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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 |||
<colbgcolor=#062861><colcolor=#fff> 출생 | 1868년 8월 9일 | ||
비젠국 이와나시군 (現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 |||
사망 | 1956년 4월 30일 (향년 87세) | ||
시즈오카현 다카타군 (現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 |||
재임기간 | 제3대 조선총독 권한대행 | ||
1927년 4월 4일 ~ 1927년 12월 10일 | |||
제6대 조선총독 | |||
1931년 6월 17일[1] ~ 1936년 8월 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62861><colcolor=#fff> 신장 | 180cm[2] | |
학력 | 육군대학교 (14기)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1기) | ||
복무 | 일본제국 육군 | ||
1891년 ~ 1931년 | |||
최종 계급 | 대장 | ||
참전 | 러일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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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現狀에 조선인에게 참정, 자치를 허용하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내린 명을 저버린 것이다. 반도 2천 만 동포로 하여금 內爭과 혼란과 기근과 쇠망으로 이끌어 가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수습하기 힘들다.
1929년 11월8일, 角田順校訂, 『宇垣一成日記』 1,
일본의 군인, 정치가, 제6대 조선 총독. 오카야마현 출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 농사꾼의 5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모쿠지.[3] 1929년 11월8일, 角田順校訂, 『宇垣一成日記』 1,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0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였다.[4] 1891년에 일본군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 후 러일전쟁에 참모로 참전했다.1906년, 아내를 잃고 38살의 나이로 상관 오하라 요시지로 소장의 딸인 오하라 사다코와 재혼했다. 신부의 나이는 18살. 1913년에 해군 출신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가 군부대신[5] 현역 무관제를 폐지[6]하자 열 받아서 괴문서를 뿌리기도 했다. 1915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24년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의 육군대신에 취임했고, 1925년에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1927년까지 4개 내각(기요우라 게이고~와카쓰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에서 육군대신을 지냈다.[7] 사이토가 제네바 군축협상으로 총독에서 물러나자 4대(야마나시 한조) 부임 사이에 임시 총독(1927년)을 지내기도 했고, 이후 차기 총리로 하도 유망해서 정계의 혹성(政界の惑星)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이 별명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었으니, 뒤에 보듯이 내각총리대신(태양)만 뺑뺑 돌다 끝난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가키가 육군장교단이 치를 떠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우가키 군축(일본군 항목 참조)으로 21개 사단 중 4개 사단(34,000명)을 날려버렸던 것이다.[8] 줄인 예산은 교련과 현대적 무기로 그대로 사용되었다. 육군 내부에서 눈에 띠는 현실주의적, 민주주의 친화적 군인으로, 6사단장 재직 시절에는 상당히 민주적인 병영 문화를 만들어냈고 세계 대전의 교훈을 받아들여 현대화, 차량화, 화력 강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정신력 만능주의를 주장하는 우에하라 유사쿠 등과 대립했다. 사실 이러한 현실적인 면모는 조슈벌 전반에서 보이는 것으로, 꼬장꼬장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다이쇼 시대부터는 정당정치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고 처음에는 입헌동지회, 그 다음에는 하라 다카시의 입헌정우회와 연대했으며 야마가타 이후 조슈벌의 지도자가 된 다나카 기이치는 정당정치에 매우 능숙해서 나중에 입헌정우회의 총재를 거쳐 내각총리대신까지 올랐다. 우가키가 일본 육군의 이단아는 아니고 이러한 흐름 중에서도 상당히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던 셈. 하지만 그런 그도 완전한 영미식 의회민주주의자가 아닌, 기본적으로 육군의 조직적 이익과 크게는 일본 제국의 대륙에서의 전략적 성취를 주장하는 인물로, 위에서 언급했듯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에서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폐지하자 이에 격렬히 반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1년에는 군 소장파로부터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라고 추대되기도 하여 본인 역시 호응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3월 사건인데 정작 우가키가 정식으로 총리로 지명될 가능성이 보이자 발을 빼버려서 우가키는 이후 군에서 믿을 수 없는 인물로 찍히고 말았다.
