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리차르 황금사원의 전경 |
ਹਰਿਮੰਦਰ ਸਾਹਿਬ(하르만디르 사히브) (펀자브어)
Amritsar Golden Temple (영어)
1. 개요
인도 펀자브 암리차르[1]에 위치한 시크교 최대 성지. 시크교의 경전이자 마지막 구루인 구루 그란트 사히브가 안치되어 있다.휘황찬란한 황금빛 자태로 유명한 건축물로, 무려 750kg에 달하는 24K 순금이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다.[2] 시크교의 제5대 구루인 구루 아르잔이 1589년 지은 이래로 시크교의 최고 성소로 여겨졌다. 무굴 제국, 두라니 왕조 시절 이슬람의 탄압을 받아 여러 차례 훼손과 파괴를 반복하다가, 1800년대 초에 시크 왕국의 란지트 싱이 황금을 기부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원 전체에 덮인 황금은 162kg 정도였으나, 1990년대에 대대적인 공사를 거치며 500kg에 달하는 순금을 새로 추가했다. 이후에도 꾸준하게 황금을 바르면서 현재는 약 750kg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금으로 덮여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건물에 박힌 수많은 보석과 준보석, 내부에 장식된 예술품들을 생각해보면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시크교의 창시자 구루 나나크가 평생을 걸식을 하며 살아왔고 시크교의 교리인 '평등'을 행하는 의미에서 종교나 국적 등의 조건을 전혀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든 무상으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한다.[3] 때문에 관광객에겐 문화유산 건축물이면서 무료 식당이자 무료 숙박시설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엄청나게 긴 줄과 그걸 다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의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시크교 교리 자체가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어서 이러고도 돈이 남는다.
2. 역사
2.1. 구루 아르잔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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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구루 아르잔 | 사원 건설을 감독하는 구루 아르잔 |
시크교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람다스푸르도 승승장구했다. 제5대 구루 아르잔은 시크교도들의 기부와 자원봉사를 받아 마을을 거대한 도시, 즉 현재의 암리차르로 성장시켰다. 구루 아르잔은 1581년 처음 사원을 짓기 시작했다. 사원을 짓는 동안 인공 연못의 물은 싹 빼낸 뒤 8년 동안 공사를 진행했다고. 구루 아르잔은 일부러 도시보다 낮은 곳에 사원을 지어 구루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고자 했다. 또한 사원의 사방에 문을 내어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시크교의 교리를 강조했고,[5] 사원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오직 하나만 만들어 수행자들이 결국 다다르는 곳은 하나라는 가르침을 담았다. 또한 사원의 주춧돌을 놓는 행사를 거행할 때는 라호르에서 수피즘 성인 미안 미르(Mian Mir)를 초대해 시크교의 다원주의와 관용을 보여줬다고 한다.[6]
1589년 벽돌로 지은 사원이 완공됐고 축성식이 끝나자 연못에 물이 채워졌다. 1604년 8월 16일에는 구루 아르잔이 시크교의 핵심 경전인 구루 그란트 사히브의 정리집필을 끝마치고 첫 필사본을 사원에 안치했다. 시크교의 최고 지도자인 구루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지어놓은 사원이었으니 완공되자마자 시크교의 최고 성지이자 격높은 사원이 되었으며, 시크교도들은 '이 사원 하나를 순례하는 것이 인도 전역의 힌두 성지 68개를 순례하는 것보다 낫다'며 극찬했다.
