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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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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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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81818,#e5e5e5
이십사사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 송서
사마천 반고 범엽 진수 방현령 심약
남제서 양서 진서 위서 북제서 주서
소자현 요사렴 요사렴 위수 이백약 영호덕분
수서 남사 북사 구당서 신당서 구오대사
위징 이연수 이연수 장소원 구양수 설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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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 토크토아 토크토아 토크토아 송렴 장정옥
기타
동관한기 신원사 청사고
유진 커샤오민 자오얼쉰 등
}}}}}}}}}}}}}}} ||
진서
晉書
Book of Jin
저자 방현령
시기 7세기
언어 한문
권 수 130권
분량 200년 ~ 420년 (220년)
한헌제 12년 ~ 진공제 2년

1. 개요2. 편찬자3. 구성
3.1. <제기>(紀)3.2. <지>(志)3.3. <열전>(列傳)3.4. <재기>(戴記)
4. 평가
4.1. 호평4.2. 혹평
5. 여담6. 관련 고사성어

[clearfix]

1. 개요

晉書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권신 사마의의 시절부터 서진을 거쳐 동진 공제유유에 의해 동진이 멸망할 때까지의 사마진의 역사 기록을 담은 역사서로 이십사사 중의 하나다.

당나라의 제2대 황제였던 태종 이세민은 이전 시대 사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사서들을 모아 하내 사마씨의 진나라에 대한 정사를 새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따라서 646년 윤 3월 조서를 내려서 조정 신료들로 하여금 새로운 《진서》를 편찬하도록 했다. 작업은 당시 명재상인 방현령 등 3명이 감수하고 그 아래에 18명의 사관을 두어 분담해서 실행되었다. 방현령 등은 육조시대 제나라의 학자였던 장영서(臧榮緖, 415년~488년)의 저서인《진서》를 저본으로 하고, 다른 역사서를 참고로 하여 편찬을 실행했으며, 2년 후인 648년에 완성했다.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재기(載記)〉[1] 3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130권이다. 〈서례(敍例; 서문)〉, 〈목록〉이 1권씩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고조선제기(高祖宣帝紀)〉, 〈세조무제기(世祖武帝紀)〉, 〈육기육운전(陸機陸雲傳)〉, 〈왕희지전(王羲之傳)〉은 당태종이 직접 편찬에 관여했기에 '어찬'(御撰)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진나라에 대한 기록은 동진~남북조시대를 걸쳐서 여러 사람이 각각 저술한 18 가지의 《진서》및 《진기》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라졌고, 《태평어람》, 《세설신어》, 《삼국지》 주석에, 다른 진나라에 대한 기록 몇몇만이 인용되어 남아있다. 이로서 《진서》는 유일하게 온전히 현존하는 진나라의 기록에 대한 역사서다.

2. 편찬자

「正史類」稱:「《晉書》一百三十卷,房玄齡、褚遂良、許敬宗、來濟、陸元仕、劉子翼、令狐德棻、李義府、薛元超、上官儀、崔行功、李淳風、辛丘馭、劉引之、陽仁卿、李延壽、張文恭、敬播、李安期、李懷儼、趙弘智等修,而名為御撰。」
《신당서》 <예문지>

신당서》 <예문지>에 따르면 《진서》의 저자는 모두 21명이었다. 감수가 3명이었는데 방현령, 저수량, 허경종이 감수했으며, 천문, 율력, 5행의 <지>를 지은이는 이순풍이았다. 나머지 16명의 명단을 보면 영호덕분, 내제, 육원사, 유자익, 노승기, 이의부, 설원초, 상관의, 최행공, 신구어, 유인지, 양인경, 이연수, 장문공, 이안기, 경파, 이회엄, 조홍지 등이 참여했다. 또한 당 태종 이세민도 선제(사마의)·무제(사마염) 2기 및 육기(陸機)·왕희지(王羲之) 2전에 4편의 사론을 썼기 때문에 '어찬'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3. 구성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3.1. <제기>(紀)

진서(晉書) 제기 구성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권1 제기제1
帝紀第1
선제기
宣帝紀
사마의(司馬懿)
권2 제기제2
帝紀第2
경제문제기
景帝文帝紀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
권3 제기제3
帝紀第3
무제기
武帝紀
사마염(司馬炎)
권4 제기제4
帝紀第4
혜제기
惠帝紀
사마충(司馬衷)
권5 제기제5
帝紀第5
회제민제기
懷帝愍帝紀
사마치(司馬熾), 사마업(司馬鄴)
권6 제기제6
帝紀第6
원제명제기
元帝明帝紀
사마예(司馬睿), 사마소(司馬紹)
권7 제기제7
帝紀第7
성제강제기
成帝康帝紀
사마연(司馬衍), 사마악(司馬岳)
권8 제기제8
帝紀第8
목제애제폐제기
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司馬聃), 사마비(司馬丕) , 사마혁(司馬奕)
권9 제기제9
帝紀第9
간문제효무제기
簡文帝孝武帝紀
사마욱(司馬旭), 사마요(司馬曜)
권10 제기제10
帝紀第10
안제공제기
安帝恭帝紀
사마덕종(司馬德宗), 사마덕문(司馬德文) }}}}}}

3.2. <지>(志)

