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6:50:40

유총(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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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제3대 황제
유총 | 劉聰
파일:刘聪.jpg
출생 연대 미상
서진 병주 신흥군 여치현
(現 산시성 신저우시 우타이현)
사망 318년 8월 31일
전조 평양 황궁
(現 산시성 린펀시)
능묘 선광릉(宣光陵)
재위기간 제3대 황제
310년 9월 5일 ~ 318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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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ece5b6> 성씨 유(劉)
총(聰)
부모 부황 태조
모후 광헌황후
형제자매 7남 중 4남
배우자 호연황후, 무효황후, 무선황후,
무덕황후, 상황후 2명, 좌황후 2명,
우황후 1명, 중황후 1명
자녀 20남
신체 특징 2척(47cm)[1]
현명(玄明)
작호 초왕(楚王)
묘호 열종(烈宗)
시호 소무황제(昭武皇帝)
연호 광흥(光興, 310년 ~ 311년)
가평(嘉平, 311년 ~ 315년)
건원(建元, 315년 ~ 316년)
인가(麟嘉, 316년 ~ 3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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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
2.1. 초창기2.2. 조한(趙漢) 건국기2.3. 정권을 잡다2.4. 영가의 난2.5. 실정의 시작2.6. 서진 멸망전 및 타락2.7. 말년
3. 미디어 믹스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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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초기 전조(前趙)의 제3대 황제.

태조 광문제 유연의 3남[2]이자, 장부인 소생으로 는 현명(玄明)이었다.

2. 생애

2.1. 초창기

생모인 장씨가 유총을 임신했을 때, 태양이 안기는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나 이를 유연에게 말했다. 유연은 그 말을 듣고
"이는 틀림없는 길조이니 말을 삼가도록 하라."
라 당부하였다. 이후 15개월이 지나서야 유총이 태어나니, 어두컴컴한 밤임에도 빛이 환하게 밝아오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 유총의 생김새 역시 특이하여 왼쪽 귀에 있는 하얀 광택이 도는 털이 돋아나 길이가 2척[3]에 달했다. 유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학문을 좋아했는데, 그를 가르치던 박사 주기(朱紀) 또한 범상치 않게 여겼다. 그는 14세가 되던 해에 모든 경서를 통달하였고, 《손자병법》과 《오자병법》도 깨우쳐 암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 문장에도 재능을 보여, 초서예서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었고, 서정시 수백여 편과 부(賦) 50여 편을 저술하였다.

유총은 15세가 되었을 때 무예도 익히기 시작하여 칼로 찌르고 베는 법을 배웠고, 팔이 길고 힘이 좋아 300근에 달하는 활을 손쉽게 다루며 활쏘기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체력과 용맹은 가히 당대 최고라고 할만 했다. 아버지 유연은 재능 넘치는 유총을 무척 총애했고, 아버지 친구인 왕혼은 유총을 만난 뒤 기뻐하며 유연을 향해 말했다.
"이 아이는 나로서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구려."

약관에 나이에 이르자, 유총은 위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유학을 떠나 명사들과 교류하여 당시 명망높은 명사 악광, 장화보다 특출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신흥(新興)태수 곽이(郭頤)에 의해 벽소되어 주부를 지냈고, 조정에 양장(良將)으로 천거되어 효기별부사마(驍騎別部司馬)에 임명되었다.

팔왕의 난 발발로 제왕 사마경이 집권하자 국중위(國中尉)로 승진하였고, 그 뒤로도 승진을 거듭하여 좌부사마(左部司馬)를 거쳐 우부도위(右部都尉)에 임명되니, 백성들을 능히 어루만져주어 5부의 흉노족들 중 그를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 무리가 없었다.

여러 번의 정변이 일어나고 정권을 잡은 하간왕 사마옹은 조정에 상표하여 유총을 적사중랑장으로 삼았다. 당시 아버지 유연은 업(鄴)에서 성도왕 사마영을 섬기고 있었는데, 유총은 혹여나 아버지가 사마영에게 해를 입을까 염려하였다. 결국 그는 하간왕 사마옹으로부터 도망쳐, 업으로 가서 성도왕 사마영에게 귀순하니, 사마영은 그를 우적노장군(右積弩將軍), 참전봉전사(參前鋒戰事)로 삼았다.

2.2. 조한(趙漢) 건국기

건무 원년(304년) 8월, 아버지 유연이 사마영 설득에 성공해 북선우에 임명되어 흉노 5부로의 귀환을 허락받았다. 유총 또한 우현왕에 올라 아버지와 함께 좌국성(左國城)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유선 등과 더불어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하였다. 대선우로 등극한 유연은 도읍을 이석(離石)으로 삼고, 아들 유총을 녹려왕(鹿蠡王)으로 삼았다.

건무 원년(304년) 10월, 대선우 유연이 다시 좌국성으로 천도하고, 한(漢)을 건국해 한왕(漢王)을 칭하면서 서진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이때 유총은 무군장군에 제수받고 서진과의 전투에 종군하였다.

원희 원년(308년) 정월, 유총이 유연의 명령에 따라 10명의 장수들을 이끌고 상당(上黨)의 태행산(太行山)을 점거해 낙양 공략에 돌입할 준비를 하였다.

원희 원년(308년) 5월, 하동(河東)을 침범했다가 진의 장수 북궁순(北宮純)에게 패하여 퇴각하였다.

영봉 원년(308년) 11월, 한(漢)의 황제로 즉위한 유연이 유총을 거기대장군에 임명하고, 그 다음 달에는 초왕(楚王)에 봉했다.

영봉 2년(309년) 4월, 낙양 정벌을 맡았던 멸진대장군 유경(劉景)이 백성들을 학살하는 전쟁 범죄를 저질러 경질되고, 유총이 유경을 대신해 낙양 정벌 지휘를 맡았다. 유총은 안동대장군 석륵을 전봉도독으로 삼아 선봉에 세우고, 정동대장군 왕미와 함께 호관(壺關)으로 향했다. 진의 병주(幷州)자사 유곤은 호군장군 황숙(黃肅), 한술(韓述)을 보내 호관을 구원케 했지만, 한술은 서간(西澗)에서 유총에 의해, 황숙은 봉전(封田)에서 석륵에 의해 모두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동해왕 사마월도 회남(淮南)내사 왕광(王曠)과 장수 시융(施融), 조초(曹超)를 파견해 유총을 막게 하였다. 왕광 등은 황하를 건너 태행산에서 유총의 군대와 조우하고 장평(長平) 일대에서 흉노군과 회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여 병력은 모두 전멸하였고 시융, 조초는 전사하였다.(장평 전투) 진나라의 군대를 연이어 격파한 유총은 기세를 몰아 둔류(屯留), 장자(長子)를 차례로 함락시켰고, 여기서 포로로 잡거나 참수한 자만 19,000여 명이니 싸울 마음을 잃은 상당태수 방순(龐淳)이 호관을 들어 유총에게 투항하였다. 이때 유곤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철불부유호를 공격하자, 유총은 유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군대를 보내 진양(晉陽)을 기습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하서 원년(309년) 8월, 호관 공략에 성공하여 낙양으로의 길을 뚫은 유총은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낙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동해왕 사마월은 평북장군 조무(曹武), 정로장군 송추(宋抽), 장수 팽묵(彭黙) 등을 보내 영격케 했으나 유총에게 모두 격파당했다. 장안의 평창공 사마모도 장수 순우정(淳于定), 여의(呂毅)에게 군대를 주어 낙양에 원군을 보냈지만 이들 역시 유총에게 격파당했다. 유총은 의양(宜陽)까지 진격하고, 낙양의 태학과 국학을 불태우는 활약을 했으나 연이은 승리에 도취되어 진영의 방비를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하서 원년(309년) 9월, 홍농(弘農)태수 원연(垣延)이 거짓투항해오자, 유총은 의심없이 그를 군영에 들였다. 이후 원연이 밤에 군대를 들어 기습을 감행하니, 유총은 대패해 퇴각하였다. 광문제 유연은 상복을 입은 채로 유총을 맞이하며 그의 경솔함으로 인한 패전에 대해 책망하였다.(제1차 낙양 공략전)

하서 원년(309년) 10월, 유총이 시안왕 유요, 여음왕 유경과 함께 정예 기병 50,000기를 거느리고 낙양으로 향했으며, 대사공 호연익(呼延翼)이 보병으로 그 뒤를 이었다. 유총의 군대가 다시 의양에 다다르자, 무려 한 달만에 재침공하리라 생각치도 못했던 서진 조정은 크게 진동하였다. 유총은 하남(河南)에서 진군을 격파한 뒤, 별다른 없이 서명문(西明門)에 주둔하여 낙양성을 위협하였다. 그때 진의 양주독호 북궁순과 호군 가윤(賈胤)은 용사 1,000여 명을 선발하고, 그날 밤에 성 밖으로 나가서 한나라 진영의 군루를 습격해 한의 정로장군 호연호(呼延顥)를 참수했다. 유총은 군대를 남쪽 낙수(洛水)로 옮겨 수습하려 했는데, 후방에 있던 호연익이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면서 대양(大陽)에 주둔해 있던 한군이 흩어졌다. 광문제 유연은 조서 내려 유총에게 돌아오라 명했지만, 유총이 진군의 나약함과 호연호, 호연익의 전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낙양 공략을 계속하기를 고집하자, 하는 수 없이 그의 청을 허하였다.

