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0 06:29:57

유요(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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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ece5b6>
전조 제5대 황제
유요 | 劉曜
출생 연대 미상
조위 병주 신흥군
(現 산시성 신저우시 우타이현)
사망 328년
전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5대 황제
319년 ~ 3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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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ece5b6> 성씨 유(劉)
요(曜)
부모 부황 선성제
모후 선명태후
배우자 원도황후, 헌문황후, 헌열황후, 유황후
자녀 9남 1녀
신장 9척 3촌(220cm)
영명(永明)
작호 중산왕(中山王)
연호 광초(光初, 319년 ~ 328년)
}}}}}}}}} ||

1. 개요2. 생애3. 일화4. 기타5. 가족 관계
5.1. 아내5.2. 자녀
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초기 전조(前趙)의 제5대 황제.

전조의 창건자인 태조 광문제 유연(劉淵)의 족자[1]는 영명(永明)이었다. 그의 아들인 유희의 재위기간에 나라가 멸망해 묘호시호가 일체 없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유요(전조)/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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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일화

유요는 평소 오한등우를 가벼이 여기며, 스스로를 악의, 소하, 조참에 비견된다 호언장담하고 다녔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오직 유총만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영명(永明: 유요의 자)은 세조위무(魏武)와 같은 부류이거늘, 어찌 그 공(公)들로 족할 수 있겠는가!"
라 말했다고 한다.

유요가 관천산에서 은거하던 시절, 홀연히 밤중에 2명의 동자가 찾아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관천왕(菅涔王)께서 소신으로 하여금 조(趙)의 황제를 알현하고, 검 한 자루를 바치라 하셨습니다."
라 말한 뒤, 다시 절을 하고 떠났다. 유요가 촛불을 들어 동자가 남기고 간 검을 살펴보니, 검의 길이는 2척에 달했고, 광택이 비상하여 적옥색 빛이 방 안을 메웠다. 그리고 칼등에는 「신의 검으로 막고 뭇 독을 제거하라(神劍御,除眾毒)」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전에 유요는 낙양을 함락시키고, 서진 제2대 황제인 혜제 사마충의 황후였던 양헌용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는데 이때 일화가 유명하다. 유요가
"사마씨 꼬맹이와 나를 비교하면 어떤가?"
라고 물으니 양헌용은
"사마충은 암군으로 나라를 말아먹어 이 꼴로 만들었는데 비교할 게 있나요? 공(유요)을 보자 진짜 남자가 어떤지 알게 되었죠."
라면서 전 남편인 사마충을 깠다. 유요는 양헌용을 총애해서 나중에 황제로 즉위하자 그녀를 황후로 삼았고, 양헌용은 유요와의 사이에서 장남 유희를 비롯한 세 아들을 낳았다.

322년에 양황후가 죽었는데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장인 양현지를 위해 영원릉(永垣陵)을 만들어 이장시키고 그녀는 현평릉(顯平陵)에 장사지냈다. 유요는 그녀를 기리고자 엄청난 돈을 들여 그녀와 그 부친을 위해 능묘를 만든 것이었다.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밤낮을 쉬지 않고 건설했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의 희생이 많아지자 원망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무덤 건설 공사를 위해 그 부지에 있었던 오래된 무덤을 밀어버리고 시체들은 황야에 버렸는데 그 시체들에서는 악취가 나고 전염병이 돌아 이에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호소했다.
"두 묘는 만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하여 하루 60,000명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지금까지 600만 명의 공력이 들어갔습니다. 벌써 3개의 연못을 만들었고 높이가 100척이나 되는 산만한 언덕이 생겼습니다. 뼈들이 온 땅에 널려 있고 인부들의 탄식 소리가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또한 나라와 폐하와 황후에게도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요는 복지부동이었고, 끝내 두 개의 능을 완성시켰다. 특히 현평릉은 양황후가 이미 묻혔지만 나중에 자신을 합장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하지만 훗날 유요가 석륵에게 죽임을 당하고 전조가 멸망할 무렵, 황후 양헌용이 묻혔던 현평릉은 표적이 되어 도굴되고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4. 기타

진서》에 유요가 붙잡혀 폐위되는 과정을 후조를 세운 유목민 세력인 갈족의 언어로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갈족이라는 민족의 정체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터라서, 이 내용이 언어학자들에게 대단한 떡밥을 제공하고 있다. 즉
"秀支替戾岡 僕谷劬禿當"
이라는 문장이 그것인데, 여기서 수지(秀支/si̯u-ci̯e)는 군(軍)을, 체려강(替戾岡/tʰei-let, lei-kɑŋ)은 나오다(出)를, 복곡(僕谷/bok, buk-kuk, yok)은 유요의 오랑캐 직위 이름(劉曜胡位)을, 그리고 구독당(劬禿當/ɡi̯u̯o-tʰuk-tɑŋ)은 붙잡다(捉)를 일컫는다고 해설되어 있다.

