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眞興王巡狩碑 | |||
|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 창녕 진흥왕 척경비 |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
| ※ 파주 감악산비는 진흥왕 순수비 중 하나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음. | |||
| |
| 순수비의 분포도.[1] |
1. 개요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신라의 제24대 국왕인 진흥왕이 한반도 각지에 세운 순수척경비 4기를 가리킨다.2. 역사
6세기 중반, 신라 24대 국왕 진흥왕은 신라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였다. 진흥왕은 정복전쟁을 벌여 경상북도 전역과 경상남도 동부, 충청북도 남부 정도의 영역에 한정된 기존 신라 영토를 가야 전역과 한강 유역, 그리고 지금의 함경도까지 한반도 각지로 확장했다. 그리고 새로 차지한 땅 이곳저곳에 직접 행차하여 구구절절 자신의 업적을 칭송하는 비석을 여럿 세웠다.[2]순수비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삼국사기》 기록상 551년에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지역인 '낭성'에 순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진흥왕은 더 많은 곳을 순수했다. 어쩌면 순수비가 더 있는데 깊은 산 속에 있거나 오랜 세월에 넘어지고 파편으로 남아서 아직 발견을 못 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포항 중성리 신라비가 21세기에 새로 발견된 것처럼, 오늘날에도 잊혔던 금석문이 발견되는 일이 가끔씩 있기 때문이다. 조선 인조 임금 시절, 1644-45년에 동래부사로 재임한 이원진의 시에 따르면, 신라 왕들이 동래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갔다는 내용이 씐 신라시대 비석이 조선시대까지 동래온천에 있었고 비문을 이원진이 읽었다고 한다. 1640년대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신라 비석이 어느 사이에 소실된 것이다. 혹은 문서 아래에 있는 감악산비처럼 풍화되어 육안으로는 비문이 아예 안 보이거나 황초령비처럼 조각났다면,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순수비의 건립 목적은 단순히 정복업적 과시에 그치지 않고, 새로 신라에 편입된 주민들을 교화하기 위해 명망 높은 승려를 대동하며 문화적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등 활동도 있었다고 본다. 고대 한국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매우 부족한 상황에 순수비에 새겨진 많은 정보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고, 훗날 다시 발견하고 그 유래를 분석하는 과정은 한국 금석학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3. 목록
현재까지 발견된 진흥왕 시기 비석 가운데 영토순수의 성격이 있는 비석은 총 4개로, 북한산 순수비, 창녕 척경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가 이에 해당한다. 이 밖에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성류굴 벽의 신라 시대 명문 중에도 진흥왕이 행차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한편, 단양 신라 적성비는 진흥왕 시기에 건립되었으나 순수비는 아니다. 단양 적성비의 내용은 고구려 영토인 적성 지역을 신라가 차지한 후 신라에 협력한 '야이차'라는 적성 사람이 사고로 죽었으므로 남은 야이차의 가족에게 상을 내리고, 앞으로도 적성 사람들을 우대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3]
3.1.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이 설치한 비석. 대한민국의 국보 제3호. 문서 참조.
3.2. 창녕 진흥왕 척경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진흥왕이 설치한 비석. 대한민국의 국보 제33호. 문서 참조.
3.3.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진흥왕이 황초령(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소재)에 설치한 비석. 북한의 국보 제110호. 문서 참조.
