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23:37:31

하후패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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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侯霸
하후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XiahouBa.jpg
시호 실전
작위 박창정후(博昌亭侯)
최종직위 거기장군(車騎將軍)
성씨 하후(夏侯)
(覇)
중권(仲權)
아버지 하후연(夏侯淵)
생몰기간 188년 이전?[1][2] ~ 259년 이전[3]
고향 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4]
사망지 정군산(定軍山)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2.2. 제갈량의 북벌, 흥세 전투에서의 행보2.3. 위나라의 숙장, 그러나 꼬이는 인생
2.3.1. 토촉호군 역임2.3.2. 강유의 북벌을 저지하다2.3.3. 고평릉 사변 그리고 촉한으로의 투항
2.4. 촉의 중진
2.4.1. 거기장군으로의 승진2.4.2. 장억과의 인연2.4.3. 종회에 대한 경고2.4.4. 강유의 북벌에 종군하다
2.5. 불확실한 최후
3. 삼국지연의4. 평가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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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 촉한의 장수로 위나라의 맹장으로 유명한 하후연의 차남이다.[5] 는 중권(仲權). 동생으로 하후칭, 하후영, 하후위, 하후혜, 하후화가 있고, 자녀로는 양호와 결혼한 딸 만세향군이 있다. 예주 패국 초현 사람이다.

위의 대표적인 명문성씨인 하후씨에 황충에게 죽은 하후연의 아들로 반평생 촉에 원한을 갖고 살았으나, 의 발호로 인해 조씨와 하후씨가 권력을 잃고 사마씨가 득세하면서 권력 투쟁에 밀려 촉한으로 투항해 중신이 된 기구한 삶을 살다간 인물. 그리고 기록마저 적어서 흩어진 배송지주와 여러 열전들의 기록을 참고해야만 그나마 인생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군사 커리어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아버지 하후연과 동생 하후영한중 공방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언제나 그 원수를 갚을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위나라에서의 하후패의 군사 커리어는 대촉전선에서 두각을 낸다.

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 편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편장군이 상당수 유망주들이 맡는 직책임을 고려하면 위에서도 나름대로 유망주로 꼽혔었던 듯하다.

워낙 하후패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상당 부분 다른 인물의 열전이나 어환의 『위략』에 의존해야 하는데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일족을 죽인 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는 부분과 편장군에 봉해졌다는 부분 외에는 유추할 만한 내용조차 없다.

2.2. 제갈량의 북벌, 흥세 전투에서의 행보

230년, 조진이 군사를 일으켜 자오도를 통해 촉을 침공했을 때 하후패도 같이 참전했다. 선봉을 맡아 자오도를 통해 촉을 침공했던 하후패는 흥세를 포위하고 전곡에 진채를 내렸다.

그러나 촉에서는 하후패를 알아 봐서 군사를 출격시켜 곧바로 공격했다. 하후패를 향한 공세는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를 하던 촉군의 상황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인데 하후연의 아들인 하후패를 포박하거나 참살함으로 사기진증을 노린 것으로 추측된다. 단순히 생각해 봐도 자오전투는 한중전 이후 두 번째로 한중에서 양국이 전쟁을 벌이는 상황인데 하후연의 아들 하후패가 참살당한다면 이게 무엇을 의미할지와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상당히 확연하다.[6] 당시의 한중을 관할하며 방어하는 정서장군은 강유였기에, 강유와 하후패의 첫 조우는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후패는 녹각 사이에서 몸소 싸웠고 구원병이 도착하여 위기를 벗었다."
-『위략』

하후패는 위기의 순간에 몸소 녹각 사이에서 촉한군과 맞서 싸우고 끝내 구원병의 도움으로 위험을 벗어났다. 일군을 이끄는 장군의 몸으로 몸소 녹각에서 싸워 구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내 걸 보면 하후패는 촉에 대한 적개심이 무척 강했고 연의의 묘사처럼 무예에도 능했던 듯 하다. 하후연이 몸소 녹각을 점검하다가 황충에게 참살당한 과거를 떠올려보면 아버지처럼 솔선수범하는 장군이었을 수도 있다.

