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1 20:36:30

양수(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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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修/楊脩
(175 ~ 219)
1. 개요2. 정사 삼국지3. 세설신어의 일화4. 숙청 원인5. 삼국지연의6. 기타7. 기타 창작물

1. 개요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며 는 덕조(德祖). 후한 말기의 중신인 양표의 아들로, 어머니는 원술의 누이인 양태위부인 원씨다. 사례 홍농군 화음현 출신. 오늘날에는 계륵의 당사자로 유명하다.

2. 정사 삼국지

어린 나이부터 주부 벼슬을 지냈다. 아는 게 많고 언변이 능한 데다가 재주도 있고 생각하는 것도 민첩해 남이 떠올린 것을 알아채고서 한 발 먼저 처리해 주는 일이 잦았다. 당대에 똑똑하다고 유명했던 공융, 예형과 교류하였다.

219년 가을에 조조에게 트집을 잡혀 낙양에서 처형되었다. 향년 44세. 아들로 양효가 있었으며, 손자는 양준[1]이다. 양준은 서진 때에 고관이 되었고 그렇게 양수의 직계 자손은 동진 말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안제의 치세였던 의희 4년(408년), 양준의 증손자였던 양사평[2]이 처형된 이후에는 자손들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3. 세설신어의 일화

재능에 관한 일화가 세설신어에 많이 실려있다. 세설신어는 어디까지나 그 시절의 가십 모음집이므로 이 일화들이 실제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위진남북조 시대에 양수가 똑똑하다고 알려져 있었다는 것 정도를 알 수 있다.
  • 조조가 화원을 하나 꾸미라고 명령하였다. 얼마 후 화원이 완성되자 조조가 화원을 구경하러 갔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별로 좋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화원 문에 活(살 활)자만을 쓴 채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조조가 그걸 왜 써 놓았는지 아무도 이해를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양수가 지나가다 끼어들어서는 "門(문)에다 活(활)자를 써 놓았으니 이것은 곧, 闊(넓을 활)자. 승상께선 화원이 너무 넓직하니 휑해 보여서 맘에 드시지 않은 것이오"라 말하여 사람들이 화원의 폭을 좀 더 촘촘하게 좁히고 아담하게 개조한다. 수일 뒤 조조가 다시와서 알맞게 되었다고 만족하고는 어떻게 뜻을 알았냐고 묻자 사람들이 양수가 지나가다 말해주었다고 대답하였다. 조조는 그 말을 듣고 정원사들이 고민할 몫을 양수가 채갔다는 생각을 해 조금 언짢다는 말을 한다.
  • 양수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일처리를 잘해 항상 빨리 끝내고 놀러 다녔다. 양수가 하도 많이 자리를 비우자 하인들은 "그럼 조 승상이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양수는 쪽지 3개를 주며 "승상이 오셔서 공문 처리에 대해 물으면 첫 번째로 이걸 주고, 두 번째로 이걸 주고, 세 번째로 이걸 줘라"하며 놀러 나갔다. 후에 조조가 와서 이에 대한 질문들을 했는데 과연 양수가 준 종이에는 조조의 질문들이 그대로 적혀있었고 하인들은 양수가 적어놓은 답을 조조에게 말해주어 일에 지장이 없었다.
  • 조조가 원소를 징벌하러 떠났을 때 행장을 모두 갖추어 보니 죽편 수십 곡이 남았다. 조조는 필요 없으니 다 태워 버리려 했지만 뭔가 아까워 고민하다 이 죽편으로 방패를 만들 생각을 하였다 조조는 신하들에게 "이 죽편들 어떻게 할까?"라고 물었는데 양수가 "방패로 쓰면 딱이겠네요"라 답하였다. 조조는 흡족해했다.
  • 어느 날, 새북에서 조조에게 수(酥)[3]가 올라왔다. 조조는 수를 한 입 먹고 슬쩍 장난기가 들어 합 위에다가 일합수(一合酥)라는 글자를 써 놓고 책상 머리에 놓아두었다. 그런데 양수는 그걸 보더니 숟가락을 가져와 관리들과 함께 퍼먹으니[4] 조조가 짐짓 노한 척 양수에게 "왜 먹었느냐?" 라고 꾸짖으니 양수는 "합 위에 한 사람이 한 입씩 먹는 수(一人一口)[5]라 써 있으니 어찌 승상의 뜻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조조는 웃어젖히고는 물러갔다. 삼국 드라마에서는 마등이 보낸 과자[6]로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선 양수의 대답을 들은 직후 들어온 순욱에게도 조조가 하나 준다. 과자를 넙죽 받아먹은 순욱에게 조조가 마등이 보낸 것이라 말하자 순욱이 독이 들은 것은 아닌가 하고 깜짝 놀란다. 그러자 조조가 웃으면서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먹여봤다고 말하는데, 퀴즈도 내고 독이 있는지도 확인하는 조조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 조조가 아들 조비와 조식의 재간을 시험해 보려고 두 아들을 밖으로 내보낸 다음 업(鄴)의 궁궐을 지나가라고 시켰다. 