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color: #C3C96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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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구로다 기요타카 | 야마가타 아리토모 | 마쓰카타 마사요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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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이토 히로부미 | 오쿠마 시게노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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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 이토 히로부미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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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모치 | 가쓰라 다로 | 야마모토 곤노효에 | 오쿠마 시게노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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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카이 쓰요시 | 사이토 마코토 | 오카다 게이스케 | 히로타 고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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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센주로 | 고노에 후미마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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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하라 기주로 | 요시다 시게루 | 가타야마 데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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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45대 내각총리대신 일본국 제48-51대 내각총리대신 요시다 시게루 吉田茂(よしだ しげる) | Yoshida Shigeru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78년 9월 22일 | ||
도쿄부 도쿄시 요츠야구 (現 도쿄도 신주쿠구) | |||
사망 | 1967년 10월 20일 (향년 89세) | ||
가나가와현 나카군 오이소마치 | |||
재임기간 | 제45대 내각총리대신 | ||
1946년 5월 22일 ~ 1947년 5월 24일 | |||
제48대 내각총리대신 | |||
1948년 10월 15일 ~ 1949년 2월 16일 | |||
제49대 내각총리대신 | |||
1949년 2월 16일 ~ 1952년 10월 30일 | |||
제50대 내각총리대신 | |||
1952년 10월 30일 ~ 1953년 5월 21일 | |||
제51대 내각총리대신 | |||
1953년 5월 21일 ~ 1954년 12월 1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 전처 요시다 유키코 사별 후처 요시다 키요코 | |
자녀 | 장남 요시다 켄이치 장녀 요시다 사쿠라코 차남 요시다 마사오 차녀 요시다 에코 삼녀 아소 가즈코 | ||
친인척 | 처조부 오쿠보 도시미치 처외조부 미시마 미치쓰네 친부 다케우치 츠나 양부 요시다 겐조 장인 마키노 노부아키 친형 다케우치 메이타로[1] 사위 요시다 히로시[2] 사위 아소 다카키치 외손자 아소 다로 외손녀 노부코 비 외손녀부 토모히토 친왕 외증손녀 아키코 공주 외증손녀 요코 공주 | ||
신체 | 155cm |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요셉 토마스 모어)[3] | ||
학력 | 고등상과학교 (중퇴) 게이오기주쿠 (중퇴) 도쿄물리학교 (중퇴) 가쿠슈인 고등과[4] (졸업) 가쿠슈인 대학과[5] (수료)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 학사) | ||
정당 | |||
지역구 | 고치 전현구 | ||
의원 선수 | 7 (중) | ||
의원 대수 | 23, 24, 25, 26, 27, 28, 29 | ||
약력 | 외무성 관료 제12대 외무차관 제35대 내각서기관장 제65·69,70,71대 외무대신 귀족원 의원 제2대 종전연락중앙사무국 총재 제2대 제1복원대신[6] 제2대 제2복원대신 제5대 농림대신 제2대 일본자유당 총무회장 제2대 일본자유당 총재 제45·48-51대 내각총리대신 중의원 의원 초대 민주자유당 총재 초대 자유당 총재 초대 황학관대학 학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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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45, 48~51대 내각총리대신. 일본 보수본류의 시조격이자[7]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재건, 국가전략 노선을 세운 인물로서,[8] 일생의 라이벌 하토야마 이치로와 함께 전후 현대 일본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다.재임 시절 넘버 원 맨(No.1 Man) 혹은 원맨재상(ワンマン宰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사실 넘버 원 맨보다는 '자기 혼자만 안다.'는 의미인 원 맨으로 당시 일본인들에게 회자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고집불통 성향의 원 맨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그조차 미국의 압력에는 어쩔 수 없었다.
현역 총리대신일 때는 소속 정당이 1955년에 창당한 자유민주당이 아니라 자유당이었다.[9] 자유민주당에는 1957년에 입당했다.
2. 생애
2.1. 정치 인생
학생 시절의 요시다 시게루 |
외교관 시절 |
1878년 요코스카 출생. 그의 생부 다케우치 츠나는 토사 번 출신으로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심복이었다.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상인 요시다[10]에게 입양되었다. 1906년 7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9월,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해 외무성에 입성했다.
