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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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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中国历史 中國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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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CC0000><tablewidth=100%><tablebordercolor=#CC0000><tablealign=center>중국의 역사 907년 ~ 1644년 ||
907 ~ 1279 오대십국(五代十國) 대요(大遼)
서요(西遼)
당항(黨項) 대리국(大理國)
송(宋)
북송(北宋) 서하(西夏)
남송(南宋) 대금(大金)
1270 ~ 1368 대원(大元)
1368 ~ 1644 대명(大明)
,남명(南明), ,대순(大順), ,대서(大西), ,명정(明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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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ongolia_so.png 몽골의 역사
ᠮᠣᠩᠭᠣᠯ ᠤᠨ ᠲᠡᠦᠬ Монголын түүх
고대중세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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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나이만 몽골 제국 원나라북원청나라 치하 몽골청나라 치하 몽골
타타르
케레이트차가타이
칸국
오이라트준가르
메르키트일 칸국티무르 제국
카마그 몽골우구데이
칸국
킵차크
칸국
이흐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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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대몽골국
Dai Ön Yeqe Mongɣul Ulus
ᠳᠠᠢ ᠦᠨ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
ᡩᠠᡳ ᠶᡠᠸᠠᠨ ᡤᡠᡵᡠᠨ[1]
大元大蒙古國
파일:Yuan_ch.png
1271년 ~ 1368년
이칭 예케 몽골 울루스(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 다이 유완 구룬(ᡩᠠᡳ ᠶᡠᠸᠠᠨ ᡤᡠᡵᡠᠨ), 대원(大元)
위치 몽골, 중국, 한반도 북부, 러시아 남부
수도 대도(大都) / 상도(上都)[2] (1271년 ~ 1368년)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카안(ᠬᠠᠭᠠᠨ)(황제)
국성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주요 카안세조 쿠빌라이,(1260~1294),
성종 테무르,(1294~1307),
인종 아유르바르바다,(1311~1320),
혜종 토곤테무르,(1333~1368),
언어 중세 몽골어, 중세 중국어, 티베트어
문자 몽골 문자, 파스파 문자, 한자
종교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유교, 백련교
종족 몽골족, 한족, 색목인
통화 교초(交鈔) 등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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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년 칭기즈 칸, 몽골 통일
1227년 서하 멸망시킴
1234년 금나라 멸망시킴
1260년 쿠빌라이 칸, 개평부에서 즉위
1260 ~ 1264년 아리크부카의 반란
1262년 이단의 반란
1267년 대도 건설
1267 ~ 1273년 양양 공방전
1269년 탈라스 회맹
1271년 건국
1274, 1281년 일본 원정
1275 ~ 1295년 마르코 폴로, 원 체류
1276 ~ 1282년 시리기[3]의 반란
1279년 남송 멸망, 천하 통일
1280년 곽수경, 수시력 편찬
1284 ~ 1287년 안남 (베트남) 원정
1285 ~ 1301년 카이두의 반란
1287년 나얀의 반란
1292 ~ 1283년 자바 (인도네시아) 원정
1307년 화림행성 설치
1310년 오고타이 칸국 해체
1314년 과거제 실시
1323년 남파의 변
1328년 양도전쟁
1329년 천력의 변, 문종 즉위
1351년 홍건적의 봉기 시작
1368년 멸망
1388년 북원 멸망
성립 이전
몽골 제국, 남송
멸망 이후
북원

1. 개요2. 상세
2.1. 사회2.2. 행정2.3. 문화
3. 황실
3.1. 역대 황제3.2. 계보도3.3. 추존 황제
4. 미디어에서5. 트리비아6. 둘러보기

1. 개요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 몽골 제국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시기를 말한다. 수도는 대도(칸발릭).

