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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15대 국왕 미천왕 | 美川王 | |||
| 미천왕릉으로 추정되는 서대총 전경 | |||
| 출생 (음력) | <colbgcolor=#fff,#1f2023>270년대 | ||
| 고구려[1] | |||
| 사망 (음력) | 331년 2월 (향년 50 ~ 60대) | ||
| 고구려 | |||
| 능묘 | 미천원(美川原)[2] | ||
| 재위기간 (음력) | 고구려 제15대 국왕 | ||
| 300년 9월 ~ 331년 2월 (30년 5개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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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 | 고(高) | ||
| 휘 | 을불(乙弗) / 우불(憂弗)[3] / 을불리(乙弗利)[4] | ||
| 조부 | 서천왕 | ||
| 부모 | 부친 고돌고 모친 미상 | ||
| 왕후 | 왕후 주씨 | ||
| 자녀 | 태자 고사유 왕자 고무 | ||
| 종교 | 무속 | ||
| 시호 | 미천왕(美川王) | ||
| 호양왕(好壤王)[5] | }}}}}}}}} | ||
1. 개요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삼국사기》 미천왕 원년 창조리의 부하들이 자신을 찾아내자 의심하며 한 말.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천왕의 유일한 말이다.
고구려의 제15대 국왕.《삼국사기》 미천왕 원년 창조리의 부하들이 자신을 찾아내자 의심하며 한 말.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천왕의 유일한 말이다.
큰아버지 봉상왕에게 아버지를 잃고 큰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국상 창조리의 도움으로 고구려의 임금이 되었고 영토 확장과 왕권 안정화로 고구려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즉 고구려 전성기의 뿌리를 마련한 명군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사 최악의 고인능욕을 당한 비운의 군주이기도 하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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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안악 3호분?
1949년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설리[6]의 재령강 북쪽 구릉 서편에서 농리 정리 중 우연히 발견된 안악 3호분[7]의 주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안악 3호분은 고고학자 도유호가 발견했는데 비록 도굴당해서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잘 보존된 벽화들이 있었다.최초 발굴자인 도유호와 월북 미술사가 김용준 등은 "이 무덤의 주인은 모용황의 아우 모용인의 쿠데타에 참가했다가 모용인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로 망명한 전연의 장수 '동수(冬壽)'이다"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진서》와 《자치통감》에 동수가 난을 피해 고구려로 망명왔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무덤 내부에 동수의 생애가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도 동수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무덤 내부에 기록된 묵서명[8]에 의하면 서기 357년에 축조된 무덤이다.
그러나 북한 사학계에서는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왕릉설을 주장하고 있다. 동수라는 글자가 무덤 주인이 아니라 군관의 일종인 '장하독(帳下督)'의 머리 위에 쓰여 있는 점[9], 주인공의 행렬 벽화에 그려진 깃발 옆에 '성상번(聖上幡)'이라는 명문이 쓰여 있는 점, 주인공 초상화에 고구려 왕의 왕관인 백라관(白羅冠)으로 추정되는 흰 비단 모자를 쓰고 있는 점[10]이 주로 거론된다.
이전까지는 왕릉설 내에서도 어느 왕릉인지를 밝히지 못하다가 1963년 주영헌 등의 학자들이 미천왕설을 주장했다. 이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초기에는 국내성 인근에 미천왕의 무덤이 있었는데[11]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가져 갔다가 돌려받은 시신을 다시 묻은 곳이 이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수가 기록된 것은 시신 반환 또는 무덤 축조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논지이다.
반면 근래 박진욱 교수는 고국원왕설을 주장했다. 고국원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남쪽 평양'에서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박진욱 교수는 이 기록을 달리 해석하여 '고구려의 남쪽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쪽 지방이던 황해도 근처'에 있던 '남평양'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고국원왕은 고국원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고국원이 남평양 근처였던 이 안악의 언덕이었다는 것이다.[12]
물론 안악 3호분 자체가 철저하게 도굴되어 유골은 물론 부장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매우 힘든 상태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는 관련 기록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영원히 불분명하며 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북한 학계의 추이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북한 학계는 스멀스멀 존엄이 역사에 개입하는 암운이 드리우다가 19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김씨 일가의 교조화된 연구로 변질되었으며, 민족주의 고취에 초점을 둔 해석이 공식적인 입장으로 표명되기 시작하였다. 안악 3호분을 동수의 무덤이라고 봤던 도유호가 학계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대표적인 사례.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그렇지, 사실 동수묘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미천왕설 또는 고국원왕설을 지지하는 북한학계와 자칭 소장파 학자들이 간과하는 근거가 있다.
