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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제 28호 | ||
이름 | 조선어 | 강서세무덤 | |
한자 | 江西三墓 | ||
위치 |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1] | ||
시대 | 고구려 6세기~7세기 | ||
지정연도 | 미상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고구려 고분군 Complex of the Koguryo Tombs Ensemble des tombes de Koguryo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북한| ]][[틀:국기| ]][[틀:국기| ]] 남포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1091 | |
등재연도 | 2004년 | |
등재기준 | (ⅰ)[2], (ⅱ)[3], (ⅲ)[4], (ⅳ)[5] | }}} |
<colbgcolor=#000,#10100f> 강서삼묘의 전경[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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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국보 제28호.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7]에 있는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석실). 강서삼묘는 강서대묘(江西大墓), 강서중묘(江西中墓), 강서소묘(江西小墓)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봉분의 규모에 따라서 이름이 붙여졌다. 또 다른 총칭으로는 삼묘리 고분군이라고도 한다.동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북한의 국보 156호이자 강서삼묘와 같이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에 등재된 덕흥리 벽화분이 있다.
무덤이 축조된 시기는 학계의 견해차가 있긴하지만 대체로 6세기 후반~7세기 정도로 보고 있으며, 특히 강서대묘의 경우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인 왕릉으로 이해되고 있다.
2. 상세
2.1. 강서대묘
▲ 1915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강서대묘의 모습[8]
▲ 오늘날에 북한이 관리하고 있는 강서대묘의 모습.
강서대묘는 삼각배치 중 가장 남쪽에 있는 무덤으로 봉분의 규모가 장축 51m, 높이 9m에 달한다. 평양 천도 이후 조성된 석실봉토분(굴식돌방흙무덤) 중에서 두번째로 큰 크기이며, 가장 큰 강동군 경신리(舊 한왕리)에 소재하는 경신리 1호(이칭 한왕묘)의 봉분규모와 장축 54m, 높이 12m에 비해 약간 차이가 있는 정도이다[9].
▲강서대묘의 투시도
무덤은 외부에서 현실로 들어가는 통로인 연도(羨道, 널길)와 정방형에 가까운 하나의 현실(玄室, 널방)을 갖고 있는 단실(單室) 구조이며,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매장주체부는 몇 매의 대형 화강암을 매끄럽게 가공한 절석(切石)으로 만들어 벽체로 쌓아 올렸으며 현실의 크기는 W318*D315*H350cm로 강서 삼묘 중에서는 강서소묘에 이어 두번째로 크다. 벽면과 천정부분이 맞닿는 모서리에는 오각형 입방체를 두어 천정부 하중을 분산하게 하였다. 때문에 안쪽에서보면 마치 팔각고임이 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천정부분은 후기 고구려 석실의 천정구조 국룰인 2단 평행고임 이후 삼각고임이 이루어졌다. 현실의 내부에는 시신을 놓는 시상(屍床)이 2개가 마련되어 있다.
연도와 현실 사이에는 바닥의 단을 달리하는 묘도가 있는데, 묘도에는 돌로 만든 문 시설(門扉)이 확인되었으며 이 또한 평양 천도 이후 대형 석실분에서 주로 나타나는 요소이다.
강서삼묘에는 벽면과 천정고임부의 벽면, 천정석 하단 등 고르게 벽화가 남아 있다. 주요한 특징으로는 강서삼묘 이전의 고구려 벽화분이 대부분 무덤의 벽면에 두텁게 백회를 칠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린 것에 반해, 강서삼묘는 백회를 바르지 않고 돌 벽면 위에 바로 벽화를 그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국내지역[10]의 오회분 4호묘와 매우 유사한 양상이기도 하다.
위의 강서대묘의 묘실구조 도면에 표시된 벽화의 위치처럼, 가장 안쪽 벽(북벽)에는 현무도, 서벽에는 백호, 동벽에는 청룡을 그렸으며, 현실로 들어오는 입구 내측 양쪽(남쪽)에 주작을 2마리 표현하였다. 무덤의 뚜껑과 같은 천정석에는 중앙을 의미하는 황룡을 그렸으며 이러한 사례는 윗 문단에서 언급한 오회분 4호분과 유이한 사례이다. 일반적으로는 천정석 아래에는 대형의 연화문 정면 모습을 그리는데 강서대묘는 황룡을 그려넣고 그 대신에 천정석 아래의 고임석에 연화문을 4분할하여 그려넣었다[11]. 벽면에는 일부 지형표현을 제하면 사신도(四神道)만 그려졌으며, 천정부의 각 단에는 인동문과 연화문의 장식무늬를 그려넣었다.
현무도 | 백호도 |
주작도 | 청룡도 |
강서대묘는 6세기 후반 이후의 대표적인 고구려 석실벽화분인데, 기존에 유행하던 장식무늬패턴의 벽화와 생활풍속도 벽화들 중에 그 구성요소의 일부로써만 표현되던 사신(四神)이 메인 테마가 된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12]. 또 이전까지 각 사신의 묘사가 다소 중구난방이었다면 사신도 단일 제재가 유행하는 6세기 후반이후부터는 점차 날렵한 체형에 미끈한 인상을 주는 화풍으로 사신이 묘사된다는 특징이 있다.
