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6:55:55

간 나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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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구 (선거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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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블록 상임간사 키시 마키코 도호쿠 블록 상임간사 요코사와 타카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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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블록 상임간사 테즈카 요시오 호쿠리쿠신에츠 블록 상임간사 테즈카 요시오
도카이 블록 상임간사 요시다 츠네히코 긴키 블록 상임간사 사쿠라이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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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대책위원장 류 히로후미 국회대책위원장 대리 야마노이 가즈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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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대책부위원장 고토 유이치 | 요시카와 하지메 | 모리야마 히로유키 | 노마 타케시 | 겐마 켄타로 | 모리타 토시카즈 | 오쓰카 쿠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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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단
최고고문 에다노 유키오 상임고문 오카다 가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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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대신(1938년~2001년)
초대
기도 고이치
2·9대
히로세 히사타다
3대
오하라 나오시
4대
아키타 기요시
5대
요시다 시게루
6대
야스이 에이지
7대
카네미츠 츠네오
8대
고이즈미 치카히코
2·9대
히로세 히사타다
10대
아이카와 카츠로쿠
11대
오카다 타다히코
12대
마츠무라 켄조
13대
아시다 히토시
14대
가와이 요시나리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15대
히토츠마츠 사다요시
16대
타케다 기이치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17-18대
하야시 조지
19대
구로카와 다케오
20·31대
하시모토 료고
22대
요시타케 에이치
23대
야마가타 가쓰미
24대
구사바 류엔
25대
쓰루미 유스케
26대
가와사키 히데지
27대
고바야시 에이조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28-29·41-41대
간다 히로시
30대
호리키 겐조
20·31대
하시모토 료고
32대
사카타 미치타
33대
와타나베 요시오
34대
나카야마 마사
35대
후루이 요시미
36대
나다오 히로키치
37대
니시무라 에이이치
38-39대
고바야시 다케지
28-29·41-41대
간다 히로시
42대
스즈키 젠코
43-44대
보 히데오
45·59대
소노다 스나오
46·48대
사이토 노보루
47대
우치다 쓰네오
46·48대
사이토 노보루
49대
시오미 슌지
50·58대
사이토 구니키치
51대
후쿠나가 겐지
52대
다나카 마사미
53대
하야카와 타카시
54대
와타나베 미치오
55대
오자와 다쓰오
56대
하시모토 류타로
57대
노로 쿄이치
50·58대
사이토 구니키치
45·59대
소노다 스나오
60대
무라야마 다쓰오
61대
모리시타 모토하루
62대
하야시 요시로
63대
와타나베 고조
64대
마스오카 히로유키
65대
이마이 이사무
66대
사이토 주로
67대
후지모토 다카오
68-69·80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68-69·80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70대
도이다 사부로
71·84대
쓰시마 유지
72대
시모조 신이치로
73대
야마시타 도쿠오
74·82-83대
니와 유우야
75-76대
오우치 게이고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75-76대
오우치 게이고
77대
이데 쇼이치
78대
모리이 추료
79대
간 나오토
68-69·80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81대
미야시타 소헤이
74·82-83대
니와 유우야
74·82-83대
니와 유우야
71·84대
쓰시마 유지
85대
사카구치 치카라
노동성설치준비위원회위원장(1947년)
초대
요네쿠보 미츠스케
노동대신(1947년~2001년)
초대
요네쿠보 미츠스케
2대
가토 간쥬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3대
마스다 가네시치
4대
스즈키 마사후미
5대
호리 시게루
6대
요시타케 에이치
7대
토츠카 쿠이치로
8대
고사카 젠타로
9대
치바 사부로
10대
니시다 타카오
11·15대
쿠라이시 타다오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12-13·15대
마츠우라 슈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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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 히로히데
11·15대
쿠라이시 타다오
16대
마쓰노 라이조
14·17-18·22-23·39대
이시다 히로히데
19대
후쿠나가 겐지
20-21대
오오하시 타케오
14·17-18·22-23·39대
이시다 히로히데
24대
고다이라 히사오
25대
야마테 미츠오
26-27대
하야카와 타카시
28대
오가와 헤이지
29·31대
하라 켄자부로
30대
노하라 마사카츠
29·31대
하라 켄자부로
32대
츠카하라 도시오
33대
타무라 하지메
34대
가토 츠네타로
35·37대
하세가와 타카시
36대
오쿠보 타케오
35·37대
하세가와 타카시
38대
우라노 사치오
14·17-18·22-23·39대
이시다 히로히데
40대
후지이 카츠시
41대
쿠리하라 유코
42대
후지나미 타카오
43대
후지오 마사유키
44대
하츠무라 다키이치로
45대
오노 아키라
46대
사카모토 미소지
47대
야마구치 도시오
48대
하야시 유우
49대
히라이 다쿠시
50대
나카무라 타로
51대
니와 효스케
52대
호리우치 미쓰오
53대
후쿠시마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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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카하라 슌페이
55대
오자토 사다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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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 테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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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마사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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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구치 치카라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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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구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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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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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다카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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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노 유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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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리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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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노 타카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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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노동대신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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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구치 치카라
4·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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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사키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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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니기사와 하쿠오
8-10대
마스조에 요이치
11·12대
나가츠마 아키라
13대
호소카와 리쓰오
14대
고미야마 요코
15대
미쓰이 와키오
16·23대
다무라 노리히사
17·18대
시오자키 야스히사
19·20·22·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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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토 다쿠미
19·20·22·26대
가토 가쓰노부
16·23대
다무라 노리히사
24·25대
고토 시게유키
19·20·22·26대
가토 가쓰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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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식품안전담당* 후쿠시마 미즈호히라노 히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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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재정정책담당 간 나오토
방재담당 마에하라 세이지나카이 히로시
과학기술담당 간 나오토가와바타 다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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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1946년~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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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세 소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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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히로오
5대
쿠루스 타케오
임시대리
아시다 히토시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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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야마 산로쿠
임시대리
스토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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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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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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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대
다나카 슈세이
53대
아소 다로
54대
오미 코지
55-56-57대
이케구치 코타로
58대
누카가 후쿠시로
경제 재정 정책 담당대신 (2001년~2003년)
1대
누카가 후쿠시로
2대
아소 다로
3대
다케나카 헤이조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경제 재정 정책 담당)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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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대
다케나카 헤이조
7대
요사노 가오루
}}}
8·9대
오타 히로코
10·11대
요사노 가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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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하야시 요시마사
13대
간 나오토
14대
아라이 사토시
15대
가이에다 반리
16대
요사노 가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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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후루카와 모토히사
18대
마에하라 세이지
19·20대
아마리 아키라
21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22·23대
모테기 도시미쓰
24·25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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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5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26·27대
야마기와 다이시로
28대
고토 시게유키
29대
신도 요시타카
30대
아카자와 료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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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요시다 내각 가타야마 내각 아시다 내각 제2·3차 요시다 내각
시데하라 기주로 아시다 히토시 니시오 스에히로 하야시 조지
국무대신(복원청 총재) 외무대신 무임소 국무대신 후생대신
제4·5차 요시다 내각 제1·2·3차 하토야마 내각 제1차 기시 내각 제2차 기시 내각
오가타 다케토라 시게미쓰 마모루 이시이 미쓰지로 마스타니 슈지
국무대신(내각관방장관) 외무대신 행정관리청 장관 겸 홋카이도개발청 장관 행정관리청 장관
홋카이도개발청 장관
제3차 이케다 개조 내각 제1·2차 다나카 내각 미키 내각 제2차 오히라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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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도쿄올림픽 담당대신 환경청 장관 경제기획청 장관 내각관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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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활력도입담당대신 대장대신 외무대신 법무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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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나오토 오카다 가쓰야 아소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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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대신 }}}}}}}}}

