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1 21:02:50

장준(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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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전량 4대 국왕
장준 | 張駿
출생 307년
전량 양주 안정군 오씨현
(現 간쑤성 핑량시)
사망 346년(향년 40세)
재위기간 4대 국왕
324년 ~ 3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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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성씨 장(張)
준(駿)
부모 부친 장식
모친 소주 가씨
자녀 3남 ?녀[1]
공정(公庭)
작호 서평공(西平公)
묘호 세조(世祖)
시호 전량: 문왕(文王)[2]
동진: 충성공(忠成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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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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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량의 제4대 군주.

자는 공정(公庭)이었다. 제2대 군주인 장식의 외아들로 남흉노전조가 쇠퇴한 틈을 타 하남과 농서 지역을 손에 넣어 국력을 상승시키고 서역 정벌을 실행했다. 갈족 석씨의 후조와 사마씨의 동진에게 관직을 받고 복속하는 척했지만 영지내에서는 황제의 의장을 쓰고 천자의 권한을 행사했다.

2. 생애

장준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웅장한 기세를 타고 났다. 10살 때부터 뛰어난 글재주로 주위 사람들을 놀래켰으나 사람됨이 탐욕스러워 남들에게 무언가를 빌려주면 그 곱절을 받아냈다고 한다.

316년, 진민제 사마업이 조서를 내려 장준을 패성후(霸城侯)에 봉했다. 이후 아버지 장식이 암살당하고 숙부인 장무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아버지의 작호였던 서평공을 물려받았다.

324년에 장무가 병사하자 양왕을 계승했다. 전조의 황제인 유요가 사자를 보내 장준을 대장군, 양주목에 임명하고 양왕(涼王)에 봉했다. 전량의 장수 신안(辛晏)이 장준의 즉위에 반대하여 하남 지방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장준은 두도(竇濤) 등을 보내 토벌하려고 했지만 종사 유경(劉慶)은 신안이 얼마 안가 항복할 것이라며 말렸다. 과연 그의 말대로 이듬해(325)에 신안이 땅을 들어 항복해왔다.

327년, 전조가 후조의 고조 명황제 석륵에게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조에서 준 관작을 모두 버린 뒤, 전조의 진주(秦州)를 공격했다. 하지만 남양왕 유윤에게 패배하고 오히려 기세를 탄 유윤의 군대에 쫓기게 되었다. 유윤은 황하를 건너서 영거와 진무를 함락시키고 전량군 20,000명을 죽여 하서를 뒤흔들었다. 장준은 황보해를 보내 막도록 했지만 금성태수 장랑과 부한호군 신안이 모두 땅을 바치고 전조에 항복을 하는 바람에 하남 지역의 땅을 다시 빼앗겼다.

329년, 전조의 잔당이 후조에게 완전히 멸망해버린 틈을 타 군사를 이끌고 다시 하남 지역을 되찾았다. 그리고 적도, 석문을 거쳐 합수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후조는 맹의를 사자로 보내 장준을 진서대장군, 양주목에 임명했지만, 후조에 복속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 장준은 맹의를 붙잡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해(329) 9월, 흉노족 왕강이 후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양주로 도망쳐왔다. 후조의 군대가 보복하러 올까봐 겁을 먹은 장준은 억류하던 맹의를 돌려보내고, 후조의 신하가 되기를 청했다.

331년, 무기교위 조정이 반란을 일으켜 서역장사 이백을 패퇴시켰다. 장준의 측근 중 한 명은 이백이 조정과 내통하여 일부로 진 것이라고 참언했지만, 장준이 이백은 죄가 없음을 밝히고 처형하지 않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장준은 죄인의 친족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막는 법을 폐지하는 등 전량의 법을 개정하고 내치를 다져 국력을 빠르게 상승시켰다. 장준이 정사를 부지런히 처리하고 민생을 안정시키자 신하들은 물론 양주 내의 모든 백성들이 장준을 '양왕' 혹은 '적현군'(積賢君)이라 부르며 진심으로 따랐다. 비록 장준의 통치 기간에 전량은 거의 매년 전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주는 평온하고 안정되었다.

333년, 동진에서 사람을 보내 장준에게 진서대장군, 양주자사, 영호강교위직을 수여하고 정식으로 서평공(西平公)에 봉했다. 장준은 임명을 받은 뒤, 수시어사 경방, 부곡동 왕풍 등을 동진으로 보내 사죄하며 신하를 청했지만 연호는 동진을 따르지 않고 건흥을 계속 사용했다. 334년에 진강제는 장준을 대장군으로 승진시켰고, 이후 전량과 동진은 매년 서로 사자를 보내 통교했다. 그리고 장준은 장수 양선에게 군사를 주어 구자국과 선선국을 공격하도록 해 서역 정벌을 개시했다.

339년, 장준은 천자만이 설치할 수 있는 학술 연구 기관인 벽옥(辟雍)을 설치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궁을 황궁과 비슷하게 꾸몄으며, 그의 의식주를 모두 천자와 같은 수준으로 바꿨다. 이맘때 즈음에 양선의 서역 정벌이 순조롭게 흘러가면서 전량의 영토가 넓어졌는데, 서쪽으로는 사주(沙州), 동쪽으로는 하주(河州)까지 이르렀다. 양주, 사주, 하주를 모두 복속시킨 장준은 스스로를 대도독, 양왕이라 부르며 천자의 것과 비슷한 수레를 타고 다녔다. 또, 밑에는 백관들을 설치하여 사마씨의 진나라 조정과 매우 유사한 관직 체계까지 갖추었다.

340년, 후조의 군대가 전량을 공격하자 장수 사애를 보내 막았다.

343년 7월, 후조의 진주와 옹주를 겸병할 뜻을 품고 동진에 참군 국호를 보내 북벌을 권했다. 마침 북벌을 준비하던 유익은 이를 반겼으나 유익의 북벌이 무산되어 실제 실행되진 못했다. 345년에는 서역의 언기국(焉耆國)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 격퇴했다.

346년, 장준이 승하했다. 동진에서는 진목제가 그를 대사마, 충성공으로 추증했고, 전량에서는 그의 아들 장조에 의해 문왕으로 추존되었다. 장남은 장조였지만 첩의 소생이었던 관계로 차남인 장중화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3. 둘러보기

전량의 역대 국왕
3대 태종 성왕 장무 4대 세조 문왕 장준 5대 세종 환왕 장중화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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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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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조가 왕위에 오르고 그의 딸들을 취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딸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2] 위왕(威王) 장조(張祚)가 추존했다.[3] 동진의 제9대 효종 목황제 사마담이 추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