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匈奴 | 선비鮮卑 | 저氐 | 갈羯 | 강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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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匈奴 | Xiongnu | |||
문장[1] | |||
■ 기원전 2세기경 흉노 제국의 세력권 ■ 남흉노 ■ 선비 | |||
기원전 400년경~439년 |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몽골어 | <colbgcolor=#fff,#212121> ᠬᠣᠨᠨᠣ (Qunnu; 훈누) Хүннү (Khunnu)[2] | |
상고한어 | qʰoŋ naː (콩나, 정장상팡) qʰ(r)oŋ nˤa 1 (크롱나[3], 벡스터-사가르) hjuŋnag (흉나그, 리팡구이) | ||
위치 | <colbgcolor=#fff,#212121>북아시아 스텝 지역 러시아 남부 몽골 고원 | ||
언어 | 흉노어 | ||
문자 | 흉노 문자(?)[4] | ||
종교 | 텡그리 신앙(?) | ||
국가원수 | 탱리고도선우(撑犂孤塗單于, 선우) | ||
주요 선우 | 초대 두만 2대 묵돌 11대 호연제 14대 호한야 21대 오달제후 북흉노 1대 포노 2대 우유 남흉노 1대 혜락시축제 20대 호주천 | ||
성립 이전 | 훈육 험윤 월지 동호 | ||
멸망 이후 | 열반[5] 남흉노 선비족 오환족 철륵 전조 북하 훈족(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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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흉노(匈奴)는 기원전 4세기 말 전국시대부터[6] 기원후 5세기 중반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년 동안 주로 북아시아 지역에 존속했던 특정 유목민 집단 및 이들이 세운 국가를 가리킨다.역사서에 기록된 세계 최초의 유목제국이었다.[7] 이 시절 중국의 여러 기록물 내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로 끊임없이 중화권 국가와 치고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건조한 초원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 현재의 중국 북부, 몽골 고원에서부터 러시아 남쪽에까지 달하는 광활한 제국을 건설했고,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그리고 현재 중국의 내몽골, 간쑤성, 토하리스탄까지 영향력이 미쳤다.
2. 역사
사마천의 사서 《사기》에는 하나라의 후손으로 서주를 밀어버린 훈육과 험윤이 이들의 조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전국시대 이전의 북방 이민족들은 제대로 된 유목민이 아니었다고 한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성과로 보면, 이후의 유목민족들처럼 제대로 된 유목문화는 기원전 10세기에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시작되어[8], 기원전 8~7세기가 되어야 비로소 중국 북방에 유입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즘엔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 초기 사이에 등장하는 호(胡)라는 이름의 족속이 중화권 사람들이 최초로 조우한 기마 유목민이라고 보는 학설이 힘을 얻었다. 고고학 연구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고대에도 몽골 고원에 사람이 살긴 했지만, 적어도 기원전 8~7세기까지는 이곳에 살던 민족들이 소를 키워서 먹고 살던 유목민[9]이나 수렵채집민이었다고 한다.[10]전한 초기엔 한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면서 한고조 유방을 백등산 포위전에서 사로잡을 뻔한 기염도 토했으나, 이후 화친으로 돌아섰고, 전한의 형님에 해당하는 위치에서 정기적으로 전한이 재화를 바치는 것에 만족했다. 한무제 시절엔 전한과의 데스매치 끝에 결국 막북으로 밀려나 다섯 명의 탱리고도선우가 난립하는 혼란기를 거쳐 두 차례 국가가 분열되는 등 중원에서의 패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후 후한시대에 흉노가 분열한 남흉노 등은 후한의 제후격으로 떨어지기도 했고, 오호십육국시대에 서진(西晉)을 멸망시킨 후(영가의 난) 화북지방에 한조, 북하 등 유목왕조를 세우기도 했지만 이때부터 중국 내부에 들어오면서 문화적으로는 중화권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다가 선비족에게 된통 얻어맞고 점점 세력이 약화되더니 끝내 흉노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이렇게 수백 년 이상 중화제국과 충돌한 경력 때문인지 지금도 '북방민족'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유목민족 중 하나로, 중국 문화에도 흉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천고마비, 만리장성, 왕소군 등이 대표적이다. 흉노에 대한 기억은 흉노가 소멸된 후에도 중국인들의 뇌리에 박혔기 때문에 흉노가 소멸된지 한참 지난 남송 시대에도 만강홍에서 여진족 금나라를 흉노로 호칭했다.[11]
2.1. 초기
흉노가 중국 역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4세기 말의 전국시대이다. 흉노는 가끔 진나라에 대항하는 각국의 연합에 참가하여 진나라를 공격했지만 매번 참패로 끝났다. 그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기원전 215년에 몽염을 보내 오르도스 지역의 흉노를 축출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다.2.2. 전성기
기원전 209년 묵돌 선우가 아버지 두만 선우를 죽이고 선우위에 올랐다. 묵돌은 동몽골을 공격해 동호를 멸망시켰고, 서쪽으로 알타이-준가르 분지-서고비-하서주랑의 광활한 영역을 가지고 있었던 월지를 공격해 대부분의 강역을 점유했다. 흉노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여러 부족들도 흉노에 복속되었다.한편 중원에서는 유방이 초한전쟁을 수습하고 전한을 세웠다. 기원전 200년 흉노가 한나라의 변경을 공격하자, 유방이 친정하여 흉노군과 맞서 싸웠으나 백등산 포위전에서 처참하게 당하고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기원전 177년 흉노의 우현왕이 한나라의 변경을 약탈했을 때, 한문제가 우현왕을 치도록 했으나 당시 실크로드 정책에 집중하고 있었던 목돌 선우가 흉노의 책임을 인정하고 물러났다. 이후 우현왕은 하서를 공격해 월지족을 천산산맥 너머로 축출하고 서역의 26개국을 복속시켰다. 이로 인해 실크로드는 흉노의 손에 넘어갔다.[12]
2.3. 쇠퇴
한나라는 백등산 포위전 이후 흉노에 굴복하여 반기를 들지 못했으나 한 무제가 즉위한 이후 정세가 완전히 반전되었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 위청과 곽거병을 파견해 서역으로의 통로에 해당하는 하서주랑 지역을 정벌하고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의 하서 4군을 세웠다. 전세가 역전되자 한나라와의 조공무역이 끊어져 악화됐던 경제적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한나라와의 기나긴 전쟁으로 흉노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그리고 기원전 60년에는 한나라가 타림분지의 서역 도시국가들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하면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완전히 빼앗겨버렸다. 또한 기원전 56년에는 형제간의 싸움으로 동•서흉노로 분열되었는데 동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기원전 51년에 한나라에게 신하의 예를 표하면서 직접 장안의 한나라 황제를 알현하고 지원을 받아 흉노를 통일했으며, 서흉노의 질지선우는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세력을 확장하면서 한나라 사신들을 죽이는 등 대항하다가 기원전 36년에 한나라 군대의 토벌로 모두 몰살당한다. 이후 흉노는 한나라와 화친을 맺게 되었다.
당시 흉노가 갑자기 약화된 이유로 몽골 고원이 한랭화된 것을 이유로 보기도 한다.[13] 또한 흉노가 약화되면서 정치적 불안성도 발생해서 이치사부터 호한야까지의 선우만 11명인데 같은 시기 한나라는 무제, 소제, 폐제, 선제, 원제까지 5명뿐이었다.
전한이 멸망하고, 왕망의 신나라가 세워졌을 때, 왕망의 일관성 없는 대외정책에 흉노는 화친을 거두고 신나라를 침공하기도 했다.
이후 신나라가 멸망하고 후한이 세워졌을 때 흉노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이때 남흉노는 오르도스와 산시성에 정착하여 후한과 협력 관계가 되었고, 후한에 부정적인 북흉노는 몽골 고원에 남았다.
2.4. 소멸
서기 89년 후한은 북흉노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남흉노는 이후 중국의 변경이 되었다. 삼국시대에 남흉노 선우는 유명무실해지고 흉노는 조조와 그가 세운 위나라에 의해 5부로 재편되어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이후 서진 말 팔왕의 난으로 중원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흉노족이자 남흉노 선우의 후손인 유연이 한나라(전조)를 건국하고 서진을 무너뜨려 5호16국시대를 열었다. 전조가 멸망한 뒤에는 407년에 산시성 주변에 흉노 국가인 북하가 세워지기도 했지만 이 역시 439년에 탁발선비족의 북위에게 멸망하면서 흉노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한편 북흉노의 일부는 서쪽 제티수 일대로 이주하여 열반을 세우고, 그 중 처월(處月)족은 훗날 돌궐에 동화되며 사타족이란 이름으로 돌고 돌아 중원에 귀환한 끝에 거란, 한족 등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3. 풍습
한나라 시기 흉노족 가죽 상의 |
북아시아의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했다고 한다. 말, 염소, 양, 당나귀 등을 주로 길렀고, 개중에는 낙타 같은 진귀한 가축도 있었다. 군주인 선우 이하 모든 백성들이 고기를 주식으로 했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고 한다.
농사는 짓지 않았으며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다. 평화 시에는 목축과 수렵으로 생계를 이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부족 전원이 전투에 임해 약탈에 나섰다고 기록된 것이 중국측 기록이다.
그러나 정주민들에게서만 나오는 물산을 얻기 위해 그저 교역이나 약탈로 얻는 것을 넘어서, 정주민(주로 한나라 사람) 거주지를 대량으로 약탈하거나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두고 정주생활을 하게 하면서 흉노에게 봉사하게 했다. 이것 역시 중국 기록에 나오며, 흉노 유적들에서 보이는 정주 흔적은 이렇게 흉노에 끌려와 하층민이 된 한족 정주민들의 유산으로 주로 해석한다. 현대 러시아 학자들이 발굴한 러시아 흉노 유적지에 농사와 축산을 한 듯한 일정한 주거지 및 철기와 청동을 생산한 대장간 흔적 등이 있다.
이는 흉노 후대의 유목민족에게서도 자주 나타나는 형태로, 피지배계층이 농업과 공업을 하고, 지배계층은 목축과 수렵을 하는 체계를 수립한 경우일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가령 몽골은 청나라 시대에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서 몽골인 지주들이 나름 비옥한 토지들을 골라서 한족 출신의 소작농들에게 소작을 맡기고, 지주 본인은 전통적인 목축업에 종사했다.[14]
더 이전 금나라에서는 맹안·모극제라 하여 한족과 발해 유민들에게는 대규모 농경생활을 하게 하고, 지배층인 여진족에게는 반농반목생활을 유지할 것을 장려하기도 했다. 또, 고구려 역시도 초기에는 수렵을 병행하는 등 순수한 농업 위주의 정주문명은 아니었기에 어쨌든 농업을 주업으로 삼던 주변의 정주민들인 동예, 옥저 등을 정벌하여 조공을 받거나, 후한 등의 여러 중국 왕조와의 전쟁을 통해 잡아온 한족 농민들을 농지에 투입시키는 식으로, 하층민들에게 농사를 시켰다.
