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6 13:51:24

정아춘


사마진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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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동진의 추존 태후
宣太后 | 선태후
시호 선태후(宣太后)
출생 불명
서진 하남군 형양현
(現 허난성 정저우시 싱양현)
사망 326년
능묘 가평릉(嘉平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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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 정(鄭)
불명
아춘(阿春)
부모 부친 정개(鄭愷)
모친 복양 오씨(吳氏)
형제자매 4녀 중 장녀
부군 중종(中宗) 원황제(元皇帝) 사마예(司馬睿)
자녀 3남 1녀
사마환(司馬煥), 사마욱(司馬昱), 심양공주(尋陽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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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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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추존 태후. 아춘은 휘가 아닌 자(字)로 본명은 알 수 없다. 진원제의 첩으로 재혼하여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녀의 전남편 전씨(田氏) 사이에서도 아들이 하나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일반 백성으로 살았는지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2. 생애

정아춘의 집안은 대대로 하남군에서 알아주던 유력 호족 가문이었으나, 정아춘의 아버지 정개와 어머니 오씨가 네 자매만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장녀였던 정아춘은 발해(渤海) 사람 전씨와 혼인하여 아직 어린 세 여동생을 돌보았다. 남편 전씨가 죽자 그녀는 여동생들과 전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외삼촌 오씨에게 의탁하였다.

315년, 정아춘의 외삼촌 오씨는 낭야왕 사마예와 안면을 트고, 자신의 딸을 사마예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사마예가 오씨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정아춘은 오씨의 딸과 뒷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사마예는 그녀들을 한동안 지켜보니, 그를 곁에서 수행하던 한 사람이 사마예에게 말했다.
정씨는 비록 과부이나 오씨의 딸보다 훨씬 현명하고 어질다합니다.
사마예도 정아춘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후 317년에 그가 진왕(晉王)이 되었을 때 그녀를 부인으로 맞아 매우 총애하였다. 그 해에 정아춘이 사마환을 낳으니, 사마예가 그를 무척 예뻐하였다.

정아춘이 사마예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지만 늘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마예가 그 연유를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소첩에겐 여동생이 셋이 있는데, 둘째는 장사 사람 왕포(王褒)에게 시집갔으나, 나머지 두 여동생은 배필을 찾지 못했습니다. 헌데, 언니인 제가 첩인지라 여동생들이 좋은 집으로 시집가는 데 방해가 될까 걱정이옵니다."
그러자 사마예는 그 자리에서 어사중승 유외를 호출하여 정아춘의 여동생들을 책임지고 좋은 혼사를 알아보라 명하였다. 유외는 자신의 조카인 유용(劉傭)을 추천해 셋째 여동생과 결혼시켰고, 한중의 유력 호족 집안의 아들인 이씨(李氏)를 추천해 넷째와 맺어지게 도와주었다. 또, 둘째 여동생의 남편 왕포를 상서랑에 임명하니, 정아춘은 더이상 걱정하는 안색을 비치지 않았다.

318년 4월 26일, 사마예가 황위에 올랐다. 사망한 자신의 정처 우맹모를 원경황후로 추존했으나, 그녀 외의 황후를 두길 거부해 정아춘은 황후가 되지 못한 채 부인에 머물렀다. 비록 정아춘은 첩 신분이었지만 황태자 사마소, 동해왕 사마충, 무릉왕 사마희 모두 그녀를 친모처럼 섬겼다.

두 살배기 어린 아들 사마환이 심한 병에 걸렸다. 사마예는 사마환을 낭야왕에 봉하고 식사를 줄였으나, 병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사마환이 병사하였다. 사마예는 매우 슬퍼하며 성인(成人) 수준의 부장품을 묻어주고 사마환의 묘를 크게 지어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낭비했다. 우상시 손소(孫霄)가 간언했지만 사마예는 듣지 않았다.

320년, 정아춘이 사마욱을 낳으니, 사마예가 그를 낭야왕에 봉하였다. 그녀는 아들 사마욱과 함께 낭야국으로 가 어린 아들을 대신해 정사 처리를 도왔다.

323년, 원제가 죽고 그 뒤를 이은 명제 사마소는 정아춘을 건평원부인(建平園夫人)으로 고쳐 봉했다. 왕태비가 될 수 없었던 까닭은 그녀의 아들 사마욱이 아버지 사마예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닌, 할아버지 사마근의 낭야왕직을 계승하기 위해 출가한 것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326년, 정아춘이 사망했다. 낭야왕 사마욱은 낭야국 국상 제갈이(諸葛頤)의 건의 받아들여 상을 크게 올리려 하였는데, 낭야국의 신하들은 격하해서 상을 치러야 한다 주장하며 국상 제갈이 파면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사마욱이 답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께선 생전 이 나라(낭야국)에 머무르셨고, 돌아가실 때는 이 나라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셨다. 내 비록 출가하였으나 모친의 상을 격하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 모자 간의 정을 표현한 것이다. 과거 예장왕은 출가하였음에도 그의 어머니 경황후가 죽자 상을 크게 치렀듯이, 나도 선례를 본받아 똑같이 행하겠다.
당시 어린 성제를 대신해 섭정하던 황태후 유문군도 이 소식을 전해들었으나 태클을 걸기는커녕 사마욱의 효심을 기특히 여겨, 사마욱을 회계왕으로 봉해 출가를 취소시켜 주니, 장아춘은 마침내 회계태비가 될 수 있었다. 이후 사마욱은 낭야왕까지 겸하면서 낭야와 회계 두 국정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371년, 권신 환온에 의해 사마욱이 동진의 황제로 즉위했다. 사마욱은 약 1년간 환온의 선양 압박에 시달리다가 죽으면서 아들 사마요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394년, 장성한 사마요는 조서를 내려 자신의 외할머니 장아춘을 태후로 추존하고, 시호 '선(宣)'이라 하였다. 또, 낭야국에 있던 장아춘의 묘를 태묘로 이장시키고, 다른 황후들과 동등하게 가평릉(嘉平陵)이라 높여 부르도록 명했다.

3.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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