안악 3호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 안악 3호분은 당시 중국 요령성 일대에서 유행하던 형태의 무덤으로서 계보는 당연히 요령성 일대에서 찾아지는 외래계 무덤이며,
- 벽화의 구성이나 방식 또한 요령성의 가옥형 석실과 거의 동일하다.[13]
- 요령성에서 확인되는 가옥형 석실[14]들에서도 백라관으로 추정됐던 그 관과 똑같은 농관을 쓴 묘주들이 그려진 벽화가 수두룩하다.
- 왜 장하독의 머리 위에 묵서명이 써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사실 간단한데, 묘주도가 그려진 전실 서벽의 바로 옆인 북벽의 모서리에 있기 때문이다. 즉 묵서명의 위치는 장하독의 머리 위가 아닌 묘주도의 바로 옆이며, 벽의 위치가 다를 뿐이다. 또한 장하독 1명만 묵서명이 그렇게 소상히 쓰이는 것도 벽화의 구성 전체를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묘주도의 설명으로 추정하는 것이다.[15]
'성상'이라고 쓰여진 부분이 지금은 판독하기 쉽지 않은데, 왕릉설을 주장하는 측의 타당한 논거는 딱 그것 하나뿐이다. 이쯤 되면 성상 하나만 갖고 왕릉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각주에서도 있듯이 이미 고구려 고분은 4세기에 적석총을 위시한 국내 지역,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일대에 아주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왜 통구 고분군에 미천왕이나 고국원왕[16]이 묻히지 아니하고, 이곳에 묻혔는가를 결코 설명하지 못하며, 당연히 전문학계의 견해가 아닌 게 수두룩하기 때문에 추가적 연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학계나 국내의 재야학계에서 이 무덤을 미천왕릉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바로 이곳이 낙랑군의 고지가 아니라는 것을 피력하기 위함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낙랑군 문서에도 있지만 이 일대는 313년 낙랑군의 축출 이후 서서히 고구려의 직접 지배 영토로 편입되었고, 4세기 당시에는 간접적인 지배의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으로 보는 논리 자체도 허접할 뿐더러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문제는 고구려의 자체적 행정방식의 변화나 영역 관리 등의 내재적 문제와 전혀 결부되지 않고, 오직 낙랑군은 애초에 평양[17] 일대에 있지 않았다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3.2. 서대총
다만 한 가지 함정이라면 고구려 적석총이 집중적으로 축조되는 통구 고분군에서도 완전히 빼박이라고 할 수준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천왕의 무덤은 견해가 모여 있는 편인데, 바로 서대총이라는 것이다.통구 고분군은 무기단식 적석총부터 계단식 적석총, 적석총의 완성형인 장군총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축조된 고구려의 고분군이다. 확인된 고구려 적석총 수의 90%가 다 이 고분군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하다.[18] 여기서 왕과 관련되어 주요한 것은 마치 신라의 대릉원 고분군처럼 누가봐도 왕이 아니면 이 무덤의 주인이 될 수 없을 이른바 왕릉급 무덤들이 10여기 정도가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19] 적석총의 형태 변화에 따른 시간적인 단계별 변화상을 고려하면 10기의 왕릉급 무덤들은 3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형성된 것으로 고구려 왕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장지형 왕호를 사용하던 시점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고고학계에서는 미천왕부터 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까지가 토론 가능한 근거를 바탕으로 논의되고 있다.
