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00080><colcolor=#fff> 강락헌무공(康樂獻武公) 謝玄 | 사현 | |
사현 상상화 | |
시호 | 헌무(獻武) |
작위 | 동흥현후(東興縣侯) → 강락현공(康樂縣公) |
성 | 사(謝) |
휘 | 현(玄) |
자 | 유도(幼度) |
생몰 | 343년 ~ 388년 |
출신 |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
부모 | 부친 - 사혁(謝奕) 모친 - 완용(阮容)[1] |
형제자매 | 7남 4녀 중 6남 |
자녀 | 아들 - 사환(謝瑍) 딸 - 사씨(謝氏)[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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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중국 위진남북조 오호십육국시대 동진의 명장. 자는 유도(幼度). 명문가 진군 사씨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사혁은 비록 관직이 매우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동진의 1인자나 다름없는 환온과 절친이었으며, 작은아버지 사안은 동진의 명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사현 본인 또한 문무겸장에 동진의 최정예 부대인 '북부병(北府兵)'을 거느리면서 전장을 누볐고, 전진의 부견의 100만 대군을 비수대전에서 격파한 전적으로도 유명하다. 문학적 감각도 있어 동진의 사대부들 사이에서 "시주풍류(詩酒風流)"라 칭송받았다.2. 생애
2.1. 초기
어릴 적부터 남들보다 영리하여 사촌형 사랑(謝朗)과 작은아버지 사안이 그의 재능을 중히 여겼다. 한번은 사안이 자녀와 조카들을 불러놓고 질문했다."너희들이 훗날 사람을 이끄는 일을 맡는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인도하겠느냐?"
아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사현만이 나서서 답했다."비유컨대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모두 한 정원에서 자라나게 하듯이 키워보고 싶습니다."
사안은 그의 대답에 무척 기뻐하였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지란옥수(芝蘭玉樹), 한 집안에서 많은 명사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는 것을 뜻한다. 사안은 그런 총명한 사현의 재능을 누구보다도 아끼며 그가 혹시라도 엇나갈까 항상 경계하였다. 사현이 자주색 수놓은 향낭을 좋아하여 항상 차고 다니자, 그것이 훗날 사치로 이어질까 걱정한 사안은 사현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놀아주는 척하며 몰래 그 향낭을 훔치고 안 보이는 곳에서 불태워버렸을 정도였다.성인이 되자 조정에서 사현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재략이 있다 여겨, 누차 그를 불렀지만 사현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친구인 환온의 부름을 받고 왕순(王珣)과 함께 그의 속관이 되어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환온은 예의를 갖추어 사현을 중시하였다. 그 후 서정대장군 환활의 사마로 옮겨졌다가 남군상(南郡相), 북정제군사(北征諸軍事)를 역임했다.
전진의 황제 부견은 강성한 힘을 과시하면서 자주 동진의 변경 지대를 침노하기 시작했다. 이에 동진 조정에서는 북방을 지킬 문무를 모두 겸한 인재를 물색하였는데, 이때 사안은 자신의 조카 사현을 천거하였다. 비록 중서랑 치초는 평소 사현과 마찰이 잦아 서로 사이가 나빴으나 사안의 천거 소식을 듣고 탄식하였다.
"안(安)이 남들에게 욕 먹을 각오를 하고 그의 친척을 천거하다니 총명하도다. 현(玄)의 재능은 과연 쉽게 구할 수 없을 재능이라 거사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많은 대신들은 사안이 사심을 품고 자신의 친척을 추천했다 비난하였다. 치초가 나서서 말했다."저는 사현과 함께 환공(桓公)의 부서에서 일을 하며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한 바 있습니다. 사현은 지위가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맡은 일은 모두 해냈기에, 저 또한 사현이 이번 임무의 적임자라 생각합니다."
