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2 10:54:58

라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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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80년

모헨조다로 고고 유적
موئن جو دڑو اصلی نام (موہانڑوجودڑو) یعنی موہانڑو قوم کا ٹیلہ وادی سندھ کا سب سے پرانا قبیلہ میں آثار قدیمہ کے کھنڈر
1980년

탁실라
ٹیکسلا
1980년

타흐티바히의 불교 유적과
사리바롤의 도시 유적
تخت بھائی کے بدھ کھنڈر اور قربی شہر سیری بہلول کی باقیات
1981년

라호르 성과 샬리마르 정원
قلعہ لاہور اور شالامار باغ
1981년

타타의 역사 기념물
مکلی کا قبرستان, ٹھٹہ
1997년

로타스 요새
قلعہ روہتاس
}}} }}}}}} ||
파일:라호르 1.jpg
무굴 제국 시기 왕성이던 라호르 요새
파일:Badshahi_Mosque_front_picture.jpg
1673년에 세워진 바드샤히 모스크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라호르 성과 샬리마르 정원
영어 Fort and Shalamar Gardens in Lahore
아랍어 حصن وحدائق شاليمار في لاهور
프랑스어 Fort et jardins de Shalimar à Lahore
국가·위치 파키스탄 펀자브 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1년
등재기준 (i)[1], (ii)[2], (iii)[3]
지정번호 171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펀자브주의 주도
라호르
PN : لہور
UR : لاہور
EN : Lahore
국가
[[파키스탄|]][[틀:국기|]][[틀:국기|]]
상위 행정구역 라호르 지구
면적 1,772 km²
인구 13,004,135 명 (2023년)
공용어 우르두어, 펀자브어
종교 이슬람교 94.7%
기독교 5.1%
시간대 UTC +5 (PKT)
지역번호 042
우편번호 54000
웹사이트 라호르 지구정부 홈페이지

1. 개요2. 상세3. 역사
3.1. 중세3.2. 무굴 제국
3.2.1. 안정과 번영3.2.2. 혼란기
3.3. 시크 왕국3.4. 영국 지배기3.5. 현대
4. 교통5. 롤리우드6. 주변 관광지
6.1. 와가 국경 관문 (국기하강식)6.2. 미나르 에 파키스탄6.3. 샤다라 정원
6.3.1. 자한기르 영묘6.3.2. 아사프 칸 영묘6.3.3. 누르 자한 영묘
7. 여담

[clearfix]

1. 개요

카라치 다음 가는 파키스탄 제2의 도시로서 파키스탄 북동부에 있는 펀자브 주의 주도이며 파키스탄의 정치, 경제, 교통 및 교육의 중심지 중 하나다. 인도와의 국경 근처에 해당하는 인더스 강의 지류 라비 강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2023년 기준으로 도시의 인구는 1,300만 명이고 인구 밀집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바로 인접해 있는 사히왈 구와 합산하면 2011년을 기준으로 2,200만이 넘어간다. 최대 도시 카라치가 금융과 무역을 담당하고, 수도 이슬라마바드가 정치를 담당하고 있다면, 라호르는 페이살라바드와 함께 공업을 담당하고 있다.

2. 상세

유서 깊은 도시여서 유적지도 많고, 특히 도시 내의 샬리마르 정원과 라호르 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바로 옆에 레스토랑 밀집지가 있으니 관광을 목적으로 왔다면 구경하고 나서 여기서 배를 채워도 된다.

파키스탄 독립 선언이 발표된 곳이며 파키스탄이 막 분리 독립되어 나왔을 때 가장 큰 도시였다. 그리고 독립을 전후해서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무슬림간의 일어났던 많은 시위와 폭동 등, 파키스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2020년 파키스탄에서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된 도시이기도 하다. 다만 라호르 지하철 건설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돈을 거하게 빌려왔는데 이 때문에 열악한 파키스탄 재정에 큰 부담을 주고있다는 평이다.

HDI 지수는 2015년 기준 0.877로 파키스탄에선 가장 높은 수치를 자랑한다.[4]

3. 역사

파일:2560px-Wazir_Khan_Mosque_by_Moiz.jpg
1634년 세워진 와지르 칸 모스크
파일:1280px-Main_Entrance_of_Akbari_Sarai.jpg
1637년에 여행자 및 자한기르 영묘 관리자들의 숙소로써 샤다라 정권에 세워진 아크바리 사라이의 정문

지명은 인근 라비 강 혹은 대장장이를 뜻하는 로하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1∼12세기에 북인도에 유입된 이슬람 세력인 가즈니 왕조고르 왕조의 수도였고, 그 후 북인도를 평정한 무굴 제국의 수도가 된 적도 있었다. 당시 명나라베이징, 오스만 제국이스탄불과 함께 세계 3대 도시였다. 무굴 제국이 쇠한 이후에는 시크교도들이 도시를 장악하여 시크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영국의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령 펀자브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후 1947년 파키스탄 분리 독립 시기에 파키스탄령에 편입되어 1955년에 서파키스탄 주, 1970년에는 펀자브 주의 주도가 되었다.