그리고 궁궐의 문지기에게 그 누구도 성문 밖으로 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아들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밖으로 나와 조조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조비는 궁궐을 통과하려다 문지기가 막자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7] 이 말을 들은 조식은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 짐작해 양수에게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자 양수는 "왕자께서 왕명을 받들고 나가려는데 기어이 막으려는 자가 있으면 베어버리셔도 됩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같은 명령을 받아 조식이 궁궐을 통과하려고 할 때, 문지기가 막자 "나는 위왕의 명령을 받듣고 지나가는데, 어느 놈이 감히 내 앞길을 막는단 말이냐?"라고 말하고 문지기를 베었다. 조조는 조식의 재간이 놀라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였느냐고 묻자, 조식은 "그것은 양수가 가르쳐 주었사옵니다." 하고 말했다. 조조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양수를 멀리하게 되었다.
  • 조조는 남이 자기를 암암리에 모해할까 두려워 항상 좌우에게 이런 거짓말을 하였다. '내가 꿈속에서 사람을 잘 죽이니 내가 잠이 들었을 때는 행여 너희들은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그리고 나서 어느 날 그가 장중에서 낮잠을 자다가 일부러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이걸 본 근시가 조조를 부축해 세우려 하니, 조조는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뛰어 일어나 칼을 뽑아서 그를 베고 다시 와상 위로 올라가 자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일어나서는 짐짓 놀라며 물었다. "누가 내 근시를 죽였단 말이냐?" 여러 사람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조조가 통곡하여 후하게 장사를 지내 주게하니, 사람들은 모두 조조가 정말로 꿈속에서 사람 죽이는 버릇이 있는 줄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독 양수는 조조의 그 숨은 뜻을 알고 있어서 그 사람을 장사지낼 때 죽은 내시의 시체를 손으로 가리키며, "가엾구나! 승상이 꿈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대가 꿈꾸고 있었던 것이네!"라고 한탄하니, 이 말을 듣고 조조는 더욱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 양수는 조비와 조식 간의 후계자 다툼에서 조식 편을 들었는데, 조비를 위해 계책을 잘 내는 오질이라는 자가 비단을 나르는 바구니 속에 몸을 숨겨 대궐 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양수는 즉각 조조에게 "왕자님(조비)께서 조가장 오질을 대궐 안으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라고 일러바쳤고, 조조가 그 사실을 확인하려 하자 조비가 불안해했다. 이에 오질에게 대응책을 묻자 그는 간단하게 "다음엔 진짜로 비단만 들여오면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가 시킨 대로 하자 조조의 신하가 확인해 보니 정말 비단만 들어 있었다. 이에 조조는 양수가 조비를 모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조조는 조식을 총애했는데 조비와 조식 모두를 자주 방문하였다. 양수는 도움이 되기 위해 조식에게 조조가 물어볼 10개 모범 답안을 만들어 주었고 조조가 질문하자 조식은 그 답을 그대로 읊어 총애를 얻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것도 양수가 한 짓임이 드러났다. 조조는 양수를 미워하였다.
  • 조조가 조아비(曹娥碑)[8]에 적힌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 外孫虀臼)'라는 채옹의 글귀를 보았을 때[9] 조조가 그 뜻을 몰라 주위 책사들에게 그 뜻을 묻는데, 책사들이 양수가 그 뜻을 안다고 하니 지금까지 양수에게 계속 당했던 조조는 자신이 좀 더 생각해보겠다고 하고는 삼 마장(30리)을 간 뒤에야 그 뜻을 알아내고는 양수에게 먼저 해석한 바를 말하게 한다. 양수가 답하길 "황견(黃絹)이란 누런 누에고치 옷감을 뜻하는 것이니 곧 색실(絲色)을 뜻하니, 두자를 합치면 절(絶)이 되고, 유부(幼婦)는 어린 소녀를 뜻하니, 어린 소녀(幼婦) 곧 젊은 여인(少女)이니, 두 자를 합치면 묘(妙)가 됩니다. 외손(外孫)은 딸의 자식으로 딸은 여(女), 아들은 자(子)니, 두 자를 합치면 호(好)가 되고, 제구(虀臼)는 다섯 가지 맛의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이는 매운 것(辛)을 담는 것이니(受), 두자를 합치면 사(辭)[10]가 되므로 모두 조합하니 절묘호사 '아주 훌륭한 문장'(絶妙好辭)이 되지요." 라고 하니 조조는 웃으며 "나의 생각과 똑같구나."라 말했다. 어림에 따르면 세간에서 "지혜 있는 사람과 지혜 없는 사람의 차이는 30리다."라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11]