사현과 사이가 영 좋지 않던 치초가 사현의 천거에 찬성하자 조정은 사현을 불러 건무장군(建武將軍), 연주 자사(兗州刺史), 영광릉상(領廣陵相), 감강북제군사(監江北諸軍事)로 임명했다. 사현은 전진에 대항하기 위해 날래고 용맹한 자들을 널리 모았는데, 이때 얻은 자들이 하겸(何謙), 제갈간(諸葛侃), 고형(高衡), 유궤(劉軌), 전락(田洛), 손무종(孫無終), 유뢰지(劉牢之)였다. 사현은 병사들도 징발해 '북부병(北府兵)'이라는 동진의 정예부대를 탄생시켰다.태원 3년(378년) 4월, 부견이 장락공 부비를 보내 양양(襄陽)을 공격했고, 양양의 외성은 이미 전진의 정로장군 석월에게 점령당한 상태라, 형주자사 거기장군 환충(桓沖)이 저지하고 있었지만 그 형세가 매우 위태로웠다. 사현은 형주를 구원하고자 3주(州)에서 병력을 징발하고, 팽성내사 하겸에게 군사를 이끌고 회수와 사수를 건너 양양을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전진군의 사령관인 부비 또한 부견에게 책망을 받고 유리한 물량을 이용해 필사의 각오로 양양을 공략하던 터라, 결국 이듬해 2월에 내성까지 함락되면서 동진은 양양을 잃었다. 형주 전선의 총책임자인 환충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장절(章節)을 올려 면직을 청했지만 조정에서 불허하였다.
2.2. 대록 구원전
태원 4년(379년) 2월, 용양장군 대록(戴逯)은 벌써 반년째 팽성(彭城)에서 전진의 장수 팽초(彭超)의 공격을 막고 있었지만 모든 관심이 요충지인 양양에 쏠려있어 그동안 제대로 된 구원병을 받지 못했다. 사현은 대록을 구하기 위해, 동관태수 고형(高衡), 후군장군 하겸과 함께 회음(淮陰)으로 나아가 사구(泗口)에 1만 병력을 주둔시켰다. 사현은 대록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병이 왔다는 소식을 알리려 했으나, 위험한 임무를 맡을 만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소장(小將) 전홍(田泓)이 물에 잠수해서 팽성으로 들어가기를 자원하니, 사현은 그에게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전홍은 전진의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붙잡혔고, 팽초는 그를 돈으로 매수하여 팽성 수비군을 향해 '팽성에 구원군 따위는 오지 않는다!'를 외치게 하였다. 전홍은 팽초의 부탁에 응하는 척 성벽 앞으로 가서 "남쪽에 구원병이 이르렀으니 모두 힘내라!"라 외치고 이내 팽초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당시 팽초는 팽성을 공격하면서 치중을 유성(留城)에 쌓아두고 있었다. 이에 사현은 하겸 등을 출진시키고, 남은 병사들에게 "하겸 등을 유성으로 보냈다!" 소리치게 하니, 이 소식에 놀란 팽초는 서둘러 팽성의 포위를 풀고 유성의 치중을 지키러 이동했다. 팽초가 간 것을 확인난 하겸은 팽성으로 방향을 돌려 팽성을 지키던 동진군을 안심시켰다. 전진이 이대로 물러갈 리가 없을 것이라 판단한 사현은 만약 그들이 작정하고 공격해오면 팽성에서 막아내기 힘들 것이라 판단하여 팽성에서 철수하기로 하였다. 사현은 하겸에게 돌아오도록 명했고, 대록도 하겸을 따라 사현과 합류했다. 사현은 대록과 자신의 군사를 합치고 광릉으로 퇴각해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한편, 뒤늦게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팽초는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부장 서포(徐褒)를 남겨 치중을 지키게 하고, 남하하여 비어있는 팽성을 점거하였다.
2.3. 광릉 전투
팽초는 팽성을 점령하고 동진 침공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먼저, 후장군 구난(句難)도 출격해 회음에서 동진군을 격파하고 낙주자사 소보(邵保)를 남겨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양양에서는 우장군 모당과 강노장군 왕현(王顯)이 2만 군사를 이끌고 구난, 팽초의 군대와 합류하니, 그 무리가 6만이었다. 팽초, 구난, 모당의 전진군은 회수를 건너 우이(盱眙)를 함락시키고 모조지(毛璪之)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계속 남진하여 동진의 유주 자사 전락(田洛)이 지키는 광릉군 삼아(三阿)를 포위하였다. 