진서(晉書) 지 구성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권11 지제1
志第1
천문(天文)
권12 지제2
志第2
권13 지제3
志第2
권14 지제4
志第4
지리(地理)
권15 지제5
志第5
권16 지제6
志第6
율력(律歷)
권17 지제7
志第7
권18 지제8
志第8
권19 지제9
志第9
예(禮)
권20 지제10
志第10
권21 지제11
志第11
권22 지제12
志第12
악(樂)
권23 지제13
志第13
권24 지제14
志第14
직관(職官)
권25 지제15
志第15
여복(輿服)
권26 지제16
志第16
식화(食貨)
권27 지제17
志第17
오행(吳行)
권28 지제18
志第18
권29 지제19
志第19
권30 지제20
志第20
형법(刑法) }}}}}}

3.3. <열전>(列傳)

진서(晉書) 열전 구성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권31 열전제1
列傳第1
후비상
后妃上
선목장황후(宣穆張皇后), 경회하후황후(景懐夏侯皇后), 경헌양황후(景獻羊皇后), 문명왕황후(文明王皇后), 무원양황후(武元楊皇后), 무도양황후(武悼楊皇后), 좌귀빈(左貴嬪), 호귀빈(胡貴嬪), 제갈부인(諸葛夫人), 혜가황후(惠賈皇后), 혜양황후(惠羊皇后), 사부인(謝夫人), 회왕황태후(懷王皇太后), 원하후태비(元夏侯太妃)
권32 열전제2
列傳第2
후비하
后妃下
원경우황후(元敬虞皇后), 명목유황후(明穆庾皇后), 성공두황후(成恭杜皇后), 강헌저황후(康獻褚皇后), 목장하황후(穆章何皇后), 애정왕황후(哀靖王皇后), 폐제효유황후(廢帝孝庾皇后), 간문선정태후(簡文宣鄭太后), 간문순왕황후(簡文順王皇后), 효무문이태후(孝武文李太后), 효무정왕황후(孝武定王皇后), 안덕진태후(安德陳太后), 안희왕황후(安僖王皇后), 공사저황후(恭思褚皇后)
권33 열전제3
列傳第3
왕상등전
王祥等傳
왕상(王祥), 정충(鄭沖), 하증(何曾), 석포(石苞)
권34 열전제4
列傳第4
양호등전
羊祜等傳
양호(羊祜), 두예(杜預)
권35 열전제5
列傳第5
진건등전
陳騫等傳
진건(陳騫), 배수(裴秀)
권36 열전제6
列傳第6
위관등전
衛瓘等傳
위관(衛瓘), 장화(張華)
권37 열전제7
列傳第7
종실
宗室
안평헌왕 부(安平獻王孚), 팽성목왕 권(彭城穆王權), 고밀문헌왕 태(高密文獻王泰), 범양강왕 수(范陽康王綏), 제남혜왕 수(濟南惠王遂), 초강왕 손(譙剛王遜), 고양왕 목(高陽王睦), 임성경왕 능(任城景王陵)
권38 열전제8
列傳第8
선오왕문육왕전
宣五王文六王傳
평원왕 간(平原王榦), 낭야왕 주(琅邪王伷), 쳥혜정후 경(清惠亭侯京), 부풍왕 준(扶風王駿), 양왕 융(梁王肜), 제왕 유(齊王攸), 성양왕 조(城陽王兆), 요동왕 정국(遼東王定國), 광한왕 광덕(廣漢王廣徳), 악안왕 감(樂安王鑒), 악평왕 연조(樂平王延祚)
권39 열전제9
列傳第9
왕침등전
王沈等傳
왕침(王沈), 순의(荀顗), 순욱(荀勗), 풍담(馮紞)
권40 열전제10
列傳第10
가충등전
賈充等傳
가충(賈充), 양준(楊駿)
권41 열전제11
列傳第11
위서등전
魏舒等傳
위서(魏舒), 이희(李憙), 유식(劉寔), 고광(高光)
권42 열전제12
列傳第12
왕혼등전
王渾等傳
왕혼(王渾), 왕준(王濬), 당빈(唐彬)
권43 열전제13
列傳第13
산도등전
山濤等傳
산도(山濤), 왕융(王戎), 악광(樂廣)
권44 열전제14
列傳第14
정무등전
鄭袤等傳
정무(鄭袤), 이윤(李胤), 노흠(盧欽), 화표(華表), 석감(石鑒), 온선(溫羨)
권45 열전제15
列傳第15
유의등전
劉毅等傳
유의(劉毅), 화교(和嶠), 무해(武陔), 임개(任愷), 최홍(崔洪), 곽혁(郭奕), 후사광(侯史光), 하반(何攀)
권46 열전제16
列傳第16
유송등전
劉頌等傳
유송(劉頌), 이중(李重)
권47 열전제17
列傳第17
부현전
傅玄傳
부현(傅玄)
권48 열전제18
列傳第18
상웅등전
向雄等傳
상웅(向雄), 단작(段灼), 염찬(閻纘)
권49 열전제19
列傳第19
완적등전
阮籍等傳
완적(阮籍), 혜강(嵇康), 상수(向秀), 유령(劉伶), 사곤(謝鯤), 호무보지(胡毋輔之), 필탁(畢卓), 왕니(王尼), 양만(羊曼), 광일(光逸)
권50 열전제20
列傳第20
조지등전
曹志等傳
조지(曹志), 유준(庾峻), 곽상(郭象), 유순(庾純), 진수(秦秀)
권51 열전제21
列傳第21
황보밀등전
皇甫謐等傳
황보밀(皇甫謐), 지우(摯虞), 속석(束皙), 왕접(王接)
권52 열전제22
列傳第22
극선등전
郤詵等傳
극선(郤詵), 완충(阮种), 화담(華譚), 원보(袁甫)
권53 열전제23
列傳第23
민회태자전
