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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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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진 추존 · 비정통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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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장군 예장부군 영천부군 경조부군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rowcolor=#3797e8> 비정통 황제
조왕 원왕 성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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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797e8><colcolor=#ece5b6>
서진 추존 황제
사마사 | 司馬師
파일:external/e.hiphotos.baidu.com/b90e7bec54e736d1a3724caa9b504fc2d562692b.jpg
출생 208년
후한 사례 하내군 온현 효경리
(現 허난성 자오쭤시 원현 샤오징진)
사망 255년 3월 23일 (향년 47세)
조위 예주 영천군 허창
(現 허난성 쉬창시)
능묘 준평릉(峻平陵)
재위기간 조위 장평향후
249년 ~ 251년 9월 7일
조위 무양후
251년 9월 7일 ~ 255년 3월 23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3797e8><colcolor=#ece5b6> 본관 하내 사마씨
휘 사(師)
부모 부황 고조 선황제
모후 선목황후
형제자매 9남 2녀 중 장남
배우자 경회황후, 폐후 오씨, 경헌황후
자녀 5녀 (양자 1명)
자 자원(子元)
작호 장평향후(長平鄕侯) → 무양후(舞陽侯)
묘호 세종(世宗)
시호 충무후(忠武侯)
→ 경왕(景王) → 경황제(景皇帝)
}}}}}}}}} ||

1. 개요2. 생애3. 평가4. 삼국지연의5. 가족 관계6. 기타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권신이자 서진의 추존황제. 자는 자원(子元).

진나라(晉) 건국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1], 아버지 사마의와 함께 고평릉 사변을 주도했으며, 이후 위나라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조씨 왕조의 권력을 사실상 무력화하고 사마씨 정권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에 힘입어 이후 동생인 사마소가 진왕에 오르고, 조카인 사마염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서진을 건국하게 된다.

생전의 지위는 장평향후(長平鄕侯), 무양후(舞陽侯), 시호는 충무로 생전의 작위에 더해 무양충무후(舞陽忠武侯)였다. 동생 사마소가 진왕이 되자 그는 형 사마사를 경왕으로 추존했고[2], 조카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한 이후에는 묘호와 존호를 더해 세종 경황제(景皇帝)로 추존되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으로 사마의와 장춘화의 장남이며 사마소의 친형이다. 약관의 나이 때부터 같은 세대 인물이자 처남인 하후현과 더불어 이름을 날렸다. 경초 연간(237년~239년)에 산기상시가 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거듭 승진하여 중호군까지 이르렀다.《진서》경제기에 문아(文雅)하여 풍채(風彩)가 있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풍채라는 단어는 보통 외모에 쓰는 단어이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꽤나 미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말년에 생긴 혹(혹은 종양) 때문에 외모가 많이 망가졌을 가능성이 크다.《삼국지연의》에서는 아버지 사마의와 동생 사마소와 함께 제갈량의 북벌 저지에 참전하였고 아버지가 제갈량에게 당했듯 자신도 호로곡에서 불타 죽을 뻔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서 종군한 적은 없었고 동흥 전투로 보건대 자신의 아버지 사마의와는 달리 병법은 특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근대 왕조 국가의 사서면 구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 왕조를 창건하는 과정을 어떻게든 정당화시키고 윤색하기 마련이건만, 사서에서 대놓고 일찍부터 구 황실에 충심이 없었다고 언급되는 인물이다.[3] 그것도 나라가 기울어 갈 때도 아니고 조예가 건강하고 촉오의 북벌을 모두 막아내며 조위의 성세가 공고하던 시절부터 은밀히 야심을 품고 있었다. 사마사의 아내 하후휘는 남편이 위의 충신으로 남지 않을 것을 눈치챘는데 사마사는 위의 개국공신 하후씨의 피를 이은 그녀를 꺼렸고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이 있었던 234년에 그녀를 독살했다고 <진서>에 적혀 있으나 암살설을 반박하는 정황 근거들이 많고 <진서> 자체가 신뢰도가 좋지 않은 편이라 하후휘 암살설 역시 <세설신어> 등의 야사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만 아버지가 자식을 아끼는 모습이나 동생과 잘 지낸 걸 보면 자기 편과 남의 편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매우 차이나는 인간군상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다.

하후현이 정서장군(征西將軍), 가절도독옹양주제군사(假節都督雍涼州諸軍事)가 된 후 사마사와 교체되어 사마사가 호군(護軍)으로 임명되었다. 〈하후현전〉주석《위략》에 따르면 장제가 호군으로 있을 때 아문(牙門)에서 자리를 얻고 싶으면 1,000필(匹)을 바쳐야 하며, 백인독이 되고 싶으면 500필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사마의는 장제와 가까워서 어느 날 그를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 보았다. 장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하고, 농담으로 낙양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1전(錢)이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했으며 사마의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후현이 장제를 대신하여 호군이 되었지만 이러한 인사를 막지 못했다가 사마사가 호군이 된 후 이런 폐단을 없앴다. 즉, 당시 중원에서는 '필(匹)'과 '전(錢)'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예 대에 사마지 등의 건의로 화폐를 재건하기 위해 오수전이 발행되었음에도 중원에서는 이런 현물거래가 계속 성행했으며 포백(布帛)의 화폐 기능을 제거할 수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2.2. 고평릉 사변

고평릉 사변 시점까지 조상 일파는 사마씨와 조씨의 다툼을 너 죽고 나 살자식 유혈 권력 투쟁으로 바라보진 않았다. 사마의 본인이 조상 일파인 이승 상대로 노망쇼를 벌일 때조차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군(이승)과 우의로 맺어져 있으니 서로 저버리지 마시오." 라고 특별히 언급하며 울고 이승 역시 정말로 사마의의 병환이 심하다고 생각해 조상에게 이 얘기를 전하며 그가 그리 된 것이 애처롭다고 울었을 정도. 이렇게 조상 일파는 사마의를 견제하고 불편한 사이가 되면서도 그 아들이나 측근들에겐 특별히 제약을 가하지 않았고 고평릉 사변 때도 사마의를 믿고 순순히 무장해제 해버렸다.

