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7:59:49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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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제자백가 사상가
공자 | 孔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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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비황족 추존 황제
문선황 | 文宣皇
서하 비황족 추존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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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기원전 551년 9월 28일
곡부 창평향 추읍[A]
(現 산둥성 지닝시 취푸시)
사망 기원전 479년 3월 4일 (향년 71세)
곡부 창평향 추읍[A]
(現 산둥성 지닝시 취푸시)
묘소 산둥성 지닝시 취푸시 공림(孔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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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3]
구(丘)
부모 부왕 계성왕 공숙량흘
(啓聖王 孔叔梁紇, 기원전 622 ~ 기원전 549)
모친 후처 안징재
(後妻 顔徵在, 기원전 568 ~ 기원전 535)
형제자매 부친 기준 2남 9녀 중 차남
모친 기준 외아들
배우자 병관씨(幷官氏)의 여식(女息)
자녀 아들 사수후 공리
(泗水侯 孔鯉, 기원전 532 ~ 기원전 483)
손자 기수후 공급
(沂水侯 孔伋, 기원전 486 ~ 기원전 402)
신장 182cm[4]
종교 유교
중니(仲尼)
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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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부(尼父) →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
→ 포존후(褒尊侯) → 문성니부(文聖尼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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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사(先師) → 선성(先聖) → 선부(宣父)
→ 태사(太師) → 융도공(隆道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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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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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왕(文宣王) → 문선황(文宣皇)
→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
→ 문선제(文宣帝)
→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 지성선사(至聖先師)
→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
→ 지성선사(至聖先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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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정치인, 철학자, 교육인, 작가[5], 시인[6]
호칭 공자(孔子), 콘푸치우스(Confuciu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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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생애 및 사상4. 교육 방식5. 제자
5.1. 공자의 주요 제자목록
6. 공자 관련 문헌7. 평가8. 기타9. 대중매체에서10. 기념일11. 사당12. 관련 문서13.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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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자춘추시대 유학자이다. 주나라의 예(禮)와 악(樂)을 정리하여 [유학]儒學의 기초 경전을 정립하였으며, 이 예.악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 실현을 목표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오늘날 유학(유교)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이후 유학이 동아시아 문명권의 대세가 되면서 공자 역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려서부터 (禮)에 밝았다. 30대부터 제자 양성을 시작했고, 노정공의 신임을 받아 50대에 이르러 당시 노나라의 세 권세가인 삼환(三桓)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으나 끝내 좌절되고, 실각하였다. 이에 자신의 이상이 노나라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안 공자는 이후 여러 제자를 이끌고 10여년 동안 중국 천하를 방랑하며 뜻이 맞는 군주를 찾았지만 결국엔 좌절되었다. 60대 후반인 말년에 노나라로 귀국하여 국로(國老)의 대접을 받았으나 정사에 참여하진 않고 후학 양성과 고문헌 정리에 힘쓰다 70대에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공자의 가문인 공씨는 송나라에서 노나라로 망명 온 가문이었으며, 송나라는 고대 주나라상(商)나라를 정복한 뒤 주나라에 적대하지 않은 일부 상나라 유민들을 거두어 상나라 왕족을 제후에 봉함으로써 세워진 나라이다. 따라서 공자는 상나라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8]

2.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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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 공묘[9] 대성전에 걸린 청나라 황제들의 친필 편액
만세사표(萬世師表)[10],
사문재자(斯文在玆)[11], 덕제주재(德齋幬載)[12],
성집대성(聖集大成)[13], 생민미유(生民未有)[14]

사상적인 측면에서 공자는 동아시아적인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인()' 을 최초로 제시하였다.[15] 따라서 인(仁)이란, 도덕적,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적인 의미의 '사람다움', 즉,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 이는 공자(《논어》)의 仁者 愛人('인'은 남을 아끼는 것이다)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자식을 대할 때 그러하듯이, 배려하고 걱정하는 등, 조건없이 남을 챙기고 아끼는 마음이 "사람다움"의 본질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배신 속에서 죽었기에 '남을 챙기고 아끼자. 그래서 사람답게 살자.'는 공자의 외침은 당시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크고 작은 영감을 주었다.