촉군과의 교전 이후 하후패의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후 그는 우장군에 임명되어 농서에 주둔했는데 병사를 기르고 융족과 화친하여 그들의 환심을 샀다. 정시 연간에 하후유의 뒤를 이어 정촉호군(征蜀護軍)이 되어 정서장군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정서장군은 친척조카 하후현이었으므로 조상과 하후현이 주축이 된 흥세전투에서도 참전했을 것이다. 조상의 본대가 비의의 지원군에게 참패했으니 군을 수습해 철수했을 것이다.

이로써 하후패는 아버지의 죽음 외에도 직접 촉군과 싸우며 촉과의 악연을 쌓는다.

2.3. 위나라의 숙장, 그러나 꼬이는 인생

2.3.1. 토촉호군 역임

위략』에 의하면 우장군 하후패는 농서에 주둔하며 병사를 기르며 동시에 융족들과 화친했다고 한다. 양주의 융족과의 관계를 활용해 북벌에 요긴히 사용하던 촉과 강유를 견재하기 위해서 이민족들과 친분을 쌓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앞서 언급했지만 정시 연간(240년 ~ 249년)에 하후패는 하후유(夏侯儒)의 뒤를 이어 정촉호군(征蜀將軍)[7]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강유의 북벌에 대한 기록을 담은 「강유전」과 「곽회전」에서는 촉한군과 맞서는 인물로 곽회와 더불어 하후패만을 언급한다. 당시 곽회는 옹주자사로써 관중 지역의 군사력을 총괄하고 있었으나 하후패 또한 토촉호군으로써 중앙정계에서 조상 일파의 일원인 정서장군 하후현[8] 의 직속으로 관중 지역에 대한 지분이 만만찮았을 것이다. 즉, 하후패는 곽회가 정서장군으로 임명되는 계기인 고평릉 사변이 터질 때까지 관중지역의 양두방어체제를 담당한 셈이다. 워낙 하후패에 대한 기록이 간략한 덕분에 그리 부각되지 않지만 기록이 굉장히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촉에 투항한 249년까지 강유의 북벌에 꽤 자주 언급된다는 점은 하후패의 존재감을 보여준다.

2.3.2. 강유의 북벌을 저지하다

247년옹주양주의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위를 배신하고 촉한에게 항복했다. 촉한의 강유는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는데 하후패는 옹주자사 곽회와 함께 도서에서 이들을 맞서 싸웠다. 「곽회전」에 따르면 당시 하후패는 군사를 인솔하여 위시(為翅)에 주둔했는데 곽회는 강유가 반드시 하후패를 공격할 것임을 예측했다고 한다. 실제로 강유가 하후패를 공격하자 곽회는 하후패를 증원해서 강유를 함께 맞섰다. 점차 퇴각하던 강유군(곽회전)과 위군은 도서(洮西)에서 겨뤘다.(강유전, 자치통감)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 해(정시 8년, 247년), 옹, 량의 강족 호인들이 배반하여 촉한에 항복하였다. 촉한의 강유는 장병들을 농우에 출병시켜 이에 응했고 또한 옹주자사 곽회, 토촉호군 하후패와 도수의 서쪽에서 싸웠다. (이 싸움의 결과로) 호왕 백호문, 치무대등이 부락을 이끌고 강유에게 항복했으며 강유가 이들을 옮겨서 촉으로 들어갔다. (강유가 촉으로 들어간 후에야) 곽회가 진격하여 강족 호인들의 잔당(餘黨)들을 모두 평정하였다.

