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16:57:49

시바 료타로

파일:아사히 신문 로고.svg 아사히 선정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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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이 2000년 투표로 선정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의 리스트이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나쓰메 소세키 무라사키 시키부 시바 료타로 미야자와 겐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츠오 바쇼 다자이 오사무 마쓰모토 세이초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리시마 타케오 무라카미 하루키 엔도 슈사쿠 세이 쇼나곤 요사노 아키코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모리 오가이 요시카와 에이지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류 이시카와 다쿠보쿠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노우에 야스시 미우라 아야코 아베 코보 다카무라 고타로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후지사와 슈헤이 시마자키 도손 나카하라 츄야 고바야시 잇사 세리자와 고지로
31위부터는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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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시바 료타로
[ruby(司, ruby=し)][ruby(馬, ruby=ば)][ruby(遼, ruby=りょう)][ruby(太, ruby=た)][ruby(郎, ruby=ろう)][1]|Ryōtarō Shiba
파일:UWDUFIQCRFJVZJFCM3QDZ3GTW시바료타로4.jpg
본명 후쿠다 데이이치 (福田定一)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생 1923년 8월 7일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오사카부 오사카시
미나미구 난바 니시칸다정
사망 1996년 2월 12일 (향년 72세)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호엔자카
국립 오사카 병원
직업 소설가, 비평가
수훈 문화공로자 (1991년 수상)
문화훈장 (1993년 수상)
종3위 (1996년 사후 추서)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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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colbgcolor=#fff,#191919>오사카시립난바시오쿠사심상소학교 (졸업)
우에미야중학교 (졸업)
오사카외국어학교 (몽골어학과 / 졸업)
묘소 교토시 히가시야마 니시혼간지
부모 아버지 후쿠다 제조
어머니 후쿠다 나가에다
배우자 전처 (1952년 결혼 - 1954년 이혼)[2]
마츠자카 미도리 (1958년 결혼)
자녀 장남 후쿠다 야오시
장르 소설, 비평
등단 페르시아의 환술사 (1956) }}}}}}}}}

1. 개요2. 활동3. 기념관4. 저서5. 영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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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째서 일본인은 이렇게 바보가 된 걸까' 하고 22살 때 생각했습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을 텐데. 거기서부터 저의 소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을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일본은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는 없을 테니까. 쇼와로 와서 잘못된 것이 틀림없어.' 그러나 옛날 일들을 잘 몰랐습니다.
35~36살 때부터 문헌과 자료를 읽으면서 쓴 소설은 22살 때의 자신에게 부친 편지였습니다.
<료마가 간다>도 <언덕 위의 구름>도 그 이후의 작품들도 '일본인이란 것은 뭐야?'가 테마였습니다.
1992년에 헤이세이 3년 일본 문화공로자 수상 기자회견에서. 당시 68세.

일본의 유명 소설가. 현대의 시점에서 역사를 되짚어 보는 역사 소설과 일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글을 남긴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본명은 후쿠다 데이이치(福田 定一)이며, 1923년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태어났다. 사망 시점은 1996년으로 사인은 흉부 대동맥 파열. 공교롭게도 소설가 엔도 슈사쿠와 출생년도와 사망년도가 동일하다.

