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양장 | ||||
장료 | 악진 | 우금 | 장합 | 서황 |
하북사정주 | |||
안량 | 문추 | 장합 | 고람 |
오자양장(五子良將) 張郃 장합 | |||
장합이 4차 북벌 때 제갈량을 추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상황을 묘사했다. | |||
시호 | <colbgcolor=#FFFFFF,#191919> 장후(壯侯) | ||
작위 | 도정후(都亭侯) → 도향후(都鄕侯)[1] → 막후(鄚侯) | ||
최종직위 | 정서거기장군(征西車騎將軍)[2] | ||
성씨 | 장(張) | ||
휘 | 합(郃) | ||
자 | 준예(儁乂) | ||
생몰 기간 | ?년 ~ 231년 | ||
고향 | 기주(冀州) 하간국(河間國) 막현(鄚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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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원소) | 교위(校尉) → 영국중랑장(寧國中郞將) | ||
후한(조조) | 편장군(偏將軍) → 평적장군(平狄將軍) → 탕구장군(蕩寇將軍) | ||
조위(조비 → 조예) | 좌장군(左將軍) 겸 사지절(使持節)[3] → 정서거기장군(征西車騎將軍) 겸 사지절(使持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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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준예(俊乂). 기주 하간군 막현 출신. 유비의 입촉 후 삼국이 정립되자 대촉(對蜀)전선을 담당한 명장. 장료와 더불어 항장 출신으로서 마지막까지 전선에서 싸우다 죽었다. 오자양장 중에서는 제일 마지막에 사망했다. 참고로 진기환 국역 정사 삼국지의 위서 제1권 내 주석에 따르면 오자양장 중 장합만이 망족(亡族 말고 望族), 즉 출세하기 이전부터 원래 귀족 출신이라고 한다.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한나라 말, 모병에 응해 황건적을 토벌하고 군사마가 되었고 한복에 속했다. 한복이 패망하자 병사를 이끌고 원소에 귀부했다.원소는 장합을 교위로 삼고 공손찬과 맞서게 했다. 공손찬을 격파하는 데 장합의 공이 많았으므로 영국중랑장으로 올렸다.
2.2. 관도대전
《한진춘추》에 따르면 장합이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공이 비록 연달아 이겼으나 조조와 맞붙지 마십시오. 은밀히 경기병을 보내 그 남쪽을 공략해 끊는다면 조조의 군은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조조가 관도에서 원소와 서로 맞섰을 때 원소는 장수 순우경 등을 보내 군량 운반을 지휘하게 하여 오소에 주둔했는데, 조조가 친히 군을 이끌고 가서 급습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처음 원소가 조조의 순우경 공격 첩보를 들었을 때 장자인 원담에게 말했다.
저들이 순우경 등을 공격하니, 나는 저들의 본영을 공격해 함락시켜 돌아갈 곳이 없도록 만들겠다!
장합이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조조의 군사가 정예하니 필시 순우경 등을 격파할 것입니다. 순우경 등이 격파되면 장군의 대사가 어그러질 것이니, 마땅히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야 됩니다.
곽도가 말했다.장합의 계책은 옳지 않으며 조조의 본영을 들이치는 것만 못합니다. 조조는 사세상 필시 환군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린다는 것입니다.
장합이 말했다.조조의 둔영이 견고하므로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순우경 등이 사로잡힌다면 우리들 또한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원소는 다만 경기병으로 순우경을 구원하게 하고 중병(重兵)으로 조조의 본영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과연 조조는 순우경 등을 격파하고 원소군은 궤멸되었다.곽도가 부끄러워하며 또 장합을 참소하며 말했다.장합이 군이 패한 것을 기뻐하며 불손한 말을 했습니다.
장합이 이를 두려워하여 조조에 귀부했다.<무제기>에 따르면 장합, 고람에게 당시 조조의 본진을 지키는 조홍을 공격하게 했는데 순우경이 격파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들이 투항했다고 한다.
<순유전>에 따르면 원소의 장수 장합과 고람이 망루를 공격하여 태워버리고 투항하자, 원소는 마침내 군대를 버리고 도주했다. 장합이 항복해 오자, 조홍은 의심하며 과감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순유는 조홍에게 말했다.
장합은 원소가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아 분노하여 온 것인데 당신은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조홍은 곧 그를 거두었다.조조는 장합을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장합을 편장군으로 임명하고 도정후에 봉하고 군사를 주었다.
<원소전>에 따르면 조조가 오소에게 이기고 돌아오는데 진영에 이르지 않아서 장합과 고람이 휘하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고 하니 이를 <무제기>, <장합전>, <순유전>과 종합하면 장합과 고람이 조조 진영을 공격하다가 순우경의 격파 소식을 듣고 귀환했는데 이때 곽도의 참소 소식을 듣고 이를 두려워해 역으로 아군을 공격하고 조조가 본영에 도착하기 전에 항복한 것으로 보면 맞아 떨어진다. 장합의 직접적인 배신 행위로 인한 원소군 붕괴를 기록하지 않은 <장합전>을 제외한 관련 기록들의 서술들은 명확하게 장합의 배신이 원소의 패배를 결정지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때 장합이 내부에서 아군을 공격하고 불을 지르며 대혼란을 일으켜 원소의 패배를 확실하게 결정지었던 것이 문제가 되는 상황인데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댄다면 악질적인 배신 행위에 가깝지만 곽도가 장합이 패배를 기뻐했다는 거짓말로 참소했고 장합이 이를 두려워했다는 명분이 있는데다가 투항의 확실한 의사 표시와 투항 후의 입지를 생각한다면 분명 옳은 결정이었다.
