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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9A78E><colcolor=#ece5b6> 북량 제2대 국왕 저거몽손 | 沮渠蒙遜 | |||
출생 | 368년 | ||
후량 량주 임송군 노수호 (現 간쑤성 장예시) | |||
사망 | 433년 4월 (향년 66세) | ||
북량 량주 장액군 (現 간쑤성 장예시) | |||
능묘 | 원릉(元陵) | ||
재위기간 | 제2대 군주 | 장액공 | ||
401년 6월 ~ 412년 10월 | |||
제2대 군주 | 하서왕 | |||
412년 10월 ~ 433년 4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39A78E><colcolor=#ece5b6> 성씨 | 저거(沮渠) | |
휘 | 몽손(蒙遜) | ||
부모 | 부왕 적지왕 저거홍법 (狄地王 沮渠法弘, ? ~ ?) 모후 태후 차씨 (太后 車氏, ? ~ ?) | ||
형제자매 | 3남 중 장남 | ||
배우자 | 황후 맹씨, 흥평공주, 부인 독발씨 | ||
자녀 | 10남 1녀 | ||
작호 | 장액공(張掖公) → 하서왕(河西王) → 양왕(凉王) | ||
묘호 | 태조(太祖) | ||
시호 | 무선왕(武宣王) | ||
연호 | 영안(永安, 401년 ~ 412년) 현시(玄始, 412년 ~ 428년) 승현(承玄, 428년 ~ 431년) 의화(義和, 431년 ~ 4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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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북량의 실질적인 창업군주. 장액군(張掖郡) 임송현(臨松縣) 출신의 노수호족. 흉노에는 좌저거(左沮渠)와 우저거(右沮渠)라는 관직이 있었는데, 저거몽손의 선조가 이 직책을 맡은 적이 있어 그 관직명을 성씨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저거몽손의 집안은 대대로 노수(盧水) 일대에 거주하며 부족의 수령으로 군림하였다. 저거몽손의 고조부 저거휘(沮渠暉), 중조부 저거귀(沮渠歸), 증조부 저거차(沮渠遮)는 모두 용맹하고 탁월한 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한다. 조부 저거기(沮渠祁)는 북지왕(北地王)에 봉해졌고, 나중에 부친 저거법홍(沮渠法弘)이 그 작위를 계승하였다. 저거법홍은 전진의 천왕 부견 시기에 중전호군(中田護軍)을 지냈다.
2. 생애
2.1. 저거몽손의 거병
저거몽손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노수호족 부곡(部曲)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는 웅장하고 걸출하며 계략이 많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역사서를 두루 읽었으며 천문(天文)에도 상당히 밝았다. 또, 그는 재치가 뛰어나고 권모술수에 능하여 여러 호인(胡人)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전진의 양주(涼州) 자사 양희(梁熙)와 여광도 저거몽손을 기이히 여기고 두려워하여, 저거몽손은 항상 술을 마시고 놀면서 자신의 진가를 숨기고 있었다.인가 원년(389년) 2월, 양희를 살해하고 양주(涼州)를 장악하여 후량을 건국한 여광이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였다. 이때 여광은 저거몽손에게 영인(營人)을 자율적으로 통솔하게 하고, 상직(箱直)으로 배속시켰다. 또한, 저거몽손의 백부 저거나구(沮渠羅仇)를 서평(西平) 태수, 저거나구의 동생 저거곡죽(沮渠曲粥)을 삼하(三河) 태수로 임명하였다.
용비 2년(397년) 정월, 양왕 여광이 걸복부의 서진을 정벌할 때, 그의 동생인 천수공 여연(呂延)을 선봉으로 삼아 저거나구, 저거곡죽을 이끌고 서진의 군주인 하남왕 걸복건귀를 부한(枹罕)에서 정벌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선봉군이 걸복건귀에게 속아 크게 패배하고 여연은 전사하였다. 이에 저거곡죽이 저거나구에게 말했다.
"주상(主上)은 어리석고 노쇠하며 교만하고 방종합니다. 여러 아들들이 당파를 형성하여 서로 헐뜯고, 참소하는 자들은 서로 견제하며 노려보고 있습니다. 지금 군대가 패배하여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이는 주상이 지혜와 용기가 부족하고 의심이 많기 때문으로, 이런 상황에서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우리 형제는 본래부터 그에게 두려운 존재로 여겨져 왔으니, 이 패배의 책임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명분 없는 죽음을 맞이하느니, 차라리 군대를 모아 서평으로 향하여 초조(苕藋)를 넘어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외쳐 싸움을 벌입시다. 그리하면 양주(涼州) 정도는 충분히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거나구가 거절하며 말했다."네 말이 진실로 옳다. 하나, 우리 집안은 대대로 충성과 효도로 서쪽 지역에서 명망을 얻어왔다. 한 지역의 귀감이 되었으니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리지 못하겠구나."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여광은 참소를 듣고 저거나구와 저거곡죽에게 패배의 책임을 물어 이 둘을 모두 죽였다.용비 2년(397년) 4월, 저거몽손은 저거나구와 저거곡죽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돌아갔고, 여러 부족의 많은 친족들이 장례식에 모여 그 수가 도합 10,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때 저거몽손이 곡을 하며 무리를 향해 말했다.
"예전에 한(漢) 왕조가 쇠약해졌을 때, 우리 선조께서는 두융(竇融)을 도와 하우(河右)를 안정시킨 공을 세우셨다. 그러나 지금 여왕(呂王)은 어리석고 노쇠하며, 무도하게 폭정을 일삼아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있다. 어찌 가만히 앉아 이 성패(成敗)를 관망만 할 수 있겠는가? 위로는 선조의 백성을 편안히 하려던 뜻을 이어받지 못하고, 아래로는 두 숙부께서 황천에서 원한을 품게 할 수는 없다!"
무리가 모두 만세를 외치며 찬동하였고, 그 자리에서 모두 거병할 것을 결의하였다. 저거몽손은 곧바로 병사를 모아 관청을 공격하여 중전호군 마수(馬邃)를 죽이고, 임송군(臨松郡)을 공격하여 뽑고 그 현령 정상(井祥)을 죽임으로써 무리와 맹세하였다. 열흘 만에 저거몽손의 병력은 10,000여 명에 이르렀고, 금산(金山)에 주둔하여 거점으로 삼았다.용비 2년(397년) 5월, 양왕 여광은 그의 아들인 태원공 여찬을 파견하여 총곡(怱谷)에서 저거몽손을 막게 하였고, 저거몽손은 여찬이 이끄는 후량군과 싸웠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저거몽손은 겨우 측근 6 ~ 7명만 이끌고 산속으로 도망쳤으며, 집과 가족은 모두 흩어져 사라졌다.
2.2. 단업을 추대하다
신새 원년(397년) 5월, 당시 후량의 진창(晉昌) 태수를 지내던 저거몽손의 사촌형 저거남성(沮渠男成)은 저거몽손이 병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돕기 위해 병력 수천을 모아 낙관(樂綰)에 주둔하였는데, 후량의 주천(酒泉) 태수 누징(壘澄)[1]이 이를 토벌하려 시도했다가 역으로 패하여 저거남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저거몽손은 이에 부곡(部曲)을 수습하여 저거남성에게 의지하였다.저거몽손이 군대를 이끌고 건강(建康)을 공격하는 동시에, 사자를 보내어 건강태수 단업에게 유세하였다. 단업은 항복을 거부하고 20여 일 동안 저거몽손에게 맞서 싸웠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외부에서 구원군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건강 사람 고규(高逵), 사혜(史惠) 등이 저거몽손에게 투항할 것을 권하였다. 결국 단업은 저거몽손에게 항복하였고, 저거몽손과 저거남성 등은 그를 받들어 사지절(使持節)•대도독(大都督)•용양대장군(龍驤大將軍)•양주목(涼州牧)•건강공(建康公)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연호는 '신새 원년(神璽元年)'으로 개원하였다. 단업은 저거몽손을 진서장군(鎮西將軍)•장액태수(張掖太守)로, 저거남성을 보국장군(輔國將軍)•주천태수(酒泉太守)로 임명하였으며, 군국(軍國)의 모든 일을 그들에게 위임하였다. 태원공 여찬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단업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여 시간을 허비하다 수도에서 일어난 곽논(郭黁)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회군하였다.
신새 2년(398년) 4월, 단업은 저거몽손에게 후량의 서군(西郡) 태수 여순(呂純)을 공격하도록 명령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모두 의구심을 품었으나, 저거몽손이 말했다.
"저 군(郡)은 산맥을 끼고 있는 요충지이니, 반드시 점령해야 합니다."
단업이 말했다."그대의 말이 옳다."
그리고는 저거몽손을 출병시켰다. 저거몽손이 한 달 동안 점령하지 못하자, 물을 끌어와 성을 침수시켰다. 결국 성이 함락되었고, 여순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이로 인해 후량의 진창태수 왕덕(王德)과 돈황(燉煌) 태수 맹민(孟敏)이 각각 자신들의 군(郡)을 들어 단업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단업은 저거몽손을 임지후(臨池侯)에 봉하였다.신새 2년(398년) 6월, 단업은 저거남성과 왕덕을 파견하여 후량의 상산공 여홍(呂弘)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여홍은 병력을 거느리고 나와, 장액(張掖)을 버리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이에 단업은 장액으로 거점을 옮기고 여홍을 추격하려 하자, 저거몽손이 간언하였다.
"귀환하는 병사는 막지 않고, 궁지에 몰린 적은 추격하지 않는 것이 병법입니다. 지금은 그들을 놓아주어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단업이 거부하며 말했다."하루라도 적을 놓아주었다가 나중에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친히 병력을 이끌고 추격하였다. 그러나 단업은 여홍에게 크게 패하였고, 저거몽손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단업은 탄식하며 말했다."과인이 자방(子房)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신새 2년(398년) 10월, 단업은 서안성(西安城)을 축성하고, 별장(別將) 장막해(臧莫孩)를 그곳의 태수로 삼았다. 저거몽손이 간하였다.
"장막해는 용맹하지만 지략이 부족하며,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 모릅니다. 이는 그를 위해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업은 이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장막해는 여찬에게 패배하였다. 이후로 저거몽손은 단업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항상 자신의 지혜를 숨기고 피해 다녔다.천새 원년(399년) 2월, 단업은 스스로 양왕(涼王)이라 칭하고, 영내에 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를 '천새(天璽)'로 개원하였다. 아울러 그는 저거몽손을 상서좌승(尚書左丞)으로, 양중용(梁中庸)을 우승(右丞)으로 임명하였다.
천새 원년(399년) 5월, 후량의 천왕 여광은 그의 두 아들 여소와 여찬을 보내 단업을 공격하였다. 단업은 남량의 독발오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독발오고는 그의 동생 독발리록고와 양궤(楊軌)를 보내 단업을 구원하였다. 여소와 여찬이 군대를 남량의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돌리자, 단업이 출병하여 그들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저거몽손이 간언하였다.
"양궤는 선비족 기병의 강함을 믿고 분수에 넘치는 야심을 품고 있는 자입니다. 여소와 여찬은 깊이 침입하여 병사를 사지(死地)에 몰아넣었으니, 반드시 결전을 통해 살 길을 찾으려 할 것으로, 그들을 상대하기란 어렵습니다. 지금 싸우지 않으면 태산(泰山) 같은 안정이 있을 것이나, 싸우면 계란을 쌓아놓은 듯한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단업이 이를 듣고 말했다."경(卿)의 말이 옳다."
이후 출병을 멈추고 싸우지 않았다. 잠시 후퇴한 여소와 여찬 역시 공격을 망설였고, 결국 각자 병력을 거두어 돌아갔다.천새 2년(400년) 정월, 북량의 전(前) 진창태수 당요(唐瑤)가 반란을 일으켜 이고에게 투항하였고, 주천태수 왕덕 또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하주자사(河州刺史)라 칭하였다. 이때 단업은 저거몽손에게 왕덕부터 토벌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자 왕덕은 성을 불태우고 부곡(部曲)을 이끌고 당요에게로 도망쳤다. 저거몽손은 사두(沙頭)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왕덕의 처자와 부곡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천새 2년(400년) 4월, 단업은 저거몽손의 뛰어난 무용을 두려워하여 그를 멀리하려고 하였다. 그는 저거몽손의 종숙부 저거익생(沮渠益生)을 주천태수로, 저거몽손을 임지태수(臨池太守)로 임명하고, 문하시랑 마권(馬權)을 저거몽손 대신 장액태수로 임명하였다. 마권은 평소에 저거몽손을 경시하며 업신여겼기에, 저거몽손은 마권을 참소하여 단업에 의해 죽게 후, 저거남성을 찾아가 말했다.