3.4.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 {{{#!wiki style="color:black,white; 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tablebgcolor=#FFF,#1f2023><colbgcolor=#777777,#555555> 평양시 | 평양성 (대동문 / 보통문 / 연광정 / 전금문) · 숭령전 |
| 고구려 고분군 (호남리 사신총) · 광법사 · 안학궁 · 대성산성 · 청암리 사지 & 청암리 토성 | ||
| 고구려 고분군 (동명왕릉 / 진파리 고분군) · 정릉사 | ||
| 법운암 | ||
| 룡화사 · 평양성 (부벽루 / 을밀대 / 최승대 / 칠성문 / 현무문) | ||
| 단군릉 | ||
| 개성시 | 개성의 역사 기념물과 유적 (개성 성균관 / 개성 남대문 & 개성성 / 숭양서원 / 선죽교 / 만월대 / 현릉 / 현정릉) · 해선리 고려왕릉 · 관음사 · 영통사 · 흥국사 · 목청전 | |
| 남포시 | 고구려 고분군 (강서삼묘 (강서대묘) / 덕흥리 벽화분 / 룡강대총 / 수산리 벽화분 / 쌍영총 / 약수리 벽화분) | |
| 라선시 | 굴포리 서포항 유적 | |
| 강원도 | 보덕암 · 총석정 · 표훈사 · 신계사 · 장안사 · 유점사 · 석왕사 · 정양사 · 고성행궁 | |
| 자강도 | 인풍루 · 보현사 · 상원암 | |
| 평안남도 | 강선루 · 고구려 고분군 (덕화리 고분군) · 백상루 · 법흥사 | |
| 평안북도 | 약산동대 · 영변행궁 · 수충사 · 통군정 · 귀주성 · 의주 남문 | |
| 함경남도 | 함흥본궁 · 황초령비 · 마운령비 · 귀주사 · 함흥읍성 | |
| 함경북도 | 개심사 · 북관대첩비 | |
| 황해남도 | 고구려 고분군 (안악 1호분 / 안악 2호분 / 안악 3호분) · 패엽사 | |
| 황해북도 | 성불사 | |
| 공통 | 천리장성 | |
| }}}}}}}}} | ||
| |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던 현재의 북한 함경남도 해안 지역을 정복하고 568년에 이원군 동면 용산리 사동(寺洞) 만덕산[4] 봉우리 아래에 세운 순수비. 진흥왕 시기 신라의 북방 경계를 알려주는 귀한 사료로,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 가장 먼 곳에 세운 비석이다. 황초령비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북한에 있으며 북한의 국보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함경도 오지에 있어 신라 멸망 후 오랜 세월 잊혀져 있던 비석을 조선 시대의 지리학자 한백겸이 확인했지만 이후 조선 후기에는 다시 위치가 잊혀져 김정희 시대에도 소문으로만 알려져 있었고, 워낙 먼 곳이라 직접 답사하기도 힘들다 보니 존재를 의심받았다. 현지 백성들은 비석 자체는 알았지만 한문으로 쓰여있는 비문을 읽지 못해 남이 장군의 비석으로 막연하게 잘못 불렀는데, 일제강점기 1929년 역사학자 최남선이 현지조사를 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황초령비와 내용은 물론 왕을 옆에서 수행한 인물 명단도 거의 비슷해 거의 비슷한 시점에 같이 세웠다고 추정한다.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보존 상태가 다른 순수비보다 좋은 편이다. 그래서 훼손이 심한 황초령비의 내용에서 지워진 부분을 마운령비의 내용으로 대신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현재는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 중.
| |
비양면(碑陽面; 전면)
태창 원년(太昌元年) 세차(歲次) 무자(戊子) ○○ 21일 ○○ ○흥대왕(興大王)이 ○○를 순수(巡狩)하여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무릇 순풍(純風)이 일지 않으면 세도(世道)가 참됨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德化)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邪惡)한 것이 서로 경쟁하도다.
그러므로 제왕이 연호(年號)를 세움에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짐(朕)은 역수(曆數)가 몸에 이르러 위로는 태조(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렵다.
또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운수를 열어 보여주며, 명명한 가운데 신지(神祗)에 감응되어 부명(符命)에 응(應)하고 셈대에 적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사(和使)가 서로 통하여 오도다.
아래로 스스로 헤아려 신구민(新舊民)을 무육(撫育)하였으나 오히려 말하기를 왕도의 덕화(德化)가 고루 미치지 아니하고 은혜가 베풀어짐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무자년(戊子年) 가을 8월에 관경(管境)을 순수(巡狩)하여 민심을 살펴서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주고자 한다. 만약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뛰어나고 재난의 기미(機微)를 살피고, 적에게 용감하고 싸움에 강하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에게는 벼슬과 ○(상품)을 상(賞)으로 더하여 주고 공훈(功勳)을 표창하고자 한다.
수레를 타고 나가 10월 2일 계해(癸亥)에 이르러 … 인하여 변계(邊堺)지역을 설유(說諭)하였다.
비음면(碑陰面; 후면)
이때 수레를 따른 자로 사문(沙門) 도인(道人)은 법장(法藏)과 혜인(慧忍)이다.
