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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샨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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Κοϸανο
Kosh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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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 375년
<colbgcolor=#eaeb85><colcolor=#000000> 수도 바그람, 푸루사푸라[1], 탁사실라, 마투라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주요 국왕 쿠줄라 카드피세스
카니슈카 1세
언어 코이네 그리스어, 박트리아어, 산스크리트어, 토하라어
민족 토하라인, 박트리아인, 인도아리아인, 그리스인
종교 불교, 힌두교, 그리스 종교, 조로아스터교
성립 이전 인도-스키타이
인도-파르티아 왕국
월지
인도-그리스 왕국
멸망 이후 사산 왕조, 굽타 왕조, 에프탈
언어별 명칭
코이네 그리스어 Κοσσαν (코산)
박트리아어 Κοϸανο (코샨)[2]
산스크리트어 कुषाण (쿠샤나)
파르티아어 𐭊𐭅𐭔𐭍 (쿠샨)
한자 貴霜 (귀상)
1. 개요2. 대승불교와 유목 문화3. 역사
3.1. 기원과 건국 이전의 행적3.2. 건국과 발전3.3. 전성기3.4. 쇠퇴와 멸망
4. 역대 군주5. 기타

[clearfix]

1. 개요

한국어 위키백과의 쿠샨 왕조

한나라의 사절 장건이 찾아갔던 대월지인들이 박트리아를 정복하여 건국한 왕조. 전성기인 카니슈카 1세 때는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북인도를 장악한 제국이다.[3]

쿠샨인들은 본래 중국 북부의 신장감숙 일대에서 이주하여 고대 박트리아에 정착한 토하라인도유럽인 유목민인 월지 연맹을 구성하던 5부족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조의 창시자인 쿠줄라 카드피세스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이래로 그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고, 종교적으로는 힌두교를 따랐다. 그러나 이후 그들은 인도로 진출하면서 불교를 믿었고 카니슈카 1세 치세에 이르면 쿠샨 왕조 영내에서는 불교를 비롯하여 조로아스터교, 자이나교, 힌두교 등이 널리 번성하게 된다.[4] 한편 쿠샨 왕조의 치하에서 북인도와 아프간 일대는 기나긴 평화기를 맞이하였는데, 학자들은 이 시기를 '쿠샨의 평화'라는 뜻의 라틴어 '팍스 쿠샤나(Pax Kushana)'[5]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대외적으로 쿠샨 왕조는 로마 제국, 사산 왕조, 악숨 왕국, 한나라 등과 외교적인 접촉을 가졌으며 실크로드의 중계무역을 주도하면서 번영하였다.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인 부하라, 사마르칸트, 카슈가르, 야르칸드, 호탄, 간다라 등이 모두 쿠샨 왕조의 영토로 편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초원길을 제외한 해상 실크로드와 육상 실크로드의 대부분은 대략 1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쿠샨의 지배 하에 있었고, 쿠샨 군주들은 여행가들이 험준한 산맥들을 횡단하는 여행을 장려했다. 한 학자에 의하면 이때 쿠샨 제국은 "로마와 중국 사이 무역 관계의 가운데에 위치해있던 주요 문명들의 중심지"였다.

서기 3세기경에 쿠샨 왕조는 서쪽에서 일어난 사산 왕조의 적극적인 공세에 패퇴하여 그 세력이 급속히 쇠미하게 된다. 쿠샨 왕조의 중심지였던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간다라 지역을 점령한 사산 왕조는 그 지역에 봉신국인 쿠샨-사산 왕국을 설립하여 인도와의 완충국을 두었다. 한편 동쪽으로 피신한 쿠샨인들은 카슈미르펀자브 일대에서 이른바 '소쿠샨국'이라고 알려진 소규모 정체들을 세웠다. 이후 4세기경에 접어들어 북인도에서 굽타 왕조가 발흥하여 북인도를 통일하자 소쿠샨국은 그에 복속되어 사라졌으며, 쿠샨-사산 왕국은 북쪽에서 침입해 온 유목민들인 키다라에프탈에게 압도당하여 멸망하였다.