"단업은 어리석고 우둔하여 세상을 구제할 재목이 못 됩니다. 참소를 믿고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며, 판단력과 결단력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두려워했던 자는 색사(索嗣)와 마권뿐이었는데, 이제 그들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2] 제가 단업을 제거하고 형님을 받들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거남성이 대답하였다."단업은 객지에서 외로이 떠돌던 사람이었으나, 우리 가문이 그를 세워주었다. 그는 우리 형제에게 의지하기를 물고기가 물을 의지하듯 하고 있으니, 지금 그를 배반하면 상서롭지 못할 것이다."
이에 저거몽손은 뜻을 접었다.2.3. 북량의 군주가 되다
천새 3년(401년) 정월, 저거몽손은 이미 단업에게 위험한 인물로 각인되어 내심 불안함을 느꼈다. 단업은 또한 저거몽손의 야심을 눈치채고 아침저녁으로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였는데, 저거몽손 스스로 서안태수(西安太守)가 되기를 청하자, 그가 멀리 나가는 것을 기뻐하며 이를 허하였다. 저거몽손이 부임하기 전, 저거남성과 함께 난문산(蘭門山)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약속하였다. 이때 저거몽손은 몰래 사마 허함(許咸)을 단업에게 보내 이렇게 참소하였다."저거남성이 반란을 꾀하고 있으며, 허가를 얻어 이 날에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만약 그가 난문산에서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면 이로써 신(臣)이 말한 바가 증명되는 것입니다."
정해진 날이 되자 과연 허함의 말대로 일이 벌어졌다. 천새 3년(401년) 4월, 단업은 저거남성을 체포하여 자결을 명하였다. 이에 저거남성이 항변하였다.
"저거몽손은 자신이 반란을 꾀하려 한다는 사실을 신(臣)에게 먼저 고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형제의 정 때문에 이를 숨기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의 부중(部眾)이 따르지 않을까봐 저거몽손은 신과 기일을 정하여 난문산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약조한 뒤, 신을 무고하게 참소하였습니다. 이는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 위해 신을 죽이려는 의도입니다. 신이 아침에 죽으면 저거몽손은 저녁에 거병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이 죽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면서 신의 죄악을 폭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거몽손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그때 전하의 칙령으로 그를 토벌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업은 이를 듣지 않고 끝내 저거남성을 죽였다. 이윽고 저거남성이 죽었다는 소식은 저거몽손에게도 전해졌고, 저거몽손은 이내 눈물을 흘리며 무리에게 말했다."저거남성 형님은 단왕(段王)에게 충성을 다하였으나, 단왕은 아무 이유 없이 형님을 억울하게 도륙하였다. 그대들은 복수를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 주(州)의 땅에서 병란이 일어나니, 이는 단왕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처음 단왕을 받들었던 것은 그를 진승, 오광과 같은 지도자로 여겼기 때문이었으나, 그는 참소를 믿고 의심이 많으며, 충성스럽고 선량한 이를 억울하게 살해하였다. 어찌 편히 누워 이를 바라보며 백성이 재난을 겪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저거남성은 평소에 무리의 신뢰를 얻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모두 분노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에 앞다투어 저거몽손을 따라나섰고, 저지(氐池)에 이를 무렵에는 저거몽손을 따르는 병력이 10,000명을 넘었다. 진군장군 장막해는 부대를 이끌고 와 그에게 항복하였으며, 강족을 비롯한 호(胡)족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병력을 일으켜 호응하였다.저거몽손이 진군하여 후오(侯塢)에 주둔하였다. 당시 단업은 이전에 우장군 전앙(田昂)을 의심하여 가두어 두었으나, 저거몽손이 들이닥쳤다는 보고를 듣고 전앙을 옥에서 꺼내 사과한 후, 그를 용서하여 무위장군 양중용(梁中庸) 등과 함께 저거몽손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때 단업의 별장(別將) 왕풍손(王豐孫)이 단업에게 말했다.
"서평(西平)의 전씨(田氏) 가문은 대대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많습니다. 전앙은 겉으로는 공손하지만 속마음은 잔혹하며, 뜻이 크고 감정이 험악하여 믿을 수 없습니다."
단업이 말했다."내가 전앙을 의심한 지 오래되었으나, 당장 그를 제외하고는 저거몽손을 토벌할 만한 자가 없다."
그리고는 왕풍손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전앙이 이끄는 군대가 후오에 도착하자, 저거몽손이 저지에서 나와 그를 맞이하였다. 전앙은 기병 500기를 이끌고 저거몽손에게 항복하였고, 이에 따라 지휘관을 잃은 단업의 군대가 크게 무너지니, 이어서 양중용도 병력을 이끌고 나와 항복하였다. 천새 3년(401년) 5월, 저거몽손이 마침내 장액에 당도하였다. 이를 들은 전앙의 형의 아들 전승애(田承愛)이 관문을 부수고 단업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 그를 사로잡았고, 단업의 측근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단업은 저거몽손의 군사들을 향해 크게 외치며 말했다.
"진서장군은 어디 있는가?"
이에 군사들이 저거몽손을 불러오니, 단업은 그의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며 말했다."과인은 외롭고 떠도는 몸이었으나, 이미 귀하의 가문에 의해 추대된 바요. 부디 과인의 목숨만은 살려주어, 영남(嶺南)으로 몸을 던져 동쪽으로 돌아가 처자식을 만날 수 있게만이라도 해다오."
그러나 저거몽손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곧바로 단업을 참수하였다. 단업이 패망하자, 저거남성의 동생 저거부점(沮渠富占)과 장군 구뢰(俱傫)는 가구 500호를 이끌고 남량의 하서왕 독발리록고에게 의탁하였다.영안 원년(401년) 6월, 양중용, 전앙, 방구(房晷) 등이 함께 저거몽손을 사지절•대도독•대장군•양주목(涼州牧)•장액공(張掖公)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북량의 군주로 모셨다. 저거몽손은 경내(境內)에 대사면령을 내려 사형 이하 죄인들을 모두 사면시켰고, 연호를 '영안(永安)'으로 개원하였다.[3] 저거몽손은 관리를 임명하고 백관을 설치하여 친족과 신하들에게 관직과 작위를 다음과 같이 나누어 주었다.
- 사촌형 저거복노(沮渠伏奴) → 진군장군(鎮軍將軍)•장액태수•화평후(和平侯)
- 동생 저거나(沮渠挐) → 건충장군(建忠將軍)•도곡후(都谷侯)
- 우장군 전앙 → 진남장군(鎮南將軍)•서군태수
- 진군장군 장막해 → 보국장군(輔國將軍)
- 후량의 시중 방구 → 좌장사(左長史)
- 무위장군 양중용 → 우장사(右長史)
- 장즐(張騭) → 좌사마(左司馬)
- 사정례(謝正禮) → 우사마(右司馬)
같은 달, 북량의 돈황태수였던 이고 또한 병사를 일으켜 스스로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서호교위(西胡校尉)•사주자사(沙州刺史)를 칭하였다. 이때 그는 돈황태수의 직함은 유지하였고, 연호는 '경자(庚子)'로 개원하여 서량 정권을 세워 저거몽손에게 대항하였다.
2.4. 치세 초기
영안 원년(401년) 7월, 후진의 황제 요흥이 농서공 요석덕을 파견하여 후량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저거몽손은 종사중랑 이흥(李興)을 후진에 사신으로 보내어 화친을 도모하였다.영안 원년(401년) 8월, 저거몽손이 관할하던 주천(酒泉)과 양녕(涼寧) 두 군(郡)이 반란을 일으켜 서량의 이고에게 항복하였다. 또한, 후량이 요석덕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거짓 소문을 들은 저거몽손은 크게 두려워하며, 건충장군 저거나와 목부장사 장잠(張濳)을 고장으로 보내어 요석덕을 만나 군대를 요청하는 한편, 부민(部民)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사실상 저거몽손의 투항을 받았다 생각한 요석덕은 크게 기뻐하며 장잠을 장액태수로, 저거나를 건강태수로 삼았다. 이후 장잠은 돌아와 동쪽으로 이주하는 계획에 적극 찬성하였으나, 이에 대해 저거나는 사사로이 저거몽손을 찾아가 말했다.
"확인해보니 여씨(呂氏)의 세력이 아직 남아 있고, 고장성은 아직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요석덕은 양식이 고갈되어 곧 돌아갈 것으로, 그는 오래 버티지 못할 터인데, 어찌하여 고향을 떠나 남에게 예속되려 하십니까?"
보국장군 장막해 또한 저거나의 의견에 찬동하였다. 이에 저거몽손은 장잠을 참수하고 글을 내려 말했다."과인은 허약하고 보잘것없는 인물로서 우연히 이 시대의 운명을 맡게 되었으나, 아직 대계(大計)를 널리 펴지 못하여 무리들을 평정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도충(桃蟲)이 활개치고, 동경(東京)의 큰 돼지가 서쪽 변방까지 넘나들게 되었다. 전쟁이 자주 일어나 군대가 동원되고, 창과 칼이 쉬지 않아 제때 농사를 짓지 못하여 백성들의 집집마다 먹을 양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여러 부역과 세금을 면제하고, 백성들이 농사에만 전념하도록 하며, 명확한 규정을 세워 땅의 생산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만들겠다."
영안 원년(401년) 9월, 저거몽손은 아들 저거해념(沮渠奚念)을 남량에 볼모로 보냈다. 그러나 남량의 하서왕 독발리록고는 저거해념을 볼모로 받길 거부하며 말했다.
"저거해념은 나이가 어리니, 차라리 저거나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
영안 원년(401년) 10월, 저거몽손은 다시 사신을 보내 독발리록고에게 말했다.
"신은 이전에 저거해념을 보내 진심을 다해 예를 갖추었으나, 성스러운 뜻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로 다시 신의 동생 저거나를 요청하셨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진실한 신뢰가 있다면 어린 자식이라 해서 가벼울 리 없으며, 신뢰가 없다면 동생이라 해서 무거워질 리도 없습니다. 지금 적의 침략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도 신이 조서를 받들지 못하는 이 상황을 고려하시어 부디 폐하께서 밝게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독발리록고는 이를 보고 분노하여 장송후 독발구연(禿髮俱延)과 흥성후 독발문지(禿髮文支)에게 기병 10,000기를 이끌고 저거몽손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만세(萬歲)와 임송(臨松)에 이르러 저거몽손의 사촌동생 저거선선구자(沮渠鄯善苟子)를 사로잡고 백성 6,000여 호를 포로로 잡았다.영안 원년(401년) 12월, 저거몽손은 종숙부 저거공차(沮渠孔遮)를 보내 남량에 입조케 하고, 탁발나를 인질로 보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독발리록고는 잡아간 백성을 돌려주고, 독발구연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영안 2년(402년) 2월, 고장성에 대기근이 들었다는 보고를 입수한 저거몽손은 군대를 이끌고 후량을 침공하였다. 여륭은 독발리록고에게 구원을 청했고, 독발리록고는 광무공 독발녹단을 보내 이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독발녹단이 이르기도 전에 저거몽손이 여륭에게 패하였다. 저거몽손은 여륭에게 맹약을 청하고, 곡식 10,000석을 바친 후에 돌아갔다.
영안 2년(402년) 10월, 서량의 군주 이고가 장수 당요와 응양장군 송요(宋繇)를 파견하여 주천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주천을 함락시키고, 북량의 주천태수 저거익생을 사로잡았다.
영안 2년(402년) 12월, 북량의 서군태수 양중용이 이고에게 투항하였다. 하지만 저거몽손은 그의 처자식을 벌하지 않고 서량으로 보내주었다.
같은 해, 큰 바람과 번개로 인해 땅이 흔들렸고, 그 여파로 '석책(石冊)'이라는 이름의 돌이 발견되었다.