강유는 이들을 촉한 내지인 번현에 안처시켰다.(강유전, 후주전) 비록 아하소과가 죽고 1만여 부락이 항복했어도 강유는 위나라에 반란한 강족 우두머리들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들을 내지로 이끌어 촉한의 백성으로 만들었으며 아차새 등 위나라 경내에 남은 강족들도 강유를 따르게 만들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이 싸움은 촉한에 유리하게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곽회전」에 의하면 곽회는 아하소과를 참살하는 데 성공하고 1만여 부락이 항복하는 결실을 보였다고 한다. 이게 위에 나온 자치통감의 '곽회가 진격하여 강족 호인들의 잔당들을 모두 평정하였다'일 것이다.[9] 다음 해(248년) 아차새 등은 위나라 군대에 항거했지만 곽회에게 격파되었고 무위를 포위한 치무대 역시 격파되었다. 그러나 강족의 반란과 강유의 호응은 248년까지 이어지는 것을 고려하면 강족들이 전투에서 패했어도 그와 연계된 강유의 본대는 대부분 무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유는 패주한 치무대를 강천(彊川)으로 나가 영접하고, 음평태수 요화는 성중산(成重山)에 요새를 쌓으면서 패배한 강족들을 거둬들였다.

2.3.3. 고평릉 사변 그리고 촉한으로의 투항

하후패는 강유의 북벌을 맞서면서 열렬히 과 싸웠지만 249년, 고평릉 사변을 기점으로 조상 일파가 실각되어 송두리째 처형당하고 사마의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조상의 이종사촌 동생으로 사마씨와는 정치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사이가 나빴던 정서장군 하후현이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하후패에게 종자뻘[10]인 하후현이 중앙으로 떠나 목숨을 담보할 수 없게 되고 그 후임으로 평소 서로 사이가 나빴던 곽회가 정서장군으로 부임하자[11] 위략에 따르면 하후패는 조상이 주살된 소식을 듣고 또 하후현이 소환되니 필시 화가 자신에게도 미칠 거라 여겨 내심 두려워했다. 거기에 곽회까지 상관인 정서장군에 임명되니 하후패는 더욱 불안해 하여 이 때문에 마침내 신변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휘하 군마를 이끌고 원수의 국가인 촉한으로 투항하는데, 이때 자오도에서 길을 잃어 아사직전까지 갔다. 그나마 소문을 들은 강유가 군사를 보내 구해줬다.

배송지가 「하후현전」에 주석으로 기재한 『위씨춘추』에 의하면 하후패는 귀순을 결심하고 하후현에게 함께 갈 것을 권했으나 하후현은 거부하고 남았다.[12] 결국 그는 조위의 충신으로서 사마사에게 목숨을 잃는다. 하후패가 반역을 저질렀지만 가문의 위상 덕인지 동생들인 하후위·하후혜·하후화는 연좌에 휘말리지는 않았고 관직 생활을 계속해 제각기 자사나 태수까지 역임했다. 특히 막내동생 하후화는 종회의 반란에 협조하지 않는 등 사마씨 정권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영화를 누렸다. 하후패가 위에 남겨두고 온 자식들도 낙랑으로 유배를 가긴 했으나 하후연의 공로를 이유로 목숨은 건졌고 양호에게 시집간 딸 만세향군도 별 탈 없었다.

하후패의 가족들이 이후에도 멀쩡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사마씨와 정말 그 정도로 사이가 나빴는지에 의문이 생기며, 반대로 사이가 그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면 애당초 겁을 먹을 이유가 있었는지 등이 의문으로 남는다. 다만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 사마의는 당장 조상 일파에게 항복하면 벼슬만 거둔다고 약속했으면서도 통수를 쳐서 조상의 삼족을 멸했고, 사마소는 아예 백주 대낮에 황제까지 죽인놈이고 문앙은 사마소에게 항복했음에도 나중에 가선 트집잡혀서 결국 벼슬을 뺏겼고 삼족이 멸족당했는데 수틀리면 사마씨가 하후패라고 못 죽이겠는가? 거기다 자신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던 곽회가 상관으로 부임을 해왔으니 하후패로서는 충분히 신변에 위협을 느꼈을 법도 하다.