3.1. 중세

10세기 이슬람 지리서에 처음 등장하며, 거대한 신전이 있는 힌두 도시로 묘사되었다. 1001년 ~ 1021년간 라호르는 펀자브를 지배하던 힌두 샤히 왕조의 수도로 번영했다. 하지만 1021년 술탄 마흐무드가 트릴로찬팔라를 격파, 라호르를 정복하고 부관 말리크 아야즈를 총독으로 봉했다. 1034년, 술탄 마흐무드 사후 가즈니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물탄 총독 니알티긴이 라호르를 점령했지만 1036년 말리크 아야즈가 수복하여 사망하는 1041년까지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그는 연이은 전란으로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며 우선 1037-40년간 옛 폐허를 이용해 성벽 및 성채를 세웠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말리크 아야즈 사후 1043-44년에 힌두 군대가 라호르를 포위했지만 격퇴되었고, 그후 도시는 한세기 이상 평화를 누리며 번영했다. 12세기 무렵 라호르는 펀자브의 문화적, 학문적 중심지이자 시 문학의 도시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151년 구르 왕조에게 수도 가즈니를 빼앗긴 가즈니 왕조는 라호르를 임시 수도로 삼았고, 이듬해 가즈니를 수복한 후에도 동부 수도로 여겼다.

3.1.1. 가즈니 왕조의 수도

그러던 1163년, 구르 왕조가 가즈니를 완전히 정복하자 라호르는 가즈니 왕조의 말기 수도가 되어 술탄들의 후원 하에 아프간 ~ 펀자브 일대의 명사들이 모이는 문화적 번영기를 맞았다. 당시의 시가지는 현재의 샤 알라미 바자르의 서쪽, 바티 성문 북쪽에 위치했다. 한편 1173년까지 아프간 지역을 평정한 구르 왕조의 무함마드 고리는 1180년 라호르를 포위한 것을 시작으로 펀자브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가즈니 왕조 최후의 군주 호스로 말리크는 델리 정복[5] 및 구르 조와의 친선을 도모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182년까지 신드에 이어 펀자브 대부분을 장악한 무함마드 고리는 1185년, 재차 라호르로 진격하여 인근 지역을 약탈한 후 시알코트에 군사 거점을 세웠다. 이에 호스로 말리크는 시알코트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1186년 무함마드 고리는 인질로 삼던 호스로 말리크의 아들을 석방하며 그가 방심한 틈에 다른 방면으로 2만의 병력을 보내 라호르를 습격했다. 성채에서 저항하던 호스로 말리크는 유배를 조건으로 항복했고, 호라산에 유폐되어 1192년에 사망했다. 혹은 2달의 아만 (안전 보장) 기간 후 기야스 웃 딘 무함마드가 소환해 감금했다고도 한다.

3.1.2. 노예 왕조 시기

무함마드 고리는 라호르를 기반으로 하여 1200년까지 부관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와 함께 힌두스탄 평원을 정복했고, 1202년 제국의 단독 군주가 되어 아프간으로 향하며 후자를 전진 기지인 델리 총독에 봉했다. 아이바크는 북인도 상당부를 정복했고, 1206년 주군의 암살 후 라호르를 수도로 자립했다. (델리 술탄국) 비록 1210년 이후 수도가 델리로 옮겨졌지만 라호르는 여전히 번영했고, 특히 1220년대 부터는 몽골 제국의 침공을 피해 망명해 온 시인들과 학자들 덕분에 세계 최대의 페르시아어 저작들이 모이기도 했다.

한편 일투트미쉬를 사후 1214년부터 군벌 카바차가 라호르를 장악했다가 맘루크인 일디즈를 거쳐 1217년 델리 술탄 일투트미쉬가 점령했다. 그는 아들 나시룻딘 마흐무드를 총독으로 봉했다. 그러던 1223년, 몽골을 피해 남하한 호라즘 왕조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라호르를 점령했다. 비록 이듬해 그가 북인도를 떠난 후 카바차가 재점령했으나, 1228년 일투트미쉬가 최종적으로 정복한 후 라호르는 델리 령으로 남았다. 다만 몽골 및 현지 코카르 족 등의 위협 요소 때문에 튀르크계 술탄들은 고향과 가깝고 이슬람 문화가 자리잡은 라호르 대신 후방의 델리를 제국의 수도로 삼게 되었다.

1239년 일투트미쉬 사후 혼란을 틈타 라호르는 재차 거의 자립했다. 특히 총독 카비르 칸 아야즈는 델리 정권에게서 사실상 독립했다. 다만 중앙 정부의 도움 없이 라호르는 1241년 몽골군에게 함락되어 약탈과 파괴를 겪었고, 총독 이크티야룻딘은 도주했다. 그럼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술탄 바흐람 샤는 귀족들의 정변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몽골군은 토그룰을 성주로 추대해 라호르를 계속 지배하며 물탄 등지를 노렸다. 다만 더 이상의 남하는 대장군 기야스 웃 딘 발반에게 저지되었고, 1266년 약 25년만에 라호르를 수복한 그는 마침내 술탄에 올랐다. 발반은 라비 강을 몽골에 대한 주 방어선으로 정하여 라호르 ~ 물탄 일대를 요새화하였다.