愍懷太子傳
민회태자(愍懷太子)
권54 열전제24
列傳第24
육기등전
陸機等傳
육기(陸機), 육운(陸雲)
권55 열전제25
列傳第25
하후담등전
夏侯湛等傳
하후담(夏侯湛), 반악(潘岳), 장재(張載)
권56 열전제26
列傳第26
강통등전
江統等傳
강통(江統), 손초(孫楚)
권57 열전제27
列傳第27
나헌등전
羅憲等傳
나헌(羅憲), 등수(滕脩), 마륭(馬隆), 호분(胡奮), 도황(陶璜), 오언(吾彦), 장광(張光), 조유(趙誘)
권58 열전제28
列傳第28
주처등전
周處等傳
주처(周處), 주방(周訪)
권59 열전제29
列傳第29
여남왕량등전
汝南王亮等傳
여남왕 량(汝南王亮), 초왕 위(楚王瑋), 조왕 윤(趙王倫), 제왕 경(齊王冏), 장사왕 예(長沙王乂), 성도왕 영(成都王潁), 하간왕 옹(河間王顒), 동해왕 월(東海王越)
권60 열전제30
列傳第30
해계등전
解系等傳
해계(解系), 손기(孫旂), 맹관(孟觀), 견수(牽秀), 무파(繆播), 황보중(皇甫重), 장보(張輔), 이함(李含), 장방(張方), 염정(閻鼎), 색정(索靖), 가필(賈疋)
권61 열전제
列傳第31
주준등전
周浚等傳
주준(周浚), 성공간(成公簡), 구희(苟晞), 화일(華軼), 유교(劉喬)
권62 열전제32
列傳第32
유곤등전
劉琨等傳
유곤(劉琨), 조적(祖逖)
권63 열전제33
列傳第33
소속등전
邵續等傳
소속(邵續), 이구(李矩), 단필제(段匹磾), 위준(魏浚), 곽묵(郭默)
권64 열전제34
列傳第34
무십삼왕원사왕간문삼자전
武十三王元四王簡文三子傳
비릉왕 궤(𣬈
陵王軌), 진왕 간(秦王柬), 성양왕 경(城陽王景), 동해왕 지(東海王祗), 시평왕 유(始平王裕), 회남왕 윤(淮南王允), 대왕 연(代王演), 신도왕 해(新都王該), 청하왕 하(淸河王遐), 여음왕 모(汝陰王 謨), 오왕 안(吳王晏), 발해왕 회(渤海王恢), 낭야왕 부(琅邪王裒), 동해왕 충(東海王沖), 무릉왕 희(武陵王晞), 낭야왕 환(琅邪王煥), 회계사세자(會稽思世子), 임천왕 욱(臨川王郁), 회계왕 도자(會稽王道子)
권65 열전제35
列傳第35
왕도전
王導傳
왕도(王導)
권66 열전제36
列傳第36
유홍등전
劉弘等傳
유홍(劉弘), 도간(陶侃)
권67 열전제37
列傳第37
온교등전
溫嶠等傳
온교(溫嶠), 치감(郗鑒)
권68 열전제38
列傳第38
고영등전
顧榮等傳
고영(顧榮), 기첨(紀瞻), 하순(賀循), 양방(楊方), 설겸(薛兼)
권69 열전제39
列傳第39
유외등전
劉隗等傳
유외(劉隗), 조협(刁協), 대약사(戴若思), 주의(周顗)
권70 열전제40
列傳第40
응첨등전
應詹等傳
응첨(應詹), 감탁(甘卓), 등건(鄧騫), 변곤(卞壼), 유초(劉超), 종아(鍾雅)
권71 열전제41
列傳第41
손혜등전
孫惠等傳
손혜(孫惠), 웅원(熊遠), 왕감(王鑒), 진군(陳頵), 고숭(高崧)
권72 열전제42
列傳第42
곽박등전
郭璞等傳
곽박(郭璞), 갈홍(葛洪)
권73 열전제43
列傳第43
유량전
庾亮傳
유량(庾亮)
권74 열전제44
列傳第44
환이전
桓彝傳
환이(桓彝)
권75 열전제45
列傳第45
왕담등전
王湛等傳
왕담(王湛), 순숭(荀崧), 범왕(范汪), 유담(劉惔), 장빙(張憑), 한백(韓伯)
권76 열전제46
列傳第46
왕서등전
王舒等傳
왕서(王舒), 왕이(王廙), 우담(虞潭), 고중(顧衆), 장개(張闓)
권77 열전제47
列傳第47
육엽등전
陸曄等傳
육엽(陸曄), 하충(何充), 저삽(褚翜), 채모(蔡謨), 제갈회(諸葛恢), 은호(殷浩)
권78 열전제48
列傳第48
공유등전
孔愉等傳
공유(孔愉), 정담(丁潭), 장무(張茂), 도회(陶回)
권79 열전제49
列傳第49
사상등전
謝尙等傳
사상(謝尙), 사안(謝安)
권80 열전제50
列傳第50
왕희지전
王羲之傳
왕희지(王羲之)
권81 열전제51
列傳第51
왕손등전
王遜等傳
왕손(王遜), 채표(蔡豹), 양감(羊鑒), 유윤(劉胤), 환선(桓宣), 주사(朱伺), 모보(毛寶), 유하(劉遐), 등악(鄧嶽), 주서(朱序)
권82 열전제52
列傳第52
진수등전
陳壽等傳
진수(陳壽), 왕장문(王長文), 우부(虞溥), 사마표(司馬彪), 왕은(王隠), 우예(虞預), 손성(孫盛), 간보(干寶), 등찬(鄧粲), 사침(謝沈), 습착치(習鑿齒), 서광(徐廣)
권83 열전제53
列傳第53
고화등전
顧和等傳
고화(顧和), 원괴(袁瓌), 강유(江逌), 차윤(車胤), 은의(殷顗), 왕아(王雅)
권84 열전제54
列傳第54
왕공등전
王恭等傳
왕공(王恭), 유해(庾楷), 유뇌지(劉牢之), 은중감(殷仲堪), 양전기(楊佺期)
권85 열전제55
列傳第55
유의등전
劉毅等傳
유의(劉毅), 제갈장민(諸葛長民), 하무기(何無忌), 단빙지(檀憑之), 위영지(魏詠之)