반대로 하후패가 촉으로 알아서 꺼져줬기 때문에 그나마 가족이라도 멀쩡했을 수도 있다. 사마씨 입장에선 개인적 원한을 떠나서 그간 높은 직위를 역임해온 "하후씨"는 결코 무시못할 존재감을 가진 자들이었으며, 하후상의 아들인 하후현의 경우 사마씨 제거에 엮여서 삼족을 멸하는 벌을 받기도 했다. 하후패는 비록 하후현만큼 고위직책이나 주요인물까진 아니더라도 대촉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던 하후연의 차남이라면 결코 무시할 만한 이름값이 아니다. 애초에 사마의와는 친분이 있고 그 아들들과는 친하진 않아도 원한까진 없던 하후현도 수도로 불려가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처지에 놓인 바 있다. 하후패는 수도 소환까진 아니라도 곽회가 직속상관이란 것을 통해 감시 하에 놓여진 셈이다. 거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삼족이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인데, 반대로 하후패가 촉한으로 망명한(=최소한 조위 내에서 사마씨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킬 위협은 없는) 상황에선 반대로 명망높은 '하후씨의 가문'에 굳이 손을 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촉한의 중진으로 사마씨 정권에 대항하긴 했지만, 사마씨 정권 입장에선 그가 약소국 촉한의 장수로서 공격하는 것이 '하후연의 아들이 위나라 내의 반란의 중심이 되는 것'보단 훨씬 덜 위협적이었을 테니까.

2.4. 촉의 중진

『위략』에서는 하후패의 투항 과정이 상당히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남쪽으로 음평(陰平)을 넘었다가 길을 잃었는데 양식이 떨어져 말을 죽이고 도보로 걸었다. 다리를 다쳐 바위 아래에 누워있는데 길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촉이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하후패를 영접했다.

삼국지연의』의 경우에는 간단하게 하후패가 강유에게 투항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끝마치지만 오히려 정사의 기록이 더욱 처절하다. 권력 투쟁에 밀려 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원수의 나라에 투항해왔음에도 양식이 없고 길을 잃은 데다가 끝내 다리를 다쳐서 바위 아래에 누워있어야 했다. 당시 기분에 대한 서술은 없지만 표현할 수도 없이 굴욕적이고 착잡했을 것이다. 다행히 촉은 그를 찾아내 따뜻하게 맞아주었지만 1년 전까지도 칼을 맞댔던 가문의 원수에게 이런 대접을 받았으니 기분이 매우 복잡했을 것이다.

촉이 하후패를 받아들인 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한나라를 창건한 한고조의 개국공신 하후영의 후손이 한나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유비전한 한경제의 후손으로[13] 위나라에 의해 후한이 멸망하자 스스로 한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한나라라고 칭했고, 스스로를 한나라의 정통을 이었다고 여겼다. 두 번째는 유선의 아내 경애황후장황후의 아버지인 장비의 처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장비는 과거 유비조조에게 귀부하던 시절 조조가 장비를 끌어들이고자 하후연의 조카딸 하후씨와 혼인시켰고 유선의 아내였던 경애황후장황후 모두 하후씨의 딸이라서 이들의 당숙이 된다.[14]

한편으로는 평소 숙지해 둔 지형정보, 강한 체력, 여분의 , 시종, 돈, 의복, 식량 등 급한 와중에도 꽤 준비를 하고 탈출하였을 고위급 군인이자 귀족인 하후패조차 길을 잃고 목숨을 잃을 뻔할 정도로, 음평과 검각, 구체적으로는 최고 해발고도가 3,767m에 이르는 진령산맥이 얼마나 극한의 지형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하후패의 촉 내에서의 중요 활동은 총 4개를 꼽을 수 있다.

2.4.1. 거기장군으로의 승진

위략』에 의하면 유선의 황후 장씨는 장비의 딸이며 그 어머니 하후씨가 하후연의 집안 조카였기에[15] 촉한에 투항한 하후패를 그같은 연유로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유선과 하후패가 대면하자 유선은 하후패에게 말했다.
“경의 부친이 해를 입은 것은 내 선친의 칼날에 의한 것은 아니었소.”
그러곤 자신의 아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아이는 하후씨의 외손자(甥)요”
이후 하후패에게 관작을 두텁게 내리고 총애했다고 한다.