2.3. 하북 평정
《수신기》에 따르면 조조가 원담을 치며 사람을 시켜 사당으로부터 비단 천 필을 빌리게 했으나 도삭군이 주지 않았다. 이에 조조가 장합을 보내 사당을 허물게 했다. 장합이 사당에서 백 리쯤 떨어진 곳에 왔을 때 도삭군이 병사 수만 명을 보냈으나 장합의 무리는 길에 쭉 늘어서서 행진해 왔다. 장합이 사당에서 2리쯤 떨어진 곳에 왔을 때 구름과 안개가 장합의 군대를 둘러쌌기에 장합은 사당이 있는 곳을 몰랐다.조조를 수행해 업을 공격하고 이를 함락시켰다. 또한 조조를 수행해 기주 발해군에서 원담을 공격하고, 악진과 함께 군을 이끌고 유주 어양군 옹노현을 포위해 대파했다. 조조를 수행해 유성을 토벌할 때 장료 등과 함께 군의 선봉이 되었고 공을 세워 평적장군으로 올랐다. 조조의 지휘를 받아 악진, 이전 등과 함께 청주 동래군을 정벌해 관승을 쳤다.
<장합전>에서는 옹노 공격과 동래군 토벌을 "별도"라고 서술했지만 <악진전> 등과 교차검증시 악진이 함께했음을 알 수 있다.
2.4. 진란 토벌
<장료전>에 따르면 진란, 매성이 저족의 육현을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는 우금, 장패 등을 보내 매성을 치도록 하고, 장료는 장합, 주개 등을 이끌고 진란을 치도록 했다. 매성이 우금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우금이 돌아가자 그 군을 이끌고 진란에 합류해 첨산으로 들어갔다.또한 장료 등과 함께 진란, 매성 등을 토벌해 깨뜨렸다.
2.5. 형주 정벌
<조엄전>에 따르면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때, 조엄에게 장릉태수를 겸임하도록 하고, 도독호군으로 바꿔 임명하고 우금,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 풍해 등의 7군을 통솔하게 했다.2.6. 관중 평정
<무제기> 주석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가 장차 황하를 건너려 하여 선두 부대가 막 건널 때 마초 등이 돌연 당도했는데 조조는 호상(胡床)에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장합 등이 사태가 급박한 것을 보고 함께 조조를 이끌어 배에 타게 했다.조조를 수행해 위수 남쪽에서 마초, 한수 등을 격파하고 양주 안정군을 포위해 양추의 항복을 받았다.
하후연과 함께 부현의 도적 양흥과 양주 무도군 저족을 쳤다. 또 다시 마초를 격파하고 송건을 평정했다.
2.7. 장로 정벌
조조가 장로를 정벌할 때, 먼저 장합을 보내 제군을 이끌고 흥화의 저족 왕 두무(竇茂)를 치게 했다. 조조는 산관을 지나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또 다시 먼저 장합을 보내 보졸 5천을 이끌고 선두에서 길을 뚫도록 했다. 양평에 도착했는데 9월 파군의 7성(七姓)의 이민족왕 박호(朴胡), 종읍후(賨邑侯) 두호(杜濩)가 파군의 이(夷)족, 이민족들을 들어 항복해왔다. 11월 장로가 항복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이때 유비가 유장을 습격해 익주를 차지하고 마침내 파중을 점거했는데 장합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다. 조조가 대군을 들어 한중을 점령하고 남정에 있을 당시에 장합을 시켜서 보낸 것으므로 그 병력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12월 조조는 돌아왔고 장합과 하후연을 남겨 한중을 수비하며 유비에 맞서도록 했다. 장합은 따로 제군을 이끌고 파동, 파서의 2군을 항복시키고,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겼다.2.8. 한중 공방전
<장비전>과 <장합전>에 따르면 장합은 별도로 제군(諸軍)을 지휘해 파서로 내려가 항복을 받고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니, 탕거, 몽두, 탕석으로 진군해 장비와 50여 일간 서로 겨루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장로가 파중으로 달아나 항복했을때 황권이 두호와 박호를 격파하였고 이때 위공 조조가 장합에게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3파 지역을 순행하며 그곳의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여 군대를 탕거로 진군시켰다. 유비는 파서태수 장비를 시켜 장합과 서로 대치하게 하였고 50여 일이 지나자 장비가 장합을 습격하여 크게 대파하였으며 장합이 달아나서 남정으로 돌아가자 유비도 성도로 돌아갔다.<장비전>에 따르면 장비는 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군을 요격하여 교전했는데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고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했다. 장합은 말을 버린 채 산을 타며 단지 휘하 10여 명과 함께 샛길을 따라 퇴각했고, 장합이 군을 이끌고 남정으로 돌아가니 파(巴) 땅은 안정을 찾았다. 군을 물려 익주 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왔다. 탕구장군에 임명되었다.[4]
유비가 양평에 주둔하자 장합은 광석에 주둔했다. 유비가 정예병 1만여 명을 10부로 나누고 밤중에 장합을 급습했다. 장합은 친병(親兵)을 이끌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유비는 이길 수 없었다. 그 뒤 유비가 주마곡에서 도시 주변을 불태웠다. 하후연이 불을 끄러 다른 길로 왔다 유비와 서로 만났다. 단병(短兵)으로 서로 칼을 맞부딪치며 교전하다 마침내 하후연이 죽었고 장합은 양평으로 돌아왔다. <장합전>에는 유비가 1만 군사를 10부대로 나누어 야습을 가하고 장합이 직속부대로 방어하자 유비가 이기지 못하고 주마곡 주변을 불태웠다고 적혀있는데, <하후연전>에는 유비가 야습하자 장합이 불리하여 하후연이 병력 절반을 보내 구원했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유비는 야습으로 장합을 1차적으로 압박한 후 녹각을 불태워 2차 압박을 가해 장합을 몰아붙여 하후연이 나타나도록 판을 짰다. 만약 하후연이 장합을 돕지 않았다면 그냥 아예 장합을 잡아내자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합전>에서는 장합이 친병을 지휘해 치열하게 맞서자 유비가 이기지 못했다고 기록했으나 <하후연전>은 장합이 불리하자 하후연이 병력 절반을 보내 구원했다가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이때 장합의 상황을 상반되게 기록했다.