2. 활동

일본 역사소설에 크게 기여한 패전 이후 쇼와 시대의 저명한 역사소설가로, 특히 일본 근대사 관련 역사소설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며, 그의 주요 소설작품들은 일본의 역사소설 팬이라면 적어도 한번은 거쳐가기 마련인 스테디셀러로 위치하고 있다. 그가 작품 등에서 피력한 역사관(소위 시바 사관)은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수많은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사후 25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저런 의미에서 영향력이 크고, 여기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공격과 비평, 비판을 많이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팬도 엄청나게 많지만, 안티도 상당히 많은 작가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작품을 쓰기로 유명했다. 또다른 유명 역사소설가인 요시카와 에이지와 비교할 때, "요시카와 에이지는 서재에서 펜 1자루에 의지하여 소설을 쓰는데 시바 료타로는 트럭 1대분의 자료를 들고 와서 소설을 쓴다."는 말이 있을 정도. 고서점 거리에 트럭 1대를 몰고 나타나 손에 잡히는 대로 트럭에 던져 넣었다느니, '언덕 위의 구름'을 집필할 당시 역시 러일전쟁을 소재로 쓰려던 작가가 있었는데 자료 수집을 위해 고서점에 가보니 시바 료타로가 다 쓸어가버려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등의 전설이 남아 있다. 심지어 학술 논문에 인용이 될 정도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한 듯, '시바 료타로'라는 필명도 '사마천[3](일본식 발음으로 '시바 센')에 미치려면 아직 멀었다(遼 요원하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중일 문화 교류를 위해 교류 협회의 이사직을 맡았을 때에도 "내 작품이 뛰어나다고 해도 '스승' 사마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러한 철저한 고증이 곧 역사적 사실에 항상 충실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의 주관 및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적 사실을 철저한 조사를 통해 재구성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당대 역사소설가의 기준으론 사실성에 많이 신경을 쓰고 집필을 했지만, 시바가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대는 1960~70년대[4]로 지금으로부터 50~60년 전이라, 당시 기준으론 아무리 앞서가는 고증을 했더라도 반 세기 후를 사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니 이것저것 눈에 밟히는 부분이 더욱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 사람의 시선을 통해 소설화된 역사적 사실을 실제와 같다고 보기엔 위험한 면도 있고,[5] 맹목적으로 이를 수용할 경우 근래 일본 역사의 트렌드에 뒤쳐진 지식만으로 멈춰 서버릴 우려 역시 있는 것.[6] 일본식 역사소설의 한 축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소설과 평론을 왕복하는 서술법을 확고하게 다진 인물로, 장르가 다소 다르다고는 해도 다나카 요시키시오노 나나미와 같은 작가들도 이러한 시바 료타로의 스타일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시바 료타로 작품들의 특색은 역사 속에서 패자 혹은 무명으로 남겨진 이들에 대한 재조명이라 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등의 소위 1급 인물들은 작중 주인공들이 넘어야 할 벽 내지는 그들이 활동하는 무대라는 느낌이 강하며[7] 대신 사이토 도산, 아케치 미츠히데, 이시다 미츠나리, 야마우치 카즈토요 등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부정적으로 기록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인물들을 발굴해서 영웅화시켰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흔히 '시바 사관(司馬史觀)'이라고 부른다.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기에 관해 시바 사관의 특징을 간단히 설명한다면 일본을 급속히 근대화시킨 메이지 유신과 신정부, 그 시대의 일본인을 찬미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작가의 스타일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안티라느니 이시다 미츠나리를 광적으로 존경한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미츠나리에 대한 시바의 호의적인 서술은 사이토 도산에 대한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냥 그런 부류의 주인공을 다루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정도로 생각해둘 필요가 있다. 더욱이 작가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읽어보면 미츠나리의 인격적 결함도 서술하고 있어서 미츠나리 빠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에야스에 대해서는 "재미없는 현실주의자" 정도로 평가한 적이 있을 뿐이지 딱히 안티라고 보기도 힘들며,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이에야스가 천하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나 이에야스의 강점과 장점 역시 빼놓지 않고 잘 서술하고 있다. 다만 소설 속의 이에야스가 악역을 맡고 있어서 그렇게 보일 뿐.

가만히 보면 게임이나 만화 등 오늘날 일본 여러 매체에서 표현되는 센코쿠 시대 무장의 캐릭터에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다 노부나가의 스승처럼 묘사되는 사이토 도산, 불의와의 타협을 모르는 이시다 미츠나리, 여유만만한 성격의 시마 사콘, 단순한 모반자라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쓰고 싶어한다는 아케치 미츠히데 등.