삼아에서 동진의 주요 요충지인 광릉까지의 거리는 고작 1백여 리 밖에 되지 않아, 양양에 이어 광릉까지 빼앗기면 북부 전선은 완전히 붕괴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동진 조정은 진동하여 정로장군 사석을 파견해 도중(塗中)에 주둔시키고, 우위장군 모안지, 유격장군 왕담지(王曇之), 회남태수 양광(楊廣), 환성내사 구준(丘準)으로 하여금 당읍(堂邑)에 주둔하게 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모당이 정예기병 2만여 명을 선발해 모안지 등의 군대를 기습하였고, 당읍에 주둔하던 동진군은 북방의 정예기병 앞에 처참히 짓밟혔다.태원 4년(379년) 5월, 사현과 대록은 군대를 거느리고 광릉에서 나와 삼아를 구원하였다. 하겸을 선봉으로 세워 구난의 군대를 공격하니, 구난은 삼아의 포위를 풀고 백마(白馬)로 물러났다. 양군은 백마에서 격돌하였고, 치열한 전투 끝에 동진군은 대승을 거두어 전진의 장수 도안(都顏)을 전사시켰다. 구난 등은 우이로 물러나 군대를 정비하였으나 그들을 추격해온 사현과 전락의 군대에게 또 패배해 회음으로 후퇴하였다. 사현은 이번 기회에 전진군을 완전히 말살시킬 작정으로, 하겸에게 수군을 이끌고 전진군이 회수를 넘어올 때 깔아둔 부교를 불태우게 하였다. 낙주자사 소보가 부교를 지켰지만 하겸을 막다가 전사하고 부교는 불에 타 없어졌다. 사현이 군사를 들어 전진군을 습격하자 구난 등은 또 패해 회수를 겨우 헤엄쳐 건너고 회수 이북에 패잔병을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현, 전락, 대록, 하겸이 회수를 건너 추격해왔고, 양군은 군천(君川)에서 다시 크게 싸웠다. 참군 유뢰지가 군선을 이끌고 전진군의 다리를 모조리 부쉈고, 독호 제갈간과 단부현령 이도(李都)가 적의 수송선을 탈취해 버렸다. 결국 전진군은 사현과 3번 전투하여 전패하면서 전병력이 궤멸하였고, 구난과 팽초만이 겨우 목숨을 구해 북쪽으로 달아났다.
군천 전투 이후, 한 차례 위기를 넘긴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사현의 노고를 치하하고, 관군장군, 영서주자사로 삼았다. 사현이 광릉으로 복귀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조서를 내려 동흥현후(東興縣侯)에 봉했다.[3]
2.4. 비수대전
태원 8년(383년) 8월, 전진의 황제 부견이 자신의 대군을 일으켜 항성(項城)에 주둔하였다. 그 외에도 양주(涼州)의 전진군이 함양(咸陽)에 도착해 남진을 준비했고, 촉한(蜀漢)의 전진군도 강을 따라 장강으로 내려갔으며, 유주, 기주의 전진군도 팽성에 도착했다. 부견은 양평공 부융에게 선봉으로 300,000 병력을 주어 영구(穎口)에 주둔시키고, 양성(梁成)과 왕현에게 50,000 군사를 주어 낙간(洛澗)에 주둔시키면서 동진을 크게 위협하였다.동진 조정은 사현을 선봉에 서게 하여, 그에게 서주, 연주, 청주, 양주(揚州)의 진릉, 유주의 연국(燕國) 등 각지에서 긁어모은 병력을 이끌도록 하였다. 사현은 보국장군 사염, 서중랑장 환이, 용양장군 단현(檀玄), 건위장군 대희(戴熙), 양무장군 도은(陶隱) 등과 함께 총사령관인 사석의 지휘 아래에서 전진군과 싸우러 출진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부융은 수춘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동진의 평로장군 서원희를 붙잡았다. "수춘이 함락되고 적들이 궁지에 몰렸다"는 부융의 보고를 받은 부견은 나머지 군사를 항성에 남겨둔 채, 8,000여 경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수춘으로 들어갔다.
수춘성을 아쉽게 구원하는 데 실패한 사석과 사현이 이끄는 주력군은 낙간에서 2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사석과 사현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양성은 그 둘이 함께 왔다는 소리에 두려워 감히 요격을 시도하지 않고 목책을 세워 방어할 뿐이었다. 이에 사현은 유뢰지에게 5,000명의 군사를 배속시켜 낙간에 주둔해 있는 전진군을 공격했다. 유뢰지는 양성이 세워둔 목책을 불태우고, 양성의 전진군을 붕괴시켜 양성과 그의 아우 양운(梁雲)을 베었다. 대패한 전진군은 보병, 기병 할 것 없이 회수에 뛰어들어 도망치려 했다. 유뢰지는 추격하여 왕현, 양타(梁他), 양제(梁悌), 모용굴씨(慕容屈氏) 등 양성의 부장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사로잡았으며 양성 군중에 있는 물자를 취했다. 이리하여 사석과 사현 큰 피해없이 낙간을 돌파하고 북쪽으로 계속 진군하였다.
낙간이 뚫렸다는 전보를 받은 부견은 비수(肥水) 건너편에 진을 크게 벌려 군사를 주둔시키니, 동진군은 더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사현은 부융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다.