다만 고구려에선 초기에만 그랬던 것이고 제대로 된 농토를 얻으면서부터는 농업이 국가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에는 유목국가들과는 달리 오히려 농경민이 우위를 차지하고 수렵민인 말갈족을 하층민으로 두는 반대의 모습이 나타났다.[15] 하여튼 이는 유목민들 자신이 농사에 익숙하지 않아서, 농업을 통해 얻은 곡식에서 주로 섭취할 수 있는 탄수화물을 얻고자 택한 방법이었다. 본래는 이를 위해 정주민들을 수시로 침공해서 조공을 바치게 하거나,[16] 아예 대대적인 약탈을 하던 식이었는데, 이것을 자기들 땅에 정주민들을 정착시켜서 농사셔틀로 부리는 온건한 방법으로 바꾼 것이다.
흉노의 귀족들은 난제(攣鞮), 수복(須卜), 구림(丘林), 혁련(赫連), 호연(呼延) 등 성씨를 사용했다고 한다.
흉노 사회에서는 건장한 자가 존중되었고, 노약자는 비교적 천대받았다. 예컨대, 식사를 할 때도 맛좋은 살코기는 장정들이 먼저 먹었고, 노인들은 남은 것을 먹었다고 한다. 《사기》 <흉노 열전> 부분에서 나오는 중항열과 한나라 사신의 대화에서 이를 알 수 있는데, 한나라 사신은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면서 왜 장정들이 맛있는 걸 먼저 먹고 남은 걸 노인에게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중항열은 흉노는 전투를 자주 하는데 늙고 병든 사람이 싸울 수가 없어 젊고 힘센 장정들이 잘 먹어야 잘 싸울 수 있고 나아가 노인들을 지켜줄 수 있지 않느냐고 답했다.[17]
아버지나 다른 식구가 먼저 죽을 경우, 그의 부인과 첩을 취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당연히 생모는 제외된다. 이는 대부분 유목민에게서 나타나는 제도이다. 과거 고구려도 형사취수제라 하여 형이 죽으면 그 부인을 동생이 데리고 사는 풍습이 있었다. 토지를 소유하는 정주민족은 가장이 죽더라도 남은 유가족이 생활할 수 있지만, 유목민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딸렸던 식구들의 부양을 책임지워 노동력 감소를 방지하려는 사회적 의무이고 게르만을 포함한[18] 대부분 유목민족들에게서 나타난다. 역시 유목민족 느낌이 강했던 진(秦)나라에서도, 상앙의 변법이 있기 전까지 부자(父子), 형제가 처첩을 공유했다고 한다. 나중에 상앙이 자뻑 드립할 때 언급된다. 유동성이 강한 현재의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에서도 형제의 처첩 공유는 흔했다.[19]
선우가 죽으면 측근 신하나 애첩이 '순장'당했는데 많을 경우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을 넘기도 했다고 한다. 이외에 금과 의복 등을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무덤에 봉분을 쌓지는 않았고, 상복도 입지 않았다. 장례 땐 망자를 애도하기 위해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죽은 자의 이마에 피를 흘리는 '이면'이라는 풍습이 있었고, 머리카락 일부를 베어 묻는 '전발' 풍습도 있었다. 이 풍습은 순장을 억제하여 노동력 감소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가 아닐 때 칼을 한 자 이상 뽑은 자는 사형에 처했고, 도둑질한 자는 재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남아있는 기록이 중국의 고서뿐이어서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분야긴 하다. 실제 발굴된 흉노의 유적은 중국 측 기록과 다른 점도 있었다.
중국 전통악기 얼후가 흉노에서 기원했다. 본래 흉노의 악기였던 호치르가 8세기 때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얼후란 이름이 붙었다.
4. 언어, 문자
흉노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만 있기 때문에, 현대 중국어로 음역된 일부 지명이나 이름들을 제외하고는 흉노어의 재구는 거의 불가능하다.2020년 몽골의 흉노 궁궐에서 한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 기원전 3세기~2세기 흉노 상류층은 한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링크. 뿐만 아니라, 기와에 "天子 單于"라 새겨져 있기 때문에 중국 사료에서 흉노의 수장을 일컫는 말인 '單于(선우)'는 흉노인의 자체적 표기법을 차용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흉노인들도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자기 군주를 '천자'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해당 논문의 저자 알렉산더 보빈은 이 天子單于라는 표기를 두고 탱리고도선우의 훈차일 가능성도 제기하였다. '탱리고도선우' 중 '탱리고도'는 '하늘의 자식'이라는 뜻이기 때문. 사실이라면 흉노에도 향찰과 비슷한 자국어 표기법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가끔 웹에서 흉노가 자체적 문자가 있었다는 언급이 돌곤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동아일보에서 "탐가"라는 고유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사를 낸 적이 있는데, '탐가'는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가 아니라 왕족을 상징하는 문양이므로 근거 없는 해석이다. 현재까지 흉노 유적에서도 한자와 별개의 문자 체계는 발견되지 않았다.
흉노어의 계통은 파악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튀르크어족이나 몽골어족에 속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여겼으나, 이는 어떠한 확실한 근거를 토대로 한 가설이 아니라 당나라 이후 몽골 지역은 줄곧 튀르크나 몽골 계통 민족이 거주했으므로 흉노 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일 따름이었다. 예니세이어족 설이 대두하고 있으나, 해당 어족에 대한 연구가 워낙 빈약하기에 여전히 흉노어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고대 중국어로 음역/번역된 단어로, 도기(屠耆)/현(賢), 약제(若鞮)/효(孝)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도기는 튀르키예어로 현명함을 뜻하는 단어 도기리의 어원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학자들의 재구에 따르면 낙타를 뜻하는 흉노어 어휘 *dada가 한나라 시대에 음차되어 전해졌다. 형태로만 보면 고대 튀르크어 *debe나 튀르키예어 deve, 몽골어 ᠲᠡᠮᠡᠭᠡ(temege) / тэмээ(temee, 티메)와도 비슷하지만, 연관성이 명확하게 검증되지는 않았다.
5. 전투
활을 잘 다루었는데 어린이들도 양을 타고 다니면서 작은 짐승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활을 당길 만한 힘을 가진 남성 전원이 기병으로 활약했다. 접전시에는 칼과 짧은 창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 중엽 전한 한경제 시절, 한 군관이 수십 기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흉노 궁기병 단 3기를 만나 병사를 모두 잃고 본인도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이 흉노족 궁기병들은 《사기》에서"(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쏘아 맞히는 명사수들."
이라고 칭송을 받았다.싸움에 있어 후퇴를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아서 싸움이 유리하면 전진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사정없이 도망쳤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지만, 당시 중국은 전국시대 군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전투 중에 함부로 후퇴하는 군사들을 엄벌에 처했다. 진나라 시대 관료들이 참고용으로 지참했던 법률 문서를 보면, 당시 중국의 군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전투에서 뒤로 물러날 경우, 몇 발자국을 물러나느냐에 따라 처벌의 강도가 달라질 정도로 이 문제에 민감했다.[20][21]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를 잡으면 상으로 술 한 잔을 받았다. 노획품이나 포로는 그대로 당사자의 소유가 되었다.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온 자는 그의 재산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맹렬히 싸웠고, 패색이 짙어지면 맹렬히 도망쳤다.
전쟁을 하거나 큰 일을 일으킬 때 달의 모습을 보고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 달이 차고 빛나면 좋은 징조이고, 흐릿하면 나쁜 징조였다고 한다. 실제로 달이 흐릿해지는 경우, 중 달무리가 지는 경우엔 다음날 비가 올 확률이 높으므로 흉노에 있어 궂은 날씨가 전투나 야외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 듯한 부분이다.
일설에는 흉노가 중앙아시아 초원을 누비던 스키타이인들로부터 기마술을 전수받았고, 흉노의 동검인 경로(徑路) 역시 스키타이 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기마술 부분은 크게 설득력이 없는 것이 기마술은 모든 인류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문화적 소양이기 때문이다. 말이 없던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탈주한 말을 길들여 타고 다녔던 북미 원주민들을 생각하면 쉽다.
6. 편제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족의 우두머리를 선우(탱리고도선우)라 부르며, 선우 밑에 좌현왕, 우현왕, 좌록리왕, 우록리왕, 좌대장, 우대장, 좌대도위, 우대도위, 좌대당호, 우대당호, 좌골도후, 우골도후를 두었다. 이들은 크게는 1만 기, 작게는 병사 수천 기를 거느렸으며 그들을 둘러싸고 군단장 24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만기라고 불렀다. 군단장들은 천인대장, 백인대장, 십인대장, 비소왕, 상, 봉, 도위, 당호, 저거 등의 관리를 두었다.태자는 좌현왕이라 했고, 이를 좌도기왕이라고도 불렀는데, 흉노 말로 '도기'가 고대 중국어로 '현'에 대응했기 때문이다.
각 부족들은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그 안에서 이동하며 살았다. 이중 좌·우현왕과 좌·우록리왕의 영역이 가장 컸다.
매년 정월과 5월에 군단장들이 선우정에 모여서 회합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다. 가을에는 대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백성과 가축의 수효를 점검했다.
7. 문명
흉노는 진나라나 한나라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전국시대부터 이미 흥기하여 철기시대에 진입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인 기원전 5세기부터 중국에서 철을 생산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서아시아로부터 전해왔는지 또는 중국이 자체적으로 제철기술을 발전시켰는지 논란이 많다.철은 서남아시아 아나톨리아 지방의 옛 국가인 히타이트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22] 그곳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서역의 앞선 철기 문명을 일찍 접한 흉노가 당시의 중국보다 일찍 철기 문명을 가질 수 있었고, 철제 무기를 이용해서 군사력 역시 강력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실크로드 교역의 독점권을 가졌기 때문에, 앞선 서역의 문물을 중국에 전달할 수 있었다. 흉노의 무덤에서는 다량의 철촉, 철검, 철제 마구 등이 출토된다.
철기 문화는 흉노의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한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서는 흉노와 한나라 간에 교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교역은 서로 교환할 물건이 확보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흉노는 실크로드를 실질적으로 통제하여 무역권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는 흉노에 큰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 서역에는 화려한 물품이 많다는 장건의 보고를 읽은 한 무제가 이를 탐내기도 했다.