파일:新党さきがけ.png 신당 사키가케 정책조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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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세 스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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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나오토
제4-7대
도카이 기사부로
제8대
미즈노 세이이치
9대
나카무라 아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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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주당(일본 1996년) 로고.svg 민주당(일본 1996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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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나오토
하토야마 유키오
제2대
간 나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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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주당(일본 1998년) 로고.svg 민주당(일본 1998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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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간 나오토
제2대
하토야마 유키오
제3대
간 나오토
제4대
오카다 가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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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하라 세이지
제6대
오자와 이치로
제7대
하토야마 유키오
제8대
간 나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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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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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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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에이세이
제2대
나카노 간세이
제3대
간 나오토
제4대
오카다 가쓰야
제5대
가이에다 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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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노 유키오
제7대
센고쿠 요시토
제8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제9대
나오시마 마사유키
제10대
직위 폐지
제11대
겐바 고이치로
제12대
마에하라 세이지
제13대
호소노 고시
제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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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후쿠야마 데쓰로
제16대
호소노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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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 쓰토무
제2대
간 나오토
제3대
나카노 간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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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가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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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이 히로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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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다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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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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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가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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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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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오카다 가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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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호소노 고시
제14대
오하타 아키히로
제15대
에다노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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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 간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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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 쓰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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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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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이 히로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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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나오토
제6대
간 나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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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이치로
간 나오토
고시이시 아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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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요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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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키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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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부·대장경 (1869~1885)
초대
마츠다이라 슌가쿠
2대
다테 무네나리
-
오키 다카토
3대
오쿠보 도시미치
4대
오쿠마 시게노부
5대
사노 쓰네타미
6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전전 대장대신 (1885~1947)
초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초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2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3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4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이노우에 가오루
7대
마츠다 마사히사
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
사이온지 긴모치
10대
소네 아라스케
11대
사카타니 요시로
12대
마츠다 마사히사
13대
가쓰라 다로
14대
야마모토 타츠오
15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6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17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8대
다케토미 도키토시
19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0대
쇼다 카즈에
2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2대
이치키 오토히코
23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24대
쇼다 카즈에
25대
하마구치 오사치
26대
하야미 세이지
27대
가타오카 나오하루
28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9대
미츠치 추조
30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3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2대
후지이 사다노부
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4대
마치다 추지
35대
바바 에이이치
36대
유우키 토요타로
37대
가야 오키노리
38대
이케다 시케아키
39대
이시와타 소타로
40대
아오키 카즈오
41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42대
가와다 이사오
43대
오구라 마사츠네
44대
가야 오키노리
45대
이시와타 소타로
46대
쓰시마 준이치
47대
히로세 토요사쿠
48대
쓰시마 준이치
49대
시부사와 케이조
50대
이시바시 단잔
전후 대장대신 (1947~2001)
-
가타야마 데쓰
51대
야노 쇼타로
52대
구루스 다케오
53대
기타무라 도쿠타로
-
요시다 시게루
54대
이즈미야마 산로쿠
-
오야 신조
55대
이케다 하야토
56대
무카이 다다하루
5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58-60대
이치마다 히사토
61·62대
이케다 하야토
63대
이치마다 히사토
64대
사토 에이사쿠
65·66대
미즈타 미키오
67-69대
다나카 가쿠에이
70대
후쿠다 다케오
71·72대
미즈타 미키오
73·74대
후쿠다 다케오
75대
미즈타 미키오
76대
우에키 코시로
77대
아이치 기이치
-
다나카 가쿠에이
78대
후쿠다 다케오
79·80대
오히라 마사요시
79·80대
오히라 마사요시
81대
보 히데오
82대
무라야마 다쓰오
83대
가네코 잇페이
84대
다케시타 노보루
85대
와타나베 미치오
86·87대
다케시타 노보루
88·89대
미야자와 기이치
90대
다케시타 노보루
91·92대
무라야마 다쓰오
93·94대
하시모토 류타로
95대
가이후 도시키
96대
하타 쓰토무
97대
하야시 요시로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100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101대
구보 와타루
102대
미쓰즈카 히로시
103대
하시모토 류타로
104대
마쓰나가 히카루
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재무대신 (2001~)
초대
미야자와 기이치
2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3-5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6대
오미 고지
7·8대
누카가 후쿠시로
9대
이부키 분메이
10대
나카가와 쇼이치
11대
요사노 가오루
12대
후지이 히로히사
13대
간 나오토
14대
노다 요시히코
15대
아즈미 준
16대
조지마 고리키
17-20대
아소 다로
21·22대
스즈키 슌이치
23·24대
가토 가쓰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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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국 제94대 내각총리대신
간 나오토
菅直人 | Kan Naoto
파일:Kan Naoto.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946년 10월 10일 ([age(1946-10-10)]세)
일본 제국 야마구치현 우베시
현직 입헌민주당 최고 고문
재임기간 제94대 내각총리대신
2010년 6월 8일 ~ 2011년 9월 2일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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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간 노부코[1]
자녀 장남 간 겐타로
차남 간 신지로
친인척 조부 간 미노루
이모 히메이 치에코
신장 175cm
종교 불교
학력 우베시립코토시바소학교 (졸업)
우베시립칸바라중학교 (졸업)
도쿄도립고야마다이고등학교 (졸업)
도쿄공업대학 이공학부 (응용물리학 / 학사)
정당
파벌 나라의 모습 연구회
지역구 (구) 도쿄 7구 → 도쿄 18구 → 도쿄 권역 비례대표 → 도쿄 18구
의원 선수 14 (중)
의원 대수 36[A], 37[A], 38[A], 39[A], 40[A], 41, 42, 43, 44, 45, 46[B], 47[B], 48, 49
약력 간-다카하시 특허 법률 사무소 변리사
중의원 의원
제2대 사회민주연합 정책위원장
제2대 신당 사키가케 정책조사회장
제79대 후생대신 (제1차 하시모토 내각)
제3대 민주당 정책조사회장
제2대 민주당 간사장
제1·3·8대 민주당 대표
제20대 부총리 (하토야마 내각)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과학기술정책, 경제재정정책)
제2대 정부세제조사회 회장
제13대 재무대신 (하토야마 내각)
제94대 내각총리대신
}}}}}}}}} ||