2. 상세

중국의 역대 국가 중 청나라와 함께 가장 넓다.[4] 하지만 넓이와는 달리 왕조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중국 통일왕조 중에서는 존속기간이 진나라서진, 수나라에 이어 4번째로 짧다. 나라가 97년 만에 무너졌기 때문이다.[5] 애초에 군사력만으로 세워진 나라여서 과거 고대 로마나 한족계 중국 왕조와는 달리 소프트파워가 부족하고 황제들이 대부분 문맹이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애시당초 오래 갈 수 없었다. 그러고도 97년을 버틴 게 대단한 거다.

다른 왕조들과 달리 이 왕조는 현재도 후신을 자칭하는 민족이 독립 국가를 유지하는 데다[6] 요 및 금이나 청과 달리 한족을 노골적으로 노예 취급했기 때문에 외몽골의 할하 몽골인들은 이 시기 중국몽골식민지로 평가한다. 그에 반해 정부가 중심이 되어 막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은 칭기즈 칸을 세계를 지배한 중화 몽골의 대영웅이라고 보고 있다. 차라리 쿠빌라이 칸을 중화영웅으로 떠받들지[7] 한편 중국 내몽골 지역의 차하르 몽골족은 원나라를 몽골족이 중심이 된 중국 왕조로 본다.[8]

종교는 티베트 불교이다. 티베트 불교는 라마교라고도 불리우며 티베트 불교는 동아시아 국가들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성행한 밀교와는 전혀 다른 후기 밀교이고 탄트라 좌도 밀교이다. 티베트 불교(후기 탄트라 좌도 밀교)는 한국, 중국, 일본에는 전파된 적이 없는 종교인데 딱 원나라 시기에만 중국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원나라의 경우 중국 대륙에 존재한 몽골 국가였기 때문에 원나라 때는 중국에 티베트 불교(좌도 밀교)가 성행하였고 원나라가 사라지고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도 사라진다.

몽골 제국의 제5대 칸 쿠빌라이 칸이 국명을 중국식인 대원(大元)으로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국호는 주역의 건원(乾元)을 설명하는 '대재건원 만물질시(大哉乾元 萬物質始,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의 시작이로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중원 왕조로서의 전환은 아니고, 서역의 4대 칸국[9]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명목상 대칸으로서의 정체성도 계속 유지했다.

중세 몽골어로 다이운 여커 몽골 울루스라고 불렀으며, 이는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이라는 뜻이다. 황성은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남송 등을 정복해 중국을 통일했고, 고려를 침공해 부마국으로 만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지로 쳐들어갔다가 카미카제와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후퇴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을 정복하려다가 쩐흥다오의 전략에 말려들어 물러났으며 잘 안 알려졌지만 인도네시아, 미얀마아이누가 살던 사할린 땅을 침공하기도 했다.

명나라에 의해 중원에서 추방된 이후 만주 북부와 내몽골에서 북원으로 이어진다. 북원은 겨우 3대에 평종이 대칸 자리를 조리그투 칸에게 찬탈당하며 실질적으로 "원나라"로서는 멸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몽골"로서는 이후 한참 더 존속하다가 청나라에게 내외몽골이 차례로 복속될 때까지 독립해 존재했다.

한족을 정복 왕조 내의 다른 백성들처럼 대하지 않고 하층 계급으로 강제 편입시킨 건 이 왕조가 유일하며 또한 역대 중국 통일 왕조 중 한반도 전체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간접적으로 통치했던 왕조이기도 하다.

2.1. 사회

정복활동 초기 몽골은 한때 실제로 중국인들을 모두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아 논밭을 목장으로 바꿀 계획도 있었다. 그러자 야율초재의 "근데 얘들 죽이면 세금은 어디서 걷어요?" 이 한마디에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중국 쪽에 있긴 한데,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학자들은 거짓말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몽골인들도 세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도시 한두 개도 아니고 화북의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는데 그런 계획을 했을 리가 없었다.[10]목초지 발언은 몰라도, 일단 야율초재에게 거란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들을 모두 죽여주겠다고 한 말은 진심으로 보인다.