이렇게 주변을 아끼고 챙기는 사람다움(仁)을 잘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신뢰(信)를 얻게 되는데, 주변의 수많은 신뢰를 통해 높혀진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단체의 장(長)이 된다.

이로써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생기게 되니,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모범이 되어 가르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본받아 배운다. 공자는 이러한 상하관계에서의 올바름을 '의'(義)라고 하여, 공정하고 의로운 자가 높은 위치에 있어야 그 사회가 안정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주변 친한 사람을 챙기는 것도 너무 지나치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상하관계의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있어서 순서가 없으면 미숙한 아랫사람이 그 미숙함으로 윗사람을 우습게 보아 가르침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친하더라도 거리를 지키게 하고 상하관계에서는 순서를 따르게 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을 '예'(禮)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따라서 인(仁)한 사람은 결국 높은 자리로 나아가 의로움(義)을 펼치며, 이러한 인(仁)과 의(義)의 적절한 순서를 지키자는 것이 예(禮)가 되는 셈. 여기서부터 효제자(孝悌慈), 서(恕), 경(敬)의 윤리관, 예치(禮治), 덕치(德治)의 정치관 등이 만들어졌다. [16][17]

따라서 공자는 세상이 혼란한 연유를 이러한 인(仁)의 부재와 예악(禮樂)의 상실에서 찾았으며, 예악을 따르는 인군(仁君)을 일으켜 주(周)나라 초기와 같은 성세(聖世)를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정치는 인(仁)을 갖추고 예(禮)에 밝은 군자(君子)[18]가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 군자를 양성함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 교육을 베풀었다. 그가 정립(正立)한 사상, 그리고 그의 사후 후대 학자들이 그 사상을 뼈대로 하고 여러 사상을 곁들여[19][20] 발전시켜온 일련의 사상계(思想界)(사상적 조류)를 우리는 유학(儒學), 또는 유교(儒敎)라고 부른다.

오늘날 세간에서는 보통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 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적어도 공자는 자신이 무언가의 창시자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공자는 다만 스스로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예악(禮樂) 전통을 정리하고 계승했을 따름이며[21], 자신의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옛 성왕(聖王), 성현(聖賢)의 행적에 깃든 참뜻을 밝혀낸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저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은 아니다."는 말은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요순우탕문무주공의 사상을 잇는 것이었다. 실제로, 흔히 유교 문화로 알려진 것들 중에는 공자 이전부터 있었거나 혹은 나중에 가서야 형성된 관습들이 많다. 또한, 공가(孔家)라고 부르지 않고, 유가(儒家)라고 부르는 것도 후대의 학자들이 이런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원 성종 11년(대덕大德 11년, 1307년)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사당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이기도 하다.[22]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누군가를 죽은 뒤 추존하는 사례는 많지만 대부분 왕족을 정통성 때문에 추존했던 것이지, 공자처럼 왕족도 아니었던 사람을 군주로 추존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23]

보통 《논어》에서는 '자왈(子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줄여서 말한다. 《논어》 이외의 책에서 공자를 지칭할 때는 '부자(夫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이런 까닭은 한자문화권에서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보통 공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간혹 '공부자(孔夫子)'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서구 선교사들은 이 표현을 라틴어로 바꿔서 '콘푸치우스(Confucius)'라고 불렀다.[24] '공부자'의 중국어 발음[25]에다가 남성 명사 주격 단수 어미인 '-us'를 붙인 것.[26]

생전에 키가 아주 컸다고 한다.