하서 원년(309년) 11월, 유총은 유요에게는 상동문(上東門)을, 왕미에게는 광양문(廣陽門)을, 유경에게는 대하문(大夏門)을 각자 맡아 공략하게 하고, 본인은 선양문(宣陽門)에 주둔해 공성하였다. 그러나 사마월의 방비는 무척 단단했고, 낙양성은 도무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해진 유총은 군대를 안양왕 유려(劉厲), 관군장군 호연랑(呼延朗)에게 잠시 맡기고, 신령에 기도라도 드리기 위해 스스로 숭산(嵩山)에 올라갔다. 이때 사마월이 참군 손순(孫詢)의 제안에 따라 손순과 장수 구광(丘光), 누부(楼裒)에게 용사 3,000명을 주어 유총의 진영을 습격케 했고, 손순 등은 선양문을 열고 나아가 한군을 습격해 대파하였다. 호연랑은 적에게 붙잡혀 참수당했고 유려는 목숨을 구했지만, 유총이 패전의 책임을 물을까 두려워 스스로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유총은 급히 보고를 받고 내려왔지만 이미 군사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고, 광문제 유연까지 황문랑 부순(傅詢)을 보내 퇴각을 독촉하자, 어쩔 수 없이 퇴각을 결정하고 낙양을 포위하던 모든 군대를 거두어 평양(平陽)으로 귀환하였다.(제2차 낙양 공략전)

하서 원년(309년) 12월, 대사도에 임명되었다.

하서 2년(310년) 7월, 시안왕 유요, 진동대장군 석륵, 안북대장군 조고, 평북대장군 왕상을 이끌고 진의 하내(河內)태수 배정(裴整)이 지키는 회현(懷縣)을 포위하였다. 서진 조정에서는 정로장군 송추, 관군장군 양거(梁巨)를 보내 회현을 구원케 했으나, 장릉(長陵)에서 석륵과 왕상에게 요격당해 궤멸당하고 송추는 전사하였다. 이에 하내 사람들은 배정을 붙잡아 한군에 투항하였다.(회 전투)

그 무렵, 광문제 유연이 병에 걸려 쓰러졌다. 유연은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국가 운영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여러 관리들의 관직을 재조정하고, 선우대(單于臺)를 설치해 정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이때 유총은 대사마, 대선우에 임명되어 선우대의 업무를 도맡아 하였다.

2.3. 정권을 잡다

하서 2년(310년) 7월 16일, 부황인 태조 광문제 유연이 붕어하고 그로부터 이틀 뒤에 태자 유화가 즉위하였다. 유화는 황제가 된 이후로 외숙부인 종정 호연유(呼延攸)[4], 시중 유승(劉乘)[5], 위위•서창왕 유예(劉銳)[6]를 가까이 하였다. 당시 평양 근교에는 유화의 동생들인 제왕•대사도 유유(劉裕), 노왕•상서령 유륭(劉隆), 북해왕•무군대장군 유예(劉乂), 초왕•대사마 유총이 각기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채 주둔하고 있었는데, 호연유, 유승, 유예는 황제 유화를 설득해 황자 제거를 결의케 하였다.

황제 유화가 황자 제거 계획에 반대하던 작은아버지 안창왕 유성을 살해하고, 서창왕 유예, 좌위장군 마경(馬景)을 보내 유총이 있는 선우대를 습격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다른 왕들에게도 각각 장수들을 보내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북해왕 유예 공격 임무를 맡은 상서 전밀(田密)과 서양왕 유예(劉璿)가 도중에 유화를 배반해 북해왕 유예를 받들고는 유총에게도 사자를 보내 유화의 계획을 알렸다. 이에 유총은 그들에게 갑옷을 입고 대기하라 화답한 뒤, 반격 준비를 끝마친 채 서창왕 유예 등이 오기를 기다렸다. 선우대로 향하던 서창왕 유예 등은 유총이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머리를 돌려 호연유, 유승과 합류하여 일단 제왕 유유와 노왕 유륭 토벌을 도왔다. 이때 호연유와 유승은 유안국과 유흠이 내통한 것이라 의심하여 둘 다 살해하고, 제왕 유유와 노왕 유륭의 관사를 공격해 두 왕을 참수하였다.

호연유 등이 유유와 유륭을 제거한 것을 확인한 유총은 공세로 전환해 선우대에서 나와 수도 평양(平陽)의 서명문을 습격하였다. 놀란 호연유 등은 급히 나아가 유총과 싸웠으나 결국 패하여 남궁(南宮)으로 도주하였다. 평양을 함락시킨 유총은 선봉군을 보내 도망친 호연유 등을 추격케 하고, 그 다음 날 황궁을 장악해 광극전(光極殿)의 서실(西室)에서 황제 유화를 살해하였다.(하서 정변) 이후 유총은 이후 도망쳤던 서창왕 유예, 유승, 호연유도 모두 사로잡아 처형하고 평양성 대로변에 효수하였다.

한의 군신들은 모두 유총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청했지만, 유총은 본인이 광문제 유연의 첩 장씨의 자식이라는 이유를 들어, 유유, 유륭 사후 마지막 남은 적모 소생 아들이자 이복 막내동생인 북해왕 유예에게 황위에 오를 것을 권했다. 이에 유예는 울면서 제위를 거부하였고, 여러 공경들도 유예와 더불어 유총에게 황제에 오를 것을 굳게 청하니, 유총은 오래도록 생각하다가
"유예와 여러 공들은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고, 재난도 성행하여 연장자인 나를 추대하려 한다. 이는 국가의 중대한 일이므로 내 감히 따르지 않을 수가 없구나. 따라서 나는 잠시 황제로 즉위했다가 노은공의 고사를 받들어 유예가 장성했을 때 다시 그에게 황위를 돌려주도록 하겠다."
라 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영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연호를 광흥(光興)으로 개원하고, 적모인 단 황후를 황태후, 생모인 장씨를 제태후(帝太后)로 높였다. 또, 북해왕 유예를 황태제, 영 대선우, 대사도로 삼고, 적장자 유찬을 하내왕(河内王)에 봉하고 사지절, 무군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에 임명하였다. 다른 아들들인 서장자 유이는 하간왕(河間王)에, 유익은 팽성왕(彭城王)에, 유괴(劉悝)는 고평왕(高平王)에 각각 봉작되었다. 이어서 대군을 거느리고 외지에 주둔해 있던 석륵을 급군공(汲郡公)에 봉하고 병주자사로 삼았다.

소무제 유총이 막 황제로 즉위했을 무렵, 임위(臨渭)의 저족 추장 포홍은 날쎄고 용맹한데다 꾀가 많아 당시 여러 저족 부락들을 복종시켰다. 이에 유총은 사신을 파견해 포홍을 평원장군에 임명하였으나, 포홍은 이를 무시하고 스스로 호저교위(護氐校尉), 진주(秦州)자사, 악양공(略陽公)을 칭해 흉노족에 복속되기를 거부했다.

광흥 원년(310년) 9월, 정변으로 중지되었던 부황 광문제 유연의 장사를 무사히 마치고, 영광릉(永光陵)에 안장하였다.

광흥 원년(310년) 10월, 철불부의 유호를 누번공(楼煩公)에 봉하고, 사공 유경을 대사마로, 좌광록대부 유은을 대사도로, 우광록대부 왕육을 대사공으로 삼았다.

2.4. 영가의 난

광흥 원년(310년) 10월, 하내왕 유찬, 시안왕 유요, 정동대장군 왕미에게 40,000명의 군사를 주어 낙양으로 진격케 하였다. 이때 병주자사 석륵 또한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대양(大陽)에서 유찬의 군세와 합류해, 면지(澠池)에서 서진의 감군 배막(裴邈)을 격파한 뒤 낙천(洛川)으로 들어갔다. 이후 유찬 등은 환원(軒轅)으로 나가 양(梁), 진(陳), 여(汝), 영(穎) 일대를 노략질하여 성채 100여 개를 떨어뜨렸고, 석륵은 성고관(成皋關)으로 나가 창원(倉垣)에서 진류(陳留)태수 왕찬(王讃)을 포위해 격파시켰다. 왕찬은 패잔병을 이끌고 문석진(文石津)으로 패퇴하였다.

광흥 원년(310년) 12월, 적모이자 황태제 유예의 생모인 황태후 단씨는 자태가 아름다웠기에, 소무제 유총은 황후 호연씨를 놔두고 황태후 단씨와 불륜을 자주 범하고 있었다.[7] 아무리 피가 이어져 있지 않다고 해도 당시 한족 입장에서는 패륜이나 마찬가지라, 황궁 내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유예 또한 이를 창피하게 여겨 황태후 단씨에게 제발 그만하라 당부하였다. 아들에게 한소리 들은 황태후 단씨는 수치심과 울화로 얼마 안가 사망하였고, 유총은 그녀의 죽음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슬퍼하였다. 황태후 단씨 사후 소무제 유총은 제태후 장씨를 황태후로 높였다.

광흥 원년(310년) 말, 소무제 유총에게는 동복 형 유공(劉恭)이 있었는데, 유총은 자신이 황제에 즉위해 형의 서열을 범한 것을 꺼려 자객을 보내 유공을 암살하게 하였다. 자객은 유공의 집 벽을 허물고 침입해 잠자던 유공을 칼로 찔러 죽였고, 생모 장씨는 유총이 유공을 죽인 것에 큰 충격을 먹어 병으로 앓아 누웠다.

광흥 2년(311년) 4월, 소무제 유총은 안북대장군 조고, 평북대장군 왕상을 보내 서진의 서주(徐州)자사 배순(裴盾)을 공격해 살해하였다.

