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0 08:50:52

갈홍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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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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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洪
(284 ~ 364)

동진 때의 인물이며 자는 치천(稚川)으로 갈현의 종손자.

양주 단양군 구용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지만 집이 가난해 직접 땔깜을 베어 종이, 붓을 샀으며, 밤마다 책을 베끼고 외우면서 공부해 유학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오히려 신선의 품성을 수양하는 법을 좋아했다.

욕심이 적어 애호하거나 즐기는 것이 없었고 사람됨이 질박해서 영리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찾아오는 손님도 사절해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았다. 때때로 책을 찾고 뜻을 물어보고자 직접 수천 리를 걸어갔고, 여러 전적을 열람해 특히 신선양생술을 좋아해 갈현의 제자 정은에게서 도술을 전수받았다.

남해태수 포현을 스승으로 모셨고 포현의 딸과 결혼했으며, 포현의 도술, 의술을 전수받았고 태안 연간(302~303)에 석빙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비가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려 하면서 갈홍은 장병도위로 부름을 받았다. 석빙의 별장을 공격해 격파한 공으로 복파장군에 임명되었다. 갈홍은 천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남방으로 피신하기 위해 광주자사 혜함의 군부에 참여했다가 혜함이 살해당하자 여러 해 동안 남방에 머물렀으며, 여러 차례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원제가 승상에 있을 때 속관이 되면서 적을 평정한 공으로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함화 연간(326~334) 초에 주자사의 주부가 되었다가 사도연, 자의참군 등으로 옮겼으며, 간보의 추천으로 산기상시가 되었지만 이를 거부했다. 나이가 들자 단약을 제조해 장수를 기원하려고 했으며, 교지에서 단사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구루령이 될 것을 요청했지만 거부되었다가 자신이 영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자 허락받아 교지로 떠났다.

광주에 머무를 때 광주자사 등악이 떠나는 것을 막자 갈홍은 나부산에서 연단을 제조했다. 등악이 갈홍을 동관태수로 임명하자 갈홍은 이를 사양했다. 몇 년 동안 나부산에 머물러 수양하면서 저술에 힘썼고, 마땅히 스승을 찾으러 먼 길을 가야 하니 정해진 기일에 곧 떠날 것이라는 서신을 등악에게 보냈다.

갈홍은 앉은 채로 있다가 정오가 되자 잠든 것처럼 죽었다. 등악은 갈홍을 찾으러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죽을 때 나이는 81세였는데, 갈홍의 안색은 산 사람과 같았고 몸은 부드럽고 관에 넣기 위해 시신을 들자 매우 가벼워 빈 옷과도 같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가 시해득선했다고 여겼다.

저서로는 포박자, 신선전,[1] 양리전, 은일전, 집이전, 금궤약방, 주후요급방 등이 있다. 포박자의 경우 황백(黃白)의 일을 말하는 것은, 내편(內篇) 이라 했고, 근심을 논박하며 통석(通釋)한 것은, 외편(外篇)이라 했으며, 그 외의 저술한 바로는 비(碑), 뇌(诔), 시(詩), 부(賦)가 백 권, 이격(移檄), 장표(章表)가 30권, 신선, 양리(良吏), 은일(隱逸), 괴이한 일을 모은 것 등의 전이 각각 10권이다. 다시 경사(經史), 백가(百家), 방기(方技), 잡사(雜事)에서 뽑아 기록한 것이 3백 십 권이고, 금궤약방(金匮藥方)은 백 권, 주후요급방(肘後要急方)은 4권이다. 갈홍은 널리 들음이 깊고 광범위해, 강좌(江左)에서 비교가 안 됐고, 글을 저술함은 반고사마천보다 풍성했으며, 말을 바로잡음이 심오했고, 사리를 분석함이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여담으로 저서 중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에 적혀진 내용[2] 덕분에 말라리아 치료제를 만들어내어 중국에서 노벨상을 받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자세한 건 투유유 문서 참조.


[1] 전 10권, 갈홍의 자서(自序)에 근거하면, 아마도 포박자 내편이 완성되고 난 후에, 그의 제자 등승(滕升)이 선인의 유무를 물어 지은 것으로, 기록한 바가 무릇 84인이다.[2] 개똥쑥 한 움큼을 2승(升·L)의 물에 담근 후, 비틀어 짜서 낸 즙을 마시라(青蒿一握。以水二升漬,絞取汁。盡服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