3.1.3. 쇠퇴기

1287년 발반의 사후 계승 분쟁이 일자 몽골군은 재차 펀자브를 침공했고, 1298년에는 알라 웃 딘 할지의 동생 울루그 칸이 라호르를 기반으로 몽골군에 맞섰다. 하지만 1305년에 몽골군이 다시 라호르를 공격했다. 이렇듯 라호르가 지속적으로 전방 지역이 되자, 그 대신 후방의 데팔푸르가 펀자브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1310년대 들어서는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의 활약으로 몽골군의 연례 침공 기세가 꺾이며 라호르는 짧은 중흥기를 맞았다.

하지만 라호르는 1329년 타르마쉬린, 1342년 훌레추가 이끄는 몽골군에게 점령되어 약탈을 당하며 다시 쇠락했다. 남은 투글루크 왕조 시기 동안 라호르는 델리처럼 평화를 누렸지만 소외되었고, 델리가 내전에 돌입한 1394년에는 코카르 부족장 샤이카에게 점령되었다. 1398년, 델리 원정에 나서며 라호르를 점령한 티무르는 부유하지 않아 약탈을 하지 않을 정도로 도시는 크게 쇠락한 상태였다.

티무르는 물탄의 키즈르 칸에게 라호르를 주었고, 그는 1414년 델리를 정복하여 사이드 왕조를 개창했다. 하지만 사이드 왕조는 취약했고, 1421년 코카르 부족장 무스타파 자스라트가 카슈미르 군을 격파한 후 라호르를 장악했다. 비록 델리 군대가 곧 수복했으나, 1431년 무스타파 자스라트는 재차 라호르를 점령한 후 더 나아가 델리까지 점령했다. 코카르 부족은 1432년에야 두 도시에서 물러났다.

3.1.4. 로디 왕조

1441년, 술탄 무함마드 샤 사이드는 코카르 부족의 위협을 받는 라호르를 시르힌드 총독 바흐룰 칸 로디에게 넘겼다. 이를 기반으로 펀자브 대부분을 장악한 바흐룰 칸은 3차례에 걸쳐 델리로 진격한 끝에 성공하여 로디 왕조를 세웠다. 그는 본거지이던 라호르에 사촌 타타르 칸을 총독으로 봉했다. 타타르 칸은 30여년간 재임하다가 바흐룰 칸 치세 말엽의 내전에서 시칸다르 칸 로디에게 패하고 죽었다.

시칸다르 칸이 새 라호르 총독으로 봉한 우마르 칸 사르하니는 곧 아들 사이드 칸에게 총독위를 넘겼고, 후자는 1500년 시칸다르 칸에 의해 해임되어 타타르 칸의 아들 다울라트 칸[6]으로 대체되었다. 1517년 이브라힘 칸 로디의 즉위 후 다울라트 칸과 이브라힘 칸의 숙부 알라 웃딘은 그의 중앙 집권화에 반발하며 카불의 바부르와 내통했다. 이에 바부르는 델리 지배권을 주장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사절단은 라호르에서 수개월 구금된 후에야 풀려났다.

1524년, 이브라힘 칸이 토벌대를 보내 다울라트 칸을 축출하고 라호르를 점령하자 바부르는 대군과 남하하여 빠르게 라호르와 데팔푸르를 점령했다. 다만 그 도중에 다울라트 칸의 환대를 받은 것으로 예상하다가 로디 군의 역습을 받아 패한 바부르는 라호르에 방화하고 2일 간 약탈했다. 그후 다울라트 칸은 라호르를 돌려받지 못하자 로디 측으로 배신했으나 이듬해 바부르에게 패하고 사망했다. 다만 카불이 우즈베크 인들의 공격을 받자 바부르는 알라 웃딘에게 3만 군대를 주어 델리를 점령하게 했으나, 격퇴된다.

3.2. 무굴 제국

직접 델리로 진군한 바부르는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승리하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 후마윤은 1540년, 수르 왕조의 셰르 샤 수리에게 패배했다. 후마윤은 형제들과 아그라에서 작전을 논의했는데, 이견 끝에 캄란 미르자가 라호르로 이탈해버렸다. 남은 군대와 재차 셰르 샤에 맞섰으나 패배한 후마윤은 델리를 포기, 라호르로 철수했다. 추격에 나선 셰르 샤가 곧 인근 시르힌드에 당도하자 후마윤은 사절을 보내 휴전을 제안했지만, '그대에게 카불을 남겨뒀다'는 답만이 돌아왔다. 궁지에 몰린 후마윤은 라호르를 떠나 타르 사막, 신드를 거쳐 사파비 왕조로 망명했다.

