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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 선제의 황후 선목황후 | 宣穆皇后 | |||
출생 | 189년 | ||
후한 사례 하내군 평고현 (現 허난성 자오쭤시 원현) | |||
사망 | 247년 4월 (향년 58세) | ||
조위 사례 하내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 고원릉(高原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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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춘화(春華) | ||
부모 | 부친 장왕(張汪) 모친 하내 산씨 | ||
배우자 | 고조 선황제 | ||
자녀 | 3남 1녀 | ||
작호 | 광평현군(廣平縣君) → 왕비(王妃) → 황후(皇后) | ||
시호 | 광평현군(廣平縣君) → 선목비(宣穆妃) → 선목황후(宣穆皇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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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조위의 여성으로 아버지는 장왕,[1] 어머니는 하내 산씨다.[2] 사마의의 아내이자 사마사, 사마소, 사마간, 남양공주의 어머니로 사례 하내군 평고현 사람.2. 생애
아버지 장왕은 조위의 속읍령(粟邑令)이었기 때문에 집안 사정이 평균 이상이었다. 남편 사마의보다 10살 어렸으며, 어려서부터 덕행이 있었고 지식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언제 사마의와 결혼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후 여종 살해 일화의 시기를 미루어 보면 아마도 10대 초반의 나이에 사마의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인다.201년,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조조의 출사 제의를 거절하고 진짜로 병에 걸린 척하며 집안에 누워있었다. 마침 책들을 말리려고 바깥에 놓아둔 상태였는데[3] 갑자기 비가 오자 책이 상할까 아까운 바람에 꾀병도 잊고 횡급히 나가서 밖의 책들을 걷었다.[4] 이 장면을 한 여종이 목격해버렸다.
201년 당시 장춘화의 나이는 겨우 만으로 12~13세였는데, 남편의 꾀병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유일한 목격자인 그 여종을 죽여 버렸고, 죽인 여종을 대신해서 직접 집안일을 했다. 사마의는 이를 계기로 장춘화를 무겁게 여기게 되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사마의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 다소 이해하기 힘들 수 있지만, 이것은 전근대 사회의 인권의식 수준이 현대 사회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5] 그게 아니더라도 애초에 사마의가 냉혈한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시녀를 죽인 것에 경악했다기보다는 결단력으로 자신을 구한 것이 더 대견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조조가 주도면밀한 사람이 아니라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는 사람이면 이렇게까지는 안 했겠지만, 어찌저찌해서 꾀병이라는 사실을 입수할 경우 조조는 충분히 여종을 증인으로 활용하거나 주인 가족과의 대질심문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타입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관이 이 사건을 어떻게 알았는가'하는 문제가 있다. 유일한 목격자가 살해당한 이상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은 당사자들 뿐일 텐데 당연히 당사자들이 이 사건을 자랑하고 다닐 수는 없을 테니...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닌게, 집안 내에 외부유출 금기인 할머니의 비밀 정도로 수십년 남아있다가, 훗날 조위가 저물고 사마씨의 시대가 된 뒤에 외부에 알려도 되겠다 하여 알려진 일화라고 본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208년, 20세의 나이에 사마의의 장남 사마사를 초산했으며 그를 시작으로 사마의와의 사이에서 총 3남 1녀를 낳았다. 임신하기 힘든 40대에 사마간을 낳았으니 부부간의 금슬은 오래간 듯하다. 며느리 왕원희는 시부모를 섬기면서 아내의 도리를 다했다. (《진서》 <문명왕황후열전>)
사마의는 조조에게 출사하고 점차 승진하면서 본처 장춘화 말고도 첩을 3명[6] 이상 더 두었다. 사마의는 첩들 중에서 백부인을 총애했고, 장춘화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었다.