고구려 적석총의 변화 과정은 3세기 이전까지는 무기단식 적석총, 무기단에서 발전한 기단식 적석총이 유행하다가 3세기에 접어들어서는 계단식 적석총이라는 형태로 변화한다. 큰 규모의 적석총을 만들기 위해서 적석분구를 넓히면서 나타나는 형태의 무덤으로써 여기에서 발전하여 계단식 적석총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계단식 적석총의 등장은 4세기 초반의 일로써 서대총이 계단식 적석총의 초현기에 해당하는 왕릉급 무덤이다. 그 외에도 칠성산 211호분과 우산하 992호분이 4세기 전반 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대총에서는 특히나 와당[20]에서 기축년▨▨간리작(己丑年▨▨干利作)이라는 명문이 있기 때문에 329년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적석총 발전 과정상 동일 단계의 적석총인 우산하 992호에서도 와당에서 무술년의 기록이 나오는데, 338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 적석총의 역사고고학적 편년이나 왕릉 비정이 완전히 일치된 견해가 모여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서대총을 미천왕의 무덤이라고 보는 것에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편이다.
분명한 것은 원래 왕릉의 비정이라는 것이 최대한 근거를 모아서 추정되는 것일 뿐이며 무령왕릉처럼 빼박으로 지석이 나온다거나 하지 않는다면 확정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되지도 않는 얕은 근거만 모아 특정 무덤의 주인을 비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 방법이기도 하다.
만약 안악 3호분의 묘주를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이라고 한다면, 한참 고구려와 전쟁을 치렀던 전연의 영역 내에서 확인되는 중국식 무덤을 채택한 것이 된다.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뒤의 상황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고, 미천왕은 졸지에 장법마저도 중국식으로 바꿨음[21]에도 숙적인 전연에게 털려서 도굴까지 당하는 굴욕 중의 굴욕을 당하는 셈이다.
우산하 992호 무덤이 미천왕의 2차 왕릉일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4. 여담
- 《동국통감》에서는 미천왕을[22] 어린 시절 불행했던 시절을 겪었고, 지혜로운 덕망과 술책이 있지만 덕은 없고 상국을 침범한 왕으로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미천(美川)은 일찍이 황야(荒野)로 달아나 어려운 일을 골고루 겪었으므로, 의당 지혜로운 덕망과 술책이 있었을 것인데도, 일컬을 만한 덕이 없고 한갓 상국(上國)을 침범하는 것으로서 일을 삼았습니다."
4.1. 이름 관련 이야기
하필 이름이 이름인지라 역덕후가 아니거나 고구려의 역사를 처음으로 배우거나 무식하고 장난기가 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미친왕'이라고 놀림감이 되는 경우가 흔하며, 이 군주의 이름을 처음 접한 사람은 단순히 이름만 듣고 진짜로 미친 군주거나 무능한 군주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은근히 많다. 그렇지만 미천왕은 훌륭한 명군이지 절대로 미친왕이 아니며, 오히려 백부 봉상왕이야말로 미친왕이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린다. 또한 '신분이나 지위 따위가 하찮고 천하다'라는 뜻의 사전적 의미인 '미천(微賤)하다'와는 한자부터가 다르다. 다만 역사공부할 때 위의 소금장수 일화를 들어 ‘미천했던 (시기가 있던) 왕’으로 외우기도 하며, 왕족으로 다시 확인되기 전까지 삶이 정말로 당대 기준 미천한 머슴이나 장사꾼이었기 때문에 오해할 만하다.5.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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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미천왕 본기〉
一年秋八月 미천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도망하여 곤궁하게 지내다
一年秋九月 미천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누런 안개가 끼다
一年冬十一月 강한 서북풍이 불다
一年冬十二月 혜성이 나타나다
三年秋九月 현도군을 침략하다
十二年秋八月 서안평을 점령하다
十四年冬十月 낙랑군을 축출하다
十五年春一月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다
十五年秋八月 대방군을 축출하다
十六年春二月 현도성을 공격하다
十六年秋八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年冬十二月 진의 평주 자사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해오다
二十一年冬十二月 요동을 침략하다
三十一年 후조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二年春二月 미천왕이 죽다
링크로 들어가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즉위년 9월의 기록과 중국 측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기록이 상당히 간략하다. 이러한 경향은 〈미천왕 본기〉 이후의 〈고구려본기〉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장수왕 본기〉부터는 기록의 대부분을 중국 기록에서 인용해서 채웠다. 재위가 10년을 넘어가는 왕조차 기록이 매우 간략[23]하고, 자연재해 기록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백제본기〉보다는 그나마 낫지만.
