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9 20:49:39

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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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아(黃鬚兒)
조창 | 曹彰
파일:조창 삽화.png
《증상전도삼국연의(增像全图三国演义)》 속 조창
출생 187년 이후 ~ 192년 이전[1]
사망 223년 8월 1일[2]
후한 하남군 낙양
(現 중국 허난성 뤄양시)
재위기간
후한·조위의 언릉후(鄢陵侯)
216년 ~ 221년
조위의 언릉공(鄢陵公)
221년 ~ 222년
조위의 임성왕(任城王)
222년 ~ 223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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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colcolor=#ece5b6> 성씨 조(曹)
창(彰)
부모 부황 태조
모후 무선황후
형제 25남 6녀 중 4남
배우자 손씨[3]
자녀 아들 조해(曹楷)
[4]
자문(子文)
작호 언릉후(鄢陵侯) → 언릉공(鄢陵公) → 임성왕(任城王)
시호 위왕(威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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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오환족 토벌2.3. 한중 공방전2.4. 후계자 쟁탈전2.5. 죽음
3. 평가4.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이자 무장으로 자는 자문(子文). 위의 임성왕(任城王).

조조의 아들로 생모는 무선황후 변씨. 수염이 누런 색이라 황수아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자에 문(文)자가 있지만 문보단 무(武)에 뛰어났다. 어려서 활쏘기와 수레 몰기를 잘 했고, 근력이 보통 사람을 넘었고, 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았다.[5]

여러 차례 조조의 정벌을 따라갔다. 조조는 이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조조는 자기 자식들에게 글공부를 시켜봤는데 조창만 유일하게 반항했다. 이 때 조창은 주변인에게 "저는 위청이나 곽거병처럼 무훈을 쌓고 싶지 이따위 글공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조조가 아들들에게 좋아하는 것을 물었을 때, 조창은 장수가 되기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조조는 “장수가 되어서 어찌하겠느냐?”라고 하자 조창이 답했다.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어려움을 만나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사졸들의 앞에 섭니다. 상은 반드시 행하고, 벌은 반드시 분명히 하겠습니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6]

2.2. 오환족 토벌

장수로서의 기질이 탁월하여 북중랑장, 효기장군 대행으로 임명되어 전예와 함께 오환족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싸움터에서 활에 맞아 화살이 여러 발 갑옷에 박혔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분전했다는 것으로 보아 호전적인 열혈한이었던 듯 하다. 그리고 그가 총 지휘관임에도 불구하고 돌격대장처럼 닥돌적진에 몸소 뛰어드는 과감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200리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적군이 포착되자 하루 밤낮을 강행군하게 하여 기습해 수천명을 베고 포로로 잡아 격파하는 등 상당히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군을 지휘했다. 성격도 호방한지 규정의 두 배나 되는 포상을 전군에게 하여 장병들의 환심을 사기도 하였다. 선비족의 왕 가비능은 이 위세를 보고 귀순하였기에 조창은 북방을 평정하게 된다.

조조에게 보고하기 위해 장안으로 가는 도중, 보고할 때는 자만하지 않도록 처신하라는 태자인 조비의 충고를 듣게 되고, 이에 장안에 도착한 후 조조 앞에서 공을 다른 장수들에게 돌리는 말을 하여 조조가 그의 겸손함을 기뻐하였다 한다.

2.3. 한중 공방전

한편 조창이 오환을 토벌한 것과 같은 해인 218년에 조조는 유비한중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위략에 따르면 이때 유비의 양자 유봉이 산을 끼고 내려와 여러 차례 치고 빠지는 등 조조군을 도발하자 조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유봉에게 이를 갈았다고 한다.
돗자리나 짜던 작자가 감히 가짜 아들(=유봉)을 보내 나에게 맞서는가. 내가 황수아(=조창)을 불러 너를 상대할테니 기다리거라.
하지만 오환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조창이 장안에 다다랐을 때 이미 조조는 한중에서 퇴각한 상태라 한중전에 투입되지는 않는다. 자리에 있지도 않은 조창을 들먹이며 유봉을 매도하는 것을 봤을때 조조의 신임이 상당히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연의에서는 이 조조의 발언에 착안해서 한중 쟁탈전에 조창이 참전해 위기에 빠진 조조를 구하고 이어진 전투에선 유봉을 발라버리고 오란을 죽이는 등 맹활약하지만 결국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는 내용으로 각색되었다.

2.4. 후계자 쟁탈전

각각 바로 위와 아래의 형제인 조비조식이 후계자 쟁탈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언급도 안 되었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된 바처럼 글공부를 싫어하던 조창이 제왕으로서 적성이 맞지 않아서였다.

낙양에서 조조가 죽기 전 조창은 군대와 함께 장안에 있었는데 조조가 그를 급히 불러서 갔지만 이미 조조가 죽은 상태였다.

