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27 12:10:09

타타(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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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마클리 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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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대륙의 몇 안되는 중앙아시아 양식 건축물인 샤 자한 모스크

1. 개요2. 역사
2.1. 마클리 묘원2.2. 샤 자한 모스크

1. 개요

우르두어 ٹھٹہ
신드어 ٺٽو
영어 Thatta

파키스탄 신드 지방 남부의 도시이다. 카라치하이데라바드에서 각각 동쪽과 서남쪽으로 70km 씩 떨어져 있다. 인구는 약 25만명으로, 파키스탄 내에서 중소 도시에 불과하지만 과거 신드 지방의 정치 & 문화의 중심지로써 여러 유적이 남아있는 역사 도시이다. 특히 중세 숨라, 삼마, 타르칸 왕조의 수도였고, 무굴 제국기에도 신드 주의 치소로 번영하였다. 다만 1555년 포르투갈 제국의 습격과 1637년의 모래 폭풍으로 도시는 점차 쇠퇴하였고, 뒤이은 칼호라 왕조와 탈푸르 왕조 시기 하이데라바드가 수도가 되며 신드 지방의 정치 중심지는 그곳으로 옮겨졌다. 경제 중심지 역시 영국에 의해 개발된 카라치로 옮겨졌다. 시가지는 중앙의 호수와 농경지로 양분되어 있고, 서쪽의 마클리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마클리 묘원이 있다.

2. 역사

신드 지방의 고대 중심지이던 데발 (현 밤보르 유적, 타타에서 서쪽 30km 지점)이 711년 무함마드 빈 카심의 신드 정복 당시 파괴된 후 신드의 중심지는 북부의 아로르 (현 수쿠르 인근)와 중부의 만수라 (브라마나바드)로 옮겨졌다. `10세기 들어 물탄과 마찬가지로 타타에는 쉬아 이스마일파 이슬람이 전래되었다. 그러다 11세기 신드 지방을 정복한 술탄 마흐무드는 타타에 총독 압둘 라작을 봉하였는데, 마수드 1세의 사후 가즈니 왕조가 쇠퇴하자 1051년 물탄 출신의 현지 부족장 이븐 수마르가 타타를 기반으로 숨라 왕조를 세워 자립하였다. 숨라 군주들은 (아랍 여행자들의 기록에 나오듯) 대부분 이스마일파였기에, 타타의 이스마일파는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한때 펀자브 남부까지 영유했던 숨라 왕조는 13세기 들어 델리 술탄국에 밀려나, 14세기에 들어서는 신드 남부만을 영유하게 되었다. 1335년 숨라 왕조는 자트인들이 세운 삼마 왕조에게 신드 남부를 잃고 동북쪽의 우마르코트로 축출되었다. 이후 신드를 지배하게 된 삼마 왕조 역시 타타를 수도로 삼았다. 삼마 왕조는 당시 쇠퇴하던 델리 술탄국에게서 사실상 자립하였고, 이에 토벌에 나서려던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는 진군 도중 병사한다. 비록 그 후계자인 피루즈 샤에게 복속되긴 했지만 1398년 티무르의 델리 원정 후 삼마 왕조는 재차 독립하였다. 역시 3세기 가량 이어진 삼마 왕조의 지배 하에 타타는 이스마일파에서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도시 내외에 세계유산인 마클리 묘원을 비롯한 여러 역사적인 건축물이 세워졌다.

그러던 1479년 티무르 제국후세인 바이카라가 임명한 칸다하르 총독 주눈 (둘눈) 베그와 샤 베그 아르군 부자는 점차 발루치스탄 방면으로 진출하며 삼마 왕조와 충돌하였다. 다만 1507년 주눈 베그[1]우즈베크인에 패해 전사하였다. 뒤를 이은 샤 베그는 1508년 카불의 티무르 왕공 바부르가 공격해오자 우즈베크의 샤이바니 칸에게 복속하여 도시를 지켰다. 이후 바부르는 우즈벡 인들과 싸우는 데에 치중하여 샤 베그는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결국 도시를 지키기 어렵다 판단한 그는 1520년 새로운 거점을 찾아 신드를 침공하여 삼마 군주 잠 페로즈를 격파한 후 타타를 점령하였다. 이후 양측은 휴전을 맺어 신드를 남북으로 분할, 남부는 아르군 왕조가 지배하고 북부는 삼마 왕조가 유지하기로 하였다.