2.2. 탄압과 훼손
그러나 기껏 지어놓은 사원은 무굴 제국 시대 들어서 엄청나게 탄압받기 시작한다. 이슬람 제국이었던 무굴 제국 입장에서는 시크교도들이 이 사원을 중심으로 결집하며 세를 불리는 것이 굉장히 아니꼬웠기 때문. 자한기르 황제는 구루 아르잔을 끌고가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려 시도했지만 구루 아르잔이 거부하자 고문한 뒤 죽여버렸다. 구루 아르잔의 아들 구루 하르고빈드는 암리차르에서 무굴 군대와 전투를 치렀고 1635년에는 키랏푸르 일대로 쫒겨났다. 사원은 시크교의 이단 종파[7]에게 점령당했고 시크교도들은 100년이 지난 뒤에야 이 사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원은 이 이후에도 무굴 제국, 두라니 왕조 등 이슬람 왕조들에게 수 차례 훼손당했고, 1760년대에 새로 재건한 뒤 1800년대 초까지 수없이 개축공사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암리차르 황금사원 수난사 | |
1709년 | 라호르 총독은 시크교도들이 디왈리 축제에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시크교도들이 사원에 모여 저항하자 결국 1716년 지도자 반다 싱을 비롯한 시크교도들을 대거 체포해 처형했다. |
1737년 | 무굴 제국의 총독이 사원의 지도자였던 마니 싱을 체포해 처형하라 명령했다. 그는 마세 칸 장군을 시켜 사원을 점령, 사원을 소녀 댄서들을 위한 공연장으로 개조해버리고 연못을 더럽혔다. 분노한 시크교도들은 1740년 8월 사원 내부에서 마세 칸을 죽여버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
1746년 | 무굴 제국의 관리 라크팟 라이가 사원의 연못을 모래로 메워버렸다. 3년 뒤 펀자브 총독 무인 울물크가 전쟁에서 시크교도들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연못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
1757년 | 두라니 왕조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도축한 소의 내장과 오물들을 연못에 부어 사원을 더럽혔다. 시크교도들은 즉시 연못을 복구했다. |
1762년 |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돌아와 화약으로 사원을 폭파했다. 1764년부터 기부금으로 재건을 시작해 1776년 공사를 완료했다. 1784년에는 연못을 두르는 길을 포장했고 인근 라비 강에서 신선한 물을 끌어와 연못으로 연결했다. |
1764년 | 12월 1일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아프간 군대가 사원을 다시 공격했다. 구르박쉬 싱을 비롯한 29명의 시크교도들이 맞서 싸웠으나 수적 열세에 밀려 결국 모두 죽임당했다. 사원은 3번째로 파괴당했다. |
2.3. 란지트 싱의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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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란지트 싱 | 사원 공사를 둘러보는 란지트 싱 |
2.4. 블루 스타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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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블루 스타 작전으로 파괴된 사원[8] | 사원으로 진입하는 인도 장성들 |
시크교 무장단체들은 장갑관통기능이 있는 중국산 로켓추진유탄발사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정부군은 탱크와 중화기를 끌고선 황금사원 내부로 쳐들어갔고 시크교도들은 요새화된 사원에서 농성하며 머신건과 대전차화기로 맞섰다. 24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정부군이 사원을 장악했으며 군인 83명이 사망, 249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편 시크교도 무장군인은 1,592명이 체포됐고 무장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493명이 사망했다. 시크 무장단원들이 농성 당시 순례를 온 민간인들까지 인간 방패로 사용했기 때문에 전투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 피해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9]
한 종교의 최고 성지라는 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사원 전체를 와장창 깨부수어놨으니 전세계 시크교도들의 엄청난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인도군에 복무하던 수많은 시크교도들이 군보직을 사임했고, 격분한 시크교도들은 공직에서 내려오거나 정부로부터 받은 상을 반납했다. 특히 작전의 총책임자였던 인디라 간디 총리는 불과 5개월 뒤인 1984년 10월 31일에 2명의 시크교도 경호원들에게 살해당하기까지 했을 정도. 그 직후 델리에서 반시크 폭동이 일어나 델리에서만 3,000여명이 넘는 시크교도들이 죽임을 당하는 등 비극적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한편 정부는 블루 스타 작전 이후 안전을 위해 사원과 인접한 가옥 수백 채를 철거하고 '갈리아라(Galliara)'라고 하는 공원을 만들어 1988년 6월 개방했다.
현재는 시크교의 최대 성지로 2024년 기준 매년 3,000만 명 이상의 순례객과 방문객들이 찾는 명소다.
3.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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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사원의 야경 | 다르샤나 드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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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사원 내부 | 중앙 제단[10] |
완전히 독창적인 형태의 건물은 아니고 기존 인도 건축을 복잡하게 섞어넣은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1875년 펀자브 정부는 조사 보고서에서 이 황금사원이 수피즘 성자 미안 미르의 사당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적었고 자트족의 전통적인 양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학자들의 정설은 인도-이슬람 전통이 합쳐진 무굴 양식과 힌두 라지푸트 양식이 합쳐진 건물이라는 것. 다만 힌두 사원 양식을 따르는 바람에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다고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고.
