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12 08:34:30

명나라

{{{#!wiki style="margin:0 -10px -5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folding [ 기원전 약 1600 ~ 907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ont-size:0.92em; letter-spacing: -0.4px"
<colbgcolor=#fff,#191919> 기원전 약 1600 ~
기원전 256 / 기원전 221
황하 문명(黃河文明)
상(商)
주(周) 서주(西周)
동주(東周) 춘추전국(春秋戰國) 춘추(春秋)
춘추오패(春秋五覇)
전국(戰國)
전국칠웅(戰國七雄)
기원전 221 ~
기원전 206
진(秦)
장초(張楚)
기원전 206 ~
기원전 202
서초(西楚) / 십팔제후왕(十八諸侯王)
초한전쟁(楚漢戰爭)
기원전 202 ~
서기 220
한(漢)
전한(前漢)
신(新)
현한(玄漢)
후한(後漢)
220 ~
589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삼국(三國) 위(魏) 촉한(蜀漢) 오(吳)
진(晉) 서진(西晉)
동진(東晉)
환초(桓楚)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남북조(南北朝)
육조(六朝)
송(宋) 북위(北魏)
제(齊)
양(梁)
한(漢)
후량(後梁)
서위(西魏) 동위(東魏)
진(陳) 북주(北周) 북제(北齊)
589 ~
907
대수(大隋)
수말당초(隋末唐初)
대당(大唐)
무주(武周)
호연(胡燕)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folding [ 907 ~ 현재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ont-size:0.92em; letter-spacing: -0.4px"
<colbgcolor=#fff,#191919><colcolor=#4b4b4b,#a9a9a9> 907 ~
1279
오대십국(五代十國) 후량(後梁) 십국(十國) 대요(大遼)
서요(西遼)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대송(大宋) 북송(北宋) 당항(黨項)
서하(西夏)
남송(南宋)
송말원초(宋末元初)
대금(大金)
1271 ~
1368
대원(大元)
원말명초(元末明初)
1368 ~
1644
대명(大明)
후금(後金)
남명(南明) 대순(大順) 대서(大西) 명정(明鄭) 오주(吳周)
명말청초(明末淸初)
1616 ~
1912
대청(大淸)
태평천국(太平天國)
1912 ~
1948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북양정부(北洋政府)
중화제국(中華帝國)
군벌(軍閥)
국민정부(國民政府)
일치시기(日治時期)
중화소비에트공화국(中華蘇維埃共和國)
1948 ~
현재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륙(大陸))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만(臺灣))
}}}}}}}}}}}}


만주의 역사 | 근세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고대 중세 근세 근현대
||<tablewidth=100%><-5><#015197><height=45> 북원 ||<|3><-1><#f9d537> 여진족 ||
요동 군벌 고려 올량합 삼위
후금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
}}}}}}}}}||
대명
大明 | Great Ming
파일:명나라 국새.svg 파일:명나라 보.svg
국새
파일:589px-Ming_Empire_cca_1580_(en).svg.png
1580년대의 명나라
1368년 ~ 1644년 (276년)[1]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남명
포르투갈령 마카오
<colcolor=#800000> 위치 <colbgcolor=#fff,#191919>중국, 베트남 북부[2]
역사
[ 펼치기 · 접기 ]
1356년 주원장 세력의 독립
1363년 파양호 대전
1368년 칭제건원(건국)
1382년 천하통일
1399 ~ 1402년 정난의 변
1421년 북경 천도
1449년 토목보의 변
1457년 탈문의 변
1550년 경술의 변
1571년 융경의 화의
1573 ~ 1582년 장거정의 개혁 시작
1581년 일조편법 시행
1619년 사르후 전투
1622년 서홍유, 백련교도 봉기
1623년 위충현 실권 장악
1627년 농민 반란 확산 / 위충현 실각
1636년 청 건국 / 이자성, 틈왕 자칭
1644년 멸망
1662년 남명 멸망
수도 남경, (1368 - 1421),
북경 ,(1421 - 1644),
민족 한족, 묘족, 장족, 바이족, 회족, 몽골족, 여진족, 둥족
언어 중국어, 오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성리학) (국교), 티베트 불교, 도교, 이슬람교, 경교, 백련교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皇帝)(천자)
주요 황제
[ 펼치기 · 접기 ]
초대 홍무제 주원장 ,(1368~1398),
3대 영락제 주체 ,(1402~1424),
6대 정통제 주기진 ,(1435~1449),,(1457~1464),
9대 홍치제 주우탱 ,(1487~1505),
11대 가정제 주후총 ,(1521~1567),
13대 만력제 주익균 ,(1572~1620),
16대 숭정제 주유검 , (1627~1644),
국성 (朱)
통화 대명보초(大明寶鈔)[3]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역사3. 행정과 조세4. 경제와 대외 교역5. 군대6. 조명관계
6.1. 명조 유민6.2. 현대 한국의 평가
7. 여담8. 왕사9.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중국 역사상의 통일 왕조들 가운데 하나로 1368년 주원장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내고 건국한 마지막 한족왕조이다.

정식 국호는 대명(大明)[4]이며, 국성을 따서 주명(朱明)이라고도 한다.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고 1368년부터 1644년까지 276년간 존속했다.

이 국명은 태조 주원장이 믿었던 백련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국명으로, 백련교에서는 흑암(黑暗)이 물러가고 광명(光明)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흑암인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나라라 하여 명이라는 국호를 쓴 것이다.

한족의 마지막 통일 왕조로 여겨지는데, 이는 최후의 한족 왕조였던 중화제국의 정통성이 부족한데다 단명했고 통일 왕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족이 세운 왕조라는 한족들의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한 왕조다.

주원장(훗날 태조 홍무제)는 건국하면서 수도를 난징(남경)으로 정하였으나 이후에 영락제(반란을 일으켜 2대 황제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3대 황제로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가 수도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북경으로 옮겼다.

건국 초기에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원내몽골 남쪽 일부, 만주 일부에 이르는 지역까지 장악하였다.[5] 또 15세기 중엽까지 대대적인 원정을 통해 국가의 위세를 떨쳤다. 조선, 류큐 왕국, 대월 등이 사대의 예를 취하였으며,[6] 일본무로마치 막부 초기부터 명나라에 조공하기 시작했다.

중화제국이 세계관의 일부였던 원나라, 청나라와 달리 중화제국의 정체성이 강해 앞뒤 왕조에 비해 국토 면적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7]

역설적이게도 민초 출신 영웅에 의해 나라가 탄생하고 멸망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주원장몽골 제국원나라북쪽으로 몰아내어 건국되었으나, 만주족청나라가 남하 침략하여 나라가 어려워지고 폭정으로 농민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역시 가난한 농부였던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인 숭정제가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이후 최후까지 저항하던 남명과 타이완의 세력마저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명나라의 존속 기간은 한국사고려 공민왕 ~ 조선 인조(남명 포함 시 현종까지) 시기에 해당한다.

2. 역사

원나라 말기에 홍건적의 난과 군벌들의 봉기와 수많은 한족 백련교도들의 중심 반란으로 전국이 어지러워지자 일어난 주원장은 처음엔 백련교-홍건적에 몸담았다가 두각을 나타내 지도자가 되어 오왕을 자칭하였다. 그 후 각지에서 한족 군벌들과 원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황제가 되어 명나라를 세운 뒤 대도를 함락시켰다. 원나라 원순제는 북경을 버리고 몽골 고원으로 도망쳤고 만리장성 이남은 명나라의 깃발 아래 통일 되었다. 주원장 홍무제남경을 수도로 하고 대규모 숙청을 일으켜 공신들을 제거하고[8](주원장 숙청편 참조) 명나라의 기초를 닦았다.