전범으로 사형당한 히로타 고키 전 총리와는 같은 해에 입성한 동기 사이라고 한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총독을 지낼 당시 비서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으며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도 참여했다.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 대사로 근무하면서 국제적 감각을 길렀다. 당시 일본에서 적성국가로 꼽혔던 영국 등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그쪽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 것, 그리고 시게루 본인의 유달리 튀는 성품 때문에, 직업 외교관의 정년이 다 되도록 정권 핵심에 진입하지 못하고 직업외교관의 정점인 외무차관을 마지막으로 1939년에 퇴직하였다.[11]
이즈음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야쿠자 오야붕이나 마피아 보스 같은 모습이다. 세력을 키운 이후 일본이 패전하는 1945년까지 6년 동안 은밀히 반전 운동을 했는데, 이게 덜미가 잡혀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장인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오쿠보 도시미치 초대 내무경의 차남인 마키노 노부아키 백작의 사위라는 빵빵한 처가 배경 덕에 일찍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런 빵빵한 가계는 아소 다로(요시다의 외손자)까지 이어진다. 어쨌든 이 반전 경력으로 전후 미군정으로부터 까임방지권을 획득했다.
전후 첫 내각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의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GHQ의 눈 밖에 나서[12] 사임에 몰리자,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후원을 등에 업은 요시다가 후임으로 임명되어 히가시쿠니 내각의 사퇴 이후에도 계속 유임했다. 이때 더글러스 맥아더의 눈에 들어 일본 총리직을 수행할 때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외무대신 시절 |
정치적 라이벌인 하토야마 이치로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호한 부분이 많다. 자유당 총재로 있던 하토야마 이치로가 과거 전력으로 인해 연합군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당하자 후임을 맡겼던 사람이 요시다인데, 이때 요시다는 하토야마와 '3가지 약속'[13]을 했다고 하고, 하토야마는 3가지 약속에서 하나가 늘어난 '4가지 약속'[14]을 했다고 주장한다.
2.2. 총리 시절
45대 총리 취임 후 |
[navertv(31567992)] |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2부 - 쇼와(昭和) 격동의 총리들中[15][16] |
1946년에 발족된 그의 첫 내각인 제1차 요시다 내각은 노조의 잇따른 파업으로 상당히 무능력한 내각으로 존재했다. 연합군에 이리 저리 끌려다니다가 맞은 1947년 총선에서 그가 속한 자유당이 제2당으로 내려앉으면서 결국 사퇴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이에 대해서 그가 '헌정의 상도', 그러니까 총리는 다수당에서 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추켜세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시다 히토시와 별로 매끄럽지 못한 관계가 보수연립을 무산시킨데다 자유당의 애매한 의석 수로 얼마 가지 못할 정권을 유지시키느니 요시다는 차라리 사퇴하고 기회를 노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으리라 봄 직하다. 그리고 그 판단은 확실하게 들어 맞았다. 이후 가타야마 내각 때는 와신상담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민주당의 아시다 내각이 집권하자 지속적인 태클과 클레임을 걸어서 아시다 히토시의 민주당에서 나온 탈당파들과 다시 합당을 하면서 민주자유당으로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1947년, 현역 시절 |
전후 일본에서는 패전 후 군대를 가질 수 없게 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두고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요시다는 일본의 패전국 위치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평화헌법을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반대로 하토야마는 평화헌법 개정과 이를 통한 재무장을 주장하고 나섰다. 하토야마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시다는 최소한의 방위력만 보유한 채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정책을 썼다. 그렇게 일본과 미국은 1951년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미일동맹의 근간이되었다. 또한 그는 경제성장에 주력하지 않을 경우 빈곤과 가난이 심각해져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요시다의 국가전략 노선을 기반으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은채 경제성장을 이루며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요시다의 총리 시절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1953년, 당시 이케다 하야토 대장대신이 유명한 망언을 했으니 바로 "망할 기업은 망해야 하고, 돈이 없으면 보리를 먹어야 한다."라는 말이었다. 다만 실제로 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발언은 알려진 바와는 상당부분 달라서 '부실한 기업은 속히 청산해서 다른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서민들이 보리를 먹게 되더라도 경제기조를 바꿔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런데 신문들이 거두 절미하고 큰 제목으로 썼다. 어쨌거나 이케다에 대한 불신임결의가 중의원에서 통과되면서 위기에 휩싸였다. 거기다기 의회 질의응답 과정에서 야당 의원인 니시무라 에이이치와 언쟁 중 바카야로라고 혼잣말로 욕을 했는데[19], 이게 하필 마이크에 잡혔고, 당연히 화가 난 니시무라가 항의하며 소동이 커졌다.[20] 이 발언 때문에 요시다는 징벌위원회에 회부되었고, 하토야마 이치로 계파 의원 30여명이 이탈해 11표 차로 내각불신임결의가 가결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어쩔 수 없이 1953년 3월 14일 의회 해산을 하였다.[21] 이 외에도 여러 악재가 겹쳐 지지도가 곤두박질쳤으나,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으로 반등했다.