3. 생애 및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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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육 방식

공자의 기본 교육은 원래 노래(詩)였다. 시(詩)라는 표현 때문에 그냥 조용히 독서만 할 것 같지만, 실제로 리듬을 타면서 노래까지 불렀다.[27] 흔히 유교라고 하면 도식적으로 틀에 박힌 이야기를 듣기 쉽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공자 본인은 그렇게 틀에 박힌 스타일로 교육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시경은 가사만 전해져서 멜로디를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28]

공자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예(六藝)라는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 예는 그냥 예의범절이 아니라 각종 공식행사의 의례 절차를 배우는 것. 이걸 배우면 당장 외교나 제사 등의 국가행사를 주관할 능력이 생긴다.
  • 악은 음악인데, 이것도 그냥 요즘 실용음악 같은 것 뿐만 아니라 행사 때 연주할 음악을 배우는 것이라서 역시 관료로서의 실질적 교육이 된다. 또한 그는 좋은 음악을 연주하고, 듣고, 부르는 과정에서 심성이 교화된다고 믿었다.[29] 유교 텍스트에서는 문화 자체를 예악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참고할 것.
  • 사와 어는 활쏘기와 수레타기. 즉, 전쟁기술이다. 전차가 퇴화된 후에는 말타기로 바뀌었다. 여기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호신술로서 검술도 비중있게 가르쳤다.
  • 서와 수는 문서 만들기와 회계처리라고 보면 된다. 단순 글짓기와 산수가 아니라, 공무원으로 일할 때 문서를 작성하고 세금이나 국가재정을 계산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즉, 선비는 단순히 앉아서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관료로서 공무 전반의 모든 실무에 능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인으로 치면 여려 훈련 및 행사 주관에도 빠삭하고, 부대원 교육 및 관리도 잘 하고, 매일 사격 연습도 철저히 하고, 탱크도 몰 줄 알고, 전술 및 전략에도 통달하고, 서류 작성도 잘 하고, 행정 업무에도 능숙하고, 재정 업무에도 숙달된 올라운더인 것이다. 유교가 대충 뜬구름 잡는 철학 공부라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착각이다. 후세에 내려오며 실용적 면보다 통치 이념으로서의 부분이 더 강조되었을 뿐이지. 공자는 정말 당장 관료로서 써 먹을 수 있는 실용 교육도 했던 사람이다.[30] 괜히 동아시아 세계에서 한나라 이래 유학을 세속세계의 통치이념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서양에 비유하자면 국교는 기독교이지만, 통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보면 된다.

이 육예를 서, 수 / 예, 악 / 사, 어로 나누어 현대 교육학에서 말하는 지덕체 전인교육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 공자의 진짜 업적이라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민간에 전파했다는 것이다. 공자 이전에는 제대로 된 교육 기관이라 할 것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기관도 귀족 한정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이 지배계층에 필수적인 기술과 매너를 폐쇄적으로 가내에서 전승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이나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예물로 육포 한 다발만 가져온다면 다 가르쳐주었고, 이 이야기는 지금에 이르러선 속수지례(束脩之禮)라는 성어로 굳어졌다. 여기서 육포를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육포는 남에게 주는 예물로는 가장 격이 낮은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스팸이나 참치캔 정도 지위였다. 즉 배우고 싶어서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르치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가 "백성들이 많으면 넉넉하게 해주어야 하고, 넉넉하게 되면 가르쳐주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공자에게 교육이란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꼭 받아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다만 실력이 안 되면 그딴 거 없고 공짜는 아니라는 의미도 숨어 있긴 하다. 이 육포를 촌지로 잘못 해석하는 반(反)유교인이 있지만 상술했듯 육포는 격이 낮아 고급 예물로는 부적절했다. 고로 '최소한의 성의, 의지'를 육포라는 것에 대유법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봐야 한다. 결정적으로 논어 향당편을 보면 공자의 음식 취향이 나타나는데 말린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공자가 오히려 가장 중요시한 것은 배우는 사람의 열정이었다. 흔히 속수지례로 대표되는 공자의 최소한의 성의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다음에 서술되는 "분발하지 않으면 일깨워주지 않았고, 한 귀퉁이를 허물어주고 나머지 셋을 알아 맞추지 않으면 더이상 가르치지 않았다."라는 문장을 통해 공자는 누구보다도 배우는 이의 열정을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즉, 공자는 본인의 이익보다 배우는 이가 부지런히 노력하며 앎을 추구하면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참 교육자였던 것이다.[31]

이렇듯 공자는 자신이 배움을 좋아함을 자주 강조했다. "나는 태어나면서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구절에서 그 정신이 잘 드러난다.[32] 다만 공자 숭배가 심해지면서 "공자는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며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유학자들이 많아졌고 최술은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에서 이를 강렬히 비판했다.