홍무제 재위시절 태자인 주표가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손자인 주윤문(건문제)이 황태손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홍무제는 자신의 장남인 태자 주표외에 다른 아들들은 번왕으로 임명하여 약간의 병사를 주고 마치 지방 제후처럼 역할을 주고 있었다. 홍무제가 죽자 2대 황제에 오른 손자 건문제는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삼촌인 번왕들을 숙청하려다 오히려 홍무제의 넷째 아들이자 가장 강력한 군사를 가지고 있던 연왕 주체가 일으킨 정난의 변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주체는 스스로 3대 황제에 올라 영락제로 즉위하였다. 영락제는 환관 정화를 시켜 남해안을 탐사하게 하고 몽골(타타르), 오이라트와 계속 전쟁을 벌여 북방을 억제하였으며 베트남을 점령하여 중국의 영토로 만든다.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 시기에는 비록 베트남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선덕제의 현명한 통치로 번영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정통제가 즉위하자 환관 왕진(명나라)의 국정농단으로 국정이 혼란스러워진다. 또한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기가 찾아와 북쪽에선 오이라트에센 칸이 침공해오며 남쪽에선 왜구가 해안가를 약탈한다. 명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오히려 에센에게 대패하여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토목의 변이 일어났다. 그래도 에센 칸이 내분으로 살해되고 명나라 군대가 몽골족을 격파하여 위기는 벗어났으며 정통제가 돌아와서 수습하게 된다. 이후 성화제홍치제가 선정을 펼치면서 평화와 안정을 찾아 번영한다. 다만 이 시기부터는 더이상 주변국에 패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9]

이후 무능한 황제들이 즉위하면서 명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특히 북로남왜의 위기가 다시 찾아왔는데 계속된 다얀 칸알탄 칸을 비롯한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에 시달렸으며, 수도까지 위협받는 사태가 벌어진다. 남쪽에선 왜구가 해안가를 자주 침입하여 약탈을 하고 지방을 초토화하는 위기가 찾아왔다.(북로남왜) 게다가 명나라 황제들의 무능과 누적된 정치-경제 위기는 사회적 불안을 가져왔다.

1572년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황제 만력제가 즉위하였는데 초창기 신하 장거정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장거정이 비전있는 정책으로 국가를 안정시켰으나, 장거정이 죽고난 후부터는 만력제가 정치에 흥미를 잃었고 국정을 내팽개치면서 무능한 정책을 남발하였다. 거기다 만력 3대정으로 재정은 파탄나고 무거운 세금에 시달린 농민들의 불만은 커졌고 농민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동림당과 반 동림당과의 갈등과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 세력의 정치 농단으로 명나라의 정치 혼란은 심해졌다. 한마디로 명 4대 암군 시기부터 명나라의 국운은 결정적으로 기울어진것을 넘어서 멸망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숭정제가 즉위하여 위충현을 제거하였지만 명은 이미 누적된 정치 혼란과 경제 혼란으로 막장이 된 터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변방의 만주에서 여진족만주족을 자칭하여 후금을 세우고 굴기하여 명을 위협하게 된다. 명은 이를 조선과 연합해 제압하려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요동과 여진족에 대한 패권을 최종적으로 상실하였다. 후금은 이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과 국교를 수립하고 몽골 부족들을 점진적으로 복속하였다. 이후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에 즉위하여 명나라와의 대결 노선을 확실히 했다.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완전히 복속시킨 청나라가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에 대승을 거두자 명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이 위태로워졌다.

이때 이자성, 장헌충 등이 일으킨 이자성의 난과 같은 농민 반란이 전국을 휩쓸고 농민군이 수도 북경으로 몰려오는 사태가 발생한다. 정예군이 청나라와의 결전에서 전멸한 상태에서 변경 수비대만으로 북방을 막고 있던 명나라는 농민의 대병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지방군마저 모두 반란군에게 패배하면서 더는 반란군을 막을수 없었다. 결국 북경이 이자성군에 함락되자, 숭정제는 자결하면서 명나라는 사실상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를 막기 위해 오삼계 등이 지휘하던 명나라 군대가 적이었던 청나라에 투항하자 산해관입관한 청나라 군대는 이자성군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베이징을 점거한다.

입관 이후 명청교체기 동안 이어진 중국 대륙 정복 전쟁에서 이자성-장헌충 반란 세력과 남명 정권은 연달아 패배하고 청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였다. 남명의 영력제가 살해당하면서 주씨의 후손은 끊겼고,[10] 청나라에 투항했던 옛 명나라 장군 출신 번왕이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삼번의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마지막으로 타이완 섬정씨 왕국(명정시기)도 펑후해전(澎湖海戰)에서 청나라한테 대패하여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명나라의 잔존 세력은 그렇게 청에게 굴복해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나 남아있던 명나라 유민 가운데 일부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 아래 청나라 시대 내내 비밀결사의 형태로 남기도 했다.[11]

3. 행정과 조세

명은 원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소박한 농촌 공동체의 이상을 구축해 회복하려고 했고 상당한 성과[12]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3] 자급자족 농민 질서의 회복을 추구한 것은 농민 반란을 주도하며 성장한 명 태조 주원장의 출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때문에 문제도 있었다. 예컨대 '장성'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성벽이 제일 길다는 남경성을 쌓을 때에도 현장에 공장을 세워서 벽돌을 생산하는 대신 일정 지역의 마을에서 벽돌을 십시일반으로 제공하게 했다. 벽돌을 만드는 일을 맡은 가구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 벽돌을 남경까지 운반하는 부역을 맡게 된 가구에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쾌락의 혼돈」(티모시 브룩 저)에 따르면 전근대 시기에 이렇게 전국적으로 통일된 행정 집행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업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행정 제도로는 소박한 농촌 공동체의 이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이갑제' 를 실시했는데, 주원장은 이러한 이갑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토지대장인 어린도책(魚鱗圖冊)과 조세대장/호적인 부역황책(賦役黃冊)을 통해 농촌공동체를 자세히 조사하면서 전 지역에 균질적인 농촌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갑제는 기본적으로 '이장', '이노인' 등의 유력 계층을 포괄하면서 성립되었기에 빈부격차를 결국 인정한 것이었고, 이갑제는 얼마 못가 한계를 드러냈다.[14] 주원장 자신도 말년에 이갑제로 이루어진 농촌 내에서도 상당한 빈부격차가 있는 것을 인정했다. 중요한 건 주원장 시기, 즉 명이 건국된 직후에도 실효성이 바라던 만큼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주원장 시기의 이갑제는 최소한 상당히 정확도 높은 인구 조사 제도로써 기능했던 것은 사실이며, 이갑제를 통한 최초의 인구 조사는 실제 인구와 10여 %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건 전근대 시기의 인구 조사로써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달한 것이다. 일반적인 인구 사학자들은 중국사에서 믿을만한 인구 통계가 명 초 1393년 인구 조사를 시작으로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15]

홍무제는 관에서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어서 다시 군인에게 봉급을 주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 각 농민이 할당된 군인에게 직접 쌀을 전달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이는 부대를 다른 곳으로 재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상당히 복잡해지는 상황이였으며[16] 결국 이것도 명 중기 이후에 병사들에게 은을 월급으로 주고 알아서 곡식을 사먹게 하는 형태로 변화한다.[17] 이러한 조치는 은근히 상업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었고 약탈보다는 낫지만 현지 조달의 또다른 형태에 불과했다. 결국 보급 문제는 임진왜란이나 청나라와의 전쟁, 심지어는 농민군과의 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명군의 발목을 잡는다.

어쨌든 중기 이후 명은 수입을 판단하고 거기에 맞춰 지출을 결정하는 양입제출이 아니라 지출을 결정하고 거기에 맞춰 세금을 거둬들이는 양출제입에 가까운 국가 운용을 했으며, 이는 토목의 변 이후 높아진 방위 부담을 고려하면 어쩔수 없어 보이긴 하나 또한 재정 운용의 방만함과 높은 세율을 낳았다. 정부가 알아서 지출을 조절해야 하는데 지출이 늘면 늘었지 조절은 안 됐다.

물론 명 조정이 노는 것만은 아니었고, 꾸준히 조세 구조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강남에서 쌀을 걷어서 위로 올라오는 사이 발생하는 부정 부패를 막기 위해 조세가 서서히 은납화된 것도 그러했고, 지나치게 과중해지는 잡역도 서서히 은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대체해 나갔다. 법제적으로도 이갑제 하의 갑을 묶어 행정을 재정비하고 재산에 따라 세금을 거두게 하는 균요법, 조세의 단계를 나누어 차등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십단법, 호의 등급에 따라 세금을 달리 거두자는 문은과 정은 제도, 세금을 지세와 인두세로 통합하자는 일조편법 등이 지역별로 시행되어 나갔다. 중요한 것은 첫째로 조세가 서서히 은납화되어 나갔다는 것이고, 둘째로 지역별로 다양한 개혁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지역별로 다양한 개혁책이 나타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제 이갑제를 벗어났던 지역의 행정 단위를 나름대로 탄력적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지방관들의 노력과 여기에 자발적인 사회 지배 계층들과의 협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외적의 침입과 잦은 반란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신사들이 일조했다. 이때 두각을 보인 인물이 십가패법과 남가향약을 중심으로 지역 단위의 자치 집단이자 방위 집단을 구축하려 했던 왕수인, 즉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이었다. 16세기 초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으면서, 명 후기에는 중국 전역에 향촌이 재건되었고 이를 명 정부에서도 행정 단위로 활용하게 된다. 따라서 명 말기에는 이갑제를 보갑제가 대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전국에서 다양하게 진행되던 조세의 개혁은 명재상이던 장거정이 대대적인 토지 조사와 통합적인 일조편법을 진행하면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나 조사를 기획, 실현하자 지주층과 황족, 관리층을 비롯한 특권 계층에서 엄청난 반발을 나타냈고 장거정은 수많은 정적들의 공격 끝에 사후 모든 명예를 몰수당하게 되는것은 명나라가 목표로 했던 '농촌 공동체'의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를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장거정이 살아있을 때도 몇몇 사람들이 '당신은 부국 강병만을 신경쓸 뿐 성현의 도에는 신경쓰지 않으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며 매도한 바 있고, 이에 장거정은 칭찬이 지나치십니다라고 받았다고 한다.(...)

