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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오호십육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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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319)

(319~329)
존속기간304년~329년
별칭전조(前趙), 한조(漢趙), 유조(劉趙), (Xwn)
위치중국 화북
수도 평양(平陽), 장안(長安)
정치 체제군주제
국성유(劉)
국가원수선우, 황제(308년 이후)
주요 황제광문제 유연
언어중세 중국어, 흉노
문자한자
종교유교, 도교, 불교
종족흉노족, 한족
성립 이전서진
멸망 이후후조
현재 국가중국

1. 개요2. 역사3.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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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조(漢趙), 조한(趙漢), 혹은 호한(胡漢), 호조(胡趙), 북조(北趙),[1] 유조(劉趙)라 불리던 5호 16국 시절의 국가로, 개중에서도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 역사

창건자인 유연조위(曹魏) 시절 출생한 인물로, 남흉노선우 어부라의 손자다.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를 수 있는데, 삼국지에서 고간의 원군 요청을 쌩깠으며 또 채염을 보쌈했던 흉노 좌현왕 유표(劉豹)의 아들이다. 그는 중국에 들어와 살기도 하며 중국 인사들과 교류하는 등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유연의 비범함을 눈여겨 본 서진의 제왕(齊王) 사마유가 유연을 제거해야 한다고 황제인 사마염에게 상소했으나, 왕혼이 유연을 비호하여 유연은 살아남았다.

이후 팔왕의 난이 터지자, 서진(晉)이 개막장이란 걸 알아챈 유연은 당시 흉노족 전체를 관장하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거병을 하였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했다.[2] 유연은 서진을 멸망시키려 했으나, 수명을 다했고 결국 그의 아들인 유총이 유지를 이어받아 진을 멸망시켰다. 이에 서진의 황족인 사마예가 도망쳐서 강남에 정권을 세우는데 그것이 동진(東晉)이다.

전조가 이렇게 서진을 멸망시키고 하북을 전조의 땅으로 오롯이 했으나, 전조는 서진보다도 더한 훌륭한 막장 국가였다. 권력 투쟁, 무리한 토목 공사, 사치, 사법 살인, 간음, 근친상간 등 온갖 막장질이 성행했기에 황제도 오래가지 못하고 순식간에 갈려나갔다. 서진을 멸한 유총이 죽자 그의 아들 유찬 때 실권을 쥔 외척 근준이 난을 일으켜 유찬을 포함해 유씨 황족들을 대거 숙청하는 바람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 개중에는 그나마 덜 막장인 것처럼 보인 유요는 유연의 양자이자 전조의 5대 황제로, 석륵과 함께 근준의 난을 제압하고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국호를 조(趙)로 바꾸어 흉노의 후예임을 알렸고,[3][4] 유연의 양자답게 개국의 공이 있는 숙장이었으나 안으로 막장인 것은 마찬가지였고, 밖으로도 같은 전조의 개국 공신인 석륵과 대립했다.

이에 석륵은 똑같은 조나라인 후조(後趙)를 세워 전조랑 대립했으며 결국 유요를 깨뜨리고 생포한 후 처형한다. 유요의 아들인 태자 유희는 아버지가 생포당했다는 소식에 장안을 버리고 형 유윤에게 의지하여 상규로 도망쳤으나, 그 역시 수개월만에 후조와의 싸움에서 패배 후 생포, 처형당하게 된다. 이로써 전조는 멸망하고, 후조가 뒤를 잇는다.

그렇다고 해서 후조 역시 멀쩡한 것은 아니었고 막장성으로는 전조와 자웅을 겨룰 만했다. 후조에서 거의 유일한 정상인이자 영웅이던 석륵이 죽은 후 후조 역시 막장일로를 치닫게 되고, 화북 전토는 대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유씨가 사마씨를 쓰러트렸기 때문에 후삼국지에선 '유비의 후손인 유연이 사마씨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부흥시켰다'는 줄거리로 이어지나, 전조 황실은 흉노족이며 성만 유씨일 뿐이다.[5]

3. 역대 황제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 기간 능호
- - 한왕(漢王) 유연(劉淵) 원희(元熙) 304년 ~ 308년 304년 ~ 308년 -
1대 고조(高祖)
태조(太祖)[6]
광문황제(光文皇帝) 영봉(永鳳) 308년 ~ 309년
하서(河瑞) 309년 ~ 310년
308년 ~ 310년 영광릉(永光陵)
2대 - 폐제(廢帝) 유화(劉和) - 310년 -
3대 열종(烈宗) 소무황제(昭武皇帝) 유총(劉聡) 광흥(光興) 310년 ~ 311년
가평(嘉平) 311년 ~ 315년
건원(建元) 315년 ~ 316년
인가(麟嘉) 316년 ~ 318년
310년 ~ 318년 선광릉(宣光陵)
4대 - 효은황제(孝隱皇帝) 유찬(劉粲) 한창(漢昌) 318년 318년 -
비정통 - - 근준(靳准) - 318년 -
추존 - 경황제(景皇帝) 유량(劉亮) - - -
- 헌황제(獻皇帝) 유광(劉廣) - - -
- 의황제(懿皇帝) 유방(劉防) - - -
- 선성황제(宣成皇帝) 유씨(劉氏) - - -
5대 - - 유요(劉曜) 광초(光初) 318년 ~ 329년 318년 ~ 328년 -
6대 - - 유희(劉煕) - 328년 ~ 329년 -
* 유요가 319년 국호를 한(漢)에서 조(趙)로 변경


[1] 헌데 후조도 북조, 호조라 불렸다.[2] 유연의 유씨(劉氏)는 그의 선조 묵특한고조와 화친을 맺을 때 유씨 성을 받았기 때문으로, 국호는 이에 근거했다.[3] 이 때문에 이 나라를 조한(趙漢)이라고도 부른다.[4] 허나 조가 왜 흉노의 후예임을 알리는 것과 연관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조나라는 흉노 입장에서는 원수인데 전국시대의 조나라는 이목이 흉노와 싸워 이겨 흉노족 10만명이 죽고 10년간 조나라 국경에 얼씬도 못할 정도로 흉노를 크게 박살냈다. 말하자면 조나라는 흉노 입장에서는 크나큰 굴욕을 준 나라인데 정작 그런 나라의 국호를 자기네 나라의 이름으로 쓴 것이다. 석륵이야 갈족 출신이니 그렇다고 쳐도 명백히 흉노족 출신인 전조에서 이름이 조나라인건 아이러니다.[5] 이와 대조적으로 동진을 멸망시키고 유송을 건국한 유유는 실제로 한나라 황실의 후손이 맞다.[6] 유요가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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