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67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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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1. 개요
전연(前燕)의 명장[1] 겸 명재상.전연의 제1대 황제인 태조 문명제 모용황의 4남이자 제2대 황제인 열조 경소제 모용준의 동생이었다. 창려군(昌黎郡) 극성현(棘城縣) 출신이었으며, 자는 현공(玄恭)이었다.
5호 16국시대 초기 제일의 인물로까지 평가받는다.
2. 생애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 어릴 때부터 형 모용준과 함께 부친인 모용황의 원정에 참여했다. 갈족 석씨의 후조(後趙)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요동 정벌에 나서 예맥계 부여와 고구려의 군사를 물리쳤다. 그 뒤 중산(中山)을 공격해 한족 왕조인 염위(冉魏)의 황제 염민(冉閔)을 생포했다. 모용각은 염민의 군사는 가볍고 빠르며 병력이 적은 까닭에 결사적으로 대항할 것이라 예상하고 겹겹이 포위한 채 지치기를 기다린 후 결국 그들을 몰살한다. 이후 단부선비를 멸망시키고, 하남(河南)을 침공한 뒤 여호(呂護)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했다. 그 뒤 구도 낙양을 차지하여 하북과 하남 모두를 평정하고, 전연을 중원으로 이끌었다.348년 부황 모용황(慕容皝)이 붕어하고, 맏형인 모용준(慕容儁)이 제위에 오르자 태원왕(太原王)으로 봉해졌으며, 360년에 열조 경소제 모용준이 붕어하자, 황제가 되기를 거부하고 모용준의 아들이자 본인의 조카인 모용위(慕容暐)를 옹립하고 보필했다. 이후 자신을 모함한 모여근이 주살당하자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 국정을 주도했으며, 임종 직전인 367년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세상을 떠났다.
모용각이 고평가를 받는 이유는 충분히 제위를 찬탈할 기회와 힘이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어린 조카인 모용위를 보필하여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당장 그가 상대했던 동진(東晉)의 명장이자 권신이었던 환온(桓溫)이나 전진(前秦)의 황제 부견(苻堅)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실력만 있으면 황제를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키는게 우스운 시대에 모용각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환온과 부견은 위진남북조시대의 내로라하는 명장들로 모용각은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하며 훌륭하게 나라를 지켜냈다. 결국, 그가 죽고 나서야 부견이 한족 출신인 왕맹(王猛)을 앞세워 370년에 전연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3. 평가
若王猛之治國,苻堅之管仲也;慕容玄恭之輔少主,慕容暐之霍光也;劉裕之平逆亂,司馬德宗之曹操也。
왕맹이 나라를 다스린 것은 부견의 관중이라 할 수 있다. 모용현공이 어린 주군을 보좌한 것은 모용위의 곽광이라 할 수 있다. 유유가 역란을 평정한 것은 사마덕종의 조조라 할 수 있다.
《위서》권35 <최호 열전>
왕맹이 나라를 다스린 것은 부견의 관중이라 할 수 있다. 모용현공이 어린 주군을 보좌한 것은 모용위의 곽광이라 할 수 있다. 유유가 역란을 평정한 것은 사마덕종의 조조라 할 수 있다.
《위서》권35 <최호 열전>
4. 여담
[1] 사서에 기록된 몇 안 되는 무패의 명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