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05 00:03:39

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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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없음
시호 여왕(厲王)[1]
연호 수광(壽光, 355년 ~ 357년)
부(苻)
생(生)
생몰 기간 335년 ~ 357년
재위 기간 355년 ~ 357년

1. 개요2. 생애3. 재위4. 평가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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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의 제2대 황제. 본성은 포씨(蒲氏)였으나, 조부인 부홍(苻洪) 때에 유행했던 예언서의 내용에 따라 부씨(苻氏)성으로 바꾸었다. 경명제(景明帝) 부건의 아들로 생모는 명덕황후(明德皇后)이다.

2. 생애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매우 작은 짝눈이었는데, 이를 불길하게 여긴 조부 부홍에게 멸시당했고 부홍이 외눈박이 아이는 한쪽 눈으로 눈물을 흘린다는데 믿어도 되겠냐고 말하자 화가 나서 패도를 끄집어내어 스스로 찔러 피를 내면서 이것도 한 줄기 눈물이라 했다. 부홍이 크게 놀라 회초리로 때리자 성격상 칼이나 창은 참겠지만 회초리로 맞는 것은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부홍이 부생이 패역하여 없애지 않으면 집안을 파괴할 것이라면서 부건에게 부생을 죽이라 했으나 숙부 부웅(符雄)의 만류로 부생은 목슴을 구했다. 그 외에 부생은 힘이 장사였으며 무예, 기마술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351년 아버지 부건이 전진을 건국한 후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다.

351년, 동진환온이 전진을 공격해오자 부생은 형 부장(苻萇), 숙부인 부웅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환온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웠다. 전쟁 중 태자인 부장이 전사하자 부건은 355년, 부생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해 아버지 부건이 병이 들었을 때 부청(苻菁)이 부생을 죽이고 황제가 되려 하였으나 모반은 실패하였다. 그리고 7월 10일 아버지 부건이 사망하자 황제로 즉위했다.

3. 재위

하지만 부생은 늘 술에 취해 정사를 다스리지 않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폭정을 일삼았으며, 애꾸눈이었기에 나머지, 모자람, 치우침, 한 짝, 적음, 없음, 갖추지 못함 같은 말을 꺼려 잘못해 이런 말을 했다가 죽은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첩이나 후궁들이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하면 즉시 죽이고 그 시체를 위수에 던졌고, 동물학대하는 악취미도 있어 산 채로 가죽을 벗긴 소, 양 등의 가축들 수십 마리를 한꺼번에 끓는 물에 넣고 죽어가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2]

즉위하자마자 해가 바뀌기 전에 연호를 바꾸면 안 된다고 상소를 올린 우복야 단순을 죽였다. 중서감 호문과 중서령 왕어가 천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덕행을 쌓으라고 경고했지만, 부생은 황후 때문에 천체가 불안정한 것이라며 이를 핑계로 양황후와 그녀의 친족들을 처형했다. 356년에 조소, 동영 등의 간신들의 참소를 믿고 부건이 죽기 직전 친히 뒤를 부탁했던 승상 뇌약아, 사공 왕타, 낙주자사 두욱 등의 보정대신들을 죽였다. 이때 뇌약아는 남안에 거주하던 강족들의 수장이었으므로 부생이 그를 죽이자 남안 강족들은 전진에 등을 돌렸다. 부생은 또 연회를 베풀기 좋아하였는데 함양 고성에서 연회를 베풀 때 지각한 신하들은 모조리 처형하는가 하면, 태극전에서 억지로 사람들에게 술을 먹이지 않아 앉아만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활을 들어 상서령 신뢰를 쏴죽이기도 했다.

356년 3월, 삼보(장안 주위 수도권)의 백성들을 이용해 다리를 만들게 했다가 이를 간언한 금자광록대부 정굉을 죽였으며, 4월에 장안에서 재해가 일어났을 때 이에 대해 간언하는 좌광록대부 강평을 죽였다. 또한 대추를 많이 먹고 병이 났다가 태의령 정연이 진찰해 다른 질병은 없고 대추를 너무 많이 먹었을 뿐이라 하자 성인도 아니면서 자신이 대추 먹은 것을 어찌 아냐면서 죽였다.