하후패가 촉한에 투항하고 받은 관직인 거기장군은 본래 황실의 인척이 주로 맡는 직책이다.[16] 하후패를 인척으로 만들어서 유선은 하후패의 거기장군 선임을 정당화한 것이다.

촉한에서의 대접은 굉장히 좋아서 상술한대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는데 단순서열상으론 위장군 강유보다 위였다.[17] 같은 귀순자라지만 하후패와 강유의 경력과 공적 차이, 강유도 제갈량이 무척 우대하며 파격승진을 시켜줬다는 점을 감안하면 촉한이 위 최고 명문가의 일원이자 개국공신의 아들인 그의 귀순을 얼마나 반겼는지 알 수 있다.[18] 또 사후에는 개국최고공신인 관장마황조보다 시호를 먼저 받았다.

2.4.2. 장억과의 인연

장억과도 인연이 있었는데 진수가 지은 『익주기구전』에 의하면 하후패는 장억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와는 소원하지만,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이 마음을 의탁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알아주셔야 합니다."
그러자 장억이 답했다.
"저는 아직 당신을 알지 못하고, 그대도 아직 저를 모릅니다. 우정의 커다란 도는 저쪽에 있습니다. 어찌 마음에 의탁한다고 하십니까! 원컨대 3년 후에 이 말씀을 해 주십시오."
당시 식견있는 사람들은 이를 아름다운 말로 여겼다고 한다. 여러모로 촉한내에서 하후패의 귀순을 굉장히 반긴 듯하다.

2.4.3. 종회에 대한 경고

"강유가 하후패에게 물었다.

'사마의가 이미 저들의 정권을 잡았으니, 당연히 다시 정벌할 뜻을 가졌겠지요?'

하후패는 말하였다.

'저들은 자기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하기에 아직은 밖의 일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종사계[19]라는 자가 있는데, 그 자는 비록 젊지만 만약에 조정의 정치에 관장한다면 오와 촉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자치통감』 75권
상당히 재미있는 일화로 소설속에 신캐 등장을 위한 밑밥깔기와 같은 면이 있다. 실제로도 『삼국지연의』에서 비슷한 일화가 나오는데 종회뿐만이 아니라 등애에 대해서도 경고해서 두 사람이 범상찮은 인물임을 시사한다.

사실 하후패가 종회에 대해 경고한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떡밥거리다. 「종회전」을 참고해도 종회의 첫번째 활약은 255년의 관구검의 난에서 참모로 종사했을 때부터다. 하후패가 경고했을 무렵의 종회는 문인으로서 하안 등 조상 일파와 교류했을 뿐 군사적으론 두각을 내지 않은 상태임에도 종회의 잠재성을 정확히 예견했다. 이를 고려하면 하후패는 단순한 무부가 아닌 나름의 정보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2.4.4. 강유의 북벌에 종군하다

"후년, 옹주자사 왕경이 진태에게 말하기를 강유와 하후패가 세갈래 길, 즉 기산, 석영, 금성으로 향하여 병사를 위시로 나아가게 하고, 양주의 군사로 하여금 포한에 이르게 하여 토촉호군을 기산으로 향하도록 하려고 한다고 했다."
-『위서』 「진태전」
촉한에서 의외로 여러 일화들을 남긴 하후패이지만 『삼국지연의』에서 강유의 북벌에 뺀질나게 종군하며 참모로써의 모습을 보인 것과 달리 역사상으로 하후패가 참전한 북벌은 255년의 북벌이 유일하다.
"강유는 적도에 도착하여 위나라 옹주자사 왕경을 크게 격파시켰다. 왕경의 병사 가운데 조수에서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촉서』 「장익전」
"그 뒤 (연희) 18년(=255년), 다시 거기장군(車騎將軍) 하후패(夏侯霸) 등과 함께 적도(狄道)로 출병하여 위(魏)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왕경(王經)을 조서(洮西)에서 대파하니 (왕)경의 군사들 중 죽은 이가 수만 명에 달했다."
-『촉서』 「강유전」
"여름, 거기장군 하후패 및 장익을 이끌고 적도에 출병하여, 위의 옹주자사 왕경을 조서에서 크게 격파했다.