1. 개요2. 생애
2.1. 정치 입문 전
2.1.1. 가정사
2.2. 정계 입문 후2.3. 총리 시절
2.3.1.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대처
2.4. 지지율 하락과 퇴진2.5. 총리 사임 이후
3. 평가4. 한국과의 관계5. 소속 정당6. 선거 이력7. 여담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정치인. 제94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2. 생애

2.1. 정치 입문 전

1946년 10월 10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공장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5년 도쿄공업대학 이학부 응용물리학과(현 물리학과)에 입학. 당시 대학의 자치회[9]에 들어가 있던 중핵파와 대립하고 나서 "이데올로기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라며 15명 정도의 학생들을 모아 "전학개혁 추진회의"를 세워 극좌 계열과는 다른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이 조직은 첨예화되고 있던 전공투일본공산당의 지배 하에 있던 민청과도 달랐고, 학교에 친화적인 '체제 찬성파' 그룹도 아니었던 제4의 그룹이었다고 한다.[10] 당시 경시청 경비과장을 지낸 삿사 아츠유키[11]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간 나오토는 논섹트 래디컬[12] 그룹에 속해 있었고, 학원분쟁 당시 자신이 기동대와 함께 도쿄공업대학에 출동했을 때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간 나오토는 당시 "4번째 열의 사람"이었고, 아지[13]를 포함한 연설로 청중을 모으는 데에는 뛰어났지만, 각목을 들고 검거를 각오하고 데모대를 돌진시키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삿사는 그를 "성공적인 리더였다"고 평가했다.

학원분쟁으로 인해 졸업논문 작성이 어렵게 되자, 제대로 연구해서 논문을 내고 싶다고 자진해서 1년 유급했다고 한다.

1970년 도쿄공업대학 졸업 이후 변리사로 일하면서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2.1.1. 가정사

  • 그의 아내 노부코(伸子) 여사는 1살 연상의 외사촌 누나다. 일본을 비롯한 해외 대다수 국가에서는 사촌간 혼인이 법적으로 가능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다지 별로 좋게 보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가 집안이라 둘이 결혼한다고 할 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을 둘러싼 가족회의가 어느새 일본의 보유를 둘러싼 정치토론회로 번지고[14], 정작 결혼은 두 사람 뜻대로 진행되었다.
  • 더군다나 민주당 대표 시절에도 총리 당선될 뻔한 적이 있었지만, 불륜 스캔들로 하차한 이력이 있다.[15] 참고로 부인은 그가 막 총리가 되었을 무렵, 자신의 남편이자 총리를 비판하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 장남 겐타로도 정치인 출신이다. 중학교 때 학생회장을 역임했는데, 학생회에서 불신임안이 통과되어 등교를 거부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중퇴 후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중의원 비서로 근무했다. 43, 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집안의 본적지인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키타구가 속한 오카야마현 제1구에 아버지가 당수로 있던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 후 교토세이카대학을 졸업 후 결혼했으며,아버지 간 나오토의 정책 비서로 근무하다가 2023년 무사시노시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2.2. 정계 입문 후

1974년 일본의 무소속 페미니스트 의원이었던 이치카와 후사에의 선거사무를 봐주면서 정치에 입문하고, 1976년 무소속으로 첫 출마를 했으나 2차례의 낙선 끝에 1980년 미니정당인 사회민주연합[16] 당적으로 도쿄에서 첫 당선. 이후 사회민주주의와 야권통합을 주장하는 사회민주연합의 얼굴로 활약했으며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오자와 이치로가 주도한 비자민 비공산 7당(!!) 연립정권[17]에 참여하면서 행정 경험을 쌓았다.

파일:external/9d87c31bf58f4388214cac4901f3d6ecb918f5e9b49309788f24d47e545aeacb.jpg
1994년 자민당-일본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자사사(自社さ, じしゃさ) 연정 수립 이후에는 제1차 하시모토 내각에서 신당 사키가케 소속으로 제79대 후생대신[18]을 맡았다. 이 시절 일명 O-157 사건이 터졌는데, 무순이 식중독 대장균인 O-157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판매량이 폭락하자 기자회견장에서 무순 한 사발을 통째로 먹어치우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이 외에도 주식회사 녹십자[19]에서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제재를 혈우병 환자들에게 공급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일본 정부가 관련되었다는 것을 폭로하고 직접 피해자들을 만나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이후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하고 1996년 신당 사키가케의 동료 의원들[20]우파사회당 세력을 결집하여 구 민주당을 창당. 하토야마 유키오와 함께 당의 얼굴로 활약했다. 2003년에는 자유당 당수 오자와 이치로를 끌어들여 당세를 대폭 확장했으며 이 때부터 사실상 일본 정치에선 자민당 vs 민주당의 양당 체제가 성립했다.
파일:2019112800002_2.jpg
1997년 3월 22일, 창당 이후 치러진 민주당의 첫번째 전당대회에서 공동대표 직에 연임된 하토야먀 유키오, 간 나오토

이후 오랫동안 하토야마, 오자와와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하며 민주당을 이끌었으며 2010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지지율 하락과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인한 정치적 난국을 이기지 못하고 사퇴하자, 2010년 6월 4일 국회(중의원) 본회의에서 유효투표 477표 가운데 313표를 얻어 6월 9일 총리로 취임했다.

2.3. 총리 시절

파일:external/www.kantei.go.jp/souri94.jpg

간 나오토 총리재임 시기는 도호쿠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도쿄공업대학을 졸업했으며[21], 세습 정치인 집안도 아닌 평범한 공장장 출신이다.