상대적으로 한국에서는 비주류지만 일본에선 센고쿠 시대에 꿇리지 않는 인기를 누리는 막부 말기 인물들의 이미지에도 커다란 영향을 행사했다. 그의 작품들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작품들은 주로 이 시대를 다룬 소설들이기도 하니. 가장 메이저한 사례가 유신지사인 사카모토 료마와, 막부 옹호파 무장집단인 신센구미의 요인들이다. 특히 용감무쌍하고 호탕하지만 어딘가 허당인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 악역을 도맡으며 살벌한 규율로 조직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미청년 귀신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8] 붙임성이 좋고 나이에 맞지 않게 초연한 면이 있지만 한번 칼을 잡으면 사람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는 미소년풍 천재검사 오키타 소지란 이미지는 주로 시바의 소설 《타올라라 검》, 《신센구미 혈풍록》 등에서 조형된 것으로, 시바가 히트시킨 이 세 인물의 캐릭터성은 소설이 출간된지 5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신센구미를 다루는 대중매체의 묘사에 뿌리 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1946년부터 61년까지 기자 생활을 하며 틈틈이 작품을 발표했고[9] 현상소설용으로 발표한 첫 작품 《페르시아의 환술사》가 1956년 5월,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역사소설가 가이온지 조고로(소설 《천과 지》의 저자이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고단클럽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때 시바는 자기 작품을 총대 메고 밀어준 가이온지의 평론보다 자기 작품을 적극적으로 깎아내린 다른 모 심사위원의 평론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소설가로서의 장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지만, 당시 역사소설가로서 부동의 지위를 누리고 있던 가이온지의 지원사격은 시바에게 자신감을 주었으며, 이후 그가 자기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가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올빼미의 성》으로 1960년 나오키상을 수상, 일본에 닌자붐을 일으켰다.[10] 한국에서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흐름에 따라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동명의 영화로 알려져 있다.

1966년 기쿠치간상을 받은 《료마가 간다》라는 작품이 그의 가장 유명한 역사소설로,[11] 2500만부가 넘는 누계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 동명의 TV드라마만 다섯 작품이 만들어졌고, 이 소설의 영향을 받은 만화들이 여럿 출간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들에겐 역사적으로 잊혀진 인물에 가까웠던 사카모토 료마를 '제도적으로 차별받던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변변한 배경도 갖지 못한 입장에 있었음에도, 독자노선을 걸은 끝에 로닌의 몸으로 삿초 동맹의 성사에 큰 공을 세우고, 나중에는 과거의 동지들을 탄압했던 번 상층부 요인들까지 움직여 도쿠가와 막부대정봉환을 이끌어낸 직후 무대에서 사라진, 메이지 유신사의 기적같은 인물'로 묘사한 이 소설의 대히트로 료마의 대중적 이미지는 급등했고, 지금도 유신삼걸[12]조차 능가하는 메이지 유신의 現 아이콘으로 통하면서, 일본 역사인물 인기투표 TOP 5에 대부분 포함될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사카모토 료마가 실제로 유신사에서 수행한 역할과 업적이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해선 온갖 주장과 논의가 오가지만, 적어도 료마가 일본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트리거를 당긴 작품이 시바의 《료마가 간다》였다는 건 분명하다.

또한 《신센구미 혈풍록》은 만화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의 주 모티프를 제공한 소설이기도 하다. 실제 작가 와츠키 노부히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70년대 이후에는 소설 집필은 줄고,[13] '어쩌다 일본, 일본인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고심하는 에세이를 주로 썼다.

71년부터 96년까지 에세이집(기행문) <가도를 가다(街道をゆく)>를 집필 중 사망. 25년간 연재한 이 에세이집은 단행본으로 43권 분량이라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국내에는 이 중 2권 <한나라 기행>[14]과 28권 <탐라기행>만이 번역되었다. 한국 기행문이 2번째 기행문이라는 것이 의외라면 의외. 시바 료타로가 전선으로 끌려갈 때, 기차 안에서 서울역 인근의 청자 기와[15]를 덮은 지붕들을 보면서 '내가 만약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조선에 꼭 와봐야지'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일 수교가 되자마자 기를 써서 노력한 끝에 한국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한일 수교는 1965년, 이 책이 나온 것은 1972년. 대단한 근성이다.