전한 초기 흉노의 위협에 직면해 이를 막아내기 버거웠던 한나라는 흉노와 화친하여 무역하는 방법을 택했다. 흉노에 패배한 직후였으므로 한나라에 불리한 조건의 화친이었지만 흉노에 정기적으로 바쳐야 하는 물자는 중국의 거대한 생산성으로 극복 가능한 정도였다. 그렇게 화친과 교역으로 흉노를 달래는 사이 문제와 경제는 이른바 문경지치를 이뤘고, 내실을 쌓은 이후 무제가 다시금 흉노 정벌에 나서 승리하면서 흉노는 서역 지배권을 빼앗기고 쇠퇴하게 된다. 물론 대흉노전에 국력을 너무 쏟아부은 나머지 한나라도 이후 점차 쇠퇴해간 게 함정이지만, 흉노만큼 쇠퇴하진 않았다.
7.1. 유적과 유물
문화상으로 흉노는 한족의 중원문화에 필적할 만큼 빠르고 넓게 문화권을 형성했다. 흉노 문화권을 상징하는 몇 가지 심볼적인 유물이나 표징으로는 동복(청동솥), 동물문 장식의 금공 유물들이 대표적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고분 출토품을 통한 연구가 활발한 편이며 흉노와 한(漢)나라 간의 교류나 관계망의 형성에 대한 연구도 많다.흉노 또한 중국의 유물을 받아들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동경(銅鏡)으로, 당시 동북아시아 사회에서 한나라 문화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한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음과 동시에 사여되었던 각종 인장(印章)과 중국식의 마차 구성품들 또한 동경 등과 함께 조사되기도 하여 당시 한나라의 외부 민족에 대한 통제 방식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주요한 유물로는 스키타이식 W형 화살촉, 아케메네스식 양인단검(兩刃短劍) · 칼 · 도끼 · 찰갑 · 고삐 · 마면(馬面) · 방울 · 각종 마차용구 · 대구(帶鉤) · 원경(圓鏡, 둥근 거울), 스키타이식 솥[23] 등이 있다.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북몽골 고원에 위치해 있던 튀르크계 철륵(퇼레스)이나 남러시아의 스키타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유물의 특징은 스키타이계 동물 문양을 수용한 점인데, 각종 장식물에 예외없이 동물 문양이 있다. 이러한 흉노의 스키타이계 청동기 문화는 전국시대부터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화북지역에 파급됨은 물론, 동쪽으로는 만주와 고구려,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와 멀리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흉노에 의한 동서교류는 호한문화(胡漢文化)의 창출에서 나타나고 있다. 흉노 문화는 오르도스 문화와 한(漢)문화가 융합된 이른바 '호한문화'이다. 이것은 오르도스 청동기 문화와 맥을 같이 하는 연속선상의 계승문화, 혹은 발전문화로서 한나라 문화적 요소가 뚜렷한 것이 특징인데, 대표적 유적지인 노인울라[24]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로 증명된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 것으로 추정하는 노인울라 유적지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북쪽에서 약 100 km정도 떨어진 산중에 있는데, 1924년 소련 지리학회가 파견해 울란바토르에 체재 중이던 소련 · 몽골 · 티베트 탐험대가 고분들을 속속 발굴했다. 총 212기의 고분은 모두 수츠주크테(Sutszukte)를 비롯한 세 골짜기 경사면에 위치하는데, 외관상으로는 남러시아, 남시베리아의 쿠르간 형식과 점재한 소형 성토식분 형식, 그리고 작은 웅덩이식 묘 등 3가지 형태이다.
구조는 중국(전국시대와 진•한시대)과 한반도(낙랑고분)의 분묘와 유사한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다. 즉 구조의 주체인 기실(基室)은 지하 광내(壙內)에 목재로 만들며[25], 그 위에 봉토를 씌우고 지하의 곽실(槨室)로 이어지는 갱도를 앞에서 파들어가는 형식이다.
그러나 중국이나 한국의 고총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하분도, 주로 남측 위에 좁고 긴 봉토를 씌우는 전방구(前方丘)가 주구(主丘)와 이어 붙어 있는 것과 봉토의 기초나 측면 및 표면을 조약돌로 다진 점이다. 그밖에 곽실 내부 장식에서도 다른 점이 엿보이는바, 한국의 경우 기실 내를 벽화로 장식하지만 여기서는 벽화 대신 여러가지 문양의 자수 모직품이나 비단천으로 기둥이나 대들보를 장식한다.
스키타이나 서아시아 및 소아시아 예술에서 자주 보이는 동물 투쟁 문양이 확인되며 노인울라 6호분에서 출토된 걸개 모직 카펫에는 티베트나 중앙아시아에서 번식하는 야크가 뿔사자와 싸우는 장면을 수놓았다. 또 다른 문양으로는 페르시아계의 대칭문양(對稱文樣)을 찾아볼 수 있다. 역시 6호분에서 출토된 은으로 된 원형식판에는 중앙에 야크를 놓고 좌우에 나무[26]를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끝으로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대 예술품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기하학 문양도 일부 유물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6호분에서 출토된 호피(虎皮) 문양의 카펫인데, 여기에는 방형, 피라미드형, 冂자형, 工자형 등 9가지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수놓았다. 이런 직물 유물들은 흉노에서 생산된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중국이나 서역의 박트리아로부터 수입된 것들도 있다.[27]
흉노와 관련된 자료는 생각보다 많지만 국내에 그렇게 넓게 알려지지 않은 편이고, 흉노 유물들의 여러 요소들이 꽤 동북지역,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서 간과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흉노족 신라왕족설>과 같은 게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직접적인 것은 아니고 모티브적인 차원에서의 영향을 생각보다 많이 받았다. 일단 흉노 자체가 고조선과 동맹이었다는 기록이 있다.[28]
특히 흉노는 한나라와 더불어 기승용 마구(馬具)를 보편적으로 사용했었으며 이로 인해서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경의 동북아시아는 크게 중원계 마구와 흉노계 마구로 나뉘기도 한다.
대표적인 유적들은 대부분 고분 자료들이며 도르릭 나르스, 보르한 톨고이, 골모드, 노용올, 모린 톨고이 등이 유명한 고분이다. 이 가운데서 도르릭 나르스와 모린 톨고이 고분군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공동 발굴한 유적이다.
동물문 장식이 많은 만큼 실제로 무덤에서도 동물과 관련된 유물들이 많은 편이다. 한국에서야 통상 일부 유물에서만 골각기가 확인되지만 흉노는 활부터 시작하여 화살촉이나 각종 장식 등으로 활용한 다양한 골각기를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아예 무덤의 시신 안치 공간의 머리맡에 동물의 두개골을 고스란히 묻기도 하는 등 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유목민족'스러운 부장품을 매납했다.
중국 내몽골 자치구 내 전시된 흉노의 유물 |
흉노의 벨트 버클[29] |
보르한 톨고이 출토 동복 | 유수 노하심 출토 동복 |
투바 공화국 알라타이 저수지에서 발견된 벨트 버클# |
마치 현대의 스마트폰 케이스를 연상시키는 단촐한 디자인의 유물도 있다.
8. 인종
흉노의 발원지가 몽골고원인 만큼 초창기 흉노족의 절대다수는 현대의 몽골인과 비슷한 몽골로이드로 이루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흉노가 서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제국에 코카시안계 인종이 일부 유입됐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원시 튀르크인도 원래는 몽골로이드였지만[30][31][32], 서쪽으로 진출한 집단이 혼혈되면서 현대의 튀르크인들이 형성된 것인 만큼 흉노도 초기에는 동북아 인종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흉노의 서쪽 세력권에는 코카시안계 인종 혹은 그들과의 혼혈이 유의미하게 많아졌다고도 볼 수 있다.그런데 인터넷 등지에는 마치 흉노가 처음부터 코카시안계 백인들로 이루어진 유목제국이었다는 식의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고고학적, 고인류학적으로 전혀 근거도 없을 뿐더러 애초에 불가능하다. 만약 정말 당시 몽골고원에 백인이 그만큼 많았다면 현대 몽골인과 백인의 유전적 거리가 그만큼 멀 수도 없을 뿐더러 내몽골과 만주에 존재했던 고대 유목민족의 유전자에도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몽골 북부에 위치하는 흉노 유적지인 노인울라 고분(Noin-Ula burial site)에서 발견된 카펫의 자수화들을 근거로 흉노가 사실 백인과 비슷하게 생긴 집단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노인울라 고분에서 발견된 카펫은 흉노가 만든 게 아니라 박트리아로부터 수입한 것이다.[33] 당연히 자수화로 묘사된 인물들도 흉노가 아니고, 페르시아화된 월지 혹은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이다. 당시 흉노에서 박트리아산 카펫은 사치스러운 명품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일부 고분에서는 인도-유럽계 같기도 하고 몽골계 같기도 한 유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유골이 정확히 어떤 계열인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 심지어 동양적인 형질을 띈 장두 인종 튀르크계가 그런 식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다만, 두형을 이용해 인종을 구분하는 것이 현재 학계에서는 시대착오적 내지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이 있는 데다가 흉노는 편두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두개골을 변형했으므로 더욱 오리무중이다. 게다가 두개골 측정은 같은 인종이라도 시대와 개인차가 심하다는 한계가 있어서 불안정한 결과를 보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점도 있다. 이 때문에 튀르키예와 몽골은 흉노의 역사를 놓고 여전히 줄다리기 중이지만[34] 자료가 거의 남지 않은 현재로선 그저 미궁일 뿐이다.
만약 흉노와 선비족을 강하게 연관 짓는다면 흉노의 주류 인종이 무엇이었느냐에 대한 생물학적 근거로 북주 무제 우문옹의 DNA 분석 결과를 제시할 수 있다. 우문옹은 6세기 인물이지만, 혈통의 약 2/3가 선비족이었다. 그리고 그의 선비족 유전자는 현대의 몽골인 및 다우르족과 매우 유사했다. 2024년에는 우문옹의 DNA를 분석하여 그의 얼굴을 복원했는데,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이었다. 이는 무제의 얼굴이 서구적이었을 거라고 추측했던 일부 학자들의 주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결과였다. 물론 흉노와 선비족은 다르다고 보거나, 흉노에는 선비족 말고도 다른 집단이 공존했다고 주장한다면 반박의 여지는 존재한다.
