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3:35:47

고이소 구니아키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color: #C3C96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
]]
<rowcolor=#C3C965>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rowcolor=#c3c965>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이토 히로부미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rowcolor=#C3C965>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rowcolor=#C3C965> 제13대 제14대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다이쇼 시대|
다이쇼 시대
]]
<rowcolor=#C3C965>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사이온지 긴모치 가쓰라 다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오쿠마 시게노부
<rowcolor=#C3C965>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2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rowcolor=#C3C965>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쇼와 시대|
쇼와 시대파일:1px 투명.svg전전
]]
<rowcolor=#C3C965>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다나카 기이치 하마구치 오사치 와카쓰키 레이지로
<rowcolor=#C3C965>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이누카이 쓰요시 사이토 마코토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rowcolor=#C3C965> 제33대 제34대
하야시 센주로 고노에 후미마로
[[쇼와 시대|
쇼와 시대파일:1px 투명.svg전시
]]
<rowcolor=#C3C965> 제34대 제35대 제36대 제37대
고노에 후미마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쓰마사
<rowcolor=#C3C965> 제38·39대 제40대 제41대 제42대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쇼와 시대|
쇼와 시대파일:1px 투명.svg전후
]]
<rowcolor=#C3C965> 제43대 제44대 제45대 제46대
시데하라 기주로 요시다 시게루 가타야마 데쓰
<rowcolor=#C3C965> 제47대 제48-51대 제52-54대 제55대
아시다 히토시 요시다 시게루 하토야마 이치로 이시바시 단잔
<rowcolor=#C3C965> 제56·57대 제58-60대 제61-63대 제64·65대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rowcolor=#C3C965> 제66대 제67대 제68·69대 제70대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rowcolor=#C3C965> 제71-73대 제74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헤이세이 시대|
헤이세이 시대
]]
<rowcolor=#C3C965> 제74대 제75대 제76·77대 제78대
다케시타 노보루 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rowcolor=#C3C965> 제79대 제80대 제81대 제82·83대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무라야마 도미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rowcolor=#C3C965> 제84대 제85·86대 제87-89대 제90대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rowcolor=#C3C965> 제91대 제92대 제93대 제94대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rowcolor=#C3C965> 제95대 제96-98대
노다 요시히코 아베 신조
[[레이와 시대|
레이와 시대
]]
<rowcolor=#C3C965> 제98대 제99대 제100·101대 제102·103대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이시바 시게루
← 태정대신
섭관 · 원정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오다 · 도요토미 · 에도 · 내무경 · 총리
}}}}}}}}}
고이소 구니아키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61041, #062861 20%, #062861 80%, #061041)"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대행 제4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야마나시 한조
<rowcolor=#ff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
한국통감 · 군정사령관 }}}}}}}}}}}}}}}