황금사원은 금박 입힌 돔이 올라간 12.25m x 12.25m 면적의 2층짜리 건물이다. 사원 건물은 19.7m x 19.7m 짜리 백색 대리석 기단 위에 올라가 있으며, 이 기단은 또 154.5m x 148.5m 크기의 거대한 인공 연못 한가운데에 떡하니 세워져 있다. 황금사원은 긴 다리를 통해서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다리로 들어가는 입구는 '신의 남쪽 입구'라는 뜻의 '다르샤나 드바라'(Darshana Dvara)'라고 부르며 역시나 황금으로 휘황찬란하게 장식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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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중앙 제단 | 내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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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2층 내부 | 금빛 아치 |
1층은 사원을 둘러싼 것과 동일한 백색 대리석으로 마감하고 번쩍번쩍한 황금으로 장식해 눈돌아갈 정도로 화려하다. 2층은 갤러리 용도로 쓰이는데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사원의 외관은 황금을 도금한 구리판으로 장식해놨다. 문짝 역시 꽃과 새 따위를 새긴 금박 구리판이다.[12] 특히 사원 2층의 천장이 금박을 발라놓고 온갖 보석들로 꾸며놓아 화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원 꼭대기의 반구형 돔은 측면 사방에 조그마한 돔들이 올라간 갓돌로 장식되어 있으며, 모서리마다 한 개씩 작은 황금빛 돔이 세워졌다. 사원 옥상에는 조그마한 파빌리온이 있는데 이걸 '시시 마할', 즉 '거울의 방'이라고 부른다.
앞서 언급했던 의식 '수카사나'는 휴식을 뜻하는 'sukh'와 자리를 뜻하는 'asan'을 합친 단어로 구루 그란트 사히브가 밤에 휴식을 취하러 가는 의식이다. 복잡한 경전 낭송과 의식이 끝나면 사제들은 그란트 사히브를 머리 위로 받쳐들고 노래부르며 꽃으로 장식된 가마로 이동한다. 책은 가마 위의 방석에 올려진 채로 아칼 타크트의 1층 침실 침대로 옮겨진다. 책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이 잠을 자듯이 대하는 것. 새벽에는 반대로 '빛'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의식 '프라카쉬'를 행한다. 동터오를 새벽이 되면 사제들은 책을 침대에서 꺼내 다시 가마태워 사원으로 간다. 사원에 도착하면 사제는 무작위로 책을 펼치는데, 펼쳐진 장이 그날의 설교가 된다. 사제들은 그 장을 큰 소리로 읽고 순례자들 역시 그날 내내 해당 장을 큰 소리로 낭송한다.
3.1. 신성한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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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하르 키 파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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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목욕하는 가족의 모습 | 호수의 모습 |
연못에서 특별히 물을 떠가고 싶은 사람들은 황금사원 건물 뒤쪽에 마련된 '하르 키 파우리(Har-Ki-Pauri)'[13]라고 부르는 장소로 가면 된다. 물 속으로 내려가는 작은 계단이 있어서 그 곳에서 잠깐 물을 뜨고 나올 수 있다고. 신도들은 이 물에 신성한 힘이 있어 카르마를 지워준다고 믿으며 호수의 물로 몸을 씻고 마신다. 힌두교 신자들이 갠지스 강을 신성시하는 것과 유사하다. 황금사원까지 순례를 올 여력이 없는 아픈 친척이나 친구들을 위해서 연못 물을 병에 담아 가져가는 사람도 많다. 매일 정화의식에 사용되는 성수와 사원 외벽을 청소할 물도 여기서 퍼가며 이 곳에서 퍼간 물을 우유에 타서 묽게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이 호수는 수질 자체도 시크 교에서 특별히 관리하기 때문에 갠지스 강과는 달리 깨끗한데 2004년부터는 한 신도로부터 기증받은 일반적인 수질 정화와 산소 공급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으며 가끔씩 연못의 물을 완전히 빼내고 시크교도들이 바닥을 닦아 청소하기도 한다.[14] 빠니보틀의 영상에 나오듯이 물고기도 살고 있다. 청소 용도로 넣어 놓은 것도 있는데[15] 평소에 못되게 구는 사람이 아예 없는지 물고기가 사람을 안무서워한다. 시크교 성지의 신성한 호수에 사는 물고기인 만큼 시크교도는 물론이고 비 시크교도라도 시크교도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굳이 그런 짓을 저지를 이유가 없고 만약 실제로 한다고 해도 바로 격노한 신도들에게 제지당해 신변이 위험할 가능성이 크다.