덕분에 공자를 계승한 유학자들의 특징은 역시 강렬한 현실 참여 의식과 지적 자산에의 갈구를 들 수 있다. 아무리 잘난 집안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욕을 먹는다. 다른 문화권 지배계급은 공부 압박을 그렇게 심하게 받지 않았다. 공부가 입신양명의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각광받지도 않았고. 당연히 공부를 하려면 돈이 들고 명청대 중국 사족들은 상업이나 소작료 받기 등 공부와 아무 관련 없는 일로 돈을 잘 벌기도 한다. 근데 그렇게 돈이 생기면 일단 자식을 공부시킨다.

조선도 마찬가지라서 아버지가 고위 관료면 자식이 음서로 관직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음서로 커리어 시작한 사람들도 절대 다수가 공부해서 과거를 다시 본다. 음서는 그냥 호봉이랑 짬밥 좀 쌓으려고 깔아두는 것일 뿐. 게다가 음서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낙하산 인사라는 경멸의 시선이 엄청났기 때문에 음서는 떳떳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렇게 현대 한국, 일본, 중국의 공부열이 설명될 수 있고 나아가 공부에 집착하는 서양의 아시안 스테레오 타입이 생긴것도 이런 연유라고 할 수 있다.[33] 다만 불교 국가 고려에서는 유교의 교세가 조선만큼 강하지 않았던 데에다 문벌 귀족의 관직 독점 문제가 심각하여 음서 출신도 조선처럼 멸시받지 않아 과거에 목 맬 필요가 없었다.

또한 스스로 전차를 잘 다룬다고 했는데, 전차를 모는 사람은 지휘관이자 전사를 의미한다. 공자의 키는 9척 6촌[34]이 넘는 거구였고, 그 당시에 그런 육체적 능력이 허당이었을 리가 없다. 덩치도 덩치지만 공자는 목수 일이나, 장의사일, 전차 몰기, 창고지기 등 온갖 궂은 노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심지어 그 자로[35]를 무력으로 제압했다는 얘기도 있다. 위에서 말한 육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제자들에게 군사교육도 했던 사람이다. 춘추시대 때는 문관과 무관의 구분이 없었다. 공자는 본래 무장을 배출한 가문 출신이고[36], 공자로부터 무예와 군사를 부리는 일을 배운 제자도 있었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첫 관직생활을 했을 때부터 그를 증오하는 자들의 습격으로 여러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공자가 호신술을 제대로 안 익혔으면 후에 노나라로 돌아가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원래 춘추시대의 당대의 사(士)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 계급이었다. 평소에는 정치를 하고 전시에는 전쟁을 하는 것이 사(士)였다. 즉, 공자의 집단은 거의 무장세력이었다. 당대에는 이런 무장세력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것을 제자백가라 부른다.[37] 물론 싸움만 하는 건 아니며 국가를 운영하고 행정업무를 다루기 위해서 학문도 갈고 닦았다.[38][39]

5. 제자

3,000명에 육박하는 제자들을 육성하여[40], 이후 전국시대의 인재풀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수받은 72명의 제자가 있고, 다시 그 중에서도 뛰어난 10명의 제자를 공문십철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사람들이 대륙 곳곳으로 진출해서 상당수의 제자백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자도 공자의 학문을 좀 더 보편주의화시킨 인물이고, 보통 법가로 알려져 있는 상앙은 공자의 제자 자하가 위나라에 세운 학교에서 배출된 인물이고, 한비자나 이사 등은 순자의 제자였다. 그러니까 자공, 자로 등의 주요 인물만 대단한 게 아니라, 공자의 제자들이 이후 전국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공자가 유랑생활 할 때도 공자의 제자들은 수시로 다른 나라로 가서 일을 하기도 하고, 그들의 소개로 공자가 초청되기도 했다. 특히 공자가 10여년 동안 유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재벌이었던 자공의 경제적 지원이 컸다. 공자가 마냥 가난했다고만 생각하는 건 착각. 군주나 고위관료들과 교류하려면 최소한의 경제적 수준은 있어야 된다.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도 공자는 집에 마굿간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고급 세단 몇 대는 굴렸다는 뜻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는 확고하게 굳어진 신분제도가 없었다. 물론 노비 같은 게 있기는 한데, 신분적으로 규정된 노비가 아니다. 공자는 가르침을 베푸는데 있어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제자이자 친구인 자로도 들에서 살던 양아치였다. 공자 본인도 산골에서 태어난 천한 사생아나 다름없었다. 공자는 어릴 때 천하다며 문전박대를 당한 경험이 있었고, 꽤 오랫동안 아버지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오나라 재상(大宰, 태재)이 공자를 보고 "정말 성인이시다. 다방면으로 재주가 넘치시니."라고 재주가 많음을 비꼬았는데, 이를 들은 공자가 말했다. 그가 나를 잘 아는구나. 나는 어렸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잔재주가 많을 뿐이다. 군자가 재주가 많아야 할까? 꼭 그렇진 않은 법이다.[41]