2010년 20회 참원선을 앞두고 소비세 인상 선언으로 역풍을 받았지만 역대 총리들 중 사상 최소 재산세 신고에서 알 수 있듯 청렴성이나 도덕성 면에서는 일본 내에서도 높게 평가받고 있었는데 도호쿠 대지진 하루 전에 재일교포에게 정치헌금을 받았던 사실이 나타났고 본인 역시 인정했다. 액수 자체도 크지 않고 헌금 자체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문제는 재일교포가 외국인으로 명시된 일본에선 재일교포의 정치헌금은 불법이라는 것이다.[22] 간 총리의 도덕성에 흠집이 났다.
2010년 9월 이후 엔고 현상으로 인해 일본 경제가 위기국면으로 치달은 데다 22회 참원선에서 참패해 총리직 유지가 위태로웠다.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발언을 '선거 전에' 하는 무리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9월 14일 민주당 대표선거 결과에서는 오자와 전 간사장을 여유 있는 표차(721 대 491)로 제치고 재선되었다. 이는 오자와 전 간사장의 이미지가 (정치적 수완과는 별개로) 워낙 좋지 못하기 때문에 덕을 본 면도 있다. 간 나오토의 지지도가 떨어지는 와중에 상대편에 오자와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지지율이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당심에선 패배했지만 민심에선 크게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총리 임기를 연장하자마자 중국센카쿠 열도 문제로 충돌하다가 꼬리를 내리게 되었다.[23] 게다가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가입을 하려 하다 일본 농민들의 강력한 반발로 입장을 철회했으며 조선학교 무상화 검토로 보수 의원들에게 까였다. 그리고 2011년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러시아(및 소련) 정상으로는 사상 첫 북방 4도 방문으로 인한 일본 외교의 무사안일함, 북한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한 늦장대응,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의 파병이 가능한 듯한 뉘앙스의 발언 문제 등 여러 모로 비판을 받았다.

더욱이 관료제를 폐지하자고 공언했을 정도로 반 관료주의자였던 사람이 돌변해서 관료들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사실상 다시 부활시키고 아시아 중시 외교 정책도 친미정책으로 돌아가는등 여러모로 정권교체 때 민주당이 내세웠던 공약들이 상당 부분 후퇴해버렸다. 근데 사실 도호쿠 대지진 등의 사태와 현실적인 국정 운영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던 측면도 있다.

2.3.1.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대처

''간 총리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도쿄전력으로 쳐들어가 포기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 일본을 살렸다"
2012년 2월 27일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독립검증위원회의 조사 결과.[24]

이런 상황에서 3월 11일, 일본 지진 관측 사상 최악의 상황까지 일어나버렸다. 사건 극초반에는 비교적 빨리 대책본부를 마련하고 5만명의 자위대 병력을 사건 현장에 급파하는 등 괜찮은 대처를 했으나 이후 점점 매뉴얼을 한참 넘어서는 규모[25]의 재난 앞에서 제 앞가림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특히 관료들과 공기업 조직에 대한 통제에 실패하면서 매뉴얼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의 무기력하고 무능한 관료주의의 현실을 드러내고 말았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에는 도쿄전력 측이 총리에게 사고 경위에 대해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사건 상황을 은폐하려 들자 보여준 그 개인의 리더십만큼은 의미가 있었다. 간 나오토 자신이 도쿄공대 응용물리학과 출신인지라, 스스로도 "원자력은 이 정부 안에서 내가 제일 잘 안다"라고 말해왔던 그였던 것이다.

결국 도쿄전력이 사태를 수습 못하고 심지어 1호기가 폭발했는데도 보고조차 안 들어오자, 열이 받을대로 받은 간 총리는 2011년 3월 15일 새벽에 자기가 직접 도쿄전력으로 쳐들어가서 아예 거기에 지휘본부를 차리고 자신이 지휘본부 총괄이 되어 도쿄전력 직원들에게 사자후를 내지르면서 공포에 떨게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또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해수 투입을 지시했었다고 한다. 당시는 도쿄전력이 원전 철수를 운운하던 시점이었는데, 거듭되는 삽질을 보다못해 끝내 불 같이 화가 난 총리의 말을 듣고 찌그러진 것이다. "철수는 있을 수 없다 철수하면 도쿄전력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위의 분노가 느껴지는 다그치는 발언도 이때 나왔다.

참고로 간 나오토의 증언에 의하면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총리였던 그에게조차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고 한다. 간 나오토에게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에는 주로 '세 가지 패턴'이 있었다고 하는데 '첫째'는 현장 자체의 판단이 틀린 경우였다.[26] '두 번째'는, 현장에서는 정확히 알고 있는 정보가 도쿄전력 본사를 통해 총리인 자신에게 오면서 손실되거나 잘못 전달된 경우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도쿄전력 본사가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아예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보를 숨기려고 하는 경향 때문에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은 경우로 '총 3가지 패턴'으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기사

해수 투입을 몇시간 지연시켰다는 떡밥도 있었으나, 알고 보니 총리는 진작에 해수 투입을 지시했지만 도쿄전력이 총리의 명령을 멋대로 왜곡했던 것으로 밝혀졌다.[27] 원자로 하나당 약 3,400억엔(약 5조원)이 드므로 도쿄전력은 손해가 너무 크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때문에 도쿄전력은 총리에게 아직 수습할 수 있으며, 상황은 괜찮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정작 직원들을 철수시키려고 하자 간 총리가 화가 난 것이다.[28]

일부에서는 초기에 도쿄전력의 말만 믿고 초기대응 시기를 놓친 간 총리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는 시각도 있었으나 한국과 다르게 도쿄전력은 공기업이 아닌 민간기업인데다 도쿄의 전력을 전반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만큼 위상이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일본은 내각책임제로 공권력의 권력이 한국보다 약할 뿐더러, 정부기관이 함부로 민간 기업에 손을 댈 수 없다고 법률에 직접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때문에 사태 초기의 일본 정부는 도쿄전력의 말을 믿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도 109시간 동안 철야를 해가면서 잊을 만 하면 TV에 튀어나와 상황보고를 해서[29] 일본 국민들에게는 인지도가 대폭 상승했다. 에다노는 간 총리 이후의 차기 총리감으로 지목되기도 했었다. 40대 후반의 젊은 나이도 있고.

총리가 되면서 관료체제와 타협을 시도하기도 했고 지진 이후로 더욱 더 관료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나, 자신들을 적대시 했던 탈관료 정책을 진행한 민주당 정권과 관료체제 사이의 보이지 않는 알력은 여전해서 재난 수습이 지지부진한 원인이 되고 있다. 게다가 지진을 이용해서 간 총리의 측근인 센코쿠 요시토 등을 다시 내각에 복귀시키기도 해서 비판받고 있다. 여기저기서 이번 재난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들려오는 가운데 원전 사태가 수습 못되면 간 총리도 연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현지 분석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4월 10일에는 제11회 통일 지방선거에서 가히 역사적인 참패를 기록했다. 광역의원이 자민 1,119: 민주 346. 물론 늘 1당은 자민당이었지만 지난 선거의 415석보다 69석 감소한 것이었고, 무소속(442)보다도 못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가뿐히 4선 연임에 성공했고, 민주당은 사실상 전패했다.[30]

5월 6일, 골든 위크가 지나가자 도쿄 지역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마오카 원전을 중지시키는 방안을 내놓고, 기어코 중지시켰는데, 일본전력과 보수주의자 측에서는 "시민사회단체의 핵공포에 넘어가 전력난을 일으키려고 한다"라는 식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원전반대단체나 환경단체, 국민 여론 전반에선 환영을 받으면서 간 총리의 임기 중 몇 안되는 치적으로 평가받는 분위기. 자기 전공(응용물리학)에 가까웠음에도 일본에서 최초로 탈 원전을 주장한 총리인 셈이다.