당시 조비와 측근들의 여론은 조창을 의식했기에 조조가 죽자마자 절차를 생략하고 조비의 즉위를 추진해 하루 만에 모든 일을 처리했다고 한다. (진교전) 일단 군권을 쥐고 있었던 데다 조조에게서 호출됐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인지 극도로 경계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후계자 쟁탈전 때는 조조의 총애를 받던 재기발랄한 조식이 조비의 최대 경쟁자였지만 일단 조비가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은 후에는 한풀 꺾인 조식보다 일부 군권을 장악하고, 군부의 호의적인 지지를 받는 야심만만한 조창이 조비의 최대 정적으로 급부상했다.

뒤늦게 도착한 조창은 장례를 주관하던 가규에게 옥새의 행방을 물으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가규에게 "대를 이을 사람은 따로 있으니 당신이 알 바 아니다."라고 무시당했으며 위략에 따르면 "선왕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너를 후계자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로 조식을 부추겼으나 조식은 원씨 형제의 말로를 직접 보지 않았냐며 조창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정사상 조조 사후 조창의 행적이 부실하지만 (위략을 배제하더라도) 가규와 실랑이를 벌이는 일화가 매우 위화감 넘치는 것은 사실이라 야심가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종종 나온다. 이에 따르면 비록 군권을 쥐고 있었으나 군사력 이외의 정치적 입지는 전무했던 데다 그런 약점을 보완해 줄 조식과의 공조도 거절당해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허리를 숙인 것으로 보인다.

조비가 즉위하자 조창은 자신의 제후국으로 돌아간다.

연의에서는 가규가 저 발언 직후에 '군후(조창)께선 상을 치르려 오신 겁니까 아니면 왕위를 다투려 오신 겁니까?'라고 지적하고, 조창이 자신에겐 다른 뜻이 없다고 해명하자 가규는 다른 뜻이 없다면 왜 병력을 이끌고 왔냐고 다시 지적했다. 이에 조창은 병력을 물린 뒤 혼자 궁에 들어가서 상을 치르고, 병력을 조비에게 양도한 후 영지인 언릉으로 홀로 돌아가는 것으로 묘사한다.

220년 조비는 그에게 5천 호를 추가해주어 1만 호를 다스리게 하였고, 221년에는 공으로 봉하였다. 222년에는 그를 다시 왕으로 봉하였다.

2.5. 죽음

왕이 된 다음 해인 223년, 수도에 와서 조비를 알현한 뒤 갑자기 병에 걸려서 수도에 있던 관저에서 죽었다. 임성위왕창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씨춘추에 따르면 이전에 조창이 옥새와 인수끈이 어디있는지 물으며 문득 다른 뜻을 가졌기에 조비는 조창이 조정에 들어왔음에도 그를 보지 않았다. 이에 조창은 분하고 성내다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고 한다.

정황상 조창의 죽음은 조금 미묘한데, 조비는 조창과 조식이 정치 권력을 쌓는 것을 경계하여 왕으로 봉한 다음 임지에 머물게 하고, 수도로 올라오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조비의 형제들은 각자의 봉지에 연금된 상태였다.[7] 따라서 조창이 수도로 왔다면 분명히 조비가 조창을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다. 줄이자면, 다른 형제들을 모두 연금한 조비가 뜬금없이 조창만 수도로 소환했고 그러자 조창이 죽은 것이다.

세설신어》에 조창의 최후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조비가 조창을 불러서 연회를 열면서 독을 넣은 대추를 안주로 줘서 죽게 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조비와 조창의 생모인 변씨가 이걸 살려보겠다고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려 하자 아예 두레박 끈을 모조리 잘라 치워버렸다는 끔찍한 이야기다. 《세설신어》는 특성상 사서가 아니므로 액면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고 실제로 황실의 이야기가 바깥에 퍼질 리도 없겠지만, 당시 사람들도 조창의 죽음을 상당히 미심쩍게 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설신어의 주된 독자들은 그냥 일반 평민이 아니라 당대의 귀족 계급으로,[8] 당시에 이미 귀족 사회에서도 황제와 형제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조창의 죽음을 미심쩍게 여기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설신어를 무작정 배제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에 증거가 될 수 없다면 역사서로도 이를 입증 가능하다. 진사왕식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씨춘추에 의하면 "이 당시 제왕(諸王, 조조의 아들들)에 대한 법은 준엄하고 엄격했고 223년 임성왕 조창이 갑자기 죽자 제왕이 같은 고통을 느껴 우정의 감정이 싹텄다". 조창이 죽었을 뿐인데 뜬금없이 '조조의 아들들이 같은 고통을 느꼈다'는 소리는 왜 나왔는가? 이미 이 당시 사람들은 조비가 조창을 죽였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도 조창처럼 죽게 될까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믿은 것을 조비를 감싸야 했던 정사에 명시된 기록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그마저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도록 기록하였다) 현대의 사람들이 조비가 조창의 죽음과 무관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우스운 일이다.