사마의가 어느 날 병으로 눕게 되자 장춘화가 문병을 갔다. 하지만 사마의는 성의를 무시하며 "늙다리(老物)가 가증스럽구나! 어찌 성가시게 나타났는가!"라고 말했다. 장춘화는 사마의보다 10살이나 연하였는데, 사마의가 그녀를 늙었다고 여긴 것은 사마의의 다른 첩들은 훨씬 어렸다는 뜻이다.
장춘화는 수치스럽고 분노해서 죽겠다며 단식을 시작했고 이에 따라 그녀의 자녀들도 함께 단식을 했다. 사마의는 깜짝 놀라서 사과했고 장춘화는 그제서야 단식을 그만두었다. 이후 사마의는 창피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늙다리가 어떻게 되든지 아쉬울 것이 없다. 다만 내 훌륭한 아들들이 잘못될까 걱정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 일화 때문에 사마의가 공처가로 묘사되는 일이 많다.
247년 4월, 장춘화는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진서》 <선제기>) 남편보다 10세 연하에 4년 일찍 죽었으니 단명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마의가 장수한 것이지 당시 기준으로서는 충분히 살만큼 살았으며, 장남 사마사가 상례를 치렀는데 지극히 정성을 다했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진서》 <경제기>) 낙양의 고원릉에 장사지내졌고 광평현군(廣平縣君)으로 추증되었다.
장춘화가 죽고 2년이 지난 후, 사마씨 가문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서 조위의 정권을 장악했다. 264년, 아들 사마소가 진왕이 되자 '선목비'(宣穆妃)로 추봉되었다. '선'(宣)은 단지 남편 사마의의 시호를 따른 것이라 딱히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며, 시법에서 '목'(穆)은 성품이 좋다는 뜻이다. 어린 나이에 살인멸구를 시도한 냉혹한 면모와는 어울리지 않으나, 자식들에게는 자상한 어머니였거나 혹은 실질적인 개국자의 배우자였던 만큼 성품이 훌륭했다고 포장을 해 주려는 의도였던 듯. 사마소는 장춘화의 외가 쪽 친척인 산도를 등용한 경력도 있었다. (《진서》 <산도열전>) 265년, 손자 사마염이 조위 원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했다. 사마염은 할아버지 사마의를 고조 선황제로 추존했고 할머니 장춘화도 선목황후(宣穆皇后)로 추존했다.
3. 기타 창작물
3.1. 삼국지 시리즈
100만인의 삼국지, 삼국지 8 리메이크 | 삼국지 11 |
삼국지 12, 13 |
삼국지 13 PK, 14 |
삼국지 11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정사에서의 무시무시한 일화에 비해서 많이 순진해보이는 일러스트로 나왔기 때문에 매치가 잘 되지 않는다. 하녀를 죽였다는 일화 때문에 강해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무력이 달랑 9 밖에 안 되며 나머지 능력치는 60~70대의 평범한 내정용 장수다. 특기는 비책.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황부인이 남편 버프를 받아 유니크 특기인 공신을 가지고 있고 능력치도 준 1류급 모사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삼국지 12에서는 사마의를 충분히 휘어잡을 수 있을 만한 드세게 보이는 일러스트로 나왔다. 남편보다 10살 연하인데 일러스트가 사마의는 노년의 모습으로 나오고 장춘화는 한창 젊었을 때 모습이라서 사마의가 도둑 장가 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단도를 든 것으로 보아 여종을 직접 죽일 때를 묘사한 모양. 만약 여종을 죽일 때를 묘사한 것이라면 이 일화가 위에서 나오듯이 장춘화가 13세 때 일이라 전체적으로 성숙한 일러스트가 고증에 맞진 않다. 게임 내에서 전법이 진정이라서 활용도는 낮은 편이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0/무력 49/지력 79/정치 72. 병과적성은 C/B/C. 특기는 상업 4, 설파 7, 언변 7, 귀모 1(사마의 인연 효과)을 가지고 있다. 중신특성은 적중작적, 전수특기는 설파, 전법은 동요. 13탄 PK에서 신규 일러스트로 변경되었고, 이상위명으로 뜬금없이 국사를 부여받았다. 그간 미디어에서 보여진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위명. 이에 더해 12탄까지는 시녀를 직접 살해했기 때문이었는지 드세 보이던 인상이 약간 유하게 변했는데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의 이미지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죽간 2개를 가지고 있는데 12편의 일러스트와 관련된 실제 일화의 다른 부분을 묘사한 모양이다. 일러스트 변경에 맞춰 목소리 타입도 기존의 '용감' 타입에서 '현명' 타입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장춘화는 몰년이 제대로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년은 제대로 설정되었는데 몰년이 234년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실제 역사보다도 매우 빨리 사망한다.[7] 이 오류가 신경 쓰인다면 편집기에서 몰년을 수정 할 수 있다. 여성무장임에도 여성 테마곡이 아닌 자신을 포함한 5명(사마사, 사마소, 왕원희 포함)이 사마의 테마곡을 쓰고 있다.