파일:attachment/간 나오토/Kannaoto.jpg
무순에 이어서 이번엔 오이방사능 공포를 몰아내려고 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한중일 3개국 정상이 같이 먹었다. # 외교 결례라는 욕을 안 먹을 수가 없었다. 원자바오 총리는 딱 한 입만 베어 물었는데, 우리나라의 이명박 대통령은 일단 주어진 1개는 다 먹었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의 본래 먹방 실력을 고려하면 진짜 먹기 싫었음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여하간 이시하라 신타로보다는 모양새가 나았다.

2.4. 지지율 하락과 퇴진

지진 이후 내각 지지율은 20%대 이하로 급락하며 자민당, 공명당은 중의원을 해산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즉 총리직 사임과, 중의원 해산을 속행하지 않을 시엔 내각이 추진하는 정책은 모두 반대할 것이라고 했다.[31]

이렇게 되자 간 나오토 총리는 화살을 오자와 이치로에게 돌리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정치자금 문제로 강제 기소된 오자와 이치로 전 대표의 당원권을 정지하고 탈당을 압박했던 것. 간 총리는 심지어 중의원 해산 언급하는데 의석수 감소가 뻔하니 협박인 셈. 잠시 상황이 반대로 됐으나 오자와파가 따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간 총리의 퇴진을 압박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렇게 동력이 빠진 상태에서 센가쿠에서의 중국과의 갈등(2010년 9월), 후텐마 기지에서의 미국 요구 수용(2011년 5월), 그 외 러시아 북방 4도 굴욕 등 매번 상대국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약한 일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로서 친미 기조에서 탈피해 한중일 경제 공동체를 하자던 하토야마의 꿈은 좌절되었다. 또, 2010년 제2사분기에 중국의 경제 규모가 세계 2위였던 일본을 추월하면서 1989년 소련을 추월한 이후 21년 만에 3위로 하락하여, 추락하는 일본의 한가운데에 있게 되었다.[32]

하지만 그래도 간 나오토 담화# 위백항목에서 자국 내의 비판을 무릅쓰고 우회적으로 국권 침탈의 강제성을 인정했으며 의궤 반환을 추진하였다. 이런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도 일본사회당무라야마 도미이치 이래 처음이다.[33] 그래도 개념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자위대 파병 발언을 했다가 긁어 부스럼으로 작용해 쌓아왔던 점수를 다 깎아먹었지만.. 최근 10여 년간의 한일관계에서 간 총리 재임기간 동안의 한일관계가 가장 원만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2011년 6월 2일에 재해 복구가 대략 마무리되면 퇴진하기로 발표하였다.# 자민당, 공명당의 내각 불신임안 제출에 대한 일종의 고육지책으로 평가받는데, 이 고육지책이 통했는지 당일 오후 2시관련기사에 열린 일본 중의원의 내각 불신임안 표결 결과 찬성 152 대 반대 293표로 부결되었다. 불신임안이 부결된 것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간 나오토 총리의 편을 들면서[34]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 쪽도 대놓고 반대를 할 수 없었고, 자진 퇴임 정도면 모양새도 좋다고 생각해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그러니까, 민주당 의원 대략 전체가 반대했다.) 또한 일본 국민들이 "지진과 원전으로 난리 난 판국에 권력 다툼을 하고 싶냐"라고 부정적 여론을 내비친 것도 영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간 총리가 사임 의사를 표명한 만큼 6월 국회를 마무리하고 사임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올 연말까지는 총리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발언해 사실상 조기 퇴진 의사를 철회하였다.[35] 거기에 9월에 있는 유엔 총회에서 "탈 원전 기조"에 대한 연설을 하기 위한 연설문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거기다가 재해 복구를 지원하기 위해 정기국회의 회기를 올해 말까지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내각 불신임안을 한 국회 회기에 두 번 이상 할 수 없는 법을 노린 것이다. 이에 하토야마 전 총리가 사기꾼!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때문에 하토야마 전 총리와 오자와 전 간사장은 간 총리의 조기 퇴진을 위해 연대하기로 합의했다.

상황이 이리 흘러간 탓인지 간 총리는 다시 여름이 끝나기 전, 즉 8월 말의 정기국회 회기까지 2차 추경예산과 재해복구기본법, 전력회사가 자연에너지 발전을 사들이는 재생에너지특별조치법안, 올해 예산에 편성된 국채발행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공채법안을 처리하고 퇴진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여하간 일본 내에서도 '경이적인 끈기'라고 표현할만큼 끈질기게 버틴 덕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래 가장 오래 총리를 한(1년 3개월) 인물이 되었다. 그래봐야 3달 더 한거지만 말이다.

8월 초에 접어들자 지지율이 15%p로 민주당 집권 이후 최저가 되어 버렸고,(그나마 다행인 건 아무리 지지율이 폭락해도 모리 요시로의 5.7%p 기록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점이다.) 노다 요시히코 재무대신,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대신 등이 총리 레이스에 뛰어들기로 공식 발표하면서 결국 2011년 8월 29일에 민주당 대표 경선이 열리기로 확정되었다. 당초 유력한 주자로 거론되던 노다 요시히코가 증세론 때문에 지지율이 오르지 않으면서 결국 오자와계를 이길 후보로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대신이 거론된 끝에 대표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분위기로는 마에하라 전 장관이 사실상 차기 총리로 유력하다는게 대체적인 견해였으나 여론의 지지와는 달리 당 내에서의 부정적 분위기로 마에하라는 낙선했고 노다가 당선되었다.

2011년 8월 26일, 자신이 공약한 퇴진 3조건인 2차 보정 예산안, 특례공채법안, 재생에너지 특별법안이 중참 양원에서 통과되면서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8월 30일 대표 선거에서 당선된 노다 요시히코 신임 대표가 중참 양원에서 신임 총리로 당선되면서 2011년 9월 2일을 끝으로 파란만장했던 간 내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총 재임기간은 452일.해당기사

2.5. 총리 사임 이후

46회 중원선, 2년 뒤에 치러진 47회 중원선에서 연속으로 비례부활 당선되었다. 47회 중원선때는 중의원 475석 중 마지막으로 의석을 배정받아 미스터 475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2017년 10월, 희망의 당48회 중원선 후보자 공천 신청을 했지만 리버럴 성향을 이유로 거부당했다. 결국 에다노 유키오가 호헌, 리버럴 성향 의원들을 이끌고 나가 창당한 입헌민주당에 참여했고 선거 결과 당선되었다.