영안 3년(403년) 정월, 저거몽손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노인을 공경하고 백성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은 진(晉)나라의 문공(文公)이 백성들의 노래를 받아들여 영웅과 기이한 인재를 초빙하고 태평성대를 이룬 방식이다. 하물며 과인은 덕이 얕고 지혜가 부족하여 먼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니, 어찌 올바른 말을 듣고 거울삼아 반성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외의 신하들은 각자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을 찾아내고, 초야에 묻혀있는 인재들을 폭넓게 천거하여 과인의 부족함을 보완하게 하라."
영안 3년(403년) 2월, 후량의 군주 여륭은 저거몽손과 독발녹단이 서로 협력하여 침공해 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동생 여초(呂超)를 후진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영안 3년(403년) 6월, 저거몽손은 보국장군 장막해를 보내어 북산(北山)에서 후량군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장막해는 후량군을 크게 격파하고, 후량의 백성 5,000호를 사로잡아 귀환하였다.
영안 3년(403년) 8월,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여륭이 후진에 항복하면서 후량이 멸망하였다. 후진의 황제 요흥은 상서좌복야 제난(齊難) 등을 보내 병력을 이끌고 여륭을 맞이하게 하였다. 여륭은 제난에게 군사를 이끌고 북량을 정벌할 것을 권유하였고, 제난이 이를 따랐다. 이에 저거몽손은 다시 장막해를 보내 제난의 선봉군을 격파하였다. 제난은 더이상 정벌을 속행할 수 없어 저거몽손과 맹약을 맺은 것으로 만족하여 철수하였고, 저거몽손은 건충장군 저거나를 후진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당시 저거몽손의 백부인 중전호군 저거친신(沮渠親信)과 임송태수 저거공독(沮渠孔篤)은 모두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백성들에게 해를 끼쳐 큰 고통을 주고 있었다. 이에 저거몽손이 말했다.
"나의 국가를 어지럽히는 자는 두 백부이다. 이들이 어찌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두 사람을 강제로 자결하게 하였다.영안 3년(403년) 10월, 후진에서 홍려 양비(梁斐)와 장구(張構) 등을 보내 저거몽손을 진서대장군•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사주자사(沙州刺史)•서해후(西海侯)로 삼았다. 이와 동시에 후진은 독발녹단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고, 광무공(廣武公)에 봉하였다. 저거몽손은 이 소식을 듣고 불쾌하여 양비와 장구에게 말했다.
"독발녹단은 상공(上公)의 작위를 받고, 나는 후(侯)의 작위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장구가 답하였다."독발녹단은 경솔하고 교활하며 인정이 없어, 진심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높은 관직과 허울뿐인 명예로 그를 얽어매고, 그가 선한 길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에 상응하는 예우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군께서는 충성심이 태양처럼 빛나고, 공로가 당대에 빼어나니, 황실을 보좌하여 대업을 이루는 데 마땅히 큰 역할을 맡으실 분입니다. 어찌 신뢰 없이 대하겠습니까? 성스러운 조정에서는 작위는 반드시 공로에 따라 주어지고, 벼슬은 덕을 넘지 않습니다. 예컨대 윤위와 요황은 나라를 창업할 때 공로를 세웠고, 제난(齊難)과 서락(徐洛)은 원로 공신으로서 용맹한 장수이나, 모두 2품의 지위에 그치고, 후(侯)나 백(伯), 장군의 직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어찌 장군이 그들보다 먼저 높은 작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두융(竇融)은 조정에서의 신중한 배려에 감사하며, 앞선 신하들보다 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저희들은 장군께서 이런 질문을 하실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거몽손이 다시 물었다."조정은 어째서 바로 장액(張掖)을 봉지로 삼지 않고 멀리 서해(西海)를 봉하였는가?"
장구가 대답하였다."장액은 이미 장군께서 차지하여 장군의 손아귀 안에 있습니다. 조정에서 서해를 멀리 봉지로 정한 것은 장군의 영토를 더욱 넓히고 크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제서야 저거몽손은 크게 기뻐하며 작위를 받아들였다.영안 5년(405년) 2월, 저거몽손은 적낙반(狄洛盤)을 번화(番禾)에서 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대신 그곳의 백성 500여 호를 이주시키고 돌아왔다.
같은 해, 저거몽손은 칼 100자루를 제작하고, "영안(永安)"이라는 글자를 예서체로 새겼다.
영안 5년(405년) 10월, 서량의 군주 이고가 도읍을 주천으로 옮기며 점차 저거몽손을 압박하였다. 이에 저거몽손은 군대를 정비하여 이를 방어하였다.
영안 6년(406년) 6월, 남량의 군주 독발녹단이 군사를 이끌고 저거몽손을 공격하였다. 저거몽손은 성을 굳게 지키며 방어하였고, 독발녹단은 적천(赤泉)에 이르러 약탈한 뒤 물러갔다.
영안 6년(406년) 8월, 저거몽손이 서량의 이고를 주천에서 습격하였다. 저거몽손이 안미(安彌)[4]에 이르렀을 때, 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이고가 이를 알아차리고 군사를 이끌고 나와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저거몽손은 서량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이고는 성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이에 저거몽손도 군사를 이끌고 철수하였다.
2.5. 남량 정벌
영안 7년(407년) 2월,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오르는 이상 현상이 나타났으며, 산이 무너지고 땅이 진동하며 나무가 부러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태사령 유량(劉梁)이 저거몽손에게 말했다."신유(辛酉)년은 '금(金)'에 해당합니다. 땅이 '금'의 기운으로 인해 움직였고, '금'이 움직이면 '목(木)'을 이깁니다. 이는 대군(大軍)이 동쪽으로 나아가면 막을 자가 없다는 징조입니다."
또, 당시 장액성에서는 자주 빛과 광채가 나타났다. 저거몽손이 말했다."이는 왕의 기운이 장차 이루어지고, 백 번 싸워도 백 번 승리할 징조이다."
영안 7년(407년) 9월, 저거몽손은 독발녹단을 균석(均石)에서 공격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였고, 그를 격파하였다. 이어 서군을 공격해 일륵(日勒)에서 남량의 서군태수 양통(楊統)을 항복시켜 서군을 빼앗았다.
영안 8년(408년), 주천 남쪽에 동타산(銅駝山)이 있었는데, 이 산을 범하면 반드시 큰 비나 눈이 내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저거몽손은 장인을 보내어 그곳에서 구리를 채취하게 하였고, 10,000근에 달하는 구리를 얻었다.
영안 9년(409년) 2월, 장액태수 구호륵(句呼勒)이 서량으로 도망쳤다.
영안 9년(409년) 7월, 저거몽손은 저거나구의 아들 저거성도(沮渠成都)를 금산태수로, 저거곡죽의 아들 저거선선(沮渠鄯善)을 서군태수로 임명하였다. 이때 구호록이 서량에서 다시 돌아와 저거몽손에게 투항하였고, 저거몽손은 그를 이전처럼 대우하였다. 이후 저거몽손은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원정에 나섰으며, 단령(丹嶺)에 주둔하였다. 이때 북로대인 사반(思盤)이 부족 3,000명을 이끌고 와 항복하였다.
이 시기에 영안(永安) 지역에서 서로 다른 두 나무가 한 줄기로 연결된 연리지(連理枝)가 자라났다. 영안현령 장피(張披)가 글을 올려 말했다.
"다른 가지가 하나의 줄기를 공유하는 것은 먼 지역들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징조이며, 서로 다른 뿌리가 한마음으로 연결된 것은 위아래가 한결같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지극한 도(道)의 아름다운 상서로운 징표이자, 대동(大同)의 좋은 징조입니다."
저거몽손이 말했다."이는 모두 이천석(二千石)의 관리들이 몸소 시대를 구제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지, 어찌 나의 얕은 덕으로 감응된 일이겠는가?"
영안 10년(410년) 3월, 저거몽손이 기병 30,000기를 이끌고 남량을 정벌하기 위해 서군에 주둔하였다. 이때 북서쪽에서 큰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에 다섯 가지 색의 기운이 나타났으며, 곧이어 대낮에 어두워졌다. 저거몽손은 진격하여 현미(顯美)에 도착해 수천 호를 이주시킨 뒤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독발녹단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궁천(窮泉)에 이르러 저거몽손을 따라잡았다. 저거몽손이 전투를 준비하자, 장수들이 말했다.
"적이 이미 진을 쳤으니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저거몽손이 말했다."독발녹단은 우리가 멀리에서 와 피로할 것이라 여겨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의 진영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한 번의 공격으로 그를 사로잡을 수 있다."
저거몽손은 곧바로 공격을 감행하여 독발녹단을 크게 무찔렀다. 그는 승세를 타고 고장(姑臧)까지 이르렀으며, 이에 항복한 한족과 강족이 10,000여 호에 달했다. 독발녹단은 두려워 성을 굳게 지키며 화친을 요청하고, 사예교위 경귀(敬歸)와 그 아들 경타(敬他)를 인질로 보냈다. 저거몽손은 이를 허락하고 8,000호를 약탈하여 귀환하였다.때마침 남량의 우위장군 절굴기진(折掘奇鎭)이 석여(石驢)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독발녹단은 남쪽으로 낙도(樂都)로 도망쳤다. 그러나 독발녹단이 고장성을 떠나자마자, 위안(魏安) 사람 후모(侯謀) 등이 성문을 닫고 반란을 일으켜 사신을 보내 저거몽손에게 투항하였다. 또, 초랑(焦朗)이 고장을 점거하고 스스로 대도독•용양대장군이라 칭하며 서량의 이고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영안 10년(410년) 8월, 저거몽손은 기병 2,000기를 이끌고 서량을 공격하여, 마묘(馬廟)에서 이고의 아들 이흠을 패배시키고, 서량의 장수 주원호(朱元虎)를 사로잡았다. 이후 군사를 이끌고 철수할 때, 이고가 은 2,000근과 금 2,000량을 보내며 사죄하니, 저거몽손은 주원호를 이고에게 돌려보냈다.
영안 11년(411년) 2월, 초랑이 여전히 고장을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저거몽손은 기병을 이끌고 고장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초랑을 사로잡아 귀환하였다. 저거몽손은 초랑을 용서하였다. 이후 저거몽손은 겸광전(謙光殿)에서 문무 관료와 장수들을 크게 연회로 대접하고, 금과 말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그는 동생 건충장군 저거나를 호강교위(護羌校尉)•진주자사(秦州刺史)•안평후(安平侯)로 삼고 고장성을 지키게 하였다. 저거몽손은 곧이어 남량을 정벌하여 낙도(樂都)를 포위하였으나, 30일 동안 함락하지 못하였다. 남량왕 독발녹단은 아들 독발안주(禿髮安周)를 인질로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고, 저거몽손은 이를 받아들이고 회군하였다.
저거몽손이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발녹단이 다시 군사를 이끌고 저거몽손을 공격하였으나, 저거몽손이 이를 격파하고 낙도를 재차 포위하였다. 독발녹단은 궁지에 몰려 항복을 청하며 다시 아들 독발염간(禿髮染干)을 인질로 보냈고, 저거몽손은 이에 응하여 철수하였다. 같은 달, 동생 저거나가 사망하니, 저거몽손은 종조부 저거익생의 아들을 진동장군(鎮東將軍)•호강교위•진주자사로 임명하여 고장을 지키게 하였다.
영안 11년(411년) 7월, 저거몽손은 저거백년(沮渠百年)을 보내 서량의 이고를 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고의 세자 이흠이 기병 7,000기으로 이를 막아 격전을 벌였고, 저거백년은 병력 수천을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흠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영안 12년(412년) 10월, 저거몽손은 도읍을 고장으로 옮겼다.
현시 원년(412년) 11월, 저거몽손이 겸광전에서 스스로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하였다. 경내에 대사면을 내려 사형에 해당하는 죄 이하의 죄인들을 용서하였고, 연호를 '현시(玄始)'로 개원하였다. 저거몽손은 백관을 설치하고, 궁전과 성문을 수리하며, 여러 누각을 세우는 등의 건축 사업을 추진하였다.
현시 2년(413년) 정월, 저거몽손은 어머니 차씨(車氏)를 왕태후로, 아내 맹씨(孟氏)를 왕후로 책봉하였다.
현시 2년(413년) 4월, 저거몽손이 아들 저거정덕(沮渠政徳)을 세자로 세우고, 진위대장군(鎮衛大將軍)•녹상서사(錄尚書事)의 관직을 겸하게 하였다.