《위략》에 따르면 비록 하후연이 도독이었으나 유비는 장합을 꺼린 반면 하후연은 경시했다. 이에 하후연이 죽자 유비가 말했다.
응당 우두머리를 잡아야지, 이 자를 잡아서 무엇하겠는가![5]
당시 총대장을 잃었으므로 유비가 이를 틈탈까 두려워하며 삼군이 모두 놀라서 얼굴빛이 변했다. 이에 하후연의 사마인 곽회가 군중에 영을 내렸다.
장장군은 국가의 명장으로 유비가 꺼리는 분이다. 지금의 긴급한 사태는 장장군이 아니면 누구도 안정시킬 수 없다.
이에 장합을 추천해 군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두습전>에 따르면 두습은 장합, 곽회와 연합하여 군대의 모든 사물을 주관하는 한편, 장합을 원수로 임명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통일시켰으므로 삼군은 곧 안정되었다.
장합이 나서서 군사들을 통솔하고 진영을 안돈하고 제장들이 모두 장합의 절도(節度)를 받게 되자 군심이 안정되었다. 조조는 장안에서 사자를 보내 장합에게 절을 내렸다. 그리고 조조가 친히 한중에 도착하자 유비는 높은 산을 지키며 감히 나와 싸우지 못했다. 이에 조조는 한중의 제군을 이끌고 나왔고 장합은 우부풍 진창현으로 물러나 주둔했다.
2.9. 조비 휘하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장합을 좌장군으로 임명하고 도향후로 올려 봉했다.<곽회전>에 따르면 곽회는 좌장군 장합과 관군장군 양추를 감독하여, 산적 정강과 반란을 일으킨 노수의 오랑캐를 모두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막후로 올려 봉했다. 조서를 내려 조진과 함께 안정의 노수호(盧水胡)와 동강(東羌)을 토벌하게 했다.
2.10. 강릉 전투
장합과 조진에 명해 궁으로 와서 조알하게 하고 남쪽으로 보내 하후상과 함께 강릉을 공격하게 했다. 장합은 별도로 제군을 지휘해 장강을 건너며 섬 위의 방어 진지들을 점령했다.(조비의 1차 남정)<문제기> 주석 위서재병오조에 따르면 중군, 정남이 강릉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좌장군 장합 등이 수군을 이끌고 직접 강을 건너 남저를 공격하니 적중에 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이 수 천 명이었다.
2.11. 제갈량의 1차 북벌
조예가 즉위하자 남쪽으로 보내 형주에 주둔하게 했다. 사마의와 함께 손권의 별장(別將)인 유아 등을 공격했는데, 기구에까지 추격하여 교전해 이를 격파했다.<제갈량전>에는 조예가 서쪽으로 장안을 진수하고 장합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고 제갈량은 마속에게 선두에서 제군을 이끌게 해 가정에서 장합과 더불어 싸우게 했다고 했으며, 곽회전에 따르면 촉나라 재상 제갈량이 기산에서 나와 장군 마속을 가정까지 파견하고, 고상은 열유성에 주둔하도록 했다. 조진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자 남안, 천수, 안정의 3개 군이 모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다. <명제기>에 따르면 조예는 이에 보병, 기병 5만 대군을 준비해 제갈량을 막았다. 우선 조예는 조진으로 하여금 관중의 병력들을 모두 도독하게 하고 제군을 지휘해 촉한의 장군 조운과 대치하고 있는 미(郿)에 주둔케 했다. 그리고 우장군[6] 장합을 서쪽으로 향하게 보내 제갈량을 막게했으며 명제 조예 자신도 2월 17일경에 장안에 도착했다. 장합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자 장합에게 특진의 지위[7]를 더하고 제군을 이끌게 해 파견했고, 제갈량의 선봉인 마속을 가정에서 막게 했다.[8]
한편 가정에 도착한 촉장 마속은 <제갈량전>과 <마속전>에 따르면 여러 부대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가정에서 내린 명을 따르지 않고 군을 부적절하게 운영했다. <제갈량전>과 《화양국지》 <유후주지>를 종합하면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 명령을 어기고 거동(擧動)이 부적절하였다고 한다. <왕평전>에 따르면 마속은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행동하기에 번잡하였으므로 왕평은 계속 선봉이었던 왕평이 여러 차례 옳은 도리, 규칙을 들어 반대했으나 마속이 이를 쓰지 아니해 받아들여지지 않아 가정에서 크게 패하였다 되어 있으며 장합전에 따르면 마속은 남산에 의지해 막고 (내려가) 아래의 성[9]점거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자치통감]》]에서도 마속은 선봉으로서 제갈량의 절도를 어기고 행동거지가 번거롭고 요란했는데 물가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고 나온다. 장합은 그 급도(용수로)를 끊고 들이쳐서 공격하여 마속을 대파했다.
<왕평전>에 따르면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 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위나라 장수 장합은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10] 이로 인해 가정을 잃게 되면서 3군의 호응에 힘입어 자신있게 막을 올린 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촉군은 한중으로 퇴각하였다.
<명제기>에선 장합이 가정에서 제갈량을 쳐서 대파했다고 했고 <조진전>에서는 장합을 파견하여 마속을 공격했다고 했으며 <곽회전>에선 가정에 파견되었던 마속을 장합이 공격하였고, 곽회가 열류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고상의 진영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시켰다고 되어 있다. 열류성에서 가정을 백업하던 고상도 가정이 무너지고 옹주 자사 곽회에게 진영이 격파당했으며, 기산이 무너지자 기곡에서 불리한 가운데 조진의 대군을 상대하며 조진을 붙들어 매던 조운도 패배해 퇴각했다.
<장합전>에 따르면 남안, 천수, 안정군이 모반해 제갈량에 호응했었는데, 장합이 이를 모두 깨뜨리고 평정했다. 조서를 내렸다.
적 제갈량이 파촉의 무리를 이끌고 나왔다 포효하는 범과 같은 군대를 만났도다. 식읍을 1,000호 늘려 예전과 합해 모두 4,300호가 되게 하라.
