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19:27:54

석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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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후조 제2대 황제
석홍 | 石弘
출생 314년
전조 광평군 양국현
(現 허베이성 싱타이시)
사망 335년 (향년 22세)
후조 광평군 양국현 숭훈궁
(現 허베이성 싱타이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후조 황태자
330년~ 333년 8월 17일
제2대 황제
333년 8월 17일 ~ 3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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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성씨 석(石)
홍(弘)
부모 부왕 고조
모후 정씨
형제자매 4남 중 차남
대아(大雅)[1]
작호 해양왕(海陽王)
연호 연희(延熙, 334년)
}}}}}}}}} ||
1. 소개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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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오호십육국시대 후조(後趙)의 제2대 황제.

고조 명황제 석륵(石勒)의 차남으로 석륵의 6촌동생인 석호(石虎)에 의해 폐위되어 묘호시호를 받지 못했으며, 폐위된 후 해양왕(海陽王)에 봉해졌다.

2. 생애

어려서부터 효성이 깊고 공손하였으며, 신중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두하(杜嘏)로부터 경전을 배우고, 속함으로부터 법령을 배웠는데, 아버지 석륵은
"지금의 세상은 태평하지 않으므로, 문업(文業)만 교육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라며, 석홍을 유징(劉徵)과 임반(任潘)에게 보내 병법을 배우게 하였고, 왕양(王陽)으로부터는 전술을 배우게 하였다.

조왕 4년(322년) 2월, 석홍의 형인 세자 석흥(石興)이 죽었다. 이에 석륵은 차남 석홍을 세자로 세우고, 영 중령군(領中領軍)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위장군으로 승진하였고, 개부(開府)를 허락받았다.

조왕 4년(322년) 10월, 청하(清河) 사람 장피(張披)는 초기에 정하의 장사를 지내다가 장빈의 천거 덕에 별가로 임명되어 정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정하는 장피를 멀리하고, 장빈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정하의 조카인 석홍은 본인의 입지 강화를 위해 어머니로 하여금 석륵에게 장피와 장빈이 어울려 유협(遊俠)으로 놀고 있다는 참소를 하게 하였다. 석홍의 어머니인 왕후 정씨는 석홍의 요구대로 장피와 장빈을 헐뜯었고, 석륵은 이에 동의하여 장피를 급히 소환했지만, 장피가 즉시 도착하지 않자 곧바로 그를 처형하였다.

조왕 8년(326년) 10월, 조왕 석륵이 석홍을 먼저 업(鄴)으로 보내 진수케 하고, 우장사 정하(程遐)와 비밀리에 협의하여 10,000명의 금병(禁兵)과 거기장군이 통솔하는 54개의 군영에 모두 석홍의 휘하로 배속시켰다. 그리고 효기장군•문신좨주 왕양에게 육이(六夷)를 통솔하게 하여 석홍을 보좌하게 하였다.