작가 개인의 성향은 일단 보수 지식인에 가깝지만, 극우는 아니고 온건 보수 정도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본을 까는 데엔 주저함이 없다. 특히 대전 중 일본군에 대해서는 증오한다고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깐다. 이는 본인의 경험도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전쟁 말기 그는 학병장교로 전차소대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작전 중 "시민과 병사들이 패닉을 일으키면 어째야 하냐"고 상급자에게 묻자 "치어 죽이며 가라"는 대답을 듣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16] '전쟁 바보가 되어버린 일본인'을 규탄하기 위해 이후 소설을 쓸 결심을 했다고 한다.[17]

쇼와 시대에 대해서는 '귀태(鬼胎)"의 시대',[18] 일본사에서도 특이한 '비연속의 시대'라고 평했다. 즉, 뭔가 잘못돼서 이상해졌다는 것이다. 시바는 <이 나라의 형태(この国のかたち)>에서 이 귀태의 시대의 시작은 러일전쟁의 승리로[19] 일본 국민은 자국 우월주의(내셔널리즘)에 빠져, 군부의 폭주와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쇼와라는 귀태(鬼胎)의 시대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시바는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을 내셔널리즘(비뚤어진 애국심)과 패트리어티즘(애국심)으로 구분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내셔널리즘은 그저 집안 자랑이나 하고, 다른 집안을 업신여기고 깔본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쩌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계속 존경받을 수 있는 집안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감정을 국가적 규모로 행하는 것이 내셔널리즘과 패트리어티즘이라고 정의했다. 일본이 내셔널리즘(비뚤어진 애국심)이 폭주한 것은 러일전쟁의 승리가 계기였다고 시바는 생각했다. 러일전쟁 직후에 일본은 내셔널리즘이 아닌 패트리어티즘의 길을 선택해서, 해군을 축소하고 주변국과 사이좋게 협조하면서 국가를 발전시켰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 전의 다른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서술했음에도 불과하고 오직 쇼와 시대의 이 시기만큼은 "귀태"라는 단 한 마디로 어물쩍, 일본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 없이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본 내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좌파로부터는 메이지 시대쇼와 시대 초기를 단절하여 봄으로써 쇼와 시대 초기 일본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씨앗이 메이지 시대에 이미 뿌려졌음을 무시한다는 비판도 흔히 볼 수 있다. 반대로 극우파들에게는 '자학사관의 전파자'니 '친미보수'[20]니 하는 식으로 까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온건 보수라고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 한편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중증의 메이지. 쇼와 시대에 대한 비판도 엄밀히 따지면 "메이지 시대의 영광을 너희들이 다 말아먹었다"고 디스하는 모습에 가깝다.
시바사관이란, 메이지 시대를 합리적인 인간이 만들어낸 밝은 국가라고 찬미하고, 다른 한편으로 2차 대전 시기의 쇼와 시대(戦前戦中の昭和)에 와선 비합리적이고 무능한 인간들이 전자를 파괴했던 암흑국가라고 단죄하는 역사관을 의미한다. (또한 시바사관은) 메이지 유신의 성공과 (전후) 고도경제성장의 성공을 아무런 매개도 없이(無媒介) 연결시키는가 하면, 전쟁 이전의 일본을 고의적으로 예외시하기도 한다. 시바사관에는 반드시 "합리적인 영웅"이 존재하는데,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히어로를 중시하는 영웅사관이기 때문이다. 시바의 소설은 언젠가부터 논픽션인 것 처럼 취급되어, 시바 료타로 자신은 지금까지도 소설가를 초월한 영향력을 (일본 사학계와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발휘하고 있다.
마치다 아키히로 (2019)[21]

한국 관련해선 지한파에 속한다. 조선 시대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도 읽어봤을 정도. 참고로 내용이 부실하다고 비판은 했지만, 16세기 이후 일본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정부내란음모 혐의 조작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당시 스즈키 젠코 총리에게 김대중 구명에 나서 달라는 서한을 보낸 적이 있다. 한편으로 그는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거나, 그가 쓴 수필이나 칼럼 등에서 한국을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다거나, 봉건제가 발달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후지와라 시대와 비교해서 고찰하는 등의 내용이 간간이 들어 있어 이것이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래도 우파로서는 온건한 축에 드는 인물이며 첫 직장을 재일 한국인 회사로 정할 정도로 거리낌이 없어 한국계 지인들도 많은 편이라 국내에서는 지한파 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에 자주 들렀으며 한국 음식도 입맛에 맞았는지 특히 자주 왕래하던 부산에는 단골로 가는 술집도 정해두고 있었다고 한다.