파일:대정익찬회 로고.svg 대정익찬회 총재
초대

고노에 후미마로
제2대

도조 히데키
제3대

고이소 구니아키
제4대

스즈키 간타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colbgcolor=#b0313f> 대장
大將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
육군
陸軍
시라카와 요시노리 | 우가키 가즈시게 | 미나미 지로 | 아베 노부유키 | 야마나시 한조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도이하라 겐지 | 마쓰이 이와네 | 야마시타 도모유키 | 이타가키 세이시로 | 이마무라 히토시 | 기무라 헤이타로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 오카무라 야스지 |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 다치바나 요시오 | 아나미 고레치카 | 가와베 마사카즈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파일:일본 제국 해군기.svg
해군
海軍
야마모토 곤노효에 | 스즈키 간타로 | 사이토 마코토 | 나구모 주이치 | 요나이 미쓰마사 | 이노우에 시게요시 | 오카다 게이스케 | 시마다 시게타로
중장
中將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
육군
陸軍
창덕궁 이왕 은 | 홍사익 | 무토 아키라 | 이시이 시로 | 스즈키 데이이치 | 도미나가 교지 | 무타구치 렌야 | 이시와라 간지 | 사토 겐료 | 사토 고토쿠 |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 히구치 기이치로 | 이병무 | 조동윤 | 혼마 마사하루 | 오시마 히로시
파일:일본 제국 해군기.svg
해군
海軍
야마구치 다몬 | 오자와 지사부로 | 우가키 마토메 | 모리 쿠니조 | 기무라 마사토미
소장
少將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
육군
陸軍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 이희두 | 조성근 | 왕유식 | 김응선 | 어담 | 이치키 기요나오
파일:일본 제국 해군기.svg
해군
海軍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 : 사후 추서
※ 둘러보기 | 파일:일본 황실.svg 일본군 원수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척식무대신 (1896~1897)
초대
타카시마 토모노스케
척무대신 (1929~1942)
초대
다나카 기이치
제2대
마츠다 겐지
제3대
하라 슈지로
제4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제5대
하타 토요스케
제6대
나가이 류타로
제7대
오카다 게이스케
제8대
코다마 히데오
제9대
나가타 히데지로
제10대
유우키 토요타로
제11대
오타니 손유
제12대
우가키 가즈시게
제13대
고노에 후미마로
제14대
핫타 요시아키
제15대
고이소 구니아키
제16대
카네미츠 츠네오
제17대
고이소 구니아키
제18대
마츠오카 요스케
제19대
아키타 키요시
제20대
토요다 테이지로
제21대
도고 시게노리
제22대
이노 히로야
폐지
}}}}}}}}}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808080; border-right: 10px solid #808080;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직위 명단
<colcolor=#ffffff> 외무대신 <colbgcolor=#ffffff,#000000> 아리타 하치로
내무대신 코다마 히데오
대장대신 사쿠라우치 유키오
육군대신 하타 슌로쿠
해군대신 요시다 젠고
사법대신 키무라 쇼타츠
문부대신 마츠우라 시게지로
농림대신 시마다 토시오
상공대신 후지와라 긴지로
후생대신 요시다 시게루
체신대신 카츠 마사노리
철도대신 마츠노 츠루헤이
척무대신 고이소 구니아키 }}}
}}}}}}}}}

제8대 조선총독
'''일본 제국 제41대 내각총리대신
고이소 구니아키
'''
파일:Kuniaki Koiso.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80년 3월 22일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시
사망 1950년 11월 3일 (향년 70세)
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 형무소
재임기간 제8대 조선총독
1942년 5월 29일 ~ 1944년 7월 22일
제41대 내각총리대신
1944년 7월 22일 ~ 1945년 4월 7일
서명
파일:KoisoK_kao.pn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고이소 가오루코
자녀 고이소 쇼이치 (장남)
고이소 미치코 (장녀)
학력 육군대학교 (22기)
정당
종교 국가신토
약력 제18대 육군성 군무국장
제15대 육군차관
제7대 관동군 참모장
제12대 조선군 사령관
제15·17대 척무대신
제8대 조선총독
제41대 내각총리대신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12기)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01년 ~ 1938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러일전쟁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조선 총독 고이소2.3. 총리 고이소2.4. 전후와 죽음
3. 별명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군인, 정치인.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후임으로 1942년 8대 조선총독이 되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키고 미나미 총독이 제창했던 지원병 제도를 학도병 제도로 강화했다. 강제 징병, 강제 징용, 근로 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1944년 조선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제41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을 이끌었고 탄핵에 의해 총리직을 사임하였다가 1950년 종신금고로 복역 중 죽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고이소는 1880년 3월 22일, 일본 제국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시에서 태어났다. 1900년 일본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04년 전임 총독인 미나미 지로와 함께 러일전쟁에도 참전하였고 1916년 육군 참모부 부원, 1932년, 관동군 참모장으로 재직하면서 관동군 사령관 무토 요부노시, 만주국 참사관 가와고에 시게루와 일만의정서를 체결하여 만주국을 관동군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2.26 사건 이후 통제파 천하가 되자 본디 우가키파였던 고이소는 같은 처지였던 미나미처럼 숙청당하고 군복을 벗을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타테카와 요시츠구의 청탁으로 육군대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고 이후 조선군 사령관을 지내다가 1942년 전임 총독 미나미 지로의 후임으로 8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1937년,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우가키가 전임 히로타 내각 때 부활한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때문에 육군대신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다가 조선총독 시절 심복이었던 고이소에게 육군대신으로 부임할 것을 부탁했으나 고이소는 우가키가 이미 찍혀 있는걸 눈치까고 그를 배신한다.