쇼와 천황은 본인의 전쟁책임을 인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나, 태평양 전쟁 자체에 대해 반성하기는 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기념 행사의 발언에서 쇼와 천황이 "나는 아무래도 반성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도, 정부도, 국민도 모두가 하극상이나 군부의 전횡을 놓친 것을 반성해 나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넣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시다 총리가 아래와 같은 말을 하며 반대했다.
(천황이) 전쟁을 시작하신 책임이 있다는 말을 들을 위험이 있다. 이제 전쟁이나 패전 같은 말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戦争を御始めになつた責任があるといはれる危険がある. 今日は最早戦争とか敗戦とかいふ事はいつて頂きたくない気がする. # #
戦争を御始めになつた責任があるといはれる危険がある. 今日は最早戦争とか敗戦とかいふ事はいつて頂きたくない気がする. # #
2.2.1. "이제 일본은 살았다" 발언 관련
한국에서는 "일본은 한국에서 전쟁이 나는 것을 바라고 있다"고 할 때 소위 "요시다 시게루가 했다"는 망언을 자주 인용하며, 대표적인 사례로는 2000년에 간행된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새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1탄이 있다. 이 때문에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에서 왠지 모르게 얄미운 기회주의자 인상이 박히게 되었다.[22]これぞ天佑!これを足掛かりにして日本経済を立て直せる!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다! 이것(6.25 전쟁)을 발판으로 일본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다! 이것(6.25 전쟁)을 발판으로 일본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
다만 요시다 시게루가 이런 발언을 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에피소드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일본 국회 속기기록에 의하면 다른 의원이 요시다를 비판하면서 '요시다가 조선의 동난을 천우라고 언급했다'라고 지적한 1953년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제로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한 발언일 가능성이 있다.#
이 외에도 궁내청이 기록한 쇼와 천황의 공식 기록집 중 하나인 "쇼와 천황 실록"에서는 "조선에서의 문제가 일본에는 오히려 좋다" 라고 쇼와 천황에게 이야기한 기록이 존재한다. #[23]
천우신조(天佑神助)'는 '하늘이 보우하고 신령이 돕는다'는 뜻으로, 불교나 신토, 또는 민간신앙의 색채가 강한 사자성어이므로, 일본에서 몇 안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요시다 시게루가 '천우신조'라는 표현을 썼을 가능성은 더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24]
인터넷에서는 2000년대 초 네이버 인조이재팬에서 환빠 계열 네티즌들이 널리 도배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일본 네티즌들이 이 말을 듣고 다시 일본 내에 퍼뜨려 일본에서도 아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외에도 중국어판 BBC 기사에서도 이를 인용한 적이 있다. #
다만 일본이 당시의 심각한 경제 위기를 한국전쟁으로 극복한 것은 사실이나 일부 한국인들이 주장하듯 일본의 5,60년대 고도 성장이 오로지 6.25 전쟁 덕분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나 단순히 전쟁 하나로 가망 없던 경제가 살아난 것은 아니다. 이미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기술력으로 미국, 독일에는 못 미쳐도 어지간한 유럽 국가들과 맞먹을 수준은 되었다. 그리고 사실 6.25 전쟁은 비단 일본 뿐 아니라 2차 대전 직후 약간의 침체기를 겪던 미국 경제도 엄청난 반등의 계기가 되었다. 오로지 월남전 하나 덕분에 한국 경제가 살아났다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얘기다.