3.2.1. 안정과 번영

셰르 샤 사후 세력을 회복하여 돌아온 후마윤은 1555년 2월 라호르를 수복했고, 7월에는 델리에 입성하며 무굴 제국을 재건했다. 악바르 대제 시기 라호르는 안정을 누리며 번영했고, 1584년에는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악바르는 파괴되어 있던 성채를 재건했고, 성벽을 재건 및 동쪽으로 확장하며 샤 알라미 바자르 ~ 라라 마이단 일대까지 포함하였다. 무굴 시기 라호르 주민들은 대부분 성벽 밖의 교외 지역에 거주했다. 악바르 시기 36개의 시가지 구역 (구자르) 중 성벽 내부에는 9개만이 있었다. 또한 도시는 카스바라 불린 배후 시장 도시들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그중에는 암리차르, 바탈라, 카수르, 에미나바드 등이 있어 라호르에 식량을 공급했다.

1580년대에는 아크바리 만디 곡물 시장, 다람푸라 구역 등이 세워졌다. 이때 현존하는 하벨리 (저택)들이 대부분 세워졌다. 라호르는 1580년에 편성된 전국 12개 주 중 하나의 치소였고, 1585-86년에는 황후 마리암 웃 자마니의 동생 바그완트 다스 (조다바이)가 총독을 지냈다. 1592년에는 미래의 샤 자한이 라호르에서 탄생했다. 1598년에 아그라로 재천도된 후에도 라호르는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했고, 여러 인프라 및 종교 시설들이 세워졌다. 17세기 초엽 라호르의 바자르들은 외국인들이 자주 방문하는 등 활동적이고 다양한 물품을 구비했다. 당시 라호르는 건립 이래 가장 번영했다.

그러던 1606년, 새 황제 자한기르의 아들 쿠스라우 미르자가 시크교 지도자인 구루 아르준 데브의 축복 후 라호르를 포위했다. 아들의 반란을 진압한 자한기르는 같은해 라호르에서 구루 아르준 데브를 역모 가담 혐의로 처형했고, 이로써 본래 호의적이던 무굴-시크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한편 라호르에 묻히길 원했던 자한기르의 뜻에 따라 1637년 황후 누르 자한은 외곽의 샤다라 바그에 그의 영묘를 조성했다. 자한기르를 계승한 샤 자한 역시 라호르 성채를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1633년 나우라카 누각을 세웠다. 1635년에는 시내에 샤히 함맘을 세웠고 1641년 에 화려한 와지르 칸 모스크와 샬리마르 정원을 건설했다. 그 시기에도 교외 지역의 인구는 계속 늘어나 성내 인구의 약 6배에 이르렀다.

뒤이은 아우랑제브 역시 라비 강이 길을 틀어 성벽을 위협하지 않도록 1662년 알람기리 번드 제방을 쌓았고, 이후 중산층이 일대에 휴양 정원을 세우는 등 개발했다. 1673년에는 라호르 성채 옆에 또다른 랜드마크인 바드샤히 모스크를 세웠고, 그 이듬해에 성채에서 모스크로 이어지는 알람기리 성문을 더해 장엄함을 보였다. 하지만 아우랑제브 사후, 시크교도들이 봉기해 1709-10년에 걸쳐 시르힌드와 잘란다르를 함락하고 라호르까지 공격했다. 이에 황제 바하두르 샤 1세가 친정하여 라호르 총독과 함께 대대적으로 반격에 나서 실지를 수복했다. 그는 라호르에 슈칸 칸 바하두르와 히멧 딜러 칸 장군을 보내 구루 반다 바하두르를 잡게 했으나, 패배하자 5천의 병력을 더 주어 재차 파견했다. 이에 반다 바하두르는 라호르 인근 알할라브에 은신하다가 1711년에 재차 봉기했으나 역시 바하두르 샤에 패한 후 히마찰로 도주했다. 바하두르 샤는 이듬해 2월, 라호르에서 병사했다.

3.2.2. 혼란기

마지막으로 능력 있던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가 라호르에서 요절한 후 제국은 급격히 쇠락했다. 그의 두 아들 중 자한다르 샤가 라호르 근처에서 형제 아짐 우스 샨을 죽이고 집권했으나 곧 후자의 아들 파루크시야르에게 제위를 빼앗긴 후 죽었다. 파루크시야르는 1716년, 반다 바하두르를 처형하며 펀자브를 안정시켰다. 따라서 라호르는 평화를 회복했고, 1720년대 및 30년대 무함마드 샤 휘하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지닌 총독들이 통치하며 무탈히 보냈다. 하지만 1738년 중반부터 아프간 남부 지역을 평정한 아프샤르 왕조나디르 샤가 계속 남하하여 1739년 1월, 라호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총독 자카리라 칸 바하두르 휘하 2만 5천의 무굴 수비대는 비슷한 수의 아프샤르 군대에게 대패했고, 도시는 함락되어 약탈되었다. 다음달에는 델리마저 약탈되었다.