정시 10년(249년), 아버지 사마의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대장군 조상을 제거하려 하자 함께 출병, 조상과 그 일족을 제거하였는데 이른바 고평릉 사변이다. 동생 사마소가 거사 직전에야 합류한 데 반해 사마사는 처음부터 사병 3천여 명을 은밀히 민간에 잠복시켜 치밀하게 준비했고 이 사건 이후로 위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즉,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권력 찬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변 전날, 사마의가 두 아들의 처소를 살피게 했는데 거사 하루 전에야 얘기를 들은 사마소가 잠을 이루지 못한 반면 사마사는 편안하게 잘 자고 있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2.3. 조위의 실권자

가평 3년(251년)에 사마의가 죽자, 사마씨에 장악당한 조정은 (왕을 폐한 명신) 이윤의 아들인 이척이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은 사례를 들어 사마의와 사마사의 관계를 이들과 비유했고 사마사는 황제인 조방에게 무군대장군 벼슬을 제수받았다. 이후 아버지 사마의보다 강력한 권세를 누렸고, 그 정도는 황제 조방을 이미 뛰어넘었다. 이듬해(가평 4년, 252년)에는 대장군이 되었으며 시중, 지절, 도독중외군사, 녹상서사도 겸해 정치, 군사를 모두 아우르는 권력을 거머쥐었다. 《위서》〈제방기〉주석 왕침의《위서》에 인용된 조방 폐위를 청하는 상소에 따르면 그는 무양후(武陽侯)라는 작위도 새로 받았다.

사마사는 정권을 쥐자 인선을 새로이 했다. 진동장군 도독양주 제갈탄, 진남장군 도독예주 관구검, 정남대장군 의동삼사 왕창, 정동장군 호준, 옹주자사 분위장군 진태에게 국가의 네 방면의 도독을 맡겼으며, 형주자사 양렬장군 왕기, 신성태수 주태, 등애, 석포에게 주와 군을 다스리게 하고, 노육과 이풍에게는 인재 선발을 맡기고, 부하와 우송으로 참모를 삼고, 종회, 하후현, 왕숙, 진본, 맹강, 조풍, 장집에게는 조정을 맡겼다. 경제기에 따르면 일단 이런 인사조치로 천하가 자신이 할 바에 경주(傾注)하여 조야(朝野)가 숙연해 졌다. 어떤 이가 있어 제도(制度)를 바꿀 것을 청하니, 경제가 말하기를 "(모시에) '(사사로이) 아는 것이 있어도 아는 것을 (쓰지) 않고, 상제(上帝)의 법을 따르노라(대아 황의편)'하였으니 이러한 것을 시인(詩人)이 아름답게 여기었소. 3대의 선조(先祖)께서 예전(禮典)과 제도(制度)를 (만드셨으니), 마땅히 받들어야 할 바요, 무력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니, 망령되게 개혁을 할 수 없소" 하였다.

이때 사마사가 최측근 참모로 기용한 인물은 하남윤/상서 직을 맡고 있던 부하라는 인물이었는데 이 자는 '반 조상 파'라는 틀을 만든다 치면 그 최상위에 등재될 인물 중 하나였다. 사마의가 태부로 물러난 뒤 조상이 하안 등을 기용하며 정권을 잡을 당시 부하는 조상의 동생 조희에게 '하안을 경계하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을 들은 하안은 당연히 격분, 거기에 부하는 이후로도 이런 조상과 하안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아 결국 이 둘의 사이는 엄청나게 벌어지게 된다. 그 전후로 하안, 하후현 등이 그의 명성과 후술할 장점탓에 몇 번 그에게 등용을 요구할 겸 교류를 위해 찾아갔으나 이를 다 거절하고 친구들에겐 이들의 단점에 대해 신랄하게 까버리며 이와 엮였던 이풍 또한 폄하한 적이 있다.

부하가 이렇게 적대적으로 나선 건 하안과의 단순한 감정싸움만이 아니라 더 큰 원인이 있었는데, 조예가 황제이던 시절 유소라는 인물이 올린 '고과제'[4]에 대해 최림, 두서 등과 같이 격렬하게 반대한 인물 중 하나였을 정도로 적어도 인재 임용과 관리에 있어선 보수적인 관점을 신봉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이 당시 조상의 행태를 그는 사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결국 등용을 포기한 조상 일파에 의해 몇 번 목숨이 노려지기도 했지만 친구 순의 덕분에 이 위기에서 살아남았고 결국 고평릉 사변이 발발하면서 반 조상파 인물들을 사마 가문이 중용하기 시작하자 처지가 좋은 의미로 역변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에 대해 엄청나게 적대했던 만큼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았던 인물이 바로 부하였던지라 사마사는 그를 자신의 최측근으로 바로 등용한 것이다.

상술한 대로 하안이 한번 까이고도 잠시간은 포기 못했을 정도로 그의 장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인맥이었다. 그는 자신과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인물만 아니면 엄청난 친화력을 보였던 인물이기에 수많은 유명인사나 그 유명인사들의 관계자들과 두터운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당장 쟁쟁한 네임드들만 해도 진군의 아들인 진태와 종요의 아들들, 순욱의 아들들 등등 위나라 건국공신 세력인 영천 사대부들의 2세대를 포함해 엄청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사마씨도 명문 사대부이긴 하지만 영천에 비하면 한끗발 밀릴 수밖에 없었고 이곳이 조위라는 점까지 포함하면 더더욱 그랬기에 그들과 두터운 관계를 맺은 부하를 영입함으로써 그들을 감시하거나 회유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영천의 2세대 중에 부하가 그 컨트롤에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대상은 삼국시대 말 최고의 괴재(怪才)이자 사마씨 최강의 사냥개 종회였다.