여담으로, 일본의 무역 보복으로 한일 갈등이 격화되던 2019년 7월 8일 JTBC 뉴스룸에서도 해당 일화가 나왔는데, 실존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는 발언임에도 당시 분위기상 인용할만하다고 여겼는지 나름의 탈출구는 만들어내면서 이를 인용해 요시다 시게루의 사진과 함께 내보내기도 하였다.
… '요시다 시게루' 역시 "6.25 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하지요. 6.25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본이었습니다 …(중략)… 일본 극우의 논리는 바뀐 적이 없으며 바뀌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른바 경제보복. 보복이란 피해를 입은 사람이 행하는 마지막 수단일 터인데 그들이 입은 피해란 대체 무엇인가 …(중략)… "6.25 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라고 했던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을 한 마디 더 전해드립니다. "이제 일본은 살았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2.3. 말년
1954년 10월 27일 영국에서.[25] |
이런 분위기에서 조선업계에 유리하도록 업계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고 중의원에서 법안을 처리해준 이른바 조선의옥 스캔들로 붙잡힌 사토 에이사쿠 간사장을 위해 법무상을 통한 지휘권 발동이라는 무리수를 저지르자 요시다를 향한 정계의 반응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제5차 요시다 내각은 1954년 11월 21일 대한민국의 독도를 군사적으로 침공했다가 독도의용수비대한테 대참패를 당하는 독도 대첩을 맞아버렸다. 만약에 독도를 점령하기라도 했으면 요시다는 정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겠지만 일본 해상보안청은 우월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독도의용수비대한테 함정 1척 중파, 16명 사상이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패배해버렸다.
결국 독도 대첩 패배 책임론은 요시다 시게루 내각을 더욱 궁지로 몰았고, 중의원에서는 내각불신임결의안이 12월 9일 제출됐다. 버티지 못한 요시다는 내각불신임안이 가결되기 직전에 내각총사퇴 형식으로 12월 10일 사임했다. 이에 따라 내각불신임결의는 자진 철회.
그래도 집권기간 7년 2개월(86개월)로 장수했다. 전후 일본에서 재임 기간이 아베 신조, 사토 에이사쿠 다음으로 가장 긴 장수 총리였다.
1967년 10월의 모습 |
89살까지 장수하여 자신과 대립하던 하토야마 이치로 정권과 기시 노부스케 정권의 탄생은 물론이고 자신의 정치적 제자들인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가 집권하는 것까지 모두 보았다.
1967년 10월 20일 사망하였는데, 임종 직전에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다. 사실 요시다는 인생의 대부분 동안 가톨릭을 믿었지만 이를 평생 동안 숨겨오다 임종 직전에서야 세례를 받은 것.
그의 장례식은 도쿄에 있는 일본무도관에서, 국장으로 거행되었다.당시 영상 일본에서 '전직' 수상의 장례가 국장으로 거행된 첫 사례다.[27] 사후 대훈위국화장경식과 대훈위국화대수장이 동시에 추증됐다.