시바 료타로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한나라 기행(韓のくに紀行)>에서 "나는 일본의 선조의 나라를 간다", "일본보다 오랜 시대부터, 당당한 문명과 독립국을 운영한 조선인(한국인)"이라고 적거나, 또, 진무 덴노는 가공의 인물이라며[22] "일본의 혈액의 60%는 조선반도에서 전해져 왔다. 90%,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라고 적었다. 또한 극우 일본 학자들로부터 실존을 의심받던 조선의 항왜 김충선(사야가)에 대해서도 <가도를 가다>에서 "센고쿠 시대 일본의 상식에서 보면 항복한 무사가 어제까지의 아군에게 활을 겨누는 일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사야가도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라며 그의 실존을 긍정했다.

시바는 단순한 고도의 메이지빠로서 한국에 대해서는 특별히 친한이라든가 혐한이라든가의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한국에 대한 표현이나 이미지들은 모두 철저히 근대 일본의 관점에서 쓰여져 있다. 즉 위에서도 이야기된 바와 같이 요시다 시게루로 대표되는 전후 친미 경무장 경제우선 노선으로 대표되는 보수본류[23] 그리고 이와 같은 뉴스에서도 나타나다시피 시바 료타로는 고도의 메이지빠이기 때문에 근대 역사에서의 한국에 대한 관점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근대화시키고 이끌어줘야 하는 상대' 딱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지 않았다.

시바 료타로의 메이지빠로서의 문제점은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부산물인 군국주의와 전체주의가 이미 메이지 유신 당시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메이지 유신 당시부터 군국주의를 긍정하고 전체주의적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였으며, 그 결과로 전쟁범죄와 인명피해를 초래하는 일본의 근대화 노선은 청일전쟁 때 중국 민간인과 포로들을 학살한 여순 대학살사건부터 이미 본색을 드러냈다. 러일전쟁의 와중에도 무고한 조선 농민들을 처형하는 일본의 전쟁범죄가 외국 언론에 보도될 정도였는데, 이러한 일본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및 전체주의의 기원을 시바는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다.

시바 료타로는 쇼와 시대의 폭주를 일본 근대화의 일탈이라고 보았지만, 쇼와 시대의 폭주와 군국주의, 전체주의는 메이지 시대부터 이어진 근대화 과정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따라서 시바의 착한 메이지 시대 vs. 나쁜 쇼와 시대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는 잘못된 역사인식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메이지 시대에 대한 애착과 변호는 일본 보수본류 세력은 물론 일본 리버럴 지식인들에게까지 공감을 얻고 있다. 보수 방류 세력이 보수 본류 세력을 밀어내고 자민당의 권력을 잡은 오늘날에는 메이지 시대는 물론 쇼와 시대까지 서서히 미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시바 료타로는 독자들로부터 쇼와 시대 전반기와 제2차 세계 대전에 관련된 작품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끝내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쓰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이 시대를 다루고자 자료도 조사했지만 결국 쓸 수 없었다. 시바가 역사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경험한 전쟁 체험이었고, 그래서 자신이 체험한 전쟁 당시의 쇼와 일본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를 다루려고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우울함과 허무함을 느끼고 정신적인 데미지가 컸다. 만일 자신이 쇼와 시대를 소설로 쓰게 되면, 제정신을 잃고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실제로 출판사의 의뢰로, 노몬한 전투에 대해 30년간 취재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어울리는 소설이라고 주변에서도 기대받고 있었다.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미화하고 국민들을 속인 윗대가리들은, 노모한 전투도 일본이 승리했다고 정신승리했고, 시바는 이런 짓을 되풀이하는 멍청한 윗대가리들과 바보가 된 일본인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끝내 집필하지 못했다. 요즘도 일본 우익들은 사실은 소련에게 진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는 우리가 이긴 싸움이라고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있다.