한편 이런 '사상적 동질성'과 '조상 일파에 대한 정치적 원한' 면에서 부하에 못지 않았던 인물이 바로 유비의 스승으로 유명했던 노식의 막내 아들인 노육이었다. 노육은 조조 시절부터 그의 아래에서 활동해왔기에 이 시점에선 이미 나름 입지가 탄탄한 원로급 인사로 조예 시절 그의 어록들은 그야말로 당시의 주류보수적 임용관인 유교적 덕행과 평판, 명성을 중시하는 인사평가 법의 결정체였었을 정도. 부하와 달리 고과법에 대해선 미온적이나마 찬성하긴 했지만[5] 그와는 별개로 바른 수신과 유교적 덕행에 따른 평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 역시 하안 등과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이긴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노육은 본래 맡고 있던 이부상서 직을 하안에게 뺏겨 복야로 밀려났고, 그로부터 얼마 안 가 이번에는 사예교위 필궤에 의해 면직됐지만, 워낙 명성 있는 원로였던 만큼 여론이 들끓어 할 수 없이 광록훈으로 타협했던 것. 그러나 고평릉 사변 이후 사마의에 의해 바로 그 사예교위에 앉게 되어 조상 일파의 처분 결정권자가 되었으니 한편의 멋진 복수극이었다.

부하가 그 젊음을 바탕으로[6] 과감하고 적극적인 형태로 조상 잔당들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라면, 노육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충분히 견제와 위압의 효과가 있는 원로였다. 더군다나 그가 맡은 임무는 인재의 등용. 사마씨 세력과 사상적으로 겹칠뿐더러 만약 조상의 잔당이 재집권에 성공할 경우 사마씨와 함께 '재보복' 대상 1호에 오를 수밖에 없는 그가 이후 15년에 걸쳐 인재선발권을 틀어쥔 것은 분명 이후 사마씨의 패권 확립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다. 이풍과 함께라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경력과 평판, 그리고 '충성도'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으니, 주도권을 쥔 쪽은 물론 노육. 더군다나 이풍을 위해 사마사가 준비한 진짜 역할은 따로 있었다.

노육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사마씨의 사상적 원로가 바로 왕숙. 그는 사마사의 동생 사마소의 장인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왕랑의 아들이자 형주의 대학자 송충에게 사사한 당대의 석학이기도 한데, 유교사에서 그의 이름은 꽤 오랜 세월 뜨거운 감자였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경전에 주를 단 그는 특이하게도 후한 말 학문의 주류 패러다임이었던 정학(정현의 학문)의 열혈 안티였는데, 두 사람 다 금문과 고문을 종합하는 입장이었지만 정현이 금문을 채택한 곳에서는 고문을 채택하고, 정현이 고문을 채택한 곳에서는 금문을 채택했다 할 정도로 왕숙은 그와 철저하게 방향성이 달랐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천년의 떡밥이 되는 공자가어와 공총자가 등장한다. 전자는 본래 한서에 기록이 있었지만 유실된 고서며 공총자는 기존 경전들의 내용을 인용해 편집한 책인데, 둘 모두 정현의 학설을 완전히 뒤집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기에 왕숙이 공자의 위세를 빌려 정현을 까려고 주작질 했다는 것이 이후의 해석. (다만 공자가어는 이후 목간본이 발견되어 100% 주작은 아니라고 밝혀졌다.) 어쨌든 이런 주작의 술에 더해 사마씨와의 관계에서 얻은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왕숙의 학문은 일가를 이루어 '왕학'이라 명명되고 그의 해석이 학관에 채택되었으며, 과거 조상 정권에서 하안과 그의 현학이 그러했듯 그와 그의 학문은 사마씨 정권의 학문/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이 왕숙도 과거 조상 일파를 비난하고, 또한 트집이 잡혀 면직된 경험이 있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7]

참모의 부하, 인사의 노육, 학문의 왕숙 - 여기에 (위 리스트에는 없지만) 부하의 친구이자 종회의 형인 종육이 사법부인 정위를 맡게 됨으로써, 사마사는 조상 잔당에 대항하고 조정 내부를 장악할 기반을 굳건히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국경 쪽에서 사마사에게 한 가지 크게 다행이었던 것은, 사마씨에 이런저런 복잡한 추억이 있는 서부 전선이 이 시기에는 내외 모든 요소가 상당히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촉한에서는 제갈량의 유지를 이어받은 위나라 최대의 국적 강유가 북벌을 계속해서 주장했지만, 상관인 비의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있었다.[8] 또한 관중 일대는 과거 사마의/사마부 형제의 관중 부흥책에 힘입은 바 방위력과 보급 여건 모두가 개선되어, 제갈량 때와는 달리 수도의 지원 없이 자체 병력만을 활용해 촉한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가능해졌고, 더군다나 서부 전선의 사령관들은 부하처럼 대놓고 사마씨의 사람이거나 종회같이 사마씨가 이용하는 사냥개는 아니어도 사마씨와 가까웠던 곽회, 진태 등이었다.