2021년 3월경부터 오염수가 통제되고 있다는 아베 전 총리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절대로 해선 안된다고 덧붙였다.#

49회 중원선에서 당초 출구조사에서 10%p 이상의 넉넉한 격차로 당선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개표 결과 3%p 차로 겨우 당선되었다.

2022년 1월 21일, 자신의 트위터에서 일본 유신회의 창립자인 하시모토 도루를 두고 "언변의 능숙함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혼란스러운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를 연상시키게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었다. 이를 두고 1월 27일 유신회 간사장이 입헌민주당 당사에 찾아가 항의문을 전달하며 사죄를 요구했다. 다만 입헌민주당은 간 나오토 개인의 의견이라면서 당 차원에서 개입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또한, 본인도 사과할 생각이 없다며 "이번을 계기로 하시모토 도루 등 유신회 간부들의 발언이 검증되는 것은 상당한 일이다."라고 밝혔다.

2022년 9월 21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와 함께 아베 신조 전 총리 국장에 불참하기로 했다. 본인은 트위터를 통해 국회 논의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과거 전례로 봐서도 적절하지 않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로서 민주당 출신 전직 총리 중에는 노다 요시히코만 국장에 참석했다.

2023년 3월 11일, 야권 무소속 후보로 2023년 일본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야마구치 2구에 출마한 히라오카 히데오 전 법무대신을 지지했다.

2023년 11월 5일, 세대교체를 이유로 차기 선거 불출마 및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후계자는 현직 무사시노시마쓰시타 레이코(松下玲子)로 결정됐다.#

2023년 12월 9일, 장남인 간 겐타로가 12월 24일 투개표의 무사시노시의원 보궐선거에 입헌민주당 후보로 공인되었다.#.[36] 12월 24일 보궐선거 투·개표 결과, 26.8%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하며 장남 간 겐타로가 무사시노시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24년 일본 입헌민주당 대표 선거를 앞두고는 자신의 계파 나라의 모습 연구회니시무라 지나미 대표대행에 대한 출마 지지를 요청했다. 다만 니시무라 본인의 출마 의사가 불투명한 상황.# 결국 니시무라 대표대행이 대표 선거에 불출마하자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요시다 하루미 중의원을 지지하기로 했다. #

10월 8일, 정계 은퇴 기자회견에서 기본적인 은퇴 사유에 대해 "건강하게 활동해왔지만 이제 77세다. 나이가 문제다"라고 밝혔다. # 참고로 기자회견 이틀 후엔 78세가 된다.

3. 평가

세습 정치인이 아닌데다 일관되게 반(反) 자민당의 길을 걸어온[37] 군소야당 사회민주연합 출신으로 맨땅에 헤딩하듯 성장해온 입지전적 인물이라 자민당의 보수 세습 정치에 질린 시민들의 기대가 컸으나, 야당 정치인 시절의 기대치[38]에 한참 못 미치는 정치력으로 실망을 주었고 설상가상으로 들이닥친 천재(天災)막장기업이 야기한 인재(人災)를 신경써 수습하고도 욕 먹는 불행한 인물이다.[39]

복지 확대 이전에 소비세 인상을 통한 재정 건전화가 우선이라는 간 내각의 정책방향 자체는 오자와 이치로의 '일단 닥치고 복지 확대'보다 현실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금 인상이라면 본능적으로 회피할 수밖에 없는 유권자들의 심리를 무시하고 일본 참의원 선거 직전에 이를 주장함으로서 참패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프로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부분. 그리고 털렸다는 22회 참원선에서도 득표율 자체는 비례, 지역구 모두 민주당이 자민당보다 앞섰다.[40] 민심은 아직까지도 민주당이 실망스러워도 자민당을 대안세력으로 보지 않은 셈인데, 선거전략을 개떡같이 짜서(...)[41] 자민당에게 반등의 기회를 준 셈이다. 이 때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만 하지 않았어도 나름대로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간 총리 개인으로서도 뼈아픈 부분일 것이다. 요약하자면, 사람은 좋은데 정치능력이 떨어진다.

다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의 대응만큼은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도호쿠 대지진 자체가 전대미문의 대재앙이었던 데다가 연이어 터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서 누구보다도 빨리 대응을 해야 했을 도쿄전력은 꾸물거리고 있는 중에 직접 쳐들어가 지휘한 것은 국가 지도자로서 분명 필요한 행동이었다.#[42] 특히나 시간이 지나면 약간은 해결되는 다른 자연재해와 달리 원자력 사고는 명백히 골든타임이 존재하는 긴박한 사고이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을 끌었다간 지금보다도 더 방사능 지대가 넓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나마 간 총리가 관련 전공자였기에 위기감을 느껴 빠르게 대처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래나저래나 욕 먹는 건 똑같으니 포기하고 도쿄전력 탓이나 하면서 손 놓고 있자" 식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은 일본이라는 국가와 1억 일본인에게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이후 들어선 아베 정권이 2018년 일본 서남부 폭우 사태때 66시간이 흐르고서야 대책본부를 수립했고 25년 만에 일본을 강타한 최악의 태풍오사카를 강타했는데도 총재선 집회가 열리는 니가타현으로 가는 만행을 저지른 바 있는데 후쿠시마 때 그런 식으로 했다간 정말 큰일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욕은 간 나오토가 더 먹었으니 지지리도 운이 없는 셈이다.

그렇게 데인 탓인지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뒤
"국민 절반이 살 수 없게 되는 사고라면 100년에 한번뿐일지라도 그런 위험부담은 져서는 안된다!"
라는 발언까지 날리기도 했다.

총리는 적어도 4년 정도는 해야 안정적이다라는 말을 총리가 되기 전 의원 시절에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본인의 생각대로 4년은 커녕 1년 3개월에 그치면서 또 하나의 단명 내각으로 남고 말았다.[43] 그래도 역대 전후 내각 총리대신 32명 가운데 19위의 재임기간으로 일본 정치의 현실에서는 아주 짧은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래에는 비교적 긴 임기에 색깔있는 총리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임기 내의 지지율 하락에 따라 하토야마 유키오와 함께 가장 많이 까이게 되었다. 당장 니코니코 대백과에서 간 나오토 항목과 아베 신조 항목을 비교해봐도 보수층들이 얼마나 간 총리를 혐오하는지 알수 있다. 보수층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대한 대부분의 일본인들의 평가는 최악 자체. 그 뒤 반핵 행보를 이유로 원전 재가동을 밀어붙이고 있는 일본 내 보수세력들에게 틈틈히 공격당하고 있다.