이로써 무굴 제국의 패권은 완전히 무너지고 라호르 역시 외침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또한 이 시기 라호르와 대양을 잇던 인더스 강 중하류 항구들이 퇴적되고 주요 무역로가 칸다하르를 지나게 되며 도시는 경제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한편 나디르 샤의 철수 후 라호르를 수복한 자카리아 칸이 1745년에 사망하자 아들들이 계승 분쟁을 벌이며 도시의 방어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1748년, 나디르 샤 사후 아프간에서 자립한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라호르를 점령했다. 다만 얼마후 마니푸르 전투에서 패배한 그가 회군하자 새 총독에 봉해진 무인 울 물크 미르 만누는 1751년, 아흐마드 샤가 재침하자 그에게 복속하여 도시를 구했다.

하지만 이듬해 아흐마드 샤는 결국 라호르를 병합했고, 1756년 무굴 대재상 가지 웃 딘 이마드 울 물크가 도시를 수복했으나 다시 1757년 아흐마드 샤가 점령하여 이번에는 아들 티무르 샤를 펀자브 총독으로 봉해 주둔시켰다. 1758년, 무굴 장군 아디나 베그 아라인은 마라타 동맹의 지원으로 라호르를 다시 수복했다. 다만 같은해 그가 급사하자 마라타 동맹이 그대로 일대를 병합했고, 영토상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1759년, 북인도 무슬림들의 초청에 따라 진격한 아흐마드 샤는 또다시 라호르를 병합한 후 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 군을 격파해 펀자브에 대한 패권을 확보했다. 다만 두라니 왕조 역시 세력에 한계가 있었기에 물탄 ~ 시알코트 영유에 만족하며 라호르에서 철수했다. (1765년)

3.3. 시크 왕국

1765년 4월, 두라니 군이 철수한 직후 시크교 세력인 방기 미슬의 레흐나 싱과 구자르 싱이 카흐나이야 미슬의 소브하 싱과 함께 카불리 말과 아미르 싱으로부터 라호르를 점령했다. 시크 군대는 4대 구루 람 다스의 탄생지인 라호르를 약탈하지 않았다. 이듬해 12월, 아흐마드 샤가 남하하여 라호르를 점령하고 레흐나 싱에게 복속한다면 펀자브 총독위를 주겠다 제안했으나 후자는 거절한 후 아흐마드 샤가 따나자 도시를 수복했다. 이미 20여년의 전란으로 파괴되어 옛 영광을 잃은 도시는 시크 지배기에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1780년에는 세 정복자인 레흐나 싱, 구자르 싱, 소브하 싱이 라호르를 1/3씩 분할 지배하였다. 이로 인한 정치적 혼란으로 펀자브의 경제 중심지는 시크 성지인 암리차르로 완전히 이전되었다. 18세기 말엽, 라호르의 번영하던 교외 구역들은 모두 버려졌고 얼마 없는 주민들은 안전한 성내에만 거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행자들은 라호르에 당도하기 전에 수 km에 걸쳐 펼쳐진 폐허 더미를 지나야 했다. 1797년, 자만 샤가 이끄는 1만 2천의 두라니 군대가 펀자브를 침공해 라호르를 일시 점령했으나 구지란왈라에 기반한 수케르차키아 미슬의 군주 란지트 싱에게 격퇴되었다.

이듬해 자만 샤는 라호르를 재차 점령했으나, 란지트 싱은 성의 보급로를 끊은 후 공세를 가하여 격파했다. 그러자 라호르 주민들은 란지트 싱에게 지배를 청했고, 1799년 그는 장모 사다 카우르와 함께 5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했다. 란지트 싱이 인근 아나르칼리에 당도하자, 라호리 성문의 수문장 무캄 딘 차우드리가 문을 열었다. 이후 시크 군대는 시내의 무슬림 구역을 약탈했고, 란지트 싱이 나서 중단시켰다. 1800년, 라호르에 화폐 주조소를 세운 그는 성채의 궁전을 개조한 후 입주했다. 1801년, 4대 교주의 탄생지에 구르드와라 람 다스를 세운 란지트 싱은 같은해 스스로 펀자브의 마하라자에 오르며 시크 왕국을 세웠다.

이후 그는 1823년까지 물탄 ~ 페샤와르 ~ 카슈미르 일대를 석권했고, 라호르는 그 수도로써 재차 번영했다. 시크 왕국 시기 라호르와 암리차르는 각각 정치, 경제적 중심지였다. 란지트 싱은 기존 무굴 건축물들을 파괴하여 그 부재로 도시를 재건했다. 특히 아시프 칸 영묘, 누르 자한 영묘, 샬리마르 정원 등지의 대리석은 벗겨져 왕국 각지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시내의 바드샤히 모스크는 화약고 및 마구간, 수네리 모스크는 구르드와라 (시크 성지)로, 마리암 자마니 모스크는 화약 공장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란지트 싱은 1812년까지 기존 악바르의 성에 해자로 구분되는 외성을 축조하여 도시의 방어력을 증강했다. 그는 또한 쇠락하던 샬리마르 정원을 보수하고, 1818년에는 5년 전의 코이누르 습득을 기념하기 위해 하주리 바그 바라다리를 세웠다.