이후 매우 유력한 조선총독 후보로 꼽혔으나 다나카 기이치와 입헌정우회의 빽으로 야마나시 한조가 총독에 임명되면서 밀려난다. 하지만 야마나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뢰사건으로 사이토 마코토로 다시 교체되고, 이후 사이토가 정무총감 해임 문제로 총독에서 사임한 후 총리로 영전하면서 1930년대 전반기의 6대 조선총독을 지냈다. 조선총독의 막강한 권력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승진이었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야심가인 그를 중앙에서 쫓아내려는 조처이기도 했다. 그의 통치 분위기는 후술하겠다.
2.2. 여러차례 실패한 총리의 꿈
원래는 사실 총독이 아니라 내각총리대신이 먼저 될 수 있었다. 1927년 와카쓰키 레이지로[9] 다음의 총리으로 내정하려 했는데, 육군장교단이 나서서 적극 방해하면서 결국 입헌정우회의 총재 다나카 기이치가 총리 자리에 오른다. 이후 한동안 한직을 보낸다.1930년 7월 하마구치 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으로 기용되었고, 미수로 끝난 1931년 3월 쿠데타[10] 기도에서 사건에서 총리로 옹립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군대를 써선 안된다."라고 만류했다(그리고 여전히 육군장교단 일부는 반대했다).[11]
이후 하마구치가 암살 미수로 3개월 넘게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 궁중석차를 기준으로 권한대행을 지목하게 되었는데, 따라서 본디는 내각 내에서 최상석인 우가키가 권한대행을 맡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우가키는 와병중으로 아베 노부유키가 무임소대신으로 대리사무를 해주고 있었기에 취임이 불가능했고, 그래서 우가키 다음 순위인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이 권한대행을 맡았다.
하마구치는 퇴원 후 직무에 복귀했으나, 병세가 심해져 1달 만에 사임하고, 1931년에 다시 후임 총리로 지명된 와카쓰키는 우가키를 조선 총독으로 발탁했다. 정당색이 없고, 청렴하다는 이유였다. 전전임 야마나시가 정치 인사 + 탐관오리였다는 것을 고려하여 반대로 뽑은 것. 일각에서는 당시 정권을 잡은 민정당의 의원들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그를 중앙에서 떨어뜨리기 위해서 총독직 던져준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후 정계의 변동이 급진전하면서, 제2차 와카쓰키 내각과 뒤이은 이누카이 내각이 연달아 쓰러지면서, 정당세력 내에서는 당시 정당 내에서 활발하게 펼쳐졌던 거국내각운동의 일환으로서 우가키를 보수양당의 영수로 모심으로서 입헌정우회와 입헌민정당의 세력을 규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입헌정우회 내에서 스즈키 기사부로-하토야마 이치로 일파가 반대파를 출당시키면서 지도부를 사수했고, 입헌민정당에서는 총무회장 겸 총재 권한대행 마치다 추지[12]가 정식 총재로 추대되면서 불발에 그친다.
1936년 조선 총독에서 물러난 직후, 히로타 내각이 붕괴되어 마침내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육군 측에서 육군대신을 내지 않겠다며 저지를 시도했고, 우가키는 이에 맞서 궁중에 자신을 현역으로 복귀시켜 육군대신을 겸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궁중이 군부의 저항에 굴복하면서 결국 우가키는 총리대신의 꿈을 놓치게 되었다. 당시 우가키는 히로히토 천황의 부름을 받고 도쿄로 가다가 헌병감 나카지마 게사코가 열차에 올라타 육군의 뜻이라며 조각하지 말 것을 협박했다며 회고록에 기록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육군 때문에 총리 지명자가 조각을 포기한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결국 총리가 된 사람은 엉뚱하게도 당시 조선군 사령관으로 있었던 하야시 센주로였다. 이렇게 연달아 총리 물망에만 오르고 끝난다.