여러 학자들이 이 문장을 튀르크어족[2][3] 내지는 예니세이어족[4]에 속하는 언어로 보아 재구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혹은 아리아인과 연관지어 고대 영어 혹은 고대 노르드어를 참고해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문장인 Fylki dragan, Prōcūrātor clūs tūr takan[5]으로 재구성한 시도도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상황이다. #

최근에는 시베리아 중부에 살고 있는 소수 종족인 케트족과의 연관성을 찾는 학자들이 늘어났다. 케트어예니세이어족[6]에 속하는데, (羯)의 중고한어 발음 'Kiat'와 '케트'(Ket)의 발음이 유사한 점, 갈어의 동사 어미 -ŋ이 예니세이어족의 일반적인 동사 어미와 동일한 점, 갈어 단어 '구독당'(劬禿當)의 재구 발음 "kot-o-kt-aŋ"이 케트어 문장 "d-kas-a-qos-n"(그들이 잡을 것이다)과 유사한 점을 근거로 한다. 다만 "kot-o-kt-aŋ"의 /t/ 발음이 케트어 발음 /s/에 해당되는 품포콜어 발음 /t/의 특성을 보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동아시아 제어 연구의 권위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갈족이 몽골 북부에 거주했던 예니세이어족 계통의 민족인 품포콜족친연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품포콜어의 형제격 언어인 아린어에서 싸움을 'Kel'이라고 하는데, 이는 재구된 갈어에서 군대를 의미하는 'Suke'의 두 번째 음절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나 연관성이 의심되어 보빈은 이를 흉노어에서 온 차용어라고 제시했다.

5. 가족 관계

5.1. 아내

  • 원도황후(元悼皇后) 복씨(卜氏) - 유요의 첫 번째 부인으로 유요가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고, 즉위한 후 원도황후로 추존했다.
  • 헌문황후(獻文皇后) 양씨(羊氏) - 이름은 양헌용(羊献容). 원래는 서진의 혜제 사마충의 황후였으며 영가의 난 때 사로잡힌 후 유요의 부인이 되었다. 복씨가 사망하고 유요가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었으며 322년에 사망했다.
  • 헌열황후(献烈皇后) 유씨(劉氏) - 헌문황후 양헌용이 사망한 후 맞아들인 황후로 326년에 사망했다.
  • 황후(皇后) 유씨(劉氏) - 이름은 유방(劉芳). 물론 한고조와는 무관하다. 헌열황후 유씨의 사촌 여동생으로 헌열황후 사망 후 맞아들인 황후이다. 유요가 석륵과 싸우다가 패사한 후로는 기록이 없다.

5.2. 자녀

  • 태자(太子) 유희(劉熙) - 헌문황후 양헌용의 소생으로, 부황 유요가 석륵에게 처형당한 후 뒤를 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대항을 하지 않고 수도 장안을 버린 후 달아났으며 나중에 유씨 황족 및 고관대작 등과 함께 사로잡혀 석륵에 의해 처형되었다.
  • 임해왕(臨海王) 유검(劉儉) - 원도황후 복씨 소생
  • 남양왕(南陽王) 유윤(劉胤) - 원도황후 복씨 소생
  • 장락왕(長樂王) 유습(劉襲) - 헌문황후 양헌용 소생
  • 태원왕(太原王) 유천(劉闡) - 헌문황후 양헌용 소생
  • 회남왕(淮南王) 유충(劉沖) - 생모 미상
  • 제왕(齊王) 유창(劉敞) - 생모 미상
  • 노왕(魯王) 유고(劉高) - 생모 미상
  • 초왕(楚王) 유휘(劉徽) - 생모 미상
  • 안정공주(安定公主) 유씨 - 후조 제3대 태조 무황제 석호의 부인이 되어 그의 아들 석세를 낳았으나, 내란에 휘말려 아들과 함께 석준에게 피살되었다.

6.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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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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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척 조카.[2] 1922년 핀란드의 외교관이자 언어학자인 구스타프 J. 램스테트가 재구한 문장으로 Sükä talıqın bügüg tutun!(전쟁에 나가 복곡을 잡아라!)이었다.[3] 1948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루이스 바쟁이 재구한 문장으로 Süg tägti ıdqaŋ boquγıγ tutqaŋ!(군대를 보내어 공격하고, 지휘관을 잡아라!)이었다.[4] 미국언어학자알렉산더 보빈이 재구성한 문장으로 suke t-i-r-ek-ang bok-kok k-o-t-o-kt-ang(군대가 나갔으니 복곡을 잡아올 것이다)였다.[5] 군대가 나오면 프로쿠라토르[7]를 잡아 탑에 가두리라.[6] 이 어족을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 및 유전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아 알래스카캐나다 서부의 원주민 어족인 나데네어족과 묶는 데네예니세이어족이라는 가상의 어족 학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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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대 로마에서는 황제 속주의 행정관을 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