DNA 분석을 통하여 도출한 북주 3대 황제 무제 우문옹의 얼굴. 중국 황제의 유골을 생물학적으로 분석하여 만든 최초의 복원도이며 2024년에 발표되어 전세계 학계에 큰 이슈가 되었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각국의 인류학자들도 매우 설득력이 있고 사실에 가까운 복원도라고 평가했다. 복원된 황제의 얼굴은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이었으며, DNA 분석 결과 혈통의 약 2/3가 현대 몽골인 및 다우르족과 매우 유사했으며, 약 1/3은 북부 한족과 유사했다고 한다. 이 분석 결과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하나는 고대 선비족이 현대의 몽골인과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했으며 외모도 그만큼 비슷했다는 것이고, 하나는 선비족이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한족과 통혼했다는 것이다.## |
8.1. 다인종 혼혈 체제?
절충론 비슷하게 (오늘날 북미권마냥) 북아시아-중앙아시아의 다양한 유목민족의 집단 연합체가 흉노였다는 말도 나온다. 사마천은 <흉노 열전>에서 묵특 선우에 의한 건국 초기의 일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그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십진법이 군사, 정치, 사회 조직을 관통하고 있다.
- 남쪽으로 좌, 중, 우로 된 3대 분할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군주를 중앙에 둔 좌·우 양익체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영민과 분지를 가진 만기 24명이 모인 연합 권력체이다. 여기에 보충 설명을 가하고 있는 이성의 비소왕들이 인솔하는 제족 집단을 포함하여 흉노 국가는 다원, 다종족의 국가였다고 추측된다.
흉노를 민족명이면서 국가명으로 보면 설명 가능하다. 즉, 흉노란 유목민족의 여러 집단 중에서도 지배민족의 명칭이고[35], 이것이 동시에 흉노가 이끌던 국가의 이름으로도 쓰였다고 추측된다. 흉노족 자신들이 이끌던 국가명에 자신의 종족명을 붙임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흉노 이후의 유목민족들도 중국으로 침투하여 한화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답습했다. 후대의 유연, 돌궐, 위구르 등도 모두 이런 케이스에 해당한다. 이런 사례는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일시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도 프랑크족이 건설했지만 실제론 프랑크족이 주류 민족이 아니라 지배층만을 이루었고, 다수 피지배층은 다른 게르만족이나 갈리아인 그라고 로마인들이었다.
그리고 흉노 국가 자체는 멸망했어도 흉노란 민족 자체는 살아남아 5호 16국시대에 다시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든 것으로 보면 된다. 다만 이 당시의 흉노족은 많이 한화가 되었거니와 건국한 곳이 중국 땅이어서 한, 조, 하 같은 중국식 왕조명을 썼던 것이다.
흉노를 국가명과 민족명으로 구별하면 흉노족이 선비족 등의 다른 민족들과 세력다툼을 벌인 것이나 민족 단위로 분쟁이 끊이지 않은 오호십육국시대에 혁련발발이 '북하' 같은 흉노족 국가를 세운 것 등을 설명하기 쉽다.
물론 확실한 자료가 남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추측이지만, 다른 유목민족의 예를 보아도 흉노를 단일민족으로 보기는 힘들며, 여러 유목민족의 집단 연합체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중앙대학교 연구진이 몽골 도르릭 나르스(Duurlig Nars)의 흉노 고분에서 출토한 고인골 DNA 분석 결과에 따르면, 흉노의 귀족층으로 보이는 60대 중반 남성 인골의 하플로그룹은 서유라시아 계통인 Y-DNA R1a1과 mtDNA U2e1이라고 한다.
2018년 5월 《네이처》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다섯 구의 흉노인 유골의 유전자를 검사한 결과, 추출된 4개의 Y-DNA 하플로그룹은 R1, R1b, O3a 및 O3a3b2이며, 추출된 5개의 mtDNA는 D4b2b4, N9a2a, G3a3, D4a6, D4b2b2라고 한다. 이를 통해 흉노는 서유라시아계와 동아시아/시베리아계 혈통이 섞였고, 이웃한 오손, 강거, 샤카보다 동아시아계 혈통이 더 많이 섞였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집단유전학 교수인 정충원 교수가 발표한 2020년 12월 논문에 따르면 동부 유라시아 스텝의 신석기 후기부터 몽골 제국이 탄생한 13세기까지의 고인골을 분석하면서 얻어낸 데이터를 토대로 유전적 변화도를 구성했는데 이에 따르면 고대 동아시아인과 고대 시베리아인, 그리고 유라시아 스텝 서쪽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스키타이와 사르마티아인의 형질을 가진 사람이 혼혈 내지 공존했다고 한다.
원래 철기 시대 말엽까지만 해도 이들이 유전적으로 관계가 없었는데 갑자기 대략 2,000년 전을 기점으로 섞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흉노 제국의 탄생과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특히 몽골 고원 일대의 흉노인 유골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종합하면 Y-DNA 하플로그룹은 C2, E1b1b, J1, J1a, J2, N, N1c, O2, Q1a, R1a, R1b이며, mtDNA 하플로그룹은 B, C, D, F, G, H, HV, I, J, K, M, N9, T, U, X라고 한다. 즉 동아시아인과 시베리아인과 서유라시아인에게 나오는 집단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 결과는 정충원 교수의 논문에 기록된 결과이며, 실제로 다른 학자들이 연구한 논문에 나와 있는 흉노 사람의 하플로그룹은 여기에 열거된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정 교수는
“몽골 고비사막 동남쪽에는 판석묘를 쓰는 고대 동아시아인 인류집단이, 북서쪽 바이칼호 부근에는 판석묘를 쓰는 고대 동아시아인과 그보다 훨씬 이전에 유라시아 북부에 살던 고대 북유라시아인 유전자가 섞인 인류집단이, 마지막으로 몽골 서쪽 알타이산맥 부근에는 유럽에서 스텝을 거쳐 온 전차를 사용하는 인류집단인 아파나시예보 문화인이 각각 살고 있었다.”
며 “1000년간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는데 이 시기에 갑자기 섞였다는 사실이 게놈 분석 결과로 처음 확인됐다”
고 말했다. 원래 기존 역사학계에서는 이 시기에 스텝을 통해 들어온 백인 집단이 카자흐스탄까지 들어와 있을 정도로 융성해 몽골 역시 비슷한 인류가 들어와 있는 단순한 구성을 예상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로 과거의 예상이 틀린 이론이며, 생각보다 동아시아 인류의 역사가 복잡하고 역동적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드러났다.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최초의 스텝(초원) 제국인 흉노 제국이 형성된 시기(약 2,200년 전)와 일치한다. 정 교수는
“동쪽 지역에서 서쪽 지역(유럽) 인류의 유전적 특성을 지닌 사람이 발견되는 등 섞임 현상이 두드러졌다.”
라며 “이에 따라 흉노는 매우 다양한 유전적 특징을 지니게 됐음을 알게 됐다.”
고 말했다. 마치 오늘날의 미국처럼 유전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살았던 것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정 교수는 “기마술의 보급에 따른 기동성의 증가나 기후변화 등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은 가설이며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라고 말했다.이때 형성된 인류는 지금의 동아시아인과는 많이 다르다. 300년 뒤 흉노가 멸망한 뒤에도 유전적 특징은 계속 변했다. 몽골 고원 지대의 유목민들은 기회가 되는데로 인구 부양력이 더 높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서진하거나 혹은 중국으로 남하했고, 시베리아 일대의 원주민들이 남하하거나 혹은 만주 일대의 유목민들이 서진하여 그 빈 자리를 채우는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고대 흉노인들의 유골을 조사해보면 코카소이드 인종 혼혈 유전자가 오늘날 몽골인에 비해 훨씬 더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다. 흉노가 멸망한 이후 유연과 돌궐이 서진하고[36] 같은 시기에 중앙아시아를 거쳐 온 사르마티아인이 나타나면서 이들 사이에 서로 밀접한 교류가 일어났다. 서기 6~7세기 무렵이 되면 위구르 제국의 흥망성쇠를 거치면서 위구르와 키르기스가 차례로 몽골 고원 일대로 남하하는데, 이들 역시 서쪽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이주하고, 그 빈 자리는 북방에서 내려온 다른 민족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현대 동아시아인과 비슷한 유전적 특성이 형성된 것은 지금부터 약 800년 전인 13세기 초에 이 지역에 몽골 제국이 세워진 이후였다. 다시 동쪽 유라시아인 유전자가 많이 섞여들면서 서유라시아인의 유전자 비중은 줄었고, 그 결과 비로소 현재의 몽골인과 유전적 특성이 비슷한 인류가 나타났다. 몽골 지역은 5,000년에 걸쳐 낙농업이 유행했고 지금도 다량의 유제품을 섭취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낙농업 지역과 달리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선 유당(락토스)을 분해하는 유전자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연구팀은 장내미생물 등에 의한 다른 적응을 통해 유제품 소화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연구는 한반도에 사는 인류집단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다만 6천 년간 동아시아 내륙에 살던 인류의 복잡한 이동과 만남을 세세하게 밝혔다는 의의가 있다. 정 교수는
"이번 연구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후기 청동기시대 이전과 흉노 이후 거란과 여진 등 중세시대 후기의 유골 시료를 더 확보해 추가연구를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이 결과를 요약해 보면 흉노인들은 동아시아인/시베리아인과 스키타이 및 사르마티아인, 그리고 그 이전에 존재했던 아파나시예보 문화, 안드로노보 문화, 파지릭 문화 등의 유라시아 대초원에 살던 고대인의 후예로 이루어진 유목부족들이 각자 따로 존재했다가 철기시대 말에 비로소 혼혈이 이루어져 유전적으로 연결고리를 갖추었던 유라시안임을 보여준다.
이를 미루어 보면 중국의 사서에서 흉노인에 대한 외모를 묘사한 항목에 동아시아인 같은 외모에서부터 금발벽안[37] 내지 적발녹안[38] 같은 유럽인을 방불케 하는 외모를 가진 사람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느냐는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리는 셈이다. 튀르크 항목에도 있듯 현대 튀르크 제족들도 다양한 인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런 인식은 현대 헝가리인들도 하는 모양인지, 넷상에 헝가리인 친구가 있다고 주장하는 글들을 보면 헝가리인들은 자신들의 선조를 흉노족, 훈족이라고 교육받는다고 한다.[39] '헝가리(Hungary)'라는 국명의 뜻도 '흉노족(훈족)의 나라'라고.. 게다가 이들은 몽골제국의 칭기스칸, 티무르나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쉴레이만 1세도 자신들의 선조 중 일부로 여긴다고 하는데, 헝가리판 환빠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이게 사실이라면, 현재까지도 상당수 유라시아 유목민족 후예 국가들은 몽골족, 튀르크족 가리지 않고 죄다 흉노족의 후예랍시고 싸잡아 자신들의 선조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맞다면 다인종 국가 개념이 아직까지도 이어져내려오는 셈이다.