파일:external/resources.tangkingpo.edu.hk/image010.jpg
원나라의 통치는 영주분봉제로 기본적으로 봉건적 신분제 사회였다. 원나라는 '몽골인 → 색목인 → 한인 → 남인' 이렇게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때 한족들은 3~4 등급의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생활하였다.[11] 그리고 원나라에서는 호적상 이들의 신분층을 계관호와 투하호로 나누었는데, 투하호는 귀족에 사적으로 배속된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양민층이며 노예층은 '구구'라고 따로 불리었다. 원은 세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민층으로 만드려 했다. 이 외에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원나라의 법률은 "'노예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했는데, 주인은 임의로 노예를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다.
  • 20가구를 1갑(甲)으로 편성하였다. 각 갑마다 한 명의 갑주(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으로,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12]
  •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13]은 몽골 병사의 몫이었는데, 중국 한인은 혈통의 순수성 유지를 위해 첫 번째 태어난 아기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열더라도 대부분 어용 집회.
    •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 노예는 사유물로 그 재산은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
  • 전부는 아니지만 노예인 한족에 한해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주중팔.
  • 과거제도에 있어서도 계급별로 할당량을 정해두어 최하계급인 남인의 경우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직종에 따라서 10등급으로 나누었다. 관리, 아전, 도사, 승려, 의사, 기술자, 목공, 창녀, 유생, 거지가 그 순서다.[14] 또 원 중기서부터 과거가 시행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유학적 지식보다 실무 행정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실무 중시 경향은 원뿐만 아니라 금과 신법 이후의 송에서도 그랬다.[15]

물론 이러한 조항이 실시된 건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특히 강남 지역에서는 송대부터 터잡고 살아온 한족 지주들의 자치가 실시되는 지역이 태반이었다. 애시당초 몽골은 이 차별 정책을 중국 전토에 시행할 만한 행정 역량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잘 알고 있는 원나라 측에서 갈아엎으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자체 분열로 그럴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역설이지만 이게 오히려 도움이 됐는데 원나라 말기 주원장을 비롯한 여러 실력자들이 강남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원나라를 칠 여력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손해가 되었는데, 농민 반란군 중 무장 상태가 농민이 아니신 분들도 생겼다.# 각종 화기를 다루는 자칭 농민 반란군

근래[16]에는 저 한족을 노예로 했단 설이 부정되고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강남의 자치다.[17] 강남인은 하북인과 달리 머리도 안 밀리고 한족 신사층끼리 알아서 잘했다. 그리고 유복형이나 조양필 등 한족 간부들도 원나라 황실을 위해 많이 봉사하곤 했다. 특히 유복형은 고려인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다.

문제는 원나라 말기 중국인들을 몰살시킬 움직임이 더 있었다는 것. 원나라 말기를 다룬 대중문학작품인 의천도룡기에서 다섯 성씨에 해당하는 한족을 죽이라는 이야기로 언급된다. 물론 국가의 전면적 막장화와 교체로 저지되었다.

또한 당시 원나라의 인구비를 살펴보면 몽골인 100만, 색목인 100만, 한인 1000만, 남인 6000만가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몽골군이 강하다고는 해도 200만으로 7000만을 지배한다는건 너무 힘든 일이라 3계급인 한인층을 포섭하였고 그 덕분에 이들은 세금이나 과거에 있어서 혜택을 받아 피지배계층이긴 해도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인은 3계급에서 우대받은 편이라(처음부터 우대받은 건 아니었고, 고려가 부마국이 되고난 뒤 세월이 지날수록 지위가 나아졌다) 고려인만을 대상으로 뽑는 과거제도(괴과-魁科)를 시행하기도 했고, 여기서 장원급제한 전원발[18] 같은 경우는 병부상서까지 오르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 이곡, 최해 같은 이들이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는 등 고려인 관리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사서를 보면 몽골인들이 군사 부문 외엔 행정에서 별로 한 것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점령지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 상당히 위태로웠다. 비유하면 군대는 있으나 경찰이 없어서 몽골인이 적대적인 점령지에 소수로 여행을 다니기에는 매우 위험했다. 조공을 바치면서도 자기들끼리는 대놓고 몽골인을 타타르라고 부르며 경멸한 러시아 같은 곳들은 몽골인을 죽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안전책도 없이 갔다가는 사망 확정이었다. 유목민이 선조인 나라들을 봐도 특이한 케이스다. 물론 농경국가적 성격이 있는 경우다. 몽골의 경우도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만주족과 몽골인을 비교하면 몽골인 쪽이 밀리는데 사실 묶어서 분류하기에 원나라는 너무 특이한 나라다.