2.12. 제갈량의 2차 북벌
사마의가 형주에서 수군을 조련해 면수(한수)를 따라 장강으로 들어가 오를 토벌하려 했다. 장합에게 조서를 내려 관중의 제군을 이끌고 사마의에게로 가서 절도(節度)를 받도록 했다. 형주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물이 얕았으므로 큰 배가 다닐 수 없었다. 이에 방성으로 돌아가 주둔했다.제갈량이 다시 출병해 진창을 급습하자, 조예는 역마(驛馬)를 내어 형주에 주둔하고 있던 장합을 수도로 오게 했다. 조예는 친히 하남성으로 행차해 주연을 베풀며 장합을 전송했다. 남북군사(南北軍士) 3만을 보내고, 무위(武衛), 호분(虎賁)을 나누어 보내 장합을 호위하도록 했다. 조예가 장합에게 물었다.
장군이 더디게 도착하면 제갈량이 이미 진창을 차지해 버리진 않았겠소?
장합은 제갈량이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부족해 오랫동안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제갈량은 이미 달아났을 것입니다.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볼 때 제갈량의 군량은 10일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11]
장합이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진격해 남정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퇴각했다. 조서를 내려 장합을 수도로 돌아오게 하고 정서거기장군에 임명했다. 다만 남정에 도착했다는 것은 정사 삼국지의 오류다, 남정(南鄭)은 한중군 남정으로 장합이 남정을 함락했을리는 당연히 없고 진창에 가는 방향과도 다르다. 진창을 남정으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자치통감에서는 아예 장합이 도착하기도 전에 제갈량이 퇴각했다고 쓰고 있다.2.13. 조예 휘하
장합은 임기응변의 방법을 알아, 형편에 따라 영과 진을 잘 설치했고, 전세와 지형을 헤아리면, 헤아림만 못한 적이 없어, 제갈량부터 해서 모두 그를 꺼렸다. 장합은 비록 무장이나 학자를 아끼고 좋아하여, 일찍이 같은 고향의 비담(卑湛)이 경학에 밝고 행실이 착하다고 천거했다.조서를 내리길
옛날 제준(祭遵, 후한 광무제 때의 명장)은 장수가 되었을 때 오경대부(五經大夫)를 설치하자고 상주했고, 군중에 있으면서도 여러 유생들과 아악을 연주하고 투호(投壺)를 즐겼는데, 지금 장군은 밖으로 군대를 통솔하면서도 안으로는 조정을 존중하는구나. 짐이 장군의 뜻을 가상히 여겨 비담을 발탁해 박사(博士)로 삼겠노라.”
2.14. 제갈량의 3.5차 북벌
<후주전>에 따르면 230년 가을, 위나라가 사마의는 서성, 장합은 자오, 조진에게는 야곡을 지나게 해 한중을 공격하려 했다. 승상 제갈량이 성고, 적판에서 이들을 기다렸는데, 큰 비가 내려 길이 끊기자 조진 등이 모두 돌아갔다.2.15. 제갈량의 4차 북벌
<제갈량전> 주석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고 선비 가비능을 부르자, 가비능 등이 옛 북지 석성에 이르러 제갈량에 호응했다. 이때 위 대사마 조진이 병이 들어, 사마의가 형주에서 와서 입조했다. 조예가 말했다,서방의 일이 중대하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 한 자가 없소.
이에 서쪽으로 장안에 주둔하게 하고 장합, 비요, 대릉, 곽회 등을 이끌게 했다.사마의는 비요, 대릉에게 정병 4천을 남겨 천수군 상규현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기산을 구원했다. 장합이 군사를 나눠 옹, 미에 주둔시키려 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전방의 군대가 홀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는 것은, 바로 초의 3군이 경포(영포)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었소.
그리고는 진격했다. 제갈량은 군을 나눠 남겨두어 기산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상규에서 사마의를 역격하려 했다. 곽회, 비요 등이 요격하자 제갈량이 이를 격파했다. 이에 그곳의 보리를 대거 수확하다 사마의와 상규 동쪽에서 조우했다. 군사를 단속해 험조한 곳에 의지하며 교전하지 않자 제갈량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사마의가 제갈량을 뒤이어 노성에 도착했다. 장합이 말했다.저들이 교전을 청하는데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장기적인 계책으로 제압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곳에 머물러 주둔하되, 군을 나누어 기습군으로 삼아 그들의 배후로 출병할 것처럼 과시할 만합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사마의가 이에 따르지 않고 제갈량을 뒤쫓았다. 도착한 후 또 산에 올라 영채를 세우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가허, 위평이 여러 차례 청하며 말했다.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사마의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청하니, 이에 5월 신사일, 장합에 명해 남쪽을 포위한 무당감 하평(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도를 따라 제갈량에게로 향했다.제갈량은 위연, 고상, 오반을 보내 이를 막게 해 대파하고, 갑옷 입은 군사 3천 급, 철갑옷 5천 벌, 각노 3,100 장을 노획했다. 사마의는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
<왕평전>에 따르면 231년,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왕평은 따로 남쪽을 포위하고 지켰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의가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가 장합에게 이를 추격토록 했다. 장합이 말했다.
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사마의가 이를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했다.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를 난사하자 화살이 장합의 넓적다리에 적중했다.원희지(袁希之)의 한표전(漢表傳)에 따르면 제갈량이 출군하여 기련산(祁連山)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목우(木牛)로 군량(軍糧)을 운반하였다. 위나라 사마선왕과 장합이 기련산을 구하러 나왔다. 여름 6월,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니 군대를 물려 청봉 목문에 이르렀는데 장합이 추격하여 왔다. 제갈량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나무껍질을 깎아내고는 크게 글을 써서 말했다.미리 병사들에게 군령을 내려 좁은 길에 수천의 강노를 준비케 하였다. 장합이 과연 모습을 드러내자 천개의 노를 동시에 발사하여 장합을 쏘니 죽었다.