2. 대승불교와 유목 문화

이 지역에선 남인도 지역에서 출발한[6] 불교의 새로운 한 종파가 번성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오늘날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대승불교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불교라고 하면 인도나 동아시아 정도를 주로 떠올리지 중앙아시아는 불교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7]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중앙아시아 지역은 불교 역사에서 가장 큰 변혁 중 하나였던 대승불교의 발전을 주도하고 이를 중국에 전파까지 한 중요한 지역이었다.

간다라 미술의 영향은 말할 것도 없다. 흔히들 불교가 아시아만의 종교라 생각하고 유럽 문명과의 접촉은 근대에야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불교가 전파될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은 헬레니즘(그리스) 문화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승불교도 이와 교류하면서 성장했다. 불교와 헬레니즘 문화와의 접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는 《밀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으로 인도 그리스 왕국의 왕 밀린다(메난드로스)와 승려 나가세나의 대화를 다루고 있다. 이 텍스트는 상좌부 불교 문헌으로 분류되지만, 인도 북부에서 세력이 컸던 설일체유부의 교리적 영향이 엿보인다.

부파 불교에서 출가자와 재가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방식은 인도인들에게는 익숙할지 몰라도, 그리스인이나 토하라, 스키타이, 파르티아인들에게는 지나치게 생소한 문화였다. 대승 불교는 출가자와 재가자에 대한 엄격한 구분 계율을 완화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에게도 불교가 보다 빠른 속도로 보급될 수 있었다.

인도 왕조라고는 해도 도읍은 오늘날 파키스탄에 위치한 페샤와르였고, 중심지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이었다. 마우리아 왕조를 계승했다기보다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인도 그리스 왕국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북서인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셈. 그래서 오늘날 파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교 국가이지만 불교 유적도 꽤 남아있다.[8] 이집트·튀르키예·시리아 등 일부 중동 이슬람교 국가에 기독교 유적이 꽤 남아있고, 알안달루스 문명의 지배를 받았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르투갈, 지브롤터)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발칸반도가 튀르키예령인 동트라키아를 제외하면 기독교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9] 이슬람교 유적이 꽤 남아있는 것과도 비슷한 경우다.

중국에서 기마 유목민의 영향으로 바지를 입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10], 인도 스키타이인들과 토하라계 쿠샨인들의 영향으로 인도인들도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오늘날 형태의 터번[11]도 쿠샨 왕조에서 처음 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역사

3.1. 기원과 건국 이전의 행적

중국 문헌에서 '귀상(貴霜 Guìshuāng, 상고한어:*kuj-s [s]raŋ )'으로 알려진 쿠샨인은 월지 연맹을 구성하던 5부족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학자들은 월지가 인도유럽인 계통의 유목집단이었다고 주장하며, 일부는 더 나아가서 이들이 특정한 토하라인 집단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을 제안한다. 한편 이란계, 그중에서도 사카 출신이라는 가설도 학계에서는 어느정도 지지를 받고 있으다. 또다른 사람들은 월지가 원래 이란계 유목민이었으나 이후 그곳에 정착한 토하라인들과 통혼-혼혈하면서 부분적으로 동화되어 이란과 토하라적 요소를 모두 가지게 되었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사마천이 쓴 『사기』와 반고가 쓴 『한서』에서는 월지인들이 유목생활을 했으며, 오늘날의 신장 동부와 감숙 북서부의 초원 지대에 살고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체로 하서회랑타림 분지 부근에 거주했다는 것이 되는데, 이곳은 한 유목집단의 근거지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협소하기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월지인들이 사실은 광대한 몽골 초원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하서회랑을 관통하는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는 '우씨의 옥(禺氏之玉)'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한 설에 따르면 우씨(禺氏)와 월지(月氏)는 사실 동일한 음을 옮긴 것이고, 월지인들이 호탄에서 나오는 옥을 중국으로 중계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는 설명이 있다. 또한 '월지'가 즈구차zgudscha를 옮긴 말이고, 이는 곧 고대 아시리아 자료의 스쿠자Skuja와 상통하니 이것이 스키타이를 지칭한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이 맞는지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월지와 오손 등은 모두 알타이계가 아니라 인도유럽계 민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공관중에게 묻기를, "나는 천하의 진귀한 물자를 화폐로 쓰는 7가지 계책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관중이 대답하기를 "음산(陰山)의 옥돌이 그 하나이며, 연의 자산(紫山)의 은(銀)이 그 하나이며, 발(發)과 조선(朝鮮)에서 나는 무늬 있는 가죽이 그 하나이며, 여수(汝水)·한수(漢水)의 우구(右衢)에서 나는 황금이 그 하나이며, 강양(江陽)의 진주가 그 하나이며, 진(秦) 명산(明山)의 증청(曾靑)이 그 하나이며, 우씨(禺氏)의 변산(邊山)에 나는 옥이 그 하나입니다. 이는 물자가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통제하고 좁은 지역을 이용하여 넓은 지역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하의 재정은 모두 경중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관자』제23계량권 제78호, 관의 경중 제11호