2.4. 요시다 학교(吉田学校)
원래 당내에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데다 기존의 당인(党人)파 정치가들을 경멸했던 요시다는 관료, 젊은 국회의원, 경제계 등에서 유망한 자를 뽑아 자신의 측근 세력을 구축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요시다학교(吉田学校)이다.이들은 요시다가 정계에서 물러난 후에도 요시다를 따랐으며 이는 요시다가 정계 은퇴 후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들 중 대표적 인물들이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등이며 그 외에도 다수의 중의원 의장 및 정계의 중진들을 배출하며 전후 일본 정치를 주도하였기에 요시다 학교는 곧 보수본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7 |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고치 전현구 | | 98,176 (29.4%) | 당선 (1위) | 초선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81,289 (22.9%) | 재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87,160 (22.7%) | 3선 | ||
1953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8,620 (24%) | 4선 | |||
1955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2,962 (14.1%) | 5선 | |||
1958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552,286 (12.2%) | 당선 (4위) | 6선 | |
1960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8,506 (16.6%) | 당선 (2위) | 7선 |
4. 대중매체에서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의 요시다 시게루(이계인 분) |
NHK 스페셜 드라마 <지고, 이긴다 ~전후를 만든 남자 요시다 시게루~>에서의 요시다 시게루(와타나베 켄 분) |
테레비 도쿄 스페셜 드라마 <미국에 지지 않은 남자 ~바보 총리 요시다 시게루~>에서의 요시다 시게루(쇼후쿠테 츠루베 분) |
5. 기타
- 역대 일본 총리들 중 재임 횟수가 5회로 가장 많다. 45대 총리로 1차 집권했고, 이후 48대부터 51대까지 4대수를 연임하여 연임 횟수도 역대 총리들 중 가장 많다. 아니, 애초에 요시다 총리를 제외하면 3회 초과[28] 연임 총리는 1명도 없다. 최장 집권 총리인 아베 신조도 총 재임 횟수는 90, 96-98대로 4회, 연임도 3회라 요시다 총리에 못 미친다.
- 노회한 정치가답게 유머 감각도 뛰어났는데, 한 번은 선거 유세 중에 외투를 입고 유세에 나섰다. 한 시민이 요시다에게 "그 외투(外套, がいとう 가이토-)를 당장 벗으시오!"라고 외치자 요시다는 "여러분! 이게 바로 가두(街頭, がいとう 가이토-)연설입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전형적인 일본식 말장난(다자레)이었다.
딸인 가즈코(和子)[29]와 가정에서는 좋은 아버지, 주위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외손자 아소 다로에게도 좋은 외할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외증손녀 2명이 여왕[30]이다. 외손녀 아소 노부코가 쇼와 천황의 막내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친왕과 결혼했기 때문. 토모히토 친왕과 노부코 비는 두 딸 아키코 여왕(1981)과 요코 여왕(1983)을 낳았다. 참고로 아키코 여왕은 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미술사)이기도 하다.
잘 웃는 것으로 유명했다.
- 일본 총리가 되기 전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I'm sorry'를 심할 정도로 자주 사용했다고 하는데, 한 외국 외교관이 요시다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Sorry(쏘리)'를 연발하고 다니냐"고 묻자 요시다는 "나는 장래에 총리대신(総理大臣, そうりだいじん 소-리다이진)이 될 사람이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 이 드립은 곤베에의 아임 쏘리라는 게임 제목으로 패러디된다.
- 영국 대사로 있을 때의 이야기 또 하나. 어느 일본 대신이 영국을 방문해서 요시다를 만나려고 하는데, 요시다가 그를 만나기 싫어해서 대신이 대사관에 전화를 걸 때마다 "대사는 외출했다고 말하라"고 직원들에게 명했다. 보다못한 대신이 주영일본대사관을 직접 찾아갔고 거기서 한 사람을 마주치는데, 그 사람도 "대사가 외출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요시다였다. 결국 대신에게 들켰다.[31]
- 패전 후 일본에 주둔하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일본의 식량 사정이 나쁘다는 이유로 "식량 지원량을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식량 지원량을 더 늘려서 더 많은 양의 곡물이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막상 맥아더가 통계를 보니 일본의 식량 사정은 지원량을 늘려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맥아더가 요시다에게 "일본의 통계는 참 엉터리요. 믿을 수가 없어."이라고 힐난하자 요시다 왈, "일본의 통계가 정확했으면, 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거나 이렇게까지 지지는 않았겠지요."[32]