사마의가 무리하게 장합에게 추격을 지시했다가 장합이 전사하고 만 이유를 과잉대응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목문도는 노성 북쪽, 상규 남쪽에 있는데 장합이 이곳에서 촉군을 추격했다가 함정에 걸려 전사했다는 것은 촉군이 위군을 상규까지 추격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2.16. 사후
<신비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장합은 그들을 추격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황제는 장합을 애석해하고 조정 회의에서 탄식하며 말했다. 조예가 말했다.촉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장합은 죽었소. 장차 이와 같음을 어떻게 하오!
사공 진군이 말했다.장합은 진실로 훌륭한 장수였으며, 국가가 의지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신비는 마음속으로 장합은 비록 애석한 인물이지만, 이미 죽었으므로 안으로 군주의 마음을 약하게 한다거나, 밖으로 큰 일로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진군에게 말했다.진공(진군), 이것이 무슨 말이오! 천하에 하루라도 무황제(조조)가 없으면 할 수 없다고 했소. 또 문황제(조비)가 없었으면 할 수 없었다고 했소. 지금 국내에 부족한 것이 어찌 장합이겠소?
진군이 말했다.또한 실제로 신비의 말이 맞소.
황제는 웃으면서 말했다.진공은 왜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오?
배송지는 여기에 자신의 의견을 달았는데 다음과 같다.
사람을 비교하려면 반드시 그와 알맞는 대상이 있습니다, 마땅히 동류의 것을 인용해 취해서 비교해야 하며, 옛 군자의 말을 기대, 구차함이 없어야 할 따름입니다. 신비는 넓고 큰 의견을 말하고자 하는데, 마땅히 장료의 무리와 같은 것을 (예시로) 들어야 함에도, 어찌 하나의 장수의 죽음을 이어 조종(祖宗)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마땅한 말이 아니고, 앞으로 나아가선 어긋난 부류이며, 뒤로 물러나선 매우 아첨하는 듯 합니다. 좌치(신비의 자)는 굳세고 바른 몸이니, 이런 말이 있음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위략은 이미 믿기 어려우며 습씨 또한 따르고 기재하여 쓰니 감히 생각해보건데 이 사람(신비)은 무고로 인해 모욕을 당함이 적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장합의 일은 같은 레벨인 장료 급에서 비교해야지 조조나 조비 급에게 비교하는 건 말이 안 되니 신비가 이런 말을 했다는건 믿기 어렵다는 것.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다만 위략뿐 아니라 습씨(습착치)도 같은 내용을 기술했다는 점에서 배송지의 인상비평에 가까울 가능성도 있다.
시호를 내려 장후(壯侯)라 했다. 아들 장웅(張雄)이 후사를 이었다. 장합이 앞뒤로 정벌전에 공을 세웠으므로 조예는 장합의 봉호를 떼어내어 장합의 아들 4명을 열후에 봉했다. 어린 아들에게는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정시 4년(243년), 장합은 태조의 묘당에 배향됐다.
3. 삼국지연의
연의에서의 장합은 정사의 행적과 비슷하다. 그런데 정사에서 장합은 뛰어난 전략가형 장수인데도 이상하게 그와 반대로 연의에서는 멧돼지처럼 창 한자루 꼬나쥐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장면이 많다.[12]관도에서는 괜찮은 모습으로 나온다. 장료와 50합을 싸우는데 양측 모두 그 솜씨에 감탄했다고 한다. 소해석을 받아들였고 여기서 한술 더 떠서 고람이 배신을 부추기고 있다.
장합과 함께 투항했던 고람은 여남 전투에서 유비를 추격하던 도중 갑툭튀한 조운의 창에 맞아 죽었다. 배신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 나관중의 성향으로 미루어 장합의 죄를 대신 씻어 주고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정사에서 고람은 관도 이후 아무런 기록도 없고 연의에서 그나마 화려하게라도 죽었으니 다행인가? 이후 유비는 세력을 잃고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한다.
장판파에서 장합은 유선을 품고 가던 조운의 앞길을 막아서는 임팩트 있는 악역을 맡아 페널티가 있는 조운을 30합을 겨뤘다.
위수 전투에서는 우금의 뒤를 이어 마초에게 도전했으나 30합 만에 도망쳤다.
한중에서 조홍이 "파서를 지키는 장수는 장비니 괜히 먼저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장합은 호기롭게 "장비 그까짓 놈이 뭐가 무섭답니까?"라며 "만일 제가 지면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고 코웃음치고 군령장을 쓰고 나갔다. 장비와의 싸움은 정사에도 있는 부분이지만, 연의에서는 온갖 심리전이 자세하게 추가되었는데, 장합은 계략으로 뇌동을 죽이기도 하지만 결국 연이어 패배한다. 힘싸움에 밀린 장합이 산채에 틀어박히자 장비가 지속적으로 싸움을 걸며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나 장합은 말려들지 않았다. 잠시 후 장비가 위군을 기고만장하게 할 요량으로 일부러 대놓고 술취한 모습을 보이자 결국 말려들어 성문을 박차고 나와 장비를 찔러 죽였지만, 그것은 알고보니 장비로 위장한 허수아비였다. 이어 영채에 숨어 있던 촉군이 튀어나오자 제대로 당했다. 이 때문에 지대로 열이 뻗친 조홍에게 두 번이나 목이 달아날 뻔 하였지만, 곽회가 편들어줘서 넘어가고 대신 가맹관을 치는 퀘스트를 맡게 된다. 여기서도 30합 만에 비긴다.
이후 가맹관을 치러 가서 굳게 지키자고 말하는 곽준의 말을 씹고 장합에게 싸움을 건 맹달을 턴다. 이에 유비가 성도에서 구원군을 자처한 황충과 황충의 추천을 받은 부장 엄안을 보내 장합과 대면시킨다. 장합은 "늙은이가 눈치없이 이런 곳에 나왔냐?!"고 비웃자 황충이 그대로 장합과 싸워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고, 게다가 이내 엄안까지 가세하였고[13] 계략으로 황충이 공격하자 연이은 패배 때문에 조홍에게는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정군산의 하후연에게 달아난다. 또 황충과도 30합을 싸운다.