3.2. 부속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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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아칼 타크트 | 랑가르히아 감시탑 |
황금사원 주위에는 2개의 높다란 붉은 벽돌 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람가르히아 감시탑'이라고 부른다. 이 탑은 황금사원이 이슬람 군대에게 약탈당하던 18세기에 지어졌다. 하도 적들이 많이 쳐들어오다보니 감시탑을 지어 적군이 쳐들어오나 감시하도록 했던 것이다. 탑의 이름은 시크 연맹의 12개 공동체들 중 하나였던 람가르히아 공동체의 지도자 자사 싱 람가르히아에서 따왔다. 감시 및 방어 용도로 지어졌지만 이후에는 순례자들의 숙소, 학교 역할로 변했다. 시크교도들은 주변에 70개가 넘는 감시탑들을 지어 기부했지만 대부분은 인도 제국 시기 철거됐고 오직 저 람가르히아 감시탑만이 남아있다.
지금은 황금사원 연못 주변이 거대한 사원으로 둘러싸여있지만 원래는 사방이 탁트인 곳으로 인도대추나무가 가득했다. 지금은 연못가 바로 옆에 3그루의 대추나무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3그루의 나무들마다 각각 사연이 있다. 첫 번째 나무는 베르 바바 부다(Ber Baba Buddha)라고 하는데 저명한 시크교도 바바 부다가 이 나무 아래 앉아서 첫 사원 공사를 감독했다고 한다. 두 번째 나무는 라키 베르(Laachi Ber)라고 하며 구루 아르잔이 이 나무 아래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가장 유명한 세 번째 나무는 두크 반자니 베르(Dukh Bhanjani Ber)라고 하여 나병을 앓던 환자가 이 나무 아래에서 연못에 몸을 담궜는데 완치했다는 설이 전해내려온다. 이에 붙은 별명이 '고통을 없애주는 나무'. 그 소문덕에 시크교도들은 이 나무 아래에서 목욕하면 68개의 힌두 성지를 모두 순례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얻는다고 믿는다.
4. 무료 식사와 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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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식당 내부 | 메뉴 |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종교나 성별, 국적에 관계없이 원한다면 암리차르에 머무는 동안 하루 세 끼를 여기서 매일 계속 해결할 수도 있다. 탁자나 의자는 없으며 커다란 강당에 돗자리가 한 줄로 길게 깔려 있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식판을 들고 여기에 앉으면 봉사자들이 차례로 짜파티, 달(콩 스프) 등을 나눠주며 원한다면 더 먹을 수도 있다. 아침, 점심, 저녁의 매뉴가 매번 바뀌고 맛이 인도 요리치고는 강한 향신료 따위를 잘 안 쓰는 편이기 때문에 한국인들도 부담 없이 식사를 할 수 있다. 맛집이라고까지 하긴 뭐하지만[19] 바깥의 돈 내고 파는 음식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진 않는다. 사실 무료 식사는 여기가 아닌 다른 시크교 사원에서도 같은 이름의 무료 식당이 딸려있으나 여기가 제일 유명하고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아서 이용하기 쉽다.
암리차르 황금사원의 식당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무료 급식소로도 유명한데, 24시간 밤낮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원한다면 언제든지 와서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자원봉사자들[20]이 교대로 일하면서 식당을 쉴 새 없이 돌린다. 밥은 식당 안에 있는 거대한 '랑가르 홀'에서 먹으면 된다. 한 번에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홀에 들어가 바닥에 앉아있으면 자원봉사자들이 식기와 음식을 배급해주는 식이다. 다 먹으면 식기를 반납하고 돌아가면 된다.
식당에서는 간단한 채식 식단을 제공하는데 주요 메뉴는 납작한 빵 로티, 렌틸콩 커리인 '달', 채소 커리인 '사브지', 달콤한 쌀푸딩 '키르' 등이다. 로티를 향신료를 넣은 렌틸콩 커리나 채소 커리에 찍어먹은 뒤에 후식으로 사프란, 견과류로 풍미를 낸 쌀푸딩을 먹는다. 매일 평균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밥을 먹고가기 때문에 매일마다 약 12,000kg의 밀가루, 15,000kg의 렌틸콩, 1,500kg의 쌀, 2,500kg의 야채, 700kg의 우유, 100개의 가스통을 사용한다고 한다.