- 수상관저 항목에도 나오지만 총리로 영전한 후에도 외무대신 관저를 썼었다.이에 요시다 본인은 "내가 외상을 겸직하는 건 외상관저에서 살기 위해서다,"라고 농담하기도 했다.물론 요시다 본인이 초대 내각때부터 3차 개조 내각 중반까지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을 겸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썼던 관저는 현재 도쿄도 정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33] 자기 측근 정치인의 이름도 잘못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심지어 쇼와 천황에게 각료 명단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자기 측근이었던 오자와 사에키(오자와 이치로의 부친)의 이름도 틀려서 천황이 직접 주의를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 1953년 1월 미국 방문 도중 일본을 들린 이승만 대통령과 비공식 회담을 한 적이 있었다.[34] 한미일 삼자 회담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미국에 오래 살았던 이승만이나 외교관 출신인 요시다 시게루나 둘 다 영어 실력이 출중해서 통역없이 영어로 말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당시 회담에 배석하였던 김용식 당시 주일대표부 대사[35]는 이승만이 "Mr. 요시다. 나나 당신이나 앞으로 10년 이상 오랫동안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포나 일본국 국민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결정지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한일협정은 정확히 10년 뒤 1963년에 협상이 이루어져 1965년에 체결됐다. 참고로 이승만은 1965년, 요시다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 둘 모두 정계에서 물러난 뒤였다.[36]
- 이들 두 지도자 사이에 '호랑이 일화'라는 야사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요시다 시게루가 이승만에게 "조선에 호랑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요즘도 많은가?"라고 묻자 이승만이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다 잡아가서 이젠 한 마리도 없다!"라고 날카롭게 응수했다는 내용이다. 혹은 "아직 한마리는 남아있다.(=그게 나다)"라고 응수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하지만 이는 와전된 내용으로, 당시 이승만을 수행했던 백선엽의 증언에 따르면 요시다 시게루가 "내가 중국에 근무할 때 조선에 호랑이가 많다는 말을 들었는데 요즘도 많은가?"라고 묻자 이승만은 "1명은 관리로 만들고 1명은 중으로 만들기 위해 아들을 기본적으로 둘을 낳는데, 아들 하나가 호랑이에 물려갈 때를 대비해서 하나쯤은 예비로 낳는다." 하며 똑 떨어지지 않는 답변을 했다. 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선문답(?)처럼 상호 청구권 문제 등으로 협상은 타결되지 못했다. 요시다와 이승만은 서로 영어가 능통했으나 궁합이 잘 맞는 상대는 아니었다.
- 1954년, 서독을 방문하였을때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회담하며 벤츠를 한대 구입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수입 규제 때문에 당장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뒤, 10여년이 흘러1963년 벤츠를 선물받고[37] 매우 기뻐하며 아데나워 수상측에게 그때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며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해당 벤츠는 요시다의 또 다른 애차였던 롤스로이스와[38] 함께 지금도 보존된다.
-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와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둘다 강한 반공성향에 패전국 독일과 일본의 전후 복구에 지도력을 발휘하였고 각각 나치, 군부에 탄압당했으며 전후의 점령군과의 마찰이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또한 위에서 보듯이 요시다와 아데나워는 서로 친분이 있었다.1960년, 요시다의 사저를 방문한 아데나워
- 김성한의 희곡 대본 <오분간>에서는 프로메테우스와 신이 담판을 벌이는 사이 중간중간에 곁다리 장면으로 등장하는 인간계 인물들 중 하나로도 등장하는데, 하토야마를 저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일본인의 이름은 한국어 한자 독음으로 표기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길전무라고 나온다.
- 애견인이었다. 많을 때는 개 10마리 이상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하며 가나가와현 오이소마치에 위치한 그의 저택 정원 한켠에는 요시다가 길렀던 개들의 무덤과 묘비들이 서있다.