명목상으로는 몽골인이 중요한 행정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몽골 제국에서 여러모로 우대를 받던 색목인들의 기록에서는 잉여다. 물론 페르시아인처럼 몽골인들에게 털린 사람들도 있어서 폄하로 볼 수도 있으나 거란족인 야율초재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반론을 하려고 해도 몽골 출신의 학자나 심지어는 글을 제대로 알던 사람도 극히 적기 때문에 반론도 거의 불가능하다. 학문적 스펙이 뛰어나지 않았던 사람들도 좋은 결과를 낸 적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일단 학문을 알아서 학문적 능력을 기른 사람들이나 그렇고 몽골인들은 학문 자체를 모르니 답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수학적 업적을 남기려면 일단 학벌이 좋지는 않아도 수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몽골인은 자기가 직접 학문하는 것보다 다른 민족들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통수를 맞을 위험이 항상 있었다. 이런 문제점 때문이라도 메이저 민족들 중에서 유목민 출신 선조들을 가진 경우를 살피면 유목민들도 본인들이 어느 정도 학문에 관심을 갖고 국가를 운영하는데,[19] 특이하게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직접 공부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운영하던 국가였다. 영웅은 공부 따윈 안 한다네 그러나 각 지역에 동화된 이후에는 지역문화에 능통해진 몽골인들도 많으니 일반화는 다소 위험하다.

2.2. 행정

파일:external/i.epochtimes.com/1601310718331695-600x381.jpg
역대 중국 통일 왕조들 중 가장 영토가 넓었지만 행정력이 가장 취약했다. 그야말로 군현제를 천 년 전 봉건제로, 근세기 중앙집권국가를 중세 봉건제도로 되돌린 수준이다. 허구한 날 주나라 시절 봉건제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유학자들의 꿈 실현 사실 이게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지방행정제도는 중서성이 승상부 역할을 맡아 전 지역을 총괄하고[20], 그 아래에 11개 행성을 하남, 강남, 섬서, 사천, 요양, 감숙, 운남, 영북, 정동[21]을 총독부로 두어 지방을 통치했다. 그 지역의 3분의 1이 정복활동 도중에 분봉된 왕공제후들 및 정복전쟁 당시 원에 붙은 군벌들의 영지로 곳곳에 왕부가 설치되었다. 이들 지역에 대해 원 황실은 간섭은 할 수 있어도 통치는 사실상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징세, 징병, 행정력 행사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하기 힘들어 중앙집권보다 봉건제에 가까웠다. 이건 현대의 기준에서 봐도 자치국이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중서성 관할 지역에서도 왕공제후들 및 귀족들 영지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거기다 정규군으로 화북에는 4개 몽골도만호부,[22] 강남에는 22익, 후광 및 쓰촨지역에 각각 6익의 한군만호부[23]들을 배치했는데, 영지까지 분봉시켜놓고 지휘관은 세습이었다. 거기다 이들은 지방행정체계인 행성 밖에서 존재했다. 따라서 얼마 못 가서 죄다 군벌화. 황실 직할군은 시위군단과 케식 합쳐서 1개 도만호부 수준이다.여기에 유목민 특유의 문화와 관료제의 미비 등으로 인하여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특히 더 낮았고, 이 때문에 다른 왕조들처럼 지방세력의 발호를 억제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것.