2.2. 조선 총독 고이소

조선 총독이 되자 전임자의 조선 민족말살정책을 그대로 전수받아 창씨개명과 한글 사용 및 한국사 교육을 전면 금지시켰으며 이를 통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서 한글학자들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탄압은 탄압대로 하면서 한편으로 이중적인 정책을 하여 조선인들에게 트롤링을 벌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고대사에 빠져 있었던 총독 중 한 명이었는데, 나름대로 연구한 고대사 지식을 바탕으로 단군=스사노오 설을 주장한 것이 바로 고이소였고, 이 때문에 경성제대에서는 총독이 미쳤다고 발칵 뒤집혔다.

어떻게든 조선이 내지의 일부라는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겠답시고 "사실 나도 조선인 혈통이다", "일본 관서지방은 거의 다 조선인 후손임을 확신한다" 따위의 아무말 대잔치를 서슴없이 벌이기도 했다. 식민사관 역시 고이소 총독 시절에 상당히 수정되어 '늘 중국에 굽신거리며 사대나 하던 조선' 이라는 기존의 비하적 사관을 지나인들의 침략에 맞서 유연한 외교로 일본인의 순수성을 사수한 조선으로 포장하기도 하며 조선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동시에 내선일체를 정당화 하려는 아스트랄한 발언들을 반복하였다.

내외지행정일원화 조치를 통해 조선을 일본과 동등한 법역으로 취급하려고 했으며 내선평등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장기적으론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동화를 시키고 단기적으론 조선인들을 일본의 전쟁으로 대대적으로 동원하려는 술책이었다.

전임자가 제창했던 지원병 제도에 학도특별지원병 제도를 더해 조선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전쟁에 동원하고자 했다. 근로정신대와 강제징용, 나아가 일본군 위안부 역시 이의 악행 중 일부로 거론된다.

후에 신민당 총재가 되는 이철승[1]이 학병거부운동을 벌이자 면담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어르고 달래보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말돌리기나 하는 고이소에게 이철승은 제대로 된 대답을 받지 못했다며 일침을 가하고 돌아갔다. 대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생들: 일본은 대동아 성전(聖戰)이라고 하고,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모두 독립을 인정하면서, 왜 2,000만 명의 조선(朝鮮)만 독립시키지 않습니까? 나라의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전개하겠습니다!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과 일본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다. 그러기에 조선과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되어야 해, 제군의 말에 일리는 있어. 그러기 때문에 내가 부른 게 아닌가. 조선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게 바로 내 직책이야. (이철승 등을 보며) 어느 학교 누구인가?
이철승: 보성전문 이철승(李哲承)입니다.
고이소 구니아키: 음...김성수(金性洙)[2] 선생은 물샐 틈 없는 인물이지...
학생들: 그러면 이번의 전문학교 정비에 보성전문도 폐쇄되는 겁니까? (고이소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해 주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자) 못 알아 듣겠습니다. 우린 이제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천황의 신민으로서 전쟁터에 나가서 죽을 수 있는 신성한 권리를 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하고, 징병제의 대가로 참정권을 받아야 한다는 조선인 엘리트들의 요구에 대해서 일본 정계는 언어도단이라는 것이 이때까지만 해도 지배적인 반응이었다. 사실 조선인을 일본군에 받아들임만 해도 일본군 입장에선 상당히 양보한 것이었다.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던 육군에선 이러다간 일본인은 다 죽고 출산율 높은 조선인만 남게 생겼으니, 조선인도 같이 죽어야 균형이 맞는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 조선인 징병 반대론자였던 도조가 42년부터 태도를 바꾸어 조선인 징병을 마지못해 밀어붙이는 판국이었고 엘리트적인 해군은 이 와중에도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히로히토도 조선인 징병제 안건이 상주되자 "그럼 조선인들이 참정권도 달라는거 아니냐?"라고 물었을 정도로 조선인들에게 의무를 부여하면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는 일본 정계의 합의된 우려였다. 하지만 1943년 카이로 선언으로 연합군이 조선의 독립을 약속하고 사이판 함락으로 도조 내각도 나가리되면서 조병옥조선인 엘리트들이 조선인 총리대신이 나올 거란 보장이 없으면 재미 없다는 돌직구를 조선총독부 관리들 앞에서 날려버리고 공출로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그야말로 조선도 못 건질 판이 되자 어떻게든 조선을 일본 제국 통치 하에 묶어두기 위해 망하기 직전에 참정권을 던져주고 조선인 귀족원 의원들을 칙임하게 되지만 몇 달 못가 조선이 해방되었다.

