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13 16:51:29

허자(서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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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許孜
생몰연도 불명

서진의 인물. 자는 계의(季義). 양주 동양군(東陽郡) 오녕현(吳寧縣) 출신.

2. 생애

효심과 우애가 깊었고, 공손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민하여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허자가 20세에 이르렀을 때, 예장태수 공충(孔沖)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십삼경 중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주역》(周易), 《효경》(孝經), 《논어》(論語)를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후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에 스승 공충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허자는 무척 슬퍼하며, 공충의 고향인 회계(會稽)로 달려가 채식만 하면서 삼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의 부모까지 세상을 떠났다. 막 스승의 3년상을 마친 허자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상당히 야윈 상태였음에도 지팡이에 의지해 고향인 오녕현으로 돌아가, 고향 사람들의 도움도 마다하고 홀로 마을 동쪽 언덕 위로 올라가 부모의 묘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이 허자를 동정하여 도와주려 하니, 낮에는 차마 그들을 제지할 수 없었으나, 밤이 되면 남들이 도와준 부분을 모두 치워버렸다. 이윽고 묘지를 완성한 후, 허자는 매일같이 그 앞에서 부모를 잃은 슬픔에 겨워 통곡하였는데, 그의 통곡 소리가 들릴 때면 항상 새와 산짐승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허자는 아내도 버리고 하루종일 부모의 묘지 옆에 기거했다. 한번은 그가 무덤에서 5 ~ 6리 떨어진 곳에 소나무를 심은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사슴이 나타나 그것을 범하자 탄식하며 말했다.
"사슴조차 나를 헤아려주지 않는구나!"
그리고 다음 날, 맹수가 그 사슴을 공격해 숨통을 끊고 허자의 소나무 아래에 사슴의 시체를 놓아두었다. 허자는 이 또한 애석히 여겨 길가에 사슴을 묻고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사슴을 죽인 맹수가 나타나 허자 앞에서 자살하니, 허자는 또다시 탄식하면서 맹수도 묻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소나무는 다른 짐승들에 의해 파괴되는 일 없이 울창히 자라났다.

그렇게 20여 년을 지냈을 무렵, 허자는 재혼하여 새로운 처를 맞아들였음에도 그대로 묘지 옆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마치 살아있는 부모를 대하듯이 무덤을 관리했다. 그의 집 처마 밑에는 매와 꿩이 더불어 살았고, 그의 집 뜰에는 사슴과 맹수가 싸우지 않고 조화롭게 지냈다.

원강 연간(291년 ~ 299년), 군(郡)에서 효렴으로 천거하려 했으나, 허자는 평생토록 관직에 오를 뜻이 없어 응하지 않았다가 80세가 되던 해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지내던 곳을 가리켜 "효순리(孝順里)"라 명명했다.

함강 연간(335년 ~ 342년), 동양태수 장우(張虞)가 조정에 상소하여 허자의 효심과 절개를 밝히고 표창해주길 청했다. 이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허자를 널리 정표하고, 그 자손들의 조세와 부역을 감면시켜 주었다. 허자의 아들도 아버지처럼 효심이 깊어, 항상 허자의 초상화를 집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그 앞에 절을 올렸다고 한다.

3. 기타

  • 허자의 사슴 일화는 먼 훗날 조선 중종 대에 대사헌 윤세호(尹世豪)의 상소문에 짤막하게나마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