- 기관막말이문 라스트 카발리어에서는 주인공과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조연에 불과하지만 루트에 따라서 역사대로 아군만 남기고 도망가서 무기력하게 막부의 종언을 맞이하게 만들거나 휘하의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분노에 찬 충언을 듣고 각성하여 일어서서 신정부군 세력들을 엿먹이고 구 막부체제도 해체하며 일본 개혁의 토대를 만드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의 파워업키트 가상 시나리오에서 등장한다.
- 루팡 3세 불꽃의 기억~TOKYO CRISIS~는 시가 2000억엔이라는 도쿠가와 매장금의 열쇠를 쥐고 있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두 장의 초상화 사진을 놓고 루팡과 마이클 스즈키의 쟁탈전을 그렸다.
- 용과 같이 유신!에서는 도지마 다이고의 모델링으로 등장하며, 도지마의 성우인 배우 토쿠시게 사츠시가 연기한다. 료마-사이토가 오키타 소지와 함께 쇼군을 만나겠다는 명목으로 둘이서 성을 깽판친 끝에 만나게 된다. 료마의 뜻을 듣고 그의 의지를 시험해보겠다며 맞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폼으로 쇼군이 되지 않았다는 본인 말마따나 정말 무식하게(...) 강캐로 등장한다.
- 2021년 10월 개봉된 히지카타 토시조와 신센구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타올라라 검[42]'에서는 야마다 유키가 도쿠가와 요시노부 역을 맡았다. 여기서는 상당히 냉혹한 인물로 등장한다.
8. 외부 링크
[1] 음력 9월 29일[2] 히토쓰바시 가문은 도쿠가와 모치나가가 계승했다. 모치나가는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구와나 번주 마츠다이라 사다아키와 함께 다카스 4형제의 일원으로, 오와리 번의 번주였다가 은거했지만 동생 카타모리 등의 알선으로 1866년 요시노부의 뒤를 이어 히토쓰바시 가문을 물려받았다.[3] 1대 쇼군 후견직이었던 다야스 요시요리는 쇼군 이에모치가 성년이 되었음을 이유로 들며 반대하였으나 공무합체파였던 시마즈 히사미츠의 건의에 따라 임명된다.[4] 쇼군 재임은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으로 끊어졌지만,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 자리는 고산쿄(어삼경)의 일원인 다야스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계승했다.[5] 요시노부는 1902년 도쿠가와 종가와는 독립적으로 공작위를 수여받아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을 개창했다. 가문과 작위는 요시노부 사후 요시노부의 7남 도쿠가와 요시히사가 계승했다.[6] 훈독과 음독의 차이[7] 하지만 키에 대한 증거인 위패가 없고,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온 키이다. 키가 155cm~157cm라는 소문이 있다.[8] 에도 막부는 물론이며 일본 막부 역사상 유일하게 사진을 찍은 쇼군이 도쿠가와 요시노부로 알려져있다. 다만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도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에모치 쇼군의 정실부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和宮親子內親王)의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이에모치로 추정되는 인물의 사진 유리원판이 발견되었지만, 하루 만에 사진 속의 화상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9] 흑백 사진 링크.[10] 쇼켄 황후의 친정아버지인 이치죠 타다카(一條忠香)의 양녀.[11] 7남 요시히사의 딸로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의 친왕비가 되는 키쿠코 비다.[12] 자녀가 워낙 많았기에 요시노부의 4남 아츠시(厚)와 9남 마코토(誠)가 분가해서 남작이 되었고, 그 가문들은 지금까지 건재하지만, 지금 와서 요시노부 가문 본가를 잇지는 않는다.[大納言] 우대신(右大臣) 다음의 정부 고관으로, 태정관(太政官)의 차관.[中納言] 태정관(太政官)의 차관. 대납언의 아래.[15] 내대신(内大臣)의 관직 사퇴와 영지의 일부 반납(辞官納地)를 명령하는 것[討薩の表] 사쓰마(薩摩)를 토벌하자는 격문[恭順] 공손하고 온순한 태도로 있겠다는 뜻이다. 항복하겠다는 의미.[18] 이때 가쓰 가이슈는 요시노부가 일부러 자신을 찾아와 예를 받아 살아 있는 보람이 있었다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19] 훗날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총리대신이 총선에서 패해 55년 체제가 깨지고 호소카와 모리히로에게 정권을 뺏기자 자민당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라고 불렸다.[20] 요시노부가 사카모토 료마의 존재를 알게된 건 아키하루에 들어간 이후였다고 한다. 사카모토 료마의 존재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서야 대중들에게 조금씩 알려질 정도로 당대에는 지명도가 낮았다.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인 1914년 3월 24일, 독일의 지멘스 회사 사건(해군 비리) 때문에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제1차 내각이 소멸당했던 직후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인물들 중 (1903년 12월 4일부터 귀족원 의장을 맡고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27일에 정식 총리 후보로 출마했으나 2일 이후에는 일본 정부 내각에서 도쿠가와 정권으로 번지는 걸 우려했기 때문에 (그가) 자진 사퇴했다.(그 직후로는 오쿠마 시게노부의 총리 당선으로 자리잡았음)[21] 시부사와는 마지막까지 요시노부에게 충성심을 보이며 그를 받들어 모셨다. 