왕경의 무리중 죽은 자가 수만, 왕경은 물러나서 적도성을 지켰다."
-『화양국지』 「유후주지」
조수 전투는 강유의 북벌 중 최대의 성과로 수만의 군사력을 참살하며 순수 피해량만 고려하면 제갈량의 북벌을 뛰어넘는 전과를 올렸다. 진수가 하후패가 강유와 함께 종군했다는 사실을 굳이 기록한 것을 봐서는 이 전투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기록상으로는 종군했다는 사실만 기록되었을 뿐 실질적인 역할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촉서』와 『화양국지』 뿐만이 아니라 『위서』 「진태전」조차도 하후패의 참전을 기록한다는 점은 하후패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20] 특히 255년의 북벌과 이전의 강유의 북벌을 차별화하는 점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동력이다. 이전까지 강유는 미리 요충지를 선점한 곽회와 하후패에 의해 전략적으로 휘둘려서 퇴각하기 일수에 후일 등애와의 결전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그에 비해 255년의 강유와 하후패는 왕경과 진태가 전략을 논했을 무렵 이미 부한(枹罕)에 도달한데다가 직후 적도를 향해 진군해서 진태의 허를 찌르고 왕경군을 박살내는데 성공했다.

위나라 출신에 오랫동안 위측에서 관중에 주둔한데다가 곽회와 여러번 손을 맞춰서 출병했던 하후패의 과거를 고려하면 그의 정보력과 경험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게 더욱 이상하다. 특히 낙곡 대전과 강유와의 전투로 숙련된 능력은 조수 전투의 상상을 초월하는 전술적 승리에 공헌했을 것이란 추측은 어렵지 않다. 다만 명시적인 기록이 없는만큼 추측의 영역으로 남았을 뿐. 반대로 하후패가 단곡에서 죽었다는 설을 참조한다면 왜 단곡에서는 그렇지 못했느냐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255년 북벌만이 이전과 달랐던 것은 아니며, 이미 246년 위장군에 오른 직후 옹주로 출병해 곽회와 하후패를 이긴 기록이 있고 254년만 해도 강유는 이미 적도로 한번 군사를 움직여 양무를 포위하고 이에 대응해 나온 대촉 전담군인 정촉호군을 격파하고 지휘관인 서질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또한 적도현, 하관현, 임조현의 세 현의 많은 성들을 함락시키는데 이때는 하후패의 참전기록이 없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이미 강유는 위군이 요충지를 방어할만한 기동전력을 격파하고 농서지역 각지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확보하여 이전보다 운신의 폭이 넓어졌기에 기동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을 공산이 있다. 즉, 조수 전투의 전과에서 하후패의 공헌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추측의 영역에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2.5. 불확실한 최후

조수 전투 이후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외에는 언급이 없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도 불분명하다. 받은 시호조차 기록되지 않을 정도로 정보가 부족하다. 다만 『촉서』 「조운전」과 「장익전」에 의하면 260년 이전에 시호가 주어진 데다가 거기장군을 요화장익이 각각 좌, 우로 나눠 맡은 때가 259년이니 그 이전에 사망한 것은 확실하다.

강유의 북벌 최대의 패배로 장수 10여 명이 죽었다는 256년의 단곡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고 그냥 자연사 했을 거라 보는 사람도 있다. 기록이 없다보니 결론이 날 수도 없고 그냥 상상의 영역이다. 애시당초 고평릉 사변 때 벌써 환갑을 넘은 노인이였으니 언제 자연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이기는 했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장합이 죽은 뒤 사마의의 부장으로 첫 등장하며, 죽은 제갈량이 만들어 둔 목상을 보고 내빼는 사마의를 호위역, 공손연 토벌의 선봉으로 종군한다. 정사대로 고평릉 사변 때 촉한에 투항하는데, 강유의 참군 역할이 되어 등애종회의 존재를 알려주고 북벌군에서 가히 강유의 오른팔이라 해야 할 정도로 신임을 받으며 수차례 분투하다가, 262년 제 8차 북벌때 조양으로 나가 싸우다 등애의 복병에 걸려 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정사에 비해 더욱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다.