4. 숙청 원인

조식이 양수의 말대로 그대로 했다. 이 때문에 양수는 제후[12]들과 밀통한다는 [交搆] 이유 때문에 처형되었다.
- 삼국지 위서 진사왕식전 - [13]
이런 일이 세 번정도 있자, 조조는 그 대답이 신속함이 기이하다고 여겨서 그 내막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 내막을 알게 된 조조는 더더욱 양수를 꺼리게 되었다.
게다가 양수가 원술의 생질[14]이기도 했는데, 조조는 그 후환을 두려워하여, 곧 이일로 인해 양수를 죽였다.
- 후한서 양표열전 - [15]
양수가 임치후(臨淄侯) 조식(曹植)과 같이 술이 취하도록 마시고, 사마문[16]을 마음대로 출입하고, 안릉후(鄢陵侯) 조창을 헐뜯었다 [謗訕]는 것을 고자질하는 자가 있었다. 조조가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노하며, 곧 양수를 붙잡아 죽였다. 그때 양수의 나이 45세였다.
- 속한서 -
조조의 의중을 읽어내거나 똑똑한 게 양수만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양수와 달리 적정한 선에서 모른 체 하거나 간접적으로 전달, 혹은 조조가 스스로 말하도록 밑밥을 깔아주는 등 처신을 잘했다. 곽가의 경우엔 자기 계책을 택하지 않는다고 조조 앞에서 침을 뱉는 파격적인 행동을 할 정도로 성격이 개차반이었지만, 그 행동은 양수처럼 잘난 척이나 가식을 떨지 않고 대놓고 보여준 것인데다 그만큼 필요해서 그런 것이었으며 조조도 이를 잘 알기에 꺼리지 않았다. 즉, 차라리 면전에다 욕을 했으면 했지 양수처럼 신경을 살살 긁어서 마치 언제든 뒤에서 뒷담화를 할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주진 않은 것이다. 또, 후계자 문제같은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적도 없다.

연의에서는 거의 이러한 면모 때문만으로 죽고, 죽인 후 조조가 후회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후계자 권력 구도에 따른 숙청이 어느 정도 기반에 깔려 있다.

일단 온전히 창작일 것만 같은 계륵은 정사 삼국지 배송지의 주석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만 계륵 때문에 바로 죽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과 다르게 양수의 죽음은 조금 나중에 이루어진다.

재수없이 나대다 죽은 것으로 묘사되는 연의와 다르게 사실 양수의 죽음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조조의 후계자 문제"였다. 양수는 자신의 주군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조조의 후계자 문제에 개입했고, 거기다 패배한 쪽인 조식의 편을 들었기에 그런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계륵 사건 때 살았다고 해도 다음 황제인 조비가 죽였을 가능성도 있다. 비슷하게 조식의 라인이었던 정의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생각해본다면, 차라리 양수는 이 무렵에 죽었기 때문에 가문이라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조조의 숙청 자체도 유비와의 대결에서 패배해 정치적 안정성이 위태해지자, 말년에 급하게 정해 매우 불안정한 후계자 조비를 위한 것이었다. 한때는 조조 본인이 후계자들을 경쟁시키고는 하였으나, 후계자가 온전히 정해진 데다가 그를 키워줄 만한 시간도 느긋하지 않은 상황에서, 후계자 결정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재수없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조식의 오른팔은 개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조조 자신의 사후 미래 계획에 걸림돌로 보였을 것이다. 만일 조식이 선택받았다면 양수 개인이 혐오스럽더라도 미래 후계자를 위해 재수는 없지만 능력은 있는 든든한 오른팔을 용납하였을 것이다. 후계자 조비 일파였던 사마의는 차후 조비의 치하에서 중신으로 성장해 그를 지탱한 것처럼 양수 또한 황제 조식을 위해 그리하였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조비가 후계자인 상황에서 조식을 열렬히 지지하는 좋은 가문 출신의 능력있는 오른팔의 존재는 상황이 정 반대다. 자식인 조식을 죽일 수는 없으니 적어도 그의 수족을 잘라낼 필요는 있었던 것.