다만 얼마후 잠 페로즈가 휴전을 깨고 남하했지만, 샤 베그에 패하여 구자라트로 도주하였다. 이로써 신드 지방은 몽골-튀르크계인 아르군 왕조 하에 통합되었다. 1522년 마침내 바부르가 칸다하르를 함락하자, 샤 베그는 신드 지방의 기존 중심지 타타 대신 고향과 가까운 바쿠르 (현 수크르 인근)를 수도로 삼았다. 1524년 샤 베그의 사후 계승한 아들 샤 후세인은 바부르의 이름을 쿠트바에 넣고, 1528년 그의 명의로 란가 술탄국령 물탄을 공격해 점령하는 등 (역시 북인도로 거점을 옮긴) 무굴 제국에 복속하였다.[2] 1540년, 수르 제국에게 축출된 무굴 황제 후마윤이 신드로 피신하여 샤 후세인에게 원군을 요구하였다. 이에 샤 후세인이 거부하자 후마윤은 무력으로 신드를 정복하여 델리 수복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으나, 결국 실패한다.[3]

이후 샤 후세인이 노쇠하자 1554년 신드 귀족들은 아르군 왕조의 방계 가문 출신인 미르자 무함마드 이사 타르칸을 군주로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내전 도중 무함마드 이사는 뭄바이 인근 바세잉의 포르투갈 인들에게 지원을 청하였고, 이에 1555년 페드루 바레투 홀링 휘하의 7백명과 28척의 함대가 파견되었으나 이미 무함마드 이사가 내전을 승리하고 타르칸 왕조를 세운 후였다. 더이상 협조가 필요하지 않은 타르칸 조가 용병료 납부를 거부하자, 분노한 포르투갈 인들은 무방비 상태이던 타타를 급격하여 수천의 주민을 학살하고 도시를 약탈하였다. 그럼에도 1560년대 타타를 방문한 포르투갈인 지아구 두 쿠투는 '오리엔트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중 하나'라고 묘사하였다.

다만 무함마드 이사는 곧 마흐무드 코칼타쉬의 도전에 직면, 내전 끝에 양측은 각각 신드 남부와 북부를 분할 지배하기로 합의하였다. 1567년 무함마드 이사가 사망하자 아들 무함마드 바키가 계승하였고, 1573년 악바르 대제는 신드 북부를 정복하였다. 1585년 무함마드 바키가 자살하자 아들 미르자 자니 베그가 계승했는데, 1591년 악바르 대제는 대군을 보내어 신드 남부를 침공하였다. 자니 베그는 저항 끝에 항복하였고, 신드 전역은 무굴 제국령이 되었다. 악바르 대제는 관용을 베풀어 자니 베그를 그대로 신드의 수다바르 (총독)에 봉하였고, 따라서 타르칸 왕가는 계속해서 타타를 기반으로 신드를 다스렸다. 1599년 자니 베그가 병사하자 아들 미르자 가지 베그가 총독위를 계승하였다.

17세기 초엽 왕자 시절의 샤 자한은 부왕 자한기르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후 타타에 피신하였고, 1626년 그의 아들 루프탈라가 타타에서 탄생하였다. 체류 동안 주민들의 환대를 받은 그는, 1628년 황제가 된 후 타타를 물탄의 관할에서 자립시켜 현대의 신드 경계와 거의 같은 주로 편성하였다. 1637년 모래 폭풍으로 도시가 크게 파괴되자, 재건에 나선 샤 자한은 늘 염두에 두던 중앙아시아의 고토 수복 (티무르 제국의 복원)의 상징으로써 타타에 티무르 양식으로 세운 샤 자한 모스크를 건립하였다. 다만 이어진 사마르칸트 원정은 실패하였고, 타타의 재건은 1659년 샤 자한의 아들이자 그 역시 신드 총독으로 재임하며 타타에 얼마간 머무른 아우랑제브 대에야 완료되었다.