권86 열전제56
列傳第56
장궤전
張軌傳
장궤(張軌)
권87 열전제57
列傳第57
양무소왕전
涼武昭王傳
양무소왕(涼武昭王)
권88 열전제58
列傳第58
효우전
孝友傳
이밀(李密), 성언(盛彥), 하방(夏方), 왕부(王裒), 허자(許孜), 유곤(庾袞), 손구(孫晷), 안함(顏含), 유은(劉殷), 왕연(王延), 왕담(王談), 상우(桑虞), 하기(何琦), 오규(吳逵)
권89 열전제59
列傳第59
충의전
忠義傳
혜소(嵇紹), 왕표(王豹), 유침(劉沈), 국윤(麴允), 가혼(賈渾), 왕육(王育), 위충(韋忠), 신면(辛勉), 유민원(劉敏元), 주해(周該), 환웅(桓雄), 한계(韓階), 주기(周崎), 이웅(易雄), 악도융(樂道融), 우괴(虞悝), 심경(沈勁), 길읍(吉挹), 왕량(王諒), 송구(宋矩), 차제(車濟), 정목(丁穆), 신공정(辛恭靖), 나기생(羅企生), 장의(張禕)
권90 열전제60
列傳第60
양리전
良吏傳
노지(魯芝), 호위(胡威), 두진(杜軫), 두윤(竇允), 왕굉(王宏), 조터(曹攄), 반경(潘京), 범귀(范晷), 정소(丁紹), 교지명(喬智明), 등유(鄧攸), 오은지(吳隱之)
권91 열전제61
列傳第61
유림전
儒林傳
범평(范平), 문립(文立), 진소(陳邵), 우희(虞喜), 유조(劉兆), 범육(氾毓), 서묘(徐苗), 최유(崔遊), 범륭(范隆), 두이(杜夷), 동경도(董景道), 속함(續咸), 서막(徐邈), 공연(孔衍), 범선(范宣), 위소(韋謏), 범홍지(范弘之), 왕환(王歡)
권92 열전제62
列傳第62
문원전
文苑傳
응정(應貞), 성공수(成公綏), 좌사(左思), 조지(趙至), 추담(鄒湛), 조거(棗據), 저도(褚陶), 왕침(王沈), 장한(張翰), 유천(庾闡), 조비(曹毗), 이충(李充), 원굉(袁宏), 복도(伏滔), 나함(羅含), 고개지(顧愷之), 곽징지(郭澄之)
권93 열전제63
列傳第63
외척전
外戚傳
양수(羊琇), 왕순(王恂), 양문종(楊文宗), 양현지(羊玄之), 우예(虞豫), 유침(庾琛), 두예(杜乂), 저부(褚裒), 하준(何準), 왕몽(王濛), 왕하(王遐), 왕온(王蘊), 저상(褚爽)
권94 열전제64
列傳第64
은일전
隠逸傳
손등(孫登), 동경(董京), 하통(夏統), 주충(朱沖), 범찬(范粲), 노승(魯勝), 동양(董養), 곽원(霍原), 곽기(郭琦), 오조(伍朝), 노포(魯褒), 범등(氾騰), 임욱(任旭), 곽문(郭文), 공장(龔壯), 맹루(孟陋), 한적(韓績), 초수(譙秀), 적탕(翟湯), 곽번(郭翻), 신밀(辛謐), 유린지(劉驎之), 삭습(索襲), 양가(楊軻), 공손봉(公孫鳳), 공손영(公孫永), 장충(張忠), 석원(石垣), 송섬(宋纖), 곽하(郭荷), 곽우(郭瑀), 기가(祈嘉), 구형선생(瞿硎先生), 사부(謝敷), 대규(戴逵), 공현지(龔玄之), 도담(陶淡), 도잠(陶潛)
권95 열전제65
列傳第65
예술전
藝術傳
진훈(陳訓), 대양(戴洋), 한우(韓友), 순우지(淳于智), 보웅(步熊), 두불건(杜不愆), 엄경(嚴卿), 외소(隗炤), 복후(卜珝), 포정(鮑靚), 오맹(吳猛), 행령(幸靈), 불도징(佛圖澄), 마유(麻襦), 선도개(單道開), 황홍(黃泓), 색담(索紞), 맹흠(孟欽), 왕가(王嘉), 승려 섭(僧 涉) 곽논(郭黁), 구마나습(鳩摩羅什), 승려 담곽(僧 曇霍) 태산(台山)
권96 열전제66
列傳第66
열녀전
列女傳
신헌영(辛憲英), 엄헌(嚴憲), 종염(鍾琰), 조씨(曹氏)[2], 왕혜풍(王惠風), 석씨(石氏)[3], 담씨(湛氏)[4], 신씨(辛氏)[5], 두씨(杜氏)[6], 정부인 손씨(孫氏), 이락수(李絡秀), 순관(荀灌), 사도온(謝道韞), 용린(龍憐), 유아(劉娥), 미인 염씨(閻氏)[7], 소혜(蘇惠), 전진의 황후 모씨(毛氏), 단원비(段元妃), 후량의 황후 양씨(楊氏), 서량의 태후 윤씨(尹氏)
권97 열전제67
列傳第67
사이전
四夷傳
부여(夫餘国), 마한(馬韓), 진한(辰韓), 숙신(肅慎氏), (倭), 토욕혼(吐谷渾), 언기국(焉耆国), 구자국(亀茲国), 대완국(大宛国), 강거국(康居国), 대진국(大秦国), 임읍국(林邑国), 부남국(扶南国), 흉노(匈奴)
권98 열전제68
列傳第68
왕돈등전
王敦等傳
왕돈(王敦), 환온(桓溫)
권99 열전제69
列傳第69
환현등전
桓玄等傳
환현(桓玄), 변범지(卞範之), 은중문(殷仲文)
권100 열전제70
列傳第70
왕미등전
王彌等傳
왕미(王彌), 장창(張昌), 진민(陳敏), 왕여(王如), 두증(杜曾), 두도(杜弢), 왕기(王機), 조약(祖約), 소준(蘇峻), 손은(孫恩), 노순(盧循), 초종(譙縱) }}}}}}