4. 경제와 대외 교역

파일:external/www.transpacificproject.com/ZhengHe-1.jpg
명대에는 전통적인 식량 생산의 농업에서 탈피하여 상품 작물의 재배가 활발했는데 이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분업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이런 원료를 싸게 사서 직공들에게 비싸게 팔고 가공물을 싸게 사들여 비싸게 팔아 차익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송, 원 대에 개방적으로 세계 곳곳의 기술들을 받아들이던 모습과 대비되어 15세기 ~ 17세기에 중국이 유럽에 따라잡히고 형세가 역전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이 시기에 서유럽이 급작스레 등장한 아메리카와 대항해시대에 활발한 대외 원정을 통해 급격히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대의 중국 경제가 황제까지도 대외 무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여했던 남송 대까지와는 달리 내수에 중점을 두고 폐쇄적인 사회를 지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며, 정화아프리카까지 원정을 다녀오는 등의 일을 벌였기도 했지만 "해금령"을 통해 공식적인 해상 활동을 억제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특히 황제가 정화의 원정기를 읽어보려고 하자 신하들이 임의로 불태워버리고는 없어졌다고 거짓 보고를 올리고, 채근담 같은 서적에서는 이러한 기록말소를 무슨 미담처럼 기록해놓을 지경이다 .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정화가 정확히 어디까지 갔었는지 알 수 없고, 아프리카에서 간간히 발견되는 정화 함대가 뿌린 도자기가 원주민들의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것을 토대로 그 루트를 추측하는게 고작인 상황이다. 하지만 이것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항해를 재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영락제는 황위를 탈취한 자신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정치적 이유라도 있었지 후대 황제에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극구 반대했던 것이다.

해금령은 화둥 지방의 푸젠 성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푸젠 성은 바다에 면해 있으면서도 산악 지역인 데다 질 좋은 목재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성의 경제는 어업, 해운업 등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해금령으로 인해 푸젠 성의 산업이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푸젠 성 주민들은 밀무역에 종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기 왜구에 가담하기까지도 했으며 가왜(假倭)로 왜구인 척하면서 중국 해안을 노략질하곤 했다.

이 해금령도 결국엔 명나라의 왜구 토벌이 종결된 1567년 푸젠성에서 제한적으로 개항을 허가했다. 곧 동남 해안 지역 전체에 급속도로 허가되어 융경 개관과 만력 중흥 등 명조 중후기의 잠시동안의 번영과 일조편법의 전국 확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를 해상 세력에 대한 견제나 유교적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폐쇄적이고 자급자족적인 농촌 사회'를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하기도 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누에바에스파냐-명나라 관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전세계를 배회하던 은이 중국에 도착하면 마치 여기가 자연의 중심이라는 듯이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 Gomes solis, "은에 대해서 논함(Arbitrio sobre la plata)", 1621

그러나 명의 대외 무역은 민간 무역의 영역에서 상당히 활발했으며 특히 은 본위 경제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한 중기 이후의 명은 대외 무역이 활발하여 전세계의 은을 긁어 모았다. 연구에 따르면 누에바에스파냐의 멕시코 아카풀코 → 필리핀 → 명으로 이어지는 무역 루트를 통해 유입된 은은 아메리카 전체 은 산출량의 절반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근대에서 공식 무역은 조공 무역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명 조정은 공식적인 무역으로는 조공 무역 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 무역, 비공식적인 무역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방관하는 상태였다. 가끔씩 해안선을 비워버리는 폐쇄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특히 북로남왜의 화 시기에) 일시적인 일에 그쳤다. 뭣보다도 그러면 세금이 안 들어오니까. 게다가 해상 활동 없이는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푸젠 성 사람들에게 해금 정책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기에 밀무역이 창궐했고, 중국에 창궐한 후기 왜구를 방관하거나 비밀리에 협조하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도 명 중기이며 포르투갈이 명 지방 정부에 불만을 품고 마카오를 폐쇄하자 상인들이 반발하며 들고 일어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라 한 적도 있다. 결국 1509년 광저우를 조공국에 한해 개방하고, 1567년 제한적으로 푸젠 성 장저우에서의 무역을 허가했으나 명나라 상인들은 그러한 제한을 무시하고 급속히 사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바람에 명나라 정부도 어쩔 수 없이 허가 무역선 규모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명 중기 이후 15세기부터 금, 은이 다시 화폐로 유통될 수 있었는데 일단 황폐해진 토지가 정리되고 평화가 지속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였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외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은의 수입이 증가했다. 민간에서 유통되는 은의 양이 늘어나면서 세금을 은으로 걷기 시작하였고 중앙에서 꾸준한 회수를 통해 주도적으로 화폐 경제를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은을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잠재 역량을 깨우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던 것이지 명나라의 경제가 침체되었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다.

세수를 통해서 비교해 보면 명대의 경제력이 송대를 따라잡지 못했고 강남 지역만을 확보했던 남송 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수치 상으로는 따라잡지 못했다'는 말에 불과하다. 송대에는 아직 화폐 경제가 완성되지 못해서 화폐상의 경제력과 실제 경제력에 거품이 끼어있었고, 도량형의 단위도 더 작았기 때문이다. 결국 송대에 경제가 융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명, 청을 능가했다는 주장은 허구다.

비슷한 예로 북송의 동전 발행량이 명, 청대보다 많았다는 떡밥이 있는데 그건 단지 동의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이다.[18] 마찬가지로 송대의 경제력이 전세계의 50%였다는 계산도 과장된 감이 있다는게 최근의 연구. 더 자세한 건 북송항목을 참조하도록 하자.

명나라의 전 시기인 몽골 진출 초기와 원 제국 초기, 그리고 말기에 엄청난 난세로 인해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가 쇠퇴한 점도 고려해줘야 한다. 몽골 진출 극초기의 학살[19], 그리고 원나라의 가혹하고 무능한 통치와 극심한 인종 차별,[20]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염병[21]의 발병으로 인해 중국의 인구는 많게는 30 ~ 40%가 감소했으며, 특히 북중국 지역은 4천만을 바라보던 인구가 1천 5백만 이하로 감소해 버렸다. 경제에 관해서는 사실, 원 대 대부분엔 중상주의적 정책과 항저우와 대도(베이징)를 잇는 운하, 그리고 원의 국내 상업로와 국제 무역선의 연결을 통한 수공업 생산과 판매와 톈산 남, 북로를 통한 내륙의 상업로등의 이유로 경제력이 매우 강력했다.[22] 애초에 몽골 제국이 해준 역할로서 언급되는 것이 '역전 설치와 도로 정비 등을 통한 동서 문물 교류 촉진'이 있다. 원이 말기에 유목민 지배층의 낭비와 엄청난 군사비로 인한 적자를 교초를 많이 발행해 해결하려고 해 지폐 가치가 폭락하게 한 것만 제외하면[23], 원의 경제는 대호황이었다. 즉 말기를 제외하고는 원의 경제엔 문제가 없었고, 항주 같은 곳은 전보다 더 잘 나갔다. 명 초기에 자급자족의 경제 정책을 선택한 원인에 단지 말기에 원이 교초를 무더기로 찍어내 화폐 경제가 무너져 버린 탓이 있을 뿐이다.

중국에서도 자생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관점에서 명 후기의 경제적 발전 양상은 매우 주목받는 시기이기도 하다.[24]

하지만 고대 중국부터 당나라 대까지 중국의 중심이었던 관중 지방의 생산력은 계속 감소하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으로부터 식량을 조달받는 안습한 위치로 떨어졌다. 게다가 명나라 말기에 황제와 환관들의 부패로 관중 지방에 식량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게 되자 지역민들의 반발심은 커졌고, 결국 이자성의 난이 관중 지방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전 시대에 비해 양자강 중류 지역에 대한 개발이 많았는데, 이런 과정에서 현대의 호북성호남성에 해당하는 호광성[25]은 엄청난 곡창 지대로 발전해 湖廣熟 天下足(호광숙 천하족)이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남송과 몽골의 전쟁, 그리고 원나라 말기 막장 상황으로 명대 초기에 호광성은 내지 변방에 해당할 정도로 피폐한 지역이었으나, 명 중기부터 정부 차원에서 호광성에 대한 개발을 장려하였다.