의외로 장판 전투에 등장하기도 한다. 나관중삼국지연의 명나라 시대의 판본에서는 하후걸의 역할을 실존인물인 하후패가 했다. 장비에게 덤볐다가 1합만에 두동강이 났다. 차후 촉장이 되는 만큼 청나라 시대의 모종강본 이후로는 다른 가공인물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이때 장비가 휘두른 사모에 밀려 그대로 물에 빠져버린다. 그 후 제갈량의 북벌 때 다시 등장하는데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서 혼란스러워 하는 독자들이 많았다. 정사와 마찬가지로 촉에 투항하여 강유의 휘하에서 종군하는데, 최후는 직접적으로는 묘사되지 않고 강유가 말년에 북벌을 하려고 하자 황호가 유선에게 '지금은 북벌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저번 북벌에서도 괜히 하후패만 잃지 않았나'라는 식으로 간언을 하면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4. 평가

아버지 하후연과 비슷한 스타일의 맹장으로 자오 전투 당시 위협에 빠지자 녹각에서 몸소 싸우며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용맹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하후연이 한중 공방전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고려하면[21] 아버지의 죽음을 반면교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의 똑같은 행동을 보이다가 스스로를 죽을 위기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다는 점은 비판할 수 있다.

촉한에 투항한 이후에 장억강유와 친목을 도모하는 등 원수의 국가에서 놀라울 정도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 255년의 북벌에 참전해서 정확한 역할을 알 수 없지만 촉한 역사상 최대의 승리에 공헌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 무렵 인재풀이 굉장히 부족했던 촉한에게 255년의 북벌 이외의 전쟁에 참전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하후패는 244년 흥세 전투 참전으로부터 시작해서 247년 ~ 248년에 이르는 강유의 북벌을 저지하는 데 비록 미끼였지만 일조하고,[22] 그 후 255년의 북벌에 참여하는 등 파란만장한 경력을 자랑하는 장수다. 기록이 워낙 부족해서 뛰어난 무력을 제외하면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