비슷한 시기 5대 교주의 순교를 기리기 위한 구르드와라 데라 사힙이 세워졌고, 그외에도 시크 왕실은 여러 힌두 사원 및 하벨리들의 건립을 후원했다. 다만 1839년, 40년의 통치 끝에 란지트 싱이 라호르에서 사망한 후 시크 왕국은 쇠퇴했다. 후계자인 카라크 싱은 1년만에 요절했고, 그 다음인 나우 니할 역시 하주리 바그에서 사고로 단명했다. 그리고 셰르 싱이 즉위했으나 기존의 태후 찬드 카우르가 라호르 성채를 장악했고, 이에 1841년 1월 셰르 싱은 바드샤히 모스크의 미나렛에 화기를 설치해 성채를 포격했다.

비록 찬드 카우르가 곧 항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굴 시기의 디완-이-암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1843년 9월, 찬드 카우르와 친했던 아지트 싱이 라호르 인근 차흐 미란에서 셰르 싱과 재상 디안 싱을 암살했다. 이에 다음날, 디안 싱의 아들 히라 싱이 시가지를 점거하고 암살자들을 처단한 후 5세의 둘리프 싱을 옹립했다. 하지만 이후 재상 지위를 두고 연이어 정변이 발생하며 시크 왕국은 더욱 약화되었고, 1차 영국-시크 전쟁에서 패배해 잘란다르 및 카슈미르를 상실하며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3.4. 영국 지배기

1846년 2월, 둘리프 싱을 호위하며 영국군이 라호르에 입성한 이래로 도시는 사실상 영국령이 되었다. 1848년의 2차 영국-시크 전쟁 후 둘리프 싱마저 폐위되며 펀자브 전역은 영국령이 되었다. 당시 라호르의 인구는 약 12만명이었고, 성벽으로 둘러진 시가지 밖에는 마을들이 흩어진 평원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었다.[7] 영국은 저항 의식이 강하고 역병이 잦다 여겨진 라호르 성을 건들지 않았다.

대신 그 근교 지방 및 펀자브의 비옥한 농촌에 투자했고, 그중 라호르 남쪽에 세워진 '도날즈 타운' (시빌 스테이션)이 펀자브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1851년 교회가 된 아나르칼리 영묘, 창고가 된 나와브 바하두르 칸 영묘, 철도 관리국이 된 다니 안가 모스크, 와인 가게가 된 미르 만누 영묘 등 기존 무굴 시기 기념물들은 개조 혹은 훼손되었다. 또한 비서관, 본부장, 공공 사업부 등의 관사 건축에도 옛 부재들이 활용되었다.

1857년 세포이 항쟁 직후 영국은 성밖에 라호르 역을 세우며, 추후의 저항을 방지하도록 요새처럼 설계했다. 성벽 동남쪽의 옛 미안 미르에는 병영인 칸톤이 세워져 영국인만 왕래가 허가되었다. 한편 시빌 스테이션에는 행정 청사인 더 몰이 세워져 현지인의 왕래가 허가되었다. 1870년 2월에는 알프레드 왕자가 라호르를 방문, 바하왈프르 및 잠무 등 왕공들의 환영을 받았다. 1887년 빅토리아 여왕의 주빌리 시기에는 라호르 박물관 및 마요 산업 예술 학교 등 인도-사라센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졌다.

1901년 기준 라호르 성내에는 2만 7백여 가구가 살았고, 광역권의 인구는 약 20만에 달했다. 1921년에는 정원 도시인 포쉬 모델 타운이, 1930년대에는 더 몰 근처에 크리샨 나가르 구역이 조성되는 등 라호르의 시가지는 더욱 성밖으로 확장되었다. 한편 1929년 12월에 라호르의 브라들라우그 홀에서 인도 독립 선언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인도 수와하즈 깃발이 채택되었다. 이에 영국은 라호르 감옥에 자틴 다스, 바가트 싱 등의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했다. 1940년에는 무함마드 알리 진나의 주도로 파키스탄 분리를 요구하는 라호르 방안이 전인도 무슬림 연맹에서 통과되었다.

3.5. 현대

1941년 기준 라호르의 67만 인구 중 64.5%가 무슬림, 35%가 힌두 및 시크교도, 0.5% 가량이 기독교도였다. 힌두 측은 통계의 오류를 지적하며 비율이 54대 45 정도고, 힌두-시크 측이 경제와 교육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며 래드클리프 라인 (인도-파키스탄 분단선)에서 라호르의 인도 편입을 주장했다. 실제로 2/3 상점, 80%의 공장은 힌두-시크교도 소유였다. 영국 당국도 라호르의 인도 편입을 고려는 했으나 이미 캘커타를 이미 인도령으로 했기에 파키스탄에 대도시가 부족하다 여겨 기각했다. 인도-파키스탄 분할기에 라호르는 상호 정체성들 간의 극심한 분쟁에 휩싸였다.