1938년 6월 3일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히로타 고키의 후임 외무대신을 맡아, 영국의 중재를 통해 중일전쟁을 매듭지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왕징웨이 공작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육군이 반발하였고, 또 대중사무를 본다는 명목으로 내각 내에 흥아원을 설치하고 외무성의 대중사무가 축소되자 여기에 대한 항의로 9월 29일 사임했다.
이후 우가키는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여, 정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가령 1945년 대정익찬회를 탈당한 기시 노부스케가 호국동지회을 만들어 반정부 야당활동에 나서자, 의회 수뇌부에서는 "기시는 우가키처럼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면 그만이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이 시점에서 우가키는 웃음거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2.3. 조선 총독 우가키
2.3.1. 경제정책
내가 조선으로 가면 제일 먼저 농민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겠다.
그는 악명 높던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근무기강을 개선해 제대로 된 행정을 구현했으며, 총독부 조직을 개편했고,[13] 농업진흥정책과 수력발전소 건설 등 공업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스스로도 조선을 근대화시켰다 자부했다. 조선의 총독이라는 별명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14]
나진이 한반도 북부의 중심 항구로서 역사에 나타난 것도 이 때문이다. # 인구가 3자리 간신히 되던 작은 어촌이었던 나진의 땅값은 만주 철도의 종착역이 된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졸지에 '동해의 다롄항, '조선의 경제수도'로 거론되면서 천 배나 폭등했다. 거꾸로 다른 곳들에 땅 사놓은 인간들은 제대로 쪽박을 찼다.[15]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지정하고 1934년 1차 발표한 지정문화재에 보물, 고적(사적), 천연기념물을 지정했다[16]. 다보탑을 본뜬 극우단체 흑룡회의 도쿄 '합방기념탑' 건립을 반대하기도 했다. #
이 농업진흥정책이 훗날 새마을운동의 일부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멸사)봉공, 자조, 협동이란 슬로건은 "근면, 자조, 협동"으로 거의 비슷하게 차용했다고 한다.[17]
그 외에도 조선 농촌의 소작제 문제가 반일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파악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어느 정도 소작농들의 의사를 반영해주는 방향으로 정책을 개선한다. 조선총독부는 1932년에 조선소작조정령, 1934년에 조선농지령을 제정해 소작농의 권리를 어느 정도 인정하여 지주들의 횡포를 견제하고자 했다. 지주들은 이 법령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우가키 총독은 이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관철했다. 이것이 식민지 지주제를 근본적으로 뒤집어엎은 것은 아니었지만 소작농의 항의 및 이탈로 인한 농촌 사회의 붕괴를 막는 데 기여했다.[18]
2.3.2. 식민지 총독
일단 겉으로는 취임하면서 '조선에 뼈를 묻겠다' 라고 밝히기도 했고, 조선에 묘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는 발언도 할 정도로 그동안의 조선 총독 중에는 전향적인 자세를 가졌다.이렇게 조선인들에 대해 개인적 호의를 가졌을 수도 있지만 그도 결국 천황을 대리하는 총독이었으므로, 당시 조선이라는 일본의 영토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내선융화(内鮮融和)를 강조했으며,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어 교육시간을 줄이기도 했다. 1932년에는 장충단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와 이완용, 송병준 등 조선 식민지화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는 박문사를 박아넣기도 했다. # 이 때문에 그의 시대는 문화통치와 황민화 정책(민족말살정책)의 과도기로 여겨지곤 한다.[19]
광산 정책은 총독부의 자금으로만, 또 장진강 수력발전공사의 전력은 일본의 노구치사의 흥남비료공장에 대부분이 돌아갔다.
농촌 정책에서는 분명 전향적인 조치가 있었지만 당시 조선의 농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작제에 대한 개혁이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일본 본토에 비하면 소작농의 권리 보장 정도는 미약했다. 또한 "남면북양(南綿北羊)[20]"과 2차 산미증식계획으로 대표되는 "농촌진흥운동"은 당시 조선의 농민들 대부분이 소작농 + 문맹이었던 상황이라 근본적으로 사회구조가 뒤바뀌지 않는 이상에 큰 효과를 내기 어려운 것이었는데[21] 이런 현실은 극복하지 않고 "자력갱생 정신교육"만 쑤셔넣은 것이다. 결국 농업진흥정책은 총독이 스스로 각반을 차고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참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시행정이 되어버렸다는 비판도 받는다.