그리고 하후연이 황충을 얕보자 장합은 황충을 경계해야 한다고 타일렀지만 하후연은 듣지 않았고, 결국 하후연은 황충의 도발에 넘어가 전사한다. 뒤늦게 한중을 구하러 온 조조에게 상황 악화에 책임이 있는 장합을 문책하라는 주변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조조는 오히려 장합을 변호해준다.
여담으로, 한중에서 조홍이 뇌동과 오란을 패퇴시킨 전공이 연의로 넘어오면서 장합과 조창이 나눠 가진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을 막아낸 공은 사마의가 가져간다. 가정 전투 자체는 그대로 묘사했지만, 이것이 사마의의 통솔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마의의 입장은 장안에서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고 있던 정도였다.
장합은 가장 오랫동안 전장에 몸담아온 장수들 중 한 명으로, 노익장이다. 그런데 연의에선 179년생인 사마의가 연상인 장합에게 반말을 쓴다. 밑에 설명되듯이 장합이 한복 밑에 있다가 원소 밑에 들어갈 때 사마의는 12세 어린이에 불과했다.
연의에서 북벌에 나선 공명은 장합을 보고 "옛날 장익덕이 장합과 싸워서 뭇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걸 들었는데 오늘 그 모습을 보고서야 용맹함을 알겠구나."라며 감탄했다. 공명이 "매우 용맹이 뛰어난 장수라 앞으로 촉에 커다란 근심을 끼칠 것이니 지금 미리 죽여야 한다."라며 높은 평가를 했다.
제갈량이 4차 북벌에서 사마의를 꾀어내어 죽이기 위해 목문도(木門道)에 함정을 파 놓았다. 사마의가 한사코 추격을 말렸지만, 장합은 지금이 아니면 앞으론 제갈량을 잡을 기회가 없다며 우격다짐으로 출병했다가 끔살. 이를 본 공명은 뒤이어 온 위나라 군사들에게 사마의의 성씨 안에 말 마(馬)가 있고 장합의 성씨가 노루 장(獐)과 음이 일치하는 것에 빗대서 "내 오늘 사냥을 나와 말을 잡으려고 했는데 노루를 쏘았다. 다음 사냥에는 중달이라는 희대의 짐승을 사로잡을 테니 너희는 사마의에게 가서 그리 말하라!"라고 말하는데, 이는 진짜로 장합을 무시했다기보단 위나라 군대의 사기를 꺾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장합을 제거하려는 의도도 있었고, 사마의 성격상 쉽게 추격하지 않을 걸 제갈량도 알 테니 장합을 죽인 것도 사실은 제갈량 본래의 의도일 것이다.
정사에서는 사마의가 추격을 명령하였지만, 장합이 불길하다며 추격하지 말 것을 주장하다 어쩔 수 없이 출격한 것이다. 연의에서 공명을 띄워주다보니 숙적인 사마의까지 본의 아니게 띄워주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피해를 봤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부분에서 장합이 무모하게 나오는 바람에 제갈량의 지략 역시 정사에 비해 약간 빛이 바랜 느낌이 있다. 정사에서는 사마의가 명령해서 억지로 출전한 것이라지만, 어쨌든 장합은 불길함을 예상한 상태, 즉 방비가 있는 상황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니 그냥 무방비 상태의 적을 죽인 것보다 더 대단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4. 평가
장합은 조위의 명장, 대촉전 에이스라 꼽히고 여러 전장에 참여해 조씨 정권으로부터 신임받던 장군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장합의 열전을 살펴보면 단독군세로 무언가를 이뤄낸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조조(위)군의 특징은 여러 장수들을 전장에 풀어놓고 상호간 긴밀한 협조, 공조를 통해 유기적인 전략을 펼치는 것이다. 장합의 대다수의 군공은 이것으로 인해 이루어졌다.일단 장합은 전장이든 개인적 처신이든 기회를 포착하는데 능했다. 군의 모집에 응한 뒤 한복에게 속한 이후 원소에게 속하였고 이후 조조를 스스로 선택한다. 전향한 이후 원소의 잔당을 향해 냉정하게 칼을 겨누었다는 것도 여러 기록에서 나온다. 기본적으로 장합은 뛰어난 처세술, 생존전략을 알았던 인물이고 늘 어느 소속이건 상황에 맞는 적합한 방향을 제시, 최소한 피해를 줄이면서도 적을 공격할 방책을 떠올리던 인물이었다. 정사기록에서도 진영을 잘 세워서 제갈량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한중전에서도 그가 큰 전공을 세우진 않았다. 다만 군을 안정시켰다는 것도 위군 측에서 그의 명성에 기대는 바가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장합의 명성은 전략가로서 늘 정확한 무언가를 제시하는 모습과 그것의 정확도, 판세를 읽는 능력은 짧은 정사기록에서도 놀라울 만큼 정확하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이 맞아 떨어졌다. 행적을 보면 전장을 위풍당당하게 휩쓰는 용장, 맹장이라기보다는 전략적, 전술적 식견이 뛰어난 지장에 더 가까운 인물.
장합은 조조가 사령탑으로 지휘하고 장료, 서황, 우금 등과 함께 정벌전을 맡을 때나 조씨, 하후씨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는 다른 장수들과 협공플레이를 하고 상위 군대로부터 지휘를 받을 때 더 빛을 보는 장수였다. 소위 '자잘한' 공들은 우금에 비할 만큼 많고 실패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만큼 많이 기용되었으며 서황처럼 작전수행에 능했거나 장료처럼 한 방면을 맡길 만큼 용명을 날렸다고 보긴 어렵다. 그는 단독으로 전장 지휘를 잘하고 격파에 능한 장수였다기 보단 다른 장수와 함께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늘 필요한 전술과 책략으로 어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래서 단독행동을 한다거나 상대방이 절도와 정석을 지키거나, 점거된 요충지를 공격하는 우직한 군사적인 충돌이 필요한 전장에서는 그의 장점이 돋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관도대전 당시 조조가 이끄는 병력이 빠져나간 조홍이 지키는 관도의 본진을 원소의 주력군을 이끌고 정면으로 공격해서 이기지 못한 것도 그렇고 탕거에서 장비에게 깨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 기산에서 왕평에게도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이 그것을 보여준다.