시부사와는 "공께서는 세상으로부터 도쿠가와의 가문을 분쇄하러 들어갔다든가, 목숨을 아까워한다든가, 여러가지 악평을 받은 것을 일절 돌아보지 않고,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러도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는 실로 그 인격의 높은 곳으로 저의 경모를 금치 못할 바입니다(公は世間から徳川の家を潰しに入ったとか、命を惜しむとか、様々に悪評を受けられたのを一切顧みず、何の言い訳もされなかったばかりか、今日に至ってもこのことについては何も言われません。これは実にその人格の高いところで、私の敬慕にたえないところです)"라고 글을 적기도 했다.[22] 태도·의견 따위가 싹 바뀐다는 뜻[23] 그래서 별명이 '이신덴'(二心殿)이었다. 참고로 사이고 다카모리는 요시노부에 대해 "확실히 인재이지만, 결단력이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確かに人材ではあるが決断力を欠いていられるようである)"라는 평을 남겼다.[24]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말솜씨가 뛰어나 당대 제일의 논객이기도 했다.[25] 실제로도 막부는 다시 싸워 볼 만한 저력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작정하고 캐삭빵 벌였다가는 향후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의 역량을 엄청나게 까먹었을 것이다.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을 인정하고 퇴장한 요시노부의 결단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로 흘렀다.[馬印] 전국시대에 대장의 말 앞에 세워두는 일종의 표식이다.[27] 여기서 잃어버린건 오사카에 있던 금부채 얘기로, 금부채는 에도 성에도 하나 더 있었다. 에도 성의 것은 현재에도 남아있으며 쿠노잔 토쇼구(久能山東照宮)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28] 청나라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았기에 주권을 존중할 필요도 없었다.[29]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는 설이 유력하다. 신 정부의 불만 분자로 몰릴 위험성이 다분해 취미에 몰두해 세속을 떠나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자세를 과시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구 막부 측 인사의 요시노부 홀대를 잘 보여주는 창작물 캐릭터가 바로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의 시노모리 아오시다. 나름대로 희생을 줄여보려는 생각에 항복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비겁해 보여 싫다라고 평가했다.[30] 실제로 개혁 세력과 반대 세력이 끝까지 대립한 청나라와 조선은 험한 꼴을 봤다.[31] 여담이지만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한 유아사 구라헤이는 고노에 후미마로를 비판하며 "후지산을 멀리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돌이 굴러다니는 황무지인데, 고노에 후미마로라는 사람의 성품이 딱 그러하다."라는 인물평을 남겼다. 같은 후지산에 빗대면서도 정 반대의 의미로 쓰인 사례.[32] 사이고는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하고 할복 자살, 오쿠보는 사족들에 의해 암살, 기도 다카요시는 지병으로 인해 세이난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사망.[33]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취미도 스스로 약을 조제하는 것이었다.[34] 당시 1대 300엔. 현재 가치로 600만 엔. 이즈음 요시노부는 양아들한테서 1달엔 1,000엔씩 생활비를 받고 있었는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을 자전거를 구입하는데 쓴 셈이다.[幕臣] 쇼군을 직접 주인으로 섬기는 무사를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10,000석 미만의 고쿠다카를 보유한 하타모토 또는 고케닌을 지칭하는데, 하타모토는 쇼군을 알현할 수 있었지만 고케닌은 쇼군을 알현할 수 없었다. 즉 농민 출신이었던 시부사와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고 쇼군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하타모토가 된 것이다.[36] 시부사와 이외에는 가쓰 가이슈, 에노모토 다케아키,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등과도 교류를 했다.[37] 2024년에 새로 바뀌는 일본 엔 1만엔의 지폐 모델이 되기도 했다.[38] 조사를 통해 그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두꺼운 종이에 손수 만든 유화 물감으로 그려져 있다. 풍경이 그려진 곳 등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요시노부가 직접 사진을 많이 촬영했기 때문에 그것들이 조합되어 실제로는 없는 이상의 풍경이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39] 코히나타 다이로쿠텐초 저택 부지내의 연립 주택에 사는 아이들을 촬영한 것이다.[40] 도쿠가와 이에야스만 무려 5번을 연기했고 여러 도쿠가와 쇼군을 연기한 도쿠가와 전문 배우이다.[41] 일본을 대표하는 거물급 연기파 배우 중 한 명이다. 굿' 바이: Good&Bye으로 유명하며,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 쇼와 천황 역으로 등장했다. 또한 배우 설경구가 나왔던 사극 쇼토쿠 태자에서 주인공 쇼토쿠 태자를 연기하기도 했다.[42] 시바 료타로의 동명의 원작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