잠자리는 황금사원 내에서 자유롭게 잘 수도 있지만 도난 등 안전상의 이유로 황금사원 기준, 우측에 있는 외국인 숙소 구루드와라(Gurudwara)를 이용하는 걸 추천한다. 구루드와라도 급이 나뉘는데 스리 구루 람 다스 니와스(Sri Guru Ram Das Niwas)는 도미토리 시설이고 비용은 무료다. 228개의 방과 18개의 도미토리로 이뤄진 거대한 규모. 다만 욕실이 공용이고 전 세계 사람 다 모이는 호스텔급 시설이다보니 빈대가 있을 수도 있다. 옆에 다른 구루드와라로 구루 아르잔 데브 니와스(Guru Arjan Dev Niwas)도 있는데 여기는 유료에 살짝 고급 컨셉 숙소인데 에어컨 룸이 500루피(약 8천 원) 정도로 굉장히 저렴한 편이라 인기가 많다.
5.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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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촬영 금지인데 시크교도들이 터번을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머리카락을 가려야 들어갈 수 있어서 모자라도 써야 한다. 내부에는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Guru Granth Sahib)[21]가 모셔져 있다.
참고로 이곳에 입장하려면 몇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한다.
1. 두건으로 머리카락을 가릴 것
1. 긴 바지를 입을 것
1. 신발(양말)을 벗고 입구에 있는 흐르는 물에 발을 씻고 맨발로 들어올 것
1. 긴 바지를 입을 것
1. 신발(양말)을 벗고 입구에 있는 흐르는 물에 발을 씻고 맨발로 들어올 것
6. 사건사고 및 여담
- 시크교도들이 이곳에서 분리 독립 시위를 하자 1984년 6월 3~8일에 당시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는 인도군 탱크와 박격포까지 동원하여 수천 명[22]의 사상자를 내는 강경 진압을 했다. 아두르 파즈한 싱 대장을 비롯한 시크교도 장군들은 되려 반발만 일으키고 내전을 부채질할 것이며 나아가 "총리도 위험하다."며 반대했지만 인디라 간디 총리는 싱 대장을 비롯한 반대파를 해임하고 아룬 바이디야 대장과 시크교도로 유일하게 작전에 참여한 쿨딥 싱 브라르(1934~ ) 중장을 지휘관으로 황금사원에 군대를 보내 시위를 진압했는데 이를 블루 스타 작전이라고 한다.
- 그 대가로 인디라 간디는 불과 4개월밖에 안 된 1984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시크교도 경호원의 엄청난 총알세례로 벌집이 된 채 암살당했다. 무려 30발을 쐈는데 그중 23발이 관통했다.
- 2021년 12월 20일에 황금사원에서 저녁 기도 도중 20대 초반의 한 남성이 난간을 넘어 경전 앞에 놓인 다이아몬드가 박힌 의례용 칼을 집어 들었다가 제압당한 후 신성모독이라며 시크교도들에게 구타(!)당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남성은 경찰이 도착하기도 전에 격분한 신도들에게 맞아죽었다고... 이 장면은 저녁기도를 TV로 송출하던 도중 벌어져서 전국에 방송됐다. 경찰은 초기 조사 후 숨진 남성에 대해 신성모독 의사는 없었으며 단순히 절도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 워낙 신성한 곳이라 이 곳에서 함부로 행동했다가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위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며칠 전에는 한 남성이 연못에 시크교 소경전인 '구트카 사히브'를 던졌다가 체포당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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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사흐칸드 | 수카사나 의식[23] |
- 시크교도들은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를 마치 사람처럼 대해 매일 밤 10시 30분마다 사원에서 꺼내 침실 사흐칸드로 옮긴다. 그리고 새벽 4시 30분에 다시 꺼내어 사원에 모셔놓은 채 낭송한다. 밤에 치르는 의식을 수카사나, 새벽에 치르는 의식을 프라카쉬라고 부른다. 시간을 맞추어 황금사원을 방문하면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
- 2009년 캐나다의 스티븐 하퍼 총리가 인도를 국빈방문했을 당시 암리차르 황금사원을 방문했는데, 번쩍번쩍거리는 외관에 놀라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저거 진짜 다 황금이야?'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 란지트 싱이 1830년에 처음 사원에 금박을 씌울 때까지만 해도 금박을 7~9겹으로 씌웠지만 1990년대에 500kg의 금을 들여 새로 보수공사를 하면서 무려 24겹의 금박을 덧씌워 두텁게 만들었다. 이 모든 비용은 전세계 시크교도들의 자발적인 기부로 충당했다.