이에 비해, 월지가 강성해진 흉노에게 밀려나 서쪽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몇 단계에 걸쳐 일어났던 것으로 이해된다. 먼저 기원전 176년 묵특의 공격을 받은 월지인들은 본거지인 하서회랑을 떠나 톈산 북방의 일리 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대월지(大月氏)'라 알려지게 되었고, 잔류한 집단은 '소월지(小月氏)'로 불렸다. 기원전 160년대에 들어서자 월지는 묵특의 후계자 노상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들의 왕이 사로잡혀 두개골이 '술잔'으로 바뀌는 참화를 당했다.[12] 기원전 139년에 한 무제가 흉노와의 대대적인 전쟁에 앞서 월지와 동맹을 맺기 위해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했을 당시, 장건이 흉노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흉노인들이 "월지는 우리의 북방에 있다"고 한 말을 들은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월지는 여전히 일리 강 유역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장건이 기원전 129년 흉노를 탈출하여 월지를 찾아갔을 때 그들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장건이 흉노에 잡혀 있는 동안, 월지는 흉노와 오손의 공격을 받아 일리 강 유역에서 더 서쪽으로 이주하여 아무다리야 북방으로 옮겨 갔다.
대월지국(大月氏國). 도읍은 감씨성(監氏城)[13]이고, 장안에서 11,600리 떨어져 있다. 도호에 복속하지 않으며, 호수는 10만, 인구는 40만, 병사는 10만 명이다. 동쪽으로 4,740리 가면 도호의 치소에 이르고, 서쪽으로 49일 거리를 가면 안식에 이른다. 남으로 계빈에 접한다. 토지, 기후, 물산, 민속, 화폐는 안식과 동일하다. 단봉낙타가 나온다. 대월지는 본시 이동생활을 하며 가축을 따라 옮겨다니고 흉노와 풍속이 같다.[14]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이 10여만 명이어서, 그런 까닭에 강성함을 믿고 흉노를 가벼이 여겼다. 처음에는 둔황과 기련[15] 사이에 살았으나, 묵특선우가 월지를 공파하고 노상선우가 월지의 왕을 죽여 그 머리로 술을 마시는 그릇을 삼기에 이르자, 이에 월지는 멀리 떠나 대완을 지나서 서쪽으로 대하를 공격하여 그들을 신하로 삼고, 규수의 북쪽에 왕정을 두었다. 그 나머지 [서쪽으로] 갈 수 없었던 소수의 무리는 남산의 강족에게 보호를 받으며 소월지라 불린다.