5. 기타
- 장합이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하는데, 허벅지의 대동맥이 손상되었다면 고대 의료 기술은 물론이고 현대 기준으로도 치명상이다. 현장에서 절명했을 가능성도 크다. 허벅지에 웬 급소냐고 싶은 사람이 많겠지만, 허벅지 안쪽으로 혈관이 많이 뭉쳐있는 동맥총이 존재하기에 재수없이 그 부분이 끊기면 거의 확실히 사망한다. 현대에도 그쪽 동맥은 주변이 근육과 살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수술로 다시 붙이기도 힘들다.
- 출생년도는 불명이지만 한복 밑에서부터 활동했다는 기록[14]을 보아 사망했을 때 적게 잡아도 60대는 넘겼을 것으로 보인다.[15] 일단 황건적의 난인 184년에 활동한게 아니더라도 황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군사마(장군의 보좌관 정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한복 밑에 있을 당시 완전 말단은 아니었고 최소한 젊은 위관급 장교 정도는 되는 위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191년에 원소가 기주를 꿀꺽할 당시 밑으로 들어갔다. 장합의 나이를 최대한 젊게 잡기 위해 그가 소탕한게 황건 잔당이라고 치고 원소가 기주 먹기 거의 직전에 한복을 섬기게 됐고, 원소 밑으로 들어갈 당시 20대 초반이었다고 쳐도 최소한 160년대 후반생이란 얘기가 된다. 즉 사마의랑 비교하면 최소한 열살은 많다.
- 북벌에서는 왕평과 악연을 이었다. 1차 북벌에서 마속의 삽질을 놓치지 않고 물길을 끊어 고립시켜 진을 뺀 후 쉽게 제압했지만, 왕평을 상대로는 왕평의 대응에 오히려 복병을 의심하여 전황이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주저했다. 덕분에 왕평은 패잔병을 수습하고 퇴각할 시간을 벌었다. 4차 북벌 때 다시 왕평을 공격했지만 견고한 방어를 뚫지 못하고 또 다시 왕평에게 당하고 말았다.
- 수많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용 학습만화에서는 비중이 굉장히 적다. 장비와 싸우는 건 거의 언급도 안 되고, 마속을 관광 태웠을 때에도 장합이 주도했다는 언급은 거의 안 나온다. 아무래도 유관장 삼형제나 제갈량의 비중을 크게 두는 경향이 큰 학습만화 스타일 때문인 듯하다. 그래도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건 장판파에서 조자룡을 방해하는 부분. 조자룡이 조조군을 마구 휘젓고 다니자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장합이 직접 나서서 조자룡과 싸운다. 많은 것이 축소된 장합의 능력 중에서도 무력만큼은 축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자룡 역시 여기서는 버티지 못하고 도망을 친다. 하지만 장합이 조자룡과 장판파에서 일기토를 치렀다는 것도 허구이니 사실 조자룡의 위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연출로 쓰였을 뿐이다.
- 최근 대중매체에서는 사마의를 띄워주기 위한 희생양으로 변질되는 사례들이 이따금씩 등장한다. 장합이 죽기 직전 사마의가 장합에게 촉군을 추격하는 명령을 내린 것 때문인데, 사마의의 능력에 맞지 않던 실책이었기 때문에 사실 사마의의 삽질이 아니라 정적인 장합을 제거하기 위한 술수였다는 가설을 차용하는 경우가 있다. 국내에선 웹툰 삼국전투기, 해외에선 중국의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가 있다.
- 장합은 곽회의 추천, 유비가 우두머리라고 여겼다는 기록, 제갈량이 꺼렸다는 기록에서처럼 현지 군대의 평판은 좋았던 걸로 보인다. 사마의의 판단착오로 장합이 전사한 것으로 보아, 장합의 군사적 식견은 사마의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보인다. 다만, 출신에서 밀려 조연급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장합은 이미 1차정벌 때 특진의 지위를 받아 삼공 밑이었으며[16]식읍으로 받은 호도 만총,장로등을 제외하면 많이 받았다. 능력이나 연공서열대로라면 제갈량과 위연, 왕평의 조합이 사마의보다 우세에 있었는데, 이에 맞서 대장군을 보좌할 있는 장군은 사실 장합이 적절했다. 그러나 제갈량의 4차 북벌에서 새로 이 지역에 부임한 사마의와 이전부터 이 방면을 맡고 있던 장합은 의견 충돌이 꽤 발생했고, 사마의가 장합의 말을 무시하고 작전을 강행한다든지 하는 모습을 보여서 장합과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그 후 사마의의 명을 따르다 사망해서 고의적인 명령이 주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황상의 썰에 불과하고[17] 사마의의 전략적 판단 실수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사마의팬은 사마의의 실책을 가리기 위해, 사마의의 안티는 사마의의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해석을 내리는 것 같다. 다만 정말로 장합이 사마의가 견제할 필요도 없는 하위직인것은 아니었던 게 장합은 이미 1차북벌 때 조예에게 특진(特進)의 지위를 받아 명목상 삼공의 아래인 위치였다. 호삼성도 장합의 명성이 서쪽에 널리 퍼져 있어 사마의가 신경썼을 거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 시대가 흐를수록 삼국지라는 미디어에서 가장 이미지가 바뀌는 장수이다. 과거의 장합에 대한 이미지는 장료, 관우, 조운과 같이 군을 이끌고 말을 타고 자신이 직접 선봉에 서서 전부 격퇴하는 맹장의 이미지였으나, 삼국지에 대한 분석이 계속 나올때마다 장합은 사실 저돌적인 무장이 아닌, 마속의 가정 전투에 대해 전장을 분석하고 싸우는 지장의 이미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그런 지장이 막상 기동전이나 추격전을 할때마다 자기가 앞장서서 나가다가 마지막 최후도 추격전에 저격으로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걸 보면 문무겸비로 전부 갖춘 완전체가 아니냐? 라는 식으로 나온다.