이러한 일은 쿠빌라이 칸이 남송원정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권을 막 퍼줘서 가능했던 일. 쿠빌라이 칸은 왕공제후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케식을 인질삼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원 황실은 이걸 통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회를 열어 달랬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심심하면 반란과 쿠데타가 일어났다.

다만 행정이 미비했다고 하더라도 나름의 정보 연결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강남의 한족 부호층은 천자만 열 수 있는 과거 시험을 감히 열고 여기에 서생들이 많이 참여하는 걸 알고 있었으나 몽골 지배층은 이걸 그냥 일종의 유치한 코스프레쯤으로 인식했기에 너그럽게 웃으며 넘어가주는 대범함도 있었다. 걍퍅한 훗날의 청나라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진정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이런 과감한 관용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보는 엉뚱한 시각도 있으나, 청말 때와는 달리 원말 때는 유학적 사고로 무장하여 원나라에 충성하다가 죽어간 한족 지식인들도 생각보다 많았음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2.3. 문화

근본적으로 몽골지상주의였으나 이 나라도 한족화는 피하지 못해 후대로 갈수록 몽골귀족들이 중국식 문화에 젖어 몽골식 성명을 중국어로 치환했다. 물론 변발호복은 이 시기부터 북중국에 한해서만 강제했으나 그나마 명목상에 불과했으며 남중국은 사실상 신사층을 중심으로 자치제를 유지해 터치도 안 하고 내버려 뒀다.[24]

이름만 중국식으로 바꾼 게 아니라 중국의 제도 등을 도입하고, 후대로 갈수록 중국색이 강해지게 되지만 다른 이민족 국가들에 비하면 그 강도가 약하다. 중국 특색을 지양하며, 몽골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였기 때문. 그런데 몽골인의 숫자가 너무 적다보니 유지하기가 매우 까다로웠고 그 성격도 매우 이질적이라 오래가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그들의 문화는 그 시대를 지탱하는 데만 유효했다. 그나마 청의 만주족과 달리 그 정책 때문인지, 아니면 북방에 근거지가 건재해서인지 나라 자체는 망하지 않고 몽골 공화국으로 계승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25] 물론 그전에 할하, 차하르, 부랴트, 오이라트 등 부족별로 분열되었고 외몽골은 청대에도 반 독립지역으로 놀았기 때문에 독립이 가능했으나 내몽골만주족과 일체화되어 현재까지 중국의 일부로 남아있고 부랴트 역시 일찍이 러시아인들에게 점령당해 자연스레 러시아화되었다.

물론 원나라가 남긴 문화적 영향도 있긴 하다. 아니, 꽤 많다. 대표적으로 매우 인기있는 중국인들의 간식인 북경 양꼬치가 바로 원나라와 명나라 때 북경에 잔류한 몽골인들에게서 유래한 것. 그리고 명나라 초중기의 복식도 한동안 몽골식 복장의 영향을 받은 형태였고[26] 베이징의 지역색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줬으며 베이징의 여러 지명도 몽골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작곡가 가오샤오숭(高晓松)이 방송에서 베이징의 명칭이 촌스럽다는 말에 몽골인이 글을 몰라서 그랬다는 무개념 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변발수병 빵모같이 생긴 모자는 청나라대에 널리 퍼졌지만 기원은 원대다. 또한 북방 중국인(북부 한족)의 혈통에는 적잖이 북방계(몽골) 혈통이 섞여있는데 몽골 통치하에 혼혈되어 태어난 것이다.

또한 원은 훗날의 명, 청과는 달리 기록 문화 자체에 관심이 적었기에 적어도 문자의 옥 같은 무시무시한 일은 자행한 바 없었다.[27]

3. 황실

3.1. 역대 황제

원나라 건국(1270년) 후의 군주들만 다뤘다. 그 이전과 이후의 칸들은 몽골 제국이나 북원 항목을 참고. 국성은 보르지긴(孛兒只斤)이다.

