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법정동에 대한 내용은 화북동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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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華北/华北중국의 지역.
정확한 영역이 없어 황하 이북, 회하 이북이라 하기도 하고 화중 이북이라 하기도 한다.[1] 화북평야가 위치하고 있다.
친링산맥(秦嶺山脈)과 화이허(淮河)를 기준으로 화북, 화남 등으로 나누는 건 지리학적인 구분을 위해 20세기 초 중국의 지리학자 장샹웬(張相文, 1867~1933)이 1908년에 정립한 것이다.#
밀 재배에 적합한 기후라 밀로 만든 빵이나 국수가 주식이다. 만터우나 꽃빵 등이 대표적.
서기 2년 전한 인구 밀도. 화북의 인구가 많았다. |
중화민국의 구분 |
화북(HB), 화남(HN), 장강 이북(BCH), 장강 이남(NCH) |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 구분. |
중화인민공화국의 개발정책에 따른 구분. 화남/북 등 없이 동부, 서부, 동북, 중부 지구로 구분한다. |
2. 역사
중국 문명의 발상지였으며, 중국사 내내 정치적 중심지다. 상고 주나라 이래부터 고대 한나라까지 화북이 아닌 지역의 '오랑캐'들을 몰아내고 어느 정도 개발을 해놓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장강 주변과 몇몇 거점도시에나 확실하게 통치력이 미쳤고, 나머지 화남 지역 대부분은 과장 좀 보태서 야만족의 땅이었고 미지의 땅이었다. 이는 후한의 13주, 삼국시대 당시의 손오도 마찬가지였으며, 촉한과 오나라가 힘을 합쳐도 조위의 국력에 못 미치는 것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하지만 중세 5호 16국 시대부터 한족들이 북방 유목민에게 화북을 빼앗기고 대거 화남으로 이주하여 한족 왕조를 이어간 남북조시대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되었고, 이후 천하통일을 이룩한 수나라 대운하의 건설, 결정적으로 남송 시대를 거치며 장강 하류의 생산력이 급상승하여 근세 요-금-원의 끊임없는 유목민 정복왕조로 피폐해진 화북을 앞질렀다.
단, 비록 화남이 장강 하류 개발로 생산력이 대폭 상승했더라도 인구면에서는 화북에 비해 수배 이상 부족했기 때문에 그 차이를 메꾸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상승된 생산력은 그대로 화남의 인구를 늘리는데 투입된 것이 아니라 화북의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운송됐다. 애초에 대운하를 만들어 장강과 황하를 연결한 이유가 화남의 생산물을 화북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화북은 비교적 한랭한 평원지대라서 강이 가득한 온난한 화남보다 기병 양병이 수월했기에 여전히 남북 두 지역 간에 군사적 대결이 발생할 경우 명나라, 중화민국 두 번을 제외하고는 늘 화북의 승리로 끝났다. 명나라의 홍무제가 근거지 난징에 도읍을 설치했지만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가 근거지 베이징으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 이어 현대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북양정부를 물리치고 난징으로 환도함으로써 중국의 중추지가 화남[2]으로 이전하는듯 싶었지만 국공내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승리하고 중화민국이 타이완 섬으로 피난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다시 베이징으로 정도하여 현재도 화북은 중국의 중추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