강서대묘처럼 정방형에 가까운 현실의 평면, 현실의 각 면의 길이가 약 3m급, 사신도 제재의 벽화, 절석처럼 가공된 석재는 강서대묘 뿐만아니라 6세기 후반 이후의 왕릉, 왕릉급 고분들의 공통된 현상이기도 하다. 특히 강서대묘는 비슷한 유형들 가운데서 가장 봉분, 석실구조 등에서도 큰 편에 해당하고 석재의 가공도도 높기 때문에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 왕릉의 묘주(墓主)를 논할때 강서삼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어 왕릉으로보는 데에 이견이 없는 편이다. 다만 그 묘주에 대해서는 각론이 너무 많기에 아래에서 하술.
2.2. 강서중묘
강서삼묘 중 두번째로 큰 봉분을 갖고있어 강서중묘로 불리며, 강서대묘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스펙은 강서대묘와 비슷한데 약간씩 차이가 있다. 강서대묘와 마찬가지로 정방형평면의 현실, 중앙에 놓인 연도, 현실 각 변 3m급의 대형 현실, 사신도 중심제재의 벽화 구성으로 상당히 높은 위계를 갖는 무덤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강서대묘와 함께 주로 왕릉으로 이해되고 있다.
봉분은 강서대묘에 비해서 조금 더 작은 편이고, 묘실 규모는 W329*D309*H255cm로 평면적은 대묘에 비해 조금 작지만 현실의 높이에서 차이가 있다. 스펙상으로만 놓고보면 강서중묘의 묘실이 강서소묘보다 도 조금 더 작다. 천정 구조에서도 강서중묘는 2단 평행고임만하고 천정석으로 마무리한 형태이다.
강서중묘 청룡 모사도 | 현무 모사도 |
강서중묘 역시 대형의 화강암을 정연하게 가공하였고, 그 벽면 위에 백회없이 바로 사신도를 그렸다. 다만 강서대묘처럼 통일된 양식의 사신도는 아닌데, 강서중묘는 현무를 제외하면 강서대묘의 주작, 청룡, 백호와 비슷하지만 현무는 강서대표처럼 꼬리가 서로 꼬인 형태의 현무가 아니라 다소 뚱뚱하고 뻣뻣한 느낌의 현무가 그려져 있다.
2.3. 강서소묘
강서중묘의 동쪽, 강서대묘의 북동쪽에 위치하는 봉분이 가장 작은 봉토석실분이다. 강서삼묘 중에서 작은 것이지 장축이 약 30m 정도로 다른 보통의 고분들에 비해서는 훨씬 크다. 강서소묘도 강서대묘, 중묘처럼 이른바 왕릉, 왕릉급으로 분류될만한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특히 봉분규모로는 소묘지만 현실의 체적만으로는 근소하지만 세 무덤 중에서 가장 크다(W336*D350*H350cm). 또 강서대묘처럼 벽면과 천장부가 맞닿는 모서리에 고임돌을 두었다는 점에서 양자간의 축조기법상 동질성이 보이기도 한다. 강서소묘도 절석으로 가공한 화강암을 사용하였고 묘실구조가 전반적으로 강서대묘와 비슷하며 천정구조도 평행고임 3단에 삼각고임으로 마무리하는 형태이다.
그러나 강서소묘의 가장 큰 특징은 갖출 것을 다 갖추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강서대묘와 중묘가 왕릉으로 꾸준히 거론되는데 반해서 소묘는 왕릉 여부에 대한 논의도 꽤나 있으며 왕릉이 아니라 보는 견해도 많다.
3. 강서삼묘의 주인
강서삼묘의 묘주에 대한 논의는 강서삼묘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몇가지 요인이 있지만 요약하면 고구려 후기 고분에서 출토유물이 사실상 없고 벽화와 묘실규모, 묘실구조 등에 의존해야하는데 비교자료도 적기 때문에 같은 현상이라도 연구자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야말로 물 반잔을 밖에 안남았다하느냐 반잔이나 남았냐하는 셈.때문에 학계에서도 평양 천도 이후의 특정 무덤은 적어도 누구왕이다라고 할만한게 없다.[13] 그럼에도 왕릉비정의 어려움에서 촉발되는 큰 문제는 없는데 이는 1:1대응에 일치된 견해가 없을뿐, 단계적인 변화상으로는 얼추 대응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평양 천도 이후에는 각 견해를 포괄하여 보더라도, 왕릉을 포함한 벽화 제재 유행의 흐름과 고구려 단실계 석실의 정형화 과정 등으로 보면 '한왕묘(경신리 1호분)·전 동명왕릉·토포리대총[14]' → '호남리 사신총 → 강서대묘·중묘[15]'의 큰 틀에는 이견이 없다. 한왕묘, 전 동명왕릉, 토포리 대총이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 호남리 사신총과 강서대묘, 중묘가 6세기 중엽 이후 정도로 파악된다. 즉, 느슨한 수준에서는 각 시점마다 대응되는 무덤과 왕이 있는 셈.