- 일본에서 실시된 각종 역대 전후 총리 평가 여론조사에서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같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 그의 재임시절인 1954년 11월 21일 독도 대첩이라는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우리나라의 독도의용수비대와 해상보안청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는 일개 장관이 저질렸다기엔 장관에 대한 문책이나 비판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다 시게루의 직접 지시로 벌어진 사건으로 추정되고 있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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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 <rowcolor=#D7003A> 증조부 | 외증조부 | |
아소 다키치 | 마키노 노부아키 | ||
3대 | <rowcolor=#D7003A> 부 | 외조부 | |
아소 다카키치 | 요시다 시게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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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마사히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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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2위의 건설기계메이커인 고마츠제작소와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설립자[2]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형제의 사촌[3] 사후 세례명을 받았다.[4] 지금의 신제 고등학교가 아니라 구제고등학교에 상응하기 때문에 대학 예비문에 해당한다.[5] 지금의 가쿠슈인대학은 신제 대학이고 이때의 대학과는 구제대학에 상응했다. 가쿠슈인 대학과가 1905년에 폐지되는 바람에 요시다는 도쿄제국대학에 특별편입해서 졸업했다. 가쿠슈인 대학과는 1949년 신 학제 개편 때 가쿠슈인 고등과(구제)를 통합하고 신제 가쿠슈인대학으로 부활하여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지금 존재하는 가쿠슈인 고등과는 신제 고등학교이므로 요시다가 졸업한 고등과와는 전혀 무관한 학제이다.[6] 여기서 복원(復員)이란 전시체제에서 평시체제로 전환됨에 따라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 목적에서 해제시키는 제반 활동을 뜻한다. 기존의 육군성과 해군성이 각각 제1복원성과 제2복원성으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제1복원대신은 일본 제국 육군, 제2복원대신은 일본 제국 해군과 관련된 일을 맡는다. 이 두 직책은 내각총리대신이 되면서 그대로 승계해 겸직했다.[7] 보수본류 양대 파벌(굉지회와 헤이세이 연구회)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이케다 하야토와 사토 에이사쿠 모두 요시다 시게루의 정치적 제자였다.[8] 미일동맹과 주일미군을 안보의 기초로 하여, 일본은 최소한의 경무장 방위력만 보유한 채 경제발전에 주력한다는 노선. 흔히 '요시다 독트린'으로 불리며,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후임 일본 총리들도 이를 계승하며 일종의 국가전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그리고 아베 신조 등으로 대표되는 '보통국가' 노선이 일본 외교안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현재는 많이 퇴색되었다.[9] 요시다가 총리를 1954년까지 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당은 요시다의 자유당과 하토야마의 일본민주당이 합당해 1955년 창당된다.[10] 요코하마 최대의 무역상이었다. 그 덕에 요시다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사치와 정치활동에 탕진하였다.[11] 1936년에 총리에 임명된 외교관 동기인 히로타 고키가 요시다를 외무대신으로 입각시키려하자 데라우치 히사이치 육군대신이 반대하였다. 이때 육군성 군무국장이던 무토 아키라가 각료 명단에서 요시다와 시모무라 히로시, 오하라 나오시 3명의 이름을 붉은색 펜으로 죽죽 그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12] 후에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7년형을 받는다.[13] 돈을 모으지 않고, 하토야마는 인사에 일절 상관하지 말고, 총리직이 부담되면 언제든지 관둔다.[14] 하토야마가 돌아오면 언제든지 총리 자리를 하토야마에게 물려준다는 것. 결과론적이지만 약속은 지킨 셈이다.[15] 2019년 3월 9일 방송[16] 쇼와(昭和) 격동의 시대, 목숨을 걸고 일본의 방향타를 잡은 총리들의 고난과 갈등의 이야기를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대표적인 4명의 총리를 통해서 바라본 다큐멘터리[17] 일본사회당은 이미 가타야마 퇴진 직전 열린 총선거에서 완전히 쪽박크리를 먹은 상태였다. 게다가 당내에서 좌우파로 분열되어 결국 1950년에 사회당 우파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듣보잡 신세로 전락했다. 