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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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髙瞻생몰연도 미상
전연의 인물. 자는 자전(子前). 기주(冀州) 발해군(勃海郡) 수현(蓚縣) 출신.
2. 생애
어릴 적부터 영준한 기개가 있었고, 재능이 준수하였으며, 신장은 8척 3촌에 달하는 장신이었다. 서진 시기에 임관하여 상서랑을 지냈다.영가의 난이 일어나 중원이 큰 혼란에 빠지자, 고첨은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의 어르신들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며 말했다.
"오늘날 황제의 법도가 부진하여 사방에서 병란이 구름처럼 들끓고 있습니다. 이 고을은 기름진 땅과 주변에 강과 바다에 굳게 의지하고 있으나, 적군이 해마다 들이닥친다면 결코 안전을 도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왕팽조는 일찍이 유주(幽州)의 계(薊)를 점거하고, 연(燕)・대(代) 일대의 재물과 강한 병사를 보유하고 있으니 의지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어르신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 없이 모두 동의하였다. 고첨은 숙부 고은(髙隱)과 함께 수천 호를 이끌고 유주로 이주하였으나, 왕준의 무도한 통치에 크게 실망하여 다시 북쪽으로 이동해 요동의 평주(平州)자사 최비(崔毖)에게로 갔다.대흥 2년(319년) 12월, 최비는 요동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백성들이 모용부의 모용외를 따르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에 최비는 고구려, 단부, 우문부로 사신을 보내 모용부를 멸망시키면 그 영지를 나누어 주겠다는 약조를 맺으며 연합하였다. 이를 알게 된 고첨은 최비를 찾아가 굳게 간언했지만, 최비는 듣지 않았다.
모용외의 이간질과 모용한의 활약으로 최비의 계획을 실패하였고, 최비는 조카 최도(崔燾)를 보내 거짓으로 축하하는 척 했으나, 3국의 사신에서 화의를 청하면서 최비가 배후에 있었다는 것을 일러바쳤다. 모용외는 최도를 되돌려보내면서 항복을 독촉하였고, 최비는 두려워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이때 고구려에서 장수 여노자를 보내 우하성(于河城)을 점거하였는데, 모용외는 장수 장통(張統)을 파견해 여노자와 고첨, 최도, 한항, 석종(石琮)과 1,000여 호를 사로잡았다. 모용외는 선비를 예우할 줄 알던 군벌이었기에 고첨 등을 극성에서 빈객으로 예우하였다.
모용외는 고첨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장군직을 맡기려 했지만, 고첨은 매번 병을 핑계로 사양하며 받들지 않았다. 모용외는 여러 차례 고첨을 찾아가 그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자네의 병은 이곳에 있는 것이오. 지금 진 왕실이 상란을 겪어 천자가 난을 피해 도성을 떠났고, 천하는 갈라져 백성들이 어수선한 바를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왕실을 위기에서 구하고, 적들을 베어 2경(二京)에서 천자를 영접하고 싶을 따름이오. 팔방으로 더러운 것들을 청소하고, 사나운 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싶은 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오. 그대는 중원의 사람이지만 우리는 서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한족과 이민족이라는 차이만으로 소원해져야 하는가! 애초에 대우(大禹)도 강족이었고, 문왕 또한 동이였으니, 공과 업을 세우기 위해서는 오직 뜻과 계략만을 물어야 할 뿐인데, 어찌 이전의 관습을 내려놓지 못하겠는가!"
모용외의 이와 같은 설득에도 고첨은 끝까지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병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모용외는 이를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기자, 용양장군 주부 송해가 고첨을 제거할 것을 권했다. 비록 모용외는 송해의 권유를 거절하였으나, 이 소식을 들은 고첨은 마음이 불안해져 더욱 근심하다가 병사하였다. 고첨의 아들 고개와 고상(高商)은 아버지와 달리 전연에 모두 전연에 출사하여 관직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