2.3.3. 재임기와 이후 영향
여튼 우가키는 이렇게 5년간 조선을 다스리고, 1936년의 2.26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정계에 나설 때라고 생각하고 총독에서 물러난다.그의 통치 시기동안 조선에서는 안정적인 경제성장이 이뤄졌고 한반도 북부 지역의 공업화도 추진되었기에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이 시기를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공업화는 진정한 경제 성장보다는 중일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 컸고, 식민지기 전반이 그렇듯 공업화의 과실은 일본인이 독점했다는 비판도 있다. 게다가 이 시기는 그 유명한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졌다. 우가키 총독 초기에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남아있어 보통학교 이상을 졸업한 졸업생 75%가 취업을 못했다. 이때 상륙해 큰 인기를 끈 독일어 단어가 그 유명한 룸펜. 이상의 《날개》나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이 이 시기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1938년의 모습[22] |
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히로타 고키 전 총리의 후임으로 외무대신에 임명되어 장제스와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노에 후미마로의 지원을 받아 1938년 우가키 공작이라는 것을 지휘했지만 군부 강경파의 폭주 때문에 말아먹었고 열받은 우가키는 외무대신직을 사임했다.
2.4. 전쟁과 패전, 그 이후
결국 정치에서 은퇴하고 타쿠쇼쿠대학 학장에 취임했다. 군사와 정치에 관한 폭넓은 안목 덕인지, 일본인 모두가 승리를 자신하던 태평양 전쟁 개전 초에도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하고 일본의 앞날에 회의감을 품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이 맡았던 역할을 자신이 맡겠노라' 생각하며 당시 막 남방작전에서 승리한 제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에게 인편으로 일본의 장래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이마무라는 '일본군이 무리한 팽창으로 병력이 분산되고 공세한계점에 도달하면 수세에 몰릴 것'이라며 그의 전망에 동의했다.자신의 조선 총독 재임에 대해서 상당히 자부심을 느꼈던 모양인지 조선의 해방과 조선 민중들의 환호에 대해서 전해듣고는 분노하면서 "머지않아 비애를 느낄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마구 저주를 퍼부었다.
패전으로 공직에 추방되었으나 공직추방령이 해제된 후에 이루어진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53년)에서 전국 최고의 득표수로 의원직 당선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이후 참의원 임기 중, 1956년에 만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전후 일본 참의원 최고령 의원이었다. 그간 조선 총독과 일본 정치인을 여러 번 오간 세월을 생각하면 정말 오래 산 셈이다. 그와 동시기를 살았던 일본 육군의 고위 장성들이나, 육군 출신 총리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을 생각해보면, 도조와 고이소의 방해 때문에 총리가 되지 못한 우가키야말로 최후의 승자였을지도 모른다.
3. 평가
국내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육군 고위 장교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육군 병력을 4개 사단이나 감축하기도 했고, 통제파가 장악한 육군 수뇌부가 내각을 흔들자 제국이 파시즘으로 갈것인지 의회정치로 갈것인지 갈림길에 서있다고 육군 수뇌부를 비판하는 성명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군 고위 장성 치고는 민간 정치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 덕분에 패전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다.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육군대신 시절 문부성과 투쟁을 거쳐 중등교육기관에 교련 과목을 도입했고, 통수권은 내각과 분리되어 생각되어야 한다고 문민통제 원칙에 적극 반대하였다. 또한 근본적으로는 그 역시 군국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이었다. 육군대신으로서 "만주와 몽골은 일본이 반드시 영유해야 한다"라고 여러차례 강조했으며 그의 재임 직후 일어난 만주사변도 그 돌발적인 측면에서 놀라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만주 침략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여 만주 침략을 착실하게 도왔는데 이는 일본 군부 온건파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당장 이시와라 간지도 중일전쟁은 결사 반대했고 호리바 가즈오를 비롯해서 만주사변을 칭송하던 참모들도 중일전쟁 불확대파를 이루어 확대파를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말하자면 중국이라는 대국과의 전면전과 일부 영토만을 침탈하는 국지 도발의 차이 및 당시 일본의 주적을 중국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냉정하게 이해했던 셈. 그는 당시 일본군 중에서는 그나마 합리적인 사고를 갖추었던 인물로 평가함이 합당할 것이다.