아시다의 민주당은 아시다 퇴진 이후 별일없이 비틀거리다가 하토야마 이치로에 의해 자민당으로 흡수되었다.[18] 비슷하게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 또한 점령군 측과 마찰을 빚다 쾰른 시장에서 잘렸는데, 오히려 독일 국민들에게 당당한 정치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사례가 있다.[19] 본인보다 19살이나 어린 니시무라가 본인을 강하게 밀어붙이니 칠순이 넘은 노인인 요시다가 격분한 것.[20] 결국 요시다는 바카야로 사건이 터진 그 날 바로 사과해야 했고, 사과를 받은 니시무라는 이에 대해 더 추궁하지 않았다.[21] 이것이 바로 바카야로 해산이다.[22] 다만 요시다 시게루 재임 시절 독도 대첩으로 한일이 실제로 무력 충돌한 적이 있으므로 이러한 부정적 인상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23] 1990년 한 일간지에서 보도한 것이 퍼진 것이 기원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 설은 사실이 아니다. 1987년 출간한 일본경제론(강영수 저, 大旺社)에도 엄연히 이 이야기가 실려있고 최소 1970년대에는 이 이야기가 이미 세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애초에 6.25 전쟁특수로 일본 경제가 큰 혜택을 보았다는 것 자체가 일본에서도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지는 인식이다.[24] 하지만 천우신조라는 표현 자체는 이미 종교색이 퇴색된 채 일상적인 관용어구로 쓰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요시다 본인이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이러한 표현을 썼다는 것이 딱히 이상하지 않다. 한국에서도 '무진장', '야단법석' 등 불교에서 유래된 관용어구가 많이 쓰이지만, 어지간히 극보수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아닌 이상 이를 문제 삼는 기독교인은 찾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요시다는 일반적인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일평생 자신의 신앙을 숨겨오다가 죽기 직전에야 이를 고백한 인물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25] 그의 신장은 155cm였다.[26] 가장 유명한 게 '바카야로 해산'이다. 중의원 질의응답 중에 야당의원의 추궁자세에 질린 나머지 "바카야로"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야당의원도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갔는데, 술수 꾸미기로 유명한 미키 부키치가 트집을 걸고 넘어지면서 중의원이 해산됐다. 만화 맨발의 겐 10권에서도 잠깐 얘기가 나온다.[27] 그로부터 55년 만인 2022년 9월, 2개월 앞서 피살당한 아베 신조 전 수상의 장례가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전직 수상으로는 요시다에 이어 사상 2번째의 사례지만, 통일교 게이트 관련으로 반대 여론이 높은 상태로 치러져 빛이 바랬다.[28] 3연속 집권도 하토야마 이치로,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가 전부다.[29] 2.26 사건 때 20대였던 그녀는 외할아버지인 마키노 노부아키를 황도파 장교들로부터 지키고 언덕으로 피신시켰다. 후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아소 다로다.[30]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부른다. 남자는 친왕/왕.[31] C. Fadiman, ed., The Little, Brown Book of Anecdotes, 1985.[32] 농담이 아니고, 요시다의 말대로 일본 제국은 통계고 보고고 뭐고 간에 제대로 맞는 게 없었다. 패전은 승전이라 했고, 보급받은 건 떼먹기도 했다. 요시다의 말대로, 일본의 통계가 정확했다면 진짜로 일본이 그만큼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통계와 보고가 제대로 들어올 정도면 최소한의 정신머리는 잡혀 있다는거니까.[33] 요시다는 사망 직전까지 정치인이었고, 사람의 이목을 많이 받는 자리에 있었는데 치매가 보고된 적은 없었다, 그냥 순수하게 기억력이 별로 좋지 못했다.[34] 재미있게도 당시 요시다 시게루와 이승만 둘 다 자유당이라는 당명의 정당에 속해 있었다.[35] 훗날 외무장관, 국토통일원 장관,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주유엔대사 등을 지냈다.[36]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 치하의 세대가 어느 정도 지나간 후에야 한일관계가 복구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부수립 초기부터 청구권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내려놓고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막상 일본은 조선에 남기고 간 재산에 대한 청구권 문제를 들고 나옴으로서 협상은 계속 공전했다.[37] S클래스의 전신인 W112 300SE 롱 휠베이스 모델로 일본에 첫번째로 수입된 모델이었다[38] 영국대사 시절 구입하여 귀국할때 선편으로 들여와 계속해서 타고 다녔다. 나중에 50년대에 다시 영국으로 보내 오버홀을 받았다고 하니 차에 대한 애착이 매우 컸던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