언행불일치를 그간 요상하게 해왔기에 극우가 아니더라도 까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아베 총리는 인터넷으로 유권자와 소통하기 때문에 자격미달"[44]이라는 발언을 본인 블로그에 써놓는 걸로 시작해서, "정치판이 개판이라 은퇴하고 싶다"고 인터뷰까지 해놓고는 선거전에 제일 먼저 뛰어든다던지 자기는 블로그에서 타 정당 낙선운동[45]을 벌였으면서 아베가 블로그에 본인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걸로 정점을 찍은 여러가지 기행 덕분에 신나게 까이고있다. 그러나 간 나오토가 아베를 고소한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니 간 나오토만 잘못했다고 할 수 없는 부분이다.[46]

2024년 이시카와현 노토 지방 지진 이후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허술한 대응으로 인해, 13년 전 도호쿠대지진 당시 첫날부터 사력을 다해가며 적극적으로 대응한 민주당 내각에 대한 재평가가 회자되기도 했다.

4. 한국과의 관계

일단 간 나오토 총리는 한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임 전부터 표명했고, 미래 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해 동북아 평화번영을 추진하는 등 매우 개념 있고 진일보한 인물. 총리 취임 전부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정치인들에게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는 북한 관계와 관련 "한국의 천안함 침몰 사건은 용인하기 어려운 만큼 한국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기도 했고, 2010년 8월에는 한일병합 100주년을 맞이해 간 나오토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의 과거 식민지 지배의 모든 사실을 인정했다.

또한 간 나오토가 2010년 7월 당시 의회에서 일본에는 전혀 없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한국의 유교 사상에 포함되어 있는 행동인 고개를 돌려 물을 마시는 행동을 하여 일본 네티즌들에게 한국의 스파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으며, 간 나오토가 한국계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었다.기사

결론적으로 간 나오토 재임 시기에 한일관계가 매우 원만했었고 무라야마 도미이치, 오부치 게이조, 하토야마 유키오 등과 함께 한국인에게 개념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최근 2014 ~ 2015년 사이에 자주 방한해 도호쿠 지진, 원전사고에 대해 수없이 강연을 하였고, 경주에서도 강연을 가진 적도 있다.해당 영상 또한 2015년 3월 18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고해당 영상, 2016년 당시 jtbc 후쿠시마 다큐 프로그램에 일본 총리 최초로 출연하여 인터뷰에 응하기도 하였다.해당 영상

그리고 총리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대해 SBS 스페셜 제작진과 전직 일본총리로서는 최초로 인터뷰를 했으며 총리시절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도쿄전력의 행태에 대해 돌려말하기 식으로 비판하기도 했다.[47]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76 - 1977 정계 입문

1977 - 1978 입당

1978 - 1994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4 정당 해산

1994 - 1996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6 탈당[48]

1996 - 1998 창당

1998 - 2016 합당[49]

2016 - 2017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7 탈당[50]


2017 - 2020 창당

2020 - 현재 합당[51]
정계 은퇴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도쿄 7구

[[무소속(정치)|
무소속
]]
71,368 (11.74%) 낙선 (5위)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7,480 (11.93%) 낙선 (6위)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57,921 (22.82%) 당선 (1위) 초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7,700 (19.90%) 재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6,482 (20.35%) 당선 (2위) 3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7,343 (17.34%) 당선 (3위) 4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54,827 (20.49%) 당선 (1위) 5선[52]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도쿄 18구
116,910 (62.45%) 6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4,750 (56.15%) 7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9,195 (58.33%) 8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6,716 (47.43%) 9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63,446 (59.47%) 10선
2012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3,942 (28.33%) 당선 (2위)[석] 11선
2014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9,877 (38.79%) 당선 (2위)[석] 12선
2017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6,713 (40.73%) 당선 (1위) 13선
2021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2,091 (47.12%) 14선[55]