357년에 요양이 관중에서 뇌약아의 처형으로 분노해 있던 강족들을 규합해 이들을 이끌고 전진을 공격해오자 광평왕 부황미(苻黃眉)를 보내 막게 하였다. 부황미는 격장법(激將法)[3]으로 대승을 거두었고, 요양을 죽인 뒤 그의 동생 요장(姚萇)까지 복속하는 큰 공도 세웠다. 그러나 부황미는 어떠한 상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여러번 사람들 앞에서 부생에게 모욕을 당하자, 부황미는 격노하여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부생은 이를 알고 부황미를 비롯한 수많은 황족을 죽였다.

부생은 어느날 꿈에서 큰 물고기(魚)가 창포풀(苻)을 먹는 것을 보았다. 이때 장안에 동해의 큰 물고기가 용이 되었는데 남자는 모두 왕, 여자는 공이 되었다는 요언이 퍼졌는데, 꿈에 대해 어씨가 포와 관련된 부씨를 잡아먹은 걸로 해석해 태사, 녹상서사, 광녕공인 어준과 아들 일곱 명, 열 명의 손자를 죽였다.

그러자 어사중승 양평로를 비롯한 대신들은 부웅의 아들이자 동해왕이었던 부견에게 부생을 죽이고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으나 부견은 처음엔 따르지 않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해 6월, 부생이 부견의 배다른 형인 부법까지 죽이려한다는 제보를 받게 되자, 부견과 부법은 곧바로 양평로, 강왕, 여파루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갔다. 궁궐을 지키는 병사들은 부견이 제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모두 그에게 투항했고 부생은 폐위되는 그 순간에도 술에 취해있었다. 부견은 부생을 월왕(越王)으로 격하하고 머지않아 그를 살해했다. 향년 23세로, 무고한 이를 죽였다 하여 부견으로부터 여왕(厲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부규(苻馗)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월왕이 되었지만 딱히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부견의 견제를 받고 작위가 여러번 삭감되어 월후까지 지위가 내려갔다. 부규 사망 이후 후사가 없어 대가 끊겼다.

4. 평가

사서에서 부생은 잔학한 폭군으로 기록되었으나 방계로써 직계의 제위를 찬탈한 부견에 의해 재위기간중의 행적이 과장,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오호십육국 시대에 부생만한 폭군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들과 달리 부생은 여러 사학자들로부터 실제 폭군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재평가를 계속 받고 있긴 때문. 《낙양가람기》에서 부생은 긍정적인 군주였으나 부견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기록했고, 당나라 시대의 사학자인 유지기(劉知幾) 또한 자신의 저서 『사통』에 부생이 억울하게 무고당했음을 강조했다.[4] 근현대 중국의 4대 사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뤼쓰몐(呂思勉) 교수 역시 부생이 민가를 돌아다니며 학살한 일화나 칼과 망치로 대신들을 위협한 기록은 당대 사관의 의도적인 모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기록의 진실성을 의심했다.

5.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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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아 생전에 폐위되어 죽었기 때문에 황제로서 받은 시호나 묘호는 없다.[2] 이 외에도 길을 다니다 보이는 사람을 아무나 잡아다 발을 자르고, 태아를 파내고, 톱으로 목을 자르고, 고문을 자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궁 안에서 남녀 여러명으로 하여금 옷을 벗고 난교를 하도록 했다는 일화나 길 가던 남매를 붙잡아 근친상간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남매가 끝까지 거부하자 둘을 죽였다는 일화도 있다. 다만 후술하다시피 부견의 왜곡이 가미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3] 중국의 병법 중 하나. 상대 진영 장수를 도발하고 약올려 함정에 빠뜨리는 전술로 도발에 걸려 추격하는 요양의 부대를 삼원(三原)까지 유인한 뒤 격파하였다.[4] 유지기는 측천무후실록 편찬에 참여했다가 궁궐 사관들이 권력자 눈치 보며 역사를 기록하는 현실에 분노해 뛰쳐나온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정보를 수집한 뒤 역사비평사인 『사통』을 편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