한편 조선총독으로서 나름의 업적을 남겼고 조선인을 단순히 착취의 대상이 아닌 통치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다른 조선 총독들보다는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우가키 가즈시게가 물러난 뒤 미나미 지로가 본격적으로 황민화 정책과 억압적 통치를 벌이자 일부 조선 식자층에서는 "우가키 가즈시게는 신사였다"며 우가키 가즈시게를 그리워하는 분위기도 있었던 듯하다.[23]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영토로써 조선을 소중히 여겼을 뿐, 조선인을 각별히 여겨 잘 대해주거나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4. 여담
- 각종 시험에서 조선총독의 이름은 그저 1910년대에는 무단통치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3.1 운동 후 1920년대에는 문화통치의 사이토 마코토, 1930년대에는 민족말살통치의 미나미 지로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 이 세 총독의 임팩트가 강한 일제강점기사에서 사이토 마코토와 미나미 지로 사이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 정도로 보면 될 법하다.
- 우가키 미사토의 친종고조부다.
- 우가키의 사위 야노는 여운형을 보고 홀딱 반했다고 전해진다. 여자였다면 그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혼했을 텐데, 남자로 태어나서 그러지 못했다고. 우가키 본인도 여운형에 대해서 상당한 호감을 표했다.
5. 대중매체에서
-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배우 윤주상이 연기했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대체역사 모드 레드 플러드에서 조선총독부의 총독으로 등장한다.
[1] 정확히는 7월 11일 부임. 취임 직전에 만보산 사건(7월 2일)과 뒤이은 조선인들의 화교 린치로 뒤숭숭하던 상황이었다.[2] 우가키 가즈시게를 실제로 본 치노 슈오로가 기록한 키이다.[3] 가즈시게(一成)라는 이름은 말그대로 "1등으로 성공하겠다"라는 의미로, 1896년에 중위로 진급하면서 스스로 바꾼 이름이다.[4] 1932년 훙커우 의거 당시 윤봉길 의사에게 처단된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동기. 그 외에 스즈키 소로쿠, 스기야마 하지메, 하타 슌로쿠, 하타 에이다로, 가와시마 요시유키, 아베 노부유키 등의 후배들도 그의 파벌이었다.[5] 군부대신이라는 직함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을 통틀어 이른 말이다.[6]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는 일본 육군의 아버지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처음 제정하였었고, 이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군부가 한창 날뛰던 히로타 고키 내각에서 부활한다. 히로타 총리는 흙수저이면서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가 사이토 내각과 오카다 내각, 본인의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낸 입지전적인 문관(文官)이었으나, 군부를 제어하지 못하고 그들의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이 제도를 부활시켰다.[7] 다만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선 우가키 본인의 동기인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육군대신을 맡았다.[8] 이때 짤린 야마나시 한조 대장이 그대로 총독으로 직행하여 금권정치를 펼친다.[9] 와카쓰키 총리는 재임 때 그를 「진정한 평화 애호자」라고 말하고 뒤에 보듯 그를 총독으로 발탁하는 등 그의 재능을 아꼈다. 와카쓰키는 군인 출신이 아닌 문민 총리였는데도 군부 인사인 그를 비교적 좋게 본 것이다.[10] 고이소 구니아키 군무국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계획이었다. 노동법이 상정될 3월 20일 군중 1만명으로 국회의사당, 입헌민정당 본부, 수상관저를 습격해 혼란을 일으키고 혼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육군을 보내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계획이었다.