타타에는 1632-62년 영국 동인도 회사, 1652-6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있었고 양측은 상호 대립하였다. 1650년대 무렵 타타에는 2천개의 베틀이 있었고, 그에서 생산된 비단과 의류는 아시아 각지와 포르투갈 등지로 수출되었다. 그외에 가죽 등도 수출되었다. 당시 타타를 자주 왕래하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는 그 부유함을 기록하였고, 동시에 민간 환관인 히즈라가 활동하는 등 자유로운 분위기도 있었다. 신드의 주요 항구로 번영하던 타타는 본래 도시를 지나던 인더스 강이 퇴적으로 인해 17세기 후반 무렵 동쪽으로 물줄기를 틀자 항구 기능을 상실하였다.[4] 이로써 유럽 상인들이 철수한 후에도 힌두 상인들이 (유럽 상선 대신) 자신들의 선박을 이용하여 인도양 교역에 종사하였다.

타타의 힌두 상인들은 오만무스카트와 주로 교역하였고, 무스카트의 첫 힌두교 사원이 타타의 바티아 카스트에 의해 세워질 정도였다. 18세기 초엽에도 타타는 여전히 신드의 경제 중심지이자 인도 최대의 직물 산업 도시 중 하나로, 인구는 20만에 달하였다. 한편 무굴 제국의 쇠퇴 후 신드 북부에서 자립한 칼호라 왕조는 1737년 나디르 샤의 북인도 침공을 틈타 타타를 점령하였다. 그 무렵 타타는 신드 북부의 쉬카르푸르나 구자라트 등지에 무역 주도권을 내어주며 쇠퇴하였다. 특히 무굴 제국의 쇠퇴기에 인더스 강의 치수 산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퇴적이 심화되며 타타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를 반증하듯 1758년 영국인들이 한세기 만에 타타로 돌아와 상관과 공장을 세웠으나 1775년 재차 철수하였다.

18세기 말엽 타타는 발루치계 탈푸르 왕조령이 되었다. 19세기 초엽 타타의 인구는 한세기 전의 1/10에 불과한 2만에 그쳤다. 1843년 미아니 전투에서 찰스 제임스 네이피어의 영국군이 탈푸르 군대를 격파하고 신드를 정복하였다. 영국 당국은 신드의 주도를 하이데라바드에서 카라치로 이전하였다. 인도 제국령 봄베이 국에 편성된 타타는 식민 시대에 완전 소외되어 더욱 쇠퇴하였다. 1920년 당시 인구는 1만을 겨우 넘긴 수준이었다.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당시 타타는 다른 신드 지방의 도시들처럼 종교간 소요를 겪지 않고 상대적으로 조용한 시기를 보냈다.[5] 힌두 주민들은 1948년 1월의 카라치 폭동 후에야 인도로 떠났는데, 남은 이들도 상당수 있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1970년대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정권기에 타타의 유적들은 복원이 이루어졌고, 몇몇 산업들이 타타로 이전되어 현재와 같이 인구 20여만의 중소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2.1. 마클리 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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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샤 자한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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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세인 바이카라의 아들 바디울 자만의 반란을 도우며 그를 사위로 삼았고, 1506년 그의 집권 후 조정의 요직을 차지함. 한편 주눈 베그의 아들 무함마드 무킴 칸은 1502년 울루그 베그 2세의 사후 혼란에 빠진 카불을 장악했으나 1504년 바부르에게 축출됨[2] 그는 아들 미르자 아스카리를 물탄 총독에 봉하고 란가 술탄국 시절의 고관 란가르 칸에게 그를 보좌하게 한 후 타타로 향했는데, 그 직후 반란이 일어나 란가 술탄 마흐무드 2세를 복위시키고 무굴 제국에 복속하였다. 그러단 1541년 수르 제국의 셰르 샤가 물탄을 점령하며 란가 술탄국은 완전히 멸망한다[3] 이후 후마윤은 아르군 조와 휴전을 맺은 후 1543년 칸다하르로 향하여 사파비 왕조에 망명한다.[4] 현재 인더스 강은 타타에서 동쪽으로 8km 가량 떨어져 있다[5] 신드 지방 자체에서도 1947-48년간 살해된 힌두교도의 숫자는 5백이 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