남량왕 독발녹단이 저거몽손을 공격하였으나, 저거몽손이 이를 약후오(若厚塢)와 약량(若涼)에서 연이어 격파하였다. 저거몽손은 승세를 타고 낙도를 20일간 포위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이때 남량의 황하(湟河) 태수 독발문지(禿髮文支)가 황천(湟河)를 들어 5,000여 호를 이끌고 저거몽손에게 투항하였으며, 남량의 진군장군 성의후(成宜侯) 역시 병력을 이끌고 저거몽손에게 투항하였다. 저거몽손은 독발문지를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광무태수(廣武太守)로, 성의후를 진위장군(振威將軍)•황천태수(湟川太守)로 임명하였고, 전중장군 왕건(王建)을 황하태수(湟河太守)로 삼았다.
현시 2년(413년) 8월, 저거몽손이 다시 남량을 정벌하자, 독발녹단은 두려워하여 태위 독발구연을 인질로 보내 화친을 청하였고, 저거몽손은 이에 응하여 철수하였다. 이후 저거몽손은 글을 내려 말했다.
"자고로 현명하고 어진 임금들이 난세를 바로잡을 때, 반드시 사방을 정비한 뒤 순수한 기풍을 드높였다. 과인은 비록 지혜가 부족하나, 시대를 구제할 책임을 맡고 있다. 교활한 종놈 독발녹단은 옛 수도에서 매복하며 한족과 오랑캐 모두에게 재앙을 끼쳤다. 동원(東苑)에서 그가 벌인 학살극은 장평(長平)의 참혹함보다 심하고, 변방 성읍의 피해는 험읍(獫狁)이 침략하여 입힌 피해보다도 크다.
과인은 늘 고통받는 무고한 백성들을 생각하며 편히 쉴 수 없어, 친히 갑옷을 입고 먼지 속에서 피로를 무릅쓰며 싸운 끝에, 비록 그 둥지를 기울게 했으나, 독발녹단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그의 동생 독발문지는 한나라의 항백의 의리를 따라 우리에게 귀순하였고, 서평(西平) 이남의 모든 성들도 잇달아 귀순하였다. 오직 독발녹단만이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낙도에서 죽음을 지키고 있으나, 그의 사지(四肢)는 이미 잘려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의 운수가 이미 청일(清一)을 이룰 때가 되었으니, 이를 멀리 알려 백성들이 영원히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하라."
과인은 늘 고통받는 무고한 백성들을 생각하며 편히 쉴 수 없어, 친히 갑옷을 입고 먼지 속에서 피로를 무릅쓰며 싸운 끝에, 비록 그 둥지를 기울게 했으나, 독발녹단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그의 동생 독발문지는 한나라의 항백의 의리를 따라 우리에게 귀순하였고, 서평(西平) 이남의 모든 성들도 잇달아 귀순하였다. 오직 독발녹단만이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낙도에서 죽음을 지키고 있으나, 그의 사지(四肢)는 이미 잘려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의 운수가 이미 청일(清一)을 이룰 때가 되었으니, 이를 멀리 알려 백성들이 영원히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하라."
현시 2년(413년) 10월, 저거몽손은 서쪽으로 초조(苕藋)에 이르러, 관군장군 저거복은(沮渠伏恩)을 파견하여 기병 10,000기로 비화(卑和)와 오제(烏啼)의 두 부족을 습격하게 하였다. 저거복은은 그들을 크게 무찔러 2,000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이 시기에 저거몽손의 어머니 왕태후 차씨가 사망하였다.
현시 3년(414년) 여름, 남량의 무왕 독발오고의 손자 독발승발(禿髮承缽)과 강왕 독발리록고의 손자 독발부주(禿髮副周)가 저거몽손에게 귀순하였다.
현시 3년(414년) 6월, 남량이 서진의 걸복치반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독발녹단은 걸복치반에게 투항하러 가면서 독발번니(禿髮樊尼), 독발흘발(禿髮紇勃), 독발낙굉(禿髮洛肱)에게 10,000여 호를 이끌고 북량으로 가도록 하였다.
현시 4년(415년) 12월, 동진의 익주(益州) 자사 주령석이 사신을 보내 저거몽손과 만나게 하여, 그에게 동진 조정의 위엄과 덕을 전하게 하면서 북량과의 교류를 꾀하였다.
2.6. 서진과의 전쟁
현시 4년(415년) 3월, 저거몽손은 군사를 이끌고 서진의 광무군(廣武郡)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는 별장을 보내 황하(湟河)로 양식을 운송하도록 했으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광무에서 황하(湟河)로 직접 이동하여 호문(浩亹)을 건넜다. 이에 걸복치반은 장군 걸복퇴니인(乞伏魋尼寅)을 파견하여 호문에서 저거몽손으로 저지하게 하였으나, 저거몽손이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걸복퇴니인을 참수하였다.걸복치반은 다시 장군 왕형(王衡), 절배(折斐), 곡경(曲景) 등을 보내 기병 20,000기로 근저령(勤姐嶺)을 점거하게 하였다. 저거몽손은 싸움을 벌이며 전진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고, 절배 등 7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후 저거몽손은 자신의 동생 저거한평(沮渠漢平)을 절충장군(折衝將軍)•황하태수(湟河太守)로 임명한 뒤 군사를 이끌고 귀환하였다.
현시 4년(415년) 5월, 저거몽손은 사인(舍人) 황신(黃迅)을 동진의 익주로 보내 답례하고, 동시에 동진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재앙을 내려 사해(四海)가 분열되고, 조정의 위세와 영광은 남쪽 끝에 머무르며, 백성들은 오랑캐의 손아귀에 빠져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어지는 성스러운 유업을 계승하시어, 주(周)나라와 한(漢)나라를 능가하는 도를 펼치시니, 순수한 교화가 사방에 두루 미치고 있습니다. 신은 비록 머리를 풀어헤치고 변방에 살며, 재능도 당대의 준걸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하서(河西)의 남은 백성들이 신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았습니다. 신의 선조들은 대대로 조정의 은총을 입었으며,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의리를 지키며 한결같이 왕실을 흠모하였습니다.
지난 겨울, 익주자사 주령석이 사신을 보내 조정의 평안과 안부를 물으며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거기장군 유유께서 중원을 평정하기 위해 말을 배불리 먹이며 창을 휘두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대진(大晉)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뛰어난 인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신은 이를 보면 소강(少康)이 하(夏)나라를 부흥시키고, 광무제(光武帝)가 한나라의 업적을 회복한 사례가 떠오릅니다. 이들은 팔을 걷고 외치며 일어나 한 지역의 병력으로 하늘에 맞먹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하물며 폐하께서는 완전한 초(楚)의 땅을 점거하셨고,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의 정예 병력을 보유하고 계시니, 어찌 태평하게 손을 놓고 두 옛 도읍(장안과 낙양)들을 오랑캐에게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육군(六軍)이 북쪽으로 진군하여 중원을 회복할 기회가 온다면, 신은 하서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晉軍)의 우익(右翼)이 되어 오랑캐를 몰아내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또, 이때 당시 북하의 혁련발발이 어사중승 오락고(烏落孤)를 보내 동맹을 제안하자, 저거몽손은 동생인 황하태수 저거한평을 보내어 북하와 동맹을 맺게 하였다.지난 겨울, 익주자사 주령석이 사신을 보내 조정의 평안과 안부를 물으며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거기장군 유유께서 중원을 평정하기 위해 말을 배불리 먹이며 창을 휘두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대진(大晉)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뛰어난 인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신은 이를 보면 소강(少康)이 하(夏)나라를 부흥시키고, 광무제(光武帝)가 한나라의 업적을 회복한 사례가 떠오릅니다. 이들은 팔을 걷고 외치며 일어나 한 지역의 병력으로 하늘에 맞먹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하물며 폐하께서는 완전한 초(楚)의 땅을 점거하셨고,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의 정예 병력을 보유하고 계시니, 어찌 태평하게 손을 놓고 두 옛 도읍(장안과 낙양)들을 오랑캐에게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육군(六軍)이 북쪽으로 진군하여 중원을 회복할 기회가 온다면, 신은 하서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晉軍)의 우익(右翼)이 되어 오랑캐를 몰아내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같은 달, 서진왕 걸복치반은 군사 20,000명을 이끌고 황하(湟河)를 습격하였다. 저거한평은 힘껏 싸우며 성을 지키다가, 사마 외인(隗仁)을 밤에 출격시켜 서진군의 진영을 야습하였다. 외인이 서진군을 크게 패배시키고 수백 명의 목을 베니, 걸복치반은 철수하려 했으나, 저거한평의 장사 초창(焦昶)과 장군 단경(段景)이 비밀리에 걸복치반과 내통하며 저거한평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결국 저거한평은 초창과 단경의 설득을 받아들여 스스로 결박하여 항복하였다. 그러나 저거한평의 사마 외인은 항복을 거부하고 붙잡혀 걸복치반에게 끌려갔으며, 참수될 위기에 처하였으나, 걸복치반의 장군 단휘(段暉)가 간청하여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다. 외인은 이후 탈출하여 고장으로 돌아갔고, 저거몽손은 그를 고창태수(高昌太守)로 임명하였다.
현시 5년(416년) 정월, 서진왕 걸복치반이 강천(漒川)에서 후진의 조양공 팽리화(彭利和)를 치자, 저거몽손은 군사를 이끌고 서진을 공격하여 석천(石泉)에 진을 치고 전진하였다. 이에 걸복치반은 정벌을 중단하고 돌아와 양무후 걸복담달(乞伏曇達)을 보내 이를 저지하려 하였고, 저거몽손은 철군하며 사신을 보내 서진과 화친을 도모하였다.
현시 5년(416년) 4월, 서역에서 삼킨 칼을 토하고 불을 뿜는 신비로운 마술과 기예를 가진 사람들이 저거몽손에게 공물로 바쳐졌다. 저거몽손은 이들을 내원(內苑)의 유림당(遊林堂)에서 공연하게 하였고, 고대 성현들의 초상을 그려 내원당을 장식하였다.
현시 5년(416년) 9월, 유림당이 완공되자 저거몽손은 대신들을 크게 연회에 초대하고, 경전과 전적에 대해 담론을 나누었다.
현시 6년(417년) 3월, 저거몽손은 서쪽으로 금산(金山)에 제사를 지내고, 저거광종(沮渠廣宗)을 보내 기병 10,000기로 오제부(烏啼部)를 습격하게 하였다. 저거광종은 오제부를 크게 격파하고 서쪽으로 초조(苕藋)에 이르렀다. 또, 저거몽손은 전장군 저거성도(沮渠成都)를 보내 기병 5,000기로 비화부(卑和部)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친히 중군(中軍) 30,000명을 지휘하면서 그 뒤를 이었다. 비화부의 부락민들은 군사를 이끌고 와 항복하였고, 저거몽손은 해안을 따라 서쪽을 순행한 뒤 다시 금산으로 돌아와 귀환하였다.
2.7. 서량 멸망
현시 6년(417년) 4월, 저거몽손은 장액태수 저거광종을 시켜, 서량에 거짓 투항하게 하여 서량왕 이흠을 유인하려 하였다. 이흠은 이를 믿고 군사를 이끌고 저거광종에게 호응하러 오자, 저거몽손은 요천(蓼泉)에 매복군을 배치하였다. 이흠은 이를 눈치채고 미리 물러났으나, 저거몽손이 추격하여 해지간(解支澗)[5]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흠의 군대를 이내 대파하여 7,000여 명을 죽였다. 저거몽손은 군대를 철수하고, 건강(建康)에 성을 쌓은 뒤 돌아갔다.현시 6년(417년) 5월, 저거몽손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근래 봄부터 큰 가뭄이 발생하여, 시기에 맞게 자란 작물들이 피해를 입고 푸른 들판과 초원이 갑자기 메마른 땅으로 변하였다. 이는 형정(刑政)이 적절하지 못해 억울한 옥사가 있기 때문인가? 혹은 부역과 세금이 과중하여 하늘의 징계를 받은 것인가? 과인 스스로 반성하건대, 이것은 모두 과인의 죄로다. 《서경(書經)》에서 이르기를 '백성이 저지른 잘못도 임금 한 사람의 죄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에 경내의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 이하를 모두 대사면하고, 백성들의 여름과 가을의 조세를 면제하노라."