[11] 일설에는 전후가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쿠데타에 관여했으나, 그가 총리 물망에 오르내린다는 이야기가 나온 3월에 갑자기 뒤집었다는 이야기. 여하간 쿠데타는 이후 불문에 부쳐졌고 참여한 장군, 장교들도 처벌받지 않았다.[12] 제1차 와카쓰키 내각, 하마구치 내각 -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농림대신을 맡았다.[13] 토지개량국과 산림국을 농림국으로 통폐합하고 관련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14] 조선에 부임한 총독이 아니라, 조선을 위한 총독이란 의미. 일본어 접속서 'の'가 영어의 of처럼 쓰이는 것을 이용한 말장난.[15] 이걸 묘사한 이태준의 작품이 바로 '복덕방'이다.[16] 보물 1호는 경성 남대문(숭례문), 보물 2호는 경성 동대문(흥인지문)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국보 1호 남대문, 보물 1호 동대문으로 이어졌다. 사적 1호가 포석정, 사적 2호가 김해시 봉황동 패총 유적인 이유도, 대구광역시 도동의 측백나무 숲이 천연기념물 1호인 이유도 이와 같다. (고적 3호부터 10호까지는 북한 소재). 또한 보물 4호였던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국보 2호, 5호였던 대원각사비가 보물 3호, 8호였던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가 국보 3호가 되었다. 다만 보물 3호였던 종로의 보신각은 오늘날 기념물 10호이다. # 참고로 보물만 지정한 이유는 문화재 체계상의 "국보"는 일본에 있다는 논리 때문. 여하간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화재 관리 체계는 이 시대의 것을 답습한 측면도 있으며, 특히 임진왜란 당시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간 숭례문과 흥인지문, 그리고 경애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포석정이 1호라는 것이 일제의 조선 정복의 상징이라며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17] 우가키의 정책 외에도, 1970년대 남북한이 적대적 경쟁을 하던 당시 북한의 천리마 운동 또한 새마을운동의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18] 정연태, 1930년대 '조선농지령'과 일제의 농촌통제, 역사와현실[19] 우가키 가즈시게의 조선총독 재임 기간을 민족말살통치 시대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으나 그 때는 아직 중일전쟁 이전이라 문화통치기의 연장선상에 있던 시대였다. 최근 교과서에는 문화통치기로 수정 서술되고 있다.[20] 조선 남부에서는 면화 농업을, 북부에서는 양을 중심으로 한 모직 목축업을 장려하겠다는 정책.[21] 1920-30년대에 조선에서 쌀 수출량이 대폭 늘었났음에도 실질적으로 농민들이 만주로 이민가느냐니 북부지역 도시로 가야했다느니 했던 것도 바로 이것때문이었는데 산미증산계획으로 일본인들은 싼값에 쌀을 먹을 수 있어서, 지주들은 돈을 대거 벌수있어서 이득이었지만 쌀 수출이 늘어난다 해서 그 이득이 소작농들에게 돌아가는건 아니었고 되려 소작농들은 고율의 소작료를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때문에 소작농들은 별수없이 시궁창스러운 삶을 살아야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이런 상황을 모른건 아니었지만 소작농들의 희생으로 본토의 쌀값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었고 많은 대지주들이 식민지 체제를 지지했기 때문에 굳이 시정하려들지 않았다. 그러니 효과가 제대로 나기가 힘들었던 것.[22] 하얗게 세어 버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콧수염이 있다.[23] 계몽사 <학습만화 한국사>에서는 미나미가 '우가키라면 몰라도 이 미나미에게는 어림도 없다!'라며 우가키를 물러터졌다는 식으로 디스하는 장면이 있다.[24] 데라우치 마사타케 - 1919년 사망/ 67세, 하세가와 요시미치 - 1924년 사망/ 74세, 사이토 마코토 - 1936년 피살/ 77세, 야마나시 한조 - 1944년 사망/ 80세, 미나미 지로 - 1955년 사망/ 81세, 고이소 구니아키 - 1950년 사망/ 70세, 아베 노부유키 - 1953년 사망/ 7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