대등(大等)은 훼부(喙部) 거칠부지(居朼夫智) 이간(伊干), 내부지(內夫智) 이간(伊干), 사훼부(沙喙部) 모력지(另力智) 잡간(迊干), 훼부(喙部) 복동지(服冬知)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 급간(及干), 미지(未知) 대나말(大奈末), 급진부지(及珎夫知) 나마(奈麻)이다.
집가인(執駕人)은 훼부(喙部) 만혜(万兮)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모지(另知) 대사(大舍)이다.
이내종인(裏內從人)은 훼부(喙部) 급혜차(汲兮次)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비시지(非尸知) 대사(大舍)이다.
약인(○人)은 사훼부(沙喙部) 위충지(爲忠知) 대사(大舍)이고, 점인(占人)은 훼부(喙部) 여난(与難) 대사(大舍)이고, 약사(藥師)는 독지차(篤支次) 대사(大舍)이다.
나부통전(奈夫通典)은 본피부(本彼部) 가량지(加良知) 소사(小舍)이고, ○○는 본피부(本彼部) 막사지(莫沙知) 길지(吉之)이고, 급벌참전(及伐斬典)은 훼부(喙部) 부법지(夫法知) 길지(吉之)이다.
이내(裏內)○○○○○○○명(名) 길지(吉之)이고, 당래객(堂來客) 이래객(裏來客)은 50이고, 외객(外客)은 ○○ ○○○○○○○○○○지(智) 사간(沙干)이다. 조인(助人)은 사훼부(沙喙部)의 순지(舜知) 나말(奈末)이다.
이종욱(서강대 사학과 교수) 역
태창 원년(太昌元年) 세차(歲次) 무자(戊子) ○○ 21일 ○○ ○흥대왕(興大王)이 ○○를 순수(巡狩)하여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무릇 순풍(純風)이 일지 않으면 세도(世道)가 참됨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德化)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邪惡)한 것이 서로 경쟁하도다.
그러므로 제왕이 연호(年號)를 세움에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짐(朕)은 역수(曆數)가 몸에 이르러 위로는 태조(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렵다.
또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운수를 열어 보여주며, 명명한 가운데 신지(神祗)에 감응되어 부명(符命)에 응(應)하고 셈대에 적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사(和使)가 서로 통하여 오도다.
아래로 스스로 헤아려 신구민(新舊民)을 무육(撫育)하였으나 오히려 말하기를 왕도의 덕화(德化)가 고루 미치지 아니하고 은혜가 베풀어짐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무자년(戊子年) 가을 8월에 관경(管境)을 순수(巡狩)하여 민심을 살펴서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주고자 한다. 만약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뛰어나고 재난의 기미(機微)를 살피고, 적에게 용감하고 싸움에 강하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에게는 벼슬과 ○(상품)을 상(賞)으로 더하여 주고 공훈(功勳)을 표창하고자 한다.
수레를 타고 나가 10월 2일 계해(癸亥)에 이르러 … 인하여 변계(邊堺)지역을 설유(說諭)하였다.
비음면(碑陰面; 후면)
이때 수레를 따른 자로 사문(沙門) 도인(道人)은 법장(法藏)과 혜인(慧忍)이다.
대등(大等)은 훼부(喙部) 거칠부지(居朼夫智) 이간(伊干), 내부지(內夫智) 이간(伊干), 사훼부(沙喙部) 모력지(另力智) 잡간(迊干), 훼부(喙部) 복동지(服冬知)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 급간(及干), 미지(未知) 대나말(大奈末), 급진부지(及珎夫知) 나마(奈麻)이다.
집가인(執駕人)은 훼부(喙部) 만혜(万兮)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모지(另知) 대사(大舍)이다.
이내종인(裏內從人)은 훼부(喙部) 급혜차(汲兮次)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비시지(非尸知) 대사(大舍)이다.
약인(○人)은 사훼부(沙喙部) 위충지(爲忠知) 대사(大舍)이고, 점인(占人)은 훼부(喙部) 여난(与難) 대사(大舍)이고, 약사(藥師)는 독지차(篤支次) 대사(大舍)이다.