2.4. 동흥 전투와 합비신성 전투

문제는 동부전선이었다. 조상 잔당의 견제자가 되어주리라 믿었던 왕릉이 오히려 솔선수범해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 반동으로 견제 대상인 제갈탄은 오히려 동부 전선의 실권자로 한 단계 뛰어 올랐고, 그 외에도 문흠과 관구검이라는 또 다른 위험인물들까지 이곳에 버티고 있었다. 한편 장강 너머 오나라는 이 해 오랜 후계자 다툼의 혼란 끝에 손권이 사망하고 손량이 즉위하며 위나라를 잠시 꿈에 부풀게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사는 그 만만해 보였던 오나라에 의외의 강적이 칼을 갈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가평 4년(252년) 10월, 제갈각이 동흥제를 재건하고 도발해왔을 때 부하의 지구전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12월 1일 제갈탄, 호준 등을 보내 동흥을 포위하는 동시에 왕창에게 남군을, 관구검에게 무창을 공격하도록 했지만 23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이는 제갈탄의 계책이었다고 하는데,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큰 패배를 당하고 조정에서는 장수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지만 사마사는 "내가 공휴(제갈탄)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제장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라고 자기 책임을 인정하며 전장 지휘관의 처벌 대신 사마사 자신과 감군이었던 동생 사마소의 직급 강등을 함으로써[9] 아랫사람들에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퍼모먼스로 원만하게 수습에 성공한다.[10][11][12]

이듬해(가평 5년, 253년) 5월 제갈각이 20만 대군으로 합비신성을 공격하고, 강유가 이에 호응해 북벌을 하는 위기를 맞으나 우송의 의견을 따라 곽회, 진태로 촉한을 막고 오와 전면전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다리자 제갈각은 장특이 지키는 합비신성을 뚫지 못한 채 손해만 보고 후퇴하였으며 이후 사마사와 반대로 패전 책임을 회피하려 들고 무리한 재원정을 시도하다 주살당하기에 이른다.

2.5. 황제 폐위

한편 사마사가 황제마저 초월하는 권세를 누리자, 가평 6년(254년) 2월 22일 황제 조방이 이풍, 장집 등과 사마사를 죽이고 하후현을 대장군에 앉히려는 친위 쿠데타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었다.[13] 사마사가 이풍을 불러내어 죄를 나열하자 이풍은 계획이 발각된 것을 알고 사마사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이에 화가 난 사마사가 사람을 보내 칼의 고리 부분으로 이풍을 짓찧어 죽였으며, 하후현과 장집 등을 체포해 삼족을 멸하였다. 그해 3월에 황제로 하여금 황후 장씨를 폐하도록 하였으며, 9월 19일 조방을 폐위하고 같은 달 22일 조모를 황제로 세운다.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호삼성은 이 사건에 대해 '왕망과 사마사, 소란은 똑같은 마음이고 왕망이 한나라를 찬탈할 때 왕순을 파견하여 원후에게 요구하였는데, 이와 아주 흡사하다. 나라의 간적에게는 반드시 돕는 자가 있느니 천하를 가진 자는 반드시 이를 경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원래 사마사는 팽성왕 조거, 즉 조조의 아들을 옹립하려 했다. 그런데 이것은 사마사 입장에서는 크나큰 자충수인 것이, 본인의 정치 처세술로 기존 조위와 타협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그 조거는 이 시점에서 나이가 꽤 많은 데다가, 위나라의 실질적 창업군주인 조조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정통성이 있는 군주를 옹립할 뻔한 것이다. 즉, 사마사가 이를 강행했다면 역으로 사마씨 정권 몰락의 시작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주변에서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결국 이를 받아들여서 조모를 세운 것이다.

2.6. 관구검, 문흠의 난과 사망

정원 2년(255년)에 관구검이 합비에서 문흠 등과 더불어 사마사의 황제 폐위에 대한 죄를 묻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지점이 관구검 일당이 '역신' 사마사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으면서도 사마사의 아버지 사마의의 공로를 보아 처벌을 가볍게 하고 다른 사마씨, 특히 사마소에 대해서 군자답고 충성스럽다면서 사마사를 대신하라고 말하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결국 반역의 동기 자체가 사마의의 명성과 사마씨의 지위를 인정하고 오로지 사마사만 찬역을 저지르고 있으나 다른 사마씨로 사마사를 대신하여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인데, 혹자는 여기서 사마씨 분열을 노리는 관구검의 속셈을 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사마사가 찬역의 길을 가고 있는 와중에도 사마의만큼은 여전히 세간에 위나라의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마소, 사마부, 사마망에 대한 유화적인 인식과 더불어서 말이다.

1월 관구검과 문흠이 병사 6만을 이끌고 회수를 건너자 다른 이들은 여러 장수들을 보내 이를 격파하자고 하였으나 부하와 왕숙은 사마사에게 직접 출병하기를 건의하였다. 이즈음 사마사는 왼쪽 눈 위에 큰 혹이 생겨서 요양 중이었는데, 통증에도 불구하고 직접 보병과 기병 10만여 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계속 전장에서 지휘하였고 문흠을 추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의 군대를 문흠의 아들인 문앙이 혼자서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파했다는 소식에 놀라 눈 위의 혹이 악화되었다. 이때 사마사는 도포(또는 이불)를 입에 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지휘했는데 도포는 이빨 때문에 해져 있었고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문앙의 활약으로 문흠군은 항성으로 퇴각하였고, 문흠이 패퇴했다는 것을 안 관구검이 회남으로 달아났으나 안풍진 도위부의 백성인 장속이 그를 추격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보냈다. 문흠은 오나라로 퇴각하였으며 이로써 회남에서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관구검의 난을 진압하기 전에 혹을 도려내는 수술을 했는데 그 후 문앙의 공격에 놀라 눈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결국 사마사는 얼마 뒤 진중에서 허창으로 돌아와 윤달 1월 29일(위서 삼소제기), 혹은 윤달 1월 28일(자치통감, 경제기)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준평릉에 안장되었다. 그는 슬하에 딸밖에 없어 후사는 동생인 사마소에게 맡겼으며 사마소의 차남인 사마유가 사마사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14] 한편 진서 경제기의 이 시기 시간 배정이 엉망이기로 유명한데, 관구검의 난에서부터 사마사의 죽음까지 타임라인은 관구검의 난 문서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 바란다.

사실 그의 혹은 악성종양이라는 추측도 있으며, 진압 후 돌아오던 길에 과다 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덤으로 연의에서는 죽자마자 눈이 튀어나왔다는 다소 호러스러운 모습으로 각색되어 있다.