[1] '암리차르'란 시크교의 성수인 '암리트'가 고인 못이라는 뜻이다.[2] 보통 인도에서 금을 도금할 때는 22K 금을 쓰는 것이 보통인데, 시크교도들이 지극정성으로 기부한 덕에 황금사원에는 24K 짜리 순금을 사용했다. 황금사원의 큰 자랑거리들 중 하나다.[3] 다만 유튜버 빠니보틀의 체험기에 따르면 식사는 괜찮지만 잠자리는 빈대 등 벌레들이 많아서 크게 추천하진 않는다고 한다.[4] 람 다스가 이 땅을 어떻게 구매했는지 2개의 이야기가 있는데, 하나는 시크교도들의 기부를 받아 700루피로 구매했다는 말도 있고 무굴 제국의 악바르 황제가 람 다스의 아내에게 기부했다는 설도 있다.[5] 하나의 문만 내는 힌두 사원과 달리 사방에 입구를 만들었다. 이 4개의 입구는 힌두교 카스트 제도의 4계급을 뜻하는 것이고 계급에 상관없이 원하는 사람은 모두가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6] 다만 확정된 사실은 아니고, 다른 시크 기록을 보면 구루 아르잔이 직접 주춧돌을 놓았다는 말도 있다.[7] 이 종파를 '미나스'라고 부른다. 제4대 구루인 람 다스가 죽은 뒤 그의 장자였던 프리티 찬드를 따랐던 이들로, 프리티 찬드의 동생이었던 구루 아르잔이 구루직을 계승하는 것을 반대했다. 구루 아르잔의 지지자들은 이들을 '사기꾼'이라는 뜻의 미나스라고 불렀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점점 사라지며 현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8] 저 완파된 건물은 황금사원 본건물은 아니고 그 바로 앞에 있는 아칼 타크트 건물이다. 물론 아칼 타크트 역시 구르 하르고빈드가 직접 의식을 집전하고 업무를 보던 대단히 중요한 건물이었다.[9] 다만 인도 정부 발표가 책임을 고의적으로 시크교 측으로 돌리고 피해를 축소한 면이 크다는 게 정설이다. 시크교 측에서는 정부군이 붙잡힌 시크교 무장단원들을 재판없이 총살했으며 피해자 수도 공식 발표보다 훨씬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10] 사제가 손으로 짚으며 낭독하고 있는 붉은 방석 위에 올려져 있는 책이 시크교의 중심 경전인 구루 그란트 사히브다.[11] 경전이 올려진 곳은 입구보다 약간 높으며 황금빛 울타리로 접근을 막고있다.[12] 황금사원에는 인간의 형상을 거의 묘사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아라베스크로 시크 경전을 금박으로 새겨놓은 것들인데, 아랍처럼 완전 기하학적 문양만 새겨놓지는 않았고 인도 전통을 따라 동물, 새, 꽃 따위를 그려놓았다. 다만 아예 인간을 그리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계단벽에는 구루 고빈드 싱을 태운 말을 그려놓기도 했다.[13] '신의 계단'이라는 뜻이다.[14] 지금까지 총 5번 청소가 이뤄졌다. 1923년, 1973년, 1984년, 1988년, 2004년에 물을 쫙 빼내고 바닥을 청소했다.[15] 연못 속에 자라는 이끼와 해조류를 먹어치워서 수질 개선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16] 각각 아난드푸르, 파트나, 난데드, 탈완디 사보, 암리차르에 1개씩 있다.[17] Guru Ka Langar, Free Kitchen이라고 영어로도 적혀 있다.[18] Langar는 펀자브어로 부엌이라는 뜻이므로 직역하자면 '구루의 부엌'이라는 뜻이다.[19] 참고로 이 사원 무료식사가 트립어드바이저 맛집 1위다.[20] 계급이나 신분,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사원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할 수 있다. 대략 400~500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이 곳에서 일한다.[21] '아디 그란트'라고도 한다. 마지막 인간 구루 고빈드 싱 이후로 경전 자체가 유일하고 완전한 마지막 지도자(구루)로 모셔지고 있다. 지도권을 둘러싼 교단의 분열을 막기 위함이 한 원인이었다.[22] 인도 정부의 공식 발표는 492명(약 500명)이지만 시크교 측에서는 수천 명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참전한 인도군의 증언 중 천 단위 희생자가 있을 거라는 증언이 있고 원래 가해자측에서 희생자 수를 줄여 발표하는 것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항상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500명보다는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23] 저 황금 가마 위에 꽃으로 장식되어 실려가는 것이 바로 구루 그란트 사히브 경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