5. 군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명나라군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조명관계

원대의 고려의 지위가 조명관계에 일정부분 계승됨으로써, 여말선초 한국 왕조와 명은 아주 밀접하게 그 관계를 시작했다. 원말부터 유교의 성리학이 불교의 지위를 점차 대체하면서 고려-조선의 유학자들은 속국이었던 조선의 지위를 유교의 예교문화로 설명하고자 했으며, 조선 왕조의 개창 이래 유교화가 더욱 진전되면서 양자의 관계를 군부신자로 여기는 정체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를 통해 조명관계역사상 한국과 중국이 가장 우호적이였던 시기라고 평가받게 된다. 조선 초기에는 물자 요구와 정도전요동정벌 계획 그리고 명 사신 접대 문제 등으로 양국 간의 관계에서 마찰도 많았으나 어린 나이의 정통제가 즉위하면서 황제의 취향, 외교 노선, 입맛, 여성 편력 등에 좌지우지되는 일이 급격히 감소하고[26][27] 명 중심의 질서가 안정화되는 15세기를 거치면서 양국은 나머지 대부분의 시기 동안 평화롭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조선은 명나라에 사대하고 명은 조선의 내정에 크게 간섭하지 않는 관계로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는 변방의 울타리 역할을 맡고 있는 조선에게 군대를 파견하고 막대한 구휼을 통해 조선을 도왔으며 조선 역시 명나라가 후금과 전쟁을 할 때 징병칙서를 보내자 조선 조정이 국왕한테 강력한 압박으로 그 왕 광해군이 원하지 않아도 반강제로 원병하기도 했다. 조선 문신들이 명 황제의 칙서를 통해 원병에 부정적이었던 왕이 군대를 파견하여 명을 돕도록 한 모습은[28] 그 이전의 한반도와 한족 왕조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정에서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했음에도 자결한 충신이 없는 것에 대해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지조와 절개있는 자들이 떠나 그렇다고 은근히 명나라를 디스하는 기록이 있으니 정말 명나라를 진심으로 섬겼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29]

이전 시대들만 봐도 한나라고조선을 전쟁 끝에 아예 멸망시켜 버렸고, 우리나라의 역사와는 달리 삼국지에는 실려지지 않은 통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삼국지위나라도 고구려와 잦은 대립을 하였고, 당나라도 비슷하게 고구려백제를 전쟁 끝에 멸망시켰으며, 이어 직전까지도 동맹이었던 신라와는 이해관계가 끝나자마자 뒤통수를 제대로 치고 바로 전쟁에 들어갔고[30], 그나마 된통 혼구녕이 난 이후로 깨갱하고 다시 화친을 맺었으나, 이후로도 간간히 신경전을 펼쳤으며[31], 발해 또한 당나라와 한편으로는 친하게도 지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겹도록 싸워가고 대립하며 성장했던 나라이다. 고려시대의 송나라조차도 북송 시절엔 말만 친선이지 실제론 요나라 견제를 위해 고려에 일방적으로 뜯기는 입장이라 군사적인 지원까지는 없었고, 남송 시절엔 고려에서 남송의 지원군 요구를 거절하자 관계가 틀어져 아예 국교가 단절됐다. 그리고 이후 남송은 완전 멸망. 금나라의 경우에는 초반까지는 친하게 지내는 듯 하더니 숙종 시절부터 툭하면 고려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이후로도 수시로 치고받고 싸워대거나 대립했다. 하지만 명과 조선의 관계는 이들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에서는 명나라가 사사건건 강짜와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부분적으로만 맞는 고증이다.[32] 당시 홍무제는 조선이 30만 대군으로 요동을 정벌하면 답이 없다는 말을 듣고 우려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조선을 경계했다.[33] 특히 정도전에 대해서는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꼬투리를 잡았다. 그런데 친명 성향을 가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신기하게도 파격적인 횟수로 조공 무역을 늘리는 등 조선에 혜택을 주어 조명관계가 첫번째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고, 이는 명이 멸망하는 날까지 더욱 안정화된다. 다만, 나중에 명나라는 재정 문제로 조선과도 조공무역을 줄였던 터라 이 문제로 조선과 갈등한다.

명 왕조가 붕괴되고 청이 중국을 정복한 이후에도 명과의 관계를 철저히 자기신념화 했던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으며, 청나라를 오랑캐라 하며 멸시했고,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모욕적인 항복을 치른 뒤에도 군부의 명에 대한 복수를 염원하며 효종북벌론 등이 제기되었다. 무엇보다 조선은 청 자체를 매우 싫어하였다. 특히 청나라 자체가 조선 초기 내내 무시와 토벌의 대상이었던 여진인들이 세운 제국이었으니 더욱더 그런 경향이 강했을 것이다. 일례로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중국 왕조에 조공하러 가는 것을 조천(朝天)[34]하러 간다고 했던 반면 청나라 시절에 조공하러 가는 것에 대해서는 연행(燕行)[35]한다고 했는데, 청나라 내부에서 청이 다스리는 베이징(燕) 어쩌구로 지칭하면 결코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자연히 이렇게 청나라를 혐오하고 멸시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평가는 올라갔는데, 대표적으로 연호도 일부 조선 유학자들은 구한말 근대적 혹은 황제국적인 연호를 쓰기 전까지 숭정(崇正) 4갑자(4 × 60 = 240년)니 하는 식으로 연호를 썼다. 공식적으로는 청 황제의 연호를 썼지만 민간 유림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숭정제의 연호를 계속 받들었던 것. 그리고 만동묘를 세워서 만력제숭정제에게 제례를 지냈는데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내내 이를 지킨 것은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때인 1937년[36]까지도 이어져 왔다.[37]

하지만 조선의 반청감정은 조선의 물리적 한계 등의 이유로 실제론 청을 대상으로 표출된 적은 없으며, 오히려 내부 불안을 완화하고 왕권 혹은 군사 기관을 장악한 신하들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무턱대고 소중화 사상을 운운하면서 당시 조선의 정책을 비난하는 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이 점을 제대로 깐 작품이 바로 박지원허생전.

그것과는 별개로 조선시대에는 명나라가 있는 배경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은근히 많다. 이는 아마 땅도 크고 사람도 많고 하니 쓸 이국적 이야기가 많고, 자국 조선을 직접 그 안에서 그리면 꼬투리 잡힐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것 때문일 것이다.

6.1. 명조 유민

후금의 공세가 요동을 공격하자, 많은 요동의 명나라 백성들이 일단 안전한 조선으로 피신하였는데 명나라 장수 모문룡평안북도 철산군의 섬 가도에 수군 요새를 건설하고 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들은 '상국(上國)'의 백성과 군대라는 명분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으며, 심하게 횡포를 부려서 조정에서 청천강 이북을 포기하고 지역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폐해가 극심했다. 이 요동 난민에 대한 감정은 물론 명에 대한 감정도 상당히 나빠져서, 모문룡이 죽고 청군과 함께 가도를 토벌하게 되자 조선군은 가도의 명나라인들을 개박살 내고 철저하게 살육한다. 명 말기의 명장 원숭환이 바로 이 점을 우려해서 동맹 제후국인 조선에 횡포를 부리는 것을 막으려고 모문룡을 죽였는데 결국 조선과 명 둘 다 망해버렸으니. 게다가 명나라가 망할 당시 투입된 청군에는 조선인 출신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정규군의 파병 병력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정도.(기사)

명나라가 멸망하자 많은 수의 유민이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 시기 수군 도독으로 참전하였던 진린의 후손이다. 명나라 무신들은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와의 전투에 나섰던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청나라 치하에서는 영 좋은 꼴을 보기 어려웠던 것. 여러 차례의 전란과 기근으로 인구가 크게 부족한 조선으로서는 이민을 막을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인구 흡수를 위해 환영했으며, 청나라에서는 명나라 유민들의 쇄환을 요구하였으나 조선 조정은 이를 무시하고 각 지역에 나눠 정착시켰다.