대하에는 본디 대군장이 없었고 성읍들은 때때로 군소의 수령(小長)을 두었다. 주민들은 약해서 전투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월지가 이주해 오자 모두 그에 신복하였다.[16] 그들은 모두 한나라 사신들에게 [물자를] 공급[稟]해 준다. 다섯 명의 흡후(翎侯)[17]가 있는데, 첫째는 휴밀(休密)[18] 흡후이고 도읍은 화묵성(和墨城)[19]이며, 도호에서 2,841리, 양관에서 7,802리 떨어져 있다. 둘째는 쌍미(雙靡)[20] 흡후이고 도읍은 쌍미성(雙靡城)이며, 도호에서 3,741리, 양관에서 7,782리 떨어져 있다. 셋째는 귀상(貴霜) 흡후이고 도읍은 호조성(護澡城)[21]이며, 도호에서 5,940리, 양관에서 7,982리 떨어져 있다. 넷째는 힐돈(肸頓)[22] 흡후이고 도읍은 박모성(薄茅城)[23]이며, 도호에서 5,962리, 양관에서 8,202리 떨어져 있다. 다섯째는 고부(高附)[24] 흡후이고 도읍은 고부성(高附城)이며, 도호에서 6,041리, 양관에서 9,283리 떨어져 있다. 대저 다섯 흡후는 모두 대월지에 복속해 있다.

한서』 96권 서역전 66제

3.2. 건국과 발전

기원전 250년에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전성기였던 데메트리오스 1세의 치세때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부 펀자브 지방을 지배했으나 왕들이 계속 암살당하는 혼란의 시대를 겪으며 쇠퇴했다. 이 와중에 하서 지역에 거주하던 토하라인의 일파 월지족이 기원전 175년 흉노에게 패배하여 준가리아로 이동하고, 그곳의 원주민이었던 스키타이계 샤카족들을 몰아냈다. 사카족들을 몰아낸지 얼마 되지 않아 오손이 월지족을 패퇴시켰고, 월지인들은 다시 남하하여 혼란에 빠져 있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침공, 기원전 130년경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멸망시켰는데, 이것이 쿠샨 왕조의 기원이다.

한편 마우리아 왕조가 기원전 2세기 중엽 붕괴되면서 북인도 지역은 여러 소국들이 할거하는 형태가 계속되었다. 이 틈을 타서 박트리아 지역의 그리스인들이 남하하여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웠는데, 인도-그리스 왕국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인도 문화와 융합되면서 간다라 미술이라 부르는, 동서 문화가 혼합된 형태가 나타나기도 했다.
파일:Coin_of_the_Kushan_king_Kujula_Kadphises.jpg
서기 50년경부터 서기 70년경까지 재위하며 쿠샨 왕조의 토대를 닦은 쿠줄라 카드피세스

박트리아에 정착한 대월지는 '토하리스탄'(Tokharistan)[25]이라는 왕국을 세웠으며, 토하리스탄의 5부족 가문 가운데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이끄는 쿠샨 가문은 토하리스탄을 구성하는 나머지 네 가문을 병합하여 박트리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뒤 인도 서북부로 진출하여 중앙아시아와 인도 서북 지역에 걸친 쿠샨 왕조를 이루었다. 쿠샨 왕조는 영토를 남쪽으로도 확장하여 인더스 강 입구에 이르렀고, 로마와 무역하던 부유한 해상 무역 도시들을 장악했다. 이 해상 무역 도시들이 쿠샨 왕조에 막대한 이익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대월지국(大月氏國). 거처는 남씨성(藍氏城)이다. 서쪽으로 안식과 접해 있는데 49일 거리이다. 동쪽으로 장사의 거처와는 6,537리 떨어져 있고, 낙양과는 16,370리 떨어져 있다. 호구는 10만, 인구는 40만, 병사는 10여 만 명이다. 처음에 월지가 흉노에게 멸망당하자 마침내 대하로 이주하고, 나라를 휴밀(休密)·쌍미(雙靡)·귀상(貴霜)·힐돈(肹頓)·도밀(都密)로 나누어 모두 다섯 부분[五部]의 흡후(翎侯)가 되었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서 귀상흡후인 구취각(丘就卻)[26]이 [다른] 4명의 흡후를 멸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귀상이라고 하였다. 안식을 침공하고 고부의 땅을 취하였다. 또한 복달(濮達)과 계빈을 멸하고 그 나라를 모두 차지하였다. 구취각은 80여 세에 사망했고, 그 아들 염고진(閻膏珍)[27]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시 천축을 멸하고 장군 1인을 두어 그곳을 감령케 하였다. 월지는 그 뒤로 극도로 부강해졌다. 여러 나라들은 모두 그것을 칭하여 ‘귀상왕(貴霜王)’이라 하지만, 한나라는 그 옛날의 칭호를 써서 ‘대월지’라고 부른다.