6.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장합/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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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권 「방기전(方技傳)」 | |||||||
화타 · 두기(夔)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 |||||||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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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8b><tablebgcolor=#00008b> ||
}}}}}}}}}}}} ||[1] 상존호주(上尊號奏)에 따르면 중향후(中鄕侯)이다.[2] 진서에서는 거기장군으로 나온다.[3] 상존호주(上尊號奏)의 기록[4] 기존의 평적장군이 3품이고 탕구장군은 5품이니 강등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5] 하후연 항목에도 기술되어 있듯이, 이는 장합을 중히 여기고 하후연을 업신여겼다는 설과, 아군이 기뻐하느라 풀어지지 말고 더더욱 밀어붙여야 한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한중 공방전 승리 후 황충이 사방장군으로 지위가 급상승을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후자 쪽이 좀 더 신빙성이 있다.[6] 여기서 의문스러운 점이 좌장군이었던 장합이 갑자기 2차북벌의 공으로 정서거기장군이 되기 전까지 우장군이 된다는 것이다. 사방장군은 기본적으로 동급이지만 그래도 전장군이나 좌장군이 우장군이나 후장군보단 대우가 높게 치는 법인데 갑자기 이 시점부터 장합이 우장군으로 나온다. 정사 삼국지의 오기인지, 아니면 실제 인사배치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참고로 <장합전>에선 우장군이 되었다는 기술이 없다.[7] 한관의, 통전에 따르면 특진(特進)은 한나라 때 제도로 제후의 공덕이 뛰어나고 성대하며, 조정에서 추앙할때 관위 특진을 하사해 삼공의 아래로 두었다. 양한과 위, 진에선 가관(加官)으로 삼았다. 하급관리는 없었고 예문유취에 따르면 관품이 2로 황후의 부친이 대체로 이 관위였다고 한다.[8] 혹은 '제갈량의 장수 마속과 가정에서 맞붙었다.' 해당 문장에 번역된 한자인 '拒'에는 '막다' 외에 '맞서다, 대치하다, 상대하다, 대항하다, 겨루다'의 뜻이 있다. 항거(抗拒), 거역(拒逆), 상거(相拒, 서로 대치하다, 서로 겨루다)등의 단어에 이런 뜻이 있다.[9] 약양성이라고도 불리는 가천정성으로 하후연도 장합과 함께 여기에 주둔하여 한수를 공격한 적이 있었다.[10] 각자 위치를 잃지 않고 북을 울리며 평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 장합이 복병을 우려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훗날 4차 북벌 때도 제갈량과 사마의의 본대와 싸울 때 장합이 별동대로 왕평을 급습하나 왕평이 이를 막아내는 등 장합의 천적스러운 모습을 보였다.[11] 이를 보아 제갈량이 형 제갈근에게 언급했던 진창성 공성전의 진짜 목표인 형주의 위군압박을 해소시킨다는 목적을 장합은 간파했었던 듯 싶다. 장합의 통찰력을 볼 수 있는 일화라고 할 것이다.[12] 이건 연의 스타일을 보면 어쩔 수 없는게 연의에서는 주유 같은 소수 장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장수들이 책사와 무장으로 나뉘며, 무장형은 무력이 주로 강조된다. 즉, '뛰어난 무장'임을 어필하려면 단기접전으로 무력을 뽐내는 장면은 거의 필수다. 애초에 흥미위주 소설이라 많은 전투를 무장들 사이 맞짱, 혹은 신묘한 계책으로 결정나는 것으로 각색했기 때문.[13] 이희재 삼국지 만화에서는 장합이 늙은이를 보냈다며 비웃자 황충이 "내 몸은 늙었지만 내 칼은 천둥벼락이니라!"라며 합을 날리는데 이에 장합이 노인네에게 이런 힘이 있냐면서 속으로 크게 당황한다. 이후 엄안이 달려오면서 "장합아, 여기도 노인네가 계시니라!"라고 외쳐 주고, 결국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한 장합은 후퇴한다.[14] 장합의 활동연대를 황건적의 난 때부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황건적은 장각 삼형제가 죽고 나서도 각지에 잔당이 오랜 시간 많이 남아 있었고, 난 당시에 한복이 황건적을 토벌하고 다녔는지는 알 수 없다. 장합이 기주 출신임을 생각하면 한복이 기주목으로 임명되었을 당시에 등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5] 사마의가 179년생으로 당시 50대 초반에 불과했기 때문에 장합이 최소한 열살은 위다. 사마의가 지휘관으로 장합에게 명령하는 위치였던 것 때문인지 연의같은 작품에선 사마의가 하대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사마의 본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일한데다 고위직 장군인 장합에게 편하게 대했을 리는 없다. 사마의와 거의 또래인 제갈량이 자신보다 최소 열살 이상 많은 조운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과 비슷한 구도.(물론 제갈량/조운은 공식 직위 자체도 제갈량이 명확히 높단 차이가 있다).[16] 가관(可官)되는 의동삼사(儀同三司)나 특진과 같은 명예직은 상위 관직의 의장(儀仗)을 사용할 수 있으며. 특진의 경우는 비단 50필 등과 같은 보너스가 주어졌다. '거기장군 의동삼사'면 삼공이랑 "야자타임" 할 수도 있는 거고, '좌장군 특진' 이면 대략 조정 대신인 구경이나 다름없는 것인데 장합은 우장군 시절에 특진을 받았고 이 시점에선 정서거기장군이라는 뭔가 애매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17] 촉군의 유시에 무릎에 맞아 죽었다는 진수의 간략한 서술이 이런 오해를 부른 듯 싶다. 삼국지 주해에는 유시에 무릎에 맞아 어떻게 사망하냐는 의문을 표한 주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