광흥 2년(311년) 5월, 안동장군 조억(曹嶷)이 청주(靑州)를 장악하고, 석륵이 허창(許昌)을 함락시키자, 드디어 때가 되었다 생각한 소무제 유총은 위위 호연안(呼延晏)을 사지절, 전봉대도독, 전군대장군으로 삼아 금군 27,000명을 이끌고 의양(宜陽)으로 들어가 낙양성을 압박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서진군을 정벌하던 왕미, 유요, 석륵에게도 명을 내려 호연안과 합류해 낙양성에 맹공을 퍼부을 것을 명했다. 호연안은 진격하면서 하남(河南)에 이를 때까지 서진군과 12번 싸워 전승하고 적군 30,000여 명을 죽였다. 예상보다 서진군의 방어가 쉽사리 뚫리면서 왕미, 유요, 석륵이 합류하기도 전에 호연안은 낙양성 7리 밖에 이르러 장방고루(張方故壘)[8]에 치중을 두고 공성 준비를 하였다.

광흥 2년(311년) 6월, 이윽고 준비를 모두 마친 호연안은 다른 군대의 합류를 기다림 없이 낙양의 남문인 평창문(平昌門)을 공격해 부수고, 성 내로 진입해 여러 관청들과 낙양의 동문인 동양문(東陽門)을 불살랐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실컷 노략질을 하며 회제 사마치가 도망치려고 준비해둔 낙수가에 대기시켜둔 배까지 모조리 불태워 없앴다. 며칠 뒤, 왕미의 군대가 낙양성 선양문에 도착했고, 유요의 군대도 서명문에 도착하였다. 호연안이 선양문에서 왕미와 합류하고 남궁(南宮)으로 들어가 다시 약탈을 재개하니, 회제 사마치는 화림원(華林園)을 통해 황궁을 빠져나가 장안으로 도망치려다 한군에게 붙잡혀 단문(端門)에 유폐당했다.

왕미군의 진입 소식을 들은 유요도 그제서야 성 내로 진입해 무기고를 장악한 뒤, 서진의 태자 사마전(司馬詮), 오왕 사마안(司馬晏), 경릉왕 사마무(司馬楙), 상서좌복야 화욱(和郁), 상서우복야 조복(曹馥), 상서 여구충(閭丘沖), 원찬왕 사마곤(司馬緄), 하남윤 유묵(劉默) 등 여러 왕공들을 살해하고, 서진의 병사와 백성 30,000여 명을 학살하여 낙수 북쪽에 그 시체로 산을 쌓아 경관을 만들었다. 서진의 역대 황제들의 여러 능묘들은 모두 파헤쳐졌고, 낙양 궁궐의 사당, 관청 등의 시설들은 전부 불태워 없어졌다. 이후 약탈을 마친 유요는 낙양에서 사로잡은 혜제의 황후 양헌용을 자신이 취하고, 회제 사마치와 전국옥새는 도읍 평양으로 보냈다. 이 사건을 역사상 한족 최대의 치욕인 영가의 난이라 부른다.

가평 원년(311년) 6월 21일, 낙양 함락 소식을 들은 소무제 유총은 대사면령을 내려 가평(嘉平)으로 개원하고, 평양으로 끌려온 회제를 특진, 좌광록대부로 삼은 후 평아공(平阿公)에 봉했다.

가평 원년(311년) 8월, 낙양이 무너지고 회제가 잡혀갔지만, 서진의 잔당은 관중으로 도망쳐 진왕 사마업을 받들면서 저항을 속행하였고, 아직 서진의 제후왕이나 군벌들도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소무제 유총은 우선 관중 평정을 목표로 잡아 평서장군 조염과 안서장군 유아(劉雅)에게 20,000명의 기병을 주어 장안을 공격케 하고, 하내왕 유찬과 시안왕 유요에게 많은 군사를 주어 그 뒤를 받치게 하였다. 조염의 군대는 동관(潼關)에서 사마모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하고 장수 여의(呂毅)를 패사시킨 후 하규(下邽)까지 진격하자, 양주독호 북궁순이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장안에서 나와 조염에게 항복하였다. 사마모는 다시 장수 순우정(淳于定)을 보내 조염을 공격해보았지만, 또 패하여 창고의 군량은 소진되었고 병졸들은 모두 흩어졌다. 조염이 마침내 장안성을 포위하니, 사마모는 군사좨주 위보(韋補)의 조언에 따라 장안성을 들어 한나라에 투항함으로써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다. 장안성을 접수한 조염은 투항한 사마모를 후방에 있는 하내왕 유찬에게 넘겼다.

유찬은 사마모가 끌려오자 그를 곧바로 처형하고, 같이 끌려온 사마모의 아들 범양왕 사마려(司馬黎), 위장군 양분(梁芬), 장사 노요(魯繇), 겸산기상시 두경(杜驁), 신밀, 북궁순 등만 도성 평양으로 보냈다. 소무제 유총이 유찬이 사마모를 멋대로 죽였다는 사실에 크게 노하자, 유찬은
"신이 사마모를 죽인 것은 단지 그가 천명을 늦게 깨달아서가 아니라, 진 왕실의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목숨을 아껴 낙양의 재난을 막지 못한 것은 천하의 악이기 때문에 주살하였습니다."
라며 변명하였다. 유총이 답했다.
"비록 네 말이 옳으나, 나는 네가 항복한 자를 주살함으로 인해 남은 무리가 투항을 꺼릴까 두려운 것이다. 천도(天道)란 신(神)이 주관하므로 천명을 함부로 헤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이후 소무제 유총은 유요를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옹주목으로 삼고, 중산왕(中山王)에 봉해 장안을 지키게 하였다.

가평 원년(311년) 9월, 석륵이 몽성(夢城)을 습격해 서진의 대장군 구희와 회제의 차남인 예장왕 사마단(司馬端)을 사로잡았다. 소무제 유총은 석륵의 공을 치하하고 유주목에 임명하였다. 항관(項關)에 주둔해 있던 왕미도 대장군으로 삼고 제공(齊公)에 봉했다.

가평 원년(311년) 10월, 석륵이 왕미를 죽이고 소무제 유총에게 왕미가 반역했다 보고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대로하여 사자를 보내 나라의 공신을 함부로 살해한 것을 책망했지만, 너무 심하게 따지면 두 마음을 품을까 두려워 석륵에게 진동대장군, 독병유2주제군사(督并幽二州諸軍事), 영 병주자사를 더해 위로하였다.

가평 원년(311년) 12월, 옹성(雍城)에서 서진의 예주자사 염정 등이 진왕 사마업을 황태자로 추대하여 새로운 서진 조정을 꾸리고 안정태수 가필, 옹주자사 국특, 신평태수 축회와 연합해 장안성 탈환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2.5. 실정의 시작

가평 2년(312년) 2월, 황후 호연씨가 사망하자 소무제 유총은 그녀의 시호를 '무원(武元)'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유총은 여색에 빠져들면서 사공 왕육과 상서령 임의(任顗)의 딸을 각각 후궁으로 들여 좌, 우소의로 삼고, 중군대장군 왕창(王彰)과 중서감 범륭, 좌복야 마경의 딸들도 후궁으로 들여 모두 귀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복야 주기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 귀비로 삼고 후궁들에게 모두 금인자수(金印紫綬)를 하사하였다. 이걸로도 모자라 태보 유은의 딸마저 후궁으로 들이려 하니, 황태제 유예가 같은 유씨끼리의 혼인은 참아달라며 간곡히 간하였다. 그러자 유총은 태재 유연년(劉延年), 태부 유경에게 유은의 집안을 조사케 하였다. 유경이 말했다.
"신이 항상 듣기로는 태보의 집안은 주(周) 왕실의 강공(康公) 계통으로, 폐하의 성씨와는 뿌리가 다르니, 받아들여도 해가 될 일은 없을 듯 하옵니다."
소무제 유총은 크게 기뻐하며 대홍려 이홍(李弘)에게 명해 유은의 두 딸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을 좌, 우귀빈으로 삼아 소의보다 위에 두었다. 또, 유은의 네 명의 손녀들도 모두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이들도 모두 취하여 입궁시킨 후, 매일 정사도 안 돌보고 여섯 미녀와 함께 지냈다. 그 중 유은의 두 딸은 귀빈에 봉했는데 한 명에게는 '유영', 다른 한 명에게는 '유아'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건 그 유명한 임금의 두 딸이자 임금의 부인이었던 아황과 여영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즉, 스스로를 요임금과 순임금만큼의 명군으로 치켜 올린 것이었으며, 모든 권한을 두 귀빈에게 넘겨준 대인배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모든 국정 운영은 중황문(中黃門)에서 처리하여 상주하였고, 좌귀빈 유영(劉英)이 결재를 맡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무렵에 회제 사마치를 회계군공(會稽郡公)으로 고쳐 봉하고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가평 2년(312년) 3월, 서진의 병주자사 유곤을 공격해 진양을 포위하던 진북장군 근충(靳沖)과 평북장군 복후가 유곤을 구원하러 온 탁발의로에게 패퇴하였다. 근충이 복후의 군대가 먼저 도망쳤다는 이유로 복후를 참수하자, 이를 들은 소무제 유총이 격분하여 말했다.
"복후는 짐조차 형벌을 가할 수 없는 인물인데, 근충은 어떤 인물이기에 그를 처형하느냐!"
그리고는 어사중승 호연(浩衍)을 보내 근충을 참수하였다. 이후 장식을 보한장군으로 삼고, 그의 두 딸 장휘광(張徽光)과 장려광(張麗光)을 자신의 귀인으로 삼았다.