후한서』96권 서역전 66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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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샨인들은 불교가 파르티아, 중앙아시아, 중국으로 퍼져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브라만교에서는 외부인이 브라만교로 유입될 경우 낮은 카스트를 부여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외부인들인 그리스인들, 스키타이인들, 토하라인들은 불교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불교가 아시아 일대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또한 쿠샨 왕조는 무역을 통한 세수 증대를 목적으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해안 지방, 인도 북부를 아우르는 도로망을 건설하고 안전하게 관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호라산, 트란스옥시아나와 인도 북부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였다.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비하르 지방이 잉여 농산물을 수출하며 특히 많은 혜택을 보았다.

파일:48F4BCC4-4A0F-4910-8EFF-9E5D05DEC75F.jpg

3.3. 전성기

ταδo αβo ιωγo χþoν(o) αβo [ι] ιυνδo φρoαγδαζo αβo þατριαγγε þαoρε αγιτα κoo-
1년째에, 그것이 인도 *(크샤트리아 왕국) 전체에 선포되었다.
αδηανo oδo ι oα(σ)πo oδ(o) [ι ζ]αγηδo oδo ι κωζ(αµ)βo oδo ι παλαβoτρo oιδρα α αβo ι ζιριτ-
그 지역은 쿠나데아노(쿤디나)[28]와 오제노(우자인)와 자게다(사케타)와 코잠보(카우샴비)와 팔라보트로(파탈리푸트라)와 지리탐보(스리캄파)까지.
αµβo σιδηιανo πρoβαo oδo µανδαρσι ζαopανo αβo ι σινδo ωσταδo oτη(ι)α αρoυγo
그가 유언장에 언급한 통치자와 다른 *(중요한 사람들) [그들이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바쳤다.

카니슈카 시대에 새겨진 라바탁 비문 5~7행 번역문
쿠샨 왕조는 2세기 중엽 제5대 카니슈카 왕 시기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카니슈카는 다른 종교들도 후원했지만 특히 로마와 교역하던 해상 무역 도시 상인들이 많이 믿던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29] 서기 1세기부터 3세기까지는 로마 제국의 경제력이 절정이 달하면서 인도산 수입품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으며, 구자라트신드 지역의 항구도시들은 인도양과 홍해를 항해하는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무역상인들을 통해 물산을 수출하고 구매 대금으로 로마 은화를 받으며 부흥했다. 구자라트와 신드 지역 항구들의 부는 다시 도회지 상인들이 주로 믿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카니슈카 시대는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 아소카 시절에 비길 만큼 불교의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했는데, 북전불교에서 말하는 4차 경전 결집의 주관자 가니색가(迦膩色迦) 왕이 바로 이 양반이고, 중국에 대승불교를 전파하고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간다라 승려 로칵세마, 즉 지루가참(支婁迦讖)이 활동하던 시기가 차기 왕 후비슈카 치세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파일:Kanishka_I_Greek_legend_and_Helios.jpg
쿠샨 제국 후기의 주화
앞면엔 왕의 초상과 함께 그리스어로 왕중왕 카니슈카의 것(Basileus Basileon Kanishkou), 뒷면엔 일륜을 달고 있는 신의 초상과 함께 태양(Helios)이라고 새겼다. 비슷한 양식에 그리스어 대신 박트리아어를 쓴 것도 있으며, 이후 쿠샨 지역을 지배한 사산 왕조의 분봉왕들도 쿠샨 제국의 주화 양식을 본받아 사용했다.