8.2. 흉노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이질성
2024년 연구에서 분석된 몽골 동부의 흉노 유적 고인골들은 완전히 동북아시아에서만 유래한 게놈들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통해 흉노는 초창기에는 유전적으로 균일함을 보이다가 서쪽으로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인종이 이질적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사실 흉노의 발원지였던 몽골 동부에서 발견되는 흉노 이전 시기의 고인골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던 것이었다.게놈 연구에 따르면 흉노의 지배층은 동북아시아 혈통이 지배적이었고 유전적 다양성이 적었으며, 흉노의 피지배층은 동북아시아 혈통과 서유라시아 혈통이 뒤섞여 유전적으로 다양했다. 실제로 고대 흉노의 선우 중 한 명을 게놈 분석한 결과 DNA의 91.2%가 동북아시아 계통이었다.#
이는 마치 후대의 몽골제국이 서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아랍인, 페르시아인, 러시아인 등을 피지배층으로 편입시킨 것과 비슷하다. 다만, 몽골제국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흉노에 비해 타인종과 통혼을 덜한 것으로 보이는데, 몽골제국 시절의 중세 몽골인들은 전체적으로 동북아시아 혈통이 흉노보다 훨씬 더 두드러졌고 현대의 몽골인과 사실상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는 몽골제국이 철저하게 몽골인과 색목인을 인종 계급으로 나눠 구분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9. 훈족과의 연관성?
로마 제국의 동쪽에서 등장해 서유럽을 휩쓸었던 아틸라의 훈족(Hun族)을 이 흉노와 같은 종족으로 보는 시각이 옛날부터 꾸준히 있었다.흉노의 흉(匈)은 훈(Hun)[40]을 중국어의 음차로 부른 명칭이라는 설도 있고, 훈족은 남흉노-후한 연합군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린 북흉노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에게 동화되면서 그 집단이 유럽으로 일직선으로 전진한 거라고 추정하는 설도 있지만 이건 가설의 단계이다. 아직까지도 시원하게 반박되거나 증명되지 않았다.
고대 중국 국가들은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들을 오랑캐로 여겨 종노(奴)를 붙였다. 흉노만 해도 호랑캐 흉(匈)에 종노(奴)로 만들어진 단어다. 왜나라도 처음에는 한자를 쓰지 않는 미개한 나라여서 왜노라 불렀다. 흉노, 왜노 등 있다. 훈족을 오랑캐로여겼을 것이고, 마침 훈=오랑캐흉으로 음차가 되니 만들어진게 아닐까 추정된다.
오늘날에는 적어도 훈과 흉노는 동일한 어휘이고, 몽골 고원 일대에서 기원한 인적 집단이 서방으로 확산되었다는 설이 많은 지지를 받는다. 보면 문헌학적으로는 교차검증이 되는 자료들이 상당히 많음에도, 유목민족이라 그런지 고고학적으로는 뚜렷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즉,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셈.
우선, 양자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은 입증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313년, 소그드 상인은 간수 회랑에서 사마르칸트로 보내는 편지에서, 중국의 남흉노 집단을 훈(Xwn)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이름은 유럽의 훈(Hun)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 흉노(ʿχiʷongʿnuo)와 연관이 있을까? 이 연관성에 대해 중국어 음운학자들은 큰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고, 흉노가 중앙아시아에 출연한 이후 언제나 이와 같이 불렸기에 다른 기원이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고대 소그드의 편지 이외에도, 둔황의 월지인인 축법호(Dharmarakṣa)는 280년에 《점비일체지덕경》(漸備一切智德經, Tathāgataguhya-sūtra)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하며, 흉노를 후나(Hūṇa)로 옮겼으며(산스크리트어 판본은 현존하지 않으나, 티베트어 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Hu-na라 적혀 있다.), 308년에 번역한 《보요경》(普曜經, Lalitavistara)에서도 똑같이 옮겼다(산스크리트어 판본이 현존하고 있다).
Étienne de la Vaissière, “Xiongnu,” Encyclopædia Iranica, online edition, 2006, available at http://www.iranicaonline.org/articles/xiongnu (accessed on November 15, 2006).
Étienne de la Vaissière, “Xiongnu,” Encyclopædia Iranica, online edition, 2006, available at http://www.iranicaonline.org/articles/xiongnu (accessed on November 15, 2006).
2018년, 에스케 빌러슬레프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지리유전학센터 교수팀이 약 4500~1500년 전 사이의 중기 구석기~신석기시대 인류 137명의 유골로부터 게놈을 추출, 해독해 《네이처》에 발표했는데, 이 연구만 보자면 일단 훈족과 흉노족이 적어도 유전적으론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기사엔 흉노족이 중국이라고 되어 있는데, 당연히 중국, 특히 한족계와 혈연적 연관성은 떨어진다. 그냥 유럽 훈족마냥 그 지역에서 인상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 듯하다. 물론 애초부터 '흉노'라는 말 자체가 여러 유목민족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10. 대외관계
10.1. 중국과의 관계
《산해경》에 따르면 흉노는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이계의 자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게다가 《산해경》이라는 책 자체가중국사에 흉노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인 《설원》(說苑)에 따르면 기원전 312년 누번의 영토에 거주하는 흉노가 급습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만 이 정보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전국칠웅 중에서도 북방의 조(趙)나라를 꾸준히 괴롭히다가, 그만 이목의 기만책에 낚여서 처절하게 발려버린 기록이 있다. 이때 자그마치 10만 명이 죽고[42] 선우만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고 하니, 이목도 이목이지만 10만 명이나 모여있었던 흉노도 대단하다. 물론 중국 사서의 특성상
하지만 그러고도 남은 무리들이 서쪽 오르도스 지방[44]에 모여 살면서 진(秦)나라의 우환이 되었는데,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명령을 받은 몽염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해 밀어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황하 밖으로 오르도스를 빙 둘러서 만리장성을 쌓아버렸다. 오르도스 확보와 만리장성 축조는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자원을 소모하여 결국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지만, 흉노의 약화라는 목적만은 달성할 수 있었다.
시황제 아래에선 찍소리도 못하고 지내던 흉노였지만 진말의 농민봉기에 이은 초한전쟁으로 중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이룬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묵돌 선우였다.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건 유방이 전한을 세우고 나서부터이다.
한고제 유방은 기세 좋게 토벌에 나섰지만 백등산 포위전에서 패배했다. 흉노는 유방의 조심성을 역으로 이용하여 한나라의 보병을 유인한 뒤 기병 포위전략을 써서 유방을 떡발랐다. 이때 진평의 계략으로 유방은 겨우 풀려났지만 결국 패배는 패배였다. 이후 전한은 한나라 여인을 선우의 아내로 바치고, 그 외 각종 물자와 인력을 보낸다는 조건으로 흉노와 굴욕적인 화약을 맺게 되었다. 먼 훗날의 북송은 거란족의 요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을 때 송나라 때와 비슷하다.
나중엔 여후에게 묵돌 선우가
그대가 과부가 되었다고 들었소. 나도 외로우니 우리 서로 부족한 것을 결합해 나와 혼인하는 게 어떻겠소
같은 식의 무례한 편지를 보내도 진나라 말기부터의 전쟁과 항우가 벌인 수많은 학살 때문에 인구 수든 생산량이든 뚝 떨어져서 장수들도 말이 없어 소를 타고 다니는 상황이었기에 토벌을 할 수 없었다.[45]흉노는 그 뒤로 평소엔 평화유지비를 받아먹고, 먹을 거 떨어지면 한나라의 국경을 두들겨대다가 복수의 칼날을 갈던 한무제 유철에게 된통 걸려서 너 죽고 나 죽자로 싸우게 되었는데, 수십 년간 지든 이기든 10만 명 이상씩 계속 초원으로 원정군을 보내는 한나라의 쇼미더머니 소모전에 밀려 결국 선우정이 막북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그래도 세력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한나라의 총공세를 기적적으로 막아내 민족 자체는 지켜낼 수 있었지만 세력은 쪼개지고 황하 상류 서쪽의 4군(무위·장액·주천·돈황)을 잃으면서 서역과 실크로드 무역로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이후 한나라를 약탈하는 게 잘 되지 않으니 대신 서쪽의 오손을 공격했다가 한선제가 오손과 손을 잡고 한무제 사후 오랜만에 200,000명의 대군으로 쳐들어오니, 흉노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나다가 수만 명씩 죽어나가는 참혹한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나중에는 흉노가 이 꼬라지가 된 걸 본 오손, 오환, 정령 등 흉노에게 복속되어 있었던 민족들이 전부 들고 일어났다. 이때 흉노는 진압하지 못하고 그들에게까지 거꾸로 두들겨맞는 동네북이 되었고, 자연재해까지 겹쳐 한나라가 흉노에 기병을 보내 흉노인을 약탈하는(!)
적어도 두만 선우 때부터 흉노는 장자 세습의 원칙을 이어갔으나, 한무제와의 대전 중에 군신 선우가 죽자 급했는지 병약한 장자 어단 대신 군신 선우의 동생인 이지사를 선우로 세웠고, 이후 이지사의 후손들이 일찍 죽어나가 장자 세습의 원칙을 더이상 견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선우위를 놓고 내부에서 궁정 암투가 극심해지며 선우의 정통성도 점차 결여되었고, 결국 한무제의 손자인 한선제 때에 이르자 후계 구도가 막장으로 치달아 한때는 선우를 일컫는 자가 다섯 명이나 되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중 호한야가 겨우 대충 아우르나 싶더니 그전까지는 조용하던 형 질지가 갑자기 들고 일어나서 호한야를 두들겨 내쫓았다.
궁지에 몰린 호한야는 한나라에게 칭신하게 되었고, 질지 역시 한나라와 잘 지내려고 했지만 서로 대등한 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한나라는 호한야의 편을 들었다. 고립된 질지는 서쪽으로 활로를 찾으니 호한야의 세력은 동흉노, 질지의 세력은 서흉노가 되었다. 서흉노는 강거로 가서 서역의 패권을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한군의 토벌로 멸망했다. 그 잔존세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재하다.