가평 2년(312년) 4월, 이 시기부터 소무제 유총은 난폭해지고 정신도 혼미해져 형벌을 남발하기 시작하였다. 좌도수사자, 양릉왕 유터(劉攄)를 생선과 게 조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참수하였고, 온명전(溫明殿)과 휘광전(徽光殿) 두 전각 공사가 너무 느리다는 이유로 장작대장인 망도공 근릉(靳陵)을 참수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분수(汾水)에서 고기잡이 구경을 갔다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왕창이 이를 간언했다가 참수당할 뻔하기도 하였다.[9] 황태후 장씨는 왕창에 대한 형벌에 항의하기 위해 사흘간 단식 투쟁을 하였는데, 이를 보다못한 황태제 유예와 하내왕 유찬이 나서서 유총에게 간절히 간했다. 그러나 소무제 유총은 오히려 화를 내며 말했다.
"짐이 , , , 와 같은 폭군이라는 말이더냐? 너희들은 별 것도 아닌 일에 눈물이나 흘리구나!"
그러자 태재 유연년을 비롯한 공경대신 100여 명이 모두 소무제 유총 앞으로 나아가 관을 벗고 눈물을 흘리며 다시 간곡히 간언을 올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아무리 소무제 유총이라도 더이상 간과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노여움을 거두고 왕창을 사면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짐이 어제 한 말은 술에 너무 취해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었다. 경들이 아니었다면은 짐은 잘못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라며 대신들에게 사과한 뒤, 그들에게 각자 비단 100여 필씩 하사하고, 시중을 보내 왕창을 석방시킴과 동시에 표기장군으로 삼고, 정양군공(定襄郡公)에 봉했다.

가평 2년(312년) 5월, 소무제 유총이 한창 오락가락하고 있을 때, 장안에서 몇 달 동안 포위당해 가필 등과 맞서던 중산왕 유요는 마침내 장안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도망쳐왔다. 소무제 유총은 유요를 용양대장군, 행대사마로 강등시킨 후, 하내왕 유찬을 보내 삼저(三渚)에서 서진의 사도 부지(傅祗)를 공격케 하고, 우장군 유참(劉参)을 보내 회현의 곽묵을 치게 하였다. 마침 부지가 병사하여 유찬은 손쉽게 삼저를 함락시키고, 그 병사와 백성 20,000여 호를 거두어 평양으로 옮겼다.

가평 2년(312년) 6월, 소무제 유총이 하간왕 유이(劉易)를 거기장군, 팽성왕 유익을 위장군으로 삼아, 함께 황궁의 금군을 통솔케 하고 궁중에서 숙영하도록 하였다. 또, 고평왕 유괴(劉悝)를 정남장군에 임명해 과거 도읍이었던 이석(離石)에 주둔시켰고, 제남왕 유기(劉驥)를 정서장군에 임명해 도읍 평양 근교에 서평성(西平城)을 축성케 하였으며, 위왕 유조(劉操)를 정동장군에 임명해 평양 북서쪽에 위치한 포자(蒲子)를 진수케 하였다. 이로써 유총은 황자들에게 각기 군권을 쥐어주어 권력을 확고히 다지고자 하였다.

이 무렵에 소무제 유총은 좌귀빈 유영을 황후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지만 유총의 모후 장씨가 유영이 같은 유씨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대신 자기 동생의 딸들이자 유총의 이종사촌들인 장휘광과 장여광 자매를 궁중으로 불려들여 둘 중 한 명을 황후로 삼도록 했다. 유총은 할 수 없이 장휘광을 황후로 삼았고, 유영은 황후가 되지 못하자 홧병이 나서 죽었다.

2.6. 서진 멸망전 및 타락

유곤에게 투항했던 조고와 왕상이 다시 한나라로 귀순하기를 희망하며 회현에서 한군을 영접하려 하였다. 이에 소무제 유총은 진원장군 양복자(梁伏疵)를 파견해 이들을 받아들이려 했는데, 왕상 휘하의 장사 임심과 장수 모목(牟穆)이 배신하여 무리 10,000명을 거느리고 유곤의 아들 유연(劉演)에게로 갔다. 조고는 양복자를 따라 서쪽으로 향했으나, 왕상이 다른 마음을 품고 동쪽 청주로 향하니, 조고는 군대를 보내 곡양(曲梁)에서 왕상을 죽였다. 왕상의 장수 장봉(張鳯)은 잔당을 수습해 유연에게로 귀순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조고를 다시 받아주고 형주(荊州)자사, 영 하남태수로 삼아 낙양을 진수케 하였다.

가평 2년(312년) 7월, 석륵이 양국(襄國)에 자리를 잡자, 소무제 유총은 그를 기주(冀州)목에 임명하고 상당공(上黨公)에 봉하였다.

가평 2년(312년) 8월, 유곤이 호군 영호성(令狐盛)을 살해하자, 이에 원한을 품은 영호성의 아들 영호니(令狐泥)가 한나라로 투항해 유곤군의 허실을 누설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매우 기뻐하며 하내왕 유찬, 중산왕 유요 등에게 영호니를 길잡이로 삼아 병주(并州)를 공략하게 하였다. 유곤은 그 소식을 듣고 상산(常山)과 중산(中山)에서 병력을 징집하는 한편, 탁발의로에게 구원을 청하고, 장수 학선(郝詵)과 장교(張喬)를 보내 유찬을 막게 하였다. 유찬이 학선과 장교를 무찔러 전사시키고 곧바로 진양을 포위하니, 태원태수 고교(高喬), 병주별가 학율(郝聿) 등이 진양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당시 진양성에는 유곤의 노부모가 있었기에, 유곤은 급보를 전해듣고 상산의 병력만으로 달려가 진양을 탈환하려 했으나 이길 수 없었다. 유곤은 하는 수 없이 기병 수십기만 거느린 채 상산으로 달아났고, 한군은 진양으로 들어가 성을 장악하였다. 영호니는 복수의 의미로 유곤의 부모를 모두 주살하였다. 유찬은 포로로 잡은 상서 노지(盧志), 시중 허하(許遐), 태자좌위솔 최위(崔瑋)를 평양으로 압송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노지를 태제태사, 허하를 태보, 최위를 태부로 삼고, 투항한 고교와 영호니를 무위장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유요를 거기대장군, 유풍(劉豊)을 병주자사로 삼아 진양을 지키게 하였다.(진양 전투)

가평 2년(312년) 10월, 유훤(劉烜)을 대왕(代王), 유령(劉逞)을 오왕(吳王), 유랑(劉朗)을 영천왕(潁川王), 유고(劉皋)를 영릉왕(零陵王), 유욱(劉旭)을 단양왕(丹陽王), 유경(劉京)을 촉왕(蜀王), 유탄(劉坦)을 구강왕(九江王), 유황(劉晃)을 임천왕(臨川王)에 봉했다. 또, 왕육을 태보, 왕창을 태위, 임의를 사도, 마경을 대사공, 주기를 상서령, 범륭을 좌복야, 호연안을 우복야에 임명하였다.

유곤이 구원을 청했던 탁발부에서 탁발의로가 탁발육수에게 수만 대군을 주고 선봉에 세워 탁발보근(拓跋普根), 위웅(衛雄), 범반(範班), 희담(姬澹) 등과 함께 진양을 공격해, 궁지에 몰린 유곤을 구원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탁발의로는 200,000 대군으로 그 뒤를 이어 진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곤은 패잔병 수천 명을 겨우 수습하고 탁발부의 군대를 위해 길을 안내했다.

한나라의 중산왕 유요는 분수(汾水) 동쪽에서 탁발육수의 군대를 영격하려다 도리어 패주하고, 겨우 전장에서 탈출하여 진양으로 들어갔다. 유요는 탁발부의 군대가 강해 진양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대장군 유찬, 진북대장군 유풍과 더불어 군사를 풀어 진양의 백성들을 실컷 약탈하였다. 곧이어 탁발육수가 진양성을 포위하자, 유요와 유준은 치중을 모두 불태워 짐을 줄인 뒤, 포위망을 돌파하여 몽산(夢山)을 통해 한나라 영토로 돌아갔다. 하지만 후방의 본군을 지휘하던 탁발의로가 한군의 뒤를 추격해 남곡(藍谷)에서 그들을 대파하고, 장수 유풍과 형연을 생포하였으며, 한의 장수 유유(劉儒), 간령(簡令), 장평(張平) 등과 한군 3,000여 명을 참수하였다. 유요는 탁발부의 병사들에게 붙잡힐 뻔했으나, 토로장군 부호(傅虎)가 유요로 위장한 덕에 겨우 평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 유찬의 참군 노심(盧諶)이 유곤에게 투항하자, 분노한 소무제 유총은 그 아버지 노지와 동생 노밀(盧謐), 노선(盧詵)을 참수하였다.(남곡 전투)

가평 2년(312년) 12월, 장식의 딸 장휘광을 황후로 삼으면서 장식을 좌광록대부로 임명했다. 이 무렵에 서진의 옹주자사 가필을 살해한 팽천호(彭天護)를 양주(凉州)자사에 임명하였다.