6. 대중매체에서
알고 보면 대한민국에서 제왕을 영웅화하여 다룬 사극의 전형적인 줄거리인 왕실에서 쫓겨남 → 바깥을 방황 → 왕위 찬탈 → 정치 싸움과 정복 전쟁의 구조를 그대로 살아간 인물이다. 한국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픽션을 위한 무리수들을 모두 고증이 가능하게 가지고 있다.[24] 이렇게 미천왕은 창작물에서 써먹을 떡밥을 고루 갖추고 있는 블루 오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 번도 사극화가 된 적이 없다.[25]실제로 그의 인생 스토리와 비슷한 줄거리를 지닌 서양 역사 소설 역작이 있는데, 이 소설은 픽션이라면 미천왕의 일생은 사료에서 분명히 증명되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강점이 있다. 그리고 저 소설의 주인공인 에드워드 6세는 몇 년 못 재위하고 요절했지만 미천왕은 즉위해서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죽었으며 고구려는 그 사후 수백 년 간 강성한 국가로 남았으니, 이 부분은 왕자와 거지 시대 배경의 직후 이야기인 엘리자베스 1세의 일대기와도 공통점이 있다. 그야말로 역사 매체로써는 매력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소재인 것.
- 역적 - 일단 미천왕이 역적으로 취급되었다는 기록 자체는 없지만, 봉상왕이 그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그 처지는 역적과 같았다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미천왕의 아버지 돌고는 자신의 친형인 봉상왕에게 모함을 받아 사형당했다. 웬만한 범죄로는 처벌받지 않는 왕족, 그것도 왕의 친 동생이자 혈통상 직계 왕족을 죽일 수 있는 가장 좋은 구실은 반란. 즉 역모죄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죽이기도 쉽고 그 자손들을 죽이거나 신분을 강등시켜 왕위 계승권 자체를 박탈시키기에도 적합하기 때문. 미천왕의 사례 말고도 동서 고금을 통츨어 자신의 왕권을 위해 자신의 형제 자매들을 역모죄를 구실삼아 숙청을 한 왕은 셀 수도 없이 많다. 다른 죄를 엮기도 하지만, 역모죄가 아닌 경우, 웬만해선 본인 외엔 당사자의 가족, 친족들까지 한꺼번에 숙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고생담 만들기 - 사극에서는 주인공의 고생을 연출하기 위해서 고증에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억지 고생담 만들기가 남발된다. 대표적으로 선덕여왕 타클라마칸 사막 보내기가 있었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미천왕은 텔레비전 앞에 앉은 시청자들이 '아이고 어떡해' 하며 눈물을 질질 짤 학대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음모한테 몸붙여 머슴일 하며 주인집에서 학대 당하고, 소금장사 하다 누명을 써서 전재산이나 다름 없는 소금을 압수 당하고, 심지어는 잡혀가서 곤장까지 맞는다.
- 상단 입단 - 상도의 영향으로 주인공을 한 번쯤 상단에 입단시키는 사례가 많은데, 실제로 소금 장수 일을 했으므로 상단에 넣어도 무방하다. 재모 같은 인물은 '친구'나 '멘토' 쯤으로 재해석 하면 그럴듯 할 듯. 아버지를 일찍 여읜 미천왕에게 사실상 아버지 역할을 해줄 인물로도 적당하다. 딱 왕자와 거지의 마일스 헨든 같은 역할일 것이다.[26]
- 메인 빌런 - 미천왕을 쫓아낸 봉상왕은 사서에서 명백하게 폭군으로 기록된 만큼, 아치 에너미 내지는 빌런으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 봉상왕을 퇴위시키고 즉위한 이후에도 대외적으로 모용외 등의 강한 라이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극의 소재는 충분하다 못해 넘쳐 흐르는 수준이다.