개인적인 면에서 촉한에 엄청난 증오심을 가졌던 인물이 여의치 않은 정치투쟁으로 아버지를 죽인 나라에 투항해 중진 행세를 해야 했다는 점은 굉장히 불우하다고 할 수 있다. 위나라에서 오랫동안 종군했으나 기록이 부족한 것은 투항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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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비의 부인 하후씨의 사촌오빠라는 기록이 있다. 하후씨는 200년에 13살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거의 70세 정도 살았다고 보면 된다.[2] 심지어 죽기 직전까지 전장에 나가 싸웠다.[3] 단곡 전투의 패배로 죽었다는 설을 신봉할 경우에는 256년이다.[4]안후이시 보저우시[5] 하후연의 장남은 하후형으로 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하후무가 하후연의 장남으로 나온다. 그런데 하후무는 정사에서 하후돈의 차남이다.[6] 게다가 당시 촉군 참전 장수들인 위연이나 왕평은(왕평은 위나라 장수였다가 유비에게 투항한 인물이라 더더욱 하후씨 집안이 위에서 가진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 것이다.) 한중공방전에 종군한 경험이 있으므로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7] 혹은 토촉호군(討蜀護軍)으로 표기된다.[8] 하후현은 하후패의 조카(從子)인데, 하후현은 하후연의 조카인 하후상의 아들이다. 그러니 친형제의 아들은 아니고 사촌동생 혹은 육촌동생의 아들인 셈. 즉 친조카는 아니고 조카뻘인 셈이다. 하후현은 또한 조상의 고종 사촌동생이다.[9] 즉 우두머리를 잡고 1만여 부락을 항복시킨 전과가 자치통감에 따르면 강유가 이끌고 간 강족들의 '잔당'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강유가 이끌고 간 강족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때 강족 반란의 규모가 얼마만큼인지 짐작이 가능하게 한다.[10] 하후현의 아버지 하후상이 하후연의 조카이니 하후패에겐 사촌 혹은 육촌 동생의 아들이다.[11] 정촉호군은 정서장군 관할에 속한 관직이다. 하후패와 곽회가 247년과 248년에 함께 출병한 사실이 앞서 서술되었는데 왜 이 둘이 불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기록된 바가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추측은 하후패가 속한 조상 일파와 곽회가 속한 사마의 일파의 파벌 싸움이라는 것 정도. 그러나 곽회는 사마의와 함께 대촉전선에서 활동하고 부인 건도 있고 해서 사마씨와 가깝긴 했으나 30년 이상 변방에서 보내 정치색이 옅은 순수 군인 타입이라 의문이 뒤따른다.[12] 사마의야 하후현의 아버지 하후상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도 있고해서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 굳이 하후현까지 제거하려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아들이자 일찍부터 위나라를 삼킬 뜻을 품었던 사마사는 하후현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이 시점에서 하후현은 이미 죽을 각오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13] 전한 5대 황제 경제는 4대 문제의 적장남이었고, 문제는 고조 유방의 4남이다.[14]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야사가 있는데, 장비가 어느날 길을 가다가 빨래를 하고 있는 소녀를 보고 납치해서 아내로 삼았는데 이 소녀가 하후씨라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장비는 하후씨 집안의 여성과 정식으로 혼인을 한 것이지만 이후 조조의 가장 큰 적이 되었으므로 이런 식으로 말을 흐린 것.[15] 게다가 하후연은 기근이 들었을때 어린 아들을 포기하면서도 조카딸을 살린 적이 있는데, 그 인물이 하후씨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이 맞다면 아버지 하후연이 그토록 아낀 사촌여동생과 13세 이후 생이별했다가 그 자손들과 만나게 된 셈. 하후씨 본인이 아닌 자식들을 보여준 것을 보면 하후씨는 이때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16] 대표적으로 헌제 시기 국구이던 동승이 거기장군이었고, 유선의 장인 장비가 거기장군을 역임했다. 유선의 의붓외숙이자 군부 중진이던 오의도 거기장군으로 한중 수비를 담당했었다.[17] 당시 군부 최고 서열이 대장군, 표기/거기/위장군, 좌장군/전장군/우장군/후장군 순이었고 대장군은 실제로 군을 이끈다기보다는 현재의 원수처럼 상징적인 자리에 해당되었으므로 사실상 당시 한나라 군대의 탑은 표기장군/거기장군이라고 할 정도였다.[18] 북한에서 망명한 황장엽을 우대한 것과 비슷한 정치적 효과를 노렸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고평릉 사변으로 인해 위나라에서 조씨와 하후씨가 상당한 실권을 잃고 사마씨가 대두되는 상황이었으니만큼, 촉에서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하후패 같이 명망있는 귀순자를 우대하는 모습을 통해 위나라 내부의 권력다툼에서 실각하는 이들을 포섭하려는 정치외교적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나라의 대촉전선 에이스가 망명을 한 상황이니 위나라 내 정변을 이용하여 하후패 같은 케이스를 더 만들어내면 관중으로의 진출이라는 숙원을 해결할 가능성이 커진다.[19] 사계는 종회의 자이다[20] 다만 하후패는 개국공신 하후연의 아들로 조위를 탈출해 타국으로 귀순한 이들 가운데 손에 꼽힐 정도의 거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그토록 증오하던 적국의 군대를 이끌고 원래 조국으로 진격해 오는 특수한 사항인데 굳이 기록에서 뺄 이유는 없다라는 반론도 있다.[21] 몸소 녹각을 점검하다가 황충의 기습을 받고 죽었다.[22] 곽회는 강유가 반드시 하후패를 공격해 올 것이므로 풍중으로 들어가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하후패를 맞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곽회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