이튿날 큰 비가 내렸고, 가뭄이 해소되었다.현시 6년(417년) 9월, 저거몽손은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고 관중(關中)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다. 문하교서랑 유상(劉祥)이 이에 대해 의견을 말하자, 저거몽손은 분노하며 말했다.
"너는 유유가 관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감히 기뻐하는 것이냐?"
그리고는 유상을 처형하였다. 이처럼 저거몽손의 행동은 엄격하고 가혹하였다. 이후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고대로부터 군사를 움직이는 자는 세성(歲星, 목성)이 위치한 지역을 침범하지 않는 법이다. 요씨(姚氏)는 순(舜)의 후예이자 헌원(軒轅)의 자손이다. 그런데 지금 세성이 헌원 자리에 있는데도 유유가 요씨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유유가 관중을 오래 지키지 못할 징조이다."
현시 6년(417년) 10월, 멸망한 후진의 장군 요애(姚艾)가 저거몽손에게 투항하였다. 저거몽손은 군대를 이끌고 그를 맞이한 뒤, 그를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삼았다. 이때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고 시대를 구제하기 위함이며, 관직에 충실하게 임하는 것은 정사를 밝게 하는 기초입니다. 관직에 있는 자는 몸을 아끼지 않고 임무를 다해야 하며, 직책을 맡은 자는 사심 없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황실의 질서가 처음 흔들리고, 전쟁이 벌어져 민간과 국가가 초토화된 이후로는 옛 규칙을 따를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조정의 관리들 중에는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고, 공문서를 집에 두고 누운 채로 서명하거나, 어떤 일에는 명확한 판단 없이 대충 넘기며, 임금의 상벌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논의가 묵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능력 있는 자와 무능한 자가 뒤섞여 구분되지 않으며,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거나 격려하려는 마음이 없어 그저 하루를 때우려는 태도만 보입니다. 이는 공적인 일을 걱정하고 사적인 욕망을 버리는 자세로 윗사람을 받드는 도리에 전혀 어긋납니다. 이제 황실의 교화가 날로 빛나고 멀리까지 안정되었으니, 질서를 바로잡고 옛 제도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저거몽손은 이를 받아들였고, 정남장군 요애와 상서좌승 방구에게 "조당제(朝堂制)"를 제정하도록 명하였다. 제도가 시행된 지 열흘 만에 백성들은 모두 엄숙해지고 질서를 회복하였다.현시 7년(418년) 9월, 저거몽손이 서량을 다시 정벌하였으나, 이흠이 출정하지 않자, 추수 예정인 곡식만 베어서 돌아갔다.
현시 7년(418년) 12월, 동진 조정은 북량으로 사신을 보내 저거몽손을 양주자사(涼州刺史)로 임명하였다. 저거몽손이 동진에 신하를 자처했기에 이러한 관직이 내려진 것이다.
현시 9년(420년) 8월, 태사령 장연(張衍)이 저거몽손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금년에는 임택성(臨澤城) 서쪽에서 군대가 패배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저거몽손은 세자 저거정덕을 약후오에 주둔하게 하였고, 자신은 서쪽으로 백안(白岸)에 이르러 장연에게 말했다."나는 올해 반드시 어떤 성과를 이룰 것이나, 태세(太歲)가 신월(申月)에 위치해 있고, 건신(建申) 또한 이루어져 아직은 서쪽으로 행군할 때가 아니다. 남쪽으로 진군하여 적의 주력을 유인하고, 그들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길이다. 계획은 상황에 따라 적절히 실행하되, 절대 유출되지 않도록 신중히 해야 한다."
이후 저거몽손은 병력을 보내 서량왕 이흠을 주천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먼저 저거몽손은 호문(浩亹)을 공격하였는데, 그의 장막 앞에 뱀이 몸을 감고 나타났다. 이를 본 저거몽손이 웃으며 말했다."지난번에는 뱀이 승천하는 모습이었는데, 이번에는 장막 앞에 뱀이 몸을 감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내게 군대를 돌려 먼저 주천을 평정하라는 뜻이다."
저거몽손은 공성 장비를 불태우고 철수한 뒤, 은밀히 천암(川巖)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이흠이 병력을 소집하여 장액을 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저거몽손이 말했다."이흠은 이미 내 계략에 빠졌으나, 내가 군대를 돌리는 것을 알게 되면 감히 진격하지 못할 것이다. 전쟁은 아직 신중히 진행되어야 한다."
이에 저거몽손은 서쪽 변경에 공문을 퍼뜨려 호문을 점령하고 황곡(黃谷)으로 진군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를 들은 이신은 군대를 이끌고 도독간(都瀆澗)으로 진입하였고, 저거몽손은 은밀히 군대를 이동하여 회성(懷城)에서 그를 맞아 대파하였다. 이신은 패주하여 임택(臨澤)으로 도망쳐 패잔병을 수습해 다시 맞섰으나, 저거몽손이 그를 추격하여 요천(蓼泉)에서 이흠을 다시 격파하고 이흠과 그의 형제 세 명을 참수하였다. 저거몽손은 승세를 몰아 서량의 도읍인 주천까지 단숨에 점령하였고, 백성들은 평온을 되찾았으며, 군대는 약탈 없이 질서를 유지하였다. 저거몽손은 서량의 녹삼부사였던 송요(宋繇)를 이부낭중으로 삼아 인재의 천거를 위임하고, 패망한 서량의 관리들 중 재주와 명망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예를 다해 등용하였다. 이때 주천태수로 임명된 저거몽손의 아들 저거목건은 서량의 옛 신하들을 각각의 재능에 따라 배치하였다.
현시 9년(420년) 9월, 이흠의 동생이자, 서량의 돈황태수인 이순은 저거몽손이 주천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무리들과 함께 둔황을 버리고 북산(北山)으로 들어갔다. 이에 저거몽손은 손쉽게 둔황을 점령하고 색원(索元)을 둔황태수로 임명하였다. 새로 부임한 색원은 성정이 난폭하고 음흉하여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기 좋아해 둔황의 민심이 급격히 흉흉해졌다. 둔황의 백성 송승(宋承)과 장홍(張弘)이 이순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써, 내부에서 호응할테니 돌아와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이순이 기병 수십 기를 이끌고 둔황에 당도하자 과연 성문은 금세 열렸다. 둔황태수 색원은 민심이 그를 떠났음을 깨달아 감히 대항하지 않고 동쪽에 있는 양흥(凉興)으로 도주하였다. 이순은 둔황군을 점거하고 스스로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을 칭하였다.
같은 달, 서진의 진무장군 왕기(王基) 등이 호원수(胡園戍)에서 저거몽손을 습격해 2,000여 명을 포로로 잡고 돌아갔다.
현시 9년(420년) 10월, 이순이 추대를 받아 서량의 왕위를 계승하고 연호까지 개원하자, 저거몽손은 세자 저거정덕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순은 성문을 닫고 농성하며 저항하였다.
현시 10년(421년) 정월, 저거몽손도 친히 군사 20,000명을 이끌고 돈황을 공격하였다.
현시 10년(421년) 3월, 저거몽손은 긴 둑을 쌓아 물을 끌어와 성을 수십 일간 침수시켰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저거몽손이 공세를 더욱 강화하자, 이순은 항복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결국 이순의 무위장군 송승과 광무장군 장홍 등이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둔황을 탈환한 저거몽손은 이순을 죽이고 성을 도륙하였으며, 이순의 동생 이자보(李子寶)를 사로잡아 고장으로 압송하였다. 이로써 서량의 이씨(李氏) 정권은 멸망하였다. 그러자 선선왕 비룡(比龍)이 저거몽손에게 입조하였고, 서역의 36국이 모두 북량으로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신하를 자처하였다.
현시 10년(421년) 10월 24일[6], 유송의 무제 유유가 사신을 보내 저거몽손을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양주자사(涼州刺史)로 임명하였다.
2.8. 서진 정벌
현시 10년(421년) 11월, 저거몽손이 우위장군 저거선선(沮渠鄯善)과 건절장군 저거구생(沮渠茍生)을 보내 서진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서진왕 걸복치반이 정북장군 몰혁간 등을 보내 보병과 기병 5,000명을 이끌고 막게 하니, 선선과 구생은 오간(五澗)에서 패배하였고, 구생은 서진군에게 사로잡혔다.현시 10년(421년) 12월, 진창태수 당계(唐契)가 군(郡)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저거몽손은 세자 저거정덕을 보내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현시 11년(422년) 정월, 저거몽손은 겸광전에서 대신들을 연회에 초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쪽 하늘에 악한 기운이 떠다니니, 이는 군대의 움직임을 상징하는 징조이다.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반드시 적이 침입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정비하도록 명하였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왕 걸복치반이 기병 5,000기로 북량을 침입하였으나, 순호령(猻猢嶺)에 이르러 저거몽손의 대비가 철저하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하였다.현시 11년(422년) 8월, 저거몽손은 전장군 저거성도에게 병사 10,000명으로 병력을 과시하며 영남(嶺南)으로 진격하게 하였고, 저거성도는 오간(五澗)에 주둔하였다.
현시 11년(422년) 9월, 걸복치반은 정북장군 출련건(出連虔)[7]을 보내 정예 기병 5,000기[8]를 이끌고 저거성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현시 11년(422년) 10월, 저거성도는 출련건에게 패배하였고, 서진군은 백성 3,000여 호를 약취하여 철수하였다.
현시 12년(423년) 2월 13일[9], 저거몽손은 사실을 유송으로 보내 지역 특산물을 바쳤다. 이에 유송 조정에서는 저거몽손을 사지절(使持節)•도독양·진·하·사4주제군사(都督涼秦河沙四州諸軍事)•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양주목(涼州牧)•하서왕(河西王)으로 삼았다.
현시 12년(423년) 4월, 세자 저거정덕이 마침내 진창을 함락시켰다. 당계는 그의 동생 당화(唐和)와 외조카 이보(李寶)와 함께 이오(伊吾)로 도망쳤다. 그들은 이오에 정착하여 유민 2,000여 호를 모아 유연의 신하가 되기를 자처하였고, 유연에서는 당계를 이오왕(伊吾王)으로 삼았다.
현시 12년(423년) 7월, 유연이 북량을 침범하자, 저거몽손은 다시 세자정덕을 보내 이를 막게 하였다. 그러나 저거정덕은 경솔하게 기병을 이끌고 진격하다가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현시 12년(423년) 10월, 저거몽손은 둘째 아들 저거흥국(沮渠興國)을 세자로 세우고, 경내의 사형 이하의 죄를 사면하였다. 또한, 문무 관원들을 한 계급씩 승진시켰다.
현시 13년(424년) 8월, 서진왕 걸복치반은 세자 걸복모말 등을 보내 보병과 기병 30,000명으로 초거곡(貂渠谷)을 넘어 북량을 침공하게 하였다. 서진군은 백초령(白草嶺)과 임송군(臨松郡)에서 북량군을 모두 격파하고, 백성 20,000여 명을 이주시킨 뒤 철수하였다.
현시 14년(425년) 4월, 서진왕 걸복치반이 평원장군 질노건(叱盧犍)을 파견하여 임송군을 다시 습격해 북량의 진남장군 저거백제(沮渠白蹄)를 사로잡고, 백성 5,000여 호를 부한으로 옮겼다.
현시 15년(426년) 8월, 서진왕 걸복치반이 군사를 이끌고 염천(廉川)에 이르렀다. 그는 태자 걸복모말 등에게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이끌고 서안(西安)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어 번화(番禾)를 공격하였으나 저거몽손이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이때 저거몽손은 북하로 사신을 보내 혁련발발을 설득하여 걸복치반의 배후를 치도록 유도하였다. 혁련발발도 이를 기회로 삼아 서진의 부한을 침공하자, 걸복치반은 이를 듣고 군사를 북량에서 철수하였다.
현시 15년(426년) 12월, 저거몽손은 사신을 북위로 보내 공물을 바쳤다. 이 해 북위는 '시광(始光) 3년'이었고, 북위의 세번째 황제 태무제 탁발도가 재위 중이었다.
현시 16년(427년) 2월, 태무제가 사신을 보내 저거몽손을 하서왕으로 책봉하였다.
