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7:09

양준(서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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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駿
? ~ 291년
1. 개요2. 생애

1. 개요

중국 서진의 권신이며 는 문장(文長)으로 세조 무황제 사마염의 부인인 무도황후 양지의 아버지이자 양병의 동생, 양요, 양제의 형, 양수와는 친척이다. 사례 홍농군 화음현 출신.

2. 생애

어려서부터 왕관의 신분으로 고릉령, 효기사마, 진군사마 등을 지냈으며, 진군장군을 지내다가 276년에 딸인 양지가 황후가 되면서 거기장군으로 임명되고 임진후에 책봉되었다. 양준은 교만해져서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해 호분의 비판을 받았으며, 저략, 곽혁 등이 표를 올려 양준이 그릇이 작아 사직의 중임을 맡을 수 없다고 했지만 무제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후 동생인 양요, 양제와 함께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그 권력이 대단해 당시 '삼양'(三楊)이라 불릴 정도였으며, 289년에 황실의 명망있는 큰어른이었던 여남왕 사마량을 꺼려 조정에서 쫓아냈다. 290년, 사마염이 중서감에 명령해 조서를 작성시켜 사마량과 함께 보정하게 하자 조서를 빌렸다가 이를 감췄다. 무도황후가 양준에게 보정하도록 하면서 4월 12일에 태위, 태자태부, 도독중외제군사, 시중, 녹상서사로 임명되어 전권을 장악했다.

사위인 무제가 죽자 양준이 태극전에서 살면서 호분무사 100여 명에게 자신을 호위하게 했으며, 어떤 사람이 사마량이 병사를 일으켜 자신을 토벌할 것이라고 고발하자 이를 딸인 무도황후에게 얘기하면서 석감과 생질인 장소를 시켜 사마량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동생 양제와 하남윤 이빈 등이 사마량을 경사에 머무르게 해야 하고, 종실과 외척이 서로 믿어야 편안해진다고 조언했지만 이를 무시했으며, 스스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조위 명제 조예가 즉위했던 때에 의거해 모든 관원의 봉작을 높여 환심을 사려고 했다.

모든 신하들을 1등급, 상사에 참여한 사람은 2등급, 2,000석 이상의 관리들에게는 모두 관중후에 책봉해 세금인 조조를 1년간 면제했으며, 이에 산기상시 석숭, 산기시랑 하반 등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무시했다. 또한 태부, 대도독, 가황월, 녹조정을 맡아 백관들이 모두 알아서 그에게 보고할 정도였고, 부함이 황제가 상을 당한 후에 갖는 복상 기간인 양암을 시행하도록 주장했지만 이를 무시했으며, 부함이 자주 간언하자 군수로 내쫓으려다가 이빈의 반대로 중지했다.

황후 가남풍을 꺼리면서 그녀의 생질인 단광을 산기상시로 삼았으며, 자신의 생질인 장소를 중호군으로 삼았다. 양준이 정사를 처리했지만 괴팍하게만 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싫어했으며, 손초가 양준에게 공명정대하고 순리대로 처리해야 한다면서 사마씨 종실이 강성한데도 그들과 논의하지 않으니 화가 이르는 것이 얼마 안 남았다고 충고했지만 이를 무시했다.

흉노의 동부 지역에 사는 왕창을 등용하려고 했지만 그는 도망갔으며, 291년맹관, 이조 등이 모반했다고 무고하자 관직을 철폐해 후작의 지위만을 가지고 집에 가 있도록 했다. 동안왕 사마요 등이 양준을 토벌하려고 할 때 양준은 조상의 집에 살면서 궁궐 안에 변고가 일어난 것을 알고 많은 관리를 불러 이를 논의했으며, 태부주부 주진이 운룡문에 불을 질러 그들을 위협하고 이 일을 만든 사람을 색출하면서 만춘문을 열고 동궁과 밖에 있는 병영의 군사를 이끌고 황태자를 옹호해 궁궐로 들어가서 반대파들의 목을 베어서 보내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양준은 평소에 겁이 많고 나약해 결정을 짓지 못하다가 운룡문은 조예가 만든 것이고 그 노력과 비용이 아주 많이 든 것인데 어찌 그것에 불을 지르냐면서 반대했다.[1] 결국 궁중의 군사들의 공격을 받아 집이 불에 타면서 마구간으로 도망가다가 잡혀 죽었고 멸족되었다. 이전에 선비 손등을 부르기 위해 이불을 보냈지만 손등이 문에서 이불을 절단하면서 베고 베고 찌르고 찌른다고 소리쳐 말했고 10일 만에 병을 핑계로 죽은 척 했다. 양준이 권좌에서 쫓겨날 것을 예상한 것이었다.

그가 죽자 감히 시체를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오직 염찬만이 시신을 수습해 그를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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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준의 발언 이후 주변 인물들은 황제의 안위가 걱정된다며 뿔뿔이 흩어졌고 양준을 도우려고 병력을 동원한 유예는 가남풍의 사촌오빠 배위의 말에 속아 스스로 병력을 해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