- 군주 등극 - 미천왕이 갖은 고생담을 극복하고 창조리의 도움을 받아 봉상왕을 폐하고 군주로 즉위하였다.
- 정복 군주 - 낙랑군과 대방군을 완전히 정복해 고조선 멸망 400년만에 중국의 한반도 서북부 지배를 끝장냈다.
- 인지도 높은 주변의 역사 - 미천왕이 지배할 즈음은 중국의 삼국시대 바로 다음 시대인 서진, 동진, 오호십육국 등이 존재하는 때이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인기가 높은 삼국지에 대한 언급과 연관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초반에 서천왕과 달가, 봉상왕과 돌고의 관계들을 조비&조예 VS 조창&조식, 원담 VS 원상&원희, 유기 VS 유종, 사마염 VS 사마유 등의 관계들에 빗대어 표현하면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는 적합하다. 게다가 미천왕이 즉위할 때 중국의 지배자는 바로 그 유명한 사마의의 증손자인 사마충이었다. 사마의 본인도 공손연 정벌 등 고구려랑 관련이 없는 사람도 아니니 엮기 좋은 셈.
- 대업을 이어나간 후계자들 -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은 다소 암군이지만, 미천왕의 손자들은 바로 고구려 중흥을 야기한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고, 증손자는 고구려를 크게 팽창시킨 광개토대왕이며, 현손자는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장수왕이다. 미천왕에서 이어지는 명군 후계자들이 차고 넘친다. 이들로 바로 이어지는 후속작을 찍어도 계속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나올 것이다.
미천왕은 저 모든 것들을 집어넣어도 고증에 문제가 전혀 없을 만한 충분한 근거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지어낼 거 없이 원래 있는 거 그대로만 재현해도 만사 OK로, 인생 자체가 대하드라마. 사실 딱히 각색 없이 대충 써도 충분히 1편의 훌륭한 한국판 사극 드라마가 될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을 갖춘 인물이지만, 아무래도 현대의 창작물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대중에게 익숙한 조선 시대 위주로 지나치게 치중되어 이 시기가 아직까지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비슷한 처지로는 불세출의 소드 마스터 고려의 척준경이 있다.[27] 미천왕의 인생 역정에 영감을 받고 이 훌륭한 소재를 이름만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군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 덧씌웠을 가능성도 있다.
- 관련 작품으로는 그 유명한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자 박창화의 《을불대왕전》이 있다. 독자들에게 호평을 사고 있기는 한데 박창화 특유의 화랑세기틱한 취향이 여기에도 반영되어 버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야설. 물론 박창화는 《화랑세기》처럼 나름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하는 현대의 역사학자들까지 낚아낼 정도로 정교한 역사물을 창작하던 사람이라 역사적 고증에 상당히 충실한데다 수십 년 전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는 편이다.
- 근래 여기에 처음으로 주목한 작가는 김진명으로, 작품명은 《고구려》인데 미천왕 부분은 이 중 1-3권을 담당한다. 다만 김진명이 쓴 작품이다보니 《을불대왕전》과 비교하기가 영 민망하다. 《을불대왕전》은 나름대로 고증에 충실했고 자신의 글이 창작이라고 확실히 명시했음에도 까가 있는 반면에 《고구려》는 성공한 대중작가의 작품이며 팬층이 꽤 두꺼운지라 첨언하지만 이 소설은 "공상역사소설"이다. 그냥 재미로 가볍게 읽자. 김진명의 《고구려》에서는 상부에 의해 아버지 돌고가 죽고 홀로 떠돌아다니게 된다. 일단 음모의 밑에서 머슴살이 한 것과 소금장수로 일했다는 것은 언급만 되고 그 뒤 다루라는 이름으로 낙랑의 양운거 밑에서 무예를 배우다가 양운거 밑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 저가라는 사람의 밑에 있다가 비무 대회에 나가 여노와 싸우게 된다. 하지만 상부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싶어 일부러 여노에게 져주고 도망친다. 여노는 을불을 쫓아와 왜 도망친 건지 연유를 묻자 결국 여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이후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저가와 저가 밑에 있던 무사 양우와 함께 길을 떠나게 된다. 낙랑에서 주아영을 만나고 후에 그와 싸우게 될 모용부의 모용외와 만나게 되고 그 후 숙신으로 가 그 곳의 족장 아달휼을 아군으로 삼는다. 그 후 창조리가 보낸 조불과 소우가 을불의 휘하에 들게 되고 상부가 고노자에게 군사를 줘서 그를 없애려고 하자 스스로 정찰병으로 분장해 직접 상부를 없애려고 한다. 그 후 창조리가 상부를 내치고 자신을 왕위에 올리자 창조리가 자신을 줄곧 돕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후 낙랑을 정벌하게 된다. 미천왕이 투석기에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를 실어서 성 안으로 던졌으며 낙랑군의 어머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늙은 여인의 초상화를 실어 날랐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작가의 순수 창작이다.