현시 17년(428년) 정월, 서진의 상주(商州) 자사 요준(姚濬)이 북량에 항복하였다.
승현 원년(428년) 6월, 당시 서진의 국왕 걸복치반이 사망하고 세자 걸복모말이 막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저거몽손은 서진의 국상을 틈타 서진을 공격하여 서평(西平)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서진의 서평태수 국승(麴承)이 저거몽손에게 낙도부터 취할 것을 권하자, 저거몽손은 서평의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낙도를 쳤다. 이에 서진의 상국 걸복원기(乞伏元基)가 기병 3,000기를 이끌고 낙도를 구원하기 위해 낙도성으로 들어갔다. 저거몽손은 일부로 걸복원기가 낙도성에 들어가게끔 놔둔 뒤, 서진의 구원군이 모두 입성하자마자 낙도성의 수도(水道)를 차단하였다. 이로써 성내의 병사들 중 절반 이상이 갈증으로 사망하였고, 걸복원기를 따라 낙도를 구원하러 온 동강(東姜)족 걸제(乞提)가 은밀히 저거몽손과 내통하여 성벽에서 밧줄을 드리워 북량군을 끌어들였다. 이때 북량군 100여 명 가량이 낙도성 내로 들어왔으나, 걸복원기가 좌우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직접 분전하면서 적군들을 베어 북량군을 겨우 성 안에서 물리칠 수 있었다.
전황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서진왕 걸복모말은 사신을 보내 저거몽손에게 이전에 포로로 잡은 저거성도를 돌려줄 것을 약속하며 화친을 청하였다. 그러자 저거몽손은 이를 받아들여 사신을 서진으로 보내 걸복치반의 장례에 조문하게 하였고, 걸복모말 또한 저거성도에게 많은 자재를 주어 보내는 동시에, 장군 왕벌(王伐)을 파견하여 저거성도를 호송하게 하였다. 그러나 저거몽손은 저거모말의 의중을 여전히 의심하여, 회무장군 저거기진(沮渠奇珍)을 문천령(捫天嶺)에 매복시켜 그곳에서 왕벌과 서량의 기병 300기를 체포하였다. 이후 저거몽손은 걸복모말에게 별다른 뜻이 없음을 확인하고, 상서령 왕저(王杼)에서 왕벌을 서진으로 호송하게 하고, 말 1,000필, 고운 융단과 은색 비단 등을 후히 보내며 우호를 표하였다. 저거몽손은 이때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사형 이하의 죄를 사면하고, 연호를 '승현(承玄)'이라 개원하였다.
승현 원년(428년) 9월, 서진왕 걸복모말이 기실낭중 마애(馬艾)를 북량에 사신으로 보내 답례하였다.
승현 원년(428년) 10월, 서진의 양주목(涼州牧) 걸복천년(乞伏千年)이 북량에 귀순하였다.
승현 원년(428년) 12월, 저거몽손이 먼저 화친을 깨고 서진을 공격하여 반이(盤夷)에 이르렀다. 이에 서진의 상국 걸복원기 등이 기병 15,000기를 거느리고 저항하자, 저거몽손은 방향을 돌려 서평을 쳤으나, 이번에도 서진의 정로장군 출련보정(出連輔政) 등이 기병 2,000기를 거느리고 서평을 구원하러 출격하였다.
승현 2년(429년) 정월, 출련보정의 구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저거몽손이 서평을 함락시키고 서평태수 국승을 사로잡았다.
승현 2년(429년) 5월, 저거몽손의 정벌에 위협을 느낀 서진왕 걸복모말은 상국 걸복원기를 부한에 남겨 지키게 하고, 정련(定連)으로 천도하였다. 걸복모말이 천도를 결정하자, 서진의 남안(南岸) 태수 적승백(翟承伯) 등이 부한 남서쪽에서 한견곡(罕幵谷)을 점거하고 저거몽손에게 호응하였다. 이에 걸복모말은 적승백 등을 공격하여 격파한 뒤, 야성(冶城)에 이르러 견천(汧川)에서 배반한 서진의 서안(西岸) 태수 막자유권(莫者幼眷)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정련으로 들어가 지켰다.
승현 2년(429년) 6월, 저거몽손은 세자 저거흥국에게 군대를 주어 정련을 곧장 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서진왕 걸복모말도 군사를 이끌고 나와서 맞서 싸웠고, 양측은 야성에서 야성에서 교전하였다. 이때 저거흥국은 크게 패하여 병력 3,000여 명이 전사하였고, 저거흥국은 걸복모말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걸복모말은 패배한 북량군을 추격하여 저거몽손을 담교(譚郊)까지 몰아냈다. 이에 토욕혼의 농서왕 토욕혼모괴(吐谷渾慕璝)가 동생 토욕혼모리연(吐谷渾慕利延)을 보내 기병을 이끌고 저거몽손을 돕도록 하니, 걸복모말은 보국대장군 단휘(段暉)를 보내 이를 막게 하였다. 단휘는 토욕혼군을 크게 격파하고 물러나게 하였다.
승현 2년(429년) 7월, 저거몽손은 걸복모말에게 사신을 보내 곡식 30만 석으로 세자 저거흥국을 되돌려 받고자 하였으나, 걸복모말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저거몽손은 저거흥국의 동복동생 저거보제(沮渠菩提)를 세자로 세웠다. 본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저거흥국은 결국 서진에 눌러앉게 되었고, 걸복모말은 저거흥국에게 산기상시라는 관직을 내리고, 자신의 딸인 평창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승현 2년(429년) 11월, 저거몽손이 다시 유송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청작두(青雀頭), 대(黛) 100근과 함께 《주역(周易)》 및 《자집(子集)》 관련 서적을 요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여 총 475권의 책을 제공하였고, 저거몽손은 다시 사도 왕홍(王弘)에게 《수신기(搜神記)》를 요청하여 그 사본도 받아갔다.
승현 2년(429년) 12월, 저거몽손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걸복모말은 여러 해 동안 신뢰와 의리를 저버리고, 말과 웃음으로 시간을 끌며 기만하고 있으니, 이제 반드시 그 소굴을 쳐부수어야 한다. 군대를 옥간령(沃干嶺)으로 전진시켜라. 부한(枹罕) 성 안에서는 굶주림으로 이미 백성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승현 3년(430년) 10월, 북량의 공세에 압박을 느끼던 서진왕 걸복모말은 또다시 천도하여 남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 저거몽손이 상서랑 종서(宗舒)와 좌상시 고맹(高猛) 등을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여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하늘이 부여한 영명과 성덕으로 백왕(百王)을 능가하시고, 천지의 이치를 본받아 만물을 기르고, 삼대(三代)의 융성함을 되살리셨습니다. 그러나 천운이 어려움을 겪으며, 구복(九服)이 어지럽고 신성한 깃발이 잠시 흩어져 마차와 문자가 통일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하늘의 은혜가 내려 도를 가진 자에게 복을 돌리고, 순수한 교화가 드높아져 먼 곳의 나라들조차 마음을 돌렸으니, 이는 백성들의 크나큰 행운이요, 온 나라가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신은 재주가 부족하여 공적을 세울 만한 것이 없으나, 폐하의 광휘로운 덕을 만나 힘을 다하고자 합니다. 늙고 쇠한 몸으로 성대한 교화를 목도하며, 남은 생을 황실에 의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전에도 상소를 올리고 사신을 보냈으나, 떠난 자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소식이 끊겼으니, 강과 길에서 적의 방해를 받았거나, 아니면 조정의 높고 먼 위엄으로 인해 제때 회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에 사신 곽지(郭秪)가 귀환하여 조서를 받들었고, 세 번이나 은혜를 입었습니다. 폐하의 덕이 만리를 감싸는 것을 깨닫고, 이 늙은 신하의 마음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제 어려운 시기를 지나 태평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폐하께서 유도하고 격려하며 끌어주시는 그 은혜는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이 늙은 신하를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낙후된 지방에도 그 은혜를 베푸시니 하늘과 같은 자비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랑캐 상인이 뒤늦게 도착하여 공경들의 서신을 받았는데, 시대의 안위와 기회를 논하며, 두융(竇融)의 지혜와 운명을 깨닫는 미덕을 본받으라고 권하였습니다. 신은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먼 곳에서 큰 은혜를 기대하며, 하늘에 그 뜻을 전하려 했습니다. 만약 만국이 폐하께 입조하여 알현하고, 여러 신하가 축하하는 날이 온다면, 신은 선견지명으로 미리 도착하여 그 뜻을 이룬 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다만, 세상이 아직 혼란스러운 가운데, 신의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자주 상소를 올렸으나 가슴 속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고, 나라에 몸을 바치고자 하는 신의 진심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 신하들에게 의혹을 주고, 공경들에게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말의 뜻이 분분하여 중복되고 정리되지 않아,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범주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북극성과 같이 한결같은 신의 충심은 전달되지 못하고, 한쪽에 머물러 사방을 헤매며 상심하고 있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상서로운 징조를 살펴보고 하늘의 때를 관찰하였으나, 황위(皇魏)와 폐하의 시대를 능가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폐하께서는 영감과 성스러운 자질을 가지고 어린 나이에 천위에 올랐으며, 그 아름다운 통치는 성강(成康)과 견줄 만하고, 도덕과 교화는 문경(文景)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이제 신성한 질서를 진작하여 온 천하를 평정하고, 현묘한 은택을 베풀어 팔방을 적시려 하십니다. 게다가 진(秦)과 농(隴)의 전란이 끝난 지금은, 바로 이 늙은 신하가 스스로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신들이 태무제를 알현하자, 탁발도는 북량의 사신들과 함께 연회를 열어 대접한 뒤에 돌려 보냈다. 이후로도 저거몽손은 사신들을 끊임없이 북위로 보내 조공하였다.신은 재주가 부족하여 공적을 세울 만한 것이 없으나, 폐하의 광휘로운 덕을 만나 힘을 다하고자 합니다. 늙고 쇠한 몸으로 성대한 교화를 목도하며, 남은 생을 황실에 의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전에도 상소를 올리고 사신을 보냈으나, 떠난 자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소식이 끊겼으니, 강과 길에서 적의 방해를 받았거나, 아니면 조정의 높고 먼 위엄으로 인해 제때 회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에 사신 곽지(郭秪)가 귀환하여 조서를 받들었고, 세 번이나 은혜를 입었습니다. 폐하의 덕이 만리를 감싸는 것을 깨닫고, 이 늙은 신하의 마음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제 어려운 시기를 지나 태평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폐하께서 유도하고 격려하며 끌어주시는 그 은혜는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이 늙은 신하를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낙후된 지방에도 그 은혜를 베푸시니 하늘과 같은 자비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랑캐 상인이 뒤늦게 도착하여 공경들의 서신을 받았는데, 시대의 안위와 기회를 논하며, 두융(竇融)의 지혜와 운명을 깨닫는 미덕을 본받으라고 권하였습니다. 신은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먼 곳에서 큰 은혜를 기대하며, 하늘에 그 뜻을 전하려 했습니다. 만약 만국이 폐하께 입조하여 알현하고, 여러 신하가 축하하는 날이 온다면, 신은 선견지명으로 미리 도착하여 그 뜻을 이룬 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다만, 세상이 아직 혼란스러운 가운데, 신의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자주 상소를 올렸으나 가슴 속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고, 나라에 몸을 바치고자 하는 신의 진심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 신하들에게 의혹을 주고, 공경들에게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말의 뜻이 분분하여 중복되고 정리되지 않아,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범주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북극성과 같이 한결같은 신의 충심은 전달되지 못하고, 한쪽에 머물러 사방을 헤매며 상심하고 있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상서로운 징조를 살펴보고 하늘의 때를 관찰하였으나, 황위(皇魏)와 폐하의 시대를 능가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폐하께서는 영감과 성스러운 자질을 가지고 어린 나이에 천위에 올랐으며, 그 아름다운 통치는 성강(成康)과 견줄 만하고, 도덕과 교화는 문경(文景)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이제 신성한 질서를 진작하여 온 천하를 평정하고, 현묘한 은택을 베풀어 팔방을 적시려 하십니다. 게다가 진(秦)과 농(隴)의 전란이 끝난 지금은, 바로 이 늙은 신하가 스스로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승현 3년(431년) 정월, 남안이 북하의 혁련정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면서 서진이 멸망하였고, 서진에 있던 저거몽손의 아들 저거흥국은 상규(上邽)로 압송되었다. 이때 서진의 태자사직 초해(焦楷)에 있다가 북량으로 망명하였다.