3.4. <재기>(戴記)

진서(晉書) 재기 구성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권101 재기제1
載記第1
유원해(劉元海)
권102 재기제2
載記第2
유총(劉聰)
권103 재기제3
載記第2
유요(劉曜)
권104 재기제4
載記第4
석륵(石勒)
권105 재기제5
載記第5
권106 재기제6
載記第6
석계룡(石季龍)
권107 재기제7
載記第7
권108 재기제8
載記第8
모용외(慕容廆)
권109 재기제9
載記第9
모용황(慕容皝)
권110 재기제10
載記第10
모용준(慕容俊)
권111 재기제11
載記第11
모용위(慕容偉)
권112 재기제12
載記第12
부홍(苻洪), 부건(苻健), 부생(苻生)
권113 재기제13
載記第13
부견(苻堅)
권114 재기제14
載記第14
권115 재기제15
載記第15
부비(苻丕), 부등(苻登)
권116 재기제16
載記第16
요익중(姚弋仲), 요양(姚襄), 요장(姚萇)
권117 재기제17
載記第17
요흥(姚興)
권118 재기제18
載記第18
권119 재기제19
載記第19
요홍(姚泓)
권120 재기제20
載記第20
이특(李特), 이류(李流)
권121 재기제21
載記第21
이웅(李雄), 이반(李班), 이기(李期), 이수(李壽), 이세(李勢)
권122 재기제22
載記第22
여광(呂光), 여찬(呂纂), 여륭(呂隆)
권123 재기제23
載記第23
모용수(慕容垂)
권124 재기제24
載記第24
모용보(慕容宝), 모용성(慕容盛), 모용희(慕容熙), 모용운(慕容雲)
권125 재기제25
載記第25
걸복국인(乞伏國仁), 걸복건귀(乞伏乾歸), 걸복치반(乞伏熾磐), 풍발(馮跋)
권126 재기제26
載記第26
독발오고(禿髪烏孤), 독발리록고(禿髪利鹿孤), 독발녹단(禿髪傉檀)
권127 재기제27
載記第27
모용덕(慕容徳)
권128 재기제28
載記第28
모용초(慕容超)
권129 재기제29
載記第29
저거몽손(沮渠蒙遜)
권130 재기제30
載記第30
혁련발발(赫連勃勃) }}}}}}

4. 평가

《진서》(晋書)의 구성과 특징. 당대(唐代) 방현령(房玄齡) 등이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서진(西晋) 4세(265~316) 52년간, 동진(東晋)의 11세(317~418) 102년간 두 왕조와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역사를 편찬, 정관(貞觀) 22년(646)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진(晋)나라의 기록은 이른바 18가 《진서》(十八家晋書)를 필두로 20여 종(二十餘種)이 있으나 모두 불충분한 것으로 보고, 당시 저명한 문인들이 분할 집필(分擔執筆)하고 장영서(臧英緖)의 《晋書》110권을 중심으로 여러 책들을 참조하여 만든 관찬서이다. 이 책은 종종 《태종어찬》(太宗御撰)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선제(宣帝)·무제(武帝) 두 본기(本紀)와 육기(陸機)·왕희지(王羲之) 두 전(傳)의 논(論)을 태종(太宗)이 직접 썼기 때문이다. 집필자는 18인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분담 집필은 이제까지의 개인이 편찬한 정사와 달라 이후 분업적 정사(正史) 편찬 방식의 선례가 되었다. 구성은 <본기>(本紀) 10권[8],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재기>(載記) 30권의 총 130권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중 5호16국(五胡十六國)의 기록인 <재기>(載記)는 산일된 최홍(崔鴻)의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를 저본으로 하여 쓰여진 것으로 다른 정사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어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이후 제가(諸家)의 《진서》(晋書)는 점차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진사(晋史)에 관해서는 이 책이 가장 완비된 기록이다. 그 내용이 분담 집필 때문에 통일되지 않거나 모순되기도 하지만 기존의 여러 사서를 특정의 사관에 구애받지 않고, 총망라하여 이용한 것을 볼 때 진(晋)나라의 멸망 이후 200년 이상 지난 뒤에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상세하다. 다만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집필했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보다 전기(傳奇), 소설류(小說類)에서 소재를 찾은 기사가 적지 않았음이 지적된다.
출처