3. 평가

世宗繼文 邦權未分. 三千之士 其從如雲.
세종은 선제의 뒤를 이었고 나라와 정권은 아직 분열되지 않았다. 삼천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따랐다.
『진서』,「경제기(景帝紀)」, 찬왈(贊曰)
권력을 잡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마키아벨리주의를 몸소 보여준 냉혹한 야심가. 음험한 정략으로는 동세대에서 당해낼 자가 없던 간웅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부친인 사마의보다 조조를 더 빼닮은 인물. 오랫동안 살의를 감추고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 한 번에 배신해 죽이는 그의 행동은 음험하고 냉혈하기로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조조 이상으로 간웅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15] 사마의, 손권 등과 함께 정치극의 요소가 매우 커진 삼국지 후반부를 이끌어나갈 주인공으로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다. 일단 서진의 기반을 본격적으로 마련하기 시작한 게 그이기 때문에 흔히 비중이 적은 기존 삼국지 창작물과는 별개로 삼국지 스토리의 흐름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부친 사마의가 조예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휴와 조진이 사라진 군부의 정점으로 올라서고 조상을 실각시켜 사마씨를 위에서 가장 강한 세력으로 대두시켰다면, 사마사는 아버지의 권력 장악 과정에 손발이 되었으며 부친 사후까지 남아있던 반대 세력을 모두 축출하고 사마씨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젊은 시절 산기상시라는 실권은 없으되 화려하고 명예로운 자리에서 관직을 시작한 사마사는 이후 몇몇 관직을 거쳐가다 중호군이라는 실권직에 안착한다. 중호군은 다름 아닌 무관을 선발하고 감독하는 자리. 그런데 비슷한 시기 사마사 최대의 악연, 라이벌이라 할 (전) 처남 하후현이 똑같이 산기상시, 중호군 루트를 밟는데, 이 하후현과 사마사가 중호군 자리에서 인재를 선발한 방향성이 뚜렷한 차이점을 보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배송지가《위서》에 인용한《세어》에서는 '중호군 시절 하후현이 뽑은 인물 중 준 걸 아닌 자가 없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나아가 각 주를 다스리는 높은 인물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고, 진서 경제기에는 '중호군 시절 사마사는 일부러 타인에 비해 공이 높지 않은 자들을 쓰니 다들 사심을 가지지 않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방향 차이다.

이런 두 사람의 인재 등용관은 위진 교체기의 뿌리 깊은 논쟁과 연관지어 해석되곤 하는데, 일각에서는 이 시기 조상(+하후현)의 일파가 조조의 유재시거 정신을 이어온 데 반해 사마의 정권을 중심으로 한 호족~문벌귀족들은 구품중정으로 대표되는 정치를 이어갔다며 이 두 세력의 대립을 상반된 정치 사상의 대결로 조명하기도 한다. 즉 하후현과 사마사의 서로 다른 인재 등용 방침도 이 두 대립하는 진영의 사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사의 방침에 대해서는 그의 야심을 생각했을 때 그렇게만은 해석할 수 없는, 훨씬 음험하고 악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추측이 있다. 어쩌면 이미 찬탈의 마음을 굳힌 사마사에게 있어 인사란 '능력과 품성이 뛰어난 인물을 적재적소에 뽑아 나라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닌 '조정 내 자신의 장악력을 확보하는' 것이 지상 과제로 본 것이 아니냐는 것. 그에게는 하후현이 뽑은 타입의 인물들, 곧 결정적인 순간 나라를 위해 자신을 막아서거나 위협할지도 모르는 쟁쟁한 거물들보다는,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자기 의도에 따라 제 목소리를 낮출 줄 아는 인물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섬뜩하게도 실제로 조상 일파가 숙청된 이후 사마씨 정권이 황실을 향해 노골적인 패역을 저지를 때도, 의외로 그 반향은 항상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또 진서 경제기를 들여다 보면 초반부터 상당히 흥미로운 떡밥이 눈에 띄는데, 바로 젊은 시절 사마사와 함께 이름을 날린 인물로 '하안'과 '하후현'이 나란히 거론되고, 또한 하안이 주역 계사전을 인용해 나머지 두 사람을 칭찬하고 있는 것.[16]

사실 조상 일당은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정쟁적 인사 면에서는 꽤 무른 구석이 있었다. 조상과 하안이 바랐던 것은 사마씨의 완전한 배제가 아니라 차세대인 사마사 등을 자신들의 일파로 흡수해 조상 중심의 통합 정권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조상 라인의 하후현과 사마의 라인의 사마사를 나란히 자신의 아래에 둔 하안의 발언은 이런 차세대 내각의 형성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상의 큰 야심을 품은 사마사에게, 이러한 하안의 구애는 칼자루를 내준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자신을 인척으로 대하며 친근함을 내비치는 그들의 호의를, 사마사는 최대한 악용했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그들의 방심을 유도하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정보를 캐내며 사병을 준비해 고평릉 사변의 1등 공신이 된다. 사건의 백미는 그 뒤의 일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정말로 사마씨 3부자가 자신들을 살려주리라 믿었던 조상과 하안의 모습은 어이가 없을 정도인데, 어쩌면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호의를 베푼 대상인 사마사에 한 조각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작 그 사마사가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장본인이었음은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이는 조상의 목숨은 보장된다는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변에 가담했다가 조상이 죽자 자신도 죄책감에 못 이겨 병사한 장제에게도 그러하다. 하후현과 하후패가 각각 초연한 죽음과 망명을 선택했던 것도 사마사의 이런 교활함과 냉혈함을 깨닫고 그 아래에선 도저히 자신들이 살길이 없다는 판단에서 행한 것이라면 이해가 간다.