조비는 조창이 죽은 뒤 즉각 뒤를 계승한 조창의 아들인 조해를 중모현으로 봉하고 봉토를 압류해 버린다. 그 뒤 1년 뒤 임성현으로 봉하였는데 그 뒤 조예가 즉위하고 나서야 임성국을 회복한다. 이때 조예는 그에게 식읍 2천 5백 호를 갖게 해준다.

3. 평가

여러모로 우수한 장군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고 조조 사후에도 식읍을 1만 호나 다스릴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아버지가 죽은 후 형에게 반기를 드는 바람에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아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20대에 오환에서의 활약 이후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는 형에게 중용받지 못해서 활약상도 전무하다.

어떻게 보면 본인이 그렇게 지향하던 곽거병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는데, 장거리 급습을 성공시키는 과감한 지휘 스타일, 그리고 젊은 나이 때에만 잠깐 활약했던 점, 전공으로 큰 위세를 누렸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허나 병사들을 대하는 모습에 있어서는 오히려 곽거병보다도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곽거병은 병사들이 굶주리는 것을 방치할 정도로 병사들의 복지에 무관심하였지만, 조창은 병사들에게 파격적으로 두 배의 포상을 내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병사들에게 후덕했다.

만약에 조창이 조조 사후 왕위계승을 노리지 않았거나 조조의 아들이 아닌 적당히 먼 친척이었거나 최소한 조조의 서자였다면 조비가 조창을 조진조휴처럼 황실의 방패막으로 삼을 인물로 지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9][10] 조진과 조휴가 연달아 죽은 후에도 황권과 신권의 균형추가 유지되었을 것이고, 함량미달인 조상이 권력을 잡아 조위 황실을 말아먹는 일도 피할 수 있었을 거라는 만약의 가능성을 짙게 남기기도 한다.

형 조비에게는 조식을 후계자 자리를 두고 처절하게 싸운 최대 경쟁자로 깊이 의식했다면 조창은 아버지에게 겨우겨우 물려받은 권력을 빼앗아버릴 수 있는 막강한 정적으로 조비가 무척 꺼리고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실제로 조식의 문집인 조자건집에 따르면 황제 위에 오른 조비가 어느날 조식을 친히 만나러 와서 조식이 기뻐했다는 구절이 있어 두 사람이 시간이 지나며 감정이 많이 누그러진 것이 확인되는데, 당초에 형이 황제 위에 오르자 순순히 현실과 타협한 조식과 달리 조창의 경우엔 대놓고 형인 조비의 계승을 위협하는 말을 언급하는 등 야심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11] 만약 조조 생전 때 본인이 군사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글공부나 정치에 아주 약간이라도 흥미를 보였으면 후계 경쟁에서 형제들 사이에 압도적인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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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년생 조비의 친동생이고 192년생 조식의 친형이니, 188년~191년 사이에 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 "황초 4년(223년)⋯ 6월 갑술일, 임성왕 조창이 경도에서 죽었다(六月甲戌,任城王彰薨於京都。)." - 《삼국지》위서 문제[3] 손강의 아들 손분의 딸이다. 손책에겐 종질녀가 된다. "조조의 아들 조창을 손분의 딸과 결혼시켰다(又爲子彰取賁女。)." - 《삼국지》 오서 손파로토역전(孫破虜討逆傳)[4] 왕창(王昌)의 아내다. 후한의 무관 왕창과는 동명이인이다. "왕창, 자는 공백이고, 동평상, 산기상시를 역임했으며, 젊은 나이에 죽었다. 아내는 임성왕 조창의 딸이다(王昌,字公伯,爲東平相,散騎常侍,早卒。婦是任城王曹子文女。)." - 《양양기(襄陽耆)》[5] 아버지인 조조도 큰 개를 때려잡았다는 기록이 있다.[6] 드라마 삼국에선 이 두 일화를 한데 섞어서, 동작대에서 활솜씨를 선보이며 붉은 전포를 따낸 조창에게 조조가 '학식이 없는 무예는 필부의 용맹에 불과하다'라고 하자 위청과 곽거병을 거론하며 글공부가 무슨 소용이냐라고 하고, 이에 대장군이 목적이냐며, 대장군의 덕목을 묻는 조조의 말엔 뚜렷한 논공행상과 솔선수범하며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고 답한다.[7] 예외는 가장 어린 동생인 조간 정도 뿐이었다.[8] 《세설신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귀족들의 살롱 문학이다.[9] 조창은 나이와 재능을 감안해 볼 때 조진과 조휴보다 훨씬 더 잠재력이 있었다.[10] 이것은 동생 조식도 해당되는 사항이다.[11] 경쟁에 매우 민감한 조비가 초야로 숙청한 조식과 대비적으로 조창은 공, 왕으로 임명한것을 보면 분명 마냥 조창이 좋아서 그랬을 리는 가능성 제로고 오히려 조창의 압도적인 포스에 억눌려 표면적으로는 타협을 하는 제스쳐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