가평 3년(313년) 2월, 처음에는 잘 대접해주었지만 점점 회제 사마치가 싫증난 소무제 유총은 광극전에서 연회를 크게 열고, 회제 사마치로 하여금 참석한 사람들에게 술을 돌리게 하였다. 이 모습을 본 광록대부 유민(庾珉), 왕준(王雋)이 슬픔과 분노를 이겨내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기분이 나빠져 왕준 등이 유곤과 내응한다는 명목으로 회제를 독살하고, 유민을 비롯한 서진의 옛 신하들 10여 명을 주살하였다. 또, 회제에게 하사했던 첩 유씨를 다시 자신의 귀인으로 가져오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가평 3년(313년) 3월, 소무제 유총이 유아(劉娥)를 세 번째 황후로 세우고, 그녀를 위해 황의전(鷬儀殿)을 축조하였다. 이에 진원달은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소무제 즉위 후 지나치게 늘어난 토목공사와 잦은 출병으로 인해 죽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며 간하였다. 유총은 마침내 분노가 폭발하여
"짐은 만기(萬機)의 주인으로서 황궁에 전(殿) 하나 지으려 하는데, 어찌 너같은 쥐새끼에게 그걸 일일이 묻겠느냐! 이 종놈을 죽이지 않는다면 짐의 마음이 어지럽혀져 전을 완공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장차 참할 것이니, 그 처자 역시 끄집어내어 죽이고 쥐새끼와 함께 구멍에 파묻도록 하라!"
당시 소요원(逍遙園)의 이중당(李中堂)에는 그 이름답게 한가운데에 오얏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진원달은 그 오얏나무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버티면서 울부짖었다.
"신이 거듭 말하는 것은 사직을 위한 계책임에도 폐하께서 신을 죽이신다면, 신은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위로는 하늘에 호소할 것이고, 아래로는 선제께 호소하겠습니다. 일찍이 주운(朱雲)이 이르기를, 「신은 지하에서 용봉(龍逢), 비간(比干)과 노니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라 하였으니, 폐하께서 어찌 마음을 놓고 지내실 수 있겠습니까!"
진원달은 쇠사슬을 허리에 두르고 나무에 묶인 채 버티고 있어, 좌우에서 아무리 그를 끌어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유총은 부아가 더욱 치밀어 올라 날뛰기 시작하니, 하간왕 유이, 대사도 임의, 광록대부 주기, 태위 범륭 등이 모두 나와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그때 후당(後堂)에 있던 황후 유아가 소식 듣고 급히 형을 정지해달라는 간절한 서신을 써서 중상시를 통해 유총에게 전달하자, 그제서야 유총은 진정하고 진원달을 끌어안으며 사과하였다. 이때 유총이 진원달에게 황후의 서신을 건네니, 진원달도 한발짝 양보하여 황후의 현명함을 칭찬하였다. 이 일에 감명받은 하간왕 유이는 소요원을 "납현원(納賢園)", 이중당을 "괴현당(愧賢堂)"으로 이름을 고쳤다.

가평 3년(313년) 4월, 민제 사마업이 회제 사마치의 죽음을 전해듣고 장안에서 서진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중산왕 유요, 사예교위 교지명, 평서장군 조염, 무아장군 이경년(李景年)을 보내 장안 공략을 재개하였다.

가평 3년(313년) 7월, 유곤이 형북(陘北)에서 탁발부의 탁발의로와 접견해 한나라 정벌에 대해 논의한 후 진군하여 남곡을 점거하였다. 이후 유곤은 감군 한거(韓據)에게 서평성(西平城) 공격을 명했으며, 대공 탁발의로도 탁발보근을 보내 북굴(北屈)에 주둔하여 유곤을 원조하였다. 이에 소무제 유총은 대장군 유찬을 파견해 남곡의 유곤을 치게 하고, 유이에게 표기대장군을 더해 여러 장수들과 함께 탁발보근을 막게 하였으며, 탕진장군 난양(蘭揚) 등은 서평성으로 보내 수비를 돕게 하였다. 유곤이 한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군대를 거두어 철수하니, 소무제 유총은 여러 군대들에게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병주 공략의 계책을 생각해내게 하였다.

가평 3년(313년) 11월, 장안을 공략하러 갔던 유요가 또 패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가평 3년(313년) 12월, 서진의 하남윤 위준이 석량(石樑)에서 세력을 키우는 것을 꺼려 중산왕 유요를 보내 토벌하였다. 서진의 연주(兗州)자사 유연과 하내태수 곽묵이 위준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황하 이북에서 유요에게 요격당해 둘 다 대파되었고 위준은 석량을 버린 채 야반도주하다 붙잡혀 처형되었다.

가평 4년(314년) 정월, 유성 하나가 견우(牽牛)에서 나와 자미(紫微)로 들어가더니, 그 빛이 땅까지 이어져 평양에서 10리 떨어진 지점에 충돌하였다. 유성의 파편은 대부분은 27보 안으로 퍼졌는데, 이를 기점으로 평양에서 악취나기 시작했고 그 파편 주변에서는 괴이한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소무제 유총은 이 징조를 매우 불길하게 여겨 공경대신들을 불러모아 물었다.
"짐의 부덕함이 이와 같은 기이한 현상을 불러들였으니, 각자 거리낌없이 말해보도록 하라."
이에 진원달과 박사 장사(張師) 등이 나아가 말했다.
"성변(星變)의 이상현상은 그 화가 닥칠 조짐입니다. 신은 그것이 후정(後庭)에 3명의 황후를 두어 생긴 일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아직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무너지는 일이 닥치지는 않았으나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삼가시길 바랍니다."
유총이 답했다.
"이런 음양의 이치가 인간의 일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리고 얼마 뒤에 황후 유아가 난산으로 사망하였다. 그 이후로 유성 파편 근처에서 들려오던 소리도 함께 멈추었지만, 유 황후가 사라지면서 여러 비빈들이 다시금 유총의 총애를 두고 다투니 황궁에 절도와 질서가 사라졌다.

소무제 유총이 7공(七公)과 16대장군을 설치해 각 황자들에게 분배하였다. 적장자인 하내왕 유찬은 승상, 영 대장군, 녹상서사에 임명하고 진왕(晉王)으로 전봉시켰다. 그리고 유연년(劉延年)은 녹상서육조사, 유경은 태사, 왕육은 태부, 마경은 대사도, 주기는 대사공, 유요는 대사마로 각각 삼았다.

가평 4년(314년) 3월, 석륵이 유주에서 할거하던 군벌 왕준을 참수하고 그 수급을 평양으로 보냈다. 소무제 유총은 그 공을 치하하고 석륵을 대도독, 독섬제군사(督陝東諸軍事), 표기대장군, 동선우에 임명하였다.

가평 4년(314년) 6월, 유요와 조염을 파견해 다시 장안을 공략하게 하였다. 유요는 위예(渭汭)에 주둔하고 조염은 신풍(新豐)에 주둔했는데, 서진의 태위 삭침(索綝)이 군대를 이끌고 나와 조염을 격파했다. 조염은 신풍에서 나와, 장수 은개(殷凱)와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장안으로 진격하였고, 도중에 빙익에서 요격하러 나온 국윤의 군대도 격파하였다. 국윤이 일단 군사를 거두어 물러났다가 밤에 은개의 진영을 야습하여 은개를 죽이니, 유요는 잠시 장안 공략을 멈추고 하내(河內)로 방향을 틀어 하내군의 회현을 포위하였다. 회현을 지키던 하내태수 곽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양식이 떨어져 하내군을 포기하고, 신정(新鄭)으로 달아나 형양태수 이구에게 의탁하였다. 유요는 주인 잃은 하내를 손쉽게 장악한 후 다시 포판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조염을 보내 북지(北地)를 쳤으나 조염이 청백성(青白城)을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가평 4년(314년) 11월, 승상 직책을 없애고, 진왕 유찬을 상국, 대선우에 임명해 백관을 통솔케 하였다. 이때 평양에 큰 지진이 발생하고 거센 바람이 불어와 곳곳에 나무가 뽑혔고 집들의 지붕이 날아갔다. 또, 광의(光義) 사람 양충(羊充)의 처가 머리가 둘인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를 잡아먹은 양충의 형이 3일 뒤에 사망하였다.

건원 원년(315년) 정월, 평양에 태묘가 완성되자 소무제 유총은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건원(建元)으로 개원하였다. 당시 궁궐 내부에서 밤만 되면 귀신이 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이 정체불명의 소리는 3일 동안 지속되다가 우사예(司隸)의 관청을 궁궐 밖으로 옮기자 멈추었다고 한다.

건원 원년(315년) 3월, 평양에 다시 지진이 발생했으며, 하늘에서 피가 비처럼 내려와 동궁(東宮)의 연명전(延明殿)을 피바다로 만들었고, 5촌 정도 잠긴 후에야 멈췄다고 한다. 동궁에 거주하던 황태제 유예가 이를 보고 기분이 나빠 태사 노지, 태보 최위, 태부 허하에게 이런 일이 발생한 연유를 묻자, 노지 등은 소무제 유총의 뜻은 이미 상국 유찬에게 간 지 오래라며, 대장군 유부의 병영을 습격해 금군을 장악해야 한다는 계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유예는 따르지 않았고, 이 모의는 동궁의 사인 순유(荀裕)가 소무제 유총을 찾아가 전부 털어놓으면서 들통났다. 유총은 즉시 노지, 최위, 허하를 투옥하여 살해한 후, 관위장군 복추(卜抽)로 하여금 동궁을 감시케 하고 유예의 조정 출입을 금하였다. 유예는 두렵고 어찌할 바를 몰라 서인이 되길 자청하고 진왕 유찬을 태자로 세우라는 상소문을 올리려 했지만, 복추가 가로채 소무제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청주자사 조억이 제(齊)와 노(魯) 일대의 군현을 전부 병탄하고 임치(臨菑)에서 무리 100,000여 명을 모아 황하에 수자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석륵은 조억 토벌을 상표하였으나, 소무제 유총은 석륵이나 조억 둘 중 누가 이겨도 통제 못할 것을 걱정해 불허하였다.

이렇듯 국내 정세가 흉흉하였음에도 소무제 유총의 여색에 대한 집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소무제 유총은 한족 신하인 근준의 집에 갔다가 그의 두 딸인 근월광과 근월화 자매를 보고 눈이 돌아갔는데, 근준은 일부러 이 미인계를 준비해왔었기 때문에 선뜻 유총에게 딸들을 내어주었다. 소무제 유총은 근준의 딸들을 그날 바로 황궁으로 데려가고 10일 후에는 황후로 삼았다. 당시까지 뒷방 신세였던 귀빈 유씨 두 명은 유총이 그들을 위안해준다면서 그녀들을 좌황후와 우황후로 삼고 근월광은 상황후로 삼았다. 이리하여 한 국가에 3명의 황후가 존재하게 되자, 좌사예 진원달이 간하였다가 우광록대부로 강등당하고 권한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태위 범륭 등 대신들의 탄원서에 소무제 유총은 어쩔 수 없이 진원달을 어사대부, 의동삼사로 임명해 복권시켜 주었다.