2.9. 말기
의화 원년(431년) 6월, 혁련정이 북위의 압박을 두려워하여, 서진을 멸망시키고 얻은 백성 100,000여 명을 이끌고, 야성에서 강을 건너 북량을 공격하여 그 영토를 빼앗으려 하였다. 그러나 강을 건너던 도중, 토욕혼의 농서왕 토욕혼모괴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였고, 혁련정은 생포되어 토욕혼으로 끌려갔다. 이 전투에서 저거흥국 또한 부상을 입고 사망하였기에, 저거몽손은 경내에 대사면을 내려 사형 이하의 죄를 용서하였고, 연호를 '의화(義和)'로 개원하였다. 또, 저거몽손은 저거보제를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삼고, 하서왕세자로 정식으로 임명하였다.의화 원년(431년) 8월 7일[10], 저거몽손은 아들 저거안주를 북위에 보내 인질로 남게 하였다.
의화 원년(431년) 9월, 태무제가 저거몽손에게 답례를 보내는 문제에 대해 최호와 상의하며 물었다.
"저거몽손은 이미 신하를 자처하면서 하서(河西)에서 충성을 보여주었다. 만약 먼 지역과 교류를 열고 그들을 위로하려 한다면, 고결하고 중요한 신하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상서(尚書) 이순(李順)이 적임자가 아니겠는가? 다만, 이순은 납언대신(納言大臣)으로서 이처럼 먼저 사신으로 나서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만약 저거몽손이 옥과 비단을 들고 직접 조정에 와서 조회에 참석한다면, 그에 더해 무엇을 보낼 수 있겠는가?""
최호가 대답하였다."예전에 형정(邢貞)이 오(吳)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태상(太常)이었습니다. 만약 일이 적합하다면, 고위 관리를 사신으로 보내는 것을 꺼릴 이유가 없습니다. 당시 형정의 출행이 오왕(吳王)이 직접 조현할 때가 아니었던 것처럼, 이순이 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태무제는 이를 수긍하고, 이순에게 태상의 직위를 겸하게 하여 저거몽손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저거몽손은 이때 가절(假節)•시중(侍中)•도독양주·서역·강융제군사(都督涼州西域羌戎諸軍事)•태부(太傅)•행 정서대장군(行征西大將軍)•양주목(涼州牧)•양왕(涼王)으로 임명되었으며, 아울러 구석(九錫)의 예가 더해졌다. 최호가 태무제 대신 작성한 책문(冊文)에서 다음과 같이 저거몽손을 칭송하였다."예로부터 우리 황조(皇祖)께서는 헌원(軒轅)의 계통으로서, 여러 재능으로 융하(戎夏)를 통솔하시어 광명을 겹겹이 비추셨고, 그 유업을 잃지 않으셨다. 그리고 태조(太祖) 대에 이르러 천명(天命)을 받아 시대의 운명과 부합하시어 대업을 새롭게 여시고 천하를 통합하셨다. 태종(太宗)께서는 국가의 기반을 넓히시고, 백성을 풍요롭게 하시어 정치를 화평하게 하셨다. 짐은 천명으로 황위를 계승하여 천하를 경영하고자 하였으나, 시대의 운이 불리하여 사방이 어지러웠다. 혁련(赫連)은 관서(關西)에서 포학하였고, 대단(大檀)은 한북(漢北)에서 위세를 떨쳤으며, 오랑캐들은 강회(江淮)를 막고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동쪽과 서쪽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여러 차례 정벌하였고, 종묘의 영령과 여러 장수들의 힘으로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여 사방을 두렵게 하였다. 그 덕에 이제는 천하가 점차 태평해져 안팎이 청정해졌다.
왕은 기회를 미리 포착하여 깊이 경륜을 펼치며, 짐과 뜻을 같이하여 큰 공을 세웠도다. 지금은 운명이 시대의 말기에 이르러, 찬탈하고 반역하는 자들이 날뛰고 있다. 땅을 가진 자들은 예외 없이 한 구석을 차지하여 독립을 꾀하고, 백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사사로이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여러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모이는 도리를 따르지 않고, 작은 물줄기가 거대한 바다로 흘러드는 의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나, 왕은 대의를 깊이 이해하여 전통적인 규범을 따랐고, 땅을 다스리면서 공물을 바치고, 사랑하는 자식을 인질로 보내 황실에 충성을 다하였다. 그로 인해 왕의 공로와 의리는 빛나고, 도덕과 업적은 길이 남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왕의 크나큰 공로로다.
왕의 조부와 부친은 대대로 그 땅과 백성을 다스려왔으니, 공덕(功徳)을 논하면 당대에는 견줄 자가 없었고, 씨족을 말하면 세습되는 작위를 통해 그 역사가 이어져 내려왔다. 고대 성왕(聖王)들은 어진 이를 포상하고 덕을 칭송하며, 땅을 나누고 백성을 분배하여 번국(藩國)으로 삼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주성왕(周成王)은 태공(太公)에게 동해를 맡겨 기둥으로 삼았고, 양왕(襄王)은 진문공(晉文公)에게 남양(南陽)을 주어 나라를 확장하였다. 이에 따라, 짐은 양주(涼州)의 무위(武威), 장액(張掖), 돈황(燉煌), 주천(酒泉), 서해(西海), 금성(金城), 서평(西平)의 7군(郡)을 나누어 왕을 양왕(涼王)에 봉하노라. 이로써 이 땅을 받고 흰 띠와 백모(白茅)를 예물로 삼아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위(魏)나라의 번보(藩輔)가 되어 흥망과 존망을 우리 위나라와 함께하라. 무릇 공이 높은 자에게는 존귀한 작위가 주어지며, 덕이 두터운 자에게는 무거운 책임이 주어지는 법이다.
또한, 왕에게 명하노니, 국정 전반에 참여하여 모든 정무를 보좌하고, 계책을 내어 황실의 내부에서 중요한 논의를 맡도록 하겠다. 왕은 출정할 때 다른 제후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군사를 지휘하고, 태부(太傅)와 행 정서대장군(行征西大將軍)의 직위를 맡아 도끼와 깃발을 들고 명령을 수행하며, 하우(河右) 일대에서 위세를 떨치도록 하라. 왕은 뛰어난 전략으로 먼 곳의 오랑캐를 물리치고, 온화한 정책으로 외진 변방의 백성들도 어루만졌다. 북쪽으로는 궁발(窮髪), 남쪽으로는 용민(庸岷), 서쪽으로는 곤령(崑嶺), 동쪽으로는 하곡(河曲)에 이르기까지 왕의 위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왕은 이러한 업적으로 황실을 보좌하고 지탱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도록 하라.
또한 왕은 나라를 세워, 장군과 재상을 비롯한 여러 대신 및 모든 관리(百官)를 임명하도록 하라. 왕에게 황제의 권한을 위임하여 문관인 자사(刺史)부터 무관인 무군장군(撫軍將軍) 이하의 직책을 임명할 권한을 부여하겠다. 왕은 천자의 깃발을 세울 수 있고, 출입 시에는 경필의 예를 갖출 수 있게 하여, 한나라 초기 제후왕처럼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하였으니, 이는 경외할 만한 일이다. 지금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여 짐의 명령을 받들고, 하늘의 조화에 협력하며, 아홉 가지 덕목을 완전히 구현하여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라. 모든 관리들이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면, 왕의 탁월한은 우리 황조(皇祖)의 공적을 빛내는 데 기여할 것이다."
왕은 기회를 미리 포착하여 깊이 경륜을 펼치며, 짐과 뜻을 같이하여 큰 공을 세웠도다. 지금은 운명이 시대의 말기에 이르러, 찬탈하고 반역하는 자들이 날뛰고 있다. 땅을 가진 자들은 예외 없이 한 구석을 차지하여 독립을 꾀하고, 백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사사로이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여러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모이는 도리를 따르지 않고, 작은 물줄기가 거대한 바다로 흘러드는 의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나, 왕은 대의를 깊이 이해하여 전통적인 규범을 따랐고, 땅을 다스리면서 공물을 바치고, 사랑하는 자식을 인질로 보내 황실에 충성을 다하였다. 그로 인해 왕의 공로와 의리는 빛나고, 도덕과 업적은 길이 남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왕의 크나큰 공로로다.
왕의 조부와 부친은 대대로 그 땅과 백성을 다스려왔으니, 공덕(功徳)을 논하면 당대에는 견줄 자가 없었고, 씨족을 말하면 세습되는 작위를 통해 그 역사가 이어져 내려왔다. 고대 성왕(聖王)들은 어진 이를 포상하고 덕을 칭송하며, 땅을 나누고 백성을 분배하여 번국(藩國)으로 삼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주성왕(周成王)은 태공(太公)에게 동해를 맡겨 기둥으로 삼았고, 양왕(襄王)은 진문공(晉文公)에게 남양(南陽)을 주어 나라를 확장하였다. 이에 따라, 짐은 양주(涼州)의 무위(武威), 장액(張掖), 돈황(燉煌), 주천(酒泉), 서해(西海), 금성(金城), 서평(西平)의 7군(郡)을 나누어 왕을 양왕(涼王)에 봉하노라. 이로써 이 땅을 받고 흰 띠와 백모(白茅)를 예물로 삼아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위(魏)나라의 번보(藩輔)가 되어 흥망과 존망을 우리 위나라와 함께하라. 무릇 공이 높은 자에게는 존귀한 작위가 주어지며, 덕이 두터운 자에게는 무거운 책임이 주어지는 법이다.
또한, 왕에게 명하노니, 국정 전반에 참여하여 모든 정무를 보좌하고, 계책을 내어 황실의 내부에서 중요한 논의를 맡도록 하겠다. 왕은 출정할 때 다른 제후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군사를 지휘하고, 태부(太傅)와 행 정서대장군(行征西大將軍)의 직위를 맡아 도끼와 깃발을 들고 명령을 수행하며, 하우(河右) 일대에서 위세를 떨치도록 하라. 왕은 뛰어난 전략으로 먼 곳의 오랑캐를 물리치고, 온화한 정책으로 외진 변방의 백성들도 어루만졌다. 북쪽으로는 궁발(窮髪), 남쪽으로는 용민(庸岷), 서쪽으로는 곤령(崑嶺), 동쪽으로는 하곡(河曲)에 이르기까지 왕의 위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왕은 이러한 업적으로 황실을 보좌하고 지탱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도록 하라.
또한 왕은 나라를 세워, 장군과 재상을 비롯한 여러 대신 및 모든 관리(百官)를 임명하도록 하라. 왕에게 황제의 권한을 위임하여 문관인 자사(刺史)부터 무관인 무군장군(撫軍將軍) 이하의 직책을 임명할 권한을 부여하겠다. 왕은 천자의 깃발을 세울 수 있고, 출입 시에는 경필의 예를 갖출 수 있게 하여, 한나라 초기 제후왕처럼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하였으니, 이는 경외할 만한 일이다. 지금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여 짐의 명령을 받들고, 하늘의 조화에 협력하며, 아홉 가지 덕목을 완전히 구현하여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라. 모든 관리들이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면, 왕의 탁월한은 우리 황조(皇祖)의 공적을 빛내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의화 2년(432년) 12월, 북위의 태상 이순이 다시 사신으로 북량에 도착하였다. 저거몽손은 중병교랑 양정(楊定)을 보내며 이순에게 이렇게 전하게 하였다.
"나이가 들어 병이 많고, 오래된 병이 자주 재발하여 허리와 넓적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절을 올릴 수 없습니다. 며칠 뒤에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직접 뵙겠습니다."
이에 이순이 대답하였다."왕(王)의 노령은 조정에서도 알고 있으나, 왕께서 신하로서의 예를 다해야 하는 별도의 조서가 있습니다. 어찌 스스로 편히 여기며 상사(上使)를 만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다음 날, 저거몽손은 이순을 초대하여 뜰에 이르게 하였으나, 저거몽손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책상에 기대어 전혀 일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순은 단정한 태도로 엄숙히 크게 말했다."이 노인이 이렇게까지 무례할 줄은 몰랐다! 지금 나라가 망할 상황을 돌보지 않고 감히 천지(天地)를 능멸하다니. 혼백은 이미 떠났으니, 무슨 이유로 그를 만나겠는가?"
