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30 10:10:59

소왕(주)


주 국왕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서백 西白
초대 국군

후직
2대 국군

부줄
3대 국군

4대 국군

공류
5대 국군

경절
6대 국군

황복
7대 국군

차불
8대 국군

훼유
9대 국군

공비
10대 국군

고어
11대 국군

아어
12대 국군

주공
13대 국군

태왕
14대 국군

왕계
15대 국군

문왕
서주 西周
초대 왕

무왕
2대 왕

성왕
3대 왕

강왕
4대 왕

소왕
5대 왕

목왕
6대 왕

공왕
7대 왕

의왕
8대 왕

효왕
9대 왕

이왕
10대 왕

여왕
공화기

정공 · 소 목공간왕
11대 왕

선왕
12대 왕

유왕
비정통

휴왕
동주 東周
13대 왕

평왕
14대 왕

환왕
15대 왕

장왕
16대 왕

희왕
17대 왕

혜왕
비정통

폐왕
18대 왕

양왕
비정통

후폐왕
19대 왕

경왕頃王
20대 왕

광왕
21대 왕

정왕
22대 왕

간왕
23대 왕

영왕
24대 왕

경왕景王
25대 왕

도왕
비정통

서왕
26대 왕

경왕敬王
27대 왕

원왕
28대 왕

정정왕
29대 왕

애왕
30대 왕

사왕
31대 왕

고왕
32대 왕

위열왕
33대 왕

안왕
34대 왕

열왕
35대 왕

현왕
36대 왕

신정왕
말대 왕

난왕
분열 (西)
분열 (東)
국군

환공
국군

위공
국군

혜공
국군

무공
국군

혜공
국군

무공
국군

소문공
국군

동주공
국군

문공
주읍 周邑
초대 국군

문공
2대 국군

평공
ㆍㆍㆍ
?대 국군

정공
ㆍㆍㆍ
?대 국군

환공
?대 국군

희공
?대 국군

희기보
?대 국군

희열
?대 국군

희초
삼황오제 · ·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삼국시대 · 사마진 · 오호십육국 · 남북조 · ·
오대 · 십국 · · 서하 · · · · ·
중화민국 국가원수 · 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
시호 소왕(昭王)
(姬)
하(瑕)
생몰 기간 기원전 1027년 ~ 기원전 977년
재위 기간 기원전 995년 ~ 기원전 977년

1. 개요2. 재위 기간

1. 개요

주나라의 제4대 이자, 천자. 강왕의 아들로 무리한 원정을 하여 주나라를 쇠퇴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주 소왕도 죽었다.

2. 재위 기간

그는 명군 강왕의 아들로 태어나 태자가 되어 아버지 주 강왕이 죽은 뒤 왕이 되었다.

소왕 원년(기원전 995년), 동이족(東夷族)이 모반하자, 병사를 거느리고 정벌했다. 같은 해 소나라의 후작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반란을 평정하였다.

소왕 11년(기원전 985년), 소왕은 첫번째로 초나라 정벌에 떠났으나 병력만 잃었다. 한수를 건너 큰 코뿔소만 보고온 것이 소득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소득이라는 거지. 사실은 뻘짓이다. [1]

소왕 14년(기원전 982년), 소왕은 제공과 신나라 백작과 함께 두번째로 초나라를 쳤으나 병사들만 잃었다. 가면 맨날 지냐? 반란은 진압하는데 외정이 시망

주 소왕 15년(기원전 981년), 그 당시에는 소왕은 주나라에 머물러 정사를 돌봤다.

주 소왕 16년(기원전 980년), 동이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초나라를 세번째로 정벌했으나 역시 소득이 없었다.[2]

소왕 17년(기원전 979년), 50승의 병력을 주나라로 돌려보냈다.

소왕 18년(기원전 978년), 소왕은 여나라에 머물러 영사도에서 기후명자기[3] 3개를 포상으로 내렸다.[4]

소왕 19년(기원전 977년), 소왕은 다시 초나라를 네번째로 정벌했으나 한수에서 빠져 죽었다. 안죽었으면 다섯번째도 갈 양반 사기에서는 남쪽에서 순수를 하다가 강에 빠져 죽었다는 식으로 나왔는데, 실은 초나라를 정벌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것은 훗날 제 환공이 초나라를 칠 때 굴완이 한수를 이용해 막겠다는 말로 그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바가 있다. 잘 생각해 본다면 왕이나 되는 사람이 강물에 빠져 죽을정도면 그곳에서 무슨일이 벌어졌을지는 안봐도 비디오다. 그 사실이 사기와는 달리 죽서기년에는[5] 자세하게 나온다.

《일주서》에서는 소왕이 24년(기원전 972년)[6]까지도 계속 재위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러한 혼란은 공화 시대 당시의 혼란으로 인해 서주 초의 사료가 대다수 유실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 당시 음력 4월 8일, 꽤 큰 규모의 지진과 함께 지진광(earthquake light)이 관측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두고 점술사인 소유(蘇由)는 '위대한 성인이 서쪽 땅에 태어남을 알리는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지금은 천자의 치세에 끼치는 영향이 없겠으나, 1천년 뒤에는 저 성인의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전해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동아시아 불교계에서는 해당 기록을 석가모니의 탄생과 연관지어왔으며, 이로 인해 남방의 상좌부 불교와는 한동안 불멸기원을 다르게 셈해 왔다.

[1] 다만 아주 소득이 아닌 것도 아닌게, 소왕은 거기서 코뿔소를 만나보겠다고 말은 했었다.[2] 그 이유는 초나라가 한수의 험함으로 잘 지켰기 때문이다.[3] 사슴 모양으로 빚었다고 한다.[4] 정황상 여나라 제후에게 내린 듯 하다.[5] 육사(六師, 6개 군단)를 한수에서 잃었다며 패전을 암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6] 동아시아에서는 이를 기원전 1027년에 해당하는 연도로 셈했다. 이는 전근대 동아시아 역사가들이 주나라의 건국 연도를 기원전 1122년(기묘년)으로 보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