후한대에 이르러서 다시 선우위 계승 문제로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다. 북흉노는 그후 여러 번 국경을 침범하다가 후한의 명제~화제 때 반초의 서역 정벌과 화제 때 두헌(竇憲)의 북방 정벌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반초의 아들 반용(班勇)의 서역 정벌 때 다시 털린 후, 151년 이오(伊吾)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것을 마지막으로 신장 일대에서 완전히 그 세력을 잃었다. 그 후 4세기에 엄채국[46]을 함락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47]
이후 후한은 남흉노에 대한 회유정책을 펴 남흉노는 사실상 후한에게 복속된 상태가 되었으며 결국 후한이 남흉노인들을 관내로 집단 이주시켜 군사적 용병으로 써먹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흉노의 명목상 선우 직위는 계속 유지되어왔는데 건안 16년(216) 조조가 흉노 부락을 좌, 우, 남, 북, 중의 5부로 분할하고, 각 부 중에서 수(帥)를 선발해 통솔시키며 수 아래 한인의 사마(司馬)를 두어 감시하고, 5부 전체는 사흉노중랑장[48]이 감시하게 했다. 중랑장은 태원(太原)에 주둔했는데 병주자사(幷州刺史)를 겸했고, 남선우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으므로 흉노 전체가 노예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후 흉노인들은 점차 한인과 뒤섞여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특히, 5부의 귀족들과 그 자제들은 중원에서 유교 경전과 사서로 학식을 쌓으며 한화漢 되었다. 특히 분수 일대에 들어온 흉노 부족 중 도각부는 한고조 시절부터 흉노로 공주들을 시집보냈기에 유劉를 성으로 삼았다. 5호16국 시대 한漢 나라를 세운 유연이 바로 도각부 출신이다.
삼국시대에는 조위-서진의 지배를 받았는데 흉노는 정치적으로 자립성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경제 생활에서도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한인들의 멸시를 받았다.
이후 흉노가 다시 흥기한 것은 서진의 팔왕의 난 및 영가의 난으로 인한 혼란 때문으로 결국 서진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으며 5호 16국시대에 한(漢)[49], 전조(前趙), 북량(北凉), 북하(北夏)[50] 등의 국가를 세웠다. 이후 탁발선비족이 중심이 된 북위가 흉노계 호한체제 국가들을 멸망시키면서 흉노의 명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독고부 등 몇몇 후세 인물들이 흉노의 후손이라는 기록만이 남았을 뿐이다.
관롱집단의 대명사로 유명한 수문제 양견의 부인인 문헌황후 독고씨가 흉노의 후예였다.
10.2. 한민족 국가와의 관계(흉노족 신라왕족설)
좌현왕 이하의 장군들은 예맥 및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조선 왕이 내린 작호 중 하나인 '비왕'(裨王)은 흉노족의 '비소왕'(裨小王)에서 따온 말로 추정된다. 아마도 고조선이 흉노와 연계하여 전한에 대항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BC 108년 고조선이 멸망할 때 흉노의 왼쪽 팔을 잘라냈다고 기록된 것에서 고조선과 흉노의 관계를 알아 볼 수 있다.[51]이후 흉노의 주류 민족이 남하하고 북방의 힘이 공백 상태로 접어들었을 때 최악의 두 적수였던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이 싸우느라 바쁜 동안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정복전쟁이 이루어졌다. 이후 고구려는 몽골에서 흉노가 빠져나간 뒤 남은 족속이 세운 유연 제국과 지두우 등 소국을 분할해 뜯어가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 마립간 시대의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이 흉노 지역의 쿠르간 무덤과 형태가 유사해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원래 무덤양식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에[52] 근원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해석이 있었다.
또 이와 별도로 신라 중대 이후 몇몇 신라인들이 묘비에 자신을 전한 무제때의 흉노 귀화인인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자칭하기도 했다는데, 이를 입증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유래는 <흉노족 신라왕족설>인데, 신라인들이 스스로를 흉노 출신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의 신라의 유래는 이와는 다르며, 또한 흉노와 연관되어 있다는 고고학적인 확실한 증거는 나오지 않는 상태이다. 따라서 정해진 학설이 없는 만큼 섣불리 신라 = 흉노 타령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53]
자세한 내용은 흉노족 신라왕족설 문서 참고하십시오.
10.3. 기타 국가와의 관계
서역 국가들을 여러 차례 위협하면서 부세를 여러 번 거두기도 했으며, 서역 국가들의 싸움에 개입하기도 했다. 심지어 국왕을 죽이고 옹립할 정도였다. 이때문에 당시 서역 국가들이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11. 역대 탱리고도선우
흉노의 군주인 탱리고도선우의 성씨는 '연제'(攣鞮), '난제'(欒提), '허련제'(虛連題) 등으로 쓰이는데, 다들 음이 비슷해 어떤 흉노어를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추정된다.11.1. 흉노
대수 | 칭호 | 휘 | 재위기간 |
0대 | 선우(單于)[54] | ? | ? ~ ? |
. . . | |||
1대 | 두만(頭曼) | 두만(頭曼) | 기원전 ???년 ~ 기원전 209년 |
2대 | 묵돌(冒頓) | 묵돌 / 모돈 / 묵특(冒頓) | 기원전 209년 ~ 기원전 174년 |
3대 | 노상(老上) | 계육(稽粥) | 기원전 174년 ~ 기원전 161년 |
4대 | 군신(軍臣) | 군신(軍臣) | 기원전 161년 ~ 기원전 126년 |
5대 | 이치사(伊稚斜) | 이치사(伊稚斜) | 기원전 126년 ~ 기원전 114년 |
6대 | 오유(烏維) | 오유(烏維) | 기원전 114년 ~ 기원전 105년 |
7대 | 오사려(烏師廬) | 오사려(烏師廬), 첨사려(詹師廬), 아(兒) | 기원전 105년 ~ 기원전 102년 |
8대 | 구려호(呴犁湖) | 구려호(呴犁湖) | 기원전 102년 ~ 기원전 101년 |
9대 | 저제후(且鞮侯) | 저제후(且鞮侯) | 기원전 101년 ~ 기원전 96년 |
10대 | 호록고(狐鹿姑) | 호록고(狐鹿姑) | 기원전 96년 ~ 기원전 85년 |
11대 | 호연제(壺衍鞮) | 호연제(壺衍鞮) | 기원전 85년 ~ 기원전 68년 |
12대 | 허려권거(虛閭權渠) | 허려권거(虛閭權渠) | 기원전 68년 ~ 기원전 60년 |
13대 | 악연구제(握衍朐鞮) | 도기당(屠耆堂) | 기원전 60년 ~ 기원전 58년 |
11.2. 동흉노
대수 | 칭호 | 휘 | 재위기간 |
1대 | 호한야(呼韓邪) | 계후산(稽侯狦) | 기원전 58년 ~ 기원전 31년 |
2대 | 복주루약제(復株累若鞮) | 조도막고(雕陶莫皋)) | 기원전 31년 ~ 기원전 20년 |
3대 | 수해약제(搜諧若鞮) | 저미서(且麋胥) | 기원전 20년 ~ 기원전 12년 |
4대 | 거아약제(車牙若鞮) | 저막거(且莫車) | 기원전 12년 ~ 기원전 8년 |
5대 | 오주류약제(烏珠留若鞮) | 낭지아사(曩知牙斯) | 기원전 8년 ~ 13년 |
6대 | 오루약제(烏累若鞮) | 함(咸) | 13년 ~ 18년 |
7대 | 호도이시도고약제(呼都而尸道皋若鞮) | 여(輿) | 18년 ~ 46년 |
8대 | 오달제후(烏達提侯) | 오달제후(烏達提侯) | 46년 |
11.3. 서흉노
대수 | 칭호 | 휘 | 재위기간 |
1대 | 질지(郅支) | 호도오사(呼屠吾斯) | 기원전 56년 ~ 기원전 36년 |
11.4. 북흉노
대수 | 칭호 | 휘 | 재위기간 |
1대 | 포노(蒲奴) | 포노(蒲奴) | 46년 ~ ? |
2대 | 우유(優留) | 우유(優留) | ? ~ 87년 |
11.5. 남흉노
대수 | 칭호 | 휘 | 재위기간 | ||
1대 | 혜락시축제(醢落尸逐鞮) | 난제비(欒提比) | 48년 ~ 56년 | ||
2대 | 구부우제(丘浮尤鞮) | 난제막(欒提莫) | 56년 ~ 57년 | ||
3대 | 이벌어려제(伊伐於慮鞮) | 난제한(欒提汗) | 57년 ~ 59년 | ||
4대 | 혜동시축후제(䤈僮尸逐侯鞮) | 난제적(欒提適) | 59년 ~ 63년 | ||
5대 | 구제차림제(丘除車林鞮) | 난제소(欒提蘇) | 63년 | ||
6대 | 호야시축후제(胡邪尸逐侯鞮) | 난제장(欒提長) | 63년 ~ 85년 | ||
7대 | 이도어려제(伊屠於閭鞮) | 난제선(欒提宣) | 85년 ~ 88년 | ||
8대 | 휴란시축후제(休蘭尸逐侯鞮) | 난제둔도하(欒提屯屠何) | 88년 ~ 93년 | ||
9대 | - | 난제안국(欒提安國) | 93년 ~ 94년 | ||
10대 | 정독시축후제(亭獨尸逐侯鞮) | 난제사자(欒提師子) | 94년 ~ 98년 | ||
11대 | 만씨시축후제(萬氏尸逐侯提) | 난제단(欒提檀) | 98년 ~ 124년 / 94년 ~ 111년 | ||
12대 | 오계후시축제(烏稽尸逐侯提) | 난제발(欒提拔) | 124년 ~ 128년 | ||
13대 | 거특약시축취(去特若尸逐就) | 난제휴리(欒提休利) | 128년 ~ 140년 | ||
- | - | 차뉴(車紐) | 140년 ~ 143년 | ||
14대 | 호란약시축취(呼蘭若尸逐就) | 난제두루저(欒提兜樓儲) | 143년 ~ 148년 | ||
15대 | 이릉시축취(伊陵尸逐就) | 난제차아(欒提車兒) | 148년 ~ 172년 | ||
16대 | 도특약시축취(屠特若尸逐就) | 난제□(欒提□)[55] | 172년 ~ 178년 | ||
17대 | - | 난제호징(欒提呼徵) | 178년 ~ 179년 | ||
18대 | - | 난제강거(欒提羌渠) | 179년 ~ 188년 | ||
- | 수복골도후(須卜骨都侯) | - | 188년 ~ 189년 | ||
19대 | 특지시축후(持至尸逐侯) | 난제어부라(欒提於夫羅) | 188년 ~ 195년 | ||
20대 | - | 난제호주천(欒提呼廚泉) | 195년 ~ 216년 | ||
흉노 멸망 | |||||
- | 좌부수(左部帥) | 유표(劉豹) | - | ||
- | | | - |
12. 흉노 소속 인물
12.1. 흉노 분열 이전
★는 한나라 → 흉노, ☆는 흉노 → 한나라로 투항한 인물이다.- 김윤(☆) - 김일제의 동생.