아래의 역대 황제란을 보면 알겠지만, 국가가 존속했던 97년(1271-1368) 중 첫 번째 쿠빌라이(25년)와 마지막 토곤 테무르(36년)를 빼고 나면 39년(1294-1333)에 황제가 9명이 있었던,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던 막장 나라다. 평균 약 4년. 그마저도 13년 동안 재위한 2대 테무르를 제외하면 26년간 8명에 1대에 3년.
대수 묘호 시호/연호 칸호 연호 재위기간 비고
1대 세조 성덕신공문무황제 세첸 칸 쿠빌라이 중통(中統, 1260~1264)
지원(至元, 1264~1294)
1260~1294 5대 대칸
2대 성종 흠명광효황제 올제이투 테무르 칸 테무르 원정(元貞, 1295~1297)
대덕(大德, 1297~1307)
1294~1307 6대 대칸
3대 무종 인혜선효황제 퀼뤼그 칸 카이샨 지대(至大, 1308~1311) 1308~1311 7대 대칸
4대 인종 성문흠효황제 아유르바르바다 칸 아유르바르바다 황경(皇慶, 1312~1313)
연우(延祐, 1314~1320)
1311~1320 8대 대칸
5대 영종
(英宗)
예성문효황제 게게엔 칸 시디발라 지치(至治, 1321~1323) 1320~1323 9대 대칸
6대 진종 흠인대효황제 예순테무르 칸 예순테무르 태정(泰定, 1321~1328)
치화(致和, 1328)
1323~1328 10대 대칸
7대 - 천순제 라기바흐 칸 라기바흐 천순(天順, 1328) 1328 11대 대칸
8대 문종 성명원효황제 자야아투 칸 투그테무르 천력(天曆, 1328~1329) 1328~1329 12대 대칸
9대 명종 익헌경효황제 후투그투 칸 쿠살라 천력(天曆) : 1329년 1329 13대 대칸
복위 문종 성명원효황제 자야아투 칸 투그테무르 지순(至順, 1330~1332) 1329~1332 복위
10대 영종
(寧宗)
충성사효황제 린칠반 칸 린칠반 지순(至順) : 1332년 1332~1333 14대 대칸
11대 혜종[28] 선인보효황제 /
순황제[29]
우카아투 칸 토곤테무르 원통(元統, 1333~1335)
지원(至元, 1335~1340,
1368~1370)
지정(至正, 1341~1368)
1333~1368 15대 대칸

3.2. 계보도

1. 세조
친킴
카말라 다르마발라 2. 성종
6. 진종 3. 무종 4. 인종
7. 천순제 9. 명종 8. 문종 5. 영종
11. 혜종 10. 영종
12. 소종 13. 천원제

3.3.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성명 비고
희조(熙祖) 의현황제(毅玄皇帝) 보돈차르(孛瑞察兒)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10대조
선조(宣祖) 공철황제(功哲皇帝) 카불(合不勒)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증조부
열조(烈祖) 신원황제(神元皇帝) 예수게이(也速該)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생부
목종(穆宗) 도녕황제(道寧皇帝) 주치(朮赤)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장남
성종(聖宗) 충무황제(忠武皇帝) 차가타이(察合台)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차남
예종(睿宗) 인성경양황제(仁聖景襄皇帝) 툴루이(拖雷)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4남
유종(裕宗)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 친킴(眞金) 성종 추숭, 세조의 차남
순종(順宗) 소성연효황제(昭聖衍孝皇帝) 다르마발라(答剌麻八剌) 무종 추숭, 무종의 부친
현종(顯宗) 광성인효황제(光聖仁孝皇帝) 카말라(甘麻剌) 진종 추숭, 진종의 부친

4. 미디어에서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칭기즈 칸이 나올 때 후일담으로 잠깐 언급되거나, 전성기인 쿠빌라이 칸 시대에 활발한 해외원정에 딸려서 언급되거나, 말기에 개판오분전이 되어 '''국가 막장 테크를 타는 상황이 나오거나다. 한국의 경우 대몽항쟁기의 사건이 사극 등에 자주 나온다.

