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략 관련 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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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고밀효왕(高密孝王) 司馬略 | 사마략 | |
시호 | 효(孝) |
작위 | 고밀왕(高密王) |
최종직위 | 승상(丞相) |
성씨 | 사마(司馬) |
휘 | 략(略) |
자 | 원간(元簡) |
아버지 | 친아버지:사마태(司馬泰) |
생몰기간 | ? ~ 309년 |
고밀왕 재위기간 | 299년 ~ 3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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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의 황족으로 사마의의 넷째 동생인 동무대후(東武戴侯) 사마규(司馬馗)[1]의 손자이고 고밀문헌왕(高密文獻王) 사마태(司馬泰)[2]의 셋째아들이다. 자는 원간(元超).[3] 시호는 효(孝), 작위는 고밀왕(高密王)으로 모두 더해 고밀효왕(高密孝王)이다.2. 생애
부모를 공경하고 자비롭고 자상한 성격이었다.현인에게는 조심스럽고 겸허하며 예의 바르게 응대하였으며, 아버지 사마태의 풍격을 지니고 있었다.원강 1년(291년)에 서진 초대 황제 사마염에 의해 부마도위 화항(華恒), 기마도위 양준, 동안왕 사마요, 사마략의 형 동해왕 사마월과 함께 황태손 사마휼의 교육을 담당했다.
원강 9년(29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작위를 이어 고밀왕에 봉해졌다. 산기황문시랑·산기상시·비서감을 역임하고 낙양을 나와 안남장군·지절·도독면남제군사에 맡겨졌다가 이윽고 안북장군·도독청주제군사로 옮겼다. 사마략은 청주자사 정목(程牧)을 위압하여 이를 추방하고 스스로 청주를 영유하게 되었다.
영흥 3년(306년)에는 현현령(惤縣令) 유백근(劉柏根)이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적이 되었고, 진조에 반란을 일으켜 자립하여 현공이라 자칭하였다. 직후에 치하를 따라 침공하자 사마략은 진군장군 유우에게 요격을 명했으나 유우는 반격을 당해 낙양으로 패주하였다. 이어 유백근이 사마략을 공격하자 사마략은 요성으로 도주했다. 이후 유백근은 안북장군 왕준이 토벌하였다.
영가 2년(308년) 사마략은 양양을 진수했다. 유민 왕수(王逌)는 수족의 황락(郝洛)과 결탁하여 수천의 군사를 모으고 관군에 주둔하여 성곽을 침범하였다. 사마략은 참군 최광(崔曠)에게 토벌을 명했으나 왕수의 계략에 빠져 패배하였다. 사마략은 다시 좌사마 조터[4]로 하여금 최광 등을 통솔시켜 다시 왕수를 공격하게 하였다. 조터가 왕수와 교전하자 최광은 이에 가담하지 않고 몰래 철병해 버렸고, 엄호가 없는 조터는 결국 싸움에서 패해 전사했다. 사마략은 최광의 죄를 묻지 않고 다시 최광에게 군을 이끌게 하여 토벌을 가게 하자 왕수는 마침내 항복하였다.
그 공으로 승진하여 개부 산기상시에 임명되었고, 영가 3년(30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시중 태위로 추증, 후사는 그의 아들 사마거(司馬據)가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