2.3. 총리 고이소

파일:external/www.kantei.go.jp/souri41.jpg
41대 총리 취임 후

1944년 사이판의 함락으로 도조 내각이 퇴진하고 후임 총리로 데라우치 히사이치 남방군 총사령관, 하타 슌로쿠 지나(China의 일본식 발음)파견군 사령관, 고이소 이렇게 세사람이 물망에 오르게 된다. 데라우치는 최전선 사령관이니 지금 불러들이기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가장 적합한 후보라는 의견이 대세였음에도 기각되었고 하타 슌로쿠는 중신들이 대부분 반대하여 결국 히라누마 기이치로요나이 미쓰마사의 추천을 받은, 가장 무난하고 힘도 없는 고이소가 총리에 오르게 된다. 고이소는 육군대신 겸직과 현역 육군대장 복직을 요청했으나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 대장에게 단칼에 거절당했고 육군성 시무국장 사토 겐료 중장으로부터 2달이면 무너질 것이라는 조롱을 듣는다.

고이소는 미군에게 일격을 가해 그 기회를 노려 대미 강화에 나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육군 지휘부는 고이소의 의향을 따르지 않았고 최고전쟁 지도회의에서 고이소는 발언시 하타 히코사부로(秦彦三郞) 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근대적 작전용병을 모르는 수상은 발언할 자격도 없다"라는 수모를 당했다.

육군성 내부에선 "이 내각은 2달 밖에 갈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그 이유는 구니아키가 육군의 엘리트가 아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육군대학에서 졸업 했을 때 성적은 55명 중에 33등이였는데다가, 20등 이하의 성적을 가지고 출세한 자는 고이소 뿐이었기 때문이다[3]. 그래서 고이소는 다른 육군의 엘리트들에게 젊었을 적부터 무시당했고 이로 인해 어느 파벌에 끼어들지 못하게 되어서 육군 내부에 그의 편이 되어줄 강력한 파벌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이소가 승진을 한 이유도 분명했다. 고이소는 엘리트를 제외한 육군 내부에서 이상한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또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유연하다는 평도 들었는데, 1930년 군무국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성적과 달리 의외로 실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을 씹고 뜯고 맛본 다음에 논리적이고 표현력이 좋게 연설하는게 특기였다고. 군무국장, 총독, 나아가 총리라는 어려운 자리를 버텨낸 건 그런 능력이었다. 어쩌면 인간승리. 하지만 후에서 보듯이 의외라는 정도지 임기응변 이상의 능력은 없었다.
파일:고이소 내각 출범 기념사진.png
고이소 내각

1944년 10월, 사이판 함락을 구실로 사임한 도조 히데키의 뒤를 이어 총리에 발탁되었다. 예비역이 된 후 조선 총독을 하는 등 오랫동안 군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다는 이유에서 임명된 까닭이었다. 도조 히데키가 퇴임을 받아들이는 대신 마지막까지 밀어붙인 스기야마 하지메의 육군대신 임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등, 본인도 육군대장 출신이면서 육군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육해군 모두에게 무시당하고 전과 보고도 제대로 받지 못해 전황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 히로히토가 무어라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패배를 듣고 고이소는 디시 현역 육군대장 복귀와 육군대신을 겸직을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도 육군의 반대를 이겨내지 못해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4]
파일:970px-Koiso2.jpg
1945년의 고이소 구니아키

그는 도조의 무능한 정책을 이어갔으며, 카미카제의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 자폭기에 장갑을 덧대는 등 삽질은 계속 되었다. 고작 9개월의 집권 기간 동안 손발이 안 맞아 해군은 해군대로 패전하고, 육군과 해군의 알력싸움으로 골만 깊어지는 등, 되는 일이 없었다. 각 일본 육군이나 해군 내각에서도 유우부단한 고이소에 대해서 그의 능력에 대해 불신했기 때문에 전쟁을 지휘하는 지도자로는 맞지 않았다.

이런 삽질은 동맹국인 나치 독일에까지 전해져, 나치 독일의 총리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고이소 내각은 전쟁을 수행할 힘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일본독일보다 먼저 항복하면 독일이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밖에 없다"고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정작 독일이 3달 먼저 망했다. 그래도 5월에 망했으니 최소한 구니아키 퇴임 이후였다.