쿠샨 왕조는 주화나 불상 같은 유물 이외에 자체적인 문헌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역사를 재구하기 힘들다. 왕조의 중심 영역은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소그디아나(사마르칸트 일대) 지역에서 토하리스탄(박트리아), 힌두쿠시 산맥을 거쳐 간다라와 인도 북부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남서쪽의 이란을 지배하던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와 국경을 접했는데 양국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확실치 않다.
佛涅槃後四百年 迦膩色加王贍部召集五百應眞士 迦濕彌羅釋三藏[...]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4백 년 뒤에, 가니색가왕[30]이 섬부주[31]에서 5백의 응진사를 불러모아 가습미라[32]에서 삼장을 해석했다...(중략)

『아비달마대비바사론』 200권
其後健陁羅國迦膩色迦王,如來滅後第四百年,因脅尊者請諸聖衆,內窮三藏、外達五明者,得四百九十九人,及尊者世友,合五百賢聖於此結集三藏。
그 뒤 건다라국(健陀羅國)의 가니색가왕은 여래께서 입멸하신 지 4백 년이 되던 해에, 협존자(脇尊者)의 요청으로 모든 성중(聖衆) 중에서 안으로 삼장(三藏)을 깊이 연구하고 밖으로 5명(明)에 통달한 자를 모았다. 그래서 승려 499명과 존자 세우(世友)를 얻었다. 이렇게 5백 명의 현성(賢聖)이 모이자 여기에서 삼장을 결집하게 되었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2권
शापस्य शान्तिभवितेत्यूचिरे च भ्रसादिता हष्कञ्चष्ककनिष्काख्याख्यस्तत्रैव पाथिवा[...] तुरूष्कान्वयोद्धूता अपि पुण्याश्चया सपा शुष्कठेनादिदेरोषु मरचेत्यादि चक्रिरे. प्राज्ये राज्यक्षणे तेषां प्राय कदमीरमण्डलम्‌ भोज्यमास्ते स बौद्धानां भ्रव्ज्योजिततेजसाम्‌. तदा भगवत शाक्यसिंहस्य परनिचरैते अस्मिन्मदीरोकधातौ साधं वर्षां ह्यगात्‌. बोधिसच्वश्च दे रोसिन्नेको भूमीश्वरोभवत्‌.
그리고 바로 이 땅에서, 도시의 창시자들은 자신의 호칭을 따서 후스카, 우스카, 카니스카라는 세 명의 왕을 불렀다[...] 이 왕들은 비록 튀르크 인종에 속했지만,[33] 경건한 행위로 피난처를 찾았다. 그들은 수스칼레트라와 다른 곳들의 수도원들, 기도원 및 그와 유사한 건물들을 지었다. 그들 왕조의 영광스러운 기간 동안, 카슈미르 왕국은 포기를 함으로써 정욕을 얻은 불교도들 대부분의 안락함이었다. 150년 동안 이 지상세계에서 축복받은 샤카 심하의 열반이 지나간 것이 바로 이 때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보살이 이 땅의 유일한 최고의 통치자였다. 그는 사다르하드바나에 살았던 유명한 나가르주나였다.

『라자타랑기니』p. 23~24

3.4. 쇠퇴와 멸망

그러나 3세기 초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이란을 장악한 사산 왕조는 쿠샨 왕조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고, 결국 260년대에는 토하리스탄과 힌두쿠시 산맥의 거의 대부분이 함락되었다. 사산 왕조는 이 지역을 '쿠샨국'(Kushanshahr)이라 부르고, '쿠샨 왕'(Kushanshah)이라고 이름붙인 분봉왕들을 세워 지배했다.