삼국지 14에서는 통솔 40, 무력 28, 지력 79, 정치 69, 매력 62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20, 무력이 21, 정치력이 3 하락했다. 개성은 봉살과 재원으로 딱 적당한 수준의 지역담당관 요원. 주의는 남편 사마의와 같은 패도, 정책은 병참개혁 Lv 3, 진형은 안행, 정란, 전법은 저지, 매성, 정란,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여성 무장 중에선 6위이고 정치력은 손노반, 대교와 함께 공동 9위로 꽤나 너프를 먹었다. 며느리의 하위호환 정도 수준이다. 전작에 비해 사망년도가 역사에 맞는 247년으로 변경되었다.
3.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도사로 등장한다. 도사 계열 최고 특성인 50 레벨 책략 모방 특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조식에 비해 행운이 낮아 명중률이 떨어지며 금전(캐쉬) 장수인 것이 단점이다. 2017년 1월 25일 업데이트로 전용 외형이 생겼는데 시라누이 마이 수준의 도트 상향을 받아버렸다.
사마의전에서는 당연히 위치가 위치인지라 매번 사마의랑 싸우는게 특징이다.[8]
사마의가 조조에게 벼슬을 받지 않고 풍비를 빙자하여 출사를 거부할 당시 최초에는 그의 진심을 듣지 못했으나 그가 비가 오는 탓에 당황하여 움직이는 것을 본 시녀를 죽이는 것을 보게 된 사마의에게서 출사를 하지 않는 진정한 이유를 듣게 된다.[9]
집안에서 나름대로 잘 지내는 모양이나 이윽고 서서히 사이가 멀어지는 것이 돋보이게 되며, 서로 이야기도 잘 하지 않는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고평릉 사변 직전에 결국 병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사마의와 왜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녀 스스로가 밝힌다.
본인 스스로도 언제부터 멀어졌는지 잘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부터 눈을 마주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사마의가 어째서 그랬냐고 묻자 과거 젊은 시절의 풍비를 빙자했을 당시에 대해서 말하며 그 때는 따스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바라보는 자신의 눈까지 불타버릴 것 같이 뜨거워졌다고 말하는데 이때 사마의의 눈에 담긴 건 광기뿐이었다며 사마의의 변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냐는 장춘화의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사망한다. 이후 장춘화의 죽음을 토대로 사직을 청한 사마의는 그녀의 묘 앞에서 거사를 결행한다는 마음가짐을 보임과 더불어 사랑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라며 비록 표현은 잘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사랑했음을 보이면서 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며 말을 남기고 물러간다.