- 김일제(☆)
- 도륭기(☆) - 우현왕과 함께 연제박서당을 도기선우로 세운 인물.
- 도리호차
- 만구신(★)
- 복다(☆)
- 성만(☆) - 개화왕
- 연제박서당 - 도기선우로 독립한 인물.
- 연제선현탄(☆)
- 연제어단(☆)
- 연제호도오사 - 질지골도후 선우로 독립한 인물.
- 오려굴(☆)
- 오려온돈(☆)
- 왕항(★)
- 위율(★) - 흉노 후기의 권력자.
- 이광리(★) - 한나라의 이사장군.
- 이리목 - 이리목 선우로 독립했다가 질지 선우에게 패했다.
- 이서(★)
- 이릉(★)
- 제제거당(☆)
- 조리(★)
- 조신 - 흉노에서 한나라로 투항했다가 다시 흉노에 항복했다.
- 중항열(★)
- 한신(★)
- 형미앙
- 호독니(☆) - 혼야왕의 부하인 비왕.
12.2. 흉노 분열 시기
12.3. 남흉노 멸망 이후
- 기무현야(綦毋俔邪)
- 노송다(路松多) - 흉노 도각부 사람으로 신평과 부풍에서 군사를 일으켜 사마보에게 붙었으며, 초벽을 점거해 진과 농산에 사는 저족 및 강족의 호응을 받았다. 전조의 유요가 장수를 파견해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해 유요가 직접 공격하여 초벽을 함락시키자 농성으로 퇴각했다.
- 독옹(獨雍)
- 대두득일육국(大豆得一育鞠) - 흉노의 도독으로 287년에 종족 부락 11,500명을 인솔해 진나라에 항복했다.
- 발혁허(拔弈虛)
- 백마동
- 석무(石武) - 흉노의 휴저왕(休屠王)으로 322년에 상성을 바치고 전조에 항복해 진주자사에 임명되고, 주천왕에 책봉되었다.
- 도대박(都大博), 위사(萎莎) - 흉노의 인물로 286년에 각기 종족 부락 10여만 명을 거느려 옹주에 와서 사마준에게 항복했다.
- 유고승원(劉誥升爰) - 흉노의 수령. 유맹의 아들로 유맹이 하정의 계략으로 살해당하자 그 무리를 관장했으며, 그가 죽자 유호가 계승해 철불부를 이루었다.
- 유맹(劉猛)
- 유오로고(劉烏路孤) - 흉노 철불부의 수령. 유호라고도 한다.
- 유위진
- 유정(劉靖)
- 유고인 - 흉노 독고부의 수령.
- 유두권, 유현
- 장배독(張背督), 풍막돌(馮莫突) - 흉노의 인물. 석륵의 설득으로 307년 겨울 10월, 전조(한)에 귀부해 장배독은 친한왕, 풍막돌은 도독부대에 임명되었다. 장배독의 한자 '배'는 정확히는 勹, 背를 합친 한자이다.
- 장숭(張崇) - 흉노의 수령. 서하에 거주했으나 398년, 대군으로 옮기는 것에 불만을 품고 복속하고 있었던 북위를 공격했지만 유악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었다.
- 조곡(曹穀) - 흉노의 인물. 우현왕으로 전진에 항복했다가 365년에 전진을 배반했고 무리 20,000명을 이끌며 행성을 공격했다가, 부견이 군사를 이끌면서 8월에 격파되었다. 조활이 죽자 항복을 요청해 전진에 항복했다.
- 조홍(曹弘) - 흉노의 인물. 416년에 병주의 호족 수만 락이 후진에 대항해 평양으로 들어가면서 조홍은 대선우에 추대되었으며, 흉노보에서 요성도를 공격했지만 요의의 공격을 받아 토벌되면서 사로잡혀 장안으로 보내졌다.
- 조활(曹活) - 흉노의 인물. 조곡의 동생. 365년에 조곡과 함께 전진을 배반해 행성을 공격했다가 부견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 학노(郝奴) - 흉노의 인물로 노수에 거주하다가 386년에 전진의 형양태수였던 조곡이 장안으로 부르자 이에 호응했고 왕린이 마외를 점거하자 군사를 파견했으며, 4월에 학다가 후진의 공격을 받아 붙잡히자 항복했고 진북장군, 육곡대도독에 임명되었다.
- 학다(郝多) - 흉노의 인물로 노수에 거주하다가 386년에 전진의 형양태수였던 조곡이 장안으로 부른 것을 학노가 호응했는데, 왕린이 마외를 점거하자 학노의 지시로 왕린을 공격했고 4월에 후진의 공격을 받아 붙잡혔다.
- 학도원
- 학산(郝散) - 흉노의 인물로 294년 여름 5월에 봉기해 상당을 공격해 장리를 살해하고 가을 8월에 무리를 인솔하고 와서 항복했다가 빙익도위가 이들을 살해했다.
- 혁련발발
- 혜락(䤈落)
- 호박거자직(胡薄居姿職)
- 호연철(呼延鐵) - 흉노의 수령. 이석에 거주하다가 398년, 대군으로 옮기는 것에 불만을 품고 복속하고 있었던 북위를 공격했지만 유악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었다.
- 호태아후(胡太阿厚) - 흉노의 인물. 요새 밖에 있다가 285년에 부락민 29,300명을 거느리고 진나라에 항복했으며, 무제 사마염은 그들을 요새 안쪽 서하에 두도록 했다.
13. 관련 문서
[1] 몽골 알타이 지역의 고대 흉노 유적인 타킬티인코트고르(Takhiltiin Khotgor)에 있는 'Elite Tomb 64호'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의 문양으로, 태양과 달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이후 몽골인을 포함한 북아시아 유목민들에게 계승되어 몽골 제국과 현대 몽골 국장의 기원이 되었다. #[2] '사람'을 뜻하는 몽골어 Хүн(훈)과 의미상 일치한다.[3] 상고한어의 주요 현상인 인두 조화가 일어나지 않는 특이한 경우이다.[4] 흉노 고문자의 실존 여부는 학계에서 논쟁 중에 있다.[5] 《위서》 <서역전>에 북선우가 세운 열반국(悅般國)이란 나라가 나오는데, 아마 오손의 옛 땅에 세운 북흉노의 나라로 보인다.[6]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이 이때부터라 실제로는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흉노가 세력을 본격적으로 넓혀 북아시아의 강대한 유목제국으로 성장한 것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로 넘어가는 전한시대 이르러서긴 했다.[7] 선구적인 유목민인 스키타이족과 킴메르족은 부족 단위 정치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껏해야 전쟁을 위해 일시적으로 묶인 부족동맹 그 이상을 못 갔다. 유목"제국"은커녕 부족연맹의 맹주조차 없었다.[8] 야생마를 최초로 가축화한 것은 기원전 3700년경부터 기원전 3000년경까지 존재했던 현재의 카자흐스탄 북부의 보타이 문화였다. 이때의 원시 인도유럽인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서 대확산을 시작한 시기로 아직 우랄산맥을 넘진 못해서, 의외로 보타이 문화와 문화적-혈연적 흔적이 안 보인다. 기원전 3300년 경에 살았던 보타이인의 유골에 대한 유전자검사 결과, 고대 북유라시아인(ANE)과 고대 동아시아인(AEA)의 혼혈 계통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원시 인도유럽인이나 현대 유럽인과 관계가 있는 고대 북유라시아인 성분과는 달리, 타림 분지의 토하라인과 비슷하게 원시 인도유럽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대 북유라시아인 성분에 더 가깝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원시 인도유럽인과 직접 혼혈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 아메리카 원주민과 원시 인도유럽인의 조상이었던 고대 북유라시아인 집단에서 분화된 자손 중 한 갈래가 고대 동아시아인과 혼혈이 된 것이 보타이 문화인들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말의 근력이 약해서 직접 올라타지는 못하고 마차를 끌거나 짐을 지는 용도로만 이용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2000년경에 원시 인도유럽인의 후계 민족들 중 하나인 인도아리아인이 말의 품종을 직접 올라탈 수 있는 수준으로 개량하면서, 오늘날에 널리 알려진 기마 유목민의 모습이 처음 나왔다.[9] 마사이족 같은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나일사하라어족 유목민들 중 기마유목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들이 소와 함께 도보로 이동하는 유목 생활을 영위한다.[10] 상나라와 한나라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원시 몽골인이나 원시 튀르크인들과 접촉하여 소를 포함한 몇몇 가축을 수입해오곤 했는데, 그 근거로 '송아지 독'(犢)자가 고대 몽골어로 소를 가리키는 단어인 'tuɣul'에서 유래했음이 거론된다.[11] 중국 뿐 아니라 타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북방인 또는 야만인 하면 흉노를 떠올리는 관념이 어느정도 존재했다. 가령 헤이안 시대 일본의 좌대신이었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도호쿠 지방의 실권자이자 후지와라씨의 분가 오슈 후지와라씨의 수장인 후지와라노 모토히라와 갈등을 빚은 적이 있는데, 그의 가신이 오슈 후지와라씨를 흉노라고 깠다는 것이 그의 일기인 《다이키》(台記)에 적혀 있다.[12] 《사기》 <흉노 열전>에 의하면 기원전 177년 당시 한나라와 흉노의 서쪽 국경은 현재 섬서성인 상군이었고, 동쪽 국경은 하북성 북부의 상곡이었으며, 흉노의 서쪽은 월지에 접해 있었다.[13] 기원전 1세기 초반의 《한서》 <흉노전> 기록을 보면 유독 다른 시기보다 겨울이 추워 사람들과 가축이 많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허려권거선우 시기에는 흉노가 한나라를 침략하려다가 몇 명이 이탈해서 한나라에게 소식을 알리고 항복하는 경우도 있어서 한나라가 이에 대비를 해서 흉노가 끝내 침략을 못했다는 기록들이 적혀 있다.[14] 사족으로, 이게 쿠부치 사막의 직접적인 생성 원인이었다. 가뜩이나 척박한 땅에서 농사와 유목 생활을 병행하다보니, 빠르게 지력이 고갈되어 오늘날 서울의 5배에 달하는 면적의 거대한 사막이 형성되었다.[15] 고구려가 분리되어 나온 모체인 부여는 고조선보다도 훨씬 북쪽에서 기원한 국가라서, 고조선의 쇠퇴와 멸망을 틈타서 만주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주로 목축업에 많이 의존을 했다. 고구려는 그 부여에서 분리되면서 아예 압록강 인근의 산에 정착해 살았으므로, 부여보다도 농업에 훨씬 불리한 환경이었고, 그래서 주변의 옥저나 동예, 한사군 지역을 수시로 침탈하면서 국력을 성장시켜왔다. 똑같이 예맥계 부족들이 세운 나라라고해도 고조선은 그나마 농사가 가능한 요서 지역에서 발흥한 탓에 전형적인 농경민으로서의 생활양식을 보여주었지만, 부여와 고구려는 그보다도 더 척박한 환경에서 발흥해서 같은 민족인데도 목축민으로서의 전혀 다른 생활 양식을 보여준 것이다.[16] 조공 항목에서 볼 수 있는 조공의 형식만 빌린 무역이 아니라, 진짜로 삥뜯는 것을 말한다. 