태화 3년(330년) 2월, 조왕 석륵이 대조천왕(大趙天王)•행황제사(行皇帝事)를 자칭하자, 석홍은 태자로 책봉되었다. 석홍은 겸허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유학자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에 아버지 석륵이 중서령 서광에게 말했다.
"대아(大雅, 석홍의 아명)는 얌전한 것이 장군 집안의 아들 같지 않구나."
서광이 답했다.
"한나라고조는 말을 타고 천하를 얻었지만, 효문제는 현묵(玄默)으로 천하를 다스렸습니다. 성인(聖人)의 후손은 반드시 잔악함을 물리치고 살생을 멀리하는 자가 있어야 하니, 이는 하늘의 도(道)입니다."
이를 들은 석륵은 매우 기뻐하였는데, 서광이 이어서 말했다.
"황태자께서는 인자하시고, 효성스러우시며, 온화하시고 공손하십니다. 반면, 중산왕은 폭력적이고 교활한 면이 많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다면, 사직이 황태자의 소유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중산왕의 권한을 점차 빼앗고, 황태자로 하여금 조정의 정무에 일찍 참여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석륵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때 상서좌복야 정하도 서광의 말에 동의하며 석륵에게 진언하였다.
"중산왕은 용감하고 기략이 뛰어나 군신들 중 그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그의 야심과 도량을 보면, 폐하를 제외하고는 그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는 전투를 전담하며 오랜 시간 내외에 위세를 떨쳤고, 성격 또한 잔인하고 냉혹하여 안하무인하기 그지 없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들 역시 성장하여 병권을 쥐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가 불만을 품으면 어린 군주를 보정할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중산왕을 일찍 제거하여 대계를 도모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석륵은 반대하며 말했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대아는 아직 어리므로 강력한 자의 보좌가 필요하다. 중산왕은 고명한 신하로서 마땅히 이윤곽광의 임무를 맡아야 하는 자이거늘, 경들은 어찌하여 이처럼 말하는가? 경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경들이 어린 군주를 보좌할 때, 제위의 권력을 독점할 수 없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짐이 고명을 내릴 때, 경들 역시 참여시킬 것이니,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자 정하가 울면서 말했다.
"신이 염려하는 것은 지극히 공적인 일입니다. 폐하께서 이를 사적인 일로 취급해 거부하신다면, 어찌 현명한 군주가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중산왕은 비록 황태후의 아들로 자라났지만, 폐하의 친아들은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신령한 계책을 세우고, 조정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중산왕이 장차 득세하면 어찌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동궁(東宮)을 생각해서라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중산왕을 제거하지 않으신다면, 사직이 피를 볼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석륵은 듣지 않았다. 정하는 퇴청 후, 서광에게 말했다.
"주상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태자께서는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이오. 이를 어찌 해야 하오?"
서광이 답했다.
"중산왕은 항상 우리 둘을 원망하기에, 나라의 위기뿐만 아니라 집안에도 화가 미칠 수도 있소. 따라서 국가를 안정시키고 가정을 평안히 할 방법을 마땅히 강구하여 화를 피해야 하오."

이후 서광이 다시 석륵을 알현해 물었다.
"폐하께서 여덟 주를 평정하시고, 바다 내의 모든 영토를 차지하셨건만, 여전히 불안해 보이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석륵이 답했다.
"오(吳)와 촉(蜀)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사마씨(司馬氏)는 여전히 단양(丹陽)에 있으니, 나는 후세에 사람들이 내가 부록(符籙)[2]에 맞지 않아 천명(天命)을 받은 군주로 여기지 않을까 두렵소. 이 생각을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 드러나는구려."
이에 서광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배 속의 병과 같은 심각한 우환을 지니고 계신데, 신이 어찌 사소한 사지(四支)의 병을 걱정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위나라(魏)도 한(漢)의 운명을 계승하여 정통으로 황제의 지위로 올랐습니다. 비록 유비가 파촉(巴蜀)을 끼고 중흥시켰다고는 해도, 한(漢)이 멸망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고, 오(吳)가 강동(江東)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위(魏)의 아름다움을 해칠 수는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두 도성을 포함하여 여덟 주를 평정하셨습니다. 저 사마씨(司馬氏)의 자손들 또한 현덕(玄德)이나 이씨(李氏)와 다를 바 없고, 손권과 마찬가지로 제왕의 통치를 행할 수 없는 법입니다. 폐하께서 이처럼 사소한 사지의 병을 걱정하신다면, 어디에 안정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중산왕은 폐하의 지휘와 신묘한 계책을 통해 가는 곳마다 승리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폐하에 다음 가는 영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잔혹하고 교활하며,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을 것이고, 이윤이나 곽광처럼 충성스럽지도 않습니다. 부자(父子)가 모두 권력을 쥐고 왕실을 위협하고 있으며, 그가 항상 불만을 품고 있는 모습 또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동궁(東宮)에서 태자를 모실 때도 무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폐하께서 이를 눈감아 주셨지만, 저는 폐하께서 만년에 이르러 종묘와 사직에 큰 혼란이 생길까 걱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석륵은 이를 듣고 침묵했지만 끝내 따르지 않았다.