4.1. 호평

《진서》가 수찬(修撰)되었던 시기엔 진대의 문헌이나 1차 사료가 수없이 많이 있었고, 역대사 외에도 많은 량의 조령, 의주(儀注), 기거주(起居注), 문집 등이 있었다. 《진서》의 편찬자들은 대부분 남제의 학자였던 장영서(臧榮緖, 415년~488년)의 사찬인《진서》(晉書)[9]를 바탕으로 하고, 여러 기록들을 참조하여 편찬했다.

세간의 악평과 달리 현존하는 《진서》는 후대의 남북조
관련 사서들과 다르게 주요 내용이 산일된 적도 없으며, 사마진의 역사 전체에 대한 기재가 완비되어 있다. 《구당서》의 〈방현령전〉에는 "《진서》는 장영서의 《진서》를 주로 삼아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자세히 쓰여져 있으나 편찬한 사관은 문학인이 많았기 때문에, 속이거나 틀리거나 자질구레한 일과 널리 이상한 말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곳곳에서 평론하며 화려함을 다투었으나, 사실을 살피는 것을 구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학자들에게 몹시 비웃음을 받았다."라고 서술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악평에서도 인정했듯이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자세히 쓰여진 사서"인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전대의 기록을 다룬 정사인 《삼국지》가 지나치게 내용이 간략해 유송때의 배송지가 주석으로 "자질구레한 일과 널리 이상한 말을 모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을 감안했을때 여기저기서 1차 사료를 많이 보존한 《진서》의 서술 태도는 현대의 역사학자들 입장에선 많은 도움이 된다.

당나라 이전의 각 진사는, 서진의 역사만 기록하거나, 양진의 역사를 병기했지만, 오호십육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모두 완벽하지 않은 진사였던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서》가 수찬(修撰)되었던 시기엔 진대의 문헌이나 1차 사료가 수없이 많이 있었고, 역대사 외에도 많은 량의 조령, 의주(儀注), 기거주(起居注), 문집 등이 있었는데 현존하고 있는 《진서》는 이것에 대한 종합본이다. 때문에 청나라때의 역사학자였던 조익은 "당나라 초에 《진서》를 편찬했는데, 장영서본(臧本)을 위주로 했고, 여러 학자들이 아울러서 조사하는 것이 이루어졌다. 현재 《진서》, 《송서》 등 책의 <열전>은 여러 학자들이 기재한 것이며, 《진서》는 대략 수십가지 자료를 가지고 저술되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진서》는 옛 사서의 부족분을 보충했다. 《진서》는 당나라 이전의 각 진사에 비해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고 광범위하며, 기전에 수록된 대량의 조령(詔令), 주소(奏疏, 상소), 서찰 및 문장이 장황하지만 다방면의 역사를 담고 있어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예컨데 《진서》 이전의 시기를 서술한 《삼국지》는 분명 명저였지만 <본기>와 <열전>만 있있고, <지>(志)가 없었다.

반면에《진서》의 <지>는 삼국시대부터 묘사해 삼국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조위가 일으킨 둔전제와 관련하여 수리를 건설해 농업을 발전시키고, 북서쪽을 경영하는 모습 및 진나라가 일으킨 점전제에 대한 많은 서술이 있다. 《진서의》 <식화지>는 후한 및 삼국시대의 경제 발전을 설명하고 있으며, <여복지>(輿服志)와 <예지>(禮志) 및 <악지>(樂志)는 위진남북조시대 지배계급이 의례의 복식을 숭상하는 풍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고, 이로써 《후한서》와 《삼국지》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

《진서》 <지리지>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허나 《진서》 <지리지>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내용 자체가 다 오류가 있다는 건 아니다. 중화서국 표점본 《진서》를 교감한 학자들이 쓴 출판 설명에 의하면 《진서》의 <지리지>가 가진 문제는 서진의 정황만 자세하고, 영가의 난 이후 동진시대의 지명(地名), 관명(官名), 관직(官職), 시기(時期), 지점(地點)의 착오와 불일치가 많은 것이라고 했다.[10] 때문에 청나라의 제6대 황제인 고종 건륭제의 치세때 《동진강역지》(東晉疆域志)라는 책을 쓴 홍량길(洪亮吉)이 서문에서 말하기를, "역대 정사의 《지리지》에는 각자 득실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착오가 많기로는 오직 《진서》< 지리지> 뿐이다. 이 책은 태시(泰始) 및 태강(太康)만 자세하고, 영가(永嘉) 이후에는 몇 마디 말을 주워 모은 것이기 때문에 서진(西晉)의 <지리지>라고 할 수 있는 만큼, 동진(東晉)의 강역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동진의 <지리지>를 따로 편찬하는 이유를 들었다.[11] 즉 《진서》 <지리지>의 문제는 <지리지> 전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성격 자체가 '삼국통일 이후 통일제국 서진의 <지리지>'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로, <지>가 아예 없는 전대의 사서인 《삼국지》 자체의 보완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다. 다만 동진 시기는 이후 다른 학자들이 편수한 동진의 <지리지>나 《송서》의 <지리지>를 살펴볼 필요성은 있다.[12]