나부통전(奈夫通典)은 본피부(本彼部) 가량지(加良知) 소사(小舍)이고, ○○는 본피부(本彼部) 막사지(莫沙知) 길지(吉之)이고, 급벌참전(及伐斬典)은 훼부(喙部) 부법지(夫法知) 길지(吉之)이다.
이내(裏內)○○○○○○○명(名) 길지(吉之)이고, 당래객(堂來客) 이래객(裏來客)은 50이고, 외객(外客)은 ○○ ○○○○○○○○○○지(智) 사간(沙干)이다. 조인(助人)은 사훼부(沙喙部)의 순지(舜知) 나말(奈末)이다.
이종욱(서강대 사학과 교수) 역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의 내용은 요약하면 태창 원년(진흥왕 29년, 서기 568년)에 진흥왕이 순수에 나서 영토를 살피고 새긴다는 내용, 순수의 의미와 이유로 왕도정치의 표방, 진흥왕이 영토를 넓히고 백성과 토지를 얻었다는 자부심, 아직 왕이 은혜가 미치지 못한 곳이 있어 영토를 순수하고 민심을 위로한다는 내용 등을 열거하고 있다. 또 적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벼슬과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하는 부분도 있다. 그 뒤에는 진흥왕을 곁에서 수행한 여러 신하들의 명단을 쭉 써놓은 수가인명이 등장하는데 비석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기에는 승려, 고위 관리, 점쟁이, 약사 등 자잘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까지 기록해 놓아 진흥왕을 따라나선 다양한 구성원들을 엿볼 수 있다.
마운령비는 황초령비와의 상세 비교로 깨진 글자들을 모두 찾아내어 복원할 수 있는데 2025년 9월12일 서예금석학자인 문봉 안편노가 아래와 같이 완성본을 발표하였다
[新羅眞興太王巡狩管境碑] (磨雲嶺碑)
文峯 安便老(문봉 안편노 )20250912
[陽面]
01 太昌元年歲次戊子八月卄一日癸未眞興太王巡狩管境刊石銘
02 記也■■■■■■■■■■■■■■■■■■■■■■■■
03 夫純風不扇則世道乖眞旨化不敷則耶爲交競是以帝王建号莫
04 不修己以安百姓然朕歷數當躬仰紹太祖之基纂承王位兢身自
05 愼恐違乾道又蒙天恩開示運記冥感神祗應符合竿因斯四方託
06 境廣獲民土隣國誓信和使交通府自惟忖撫育新古黎庶猶謂道
07 化不周恩施未有於是歲次戊子秋八月巡狩管境訪採民心以欲
08 勞賚如有忠信精誠才超察厲勇敵强戰爲國盡節有功之徒可加
09 賞爵物以章勳效■■■■■■■■■■■■■■■■■■■
10 引駕日行至十月二日癸亥向涉是達非里奏廣淫因諭邊堺矣■
[陰面]
01于時隨駕沙門道人法藏慧忍■大等喙部居朼夫知伊干內夫
02 知伊干沙喙部另力智迊干喙部服冬智大阿干比知夫知及干
03 未知大奈末及珎夫知奈末執駕人喙部万兮大舍沙喙部另知
04 大舍裏內從人喙部沒兮次大舍沙喙部非尸知大舍𩥩[A]人沙喙
05 部爲忠知大舍占人喙部与難大舍藥師篤支次小舍奈夫通典
06 本彼部加良知小舍乃至本彼部莫沙知吉之及伐斬典喙部夫
07 法知吉之裏公欣平小舍何末買名吉之當來客裏內客五十外
08 客五十二萬民雲集■書人喙部悲智沙干助人沙喙部尹知奈末
■: 빈칸 띄움
*陰面 8행의 2~3자는 2자 자리에 두글자를 썼다.
*마운령비에서는 황초령비와 달리 智자와 知자를 구분없이 사용하였다.
*陰面 8행의 비자를 마운령비는 悲를 사용하였고, 황초령비는 非자를 사용하였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의 서체는 많이 차이가 나서 서로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사료된다.