즉 조조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후계자 문제에 자꾸 개입하는 양수가 거슬렸을 것이고 거기다가 밀려난 쪽의 지지자였으니 양수는 그 시점에서 언제든 목숨이 날아갈 위기에 놓였다.이런 상황에서 계륵 사건은 조조에게 양수를 숙청할 확실한 명분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양수는 꾸준히 자신의 명을 재촉한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

5. 삼국지연의

한술 더 떠서, 조조에게 무례하게 대한 장송과 서로 통하는 모습을 보인다. 양수는 조조의 비범함을 보여주기 위해 조조가 쓴 병법서 맹덕신서를 보여주지만, 장송은 코웃음을 치며 그 자리에서 다 외워버렸고 놀라서 조조한테 가서 장송이 맹덕신서를 한 번에 읽고 다 외웠다고 얘기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맹덕신서가 옛날 책과 비슷하다고 장송이 말했다는 것까지 쓸데없이 말해버려서 조조는 오히려 성이 나서 책을 불태워버린다.

국내의 일부 연의 판본에선 양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제갈량이 접한 뒤 "양수는 분명 남보다 빼어났다. 하지만 남보다 잘 아는 것을 입 안에 삼키고 있기란 더욱 어렵다. 양수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입을 열지도 않았을 것이고,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평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정사와는 달리 조조가 계륵 사건 당시 곧바로 처형한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대충 보다보면 계륵 사건 당시 갑툭튀해서 조조 심기 한 번 거스른 죄로 목이 날아간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6. 기타

  • 연로한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해 불효했는데, 실제 조조의 경우 양수의 목을 날려버리긴 했지만 조정의 대원로인 양표를 마냥 무시할 수 없기에 선물이니 뭐니 잔뜩 보내며[17] '이러저러해서 양수를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죄드립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자식을 보낸 아버지의 마음이 그걸로 수습될 린 없어서, 이후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양표에게 조조가 괜찮으냐 말을 건네니, "선견지명이 없어 자식을 잘 가르치지 못해 죄를 짓게 했습니다. 아들이 죽고 나니 늙은 어미 소가 어린 송아지를 핥아주는 마음처럼 어버이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지닌 슬픔에 핼쑥해졌습니다." 하고 말하자 조조는 양수를 죽인 것을 후회했다고 하며[18] 이것이 선견지명노우지독이라는 고사의 유래다.
  • 연의에 나오지 않지만 가문인 홍농 양씨도 원씨네와 맞먹는 명문가이다. 선조가 전한의 개국공신인 양희[19]로부터 4세손 양창은 전한의 승상, 8세손 양진은 사도, 태위를 역임했고 양진의 아들 양사는 사공, 태위를 지낼 정도로 명문가였다. 양표는 양사의 아들이고 양수는 양사의 손자다. 당대에 이에 비견될 명문가로는 원소, 원술의 여남 원씨나 순욱, 순유의 영천 순씨 정도.[20] 사마염의 첫 번째 황후 양염 두 번째 황후 양지도 홍농 양씨. 이 후로도 홍농 양씨는 문벌귀족으로서 수많은 관리를 배출하면서 입지를 유지했고 수나라를 세운 수문제는 양진의 후손임을 자처했고, 당나라 때의 양귀비북송의 양가장도 홍농 양씨다.
  • 조식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조비가 양수를 미워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양수를 좋게 생각했을 확률도 있다. 양수전 배송지의 주석에 따르면 양수는 태자이던 조비에게 검을 선물했는데 이후 조비는 항상 그 검을 차고 다녔다. 조비가 왕이 된 후 출궁을 하다가 갑자기 양수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칼을 휘두르며 수레를 멈추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것이 양덕조가 예전에 말했던 왕모(王髦)의 검이다. 왕모는 지금 어디 살고 있는가?" 검을 만든 왕모를 불러서 곡식과 비단을 하사했다. 다만 조비는 유비가 보낸 조조의 조문 사절을 죽였지만 선물은 낼름 하고 촉의 비단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것을 보면 물건이 맘에 들면 그걸 준 상대가 누구인지는 신경 안 썼을 수도 있다.