고이소 내각이 무너진 결정적 원인은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을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해서 그를 축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5] 결국 고이소의 막장 운영에 지친 귀족 원로들과, 해군 출신 원로들의 연합탄핵으로 총리직에서 쫓겨나는 운명을 당했다. 이로서 고이소 내각은 1945년 4월 7일 무너져 겨우 8개월짜리의 단명 내각이 되고 말았다.

2.4. 전후와 죽음

1948년 A급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불려나간 고이소는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자신의 정치인생을 다룬 회고록을 집필하였으며, 조선총독 시기 만난 조선 정치가들에 대한 논평도 남겼는데 특히 박중양에 대해서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혹평했다. 그러다가 70세가 되던 1950년 스가모 구치소에서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3. 별명

  • 고이소 구니야키가 스스로 좋아하는 별명이자 일본군 상층부에서 고이소를 부르는 별칭은 조선의 호랑이였다. 그 이유는 가장 못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6] 이 때문인지 패전 후 연합국 측의 예비검사에 의해 심문이 이루어 졌을 때 검사가 "장군은 조선의 호랑이라 불렸지요. 이제 그 이유를 답하시오."라고 질문하자, 고이소는 "역대 조선 총독 중에서 보다시피 내가 제일 못생긴 얼굴이요, 이 얼굴이 호랑이와 비슷하지 않은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에 검사가 웃으면서 "잘 알았소." 하며 납득했다고 한다.[7]

4. 둘러보기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A급 전범
평화에 대한 죄
사형수
기무라 헤이타로 도이하라 겐지 도조 히데키 마쓰이 이와네 무토 아키라
이타가키 세이시로 히로타 고키
복역수
가야 오키노리 고이소 구니아키 기도 고이치 도고 시게노리 미나미 지로
사토 겐료 스즈키 데이이치 시라토리 도시오 시마다 시게타로 시게미쓰 마모루
아라키 사다오 오시마 히로시 오카 다카즈미 우메즈 요시지로 하시모토 긴고로
하타 슌로쿠 호시노 나오키 히라누마 기이치로
피의자[1]
히로히토 천황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고노에 후미마로 코다마 요시오 고이즈미 치카히코
구즈 요시히사 기시 노부스케 나가노 오사미 니시오 도시조 다니 마사유키
다다 하야오 다카하시 산키치 데라시마 겐 도쿠토미 소호 마사키 진자부로
마츠오카 요스케 사사카와 료이치 사토미 하지메 쇼리키 마츠타로 스마 야키치로
아모 에이지 아베 겐키 아베 노부유키 아오키 카즈오 아카기 고헤이
안도 기사부로 오카와 슈메이 오타니 게이지로 이사하라 히로이치로 이와무라 미치요
하시다 구니히코 혼다 구마타로 혼조 시게루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B · C급 전범
일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피의자 약 5,700여 명[2]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범죄 사건
학살 사건 난징 대학살(100인 참수 경쟁) | 마닐라 대학살 | 밀리환초 학살 | 바탄 학살 | 보르네오 학살 | 중국 북부 학살 | 치치지마 식인 사건 | 파푸아뉴기니 학살 | 팔라완 학살 | 베허호 사건 | 아라시함 포로 학살
생체 실험 731 부대 | 규슈대학 생체해부
전시 강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노역 정신대 | 죽음의 철도 | 하시마
정치적 추종 세력 및 사상
순국7사묘 · 신사본청 · 야스쿠니 신사 · 팔굉일우 · 일본의 우경화(넷 우익) · 일본의 역사왜곡 · 일본의 피해자 행세 · 일본회의 · 국가신토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 애국 비즈니스
가나다 순 배열
[1] 불기소 피의자, 재판 전 사망자 포함. 공식적으로는 이들은 무죄이다.
[2] 개별 사건의 중복 피고인까지 합계되었으며, 이 밖에 추축국 피점령지 내 부역자, 기소유예자가 포함된 수치이다.
}}}
}}}}}}