사실 시바보다 오히려 태평양 전쟁을 옹호한 것은 또다른 일본 역사 소설계의 거두인 야마오카 소하치였다. 물론 시바의 소설에 비판할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2000년 아사히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3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4위 미야자와 겐지, 5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6위 마쓰오 바쇼,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 10위 미시마 유키오였다.#

3. 기념관

파일:attachment/Ando-Shiba_Ryotaro_Memorial_Museum.jpg

오사카시에 시바 료타로 기념관이 있다. 시바 료타로가 소장했던 책들과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과 생전에 살았던 자택이 같이 있다. 기념관 자체도 유명 건축가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꽤나 아름답다.

4. 저서

(번역된 작품 위주로 작성)

나라훔친 이야기, 료마가 간다, 고개, 타올라라 검, 나는 듯이, 언덕위의 구름은 동서문화사의 일본역사소설 '해적판' 선집 대망에 포함되어 있다. 이 해적판 때문에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출간한 창해출판사의 역본들은 상업적으로 참패하고 모두 절판되었다.

5. 영상화

인기 작가답게 많은 작품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됐다. 더 많은 영상화 작품 목록은 링크 참고.


[1] 한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사마 요태랑'으로, 사마천에 비하면 자신은 한참 멀었다(遼)는 의미라 한다.[2] 시바 료타로와 같은 오사카대학 출신의 약사이다.[3] 사마천의 사기는 시바 료타로 자신이 가장 애독했던 책이기도 했다.[4] 1980년대 이후론 기행문 시리즈인 《가도를 가다》 집필과 평론, 수필, 좌담 활동 등에 힘을 많이 쏟으면서 그의 주 분야였던 막부 말기 내지 전국시대를 무대로 한 역사소설 집필빈도가 많이 줄었다. 1980년 이후 집필된 시바의 역사소설들 중 국내에 간행된 소설이 일본역사가 아닌 중국역사에 기반한 《항우와 유방》과 《달단질풍록》 두 작품밖에 없다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5] 그렇다고 이러한 방식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픽션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접할 필요가 있다는 것뿐.[6] 일본 역사소설의 신규 로컬라이징이 단절된 지 오래인 상태에서 일제 시대부터 문인활동을 하였던 요시카와 에이지야마오카 소하치, 그리고 패전 이후에 등단하여 이미 25년 전에 별세한 시바 같은 옛 유명작가들의 작품들만 계속 우려먹히고 있는 한국 출판시장의 현 상황 고인물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7] 이에야스가 주인공인 패왕의 가문의 경우에는 이에야스조차 천재적인 노부나가나 히데요시에 비해 부족한 천재성을 우직한 면으로 버티면서 극복하려는 느낌으로 묘사된다.[8] 다이쇼 시대 말부터 신센구미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일어난 영향으로, 곤도 이사미 같은 경우 이전까지 대중매체에서 통용되던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절대악 이미지를 벗어나 나름대로의 신념과 따뜻한 온정을 지닌 매력적인 악역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증가했으나, 히지카타 쪽은 곤도가 재평가되면 될수록 악역 집단인 신센구미의 암부를 상징하는 캐릭터로 남아줘야 했기에, 패전 이전은 물론이고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피도 눈물도 없는 악질 냉혈한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9] 첫 직장은 재일 조선인 류수현(柳洙鉉)이 운영하던 신세계신문사(新世界新聞社)이라는 오사카의 소규모 지방지였으나 이후 신일본신문(新日本新聞)으로 이직했다가 최종적으로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에서 근무했다. 이혼 후 만난 두번째 부인도 산케이신문에서 만난 동료였다고.[10] 이 나오키상 수상 때도 심사위원 중 하나였던 가이온지 조고로의 적극적인 지지와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11]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신문 연재. 