- 2010년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배우 곽인호가 연기했다. 과거의 인물인지라 비중은 거의 없지만 작중 시점으로부터 26년 전 그를 조우한 적이 있는 비류왕의 언급에 따르면 단창을 쓰는 솜씨가 신출귀몰하여 대방군 장군을 한방에 꿰뚫어 죽였다고 한다.
- 2021년 제작이 계약된 김진명 원작의 동명 드라마 〈고구려〉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는 인물이다.
- 2017년에 방영된 채널A의 <천일야사> 17회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온다.
7. 둘러보기
| 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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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제 | 하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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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모수 | 유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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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왕실 | 1대 동명성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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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대 유리명왕 | 비류 | 온조 백제 왕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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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도절 | 고해명 | 왕녀 | 3대 대무신왕 | 4대 민중왕 | 고여진 | |||||||||||||
| 고호동 | 5대 모본왕 | 고재사 | ||||||||||||||||
| 고익 | 6대 태조대왕 | |||||||||||||||||
| 7대 차대왕 | 고막근 | 고막덕 | 8대 신대왕 | 고인고 | ||||||||||||||
| 고추안 | 9대 고국천왕 | 고발기 | 10대 산상왕 | 고계수 | ||||||||||||||
| 고박위거 | 11대 동천왕 | |||||||||||||||||
| 12대 중천왕 | 고예물 | 고사구 | ||||||||||||||||
| 13대 서천왕 | 고달가 | 고일우 | 고소발 | 공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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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대 봉상왕 | 고돌고 | |||||||||||||||||
| 15대 미천왕 | ||||||||||||||||||
| 16대 고국원왕 | 고무 | 고림 | ||||||||||||||||
| 17대 소수림왕 | 18대 고국양왕 | |||||||||||||||||
| 19대 광개토대왕 | ||||||||||||||||||
| 20대 장수왕 | 고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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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다 | 고승우 | 공주 | 고승천 | |||||||||||||||
| 21대 문자명왕 | ||||||||||||||||||
| 22대 안장왕 | 23대 안원왕 | 고안학 | ||||||||||||||||
| 24대 양원왕 | 왕자 | |||||||||||||||||
| 25대 평원왕 | ||||||||||||||||||
| 26대 영양왕 | 27대 영류왕 | 평강공주 | 대양왕 | |||||||||||||||
| 고환권 | 28대 보장왕 | |||||||||||||||||
| 고복남 | 고임무 | 고덕남 | 고덕무 | 공주 | ||||||||||||||
| 부흥 보덕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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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 미천왕의 능 문단 참조.[3] 이상 《삼국사기》의 기록.[4] 《위서》, 《양서》와 《자치통감》의 기록. 위서에서는 축약하여 그냥 利라 표기하기도 했다. 고대 한국 인명은 한자식 이름이 아니었으면 음차표기 과정에서 여러 형태로 표기되곤 했다.[5] '양'은 고구려식 시법에서 '천(川)'과 상통 관계에 있으므로 '호'가 '미(美)'에 대응된다.[6] 현재는 북한의 행정구역 마개조로 인해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가 되었다.[7] 안악 1호분과 안악 2호분도 있으나, 이 두 무덤은 도굴로 훼손이 심한데다가 안악 3호분이 비교적 벽화 보존이 잘 되어 유명한 것이다.