영국군의 존재에도 충돌은 이어져 1947년 봄에만 8만 2천 가구가 파괴되었고, 8월까지 2/3의 비무슬림 주민들이 인도로 떠났다. 그 직후의 폭동에서 힌두 구역이던 샤 알라미 바자르 일대가 전소되었고, 독립 선언이 있던 8월 14일에서 3일이 지난 후에야 라호르는 파키스탄에 주어졌다. 비슷한 시기, 북인도를 떠난 수십만의 무슬림 이주민들이 유입되어 몇달 전 힌두 주민들이 떠난 자리를 채웠다. 다만 라호르의 경제는 크게 약화되어 산업 생산량이 66% 감소했고, 1950년까지도 제조업 공장 중 27%만 기능했다. 따라서 파키스탄의 중심지는 경제가 어렵고 인도와 가까운 라호르 대신 안정적이며 산업 기반이 더 튼튼한 카라치로 고정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라호르는 경제, 문화적 성장세를 회복했다. 1949년부터 샤 알라미 바자르의 재건이 시작되었고, 1951년에는 알라마 무함마드 이크발의 무덤이 세워졌다. 1955년, 라호르는 서파키스탄의 수도가 되었다. 1968년에는 파키스탄 방안이 통과된 곳에 미나레 파키스탄이 세워졌고, 유엔의 자금 지원으로 라호르의 복구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1970년 서파키스탄의 해체 후 라호르는 파키스탄령 펀자브 주의 주도로 남았고, 1974년 2차 이슬라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1992년, 인도의 바브리 모스크 파괴에 반발하는 폭동이 벌어져 마하라자 셰르 싱 영묘와 더 몰 인근 자이나교 사원 등 비무슬림 유적들이 공격을 받았다. 1996년에는 카다피 경기장에서 국제 크리켓 월드 결승전이 열렸다. 2009년부터는 세계은행의 원조로 구도심에 대한 복원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4. 교통

4.1. 도시철도

5. 롤리우드

라호르는 파키스탄 영화산업의 중심지로 인도의 봄베이발리우드가 있다면 라호르에는 롤리우드가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곳에서 매년 200편이 넘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우리나라도 한 해에 제작되는 영화가 100편 정도 수준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대단한 규모였다.[8]

그러나 현재 파키스탄의 영화산업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매년 평균 25편 정도만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매년 1,500편 이상 개봉하는 인도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몰락한 것이다. 현재 파키스탄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인도 영화에 압도적으로 기술에서 여러 모로 뒤쳐져 있으며, 영화 제작 환경 및 제작된 영화들의 수준이 이웃국가 방글라데시에 비견할 수준이다. 2000년대 이후 외국 자본의 투자로 만들어진 일부 영화가 종종 해외로 소개되었지만 그 조악한 기술력과 비주류 국가의 영화라는 태생적 한계로 큰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

이렇게 세가 줄게된 이유에 대해 발리우드의 시장 장악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보다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득세와 지아울 하크 정권 하 검열이 강화된 탓이 크다. 그렇다보니 2010년대 와서 파키스탄 정부가 다시 영화 산업을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파키스탄 영화계의 반응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제작되는 영화가 인도군을 타도하고 자국군을 칭송하는 프로파간다 영화 위주이기 때문. 당연히 재미도 없기 때문에 파키스탄 내에서는 이런 선전물보다는 자국에서 금기시된 인도 영화를 몰래 찾아보는 일이 많다고 한다.

6. 주변 관광지

랜드마크 격인 성채와 여러 모스크 및 시장들을 갖춘 구도심 외에도 몇가지 볼거리들이 있다.

6.1. 와가 국경 관문 (국기하강식)


인도 암리차르로 이어지는 국경선 와가(Wagah)와 가까우며, 이곳에서는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국기하강식이 벌어진다. 두 나라는 라이벌 관계로 여기서 서로 자존심 배틀을 매일 벌이는데 거의 공연에 가까운 과장된 퍼포먼스 대결을 한다. 관객석에서 내외국인들은 자유롭게 구경하는데 양측이 A매치 응원하듯 환호하고 응원구호를 외치고 국기를 흔들면서 애국심을 불태운다. 다만 파키스탄 쪽 국경은 아무래도 인도에 비해 좀 덜 화려하고 관객석 크기도 작다.

6.2. 미나르 에 파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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مینارِ پاکستان (파키스탄 탑)

독립을 기념하여 1940년 3월 23일, 전인도 무슬림 연맹이 파키스탄 분리 (두 국가 해법)를 골자로 한 라호르 협정을 가결한 장소에 조성하였다. 1960 ~ 1968년에 걸쳐 세워졌고, 무굴 제국 건축을 디자인에 투영하려 시도했다. 시가지 북부의 대 이크발 공원에 위치하며, 높이가 70m라 멀리서도 잘 보인다.