사마사는 이러한 역사적인 정황을 일단 배제하고 극적인 요소로서도 따져봐도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구 왕조가 건재하던 젊은 시절부터 야심을 품고 십수 년간 뱃속에 칼을 품은 채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자신의 야심에 방해가 될 인물들의 호의를 받으며 친하게 지내다가, 결단의 순간 칼을 빼들어 저항하는 이들을 모두 제거하고 신 왕조를 세울 기반을 마련했으나, 정작 그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5년 남짓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가 기틀을 다진 왕조는 후한 말부터 쌓여온, 그리고 상당 부분 그의 일족이 심화시킨 온갖 사회적 모순에 짓눌려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이어진 혼란상 속에서 허무하게 이민족에게 중원을 빼앗긴 채 강남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물론 이후 동진은 1백 년 넘게 왕조를 유지했고 서진의 이른 몰락과 5호 16국 시대의 도래를 사마사 개인의 탓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겠으나, 그가 위나라 시절에도 잡아내지 못한, 그리고 부추긴 서진의 사회 구조적인 모순은 사마씨 일가의 후손들뿐만 아니라 온 중국의 백성들에게 비극을 가져왔다.

별개로 제갈각에게 쳐발린 동흥 전투나 다 이긴 낙가 전투에서도 문앙의 습격으로 인해 패배할 뻔한 것에 충격을 받아 일찍 사망한 것을 보면 당대 일류급 명장으로 평가받는 아버지 사마의에 비해 군사적 능력은 한참 떨어져 보인다. 특히 동생인 사마소가 비슷한 상황이었던[17] 제갈탄의 난을 빈틈 없이 처리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반란들을 무난하게 정리, 촉한 정벌 때 보인 나름 뛰어난 군사전략을 고려하면 아버지의 군재는 사마소가 물려 받은 것으로 보인다.

4. 삼국지연의

완성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버지 사마의의 불편한 속내를 읽고 사마사는 걱정을 하고 동생인 사마소는 곧 사마의가 위주에게 중임을 맡을 거라고 사마의를 안심시킨다. [18] 이처럼 사마사보다 사마소의 능력을 더 강조하는 일화가 많은데 이것은 사마소가 대권을 더 오래잡아서인지 그의 아들 사마염이 조환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여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진을 건국할 것을 반영한 셈인지 연의에서는 동생인 사마소가 형인 사마사보다 더 타고난(?) 기린아로 묘사된다.

그 이후 아버지 사마의가 맹달의 반란 진압을 위해 다시 기용되고 맹달을 진압한 이후에는 아버지 사마의, 동생 사마소와 함께 대촉전선에서 활동한다.

그 이후로는 정사와 행적이 비슷하나 하후현과 이풍, 장집이 조방과 밀실에서 이야기를 나눈 이후 하후현과 이풍, 장집을 추궁하여 모든 것이 들통난 하후현에게 질타를 들은 뒤 이들 셋을 체포하여 궁중으로 난입한 뒤 조방의 황후 장씨를 목졸라 죽이고 조방을 폐위시킨다. 이때 연의에서는 조방이 뜬금없이 조조가 동승을 죽인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는 사마사를 조조와 빗대어서 조조가 신하가 된 도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그의 자식도 똑같이 그런 신하에게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19]

또한 사마사는 죽을 때 비명을 지르면서 눈알이 모두 빠져나와 죽는데, 이 역시 권선징악의 일환으로 만든 결말로 보인다.

대놓고 악역으로 설정되었는데 정사보다 괄괄하고 호전적으로 변했고 군략은 소폭 버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사마의가 제갈량을 상대로 고전해서 수비전략으로 굳히고 번번이 버티는 형세에 사마사가 아버지에게 촉한군을 공격하자고 충동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연의에서는 사마사가 죽을 때 동생에게 '무거운 짐을 드디어 덜을 수 있고 이제 네 차례다'라는 둥 야심가적인 면모는 동생에게 넘어간 대신 형으로서의 책임감, 의무감을 느끼는 모습을 더 부각시킨다. 실제로는 사마사가 진정한 야심가였고 사마소는 형의 급사로 비교적 예기치 못하게 짐을 떠맡은 상황에 비하면 정반대의 서술이며, 대중 매체에서도 이런 식으로 사마사, 사마소 형제를 묘사한다.

5. 가족 관계

  • 1번째 부인: 하후현의 동생 하후휘였다. 원래는 금슬이 좋았던 것으로 보이나 하후휘는 24세에 죽었고 사마사는 당시 27살이었는데 둘 사이에는 아들은 낳지 못하고 딸이 다섯이나 있었다. 사마사는 하후휘 사후 다시 자식을 얻지 못했다.
  • 2번째 부인: 진북장군 오질의 딸과는 자식 없이 이혼했다.
  • 3번째 부인: 채옹의 외손녀 양휘유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었다.