[8] 먹물로 기록한 문장[9] 즉, 묘주를 동수가 모신 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10] 《신당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 왕은 백라관이라는 관을 썼다고 한다.[11] 실제로 중국 집안 근처에 거대한 규모의 무덤이 도굴당한 채로 발견된 적이 있는데, 그게 모용외가 도굴한 서천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고 미천왕의 원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12] 그러나 고구려 왕의 장지를 왕의 시호로 사용하던 고구려 문화의 특성상 고국원이 남평양 근처일 가능성은 적어보이는데, 고국원(故國原)이라는 단어 자체가 '옛 수도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광개토대왕의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역시 국강상(國罡上), 즉 수도 언덕 위에 묻힌 임금이라는 의미이다. 만일 고국원이 남평양 인근이려면 남평양이 고구려에서 수도로 사용되었거나 인식된 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적은 없다. 당대 고구려의 묘지명인 〈모두루 묘지명〉에 의하면 고국원왕의 시호가 '국강상성태왕'으로 나오는 것처럼, 국강상성태왕이 묻혔던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성 천도로 인해 더 이상 고구려의 수도가 아니게 되었을 때 '옛 수도 언덕에 묻히신 왕'이라는 의미로 '고국'이라는 말을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고국원왕이 묻힌 곳은 반드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어야 한다.[13] 왕이 아니면 이렇게 화려하게 그려질 수 없다고 했던 그런 행렬도도 다 있다. 안악 3호분이 결코 특별한 고구려의 무덤이 아닌 셈이다.[14] 안악 3호분도 그렇고 가옥을 묘사한 무덤이다.[15]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묵서들이 잘 남아 있었고, 지워졌다고 추정되는 부분은 없다. 즉 관리 한 명의 머리 위에 무수한 직책을 쓸 정도였다면 다른 관리들의 머리 위에도 당연히 써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참고로 장하독이라는 직책을 맡은 이의 그림은 안악 3호분에서도 모두 4명이 표현되어 있다.[16] 심지어 이들은 장지형(葬地形) 왕호를 채용했던 시기의 왕들로써 국, 천 등의 지명이 미천왕이나 고국원왕 말고도 더 있다. 광개토대왕 역시 업적을 제외한 명칭으로는 국강상왕에 해당한다.[17] 물론 평양에서 안악군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다.[18] 물론 범위 자체의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집안 시내를 둘러싼 곳 만큼은 통구 고분군으로 부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19] 물론 왕릉급 무덤을 왕릉급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짬찌 무덤도 넓고 많이 분포하고 있다.[20] 막새기와[21] 무령왕릉의 전축분이 대표적인 중국식 묘제를 채택한 사례다. 남조와의 교류의 결과로써, 당시 백제는 남조와의 조공관계를 통해 삼국 중에서도 외교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자 했다. 무령왕의 무덤에는 이러한 정치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22]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90416&cid=62135&categoryId=62281[23] 대표적으로 개로왕, 책계왕을 들 수 있다.[24] 이런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군주는 드문데, 미천왕 외에는 고려의 현종이 있다. 현종은 드라마 출연작은 있으나, 극에선 정작 현종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라서 사실 제대로 안 쓴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그 작품조차도 여러모로 문제투성이였고, 시청률도 망했다. 다만 2023년 후반기에 나온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주인공이 마침 현종이여서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문제는 이 작품도 이정우가 명군 현종을 암군으로 꾸미는 바람에 시청자들에게 현종이 현쪽이로 불리게 되어 현종의 이미지 자체를 완전히 말아 먹어버렸다는 거다. 오히려 천추태후에 나온 현종이 그 때문에 어쩌다 보니 재평가 받고 있다.[25] 물론 사극화가 한 번도 된 적이 없는 역대 역사시대 군주는 비단 미천왕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시대 나라의 임금들도 꽤 있지만, 미천왕만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군주는 드문데도 사극화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26] 드라마 선덕여왕의 죽방 정도의 캐릭터를 생각하면 될듯하다.[27] 하지만 척준경은 행적 자체가 너무 줏대가 없는 편이라 뭐라 정의내리기 힘든 인물이다 보니 주인공으로 만들기에는 매력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