파키스탄의 정체성을 담은 건축물로.우표 등에 들어가는 등 상징성이 크다. 1999년, 파키스탄을 방문한 인도 총리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가 다녀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6.3. 샤다라 정원

شاہدره باغ

구도심에서 라비 강 건너편에 조성된 무굴 제국기 정원으로, '왕의 길 정원'이란 뜻이다. 자한기르 영묘를 대표로 하여 아사프 칸, 누르 자한, 도히타 운 니사 베굼 등의 무덤 및 아크바리 사라이 등 무굴 제국기 건축물들이 모여 있다. 근처의 샤다라 바그 기차역 혹은 강 건너편의 샤다라 버스 터미널을 통해 접근 가능하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누르 자한 영묘, 아사프 칸 영묘, 아크바리 사라이, 자한기르 영묘 순으로 펼쳐져 있다. 다만 영국 지배기에 정원을 가로질러 철길을 내버리는 바람에 누르 자한 영묘는 분리되어 있고[9], 무덤 내 정원 일대가 대부분 훼손되었다. 크기는 자한기르 영묘가 아사프 칸 영묘의 4배고, 누르 자한 영묘는 그 중간 쯤이었으나 상술했듯이 후자 권역이 크게 줄어든 상태이다.

6.3.1. 자한기르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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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4대 황제 자한기르의 무덤으로, 파키스탄의 유일한 무굴 황릉이다. 자한기르의 사후 아들이자 후계자인 샤 자한에 의해 1627년 ~ 1637년간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던 딜쿠샤 (희망의 궁전) 정원 일대에 지어졌다. 건설 비용은 약 백만 루피 정도였다.

기존의 후마윤, 악바르 영묘보다는 작은 편이지만 페르시아식 정원 내에 있고 붉은 빛의 사암을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악바르 영묘 및 타지마할처럼 4개의 미나렛을 갖추고 있다. 내부의 화려한 타일 (카쉬) 장식으로도 유명하다.

다만 시크 왕국란지트 싱에 의해 외벽 일부가 허물어져 암리차르 황금사원의 부재로 쓰이고, 정원에 시크 장군들이 안장되는 등 훼손을 겪었다. 영국 지배기에는 서쪽에 철도가 놓였고, 1889-90년에 보수되었다. 수량이 많은 라비 강과 가까운 탓에 1988년 등에는 홍수로 침수되기도 했다.

6.3.2. 아사프 칸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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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타즈 마할의 부친이자 누르 자한의 오빠이며 자한기르샤 자한의 치세에 대재상을 무려 30년간 (1611년 ~ 1641년) 역임한 페르시아계 권신 아사프 칸 (미르자 아불 하산 자흐)의 영묘. 아시프 칸으로도 표기되는 그는 또한 혈연적으로 아우랑제브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1641년 아사프 칸이 사망한 후 샤 자한의 명으로 1641년까지 영묘가 세워졌다.

본래 타지마할처럼 흰 대리석으로 덮혀 있었으나, 시크 왕국 시기 보히수가 심어져 가려지고 대리석과 내부의 보물들이 전부 약탈되어 암리차르 황금사원 등 시크교 건축물의 부재로 쓰이며 크게 훼손되었다. 비록 영국 지배기에 보리수는 뽑혔지만, 전반적으로 현재까지도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 상태이다. 그나마 영묘 벽의 무카르나스, 돔 내부 천장 정도 장식과 석관이 상당 부분 남아있다.

6.3.3. 누르 자한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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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기르가 가장 사랑한 부인이자 아사프 칸의 동생인 누르 자한의 무덤. 대바분 1645년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4년간 30만 루피의 비용으로 세워졌고, 붉은색 사암 위주로 지어졌다. 다만 19세기, 란지트 싱에 의해 상당수의 부재가 약탈되었다. 1875년에는 페샤와르-라호르간 철도 건설로 정원 동쪽 부분이 잘려나가는 피해를 입었다. 근래 와서야 영묘 자체가 복원되었으나, 그 주변부는 아직도 어수선하다.

7. 여담

  • 현지에서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bts 테마 카페가 생겼는데, 이름이 '방타니스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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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근 바하리아 마을에 에펠탑 모조품이 있다.


  • 세계 최악의 대기오염을 자랑하는 도시다. 미세먼지 지수가 평균 300이 넘으며 심한 곳은 600이 넘어간다. 그러나 이 정도의 오염조차 이 도시의 주요 문제들 중 하나에 불과한 수준이다. 각종 비위생적이고 위험천만한 일들이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얼마나 높은 수치냐면, 한국의 대도시인 대구광역시의 HDI 지수가 0.830이다.[5] 이는 꼭 후일 몽골에게 화북을 뺏긴 금나라가 남송 정복을 시도한 것과 유사하다.[6] 구루 나나크의 고용인[7] 그외에 무굴 시기 정원, 무덤 및 시크 시기 군사 시설들이 있었다[8] 물론 당시에도 인도는 매년 1000편 가까운 영화가 개봉해서 편 수로는 압도적이기는 했지만, 인구/경제/기술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하면 파키스탄 쪽도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9] 아사프 칸 영묘가 바로 옆이지만 철길 위에 육교나 건널목이 바로 없어서 꽤 돌아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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