중앙아시아와 인도 지역에는 그 뒤에도 쿠샨 제국의 잔당들이 남아 있었지만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이름만 남아 연명했다. 결국 중앙아시아 지방의 분파는 기원이 불분명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키다라인(Kidarites)들에게, 북인도 지방의 분파는 인도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에게 각각 복속되어 370년대에 완전히 멸망했다.

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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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군
흡후
제2대 국군
초대 황제
제3대 국군
제2대 황제
헤라오스 쿠줄라 카드피세스 우에마 카드피세스
제4대 국군
제3대 황제
제5대 국군
제4대 황제
제6대 국군
제5대 황제
카니슈카 1세 후비쉬카 바수데바 1세
제7대 국군
초대 분봉왕
제8대 국군
제2대 분봉왕
제9대 국군
제3대 분봉왕
카니슈카 2세 바시쉬카 카니슈카 3세
제10대 국군
제4대 분봉왕
제11대 국군
제5대 분봉왕
제12대 국군
제6대 분봉왕
바수데바 2세 마히 쉬카
제13대 국군
제7대 분봉왕
키푸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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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 게임 홈월드의 주인공 종족인 쿠샨도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34]

[1] 산스크리트어로 पुरूषपुर.[2] 그 밖에 Κυϸανο, Κοþþaνο 등의 표기도 사용. 그리스 문자로 기록된 박트리아어에서 대부분의 단어 끝에 쓰인 오미크론은 발음되지 않았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며참고, 그 외에 기존 모음이 약화된 중설중모음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3] 몇몇 학자들은 쿠샨 왕조가 유목민인 월지가 세웠다는 점을 들어 유목 제국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4] 특히 불교는 인도와 페르시아를 방문하던 실크로드 상인들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중국으로 퍼져나갔다.[5] 그 유명한 팍스 로마나에서 나라를 쿠샨으로 바꾼것이다.[6] 중관파의 시조로 유명한 대승불교 승려인 용수보살 역시 남인도 데칸고원 출신이었다.[7] 이는 오늘날 이 지역엔 이슬람 신자들이 많기 때문도 있다.[8] 이러다보니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극단화된 시절 이런 불교 문화재들에 대한 반달리즘을 벌이기도 했다.(...)[9] 알바니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무슬림이 대다수인 것과 별개로 기독교가 최대 소수종교다.[10] 조무령왕 항목 참조.[11] 모자에 천을 두르는 형태의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터번이나 시크교도 터번.[12] 유목민 문화에서 상대방의 우두머리를 사로잡거나 죽여 그 두개골을 술잔 등의 물품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 흔한 것이다.[13] ‘람씨藍氏’ 혹은 ‘람시藍市’라고도 표기. Chavannes는 바다흐샨을, Tarn은 박트리아의 알렉산드리아를, Pulleyblank는 발흐 동쪽에 있는 Khulm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았다. Hulsewé는 남부 타지키스탄에 있는 Garm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였다(Hulsewé 1979 : 119).[14] 이를 통해 월지가 유목민족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15] 오늘날 중국의 치롄산맥.