인조 대부터 시작된 망명은 현종 대에 절정을 이루어 수십명 단위의 유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경우가 많았고, 후일 효종으로 즉위하는 봉림대군은 요동에서 명나라 출신 인물들과 친해졌는데 왕이문(王以文 : 일명 王鳳 岡)·양복길(楊福吉)·풍삼사(馮三仕)·왕미승(王美承)·배삼생(裵三生)·왕문상(王文祥)·정선갑(鄭先甲)·황공(黃功) 등의 8인이 을 위하여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훈련 도감에 속한 명나라 출신 아병만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명나라 궁녀들을 데려오기도 했는데 이들은 매우 장수하여 숙종 시기까지 살았다. 아마 전체 숫자는 적어도 수만 단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8] 그리고 청나라는 겉으로는 송환을 요구했지만, 실제로는 모른 척 했다. 어차피 불만 세력이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니 청나라 입장에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훗날 새로운 불만 세력들이 청나라를 무너뜨렸지만

명나라 출신 유민들은 전세를 줄여주거나 요역에서 몇 년간 감면해주는 등 여러모로 우대받은 편이었다.[39]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항왜처럼 세금도 안 내고 자기네들끼리 뭉쳐 살면서 따로 놀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숫자가 모문룡 세력을 능가할 정도로 많긴 했지만 대신 모문룡 세력처럼 조직화되어 있지는 않았으며 뒤를 봐주는 명나라도 없었던데다 무엇보다 조선 조정과 사대부, 특히 숙종은 명나라 유민들이 자기들끼리 뭉쳐 차이나 타운을 형성하는 건 몰라도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참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세금 면제를 핑계로 그 이상의 부역을 강제 부과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유민들의 귀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영조 때부터 다시 이들을 우대하기 시작했는데, 명나라 유민들을 일반 귀화민인 향화인과는 달리 황조인(皇朝人)이라고 불렀다. 이전에도 귀화한 사람들은 향화인이라고 불렀고, 여진족이나 일본 귀화인은 여전히 향화인이었지만, 명나라 귀화인은 특별히 우대하느라 명칭을 달리했다. 명나라 출신 유민들에게는 충량과 같은 특별한 과거를 실시하기도 하고,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사람의 후손은 관직을 주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다른 향화인보다 우대했다. 그렇다고 엄청난 특혜를 받은 건 아니고, 그냥 일반 양민과 비슷하거나 조금 혜택을 받은 정도이다. 정조도 이 같은 우대방침을 이어갔고, 이후 우대정책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조선이 사라지는 고종 때까지도 어느 정도는 우대정책을 유지했다. 명나라 유민들은 이주해온 유민들이라서 농토가 없었던지라 포졸 등 하급 군직에 지원하는 일이 많았다.

사실 조선과 명나라는 복식이 유사하였고,[40] 명나라가 청나라에 침공당하여 멸망한 뒤에도 많은 부분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홍치제고려양 폐지한 건 뭐지? 그래서 명나라 문화가 조선에서 보존되는 효과가 일어났는데, 청나라로 왕조가 바뀐 뒤에는 한족의 복식은 만주족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족이 겪은 문화적 상실감을 조선에서 보충받은(…)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같은 일화가 있다.
(전략) 그래서 고(故) 상신(相臣) 박규수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에 들어갔을 때에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와룡관(臥龍冠)을 쓴 채 조사(朝士)의 집을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손으로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선왕의 법복이다.’ 하고는 그 옷을 벗기를 청하여 그 집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를, ‘조선만이 주공(周公)이 제정한 예를 보존한 나머지 의관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라고 하였는데, 그 후 사명을 받들고 들어간 자가 있으면 매번 그랬다고 합니다.
작년 봄에 중국 사람이 동학(東學)에 들어가 우리의 의관을 어루만지며 울먹이기를, ‘200년 전 사람들과 같으며, 역시 명나라의 유민(遺民)이다.’ 하였으니, 옛것에 감동하고 우리의 의리를 사모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아, 명나라의 남은 빛이 유독 우리 청구(靑邱) 한쪽 구석에 비치고 있으니, 한 가닥 유제(遺制)의 의관이 예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 자신에 이르러서 변경한다면 참으로 성인의 제도를 지키고 명나라에 보답하는 의리가 아니며... (하략)
고종 21년 남원부 유생 이흥우(李興宇)의 상소문[41]

조선 외에도 베트남 같은 동남아시아에도 유민들이 피신하였다. 특히 베트남의 경우, 당시 인구가 희박했던 메콩강 하구 등의 남부 지방의 개척물론 크메르참파 입장에서는 침략에 큰 역할을 했다. 명나라 유민들은 원래는 캄보디아의 영토였던 사이공 지역에 정착하면서 이 지역을 크게 발전시켰다.[42] 다만 이들도 베트남의 남북조시대에는 대충 자신들의 풍습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응우옌 왕조가 들어서 통일된 이후 강력한 동화 정책으로 결국 그들의 풍속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의외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적국이었던 일본에도 많은 명나라 유민들이 피신하였다. 대표적으로 나가사키에 명나라 유민들이 많이 유입되었는데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이 생겨난 게 이때부터였다는 설이 있다.

6.2. 현대 한국의 평가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는 평가가 조금 갈리지만 타 왕조에 비하면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의외인 점은 현재의 중국이 아닌 미국이 명나라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조선의 사대외교에 대해서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평가를 하는 입장에서는 미국의 원조와 무역을 조선의 조공무역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고, 6.25 전쟁에서의 미군 파견을 임진왜란 당시 명군 원조에 비유하는 입장도 있다. 주한미군 범죄에 비유되기도 한다. 물론 터무니 없이 어거지로 만들어진 역사관이다.

역사의 해석에 대해 현대 정치적 논리가 끼이게 되면서, 명나라는 자주 대중매체에서 미국을 비판하고자 하는 반미 좌파들에게 미국으로서 잘못 은유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대국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반미감정이 국내에 치달았던 2000년대에는 그러한 정치적 역사관을 받아들인 사람들 또한 명청 교체기에 미국과 중국을 단순 대입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팽배했다.[43][44] 때문에 여러 대중매체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았으며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작품이나 저작물에서는 높은 확률로 현대 미국에 대한 비판의 은유가 들어갔다. 영화 신기전이나 천문: 하늘에 묻는다등에서의 묘사들이 대표적이다. [45] 몇몇 NL계열 운동권들이 이런 잘못된 비유를 들어 이게 퍼져나간 탓이 크다. 이게 잘못된 비유인 것이,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위정척사파만 해도 명나라를 따르던 사림 선비들이 기원이다. 오히려 청나라가 힘으로 밀고들어오는 침략자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서구 제국주의의 횡포를 비판한다는 사람들이, 청나라라고 하는 힘의 대세에 따르는 입장을 옹호하는 기괴한 결론이 된 것이다.[46]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명나라에 대해 미국을 은유하는 사람들은 대개 반미 성향이 강하고 친중 성향을 가지는 경향이 많은데, 정작 중국인들은 저 말을 들으면 싫어한다.(...) 중국인인 한족들 입장에서 중국의 마지막 왕조가 하필이면 이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국가인 청나라고 한족들은 만주족 아래서 지배받고 살았기 때문에 중국인 특히 한족들에게 있어서 명나라는 위상과 평가가 높은 왕조고 최후의 중국 왕조로 여기는 중국인들도 많기 때문이다.[47]

7. 여담

15세기 후반부터는 조세 제도의 혼란과 향촌의 해체로 국가 재정이 악화하는 한편 민간 교역이 성하였으며, 이는 필리핀을 통해 유입된 스페인 등의 영향으로 은 본위 경제 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장거정의 개혁으로 일조편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국가의 재정 악화, 무능한 황제들의 실정, 북로남왜 등의 침공, 만주 왕조의 대두 등으로 세력이 약화되다가, 빈발하는 농민 반란 속에서 직접적으로는 이자성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청나라가 이자성과 장헌충 등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중국 내륙으로 장악하여, 명나라로부터 천명(天命)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통일 왕조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멸망 이후에도 청에 대항하여 남명의 부흥 운동, 정성공대만 세력, 삼번의 난 등이 일어났으나 모두 청나라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민족과 공존하는 시대를 넘어 중화 제국의 구도를 완성한 점, 초기 자급자족적 질서를 추구하기도 했지만 활발한 대외 무역을 통해 흡수된 은 본위의 화폐 제도가 운영된 점, 마테오 리치를 필두로 가톨릭 선교사가 활동하는 등 서양과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고 필리핀과 일본 등으로부터 수입된 은 무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킨 점, 양명학 등 보다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이 추구되어 기존 주자학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적극적으로 전개된 점 등으로 인해 세계사적으로는 대개 중세를 완전히 넘어선 근세 왕조로 취급받고 있으며, 중국의 마지막 왕조가 하필이면 이민족인 만주족에 의해 건립된 청나라인 탓에 중국, 특히 한족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조금 더 치켜세워지고 있는 왕조이기도 하다.[48]

사실 명나라에 대한 재평가는 그동안의 이미지가 청나라의 편향적인 역사 서술에 의해 폄훼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점, 송나라와 비교하여 폐쇄적이고 상업적으로 다소 쇠퇴했다는 기존의 이론[49]이 흔들리면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실제로 최근 나오는 사료나 기록에서도 과거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는 것들이 많이 나와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례로 명을 방문한 스페인 신부 라스 코르테스는 "아무리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워도, 문자를 읽고 쓸 줄 모르는 어린이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놀라워하기도 했다.[50]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장강 유역에서 시작한 통일 국가였다. 초기 근거지였던 남경(난징시)은 장강이 관통하는 하류 지역에 있는 곳으로, 장강 이북과 이남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후 북경(베이징시)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상당한 국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암군들 때문에 국력에 비해 영 저평가당하는 비운의 왕조이기도 한데 사실 명나라에서도 영락제, 선덕제명군이 있었고 어느 왕조나 명군암군이 모두 있지만 명나라의 경우 불행하게도 말기암군들이 거의 연달아서 즉위했으며 그 중에서도 가정제만력제라는 진짜 개노답 암군 두 명이 너무 오래동안 재위했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 명은 북송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북송은 인구가 1억이 넘는 인구대국에다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국가였고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국가였음에도 이전 왕조들에 비해 군사적인 면에서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국력에 비해 저평가받는데 명나라는 말기에 나타난 암군들의 추태 때문에 국력에 비해서 저평가당하는 점이 북송과 비슷하다.