*글을 지은 사람은 똑 같이 훼부의 비지사간이므로 마운령비는 윤지나말이 쓰고, 황초령비는 순지나말이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문의 구성 및 서체로 보면 황초령비가 마운령비보다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新羅眞興太王巡狩管境碑(磨雲嶺碑):
신라진흥태왕순수관경비(마운령비)
文峯 安便老(문봉 안편노 )20250912
[陽面]
太昌元年 歲次戊子 八月卄一日癸未, 眞興太王 巡狩管境 刊石銘記也(태창원년 세차무자 팔월이십일일계미, 진흥태왕 순수관경 간석명기야): 태창원년(서기 568년) 세차 무자년 8월 21일 계미일, 진흥태왕께서 순수관경한 기록을 돌에 새기었도다.
夫 純風不扇 則 世道乖眞, 旨化不敷 則 耶爲交競(부 순풍불선 즉 세도괴진, 지화불부 즉 사위교경): 대저 순풍이 불어오지 않으면 곧 세상의 도가 진리에서 어긋나게 되고, 지극한 덕화를 세상에 펴지 않으면 곧 간사한 무리들이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도다.
是以 帝王建号 莫不修己 以安百姓(시이 제왕건호 막불수기 이안백성): 이것이 제왕께서 연호를 세우고 늘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신 연유로다.
然朕 歷數當躬 仰紹 太祖之基 纂承王位 兢身自愼, 恐違乾道 (연짐 역수당궁 앙소 태조지기 찬승왕위 긍신자신 공위건도): 당연히 짐은 왕위에 오르는 운수가 자신에 이르러 위로는 태조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렵도다.
又蒙天恩 開示運記, 冥感神祗 應符合竿(우몽천은 개시운기, 명감신지 응부합간): 또한 하늘의 은혜를 입고 운수를 열어 보며, 그윽한 가운데 신지에 감응되어 하늘이 내리는 명령에 응하고 신령한 징후에 적합하였도다.
因斯 四方託境 廣獲民土, 隣國誓信 和使交通 (인사 사방탁경 광획민토, 린국서신 화사교통): 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평화의 사신이 서로 오가게 되었도다.
府自惟忖 撫育新古黎庶, 猶謂 道化不周 恩施未有(부자유촌 무육신고려서, 유위 도화불주 은시미유): 아래로 스스로 생각하고 헤아려 신민과 구민을 어루만졌으나, 오히려 왕도의 덕화가 고루 미치지 아니하고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도다.
於是 歲次戊子 秋八月 巡狩管境 訪採民心 以欲勞賚(어시 세차무자 추팔월 순수관경 방채민심 이욕노뢰): 이에 무자년 가을 8월에 영토를 순수하여 백성을 찾아가 민심을 살피고 그 노고를 치하하는 선물을 내려주고자 하노라.
如有 忠信精誠 才超察厲 勇敵强戰 爲國盡節 有功之徒 可加賞爵物 以章勳効(여유 충신정성 재초찰려 용적강전 위국진절 유공지도 가가상작물 이장훈효): 만약 충성,신의,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뛰어나 예리하게 살필 줄 알며, 적에게 용감하고 전쟁에선 강하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에게는 상에 더하여 벼슬과 선물을 줌이 가능하니 그 공훈을 표창하여 본 받게 함이로다.
[陰面]
引駕日行 至十月二日癸亥 向涉 是達非里 奏廣淫因 諭邊堺矣(인가일행 지십월이일계해 향섭시달비리주광음인 유변계의): 말고삐를 끌고 며칠을 나아가 10월2일 계해일에 이르러 이 달비리에 이르렀다. (신하들이) 널리 음란하다고 아뢰니 (태왕께서) 변계의 백성들을 타일렀노라.
于時隨駕, 沙門道人 法藏•慧忍(우시수가, 사문도인 법장•혜인): 이때에 수가인으로는 사문도인으로 법장과 혜인이 있었다
大等 喙部居朼夫智伊干, 內夫智伊干, 沙喙部另力智迊干, 喙部服冬智大阿干, 比知夫知及干, 未知大奈末, 及 珎夫知奈末(대등 훼부거칠부지이간, 내부지이간, 사훼부영력지잡간, 훼부복동지대아간, 비지부지 급간,미지대나말, 급 진부지나말): 대등은 훼부의 거칠부지이간, 내부지이간, 사훼부의 영력지잡간, 훼부의 복동지대아간, 비지부지 급간, 미지대나말, 및 진부지나말 이었다.