신의(드라마)에서는 공민왕 때까지의 고려왕들이 전부 줄줄이 무능했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고려를 합병하려고 했다.

기황후(드라마)에서는 기황후, 고려의 가상왕 왕유, 토곤 테무르(혜종)의 관계를 초반에 가상적으로 설정한 스토리로 시작하여 이후 원나라에서의 스토리를 다룬다.

중국 드라마인 건원풍운(국내명은 칭기즈 칸의 후예)에서 쿠빌라이 칸에 대해 다루었다.

김용의 문학작품인 의천도룡기에서 원나라의 말기의 주원장을 비롯한 대대적인 한족들의 대몽 항쟁이 그려진다.

미국 드라마 마르코 폴로(드라마)도 이 시대가 배경. 다만, 실제 역사와 안 맞는 부분이 많으니 드라마 내용을 사실로 판단하지는 말자.

5. 트리비아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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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주어이다.[2] 대도는 겨울 수도, 상도는 여름 수도로 기능하였다[3] 몽케 칸의 아들[4] 왜 둘이 함께 가장 넓냐면 원나라는 지도마다 영역이 이랬다 저랬다 해서이다. 반면 근세의 청나라는 영토가 고정되어 있어서 대등한 넓이로 서술. 오히려 영문위키에서는 원나라보다 청나라의 영토를 더 넓다고 보기도 한다. 참조[5] 다만 4번째 단명왕조라는 건 몽골 제국이 몽골 본토만, 그리고 이후 중국 북부와 기타 아시아 지역만 차지하고 있었던 기간은 제외하고, 남중국까지 중원을 통일한 이후 시기만 계산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몽골 제국 자체의 존속기간은 칭기즈 칸부터 시작된 기간과, 원나라가 몽골 고원으로 밀려난 이후를 감안하면 훨씬 길다.[6] 외몽골의 할하 몽골인 한정. 내몽골중국, 부랴티아러시아 소수민족으로 잔존하고 있는 형편이며 내몽골인의 경우 내몽골 내에서조차 소수다. 단 내몽골인 역시 국적이 중국인일 뿐, 만주족처럼 언어와 풍습을 완전히 잃는 정도로 동화되지는 않았다.[7]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우면서 몽골 제국이 본격적으로 중국화되긴 했지만, 쿠빌라이 칸 본인은 비록 자신을 중화 황제라 자칭한 적은 있어도 정작 한족 문화에는 전혀 익숙해지지 못했을뿐더러 심지어 중국어 한마디 할 줄도 몰랐으므로 이 역시 영 아스트랄한 건 마찬가지.[8] 내몽골의 몽골족인 차하르인은 몽골국의 할하인 및 러시아의 부랴트인, 오이라트인과 원래 사이가 나빴다. 유목민에게 부족이 다르단 건 그냥 다른 나라라는 것이다. 현재도 내몽골인과 외몽골인의 키배는 살벌하다.[9] 일 칸국, 킵차크 칸국,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10] 칭기즈 칸은 생전에 몽골인이 아닌 이민족이라도 자신을 따른다면 관대하게 받아주었다. 이는 단순히 창업군주로서의 비범함뿐만 아니라 건국 초기에 국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야율초재가 징기스칸에게 임관했을 때에는 엄연히 남송이 건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을 모두 죽이고 비옥한 농토를 목초지로 바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알아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었고, 몽골인들은 그런 것을 모를 정도로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다.[11] 여진인이나 고려인은 한인 계급으로 분류되었다.[12] 이 갑주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당연히 최우선적으로 죽었다.[13] 여자 노예가 결혼할 경우 영주가 먼저 여자와 동침하는 권리.[14] 이것은 정사초의 대의략서란 글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 정사초가 반몽감정을 아주 강하게 가졌던 전형적인 인종차별주의자라 대의략서란 글 자체에 차별주의적인 논조가 스며들어있어 이런 단지 제색호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 사회적 신분의 서열로 탈바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출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김호동).