6. 기타

  • 실제로 고평릉 사변은 사마사가 주도했고 사마의는 고령으로 얼굴마담 격으로 나섰다는 주장도 있다. 우선 사마의가 칭병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게 된 것이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247년 5월부터이다.[24] 이승의 일화는 248년 3월로 기록되어 있다.[25] 그리고 선제기에 따르면 조상과 하안은 사마의의 병이 위중하다 여겨 마침내 무군지심(無君之心)을 품으니 장당과 더불어 은밀히 공모해 사직에 해를 끼치려 도모하여 그 기일이 멀지 않았고 사마의 또한 이를 은밀히 방비하니 조상(曹爽)의 무리들도 사마의를 자못 의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핵심은 이때 사마의가 꾀병이 아니라 진짜로 아팠기에 조상의 행동을 조정에 나가 방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26] 250년에는 '사마의가 오랜 병으로 조청(조현朝見, 황제를 배알함)하지 못하자 매번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천자가 친히 선제의 사저로 행차해 자문을 구했다.' 는 기사가 보인다. 251년 4월에는 왕릉의 난이 있고, 사마의는 마지막 친정을 하여 왕릉을 토벌한다. 6월에는 다시 '사마의가 병으로 앓아누워 가규, 왕릉에게 해를 입는 꿈을 꾸니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 고 한다. 그리고 8월에 사마의는 마침내 사망한다. 247년 68세부터 251년 72세에 이르기까지 사마의는 거의 내내 칭병이나 와병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꾀병'을 부리던 시기에 사마의는 장남 사마사에게 3천 명이나 되는 대규모 비밀 사병을 조직하게 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사마씨의 반란 모의는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사마소조차도 직전까지 배제되었고, 사마의는 사마사와는 모든 계획을 공유하고 있었다. 물론 사마사의 난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사마의의 무군지심(無君之心)이야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한 정황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대규모 피의 숙청을 직접 감행한 것을 보면 그가 고평릉 사변의 중심인물인 것은 당연하지만, 이 가설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실제적으로는 사마의는 얼굴마담 역이고 주동자는 사마사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마사는 아버지 사마의에 비해 업적이 매우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사는 아버지의 업적을 빌리고 사마의가 실제적으로 주동한 것처럼 꾸며 어떻게든 반란의 정당성을 얼버무리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래서 아버지의 업적을 이용하기 위해 병든 아버지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웠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사마의가 꾀병으로 속였다고 거짓말을 해 사마의가 주도한 것처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선제기와 정사 삼국지 조상전에 따르면 '이승이 서울을 떠나 형주자사로 부임하는 길에 선왕을 방문했다. 선왕은 병이 위중한 척하여 자신의 쇠약한 형상을 보여주었다. 이승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실이라 여겼다.' 라고 말해서 양측 사서 모두 명백하게 사마의가 말짱한 컨디션으로 조상 일파를 속이기 위해 꾀병을 부렸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마의가 꾀병을 부릴 때 모습과 고평릉 사변에서 말짱한 정신으로 조상 일파를 숙청하는 모습은 명백히 다르다. 사마의가 정말 아팠다 치면 사마의가 주도한 숙청이나 정권 획득에 있어서 그토록 활발하게 활동한 게 설명되지 않는다.[27] 때문에 현재는 사마사가 아버지 사마의 다음가는 고평릉 사변의 최중요 핵심 인물인 것은 맞지만, 최종 주도자는 결국 아버지 사마의라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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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마소 부인 왕원희와는 다른 인물로 효회태후로 추존된 사마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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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부군[추존][2]사마랑창무정후하간평왕[3]의양왕
장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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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평왕
고조 선황제[추존]세종 경황제[추존]제헌왕[8]동래왕[9]
북해왕[10]
제무민왕제양왕[11]
태조 문황제[추존]세조 무황제(초)비릉도왕[13]
효혜황제(2)민회태자
진헌왕진왕[14]
효민황제(4)[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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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왕
신도회왕
청하강왕[18]
장사려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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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왕→효회황제(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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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양애왕청하강왕[24]
요동도혜왕동래왕[25]화용왕[26]
광한상왕북해왕[27]
낙안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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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영조
낙평왕
여남문성왕[29]사마수
여남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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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돈왕
여양왕
낭야무왕낭야공왕중종 원황제(5)[30]
무릉장왕무릉애왕
동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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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왕 경연왕 기[31]제양왕[32]
부풍무왕순양왕신야왕[33]
신야장왕신야왕[34]
평원왕
양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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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왕 돈[37]
의양성왕[38]
태원성왕하비왕[39]
사마익남궁현왕안평왕 우[40]
하비헌왕하비왕
태원열왕하간왕
상산왕안평왕 돈안평왕 우[41]
패순왕패왕 도패왕 자
동무대후팽성목왕팽성원왕팽성강왕팽성왕[42]
고밀문헌왕동해효헌왕
신채무애왕
고밀효왕고밀왕팽성왕[43]
남양왕진원왕 보[44]
범양왕 수범양왕 효
사마순제남왕중산왕
사마진초강왕초정왕초왕
초민왕
단수현후안평정후[45]
안성정후임성왕 릉임성왕 제
습양정후사마순[46]
서하무왕서하왕 은서하왕 희
안평정후 안평정후[47][48]
경조부군 이전[추존][50]