국내지역의 문제를 차치하고보면 장수왕(491년 崩)부터 안원왕(545년 崩)까지 5명의 왕이 앞의 세 무덤의 묘주로 거론되고 있으며, 남은자리는 대체로 진파리 고분군[16]의 1,4,7호로 채워지고 있지만 진파리 고분군에 대해서는 다소 각 무덤들의 연대 및 고분군 정황 등에서 이견이 있는 편.
그 이후는 양원왕(559년 崩), 평원왕(590년 崩), 영양왕(618년 崩), 영류왕(642년 崩), 나아가 평원왕의 아들이며 추존왕인 대양왕까지 더해 강서삼묘의 묘주 후보로 거론된다. 학계에서도 가장 많이 논의된 것은 강서대묘인데, 강서대묘가 삼묘 중에서 가장 크고 멀끔하기에 왕릉에 대한 의심이 없다. 다른 여러 이유도 있겠지만 정말 간단히 요약하면 고구려 후기에 마지막 불꽃이었던 평원왕 또는 영양왕이 강서대묘의 묘주로서는 모자랄게 없기도하고해서 주로 이 두 왕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서삼묘에서의 주요 관건이 되는 요소는 1. '강서대묘→중묘' 또는 '강서중묘→대묘'의 변화순서인가? 라는 것과 2. 강서소묘는 왕릉인가? 에 대한 문제, 또 3. 강서삼묘의 특이한 군집이 시사하는 바는 고구려 말기의 악화된 정치상인가 아니면 그러한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강서삼묘에 모이게 된 것인가라는 해석적 측면에서의 문제 등이 있다. 강서대묘를 평원왕 또는 영양왕이라고 볼 때에 나머지 왕릉급 무덤인 중묘, 소묘는 나머지 왕들과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결국 문제인셈.
다만 자료 본연에서 사실상 3기의 무덤만으로 논해야하는 만큼 변천순서나 왕릉 여부 등에서 합리적인 판단준거가 되기 어렵기에 다른 연구 주제에 비해서 추정적인 측면이 크다. 각 설마다 일장일단이 있는 셈인데 임기환 교수의 칼럼에 잘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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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 건흥 |
[1] 이북 5도 기준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4]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6] 사진 우측(방위로는 남쪽)에 위치한 무덤이 강서대묘, 가장 좌측이 강서중묘, 중앙 위의 것이 강서소묘이다. 후기 고구려 왕릉 중에서는 비교적 밀집된 역삼각형 배치양상으로 강서삼묘가 유일한 사례이다.[7] 광복 당시 평남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 해방 전에는 우현리였으며 때문에 우현리대묘, 중묘, 소묘로 불렸다. 강서삼묘로 인해서 삼묘리라는 이름으로 바꼈다.[8] 지금도 이와 같은 구조로 보존되어 있다. 과거엔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고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벽화보존을 위해 폐쇄했다고 한다. 사진에 잘 보면 강서대묘 왼쪽, 오른쪽 뒷편에 각 강서중묘와 소묘의 봉분이 일부 보인다.[9] 다만 봉분조사가 정밀하게 이루어졌던 건 아니기 때문에 추후에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봉분규모는 또 바뀔 수 있다 아주 먼 미래에[10] 중국 길림성 집안시[11] 오회분 4호묘는 이 4분할 공간에 마저도 용을 그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12] 또 6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점차 장식무늬계 벽화, 생활풍속도 벽화들은 나타나지 않는다.[13] 딱히 더 낫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국내도읍기의 고구려 적석총 왕릉 중에서는 서대총이 미천왕의 무덤임이 유력하다. 해석적으로는 궁색함이 있지만 전체적인 물질문화의 변화과정 및 역사적 정황으로 보면 큰 이견이 없기 때문. 우산하 992호분까지도 고국원왕까지 이어진다. 그 이후부터가 다소 논의가 많다.[14] 세 무덤은 각기 묘실구조나 규모, 벽화의 여부 등에서 각기 차이가 있다. 공통점이라면 적석총에서 변형된 기단봉토분이라는 적석총의 잔재가 있다는 점 정도가 있다. 또 뒤의 사신도 벽화가 있는 왕릉과 달리 출토유물이 좀 있는 편인데 와당의 편년에서 늦은시기의 와당보다 분명히 빠르며 국내지역의 와당보다는 명백히 느리기 때문에 5세기~6세기 전반 경에 해당한다고 본다.[15] 세 무덤 모두 사신도가 메인 테마가 되는 무덤. 호남리 사신총의 경우 토포리대총의 인근에 있는데 이 무덤에도 석축기단이 남아 있어 사신도 제재 왕릉 중에서는 빠르다고 파악하고 있다. 사신도의 영향이 커지는 시점과 평양천도 이후 도교가 유행시기 등으로 보아서 6세기 중엽 이후로 파악되고 있다.[16] 전 동명왕릉과 함께 군집을 이루고있는 무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