"그대는 멀리서 와 우리의 경계까지 이르렀는데, 강 건너편에서 진을 치고 있으니, 우리가 속히 나아가 그대들과 전투를 벌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구려. 제군들이 잠시 장수와 병사들을 뒤로 물려주고 우리가 강을 도하한 뒤, 여유로이 어우러져 싸운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소?"
부견은 부융에게 그 청을 승낙하도록 하고, 자신들은 잠시 군사를 후퇴시켰다가 동진군이 비수를 도하할 때 습격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부융은 부견의 계책에 찬성하고 전군에게 뒤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후퇴하게 된 전진의 병사들은 이내 큰 혼란에 빠져 서로 앞다투어 퇴각했는데, 전진의 장수들은 후퇴하는 군사들을 다시 멈춰 세울 수 없었다.(...)전진군이 대혼란에 빠진 사이, 선봉 사현, 사염, 환이가 정예병 8,000명을 이끌고 강 건너편에 먼저 도착하였다. 사현이 전진군의 뒤를 맹렬히 공격하자, 부융은 말을 타고 동분서주하며 도망치는 병사들을 다스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혼란을 수습하려던 부융이 낙마해 동진군에게 죽임을 당하니, 전진의 장수들까지 공포에 질리면서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사현 등이 승세를 타고 수춘성 서쪽 청강(靑岡)에 이르자, 전진군은 또 놀라 도망가면서 서로 짖밟혀 죽었다. 황제인 부견은 도망치다가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전진군 중 죽은 자가 7 ~ 8할이나 되었다. 사현은 수춘을 탈환하고 전진의 수춘태수 곽포를 사로잡았는데, 이때 부견의 수레인 운모거(雲母車)와 전진군이 남겨두고 간 의복, 기계, 군수물자, 진귀한 보배, 가축 등 노획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사현을 전장군에 삼으려 했지만, 사현은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조정은 다시 그에게 1,000,000전과 4,000여 필의 수 놓은 비단을 하사했다.
태원 9년(384년) 정월, 형강이주자사 환충은 사석과 사현이 패배할 것이라 예측했다가 이에 어긋나자, 스스로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병사했다. 조정에서는 사현으로 하여금 환충의 뒤를 이어 형주와 강주자사직을 더하는 것을 논의하였으나, 사안이 우리 진군 사씨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쏠린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기각되었다.
2.5. 사현의 북벌
태원 9년(384년) 8월, 사안이 조정에 상주하여 북벌을 해야한다 주청하였다. 조정에서도 사안의 청을 승낙하니, 사안은 전봉도독 사현, 관군장군 환석건을 거느리고 북벌군을 일으켜 하비에 이르렀다. 사안은 사현에게 별동대를 주어 서주, 연주 지역을 공략하게 하고 자신은 환석건과 함께 옛 도읍 낙양을 수복하러 떠났다. 사안은 5년 전에 전진군에게 내어줬던 팽성을 탈환하고, 팽성내사 유뢰지를 보내 전진의 연주자사 장숭(張崇)을 공격하게 했다. 장숭이 견성(鄄城)을 버리고 후연으로 도망치니, 사현은 유뢰지를 견성에 주둔시켜 그곳을 수비케 하였다. 유뢰지가 견성에 주둔하자 황하 이남의 성들이 모두 동진에 항복하면서 사현은 연주를 평정하였다.사현의 북벌군은 비록 승리했으나 수로가 험난하여 식량 운송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이에 사현은 병사들을 감독하여 둑을 쌓아 여량(呂梁)의 물을 막고, 나무 울타리와 7개의 보를 세워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두 언덕 사이에서 하나로 합쳐지게 하였다. 마침내 조운이 용이하게 되자 사현군은 물론이고 인근에 살던 백성들까지 모두 이롭게 되었다.
그 해 10월, 사현은 청주를 공략하고자 음릉태수 고소(高素)에게 3천명의 병력을 주어 광고(廣固)로 향하게 하였다. 전진의 청주자사 부랑은 동진군을 보고 곧바로 항복해왔다. 또, 사현은 기주를 공략하기 위해 용양장군 유뢰지와 제북태수 정광(丁匡)을 파견해 황하의 확오진(碻磝津)을 점거하게 하고, 제양태수 곽만(郭滿)을 보내 활대(滑臺)를 점령하였다. 두 나루터를 점령한 뒤, 분무장군 안웅(顏雄)으로 하여금 황하를 도하하고 그 건너편에 진영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부비는 장수 상거(桑據)를 황하 이북 여양(黎陽)에 주둔시켜 동진군을 저지했지만, 사현이 부장 유습(劉襲)을 보내 상거의 진영을 야습하니, 상거는 패하여 달아났다.