건평 4년(333년) 7월, 명제 석륵이 병환으로 몸져 눕자, 석호는 궁궐을 장악한 후 조서를 마음대로 고치는 등 전횡을 부렸다. 그리고 석륵이 결국 석호를 처리하지 못한 채 붕어하니, 석호는 먼저 태자 석홍의 신변을 확보하여 평대에 앉히고, 정적인 정하와 서광을 체포하였다. 그 후, 석호의 아들 석수가 군대를 거느리고 입궁하니, 문무 백관이 모두 흩어졌다. 석홍은 두려워하며 자신이 무능하여 중책을 감당할 수 없다며 석호에게 양위하려 하였으나, 석호가 거부하며 말했다.
"임금이 붕어하면 세자가 즉위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신이 어찌 감히 이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석홍이 눈물을 흘리면서 굳게 황제 자리를 사양하자, 석호가 분노하여 꾸짖었다.
"설령 그 중임을 감당할 수 없다 하더라도, 천하에는 마땅히 대의(大義)가 있는 법인데, 어찌 사양하십니까!"
그러고는 석홍을 강제로 황제로 세우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문무 백관은 모두 한 등급씩 승진하였으나, 정하와 서광은 석호에 의해 처형당했다.

건평 4년(333년) 8월, 석홍은 석호를 승상, 대선우로 삼고, 구석(九錫)을 내렸으며, 위왕(魏王)으로 봉하여 위군(魏郡) 등 13개 군을 나라로 삼아 총괄하게 하였다. 석호는 사양하는 척하다가 마침내 이를 받아들이고, 석호의 영내에서는 사형을 면제해주었고, 석호의 자식들 또한 모두 왕작에 봉해졌다. 석호는 문무 구신(舊臣)들을 좌우 승상부(丞相府)로 보냈고, 자신의 측근들은 대성(臺省)이나 금군(禁軍)과 같은 요직에 배치하여 궁궐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태자궁(太子宮)을 숭훈궁(崇訓宮)이라 고쳐, 명제 석륵의 부인인 태후 유씨(劉氏)와 그녀 이하의 인물들을 모두 그곳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석호는 석홍의 궁녀들 중 아름다운 이들과 좋은 말, 보물, 옷 등 모든 것을 자신의 승상부로 가져갔다. 이때 진군장군 기안(夔安)은 상서좌복야로, 상서 곽은(郭殷)은 상서우복야로 임명되었다.

건평 4년(333년) 9월, 숭훈궁으로 유폐된 태후 유씨가 팽성왕 석감과 함께 석호를 몰아내고, 남안왕 석회(石恢)를 주군으로 옹립할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일이 발각되어 석호에 의해 화형당했고, 석회는 소환받아 양국(襄國)으로 옮겨졌다. 석호는 유씨를 폐위시키고 곧 그녀를 주살하였으며, 석홍의 생모 정씨(程氏)를 황태후로 삼았다.

건평 4년(333년) 10월, 하동왕 석생이 관중(關中)의 병력을 모아 거병하고, 낙양(洛陽)의 석랑(石朗)과 힘을 합쳐 석호를 토벌하려 하였다. 석호는 보•기 70,000여 명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석생과 석랑의 반란을 진압한 뒤, 다시 수도 양국으로 돌아와 대사면령을 실시하였다. 이때 석호는 옛날 위무제 조조가 했던 것처럼 석홍을 겁박해 양국에 위대(魏臺)를 세우게 하였다.