병자호란 때 당했던 삼전도의 굴욕을 생각하면 쉽다.[17] 이는 스파르타와도 대조되는데 둘 다 전투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는 노인을 공경했다. 이쪽에서 노인은 오랜 전투에서 살아남은 대단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 이러한 차이는 스파르타는 농경국가였고 흉노는 유목국가였기 때문일 수 있다. 스파르타는 노인에게까지 음식이 돌아갈 정도로 음식이 나는 데다가 속국인 메세니아를 정복해 거기서 나오는 식량까지 얻을 수 있던 반면, 흉노는 그러질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8] 카이사르도 신기하게 생각했다.[19] 형사취수제나 수첩제는 사망자의 유가족을 부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가임 여성의 임신 기회를 놓치거나 가임 여성이 가족(씨족) 바깥으로 이탈하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도 있었다. 본래 생식 가능한 남자에 비해 생식 가능한 여성의 수는 적을 수 밖에 없고, 일부다처제가 성립하는 사회에서는 가임기 여성을 힘있는 남성이 독점할 확률이 높다. 하물며 유목사회에서는 다른 혼인 상대를 쉽게 찾을 만큼 인구가 많지도 않다. 따라서 이미 씨족 내부로 들어온 여성을 내보내기란 남자 쪽에선 생식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는 행위나 다름없으므로 형사취수제 같은 제도가 생겨났던 것이다. 또한 과부를 내보내고 새 신부를 들여서 신랑이 지참금을 이중으로 지출하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20] 다만 이는 중요한 문제였다. 흉노는 애초에 전투가 일상인 민족이고 전투의 경우 땅을 빼앗거나 하는 것 말고도 약탈을 위한 목적도 크므로 전투동기도 충분하고 전투에도 익숙하나 농경국가는 군대를 따로 양성해야 했으며 이렇게 군인이 된 이들은 징병된 것이므로 흉노에 비해서 그 질이 낮았다. 그래도 진형이라도 이루며 싸우면 좀 나은데 이런 진형에서는 튀는 놈이 나오면 안된다. 게다가 전투 후에 병사들에게 돌아가는 것도 없으니 강도높은 군법으로 다스릴 수 밖에.[21] 전술적인 차이도 있다. 궁기병의 스웜전술이 중심이었던 흉노족에게는 집결과 산개의 유연한 전환이 생명줄이었던만큼 후퇴 자체도 하나의 전술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병의 방진 힘싸움을 중시하던 한족에게 개개인의 무분별한 후퇴로 인한 진형 붕괴는 곧 전 병력의 사망선고였고 한 두사람의 일탈도 강하게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22] 이를 반영한 결과인지, 마이크로소프트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로마의 부흥> 훈족의 침입 미션에서는 훈족의 종족을 히타이트로 설정했다.[23] 구연부에 두 개의 귀가 달린 큰 심발형(深鉢形) 솥.[24] Noin-Ula, 몽골어로 왕후(王侯)의 산이란 뜻이다.[25] 한나라 시대의 목실분(木室墳) 형태를 생각하면 된다.[26] 성수(聖樹).[27] 특히 박트리아에서 생산된 카펫 중에는 딱 봐도 흉노가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자수로 묘사된 것도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박트리아인 혹은 혹은 페르시아화된 대월지인을 자수한 거라고 한다.#[28] 중국측 기록에서 고조선은 흉노의 왼팔로 기록된다. 오른팔은 동투르키스탄 지역에 위치해있었던 토하라계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다. 당시 토하라계 도시국가들은 흉노의 경제를 먹여살려주는 존재들이었다. 중국이 흉노의 영역인 이곳을 정복하고 흉노를 몰아냈는데, 당시 흉노 경제에 제대로 타격을 입혔을 정도였다.[29] 두 마리 고양잇과 동물이 산양의 목을 물어뜯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30] 세계 역사학과 고고학의 주류는 원시 튀르크인을 확실하게 몽골로이드로 분류한다. 초원 유목민족 역사의 최고 권위자인 르네 그루쎄도 그런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고, 이러한 주류 고고학 및 역사학의 입장은 변한 것이 없다.[31] 137 ancient human genomes from across the Eurasian steppes[32] Populations dynamics in Northern Eurasian forests: a long-term perspective from Northeast Asia[33] 조공을 받은 것이란 주장도 있다.[34] 현대 튀르키예는 (돌궐 항목에도 있지만 튀르크를 떠나 튀르키예와는 혈통적-유전적으로는 생각만큼의 큰 연관성은 없음에도) 괵튀르크(돌궐)와 더불어 흉노 역시 자기들 조상의 역사로 본다. 한편, 몽골이나 유라시아(특히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도 흉노와 관련, 꽤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지만, 중국과는 사이가 안 좋아 그런지 서로 고고학 연구에 협조적이지 않아 이쪽과 연계 연구는 그다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35] 물론 이것도 확실친 않다.[36] 돌궐이 당나라에 멸망한 후, 잔당 세력 중 상당수는 서쪽으로 도망쳤는데, 이때 탈라스 전투 등을 거치며 아랍 세력과 조우하면서 기존에 불교를 믿는 경우도 많았던 튀르크계가 이슬람화된다.[37] 실위의 부족 중 하나인 황두실위는 이 금발벽안을 가진 흉노인의 후예로 추정된다.[38] 중국 사서에서 견곤으로 기록된 고대 키르기스인들을 가리킨다.[39] 사실 혈통적으로만 보면 헝가리인들의 조상인 마자르족과 훈족은 별로 연관이 없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지만, 어쨌든 헝가리는 12세기부터 이미 왕족들이 스스로를 아틸라 왕의 후예라고 자칭했다. 오늘날 자기들 조상이 흉노족이라고 주장하는 나라만 해도 튀르키예, 투르키스탄, 아제르바이잔, 몽골 등이 있다. 물론 실제 그런지는 따져볼 문제지만, 이미 사라진 흉노족의 후예를 자처하는 세력이 지금까지도 넓게 퍼져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40] 이 외에도 몽골어로 '사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41] 사실 고대엔 이런 갖다붙이기가 흔해서 그리스 신화만 봐도 테티스의 아들 닐로스의 딸 멤피스의 딸 리비아의 손자 아이굽토스와 포이닉스... 하는 식으로 족보가 엮였고, 로마인들과 프랑크인들은 트로이의 후예를 자처했으며, 그 주변 민족들도 《일리아스》에 나오는 모 씨가 서쪽 모처에 정착해서 자국을 세웠다는 식이었다. 지금도 아라비아 씨족들은 족보가 아담까지 올라간다. 이는 고대 세계관의 문화권력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자고로 이웃들과 교류하려면 먼저 정체를 밝혀야 하는 법이다. 여기서 자기만 남들과 다른 종류의 세계관을 따른다면 낯선 이방인, 곧 아싸가 될 테니 주변에 맞춰 족보를 손볼 수밖에 없다. 주류 문화권 입장에서도 여태 우주부터 인간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온 자기네 세계관이 한낱 변두리 촌놈들 앞에서 데꿀멍하도록 놔둘 수는 없을 테고. 비록 중국의 사마천이 갖다붙이긴 했지만, 흉노 역시 공식 세계관에 맞춘 동인설정을 지어주는 것이 고대인 기준으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막말로 중국 입장에서도 어디서 굴러온건지도 모를 듣보잡에게 졌다는 것보다는 하나라 왕실의 후손에게 졌다는 것이 그나마 덜 쪽팔렸을 것이다.[42] 그때 당시 10만 명이면 매우 큰 수치였다.[43] 이건 고대 서양도 마찬가지라서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군의 규모를 500만 명으로 추산했다.[44] 티베트 고원에서 내려온 황하가 북쪽으로 크게 곡류하면서 만드는 중간지대이다. 그 때문에 하투(河套)라고도 하고, 하남(河南)이라고도 한다. 중국 한복판의 하남성과는 다르다.[45] 물론 여후와 중신들은 진노했고, 번쾌가 10만 군사를 요청했지만, 계포가 "번쾌는 10만 군사로 고제가 40만으로도 못한 걸 하겠다는 망발을 하니 참해야 합니다."라는 직언을 올렸고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46] 중앙아시아 일대에 거주했던 이란계 유목민족.[47] 6세기경 《수서》에서 수나라가 다시 서역으로 진출해 동로마까지 기록에 남기지만 흉노는 없는 걸로 보아 시베리아로 튀었거나 망했거나. 현재로서는 추측할 단서가 없다.[48] 흉노를 총괄하는 중랑장 자체는 후한이 들어선 시기부터 존재했다. 그 명칭이 확실히 드러난 것은 한영제 시기의 장환으로, 호흉노중랑장에 임명되어 흉노 반란군과 오환, 선비의 연합군을 격퇴한 것에서 발견된다. 여담으로 이때 장환의 부장으로 종군한 것이 동탁이었다.[49] 흉노족인 유연(劉淵)은 흉노와 형제의 관계였던 후한이 멸망했으니 그 전통을 형인 흉노가 잇겠다며 국호를 '한'이라 했고, 실제로 한나라의 역대 황제에게 제사를 올렸다.[50] '호하', '혁련하' 등으로 불리는 국가로 역사상 마지막 흉노 국가임을 내세운 대표 국가였다. 결국 탁발선비족의 북위에게 멸망했다.[51]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중화제국에 맞서기 위해 튀르크계 민족인 돌궐과 손을 잡기도 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다만 몇몇 환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흉노가 한국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정도는 당연히 아니다.[52] 한국인들이 더이상 한복을 평소에 입지 않고 한옥에 모두가 살지 않지만 무덤이나 장례는 (물론 이것도 좀 변질되긴 했지만) 되도록 옛날식으로 조성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처럼 말이다.[53] 우습게도 인터넷 극단주의자들은 경상도를 비하하기 위해 이를 진지하게 믿고 있다.[54] 이목에게 패배함.[55] 이름이 유실됨.[56] 오나라의 자의적인 책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