추축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cc
<colcolor=#fff> 국가 | 지도자
유럽 <colbgcolor=#838383,#191919>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에리히 레더 · 빌헬름 카이텔 · 하인리히 힘러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파일:전향 아이콘.svg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베니토 무솔리니 · 피에트로 바돌리오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살로 공화국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베니토 무솔리니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 호르티 미클로시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국민단결정부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살러시 페렌츠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파일:전향 아이콘.svg | 미하이 1세 · 이온 안토네스쿠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국파일:전향 아이콘.svg | 보리스 3세 · 시메온 2세
파일: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국기.svg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요제프 티소
파일: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국기.svg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에밀 하하
파일:비시 프랑스 대통령기.svg 비시 프랑스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필리프 페탱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 크로아티아 독립국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안테 파벨리치 · 토미슬라브 2세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웨이 크비슬링 정권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비드쿤 크비슬링
파일:모나코 국기.svg 모나코 공국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파일:전향 아이콘.svg | 루이 2세
파일:세르비아 구국정부 국기.svg 세르비아 구국정부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밀란 네디치
파일:바르다르 마케도니아 국기.svg 바르다르 마케도니아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이반 미하일로프
파일:러시아 해군기.svg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파일:모호 아이콘.svg | 안드레이 블라소프
파일:로코트 자치국 국기.png 로코트 자치국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파일:벨라루스 국기(1918, 1991–1995).svg 벨라루스 중앙 라다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라다슬로 아스트로스키
핀란드파일:전향 아이콘.svg | 그리스국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알바니아 왕국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핀도스 공국 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류블랴나 주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덴마크 보호령 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파일:모호 아이콘.svg
아시아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 쇼와 천황 · 고노에 후미마로 (전쟁 이전)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스즈키 간타로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아이신기오로 푸이 · 장징후이
파일:몽강연합자치정부 국기.svg 몽강연합자치정부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데므치그돈로브 · 운왕
파일:왕징웨이 정권 국기.svg 왕징웨이 정권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왕징웨이 · 천궁보
파일:자유 인도 임시정부 국기.svg 자유 인도 임시정부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찬드라 보스
파일:베트남 제국 국기.svg 베트남 제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바오다이 황제
파일:캄보디아 왕국(괴뢰국) 국기.png 캄보디아 왕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노로돔 시아누크
파일:버마국 국기.svg 버마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바 우
파일:필리핀 제2공화국 국기.svg 필리핀 제2공화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호세 라우렐
파일:라오스 왕국 국기.svg 라오스 왕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시사방봉
이라크 왕국파일:전향 아이콘.svg | 태국파일:전향 아이콘.svg
이념 파시즘 · 전체주의 · 권위주의 · 군국주의 · 반공주의
영토 확장 계획 레벤스라움 · 이탈리아 이레덴타 / 스파치오 비탈레 · 대동아공영권
파일:전향 아이콘.svg 전쟁 도중 연합국으로 전향 파일:모호 아이콘.svg 간접적 지원 및 여부 논란
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나치 독일의 괴뢰국 / 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 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일본 제국의 괴뢰국
}}}}}}}}}}}}}}}


[1] 10월 유신 이후 친여당 성향("사쿠라")으로 욕을 먹긴 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엔 열혈 학생이었다.[2] 훗날 고려대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이사장이자 대한민국 부통령이 되는 그 인촌 김성수 맞다. 충숙공 이용익이 세운 보전을 인수하여 교장을 지냈었으며 동아일보의 창립자였다.[3] 일본 육군은 육사와 육군 대학 시절의 성적이 이후의 출세를 결정 짓는 오늘날 시각으로는 황당한 전통이 있었다. 단, 고이소 뿐이라는 말은 대장급 한정이다. 중장의 경우에는 몇명 더 있다.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라던가, 일본 최악의 졸장인 도미나가 교지가 그 예.[4] 참고로 고이소는 도조보다 선배였다. 그러나 고이소는 본인 이외에 육군에 동료 장성이 없었기에, 즉 자기 파벌이 없었기에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핵심 인물들에게 무시당한 것이다.[5] 고이소는 중일전쟁을 밀사를 통해 해결보려다가 실패한 경력이 있어 시게미쓰의 협상력을 신뢰하지 않았다.[6] 웃기게도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미성이었다.[7] 정작 고이소 구니아키는 이 취조 과정이 자신을 바보로 여기는 것이라고 여겼고 검사와 취조 과정을 경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