執駕人 喙部万兮大舍, 沙喙部另知大舍(집가인 훼부만혜대사, 사훼부영지대사): (진흥태왕의)말고삐를 담당한 사람은 훼부의 만혜대사, 사훼부의 영지대사였다.
裏內從人 喙部沒兮次大舍 沙喙部非尸知大舍(이내종인 훼부몰혜차대사 사훼부비시지대사): 이내종인은 훼부의 몰혜차대사 사훼부의 비시지대사이었다
𩥩[A]人 沙喙部爲忠知大舍(약인 사훼부위충비대사): 말을 돌보는 사람은 사훼부의 위충지대사였다
占人 喙部与難大舍(점인 훼부여난대사): 점치는 사람은 훼부의 여난대사였다
藥師 沙喙部篤支次小舍(약사 사훼부독지차소사): 약사는 사훼부의 독지차소사였다
奈夫通典 本彼部加良知小舍 乃至 本彼部莫沙知吉之(나부통전 본피부가랑지소사 내지 본피부막사지길지): 나부통전은 본피부의 가랑지소사 내지 본피부의 막사지길지였다
及伐斬典 喙部夫法知吉之(급벌참전 훼부부법지길지): 급벌참전은 훼부의 부법지길지였다
裏公 欣平小舍(이공 흔평소사): 이공은 흔평소사였다
何末買 名吉之(하말매 명길지): 하말매를 맡은 사람은 명길지였다
當來客裏內客五十 外客五十二(당래객이내객오십 외객오십이): 당래객은 이내객이 50인이고 외객은 52인이었다
萬民雲集(만민운집): 수 만명의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書人 喙部悲智沙干, 助人 沙喙部舜知奈末(사인 훼부비지사간, 조인 사훼부순지나말): 글쓴이는 훼부의 비지사간이었고 도우미는 사훼부의 순지 나말이었다
4. 관련 금석학 연구
4.1. 감악산비
|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감악산 정상에 위치한 비석이다. 삼국 시대 비석임은 분명한데 근처 북한산 순수비와 형태나 입지가 비슷하므로 이 또한 진흥왕 순수비가 아닌가 하지만, 오랜 세월 비문이 비바람에 닳아 없어져 읽을 수 있는 글자가 고작 열두어 자 남짓인 몰자비로 확실하게 판단할 근거가 없다.# 진흥왕 대신 진평왕이 세운 순수비라는 설도 있다.
감악산은 신라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곳으로 취급하였다. 고구려나 당나라와 벌인 칠중성 전투가 여러 차례 있었고, 통일기 이후에는 국가에서 감악산에 소사(小祀)의 격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감악산비의 존재 역시 조선시대부터 기록이 존재하는데, 이미 조선 중기의 문신인 허목(1595~1682)이 《기언》 <하·산천 상·감악산기>에서 "석단 위에 비석이 있지만 오래되어 글자를 읽을 수 없다"고 쓰기도 했다. 이 비는 비교적 현대까지도 '빗돌대왕'이라고 불리는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대전대학교 서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인 손환일은 학술지 <한국사상과 문화>에서 감악산비 글자 몇 자를 350년 만에 더 판독할 수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손환일은 "광(光), 벌(伐), 인(人) 등 글자들이 있었으므로 영토정벌 후 세운 순수비일 가능성이 있다.", "특히 벌 자는 '이벌찬'의 벌처럼 신라의 관등명을 뜻하는 글자일 수도 있다."라고 발표했다. 2022년에는 정밀 조사를 위해 새 탁본이 만들어졌는데, 박홍국 위덕대학교 연구교수가 "'전(典)'이라는 글자를 추가로 판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典)자는 기존에 알려진 당대 신라 비석에서 자주 나오는 글자이기 때문에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평했다. # 이들 주장은 상당히 적극적인 해석으로 학계에서 엄밀히 검증되지는 않았다.
현재 부분 판독한 감악산비 전문은 아래와 같으며, 몇 개 문자 외에 어떤 어구를 이룰 정도의 판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내용을 검증하는 논문 등은 발표된 바 없다.
光....伐....人....中....金...
典.....
典.....
광....벌....인....중....금....
전.....
전.....
4.2. 울진 성류굴 명문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성류굴#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성류굴#울진 성류굴 명문|울진 성류굴 명문]] 부분을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