그리고는 절(節)을 움켜쥐고 나가려 하였다. 저거몽손은 다시 양정을 보내 이순을 붙잡으며 말했다."태상(太常)께서 이미 나의 노쇠한 병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조정에서 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가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스스로 편히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태상께서 '그대가 절하거나 꿇어앉지 않으면서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면, 이는 소신(小臣)의 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이순은 더욱 분노하며 말했다."제환공(齊桓公)은 아홉 번 제후들을 모아 천하를 바로잡았습니다. 주왕(周王)이 고기를 하사하며 말하기를 '백구(伯舅)는 절하지 않아도 된다' 하였으나, 환공은 신하의 예를 받들어 몸을 낮추어 절하며 받았습니다. 지금 그대가 비록 공로와 명성이 크다 하나, 조정에 대한 환공의 노력만은 못합니다. 또한 비록 서로 높이고 중하게 여긴다 하나, 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는 없었습니다. 만약 스스로 거만해져 이러한 태도를 지속한다면, 이는 재앙을 부르는 길이지, 오래도록 평안을 꾀하는 계책이 아닙니다. 만약 조정이 크게 진노하여 그대를 멸망시킨다면,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거몽손이 말했다."태상(太常)께서 옛날의 빛나는 사례로 나를 교훈하시고, 천위(天威)로 나를 두렵게 하셨으니, 감히 경외하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공경히 가르침을 듣겠습니다."
이에 저거몽손은 절을 올리고 엎드려 예를 다하였다. 예를 마치고 나서 저거몽손이 말했다."덕(德)에 의지하는 자는 흥하고, 힘에 의지하는 자는 망합니다. 조정은 근래 여러 차례 정벌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넓혔습니다. 이제 마땅히 이 백성들을 이치에 따라 다스리는 것으로도 충분히 치세(治世)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오로지 정벌만을 추구한다면, 항상 승리할 수 있을지는 두렵습니다."
이순이 답하였다."옛날 태조(太祖)께서 굳건한 기틀을 마련하시어 구하(區夏)를 차지하셨고, 태종(太宗)께서 그 계통을 이어받아 왕업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상(聖上)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사해(四海)를 평정하려는 뜻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자주 출동시키며 친히 바람과 서리를 무릅쓰시고, 삼진(三秦)에서 혁련(赫連)을 멸망시키고, 막북(漠北)에서 연연(蠕蠕)을 격퇴하셨습니다. 영토를 넓히고 변방을 개척하며, 벤 적의 머리는 셀 수 없이 많았고, 베어진 시체와 잘린 귀는 곳곳에서 산을 이루었습니다. 폭정과 잔혹함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제하며, 위엄은 팔황(八荒)에 떨치고 명성은 구역(九域)에 퍼졌습니다.
예로부터 병력을 운용한 영광스러운 사례가 오늘날처럼 융성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 지방의 변방 백성들조차도 발돋움하며 손을 들어 환영하고, 옷깃을 여미며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천병(天兵)이 사방에 임하여 덕을 드러내고 죄를 벌하였으니, 어찌 힘에만 의존한다고 하겠습니까? 성왕(聖王)이 병력을 사용할 때, 남만(南蠻)을 정벌하면 북적(北狄)이 원망하고, 서융(西戎)을 토벌하면 동이(東夷)가 한탄하는 법입니다. 천자(天子)께서 어찌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저거몽손이 말했다.예로부터 병력을 운용한 영광스러운 사례가 오늘날처럼 융성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 지방의 변방 백성들조차도 발돋움하며 손을 들어 환영하고, 옷깃을 여미며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천병(天兵)이 사방에 임하여 덕을 드러내고 죄를 벌하였으니, 어찌 힘에만 의존한다고 하겠습니까? 성왕(聖王)이 병력을 사용할 때, 남만(南蠻)을 정벌하면 북적(北狄)이 원망하고, 서융(西戎)을 토벌하면 동이(東夷)가 한탄하는 법입니다. 천자(天子)께서 어찌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대의 말이 참이라면, 양토(涼土)의 백성들 또한 위(魏) 황제께서 멀리서 찾아오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시 서둘러 역마를 동원하여 경고를 보내고, 밤낮으로 쉬지 않는 것입니까? 보건대, 그대가 말한 것은 아마도 허황된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순이 대답하였다."묘족(苗族)의 백성들은 제순(帝舜)을 배반하고 폭군에게 충성하였고, 유후(有扈)는 후계(後啟)를 거역하고 반역 주군을 따랐습니다. 이는 모두 가까운 지역에서 위협을 받고 흉포한 세력에 억눌렸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이러한 일은 있어 왔으며, 어찌 양주(涼州)의 백성들만 그러하겠습니까?"
당초 계빈(罽賓)의 승려 담무참(曇無讖)이 동쪽으로 선선(鄯善)에 이르러, 자신이 귀신을 부려 병을 치료할 수 있으며, 비술(秘術)을 통해 여인들이 다산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선왕 만두타림(曼頭陀林)과 음통(淫通)하다 발각되었고, 결국 도망쳐 양주로 왔다. 저거몽손은 담무참을 '성인(聖人)'이라 떠받들면서 딸과 며느리들을 그에게 보내 비술을 전수받게 할 정도로 신뢰하였다. 그러나 태무제가 이순을 사신으로 보내 담무참을 북위 조정으로 보낼 것을 지시하니, 저거몽손은 신악문(新樂門)에서 연회를 열고, 이순을 초대하여 불만을 넌지시 말했다.
"이 서쪽 번국의 늙은 신하는 조정을 섬기며 감히 명령을 어기거나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자께서 아첨하는 말들을 믿고 받아들이시며, 저를 곤궁하게 만드시는군요. 이전에 상소를 올려 담무참(曇無讖)을 이 땅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제 사신을 보내 그를 강제로 데려가려 하시니 이는 문사(門師)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입니다. 저 역시 그와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니 남은 수명을 아까워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인데, 그 순간이 언제 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순이 대답하였다."왕께서는 이미 충성의 진심을 드러내셨고, 사랑하는 자식을 인질로 보내어 조정을 섬기셨습니다. 조정은 왕의 충성과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특별한 예우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한낱 오랑캐 도인 때문에 산과 같은 공로를 훼손하고, 하루의 분노를 참지 못하여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을 손상시키려 하십니다. 게다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으셨으니, 이것이 과연 조정이 왕을 두텁게 대하는 뜻에 부합하겠습니까?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는 대왕께서 취하지 않아야 할 행동입니다. 더욱이 폐하께서는 너그럽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시는 분이며, 도량이 넓고 문(文)을 존중하시는 것은 천하에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저거몽손이 말했다."태상의 말은 마치 소진의 설득처럼 달콤합니다만, 그 말이 진심과 부합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후 저거몽손은 의심하면서 담무참을 끝까지 북위로 보내지 않고, 그에게 서역에 가서 〈열반경(涅槃經)〉을 구해오라 명령하였다. 그리고 담무참이 서역으로 가는 도중에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해버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된 태무제는 무척 분노하였다.이순이 북위로 돌아오자, 태무제는 저거몽손과의 대화 내용 및 북량의 정치와 행정의 장단점에 대해 물었다. 이에 이순이 답하였다.
"저거몽손은 하서(河西)를 30여 년 동안 지배하며,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기본적인 계략과 형세의 변화에 대한 감각을 익혔습니다. 그는 변방의 민족들을 안정시켰고, 그의 부하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복종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는 후손에게 유업을 전할 정도의 원대한 계책은 부족하나, 적어도 한 세대를 마무리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신(臣)이 본 저거몽손의 여러 아들들은 모두 재능이 평범하여, 한 구석의 땅조차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듣기로 돈황태수 저거목건은 성품이 거칠고 야망있다고 합니다. 만약 저거몽손의 뒤를 이을 자가 있다면, 아마도 이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저거몽손과 비교하면 모두들 그의 능력이 아버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늘이 성명(聖明)을 돕기 위해 마련한 것이라 봅니다."
태무제가 말했다."짐은 지금 동방에서 일이 있어 서방에 대한 정벌의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소. 그러나 경(卿)이 말한 바가 사실이라면 불과 몇 년 안에 일이 해결될 것이니 서두를 필요는 없겠구려. 기존의 계획을 잠시 보류하고 장기적으로 도모하기 위해 일단은 놔두는 것이 좋겠소."
저거몽손은 말년에 정치는 타락하고 음란하였으며, 의심이 많아 잔혹하게 형벌을 가하니, 부하들은 이를 고통스럽게 여겼다. 그의 가정 내에서도 기강이 없고 혼란이 심하였다. 의화 3년(433년) 4월, 저거몽손은 병에 걸려 눕게 되었다. 그는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대낮에도 좌우 사람들에게 귀신을 보았다며 칼을 휘둘러 이를 공격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저거몽손의 병세가 이토록 심하자, 북량의 대신들은 저거보제가 유약한 것을 우려하여 그를 폐하고, 돈황태수 저거목건을 세자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거몽손은 노침(路寢)에서 병사하였다. 향년 66세.
의화 3년(433년) 5월, 저거몽손은 원릉(元陵)에 매장되었다. 태무제는 조문 사절을 보내 '무선왕(武宣王)'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묘호는 '태조(太祖)'로 정해졌다.
저거몽손은 생전에 양주(涼州)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고, 양주(涼州) 남쪽 100리 되는 절벽에 수많은 불상을 조각하였다. 이 조각상들은 천변만화하며 많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당시 이곳에서 성스러운 승려 가여(可如) 등의 인물들이 항상 머물며 수행하였는데, 잠시도 쉬지 않고 경행(經行)하였다고 한다. 먼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다가가면, 그들은 곧 멈추어 자신의 모습과 닮은 진흙으로 만든 조각상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이를 신기하게 여겼으며, 조각상의 발자국을 땅에 남겼다. 시간이 지나 다시 찾아가 보면 그 발자국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모습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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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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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 |||||
견침 · 고총 | 최휴 · 배정준 · 원번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 |||||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 ||||||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 ||||||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이주영 |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 |||||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 |||||
노동 · 장열 |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 손소(孫紹) · 장보혜 | |||||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 ||||||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 ||||||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 ||||||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 이염지 · 조영 · 상경 | ||||||
83권 「외척전(外戚傳)」 | |||||||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 |||||||
84권 「유림전(儒林傳)」 | |||||||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 |||||||
85권 「문원전(文苑傳)」 | |||||||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 |||||||
86권 「효감전(孝感傳)」 | |||||||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
87권 「절의전(節義傳)」 | |||||||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
88권 「양리전(良吏傳)」 | |||||||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 |||||||
89권 「혹리전(酷吏傳)」 | |||||||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 |||||||
90권 「일사전(逸士傳)」 | |||||||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 |||||||
91권 「예술전(藝術傳)」 | |||||||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 |||||||
92권 「열녀전(列女傳)」 | |||||||
임성국태비 | |||||||
93권 「은행전(恩倖傳)」 | |||||||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 |||||||
94권 「엄관전(閹官傳)」 | |||||||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 |||||||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 |||||||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 |||||
사마예 · 이웅 | 환현 · 풍발 · 유유 | 소도성 · 소연 | |||||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 |||||||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 |||||||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 |||||||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 |||||||
101권 「저등전(氐等傳)」 | |||||||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 |||||||
102권 「서역전(西域傳)」 | |||||||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 |||||||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 |||||||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 |||||||
104권 「자서전(自序傳)」 | |||||||
위수 |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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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健) · 탁발순 · 탁발의열 · 탁발굴돌16권 「도무7왕·명원6왕·태무5왕전(道武七王·明元六王·太武五王傳)」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련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최영등전(崔逞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고언기 · 고언강 · 고언충 · 고작 · 고엄 · 고곽 · 고정 · 고인영 · 고인광 · 고인기 · 고인옹 · 고인검 · 고인아 · 고인직 · 고인겸 · 고각 · 고선덕
고매덕 · 고질전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후막진상 · 설고연 · 곡률강거 · 장경 · 요웅 · 송현 · 왕칙 · 모용소종 · 질열평 · 보대한살 · 설유의 · 모용엄 · 반락 · 팽락 · 포현 · 피경화
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왕세적,· 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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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