하지만 영락제때는 과거 한족 국가였던 북송보다 훨씬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락제대에는 원정군으로 50만을 징집하여 중국에 역사적 골치거리인 몽골을 박살낸다.[51]

역대 중국 황제 중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황제북위태무제, 명나라영락제, 청나라강희제 세 명뿐인데 그나마도 태무제강희제유목민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영락제는 막북 친정을 감행한 유일한 한족(漢族) 황제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는 성리학이 생겨난 송나라와 함께 조선 왕조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중국사 왕조인데 당장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이 입는 용포관복은 명나라 시기의 용포와 관복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비슷하고 조선의 경국대전은 명나라 대명률을 많이 참고했으며 군사적인 면에서도 조선군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원앙진 같은 명나라의 전법이나 당파, 낭선 등 명나라 무기들을 많이 도입했다.

8. 왕사

9. 대중매체

  • Hearts of Iron II의 대체역사 시나리오인 Armageddon에서는 무려 19세기(!)까지 살아남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어 명나라의 영토가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이 만주를 얻기위한 싸움터가 되어버릴 정도로 매우 비참하게 쇠퇴한다(...) 물론 이런 치욕스러운 모습에 보다못한 민족주의자들에게 멸망한다.
  •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 시나리오 4에서 사실상 최강국으로 나온다. 다른 시나리오의 제국과는 달리 중원을 통일한 상태로 나오고 컴퓨터가 조종할 때 북원 보다 고려와 일본을 자주 공격한다.
  • 대체역사소설쌀과 소금의 시대에서는 백인들이 흑사병으로 거의 전멸하여 몰락하고 아시아권이 크게 부흥한 세계관이라서 엄청난 패권을 휘두르는 대제국으로 등장하는데, 잉저우라는 이름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일본 열도를 정복해 원주민들을 난민으로 만들어 이로쿼이 연맹에 의탁하게 만드는 등 사방팔방으로 날뛴다. 이렇게 본 역사보다 막강해지긴 했지만 결국 본래 역사대로 청나라로(...) 넘어가게된다.
  • 김용녹정기에서 '돌이켜보면 명 왕조의 황제들은 태조가 개국한 이래 마지막 숭정제에 이르기까지, 잔악한 폭정을 하지 않았다면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였다. 솔직히 강희제에 비해 천양지차가 있었다.'라며 모든 황제를 깠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지나치게 명나라를 깎아내린다는 중국 측의 비판도 있다.
  • 각종 무협소설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는 현대 무협소설의 많은 원조 작가들이 대만 출신이기 때문이다. 현대 대만의 정치체제는 1912년에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중화민국인데 이는 만주족 국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오랜만에 다시 세워진 한족 위주의 국가로서 만주족을 크게 탄압하고 한족이 큰소리 쳤던 시절인 명나라를 많이 치켜세웠다.[52] 그리고 중화민국이 대륙을 잃고 타이완 섬으로 피난하면서 타이완에서는 "우리야말로 진짜 중국이고, 지금 중국 대륙 본토를 지배하는 중국 공산당 정권은 가짜 중국이다!"라는 식의 프로파간다가 널리 퍼졌는데, 이에 따라 공산주의 이념으로 인해 전통문화에 큰 관심이 없던 대륙보다 전통 한족 문화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그런 차원에서 정통 한족 국가인 명나라에 많이 주목했다. 그래서 대만에서 나온 무협소설들에서는 원말명초[53] 명말청초[54]가 단골 시대로 등장했고, 그런 대만 무협의 영향을 받은 한국 무협에서도 자연히 명나라 시기를 다룬 작품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던 것.
  • 붕괴3rd에서 중국을 모티브로한 신주가 있는데 과거 1470년대에 작중의 등장 조직 천명과 신주의 명 제국이 교전했다고 나온다.