건원 원년(315년) 8월, 중산왕 유요가 하남을 공격해 위준의 잔당을 이끌던 그 조카 위해(魏該)를 패주시켰다. 이후 형양(滎陽)으로 진격해 이구를 복속시키고, 양원(襄垣)에서 유곤의 군대까지 격파한 후, 유곤의 근거지인 양곡(陽曲)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소무제 유총이 장안 함락이 우선이라며 유요를 제지하니, 유요는 다시 포판으로 돌아가 주둔하면서 도중에 곽매(郭邁)도 토벌하였다.

건원 원년(315년) 9월, 대홍려를 양국으로 보내 석륵에게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책명을 내려 석륵을 섬동백(陝東伯)으로 삼아 그에게 주자사, 장군, 지방 수령의 임명권을 인정해주고 연말에 한 번만 보고하게 하는 특권을 내렸다.

건원 원년(315년) 10월, 유요가 장안 공략에 나서기 위해 속읍(粟邑)으로 옮겨 주둔하자, 장안의 서진 조정은 국윤을 대도독, 표기장군으로 삼아 유요를 막게 하였다. 유요는 먼저 빙익(馮翊)을 함락시켜 빙익태수 양숙(梁肅)을 만년(萬年)으로 도망치게 하고, 상군(上郡)을 공격해 상군태수 장우(張禹)를 도주케 하였다. 국윤은 영무(靈武)에 진을 쳤지만 군세가 한군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약소하여 감히 도울 생각도 못했다.[10] 이에 관우(關右)의 호족들은 이길 것이 확실해보이는 한나라에 붙어 유요에게 응했고, 유요는 황부(黃阜)를 점거해 본격적으로 장안성을 노렸다.

한군이 장안 공략을 코앞에 두고 있을 동안, 진원달은 상황후 근월광의 행실이 부도덕해 황후 적격이 없다며 탄핵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근월광을 무척 총애하였음에도 조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진원달의 세력을 고려하여 마지못해 근월광을 황후에서 폐위시켰다. 하루아침에 후궁으로 강등당한 근월광이 수치심에 자결하니, 소무제 유총은 근월광을 그리면서 평소 잔소리만 해대는 진원달을 향한 원망만 더욱 심해졌다.

건원 2년(316년) 정월, 중상시 왕침(王沈), 선회(宣懐), 유용(兪容), 중궁복야 곽의(郭猗), 중황문 능수(陵修) 등의 환관들은 소무제 유총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렸다. 특히 작년 겨울부터 소무제 유총이 후궁에서 자주 연회를 열어 어떤 때에는 3일 동안 술에 안 깨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아예 100여 일 동안 조정에 나오지도 않았다. 국정 운영은 모두 상국인 아들 유찬이 처리하였고, 오직 사람을 처형하거나 관직을 내리는 일만 중상시 왕침을 통해 보고받았다. 이에 왕침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채 사사로이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고, 군신들은 왕침의 말을 곧 유총의 뜻으로 여겼다. 이로 인해 여러 공적을 세운 옛 공신이라도 상이 제대로 내려지지 않는가 하면, 간사한 아첨만 하는 소인배는 수일만에 2천석의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다. 군대의 원정은 해마다 일어나는데, 병사와 장수들에게 상으로 주어지는 금전이나 비단은 없었던 반면, 후궁의 집안에 하사하는 재물은 그 집안에서 일하는 동복이라도 한번에 수천 만전을 받았다. 심지어 왕침 등의 수레, 의복, 저택은 제후왕의 것보다 화려했고, 그 자제 중 서민에서 내사령으로 벼락승진한 자가 30여 명에 달했는데, 이들 모두 하나같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백성들에게 큰 해로움이 되었다. 이런 마당에 황후의 아버지 근준과 그 종족들은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며 환관들에게 빌붙어 아첨하기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황태제 유예에게 원한이 있던 곽의와 근준이 상국 유찬에게 그가 모반을 꾸민다 참소하였다. 여기에 대장군종사중랑 왕피(王皮), 위군사마 마돈(劉惇)까지 가세하여 거짓 증언을 하자, 유찬은 그들의 말을 믿었다. 당초 근준의 사촌여동생은 유예의 시녀가 되어 그를 섬겼는데, 유예의 시종과 몰래 사통하여 음란한 행위를 하다가 들켜 분노한 유예에게 살해당한 적이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유예는 누누이 근준을 비웃었기에, 그를 향한 근준의 원한은 매우 깊었다. 근준은 유찬에게 유예를 죽이면 황태자에 오를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부추겼고, 동시에 복추를 동궁에서 떠나게 한다면 유예를 죽이는 데에 유리해질 것이라 유세하였다. 유찬은 근준의 말에 넘어가 명을 내려 복추를 동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건원 2년(316년) 2월, 왕침이 소무제 유총에게 보고하면서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조정의 대신들을 모함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후궁에서 나와서 상추각(上秋閣)에 이르러 소부 진휴(陳休), 좌위장군 복숭, 특진 기무달(綦毋達), 태중대부 공사욱(公師彧), 상서 왕염(王琰)와 전흠(田歆), 대사농 주탄(朱誕)을 주살하였는데, 이들 모두 환관들이 꺼리던 대신들이었다. 시중 복간(卜幹)이 소무제 유총 앞에 울면서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은거하는 현명한 이들을 찾아 측근으로 삼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충량한 이들을 주살하신다면 장차 나중에는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과거 진목공이 삼량(三良)을 죽였을 때, 군자들은 진(秦)이 패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진여공은 3명의 대신들을 시체로 만들고도 무도함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좌우의 애증의 말만 듣고 하루아침에 7명이나 되는 대신들을 주살하십니까! 조정이 아직 신하들에게 있어 넘어가지 않은 상태이니, 폐하께서는 호천(昊天)의 은택을 베푸시고 부디 예전의 뇌정(雷霆)과도 같은 위세를 되찾아주시옵소서! 또, 만일 그들에게 죄가 있다 해도 그 죄명을 드러내지 않고 바로 처벌한다면 어찌 천하에 보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제왕의 법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라 간하고 피가 흐를 정도로 머리를 조아렸다. 이에 왕침이 복간을 꾸짖었다.
"복 시중은 지금 조명을 거역하는 것인가?"
유총 역시 복간의 간언을 듣지도 않고 면직시켜 서인으로 내쫓았다.

유총의 서장자인 태재 유이는 어사대부 진원달, 대장군 유부, 금자광록대부 왕연과 대궐로 나와 표문을 올려 간하였다.
"신(臣)이 듣기로는, 선한 사람은 하늘과 땅의 규율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과거 문왕주나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고, 환제영제는 환관들의 말만 듣다가 한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자고로 명왕(明王)의 시대라 할지라도 환관이 정사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것은 무제, 순제, 안제의 고사만 보아도 족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왕침 등은 상백(常伯)의 지위에 있으면서 대신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어, 궁 밖으로 세를 떨쳐 사사로운 감정으로 정사에 임하고, 폐하께 빌붙어 아첨함으로써 조정과 임금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또, 형벌을 제멋대로 내리고 뇌물이 아니면 관리의 천거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나라의 왕공(王公)들도 이들을 보면 깜짝 놀라며, 대신과 재상들은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합니다. 이는 폐하께 절개를 지키던 상서 왕염(王琰) 등의 충직한 신하들이 그 간사한 것들에 의해 극형에 처해져 죽은 것만 봐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서너 차례 더 살피지 않으시고 외람되게 그들을 주육하셨으니, 신들은 그 원한과 고통이 구천에 사무치고 천하가 비통해할까 두렵습니다. 왕침 등은 모두 칼과 톱을 휘두르는 배은망덕한 무리로, 그들을 향한 총애가 어찌 선비와 군자에게 베푸는 은혜보다 더 많은 보답이 나오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을 가까이 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귀중한 임무를 맡기십니까? 과거 제환공역아로 문란해졌고, 효회황제황호로 멸망하였는데, 이는 모두 먼 과거의 일만이 아닙니다. 지금 장안의 진(晉)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고, 파촉의 이웅성(成)을 세웠으며, 석륵과 조억(曹嶷)은 자립할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시국이 이와 같을진대, 왕침과 같은 자를 요직에 앉힌다면 그 누가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부디 왕침 등을 면직시키고 그들을 정죄(定罪)토록 하소서."
유총은 유이의 상소문을 받아서 왕침 등에게 보이며 말했다.
"내 아들이 진원달에게 이끌려 결국 바보가 되었구려."
왕침 등은 유총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 흘리며 말했다.
"신을 비롯한 소인들은 무지몽매함에도 폐하께서 발탁해주신 덕에 궁각(宮閣)의 청소라도 할 수 있었으나, 왕공과 조정의 신하들이 저희를 원수 보듯이 미워하고 또, 폐하를 심히 원망하나이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대조(大造)의 은혜를 거두시고, 신들의 고깃덩어리를 가마솥에 넣어 황조(皇朝) 위아래의 화목함을 도모하소서."
그러자 유총은
"저들이 미친 소리를 계속 늘어놓을 뿐인데, 내 어찌 경들을 원망하겠나!"
라 탄식하였다. 그때 곁에 있던 상국 유찬이 왕침의 충정을 칭찬하니, 유총은 크게 흡족해하며 이를 이유로 왕침 등을 모두 열후(列侯)에 봉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유이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왕침을 열후에 봉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상소문 쓰고 다시 대궐로 나와 유총에게 간곡히 간하였다. 그러나 유총은 몹시 분노하여 유이의 손에서 상소문을 낚아채 보란 듯이 손수 찢어 버렸다.