[16] 이 내용은 한 명의 국왕이 통치하던 박트리아(大夏)의 역사와는 잘 맞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역사학자인 스트라본스키타이계 유목집단인 아시오이(Asianoi), 파시아노이(Pasianoi), 토하로이(Tokharoi), 사카라울로이(Sakaraulai) 등이 북방에서 내려와 박트리아 왕국을 붕괴시켰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멸망하고, 그 일대가 여러 지방 세력으로 나뉘어진 이후의 사정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학자들은 이들 유목집단들을 월지, 오손, 사카 등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17] '제후'를 의미한다. Pulleyblank에 따르면 이 단어는 토하라어에서 ‘땅, 지방’을 뜻하는 '야포이(yapoy)' 혹은 '이페(ype)'라는 말과 연관된 것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학자들은 흡후가 튀르크어로 제후, 부왕을 뜻하는 '야브구(葉護, 엽호/Yabghu)'를 옮긴 말로 추정하고 있다(Hulsewé, 1979 : 121). 야브구는 '샤드(設 /Shad)'와 함께 돌궐제국 시대에 '카파칸' 다음가는 고위 관칭호였다. 대월지에 복속한 이 다섯 제후국은 아무다리야 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의 와칸 계곡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발흐에 이르기까지 드문드문 분포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Frye, 1962 : 356-358).[18] 와칸 일대라는 설이 있다.[19]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나오는 중앙아시아 도시 '코메다에(Komedae)'의 음역으로 보인다.[20] 치트랄 일대라는 설이 있다.[21] 오늘날 아무다리야 상류의 바흐시 강 일대에 위치한 도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22] 판지시르 강가에 있는 파르완으로 추정된다.[23] 중국의 학자 유태산(2005 : 124)은 이것이 박제(薄第)의 오류로 보고, 바다흐샨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정했다.[24] 카불의 음차로 추정. 『후한서』에는 다섯 번째 흡후를 고부(高附)가 아니라 도밀(都密)이라고 기록했다. 왕선겸(王先謙) 역시 대월지가 고부를 장악한 것은 안식(安息)을 격파한 뒤의 일이니, 고부를 다섯 개의 흡후 안에 포함시키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한 바 있다. Pulleyblank는 도밀古音의 고음古音, (옛 발음)을 tah-mlit로 복원했는데, 이것은 Tarmita를 옮긴 말이며 다시 이것은 오늘날 테르메즈를 지칭한다고 추정했다.[25] 쿠샨 왕조 멸망 이후에는 토하리스탄의 의미하는 바가 오늘날의 신장 지역에 해당하는“쿠차와 카슈가르에서 코초와 베슈발리크에 이르는”지역으로 바뀐다.[26] 쿠줄라 카드피세스의 음차.[27] 쿠줄라 카드피세스의 아들이자 쿠샨 왕조의 제2대 왕인 비마 탁토의 음차.[28] 아프가니스탄[29] 농촌 사회 중심의 브라만교는 상업을 통제하고 해상 무역을 금기시하다시피 했다. 상인들은 여기에 반발하여 브라만교 대신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기원한 여러 종교를 믿었으며 이러한 종교 중에서 가장 유행한 것이 바로 자이나교와 불교였다.[30] 카니슈카의 음역으로, 계니가(罽膩伽), 단계니타(壇罽膩咤), 할나시할(割尼尸割), 기니슬타(迦膩瑟咤)라고도 한다.[31] 섬부주(贍部洲): 산스크리트어 जम्बुद्वीप (잠부드비파), 브라흐미 문자 𑀚𑀁𑀩𑀼𑀤𑀻𑀧 (잠부디파) 를 음역한 것이다. 염부제비파(閻浮提鞞波)라고도 한다. 이들은 모두 인도에서 주로 자라는 잠부나무를 의미하며, 원문 그대로 해석하면 '잠부나무의 땅' 정도가 될 것이다. 잠부나무는 지금도 인도를 상징하는 나무 중 하나이다.[32] 카슈미르의 음차.[33] 이게 뭔 소리냐 할 수도 있지만, 당시 인도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유목민들을 한데 묶어 야만인이라는 뜻의 '믈레차' 혹은 '투루쉬카'라고 불렀다. 후에 튀르크인들이 중앙아시아를 장악하자 자연스럽게 이 명칭들은 튀르크인을 가리키는 단어로 굳어졌다. 또한 이 기록 자체가 튀르크인이 이미 출현한 12세기경에 작성된 점도 고려해야 한다.[34] 홈월드에서 나오는 지역명이나 종족명 대부분은 인도의 지명이나 왕조에서 따왔다. 심지어 사운드트랙도 인도 음악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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