[1] 주원장이 오왕(吳王)으로 자처한 기간까지 따지면 1364년을 명나라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남명의 존속 기간까지 합치면 1662년에 멸망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기간을 포함한다면 298년이 된다.[2] 1408년 - 1428년 교지(명)[3] 1375년부터 발행한 지폐[4] 절대 '대명제국'이 아니다. 전근대의 중원에 있는 왕조들은 정식 국호에 '제국'을 넣은 적이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제국'이라는 표현이 아닌 '천자국', '상국' 등의 표현을 썼다. 동아시아에서 '제국'이라는 표현이 지금과 같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제국, 중화제국, 대한제국과 같이 근대 이후의 일이다. 1915년 이전 문헌에는 중화제국이란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중화제국이라는 신조어를 말하면 아무도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현재 중화제국은 1915년도 건국한 중화제국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데 가끔 과도한 찬양 수단으로 과거 국가들을 중화제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일이며 한나라, 당나라, 명나라도 자신들을 중화제국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명나라를 언급할 때는 '명' 혹은 '대명'이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고, '대명국'이라는 표현은 아주 가끔 등장하며 '대명제국'과 같은 정체불명의 조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국체(國體)를 국명에 표현하는 것은 유럽적인 전통이다. Kingdom of England(잉글랜드 왕국)이라든지 Herzogtum Lëtzebuerg(룩셈부르크 공국)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칭했다. 이런 전통이 19세기 이후 서구 문명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밀려들면서 전파된 것이고 그 결과로 나온 명칭이 앞에 언급된 일본 제국이니 대한제국이니 하는 명칭이며 현재 한국의 정식 국호인 대한민국 역시 이 점에선 같다.[5] 단, 만주의 경우 명이 대부분의 기간 동안 랴오둥 반도 일대만을 직접 지배하고 나머지 지역에는 이를 중심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었다.[6] 이 경우 중국과의 조공으로 얻게 되는 정치적, 군사적 안정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현대 들어선 '조공 무역'에 주목한 시각도 부각되고 있다. 단, 사신 접대비나 조선 초(태종~세종) 공녀 문제,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으로 인한 관계 변질 같은 문제 등은 감안해야 한다.[7] 실제로 몽골인의 국가인 원나라와 만주인의 국가인 청나라는 둘다 국토 면적이 1,300만 km²가 넘어가는 나라다. 반면 명나라는 700만 km²도 안된다. 물론 상대적으로 작다는거지 명나라는 현대의 인도보다 국토면적이 큰 나라다.[8] 개국 공신 및 그들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수만 명을 죽였다.[9] 사실 명은 영락제 이후 식민지인 베트남에서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하여 베트남이 독립하고 토목의 변에서도 몽골에게 패하여 수도가 외적의 침공을 받는것에서부터 군사력이 약해졌음이 제대로 드러났다. 그러다보니 명은 영락제 이후로는 더는 주변국에 대한 패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국토를 방어하는 노선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10] 나중에 대왕 주계의 12대 손인 주지련이 옹정제 시기에 벼슬을 받고 명나라 제사를 잇게 되었다.[11] 많은 명 유민들이 전쟁을 피해 외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이민 가기도 했다. 이들은 현지와 많이 동화됐지만, 초창기 동남아 화교의 기원이 된다.[12] 식량 생산량 증가와 인구 증가[13] '추정' 인 이유는 아래의 이유로 인구 파악이 미비했기 때문이다.[14] 원래의 목적이 세수입을 확보하는 호구 통제 제도였다. 전근대 시기에 호구 조사 하는 이유가 뭘지 생각하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15] 조선만 하더라도 파악 호구수가 실제 인구의 최소 40%가 넘는 격차가 있을 것으로 본다. 국가가 교회를 통해서 세례자 명단만 확보하면 아주 정밀도 높은 인구 조사가 완료되던(실제로 스웨덴, 프랑스 등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유럽과는 상황이 다르다. 거긴 태어나면 기본적으로 유아 세례를 받고 죽으면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며 그 명단이 교회에 올라가니까. 세금을 내야 하지만 종교 문제가 걸려 있으니 농부들은 세금 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옛날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라 믿을만한 통계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행정력이 마비되는 시점이 현대에 비해 빈번했는데 그러면 행정 방식이 미흡한 국가에서는 인구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게 줄기도 했다.[16] 이때 보급로는 재조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17] 어떤 의미에서 이 제도는 동로마 제국프로니아 제도나 한국 역사의 과전법과 유사하다. 전근대(특히 중세) 기준으로 비용 대비 가장 효율적으로 군사력을 양성하는 방법은 영토를 분봉해주고 그 영토를 기반으로 군사력을 육성하게 하는 봉건제적 방법이었지만, 이 경우 군사력+세력기반까지 갖추고 효율적으로 양성된 그 군사력이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중앙정부가 세금을 수취하여 직접 봉급을 주게 되면 그만큼 군대에 대한 통제력은 높아지지만 전근대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수취-지금 과정에서 폐단이라고까지 할만한 막대한 비효율이 발생하는 것. 따라서 전근대 기준으로 중앙집권을 지향했던 국가들에서는 이 둘의 절충안으로 군인들에게 일정 범위의 농민들에 대한 수취권 제공하여 봉급은 효율적으로 주되 해당 농민들에 대한 지배력은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18] 명은 심각한 구리 인플레이션을 겪던 국가였다. 이건 청대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건 조선을 통해 혹은 직접적으로 일본을 통해 교역을 트고 윈난 지방의 개토귀류를 통해 동광을 확보하면서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일본이 교호 개혁으로 동 수출을 금지했을 때 동전 값이 등귀하고 동전에 아연을 더 섞어서 동전이 물러졌다고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면도 있었다.[19] 이 학살은 오고타이 칸 시절에 끝난다. 북중국을 다 정복했기도 했고 쿠빌라이가 북중국 통치를 잘했기 때문인데, 이렇게 통치를 잘 해서 얻은 세력으로 아리크부카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남송의 경우도 쿠빌라이 칸이 친중적이어서 전과 같은 학살은 없었다. 그래서 학살로 인한 인구 감소는 생각보다 적었다. 오히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20] 위에서 말했다시피 북중국의 경우 쿠빌라이가 다스리는 시기 이후로는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는 등 이 원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쿠빌라이 칸 항목 참조), 그 후에도 중국 전체로 보더라도 이 원인으론 인구 감소가 일어나지 않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령, 원나라의 인구는 대부분이 한족(몽골과 색목인 층의 수는 약 200만 ~ 300만인데 비해 한족의 수는 일단 한인의 수는 약 1,000만, 남인의 수는 약 6,000만, 합쳐서 약 7,000만 정도. 한인이 아무리 발해인, 거란, 여진 등을 포함한다 쳐도 원나라 인구의 대부분은 한족이었다.)인데도 계속 늘고 있었다. 1290년에 약 77,000,000, 1293년에 약 79,816,000, 1330년에 약 83,873,000, 1350년에 약 87,147,000, 명나라의 인구는 1393년에 약 65,000,000. 영문 위키 참조.[21] 흑사병의 피해가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고 흑사병으로 죽은 인구수는 중국이 유럽보다 더 많았다. 약 3300만명이 죽은 것으로 보여진다. 흑사병 항목 참조.[22] 두산 백과 '원의 사회 경제' 참고.[23]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참고.[24] 중국 학자들 가운데 이미 송대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명대나 청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중국본토 뿐 아니라 홍콩대학 소속 학자들이나 대만 학자들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무조건 신뢰하기 힘들다고 볼 수는 없다. 홍콩대학과 대만 국립정치대학은 서양에서 중국사 사료를 연구할때 가장 많이 자문을 구하는 학교들이며 홍콩대학은 영어가 쓰이고 중국본토와 달리 중공 입김에서 자유롭게 학문탐구를 하는게 가능해 서양 학계에서 적극적으로 자문을 구한다. 그러나 홍콩과 대만 역시 한족이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중화사상이 몸에 배어있는 국가인건 마찬가지다.(대만인들도 중공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 대해 '우리의 속국이었다'라는 인식이 엄청나게 강하다.) 따라서 대만과 홍콩이 국제적인 신뢰성을 담보하진 못한다.[25] 삼국지에서의 형주 지방, 청나라의 옹정제 시기 호북, 호남성으로 각각 분리된다.[26] 몽골인들을 북벌을 통해 축출하고 제국을 건설한 홍무제의 특성상, 명은 막북과 동북 방면에 대한 극심한 경계 태세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더욱 팽창적이고 과시적인 행보를 보여준 영락제 치세에는 더 강화됐다. 이렇게 황제의 의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관계는 비록 이유는 다르지만 선덕제까지 계승되었다. 때문에 선덕연간까지 조선 사신은 빈번하게 북경을 방문했으며, 마찬가지로 명 사신들도 한양에 빈번히 방문하여 접대를 받았다. 이때 명이 조선에 대해 다소 많은 이익을 보장해준 것은 동아시아의 특수하고 관대한 조공관계다.[27] 영락 중반부터 파견된 사신들은 주로 명 황제의 개인적 요구를 구두로 전달하기 위한 환관들이었다. 이들은 조관이 사신으로 파견됐을 때보다 훨씬 오랫동안 조선에 체류하며, 공녀, 특산품, 요리사 등을 요구했다.[28] 병자호란 때도 명나라는 내부 사정으로 조선을 도와주지 못하자 황제인 숭정제가 조선에 이를 사과하는 편지를 보냈다.[29] 상이 이르기를, "3백 년을 지켜온 종묘 사직이 일조에 빈 터가 되어 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하니, 석윤이 아뢰기를 "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 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출처.[30] 사실 당나라의 속내는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아예 한반도 자체를 야금야금 집어삼키려는 거였다.[31] 특히 신라 말기에는 수많은 신라인들을 노예로 데려가서 못살게 굴기까지 했다. 물론 개중에는 당나라와 내통해서 똑같이 쓰레기짓을 하던 신라 귀족놈들도 여럿 있었다. 그나마 이 짓거리조차도 장보고 덕에 당나라인들과 신라인들도 더 이상은 못 하게 되었지만...[32] 홍무제 때나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쇠퇴기가 배경이라면 나름대로 맞는 고증이지만, 명나라의 다른 황제 치세가 배경이면 완전 틀린 고증이다.[33] 다만 정작 당시 조선은 그 정도 병력으로는 원정을 나갈 여력은 없었다.[34] 천조, 즉 천국 간다는 뜻의 엄청난 경칭이다.[35] 과거 전국시대 연나라가 있던 베이징에 간다는 의미다.[36] 중일전쟁이 발발한 해다. 이 점을 감안하면, 일본 제국이 청나라의 중원 입관을 높이 평가하고 명나라를 최대한 깎아내리던 게 본격화된 것 또한 해당 연도로 추정된다. 