당시 부비는 업성에서 후연의 군대에게 안팎으로 공격받던 중이었다. 여기에 동진군이 상거를 격파하자 부비는 두려워 사촌동생 부취(苻就)와 참군 초규(焦逵)를 보내 "업성을 넘겨주고 장안으로 퇴각하려 하니 후연군을 격파해달라" 부탁하였다. 그러나 초규가 부비의 서신을 조작하여 동진에 귀순한다는 내용으로 바꾸고 사현에게 바쳤다. 사현은 기꺼이 부비의 "투항"을 받아들여 그에게 2천 곡의 쌀을 지원해주고 유뢰지와 2만 군사를 구원군으로 보냈다. 그리고 진릉태수 등념지(滕恬之)를 여양에 주둔시키니, 삼위(三魏)의 지역이 모두 동진에게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연, 청, 사, 예 4주를 평정한 사현은 도독서연청사기유병7주제군사에 임명되었다. 사현은 조정에 상소하여 유주와 기주는 반드시 그곳을 다스리는 총독을 따로 지정해야 하고, 사주는 자신이 있는 장소와 너무 멀어 예주자사가 관할해야 한다며 사, 기, 유 3주를 제외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조정은 이를 허하고 그간의 공훈을 치하하여 그를 강락현공(康樂縣公)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사현은 그의 이전 작위 동흥후를 조카 사완(謝玩)에게 내려줄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일부만 허락하여 사완을 예녕백(豫寧伯)에 봉하였다.
태원 10년(385년) 정월, 사현은 다시 북벌을 재개하여 영원장군 계연(昋演)을 파견해 위군(魏郡)을 차지하고 있던 신개(申凱)를 격파하였다. 이후 사현은 영예주자사 주서를 양 지방(梁國)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팽성에 주둔하여 황하 이북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황하의 수로를 이용해 서쪽에서 낙양을 지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북벌을 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수자리만 놓고 돌아오라 하였다. 결국, 사현은 북벌을 중단한 채 남진하여 회음(淮陰)에 주둔하고, 주서 또한 내려와 수춘에 주둔했다. 동진군이 내려간 틈을 타 정령족의 적요(翟遼)[4]와 태산태수 장원(張願)이 반란을 일으켜 북방이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사현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상소하여 부절을 반납하고 사직을 청했다.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사현을 달래어 그에게 회음을 그대로 지키게 두고, 주서를 팽성으로 옮겨 주둔하도록 하였다.
2.6. 사망
태원 11년(386년), 회음에 주둔해있던 사현은 병에 걸려 또 사직을 청했지만 조정에서 불허하였다. 사현이 자신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 같다며 재차 사직을 청했으나, 조정은 그의 사직을 들어주지 않고 동양성(東陽城)으로 옮겨 주둔하게 하였다. 사현은 동양성으로 가던 중 병이 위독해져 10여 개의 상소문을 보내 제발 사직시켜 달라 청했지만 회답이 오지 않았다.태원 12년(387년) 정월, 사현이 상소문을 보낸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조정에서는 그의 사직을 받아들이고 팽성의 주서에게 사현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다만, 사현을 완전히 관직에서 제외시키지는 않고 산기상시, 좌장군, 회계내사에 임명하였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회계군으로 부임하였으나, 병환으로 군(郡)의 업무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태원 13년(388년) 정월, 병사하니 향년 46세였다. 거기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헌무(獻武)라 하였다. 아들 사환(謝瑍)이 작위를 이었으나 얼마 못가 그도 요절하고, 손자 사령운(謝靈運)이 그 뒤를 이었다.
3. 기타
- 사현에게는 사도온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총명하고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영서재(詠絮才)'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사안은 조카딸 사도온 또한 끔찍하게 아꼈는데, 그녀에게 걸맞은 남편감을 까다롭게 고른 결과, 서성(書聖)으로 유명한 왕희지의 아들 왕응지에게 시집을 보냈다. 훗날 손은의 난이 일어나 왕응지가 살해당했을 때, 사도온은 직접 칼을 뽑고 적병 여러 명을 베었다는 것을 보면 오빠와 마찬가지로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손은에게 붙잡혔을 때도 사도온의 기개에 감복한 손은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해치지 않고 풀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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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기(戴記) ]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