건원 2년(316년) 3월, 유이가 분노와 원한이 사무친 나머지 분사하였고, 그의 상소문을 도왔던 진원달은 또한 절망하여 자결하였다. 이때 평양성 궐내에서 땅이 갑자기 가라앉아 1장 5척 깊이의 구덩이가 생겼고 무기고가 가라앉았다.

건원 2년(316년) 6월, 하동(河東)에 대규모 메뚜기떼가 발생해 백성들은 콩이나 기장조차 구할 수 없었다. 사예교위 근준은 부하들과 함께 하동에 가서 메뚜기를 보이는 족족 잡아 땅에 묻었음에도 그 수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메뚜기의 울음소리는 10리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요란했고, 메뚜기들을 땅 속에 묻어도 다시 금방 뛰쳐나와 별다른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건원 2년(316년) 7월, 북지에 기근이 심해져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산왕 유요는 이를 기회로 북지를 떨어뜨리고자 군대를 거느리고 북지태수 국창(麴昌)이 지키는 북지를 포위하였다. 이에 강족 추장이 군사를 이끌고 서진의 편에 서서 북지를 도우려 했으나, 유요는 유아를 보내 이들을 전부 격파하였다. 서진의 대도독 국윤도 북지를 구원하려 했지만 유요에게 격퇴당해 영무(靈武)로 도망쳤고, 얼마 안 가 북지는 유요에 의해 함락되었다. 유요는 계속 진격하여 경양(涇陽)에서 위수 이북의 여러 성채를 탈취하고, 서진의 건위장군 노충(魯充), 산기상시 양위(梁緯), 소부 황보양(皇甫陽)을 사로잡았다.

한편, 하동에서 일어난 메뚜기떼가 수도 평양으로 날아와 큰 피해를 입었다. 평양 역시 콩이나 기장으로 배를 채우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졌고, 백성들 중 아사하거나 반역을 꾀하다 죽은 자가 5~6할이나 되었다. 이에 석륵은 장수 석월(石越)에게 기병 20,000기를 주어 병주에 주둔시켜 그 유민을 기주로 받아들이게 하니, 200,000여 호가 석륵에게로 귀부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황문시랑 교시(喬詩)를 보내 따졌으나, 석륵은 답도 하지 않고 은밀히 청주의 조억과 손을 잡았다.

소무제 유총이 사망한 황후 장씨의 여종 번씨(樊氏)를 상황후로 삼았다. 이로써 황후의 옥새와 인수를 차고 있는 여인이 10명이 넘으니, 조정 내외로 법과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았고, 아첨하여 총애받는 자들만 넘쳐났으며, 뇌물은 아예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군대는 항상 외지에 주둔해있었고, 굶주림과 전염병이 창궐하여 백성들이 큰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소무제 유총은 후궁에 사사로이 쓰는 금액이 천만 전에 달했다. 유부는 매번 아버지를 찾아가 눈물 흘리며 간언을 올렸으나, 유총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번은 유총이 유부를 귀찮게 여겨
"너는 네 아비가 죽기라도 바라느냐?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아침저녁으로 울기만 하는구나!"
라 분노하자, 유부는 걱정과 울분으로 병에 걸려 결국 형 유이처럼 분사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성에서 개와 돼지 무리가 출몰해 여러 관청과 궁궐 문 앞에 모여 함께 어울리는 기이한 현상도 목격되었다. 심지어 한 돼지는 문관의 관모를 쓴 채 조정에 올라 소무제 유총의 어좌 위에 올랐는데, 이윽고 무관의 관모를 쓴 개 한 마리도 들어와 전 위에서 서로 싸우다 둘 다 죽어버렸다. 문지기들이 개나 돼지가 문을 통해 들어온 적이 절대 없다며 완강히 부인하니, 사람들은 이를 몹시 불길하게 여겼다.

건원 2년(316년) 8월, 중산왕 유요가 마침내 장안을 포위공격해 그 외성을 무너뜨렸다. 서진의 민제 사마업과 군신들은 소성으로 퇴각해 농성을 이어갔다.

건원 2년(316년) 9월, 소무제 유총이 광극전에서 연회를 열어 군신들을 위무하고, 유폐되었던 황태제 유예도 그 자리에 참석케 하였다. 동궁에 갇혀 근심과 걱정으로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새어 초췌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유예가 소무제 유총 앞에서 눈물로 다시 사죄를 하니, 오랜만에 동생을 본 유총도 감정이 북받쳐 울면서 술을 권하고 극진히 대함이 예전과 같았다.

인가 원년(316년) 11월, 소성에서 버티던 서진의 민제 사마업과 군신들은 양식이 다 떨어져 결국 투항하였다. 장안을 함락시킨 중산왕 유요는 민제 사마업과 서진의 공경 이하 관원들을 평양으로 보냈다. 평양에 도착한 민제 사마업은 한나라 황궁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고, 소무제 유총은 광극전에서 나와 친히 사마업을 맞이하였다. 이때 서진의 대도독 국윤이 엎어져 통곡하기 시작하니, 그를 아무리 부축여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소무제 유총은 노하여 국윤을 하옥한 뒤, 민제 사마업을 광록대부에 임명하고 회안후(懷安候)에 봉했다. 또, 공을 세운 유요를 가황월, 대도독, 섬서제군사(陝西諸軍事), 태재로 삼고 진왕(秦王)에 봉했다. 그리고 유찬을 보내 태묘에 이 경사스런 일을 고하게 하고, 경내 대사면령을 내려 인가(麟嘉)로 개원하였다. 옥에 갇힌 국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분을 못이겨 자결하자, 소무제 유총은 그 충성을 기려 거기장군으로 추증해 절민후(節愍候)라는 시호를 내리고, 항복한 삭침 불충하다 하여 평양성 저잣거리에서 참수하였다.(서진 멸망)

2.7. 말년

인가 2년(317년) 정월, 초하루부터 검은 안개가 수도 평양을 뒤덮는 이상현상이 나타나 종일토록 낮이 밤처럼 어두웠는데, 선광릉에 세워둔 석상이 말을 하자 안개가 사라졌다. 같은 달에 진왕 유요가 장안 동쪽의 홍농(弘農)을 공격해 점령하자, 홍농태수 송철(宋哲)은 강동으로 도주하였다.

인가 2년(317년) 2월, 장안의 서진 조정이 붕괴되면서 남은 서진 잔당은 형양의 이구와 양곡의 유곤 뿐이었다. 이에 소무제 유총이 사촌동생 유창(劉暢)에게 보기 30,000명을 주어 형양을 공격케 하니, 한왕고루(韓王故壘)에 주둔해 있던 이구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라 사람을 보내 짐짓 항복하였다. 유창은 이구의 투항에 안심하여 장수들과 연회를 열어 모두 취했다가 이구가 보낸 결사대의 공격을 받고 대패하여 단기로 도주했다.

궁전에 또다시 혈우가 내려 광극전이 피로 가득찼고, 동궁의 4문이 까닭없이 무너졌으며, 내사의 여인들이 갑자기 남자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이때 소무제 유총의 아들인 동평왕 유약(劉約)이 사망하였다가 다시 부활해 부주산에서 할아버지 광문제 유연을 만났다는 사후세계 경험담을 털어놓는 일도 있었다.

인가 2년(317년) 3월, 유찬이 부하인 왕평(王平)을 시켜 황태제 유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하였다.
"조서에서 이르기를, 경사(京師)에 장차 변고가 있을 예정이니 옷 속에 갑옷을 입어 대비하라 하였습니다."
황태제 유예는 그 말을 믿고 동궁의 신하들에게 옷 안에 갑옷을 입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찬은 그 즉시 사자를 근준과 왕침에게 파견해 일렀고, 근준은 곧바로 소무제 유총를 알현해 말했다.
"왕평이 이르기를 동궁은 항상 은밀히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하였는데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무제 유총은 크게 놀라서 말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자 왕침 등이 한 목소리로 진언했다.
"신들은 오래도록 들은 바가 있었으나, 폐하께서 믿지 않으실까 두려워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에 소무제 유총은 유찬으로 하여금 동궁을 포위하게 하였다. 유찬은 왕침과 근준을 보내 강족과 저족 추장 10여 명을 체포한 후[11], 그들을 심문하면서 높은 기둥에 머리를 매달아놓고 불에 달군 쇠로 그들의 눈을 지져 유예와 반역을 공모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보고를 받은 소무제 유총은 유예가 진실로 반역을 꾀했다 믿고, 왕침 등에게
"오늘에서야 나는 경들이 얼마나 짐에게 충성을 다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유념치 말고 먼저 말을 꺼내도록 하라."
라 하였다. 이로 인해 유예는 역적으로 확정되었고, 동궁의 소속 친위대인 15,000여 명의 4익위 병사들이 모두 갱살되었다. 아울러 유예와 친하게 지내던 대신이나 동궁의 관속 수십 명이 주살당했는데, 이들 모두 왕침, 근준 등에게 평소 밉보인 자들이었다.