정서장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柘黃色)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11] 재종조부(실제로는 종조부) 연왕 기에게 출계[추존] [13]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4] 친부는 회남충장왕[15] 여기까지 서진[16] 친부는 오효왕[17]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8]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9] 친부는 사마유(동래왕)[20]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1]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2]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3]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4] 친부는 진무제[25] 친부는 제헌왕[26]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7] 친부는 제헌왕[28]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9]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30] 여기부터 동진[31] 친부는 진문제[32] 친부는 사마경[33] 숙부 신야장왕에게 출계[34] 친부는 사마창[35] 윤통(閏統)[36]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7]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8]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9]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40]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41] 친부는 남궁현왕[42] 재종숙 고밀왕에게 출계[43] 친부는 팽성강왕[44]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45]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6] 습양정후였다가 폐출됨[47]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8]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알수없음.[추존] [50]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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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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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문왕 사마염
추봉
선왕 경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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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의 사례로 비교하면 오나라에 비유하자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손책과 비슷한 입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 때문에 그를 사마경왕이라고도 한다.[3] 《진서》가 당(唐)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진서》가 참조한 서진이나 동진의 기록에서야 당연히 윤색이 들어갔겠고 거기다가 앞뒤가 안 맞는 기록들이 많은 데다가 역사 왜곡이 상당수였기 때문에《진서》자체도 문제가 많은 사서가 되었지만, 남북조의 피비린내 나는 난세를 뚫고 세워진 당나라으로선 그 모든 난세의 시발점이자 원흉격인 사마씨의 평가에 기름칠을 해줄 이유가 없다. 물론《진서》자체가 교차 검증 안 되는 허황된 기록을 많이 넣어서 문제가 되고 이세민이 내키는 대로 기록한 사서이긴 하나, 적어도 사마씨 왕조 황제 개개인의 품성이나 야심에 대해서는 냉담하기 그지없다.[4] 관리의 공과 과를 평가하는 제도.[5] 애초에 고과법 자체가 그 뿌리가 본인에게 있었기에 크게 따질 수도 따질 의미도 없었다.[6] 최고권력자가 된 것 치곤 상당히 어렸던 사마사보다도 한살 아래였다.[7] 여담이지만, 이 사마씨/왕씨 인척관계는 양측의 안티들에게 훌륭한 깔 거리를 남겼다. 사마씨 안티들은 주작질도 서슴지 않는 엉터리 학자와 사돈 맺은데서 사마씨의 도덕 수준이 빤히 보인다고 까고, 왕숙 안티들은 순수한 학문적 성취가 아닌 사마씨 권력과의 인척관계로 일가를 이룬 왕숙을 매식자/어용학자라 비난한다.[8] 바로 이듬해에 비의가 암살당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9] 여기서 왕수의 아들인 왕의가 사마소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으나, 사마소는 그를 처형한다.[10] 이 앞뒤가 안 맞는 말들에 대해선《한진춘추》, <경제기> 모두 내용이 뒤죽박죽이니 적당히 넘기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11] 사마사 동흥에서 발려 놓고 '제갈탄 말 안 들은 내 잘못' 운운은 예전에도 말했듯이 미스테리긴 하지만, '안건' 자체는 채택해 놓고 세부 전략 면에서 말을 안 들었던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12] 사마표의《전략》편에서 보이듯이 당시 '이쪽 말을 들었어야 옳았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던 부하쪽의 말을 안 들은 것을 후회해야 맞지 않냐는 것이다. 다만 이 부분도 정치적인 이유였다는 쪽으로 해석은 가능하다.[13] 이때 하후현은 계획이 자세하지 않다는 지적을 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4] 그러나 이 점 때문에 서진 건국 후 문제가 발생한다. 자세한 건 서진 문서 참조.[15] 조조는 자기 가족에게는 관대했던 인물이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죽여도 후회를 안 했지만 자기 실수로 잃어버린 큰아들의 일은 죽는 날까지 회한으로 남았던 인물이다. 반대로 사마사는 자기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자기 아내를 20대 젊은 시절에 직접 죽여버린 인물이다. 그러나 학살의 규모를 보면 조조가 사마사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물론 사마사도 조조이상으로 냉혈한 데다가 자신을 반항하거나 방해하는 인물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것도 조조와 비슷하지만 사마사는 조조처럼 감정에 휘둘러 죄 없는 백성들이나 적군 포로들을 사리분별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하지는 않았다.[16] "드러내지 않은 도리까지 깊이 헤아려 능히 천하의 뜻에 형통한 것은 하후태초이며, 사물의 징조를 엿보아 천하의 대사를 이룰 만한 인물은 사마자원이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쾌속하고 행하지 않으면서도 도달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17] 제갈탄의 난 당시에는 제갈탄이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기에 사마소가 더 불리했다. 그나마 당시 오나라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손침이 무능했다는 것이 사마소에겐 천만다행이었다.[18] 조예의 명으로 낙향하였던 상황이었다. 마속이 제갈량에게 사마의가 역모를 꾸민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는데, 이를 그대로 믿은 조예는 사마의가 이끌던 서량 군대를 조휴에게 맡기고, 사마의에게 낙향하여 근신하라는 명령을 내린다.[19] 이 내용은 자치통감에서도 나오는 내용이다.[20] 사마사는 비록 다른 데서는 냉혹했지만 어머니에게는 효자였던 모양이다. 사마의가 젊은 첩들을 총애하고 장춘화는 늙었다고 모욕하자 분개한 장춘화가 단식투쟁을 했는데 이때 아들들(정황상 장춘화의 장남인 사마사)이 어머니 편을 들어 단식을 했다. 사마의는 늙은 마누라는 어떻든 상관없지만 뛰어난 아들의 몸이 상할까 싶어 결국 장춘화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247년 장춘화가 죽자 장남 사마사가 어머니 장춘화의 상례를 치렀는데 지극히 정성을 다했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21] 진왕 작위를 물려받은 사마소는 형인 사마사를 경왕으로 추존하였다.[22] 동생 사마소의 장남. 조환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진을 건국한 이후에 큰아버지 사마사에게 묘호와 존호를 올려 세종 경황제로 추존하였다.[23] 동생 사마소의 차남. 사마소는 평소에도 천하는 형님의 천하이다.라며 형이 다진 기반이니 명목상으로라도 형의 양자인 사마유가 세자 책봉시 사마염 대신 뒤를 이어야 한다고 했다.[24] 사마의의 아내 장춘화는 247년 4월에 사망[25] 삼국지 조진 자 조상전에 따르면 248년 겨울이라고 되어 있다.[26] 그러나 정작 정사 삼국지와 배송지 주에는 사마의의 주장 외에 조상 일파가 딴 마음을 품었다는 기술 자체가 없다. 애당초 조상이나 하안이 무군지심을 품었다는 증거도 부족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마의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군권을 주면 살려 줄 것이라고 안이하게 믿은 조상이나 사마사를 자신의 파벌인 하후현과 같은 반열에 두고 친하게 지내다 고평릉 사변 이후 자신과 관련된 이들을 고발하면 살아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하안의 행동이 설명이 안 된다. 선제기가 사마의를 비호하기 위한 기록을 인용했다는 증거다. 조상이 무군지심을 품었다는 것도 사마의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사마의가 진짜로 아팠기 때문에 역심을 품은 조상 일파를 조정에서 방어하지 못했다는 건 맞지 않는 셈이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조상의 무군지심이라는 무리수 없이 바로 사마의의 꾀병이라는 독립요인이 존재하기도 하고, 자치통감도 조상이 무군지심을 가졌다는 내용을 기재하지 않고 정사 삼국지의 기술을 따랐다.[27] 다만 불과 2년 뒤인 251년에 세상을 떠난 것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병을 실제로 앓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거기다 고평릉사변 직전에 정처인 장춘화가 세상을 떠났으니 정신적 충격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