[15] 잡과 등이 이에 해당한다.[16] 영문 위키에서 제시하는 출처에 의하면 딱히 특별한 차별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의외로 원나라 왕조 아래에서 한족이 몽골인을 노예로 삼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7] 서울대 문석홍 교수의 논문을 참조. 몽골인들은 자신들을 정점으로 하여 제2계급에 색목인, 제3계급에 화북의 한인/만주인/고려인, 제4계급에 최후까지 저항했던 남송인을 분류했다. 이들은 피지배 계급은 맞았는데, 다 정복을 하지도 못했고 행정력도 부족하니 내버려 둔 것이라 보면 된다. 중동이나 러시아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18] 나중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에 귀국할 때 당시 황제인 순제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고려의 공물을 줄여달라고 답했고, 황제가 이를 들어주어 고려의 공물 상납이 크게 줄어들었다.[19] 당장 중국의 후대 유목민계 왕조인 청나라도 적극적으로 학문을 연구했다. 인도의 무굴 제국과 유럽 및 중동의 오스만 제국도 마찬가지였으며, 원나라가 특이한 케이스였다.[20] 사실 중앙의 중서성은 지방의 행성들과 동일하게 수도인근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던 곳으로 원칙상 중서성의 승상과 행중서성의 승상은 '동렬'에 위치한다. 그러나 울루스의 수장인 '카안'을 바로 옆에서 보좌하기에 어느 정도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다.[21] 한국사에서 나타나는 '정동행성'을 말한다. 정동행성은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한 기관이지만 일본 정벌이 무산된 이후에도 존치되어 고려 내정을 간섭하는 기관으로 기능했다. 이름에서 보이듯이 이 기관은 원의 지방관청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당시 한반도가 원의 영토였는지 아니면 고려가 그대로 존속했으되 심하게 간섭만 받았는지 여부를 논할 때 정동행성의 성격은 매우 중요하게 거론된다.[22] 만호들을 총괄하는 군단급. '몽골'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몽골인이었다. 병력 정수 6~7만.[23] 1익 = 만호. 단, 사이사이에 '상만호'라는 도만호부의 절반 수준의 크기의 부대도 있었다. '한군'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계급상 3번째인 한인으로 구성. 원나라는 남인들을 경계하여 군대에서 이들을 철저히 배제했다.[24] 다만 훗날의 청나라는 강남의 한족들까지 호복과 변발을 강조하고 안 하면 참수까지 시킬 정도로 호복과 변발을 강요하며 의무화했고 이를 멸망할때까지 유지했다. 그러다보니 태평천국 운동 때는 한인들이 변발을 잘랐으나 한인 전통머리인 속발을 몰라서 산발을 하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25] 물론...... 원나라의 황실가문인 보르지긴씨800년뒤에 흔적도없이 사라진다카더라....[26] 정확히 고려양의 영향을 받은 몽골의 복식이었으며 이것도 명나라 홍치제 시기에 그의 선포로 한족 복식이 전통적인 한푸로 바뀌게 된다(15세기 후반).[27] 원은 훗날 쿠빌라이 칸에 의해 파스파 문자를 새로 만들어야 했을 정도로 기록 문화가 약했다.[28] 북원이 내린 묘호. 말그대로 묘호이기 때문에 묘가 없는 명나라에서는 따로 묘호가 없다.[29] 선인보효황제는 북원이 내린 시호이며, 태조 주원장은 하늘의 순리대로 몽골로 물러가면서 자신에게 황위를 양위했다며, 순황제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원순제가 바로 이 시호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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