3.3. 진삼국무쌍 시리즈
자세한 내용은 장춘화(진삼국무쌍) 문서 참고하십시오.3.4. 화봉요원
자세한 내용은 산무릉 문서 참고하십시오.3.5. 대군사 사마의
자세한 내용은 장춘화(대군사 사마의) 문서 참고하십시오.3.6. 삼국지톡
시즌 7 30화 | 시즌 9 12화 |
시즌 7 30화에서 임신한 모습으로 프로필 사진이 작게 나온다.[10] 남편 사마의가 순욱의 스카웃 전화를 받고 요청을 받아주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순욱에게는 '부족한 인재를 두 번이나 찾아주어서 감사하다, 승상을 진심을 다해 모시겠다'고 대답하지만, 뒤에서 채팅으로 조 모 씨가 화나서 도망 못 가겠다고 하소연하자, 내시 손자 주제에 보는 눈은 있다며 뒷담화한다. 여담으로, 사마의가 장춘화를 부르는 호칭이나 카톡 닉네임을 보면 부부간에 사이는 좋은 듯하다. 시즌 9 11화에서도 사마의의 핸드폰 그립톡에 사진이 박힌 것으로 짤막하게 출연.
한편 조조가 사마의에게도 자식이 있냐고 물어보는데, 마침 이 시점에서 사마의는 장춘화와의 사이에서 사마사와 사마소를 본 상태였다. 이때서야 제대로 드러난 얼굴은 눈꼬리가 살짝 처진 졸린 눈에 안경을 썼고 도톰한 입술 밑에 애교점이 있다. 적벽대전 시점의 단발에서 시간이 흐른 시즌 9 시점에서는 갈색의 장발로 길렀고 뒷머리를 반묶음 경단머리로 틀어 화살을 비녀 삼아 꽂아놓았다.
사마의로부터 팽당하고 단식투쟁을 하는 장면은 물론 최후도 스킵되었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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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이 왕(汪)이다.[2] 죽림칠현인 산도와 친척이다.[3] 과거에는 책의 재료가 대나무인 관계로 책벌레나 곰팡이 등을 제거하기 위해 가끔씩 햇볕에 널어 말려야 했다. 이를 '거풍' 또는 '포쇄'라고 하는데 지금도 조선왕조실록 등의 고서를 포쇄하는 행사를 하거나 아예 원래 목적대로 책을 보존하기 위해 포쇄하기도 한다. 지금이야 책을 보관하는 기술이 발달했지만 과거에는 이렇게 해도 오래 되면 결국에는 썩다 보니 10년 이상 지나면 주기적으로 새로 베껴 쓰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4] 인쇄술이 개발된 직후의 유럽에서조차 책은 집 한 채 값을 호가하는 비싼 물건이었다. 한국에서도 조선시대까지 책은 굉장히 값비싼 물품이었다. 당연하지만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는 모든 책이 닥치고 필사를 해야만 작성할 수 있는 물건이었는데 필사를 하려면 글을 알아야 하니 아무나 할 수도 없는데다 글을 잘 안다고 해도 방대한 양의 책을 옮겨쓴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공력이 소모되는 일이니 대가를 많이 줄 수밖에 없었다. 간독조차도 비싼 판에 종이책 시대라면 종이값도 매우 비싸다. 삼국지 시대에는 종이가 있었어도 아직 간독이 더 많이 쓰이기는 했었다. 동진이나 남북조 시대는 되어야 종이 생산이 전보다 나아지고 간독이 사라진다.[5] 당장 조조의 충성스러운 2인자이자 덕장이라고 불리던 하후돈도 장춘화와 비슷한 나이에 스승을 모독한 사람을 직접 죽여버린 살인을 저질렀는데도 오히려 의협심이 있다고 칭찬받았다.[6] 복부인, 장부인, 백부인.[7] 이는 제갈량과 같은 해에 사망한다는 의미다.[8]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살해협박에 이어 싸울 때마다 거의 일방적으로 사마의가 맞는다.[9] 크게 세 가지의 이유로, 첫째는 원소의 세력이 여전히 강대하다는 것, 둘째로 조조의 현재 참모진이 튼실하여 자신이 파고들 틈이 없다는 것, 마지막은 조조가 역적이라는 것이 이유다.[10] 배경이 207년인 점을 감안하면 뱃속에 있는 아이는 다음 해에 태어날 사마사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