요시카와 에이지한테 이전 작품은 고증이 엉터리라고 지적받고, 1,000만엔 이상의 취재비를 들여서 철저하게 자료를 조사했다.[12]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13] 그가 소설가로서 마지막으로 집필한 작품이 명청교체기를 그린 달단질풍록(韃靼疾風録, 1987년)이다. 본작은 1990년에 한국에도 번역되었지만 지금은 중고서점을 뒤져야 겨우 찾을 수 있고, 중고서점에 나오는 매물도 10만 원을 넘어간다. 영어로도 번역되었다.[14] 중국한나라가 아니라 한국을 말한다. 원제는 韓のくに紀行. 원문에 가깝게 옮기려다 보니 한국이 아니라 한나라로 번역한 듯.[15] 착각이었을 거라고 덧붙이고 있기는 하다[16] 위에서 '어쩌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바보가 되어버린 거냐'라며 한탄을 느낀 그 순간의 일이다. 이게 진짜 실화인지 아니면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아직도 설이 분분한 듯하다. 시바 본인도 얘기가 여기서 할 때 다르고 저기서 할 때 다르고 식으로 계속 바뀐다. 어디서는 "나 같은 사람이 어디 대본영에다 질문할 수 있겠느냐? 소설이 재미가 없으면 독자는 떠나 버린다"라고 지어낸 이야기라는 뉘앙스로 말했는가 하면, 어디에서는 시바 본인이 질문한 게 아니라 시바 본인과 동석했던 같은 연대 소속 다른 장교로 나오기도 한다.[17] 전쟁 중에 치누 중전차에 탄 적이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고문관이었던 듯.[18] 귀태란 일본 요괴 오니의 자식이란 뜻으로, 부모와 닮지 않은 아이 혹은 안 태어나는게 나을 뻔 했을 아이 정도의 뉘앙스를 뜻한다.[19] 실상은 손해가 막심했고 그 승리라는 것도 미국의 중재로 얻은 측면이 강한데, 이런 실상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훗날 태평양 전쟁에서 정신승리 같은 짓을 되풀이했다고 시바는 지적했다.[20] 일본은 극우파와 극좌파 모두 반미 성향이 강하다. 극우파는 "위대한 근대 일본을 미국이 망가뜨렸다"는 관점에서, 극좌파는 반자본주의 및 반제국주의의 관점에서 미국을 싫어한다.[21] 칸다외국어대학 교수. 주 연구분야는 사츠마번을 중심으로 한 막부말기의 정치사, 메이지유신 및 당시의 대외인식론(=존황양이론)이다.[22] 사실 패전 뒤에는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 특히 일본서기에 기록된 덴노들의 기록에 대한 사료 비판이 대세가 되어 특히 결사팔대로 지칭되는 진무 덴노에서 가이카 덴노까지의 아흡 명의 덴노에 대해서는 허구의 인물이며, 스진 덴노에서 부레쓰 덴노까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일본서기 기록과 행적이 일치하는지도 딱 잘라 말할 수 없고, 게이타이 덴노부터 실제로 존재했던 덴노로써 일본서기에 기록된 행적도 들어맞는다고 하는 학설들이 일본 학계의 주류가 되었다.[23] 현재 일본에서 이른바 우익이라 불리는 세력의 무조건적인 반한/혐한 경향은 일본 내 주류 보수 세력에게도 어느 정도 비판받고 있다. 이들이 식민지기 역사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긍정하거나 일본 제국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건 물론 아니고, 다만 한국을 최소한 중국이나 러시아보다는 협력 가능한 상대로 보는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24]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간 도공들의 이야기 및 14대 심수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한국에서는 1977년 문학사상사에서 김소운이 번역하였다. 이외에 1986년 KBS1에서 8.15 특집극 3부작으로 드라마화됐는데, 극본은 김하림, 연출은 장형일 PD였다.[25]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소설은 언덕 위의 구름, 세 번째로 많이 팔린 소설은 나는 듯이다.[26] 시바 료타로가 로고를 직접 제작했다. 2부가 소설 '나는 듯이' 원작. 1부는 시바 료타로의 저서 '료마가 간다', '화신', '세월', '마지막 쇼군' 등 장편소설과 '여우마', '취했나이다' 등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썼다.[27] 원작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最後の将軍 徳川慶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