조선인들을 굴복시키고(병자호란/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세력을 불려(병자호란을 통한 국가 안정 및 군사력과 경제력 강화/만주국 건국을 통한 일본 제국의 아시아 대륙 침공 본격화) 중국(명나라/중화민국)을 침공한 점에서 일본 제국 자신들을 청나라에 빗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까지는 무해하니 그냥 두었더라도 만력제와 숭정제에 대한 조선인들의 제사를 강제로 중단시킨 것도 그러한 명분을 쌓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37] 다만 이와는 별개로 조선 조정 역시 만력제가 암군인 건 인지하고 이 점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천계제는 원망할 수 없으나 만력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은 점은 절대로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오른쪽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사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38] 명나라가 멸망한 그 시점에 대규모로 건너왔고, 남명이 망했을 때 또 대규모 보트피플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뒤에도 꾸준히 유입되는데 삼번의 난 등 혼란이 이어질 때마다 조선 땅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39] 반면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일제 치하 조선으로 망명해온 만주족들과 친청 성향 한족들은 그들을 표면상으로나마 좋게 대해줄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어 조선총독부에 실권을 넘겨줬을뿐더러 정묘호란병자호란으로 대표되는 조선과 청나라의 엄청난 악연도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현지의 조선인들에게 처음부터 박한 대접을 받았다.[40] 왕과 신하들의 복장만 해도 명나라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이것 또한 북방 민족의 호복을 한족화시킨 것이다. 사실 받아들인 정도가 아니라 왕의 정식 예복인 면류관과 곤복 등은 아예 명나라에서 직접 만들어서 보내주는 식이었다. 반대로 서민들의 복장은 명의 한푸고려양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41] 읽어보면 알겠지만, 개화기에 이르러 복제를 바꾸려 하자 '왜 중국 사람들도 좋다고 하는 걸 굳이 바꿔여? 징징' 이런 내용이다. 전통과의 단절을 안타까워했던 당시 대다수 유생들의 반응이 느껴지는 부분.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 멸망 후 중화민국 정부가 변발을 금지하면서 한족 전통 상투인 속발은 허용하는 정책을 폈을 때 한족들이 강하게 반대했는데, 이 때는 명말청초와 달리 변발이 한족들의 새로운 전통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신해혁명에 가담한 이들 및 종교인이라 변발령을 적용받지 않은 도사들을 제외하면 변발이 본래 한족의 전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족들이 대다수였다. 이때문에 아직까지도 중국에서는 대머리인 남자를 멋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꽤나 있다고 하는데, 민족주의자들은 만주족의 복장인 치파오와 마찬가지로 변발을 매우 혐오하며 상투한푸가 중국 전통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다.[42] 지금의 호치민 시.[43] 사실 이 부분은 사람들이 크게 착각 하는것이 여러가지 있는데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를 압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병자호란 역시도 이 망해가는 상황에서 조선을 털어먹어 살 기회를 얻으려고 일으킨 전쟁이다. 명나라 멸망은 청나라의 외압보다는 명나라의 내분이 더 큰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대중들(특히 운동권)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생각 안하고 "명청 교체기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고 사대외교를 통해 명나라를 선택해 '벌을 받은' 조선이 중국을 놓치고 미국에 사대하며 의존하는 현대 한국과 같다"라는 논리(...)에 따라 정치외교적 논리로서 역사를 '활용'했었을 뿐이었다.[44] 견강부회인 게 학계에서조차 호란 당시의 후금/청이 '속 빈 강정'이었다는 건 극히 최근에서야 정설로 자리잡았고 그 전까지는 호란의 원인의 반대급부로서 '중립 외교'에 대하여 꽤나 심도있게 논의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비판이라고 해서 그게 친중으로 직결되는가?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정파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중국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모두까기'(양비론과는 다름. 양비론이 현상 유지로 귀결되는 반면 아예 독자 노선을 내세우는 건 별개의 대안 체제 추구로 봐야함)에 가까운데 위 각주야말로 도리어 정파에 대한 '시선' 내지는 '믿음'을 대중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가까운 서술이다. 반미와 친중은 별개의 문제이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명(미국)이 내외적으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청(중국)을 무리해서, 의도적으로 배척해봐야 재미볼 것이 없으므로 기존의 사대 노선 대신 독자적인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에 가깝다. 역량이 있어야 만에 하나 청(중국)과 대결을 하더라도 승산이 있는 것 아닌가. 실제로는 이괄의 난으로 북방 방위선이 붕괴되고 인사도 곱창나서 살수 대첩, 귀주 대첩의 재림을 검각[55]의 재림(...)으로 만드는 환장의 참사를 만들어냈지만.[45] 이러한 역사관이 유행이던 2000년대 중후반, 진보성향의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밀리터리 내무반 갤러리'의 밈이었던 천조국 또한 이러한 늬앙스에서 시작한 밈이었다. 미국을 명나라로, 조선을 현대 한국에 대입해 미국에게 사대하며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는것이 명과 조선의 관계와 똑같다며 과거 조선이 명 조정을 언급할때 쓰던 천조를 활용해 비판하던 밈이 천조국의 시초였으며, 이후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의미가 지금과 같이 변화해 본격적으로 퍼지게 되었다.[46] 서구에 반대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오히려 성리학 유림들에 가깝다.[47] 현대 한국 정치의 역사적 은유(엄밀히 말해서 완전히 틀린 은유지만)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중국 네티즌들은 한국 대중매체에서의 이러한 명나라 묘사를 '한국의 반중감정에 근거한 명나라 폄하'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부정적인 시선으로 본다. 이러한 반응은 중국의 대형 동영상 사이트인 비리비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48] 중국은 겉으로는 중화사상에 입각, 다민족국가임을 강조하며 요금원청도 모두 위대한 중국의 역사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칭기즈 칸도 세계정복을 이룩한 위대한 중화민족이라며 내몽골에 가짜무덤을 세워놓는 막북공정까지 하고 있다. 당연히 몽골에서는 이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다.) 실제로는 요금원청을 발전없이 파괴만 했느니 뭐니 하며 깎아내리고 한당송명을 치켜세우는 등 속마음은 한족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시진핑 정권의 중국 소수민족 탄압도 그런 한족 민족주의 성향이 제대로 폭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장 이 명나라 문서와 청나라 문서에도 이러한 한족사관의 영향을 받아 '명나라까진 화기 제조기술이 매우 뛰어났었는데 청나라 들어서며 서양에 밀리게 됐다'는 식의 편파적 서술이 보인다. 청나라가 화기의 연구 등을 금지시키거나 게을리한 건 사실이지만 이미 명나라 시절부터 서양에서 들어온 화기가 기존의 명나라 화기를 밀어내고 제식병기 자리를 차지했으며, 자연과학에서도 서양 선교사들이 기존의 한족 천문학자들을 밀어내고 고위직을 차지했으며 오랫동안 믿어온 혼천설을 대체하는 지구 구형론을 전파하는 등의 현상이 있었으므로 '청나라 때문에 서양에 밀리게 됐다'는 건 반만 맞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청나라가 이민족 정복왕조가 아니라 한족 왕조였어도 이런 평가를 했을까?[49] 근대 서양의 충격이 있은 뒤 중국이 유럽보다 뒤떨어지게 된 원인이 언제였냐는 질문에서 나왔다. 기존의 입장은 명나라 시기에 서양에 역전되었다는 관점이 우세했으나 최근 이것을 부정하는 연구가 속속 등장하면서 기존 관점이 흔들리고 있다.[50] 반대로 청나라는 명나라마냥 답이 없는 암군들이 많은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자체의 한계 탓에 명나라보다도 외세에 더욱 밀려 중국에 도움이 안 됐다는 부정적 재평가가 많아지고 있다. 다만 이 또한 한족우월주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이민족 왕조인 청을 깎아내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서양과의 자연과학/기술적 격차가 벌어지는 건 이미 청 건국 이전인 명나라부터 확인된다. 그러나 이 점을 감안해도 청나라 말기의 상황이 명나라 말기보다도 더욱 답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결정적으로 쇄국 정책과 건륭제 시기에 있었던 지나친 문자의 옥으로 인한 폐해가 결과적으로 중국을 엄청나게 퇴보시켰기 때문에, 서구 열강의 청나라 침입과 관련하여 청나라를 무조건 옹호하고 동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과연 청나라 말기가 명나라 말기보다 더 심각하고 답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청나라가 추태를 보여주며 망한 건 사실이다만(애초에 망할 땐 어느 나라든 추하지만) 명나라 역시 만주족이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철벽처럼 만주족을 막아내던 자국의 명장 원숭환을 알아서 처형했고 그렇다고 또 다른 별다른 의미있는 개혁을 보여준 것도 아니며 결국 농민반란에 의해 알아서 멸망했고 만주족은 반쯤은 주워먹는 수준으로 중원의 새 주인이 되어 한족들을 핍박하고 학살한다. 이 허무하기 짝이 없는 멸망이 과연 청나라보다 우월하고 멋있는 멸망인가? 차라리 명나라와 청나라의 멸망이 각각 다른 면에서 허무하기 짝이 없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51] 물론 영락제 시절에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토목의 변을 시작으로 점점 국력이 약해지더니 1550년의 경술의 변에서 몽골군에게 싸우지도 못한채 국토가 유린당했고 척계광원앙진 전법을 고안하기전까지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한적도 있으며 심지어 말기에는 국력에서 매우 열세인 청나라에게 약탈당하고 국토까지 유린당했고 나중에는 반란군조차 진압하지 못해 나라가 반란군에게 망하고 만다.[52] 청나라가 명나라보다 국력에서 강했다고는 하지만, 청나라 시기 중국의 지배자는 엄연히 만주족이었고 한족은 2등 국민 신세였다. 심지어 만주족 팔기군의 일개 병사가 한 도시를 다스리는 시장을 일방적으로 구타한 사건도 있었는데 그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던 사례도 있었다. 왜냐하면 만주족 병사한테 얻어맞은 시장은 피지배민족인 한족이었기 때문이었다.[53] 주로 이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몰아내는 명나라의 시조 주원장이나, 원나라의 잔존 세력인 타타르오이라트를 쳐부수러 북쪽으로 원정을 떠나는 명나라의 3번째인 영락제가 무협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슈퍼 스타들이다.[54] 이민족인 만주족에 맞서 한족의 나라를 지키려는 충의지사들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