7. 여담

  • 성씨는 레이와 아저씨라고도 불리는 스가 요시히데 총리와 완전히 똑같은 '(관)'자를 쓴다. 다만 스가 총리의 경우에는 이 글자를 스가라고 읽고, 간 전 총리의 경우에는 으로 읽는다. 스가 요시히데가 2020년 9월 총리가 되고, 2021년 10월에 퇴임해 전직 총리가 되면서 두 사람 모두 자막에는 菅元首相으로 표기되는 탓에 후리가나를 반드시 써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 별명은 핏대다. 후생대신 시절 후생성 관료들에게 뻑하면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러대던 탓에[56] 붙은 별명이다.
  • 독일 국영방송에서 <후쿠시마의 거짓말> 이라는 이름의 방송으로 지진, 원전 사고 2년 후의 일본을 촬영하고 방송했다. 전 일본 총리가 일본 내의 도쿄원전과 일본 정치권의 유착관계를 폭로하는 참으로 보기 드문 모습을 보였다.링크
  • 각료 재산 공개 당시의 재산 신고에 따르면 지역구인 도쿄도 무사시노시에 소재한 아파트와 본적지인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키타구에 소재한 약 14만 9천제곱미터 규모의 토지 등을 부인과 공동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 토지는 간 나오토 본인 명의로 6만 8648제곱미터, 부인 명의로 8만 654제곱미터 정도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토지 가격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한다. 보유한 맨션은 지역구인 무사시노시에 위치한 것으로 볼 때 자택으로 추정된다. 지역구와 실제 거주지가 일치하는 셈이다.
  • 대학생 시절 마작점수계산기를 발명했다. 특허도 갖고 있다고 한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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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민주당
제49대 중의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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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정당과 국회 내 소속 회파(会派)는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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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우자 겸 사촌누나이다. 일본의 경우 근친혼의 범위를 3촌이내의 친족에 한하기 때문.[A] 중선거구제 시절 (구) 도쿄 7구[A] [A] [A] [A] [B] 석패율 비례대표.[B] [9] 한국으로 치면 학생회.[10] 참고로 이 조직은 200명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고 한다.[11] 훗날 내각 안보실장을 지낸다.[12] 전공투 이후 등장한 무당파 좌파 그룹을 뜻한다. 폭력적인 신좌파 및 일본공산당과 그 청년 조직인 민청에 모두 반대했던게 그 특징.[13] Agitation의 줄임말. 말 자체는 선동을 의미하지만 선동을 위한 구호나 문장을 뜻하기도 한다. 한국의 운동권들도 아지라는 단어를 쓴다. 나무위키에서 아지를 찾아볼 수 있는 문서는 인터내셔널가를 참조할 것.[14] 간은 이후 진짜로 때문에 총리대신으로서의 평가가 엄청나게 깎이게 된다. 총리 본인으로서는 최대한 노력한 것이지만, 그 사고의 스케일이 좀 컸어야지...[15] 뉴스 캐스터와 심야 데이트를 하다가 걸렸다.[16] 1970년대 중반 우파사회당을 대표하던 에다 사부로좌파사회당과의 당권투쟁에서 패배하고 당에서 제명된 이후 자신의 지지자들을 결집해서 만든 정당. 최초 이름은 사회시민연합이었으나 얼마안가 사회민주연합으로 개칭했다. 1990년대까지 한자리 숫자의 중의원을 보유한 군소정당으로 계속 존재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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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한국으로 치면 보건복지부장관에 해당되는 국무대신으로, 현재는 노동대신[57]과 합쳐저 후생노동대신으로 재편되었다.[19]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창립자가 731부대 출신이다.[20] 하토야마 유키오, 마에하라 세이지, 에다노 유키오, 겐바 고이치로, 아라이 사토시, 오자와 사키히토, 이시이 코키[21] 동경일공(東京一工) 중 하나로 도쿄대학, 교토대학, 히토쓰바시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의 최상위 대학이다. 그러나 이공계에 특화된 교육기관으로 정치계와는 좀 거리가 있는 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포항공대 또는 카이스트 출신의 정치가인 셈.[22]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대신의 경우에도 같은 이유로 외무대신 직에서 자진 사퇴했다.[23] 물론 대신 센카쿠에 함대를 대폭 보낸다. 항목 참조.[24] 이 조사를 통해 그동안 도쿄전력이 사고 당시 전면 철수를 시도했다는 주장을 놓고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 쌍방의 주장이 엇갈렸으나 이번 조사결과로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었다![25] 총리 본인이 "사실상 일본 국토 20%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할 정도다.[26] 여러 차례 진상조사를 거친 지금이야 멜트다운이 어느 시점에 일어났는지 알지만, 2011년 당시에는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가 부족했기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고, 측정 장비까지 오작동했기 때문에 그나마 긁어모은 데이터조차 신뢰성이 떨어졌다.[27] 자세한 것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경과 항목 참조.[28] 상황이 수습 가능하다고 하면서 직원들을 철수시킨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정상 가동 중이어도 직원들이 상주하는 마당에 비상사태에서 직원들을 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29] 원래 비상사태가 되면 관방장관이 할 일이 많아지는데,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서 인상 좋은 아저씨가 반나절만에 초췌한 몰골로 등장했다.[30] 자민련과 연합공천한 6명만 당선됐다.[31] 2011년 예산안은 일단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정치권의 극한 대립은 피하자는 여론에 야당이 응하면서 가까스로 통과되었다.[32] 여담으로 중국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을 통해 이를 과시한 바 있다.[33] 무라야마 도미이치 이후 최초의 혁신계 총리이며, 간 이후로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34] 하토야마 전 총리와 민주당을 깨지 않는다, 자민당에 정권을 내주지 않는다, 대지진 부흥 기본법과 2차 추경 예산 조기 편성을 추진한다는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35] 정확히는 후쿠시마 원전의 냉온정지가 완료되는 시점이라고 했는데, 저게 2011년 12월 말이나 다음 해 1월 초로 예정된 것이다.[36] 이 과정에서 세습 논란이 있었지만 간 나오토 본인은 본인 지역구인 도쿄 18구는 마쓰시타 레이코가 후계자며 시의원 보궐선거 출마는 세습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부정했다.[37] 1955년 자민당 체제 등장 이후 일본의 총리 가운데 자민당 당적을 가져 본적이 한 번도 없는 인물은 1994~1995년 자민당-일본사회당-신당 사키가케 3당 연립내각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민주당 정권 시절의 간 나오토 본인, 간 나오토의 후임 총리였던 노다 요시히코 셋 뿐이다.[38] 98년 지지통신 차기총리 여론조사에서 당시 총리였던 하시모토 류타로를 20%차로 따돌리며 30%의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하는등 일본인들의 기대가 컸다.[39] 이에 맞먹는 불행을 겪은 총리가 다나카 가쿠에이. 록히드 사건으로 평생을 고생했다.[40] 비례 민주 31.56%vs자민 24.07%. 지역구 민주 38.97%vs자민 33.38%.[41] 대표적인 선거전략 실패로는 2인구, 3인구에서 후보를 2명 내보내는 전략이 실패한 것이다. 자민당은 이와 반대로 당 지지율이 낮음을 인지하고 확실하게 당선시키기 위해 후보 한 명만을 내보냈는데, 민주당은 표가 분산되어서 후보들의 득표율 합은 자민당보다 높지만 모두의 당, 공명당등의 중견정당의 약진으로 2인구, 3인구에서 한 석도 건지지 못하고, 반대로 표가 통일된 자민당은 한 석은 건지는 그런 구도가 전국에서 연출됐다.[42] 총리가 간다고 업무 효율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도쿄전력은 '철수'(사실상 도망)하려고 하다가 총리가 와서 그러지 못한 것이다. 만약 실제로 철수하고 손을 놓아버렸을 때 피해가 얼마나 더 커질지는 예측하기 어려우나, 원자력 사고의 특성상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자연히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당시 관방장관 에다노 유키오는 "최악의 경우 도쿄를 버려야 할 수도 있다"라고까지 했을 정도이다.[43] 그래도 자민당 장기집권 시대를 다시 연 아베 신조의 후임자 스가 요시히데(1년 1개월)보다는 오래 재임했다. 그래도 스가는 자민당 내에서 거의 모든 파벌들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선을 노리다가 포기했기 때문에 간 나오토와는 상황이 달랐다.[44] 이건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다. 자민당과 아베 내각이 방송국, 신문 표현의 자유는 손타쿠 등으로 침해하면서 인터넷상의 헤이트스피치는 적극적으로 방관하였기 때문.[45] 일본은 원칙적으로 인터넷에서의 선거운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단지 2013년 5월부터 한정적으로 제한이 풀리긴했지만, 2013년 7월 현재도 정치인과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연예인이 방송에서 퇴출당한 사례가 있을 정도로 엄격했다.[46]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경과 2013년 7월 17일자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47] 도쿄전력은 자신들의 손해를 줄이기 위해 행정부의 수장인 총리에게 수차례 허위 보고를 올렸다. 이 행동은 명백히 법률을 위반한 것이었고 결국 후쿠시마 사태를 조기에 수습할 기회를 놓쳤다. 간 나오토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실각에 원인을 제공했을 뿐더러 일본을 망치게 만들었기 때문에 충분히 비판할 만하다.[48] 민주당 창당을 위한 탈당[49] 민정당, 사회민주연합, 신당우애와 신설 합당[50] 입헌민주당 합류를 위한 탈당[51] 국민민주당과 신설 합당[52]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석] 석패율제 당선[석] 석패율제 당선[55] 2024.10.08 정계 은퇴[56] 간 나오토는 일본 의회 내에서도 이름 높은 반관료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