7.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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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진 혜제 사마충의 황후 가남풍에게 멸족된 양준와는 한국 한자음에 한해 동명이인이다.[2] 형으로 양전기가 있었다.[3] 양젖으로 만들었다는 음료. 현재는 연유 수, 소라고 쓰인다.[4] 혹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나누어줬다.[5] 一合을 세로로 써서 읽어보자. 합(合)이 풀어져서 일인일구( 一人一口), 즉 '한 사람당 한 입씩'이라고 볼수도 있게된다[6] 수라는 것은 유제품 일체, 술, 동물성 유지, 유제품이나 술이 들어간 과자, 빵을 모두 총칭한다. 현재 중국인에게 수라고 말하면 퍼프 페이스트리 류의 층이 있는 바삭하고 퍽퍽한 과자를 떠올리는데, 실제로 섬서 일대에서 이 고사에서 유래한 '일합수'라는 물건이 판매되고 있는데 과자다. 대만에서 유명한 파인애플 과자 펑리수를 鳳梨酥라고 쓴다.[7] 사극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조비가 문지기를 죽이지 않는 결정을 함으로써 순욱을 비롯한 대신들과 병사들의 인심을 얻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 조식은 조조로부터 칭찬을 듣고 상을 받기는 했으나 정작 장인인 최염조차 조비를 지지하게 만들었다.[8] 효녀 조아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9] 삼국지 연의에서는 오랑캐로부터 채옹의 딸 채염을 구출한 자가 바로 자신 조조였기에 한중 원정을 가는 길에 채염이 거주하던 남전을 들렀는데 그때 그곳 벽에 걸린 조아비를 보는 것으로 나온다.[10] 辤는 辭(말씀 사)의 이체자이다.[11]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 1부 5화 ~ 6화에서 이 장면이 그대로 재현된다.[12] 조조의 아들이다.[13] 조비와 조식의 후계자 경쟁에 양수가 관여한 내용 후에 이어진다.[14] 누이의 아들이다.[15] 조조의 의중을 미리 알아채는 이야기들 이 후에 이어진다.[16] 司馬門: 궁궐의 정문: 수레를 타고 들어오면 안되고 걸어서 들어와야 한다고 한다는 것이다.[17] 속담조에 따르면 조조는 비단 갑옷 2벌, 여덟 마디가 은으로 장식된 복숭아나무 지팡이 1개, 관부의 명주 비단 500필, 60만 전, 사면에 투명한 휘장을 칠한 칠향거 1대, 푸른 소 2마리, 하루 8백 리를 달리는 화류마 1필 무장한 도금 안장과 고삐 10개 영포 1구, 시위 2명을 보내며 양태위부인 원씨에게도 무늬넣은 주름비단 갖옷 1벌, 직성화 1켤래, 늘 좌우에서 시위한 시녀 2명을 보낸다고 하였다. 이어 조조의 부인 변부인도 양태위부인 원씨에게 의복 1농, 무늬 명주비단 100필, 방자현 관부의 비단 100근, 사사로이 타고 다닐 향거 1대와 소 1마리를 보낸다고 하였다.[18] 가식으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조조는 가끔씩 감정적이 되는 경우가 있어서,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양표를 보고 진짜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조조 본인도 먼저 떠나보낸 아들이 있으니...[19] 해하전투 이후 항우가 추격해 온 옛 부하 여마동을 보고 자결하자 여마동, 왕예, 양무, 여승과 함께 항우의 시신을 얻어 공신이 되었다. 고조공신열후 서열103위[20] 영천 순씨는 기껏해야 순신군과 팔룡이라 일컬어지는 그 아들들 대부터 명성을 떨쳤고 가문에서 역임한 최고 관직도 이천석의 지방 태수급에 삼공은 커녕 구경도 없었다. 당고의 금으로 인해 당인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었으나 기실 비슷한 수준의 명망을 지닌 가문은 여럿 있었다. 반면 홍농 양씨는 종친들까지 포함해도 한나라 전체에서 몇손가락 안에 드는 문벌이었고 그들을 거주나 장리로 모시는 관리들이 천하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당장 환관들과 상부상조하며 세력을 펼친 원씨정도를 제외하면 홍농 양씨보다 확실하게 우월한 가문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