당대의 1차 사료를 망라한 풍부한 기록을 자랑하는 만큼 《진서》는 <재기>(载記) 30권에서 서진 붕괴 이후 화북에서 난립하던 5호 16국의 역사도 정리하여 후대의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5호 16국의 역사서로는 《십육국춘추》가 있었지만 《진서》와 《십육국춘추》가 다루는 시기가 거의 겹치는 만큼,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이 시기를 연구하면서 《진서》의 <재기> 역시 신뢰도를 가지며 인용하고 있다. 《진서》에는 <재기> 이외에도 <열전> 부분에 16국 인물들에 관련된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진서》는 동시기 화북에 존재한 이민족 정권의 역사도 기록함으로서 혼란한 시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종합하자면 《진서》는 하내 사마씨의 진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할 동안 중국의 수많은 사료를 보존한 사서로써 위진남북조시대 전기(前期)에 대한 상세한 사료로써의 가치가 매우 높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진서》에 대해 "당대를 다루고 있는 다양한 사료와 잔존하는 기록을 망라하여 고증해 모았다"라며 《진서》의 풍부한 사료 채집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4.2. 혹평

21명이나 되는 학자들이 총괄자 없이 제각각 집필한 탓인지 엄밀한 고증을 거치지 않아 전후 기록이나 전기간 기록들 사이에 모순된 서술이 있다는 평가가 있다. 청나라때의 역사학자였던 장증은 저서인 《독사거정》(讀史擧正)에서 《진서》의 오류와 틀린 것 450여 부분을 찾아냈고, 청대에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攷異)를 지은 전대흔은 "《진서》는 집필하고 편집한 것이 잘못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이 책을 보완한 것으로 《진서음의》(晉書音義)(3권), 중화민국 시대인 1928년 오사감(吳士鑑)과 유승간(劉承幹)이 각종 자료를 주석으로 추가해 지은 《진서각주》(晉書斠注)(130권) 등이 있다.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는 《진서》가 《어림》(語林), 《세설신어》(世說新語), 《유명록》(幽明錄), 《수신기》(搜神記)와 같은 책에 기록된 괴이한 내용까지 수록한 것을 지적하고, "분량만 많으면 무조건 좋은 자료이며, 수집이 넓고 좋다고 하는 태도다. (이런 건) 소인은 기쁘게 할 수 있겠지만, 군자가 비웃고 있다.", "사료의 선별 취득을 중시하지 않고, 문자의 화려함만 추구한다."라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다만 유지기의 이러한 혹평은 유지기 본인이 사찬 사서의 예찬론자였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진서》가 각종 당대의 다양한 사료를 인용한 면은 분명히 칭찬받을만 하나 부정적인 면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진서》는 당 태종의 명령으로 인해 뛰어난 사관들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씨의 진나라를 폄하할 목적으로 지나치게 《세설신어》류의 세어 소설을 많이 인용했는데, 좀 과장해서 말해, 이것은 오늘날로 보면 타블로이드지의 기사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역사서에 집어넣는 격과 같다. 때문에 《진서》에서 지나치게 폄하하는 일화가 적혀 있는데도 실제 평가는 높았던 인물들의 경우엔 평가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대 평가의 허상 외에도 《진서》의 저자들이 진나라 시대 인물들을 폄훼하거나 할 목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일화를 집어넣어 당대 평가와 일화를 유리시킨 경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진서》를 비판하는 인물들이 언급했듯이 진나라의 검증된 기록인 기거주나 공문서들도 《진서》 편찬 당시엔 충분히 많았는데 이런 기록을 사료의 풍부함을 이유로 축약할 이유는 사실 없는 것이고, 풍부한 채록을 목적으로 했다면 이런 기록들은《진서》의 내용을 불리는 한이 있어도 더 넣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왕 다양한 사료를 넣으려고 했다면 기거주 등 검증된 사료를 우선했어야 했다'는 유지기의 비판 자체는 딱히 틀리다고는 할 수 없는 편이다. 이 때문에 《진서》는 편찬자들의 객관적이고 엄밀한 사료 비판이 이루어지지는 못한 편이라 사마씨 집권 당시의 프로파간다와 사마진 멸망 이후 사마씨를 깎아내리는 프로파간다가 섞인 괴이한 사서가 되어버려, 24사 중에서도 유독 《송사》와 함께 비판이 많은 편에 속하는 정사이다.