연희 원년(334년) 정월, 연호를 '연희(延熙)'로 개원하였다. 이때 동진의 성제 사마연이 조서 내려, 석생의 잔당 곽권(郭權)을 진서장군•진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경조(京兆), 신평(新平), 부풍(扶風), 빙익(馮翊), 북지(北地)의 백성들이 모두 거병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후조의 진서장군 석광(石廣)이 다시 곽권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연희 원년(334년) 3월, 석호가 장수 곽오(郭敖)와 아들 장무왕 석빈 등에게 병사 40,000여 명을 주고, 곽권을 토벌케 하였다. 곽오와 석빈은 미(郿)에서 화음(華陰)까지 진격하였다.

연희 원년(334년) 4월, 상규(上邽)의 호족들이 곽권을 죽이고 후조로 투항하였다. 석호는 진주의 30,000여 호를 청주(青州), 병주(并州)의 여러 군으로 이주시켰다.

연희 원년(334년) 10월, 석홍이 스스로 옥새를 들고 위궁(魏宮)을 찾아가, 석호에게 양위할 뜻을 밝혔다. 이에 석호가 말했다.
"제왕의 대업은 천하의 논의가 있어야 마땅한데, 어찌 이를 스스로 논의하려 하십니까?"
결국 석홍은 눈물을 흘리며 궁으로 돌아갔다. 태후 정씨가 말했다.
"선제(석륵)의 혈통이 이제 완전히 끊어지겠구나."
이때 상서가 위대(魏臺)로 상소를 올려 석호에게 당요와 우순의 선양의 고사를 따를 것을 청하자, 석호가 말했다.
"석홍은 어리석고 암담하며, 상중에도 예의가 없으니, 천하를 다스릴 자질이 아니다. 임금이 되려면 만국(萬國)을 다스려야 하니 마땅히 폐위시켜야지, 선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연희 원년(334년) 11월, 석호가 상서우복야 곽은을 보내 지절을 들고 입궁하게 하여, 황제 석홍을 폐위시키고 해양왕(海陽王)으로 삼았다. 폐위된 석홍은 천천히 걸어서 수레에 오르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어리석고 재능이 없어 대통을 이을 수 없으니 군후들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이 또한 하늘의 명령이므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모든 신하들은 눈물을 흘리고 궁인들은 통곡하였다. 한편, 석호의 측근들은 모두 위대에 나아가 석호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청했으나, 석호가 말했다.
"황제라는 칭호는 성덕의 칭호로서 내가 감히 받을 수 없다. 잠시 '거섭조천왕(居攝趙天王)'으로 칭하겠다."
그리고 석홍과 태후 정씨, 진왕 석굉(石宏), 남양왕 석회는 모두 숭훈궁에 유폐되었다.

석홍이 폐위되었을 때, 서강대도독 요익중은 병을 핑계로 석호를 축하하지 않았다. 석호가 여러 번 그를 불러들이자, 요익중은 도착하여 정색을 하고 석호에게 말했다.
"나는 항상 대왕을 시대의 영웅이라 여겼는데, 서로 팔을 마주잡고 선제로부터 의탁받은 입장에서 어찌하여 배반하고 찬탈하였느냐?"
석호가 답했다.
"내가 어찌 이를 즐기겠는가? 다만 해양왕(석홍)이 젊어서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까 두려워 대신한 것이다."
석호는 요익중의 말을 듣고 언짢았으나, 그의 진심을 알고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리하여 석홍은 재위 2년 만에 폐위되었다.

건무 원년(335년), 석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향년 22세. 이때 석홍과 함께 숭훈궁에 유폐되었던 이들 모두 목숨을 잃었다.


[1] 북위를 다룬 역사서인 《위서》에서는 제6대 현조 헌문제 탁발홍의 휘를 피휘하여 '석대아'(石大雅)로 표기했다.[2] 고대 중국에서 부록은 하늘의 뜻을 기록한 문서를 의미하며, 천자가 천명(天命)을 받았음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