인가 2년(317년) 4월, 소무제 유총이 유예를 황태제에서 폐위시키고 북부왕(北部王)으로 삼자, 유찬이 자객을 보내 유예를 암살하였다. 유예는 성품이 온화하고 관대하였으며, 도량이 넓어 강족, 저족 뿐만 아니라 나라의 많은 선비들이 마음 속으로 그에게 귀부하였다. 이에 유예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에 많은 강족, 저족 무리들이 분노하여 들고 일어나니, 그 무리가 100,000여 명에 달했다. 소무제 유총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의 형제는 단 두 사람 뿐이었건만, 결국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구나! 천하가 어찌 짐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라며 통곡하였고, 근준을 행 거기대장군으로 삼아 반란한 무리들을 토벌케 하였다.

인가 2년(317년) 6월, 경내에서 메뚜기떼 대량 발생하여 수도인 평양과 기주, 옹주의 피해가 특히 심하였다. 근준이 메뚜기떼를 진압하러 떠났을 때, 그의 두 아이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또, 강이 크게 범람하여 집 1,000여 채가 침수되었고, 동궁에 재앙이 일어나 문과 전각, 궁전이 모두 흔적도 없이 붕괴되었다. 이때 한의 청주자사 조억은 배반하고 강동에서 할거하는 진왕(晉王) 사마예에게 황위에 오를 것을 권했다.

인가 2년(317년) 7월, 사면령을 내려 사형수 이외의 자를 사면시키고, 유찬을 황태자로 세워 대선우를 더해 조정의 일을 통할하게 하였다.

인가 2년(317년) 8월, 하남태수 조고가 동진의 위장군 화회(華薈)를 임영(臨穎)에서 격파해 죽였다. 이후 조고는 장사 주진(周振)과 갈등하다가, 이구의 농간에 넘어가 주진과 그 아들을 참살하고 기병 1,000기를 거느리고 동진으로 가 항복하였다. 동진 조정은 조고를 다시 낙양으로 보내 지키게 하였다.

인가 2년(317년) 8월, 소무제 유총이 상림(上林)에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민제 사마업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그에게 융복을 입히고 창을 들고 앞장서게 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기 하였다. 서진의 옛 신하들이 이를 보고 한탄하자, 유찬이 유총에게 말했다.
"과거 무왕이 주왕을 주살한 것은 그를 옹립하려는 세력이 허튼 짓을 벌이지 못하게 함이었습니다. 지금 사마씨가 강남을 제패하였고, 조고와 이구가 함께 반역을 꾀하였는데, 저들은 모두 사마업의 구원을 명분으로 삼았으니, 사마업을 죽여 저들의 희망을 끊어놓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유총이 답했다.
"짐이 전에 유민 등의 무리를 죽였음에도 민심은 진나라를 지지하였다. 이를 생각하면 당장 죽이기보다는 잠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상책이다."

인가 2년(317년) 12월, 소무제 유총은 광극전에서 연회를 열어 신하들을 모이게 하고, 민제 사마업에게 술을 돌리라 명하였다. 또, 연회 도중에 유총은 측간에 가면서 사마업에게 그 뚜껑을 열게 하기도 하였다. 이런 치욕스런 모습에 옛 서진의 신하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그 와중에 상서 신빈(辛賓)이 자리에서 일어나 민제 사마업을 끌어안은 채 통곡하였다. 유총은 분노하여 신빈을 처형하였다.

오래지 않아 동진의 하남태수 조고와 하내태수 곽묵이 하동을 침범해 강(絳)에 이르렀다. 우사예(右司隸)의 백성 30,000여 명이 동진군의 진영으로 도주하자, 소무제 유총은 기병장군 유훈(劉勲)을 보내 그 뒤를 쫓아 10,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그때 조고와 곽묵가 군대를 물려 후퇴하니, 태자 유찬은 100,000 군대를 통솔하여 소평진(小平津)에 주둔하고 다시 민제 사마업을 주살하면 조고가 알아서 무너질 것이라 상표하며 유총에게 빠른 시일 내로 사마업을 죽이라 독촉하였다. 마침내 결심이 선 소무제 유총은 민제 사마업을 살해하였다. 한편, 조고의 군대와 대치하던 유찬은 장군 유아생(劉雅生)에게 지름길로 나아가 낙양을 습격케 하여 탈환하였고, 본거지를 잃은 조고는 놀라 양성산(陽城山)으로 도망쳤다.

인가 3년(318년) 3월, 유찬과 유아생은 양성산으로 도망친 조고를 추격하였다. 이에 이구가 곽묵, 곽송을 보내 조고를 구원케 하면서 참전하니, 두 군세는 낙수(洛水)를 사이에 두고 싸우면서 혈전을 벌였다. 그 소식을 들은 유총은 태위 범륭을 파견해 유찬을 돕게 하였다. 이후 아들인 제남왕 유기(劉驥)를 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 녹상서사로 삼고, 제왕 유매(劉勱)를 대사도로 삼았다.

중상시 왕침에게는 그 해로 14세가 되는 수양딸이 있었는데, 그 미색이 절묘하게 아름다워 소무제 유총이 그녀를 들이고 좌황후로 삼았다. 이에 대해 상서령 왕감(王鑒), 중서감 최의지(崔懿之), 중서령 조준(曹恂)이 간언하자, 소무제 유총은 대로하여 선회를 유찬에게로 보내
"왕감 등의 소인배들이 나라를 업신여기고 그 입으로 광언(狂言)을 내뱉어 군신간에 상하의 예가 없어졌으니 속히 처리하도록 하라."
라는 말을 전했다. 이에 유찬은 왕감 등을 체포해 동시(東市)로 끌고가 참수형을 준비했다. 이를 들은 금자광록대부 왕연이 황궁으로 달려가, 간하기 위해 소무제 유총과의 알현을 청했지만 문지기에 의해 제지당했다.

왕감 등의 처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왕침이 지팡이로 왕감의 머리를 툭툭 치며
"노예놈아, 이제 네가 어찌 다시 악행을 저지를 수 있겠느냐? 지금까지 너 같은 자와 함께 일을 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구나!"
라 조롱하였다. 이에 왕감이 눈을 부릅 뜨고 왕침을 노려보며 꾸짖었다.
"애송아! 한나라를 멸할 자는 너희 쥐새끼들과 근준이로다! 내가 죽으면 마땅히 선제께 고하고 너희들을 지하로 끌고 가리라!"
그때 최의지도 거들었다.
"근준의 마음은 어미를 잡아먹는 새끼 올빼미와도 같으니, 그는 분명 국가에 환난을 불러올 자임이 틀림없다. 너는 지금껏 사람들을 잡아먹었으니, 너 역시 누군가에게 잡아먹히리라."
그리고 얼마 뒤에 사형이 집행되어 왕침은 그들을 모두 참수하였다. 이후 선회의 수양딸도 소무제 유총이 취하고 중황후로 삼았다.

인가 3년(318년) 7월, 소무제 유총이 병에 걸려 병상에 드러누웠다. 유총은 진왕 유요를 승상으로 삼고, 석륵을 대장군으로 삼아 둘 모두 녹상서사를 더하고 조서 내려 보정을 부탁했지만 두 사람 모두 굳게 사양했다. 유총은 다시 조서를 내려 유요를 승상, 옹주목, 석륵을 대장군, 유기2주목, 왕경을 태재, 제남왕 유기를 대사마, 창국공 유의(劉顗)를 태사, 주기를 태부, 호연안을 태보로 각각 삼고 모두 나란히 녹상서사를 겸하게 하였다. 또, 범륭을 수상서령, 의동삼사로 임명하고, 근준을 사예교위로 임명해 서로 돌아가면서 상서를 통해 주사(奏事)하도록 하였다.

동년 7월 19일, 소무제 유총이 붕어하였다. 유총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근준이 황제 유찬을 포함해서 유씨 황족을 모두 도륙내고 한천왕(漢天王)을 칭했으며 동진 원제 사마예에게 우호를 표시했다. 이때 근준은 태조 광문제 유연과 열종 소무제 유총의 능인 영광릉과 선광릉을 파헤치고, 그들의 시체를 모독한 다음 목을 베고 관까지 불태웠다. 이후 유요가 근준의 난을 진압하고 엉망이 된 시신을 수습하여 개장하였다.

3. 미디어 믹스

삼국지평화》에서는 뜬금없이 촉한의 소열제 유비의 친척으로 설정되었고, 유총이 서진을 멸망시킨 후,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으로 소설이 마무리된다.


삼국지톡 완결편에 아버지 유연과 전화하는 장면으로 짧게 등장한다.

4.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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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카락의 길이가 2척(47cm)이었다는 기록이 있다.[2]진서》 <유총 재기>에는 4남이라고 되어 있다.[3]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47cm 정도가 된다.[4] 종제(従弟)이며 동시에 태조 광문제 유연의 처남이었던 호연유(呼延攸)는 숙부이며 악부였던 호연익의 아들이었다. 광문제 유연은 호연유의 무능하고 속물적인 인격을 꺼리고 싫어하여 결코 요직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5] 평소 초왕 유총을 싫어했다고 한다.[6] 광문제 유연이 죽기 직전에 여러 대신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후사를 부탁했는데, 유예는 여기에 선택받지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7] 원래 흉노족은 아버지가 죽은 후,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부인들을 차지하는 부사취수제가 있었기에 흉노 세계관으로 보면 비정상적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유총은 한족까지 다스리는 중화권의 황제였다.[8] 팔왕의 난 당시 낙양성을 함락시킨 하간왕 사마옹의 장수 장방이 세워둔 보루다.[9] 유총의 후궁인 상부인 왕씨가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아버지 목숨만 살려달라 애걸한 덕에 투옥되는 선에서 끝났다.[10] 이때 당시 장안의 서진 정권은 황제와 백관들이 야생벼를 뜯어먹어야 했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한나라에 비해 약세였다.[11] 유예는 대선우로서 저족과 강족 등 이민족의 통치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고 있어 이들과 친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