또한 한국인의 입장에서 문제가 있다면, 고구려가 존속하던 시기를 다룬 정사가 외국전을 쓸 때 고구려를 '〈고구려전〉'이든 고구려 후기의 이름인 '〈고려전〉'이든 주요 외국전으로 집어넣은 반면에 《진서》는 유일하게 고구려가 있었던 시기 외국전이 있는 정사 중에선 〈고구려전〉, 〈고려전〉이 없다는 것이다.[13] 통틀어 〈동이열전〉으로 넣어도 고구려 관련 내용은 보통 넣는 법인데 《진서》에는 〈동이열전〉에 고구려에 대한 내용이 아예 없다. 뭐 굳이 사서를 만들 때 외국전을 넣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태종 이세민이 정권 초기에 만들었던 사서들, 특히《수서[14]에는 '〈고려전〉'을 넣고 수양제의 패배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면서, 본인이 고구려에게 패배하고 생애 마지막에 편찬한 사서인 《진서》에 '〈고구려전〉' 단독 입전이나 〈동이열전〉에 고구려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은[15] 고구려에서 퇴각한 태종 본인의 사감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다.[16] 태종 자신이 집권 당시에 만들어진 사서의 내용에 많이 개입하곤 했었던 군주란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사실 모순된 기록에 대한 비판을 《진서》만이 오로지 받는 것은 억울한 점이, 사찬 정사인 《사기》나《삼국지》 에서도 기•전간에 서로 모순된 기록들이 나타나므로《진서》 만의 잘못은 아니다. 원래 고대 기록이 다들 그렇듯이 《진서》 역시 여러 사람이 쓴 수많은 진나라 사료를 토대로 편찬된 것이었기 때문에 원본인 1차 사료를 작성한 사람에 따라 모순된 기록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 이런 오류 교감은 비단 《진서》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중국에서는 예전부터 《진서》 말고도 24사 전체에 대한 다양한 보충 주석들과 오류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서》에 오류가 있다고 하여 《진서》자체만의 문제로 몰고 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만 이전의 기록들은 개인이 작성한 사찬 사서이며,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문학적인 윤색이 더해진 《사기》 같은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문학과 역사서의 차이가 부정확한 시기에 작성된 사서도 있다.[17] 반면 그로부터 수백년 뒤에 작성된 《진서》는 최초의 관찬 사서로서 그나마 체계적인 사서 편찬구조를 처음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따라서 무조건 이전의 사찬 사서와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5. 여담

  • 당나라 초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나라 황제들의 이름을 피휘했다. 예컨대 당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휘하느라 공손연을 공손문의(公孫文懿)로 표기했다.
  • 육조시대를 다루는 《송서》, 《남제서》, 《양서》, 《진서》, 《남사》는 유독 중국의 여느 정사에 비해서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정사 삼국지》나 《후한서》 같은 비슷한 시대를 다룬 다른 기록 같으면 성씨와 아버지가 누군지만 기록에 남았을 황후들의 이름이 《진서》에서는 본명으로 많이 남기도 했다. 당나라 시기에 쓰여진 《진서》도 이런 전례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삼국지》 관련 컨텐츠에 종종 나오는 장춘화, 왕원희, 양휘유, 양염 등이다. 흔히 창작물에서 위•촉•오 여인들의 이름으로 쓰이는 장성채, 견희 등은 실제로는 성씨만 기록에 남아 있고, 이름은 후대에 임의로 붙인 것인 반면, 위와 같이 《진서》에 실린 여인들은 전원 본명이 맞다. 당장 나무위키 문서들만 봐도 삼국시대 황제들의 황후들은 성씨만 남아있는 것이 많은 반면, 남조시대 황제들의 문서들을 찾아보면 황후들의 휘가 기록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이 책을 완성한 직후인 648년 신라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18] 그가 당나라의 인재 교육 체계를 참고하기 위해 국자감 견학을 요청하자 김춘추의 관심사를 안 태종 이세민은 본인이 직접 지은 비문들과 함께 《진서》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제 막 발행한 신간 도서를 저자로부터 직접 받은 셈이었다.

6. 관련 고사성어



[1] 여러 나라의 사정을 기록한 것. 《진서》에서는 5호 16국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2] 서진의 태상 정무의 처.[3] 서진 시기 정씨 가문의 정휴(鄭休)의 처[4] 동진의 태위 도간의 모친[5] 서진의 산기상시 양위(梁緯)의 처[6] 서진의 익주별가 허연(許延)의 처[7] 전량의 군주 장천석의 첩.[8] 서진(西晋) 5권, 동진(東晋) 5권[9]수서》 <경적지>에 따르면 '《진서》 110권이 있는데 남제(齊)의 서주 주부(徐州 主薄) 장영서가 사찬했다'고 했다.[10] 방현령 등찬, 《진서》(晉書), 중화서국 , 출판 설명, 1~5[11] 화림보, 《중국지명학원류》(中國地名學源流), 호남인민출판사, 2002년, 354쪽 참조[12] 사실 이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지>나 <표>가 없었던 《삼국지》가 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삼국지》의 본전이 예로부터 단점으로 지적받은 것이 기록이 너무 간소해서 빠뜨린 것이 많다는 것이었다.[13]한서》에도 고구려 관련 내용이 없기는 하지만, 중국 왕조들이 고구려와 접촉하기 시작한 때가 왕망신나라 때라서 관련 내용도 《후한서》부터 정리한다.[14] 《수서》 〈양제본기〉와 〈고려전〉, 고구려에 패배한 장수들의 주요 열전은 태종 이세민의 집권 중반인 636년에 만들어졌다.[15] 사마진이 고구려와 접촉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한나라의 고토인 한사군을 최종적으로 상실한 때가 서진 멸망 당시 고구려의 미천왕이 행한 공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중국 입장에서도 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16] 이와는 별개로 어쨌든 사마진에 대한 당대 기록의 총합이었므로 《진서》 내에 고구려에 대한 기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총체적으로 사마진 당시의 고구려가 어땠는지 설명하는 파트가 없어서 문제일 뿐이다.[17] 특히 《사기》의 경우엔 전국시대 관련 기록이 후대의 1차 사료 발굴로 인해 오류가 매우 많은 것이 증명되었다.[18]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승하한 654년에 왕으로 추대되며, 648년 당시는 신라 국왕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