5.1. 공자의 주요 제자목록

  • 안회 - 논어에서는 공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수제자로 나온다.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로 일찍이 공자가 '나는 그가 진보하는 것만 보았지 정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42]고 말한 적이 있지만, 공자보다 일찍 죽는다. 안회의 죽음을 들은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天喪予, 天喪予!)라고 탄식하며 슬퍼했다.
  • 자로 - 논어에서는 무골(武骨)에다가 성격도 드센 전형적인 호걸형 인물로 나온다.또한 대부의 가신을 지낼 만큼 정치적 능력도 상당했다. 공자에게 면박을 많이 받지만 칭찬도 받고 공자와의 인간적인 관계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후에 위(衛)나라 공실의 권력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하고 그 시신이 젓갈로 담겨진다.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한 공자의 행동이 자기 집의 젓갈을 모두 버리는 것이었는데 이 것이 공자식인설이라는 루머로 퍼졌다. 안회와 더불어 공자에게 가장 중요한 제자였는데 자로가 죽은 소식을 듣고 안회와 마찬가지로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외쳤으며 자로가 죽은 다음해에 공자도 사망했다.
  • 자공 - 논어에서는 머리가 비상하고 언변에 뛰어나며 장사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걸물로 나온다. 굉장한 부자였는데, 이 재산으로 공자학단을 경제적으로 후원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무려 6년상을 치렀을 만큼 공자에 대한 존경심이 엄청났다.
  • 증자 - 공자에게서 우직하지만 아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나이 차이가 거의 50살이나 나서 공자 사망 당시 20대였기에 공자와 대화하는 내용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고 오히려 증자의 아버지인 증점이 더 많이 등장한다. 다만 논어가 증자계파에서 완성되었다는 설이 주류적일 정도로 논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꽤 있는 편이다.
  • 재여(=재아) - 공문십철에 들어갈 정도로 높은 위치이긴 하지만 정작 논어를 보면 비난의 대상으로만 등장한다. 자로는 꾸짖으며 행동을 고치길 원하는 모습이라면 재아는 순전 비난일색이다. 공자에게도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것은 덤. 삼년상을 비효율적이라며 일년상을 주장하면서 공자에게 '재아는 부모에게 3년도 사랑받지 못했구나'라는 뒷담화를 듣거나 재아가 낮잠을 자는 것을 공자가 보고 재아를 '조각할 수 없는 썩은 나무'로 평가한다. 허나 현대에 와서는 재아가 비판받은 내용이 많은 이유가 공자의 예, 형식 강조와 재아의 실용주의 간의 대립으로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 나머지 - 자유, 자하, 자장, 민자건(민손), 염백우, 진항(진자금), 중궁, 염유 등이다.

이 중에서 제일 언급이 많이 되는 제자는 안회, 자로, 자공이며, 이 3명은 공자 제자의 삼대장이라고 할만하다. 안회는 어질고 똑똑하며 지혜롭고, 자로는 힘이 쎄고 장군감이어서 용감하며, 자공은 상인 출신이라 돈이 많아서 공자가 힘들 때 물질적으로 많이 도와주었으며 인맥이 넓었다.

그 외: 담대멸명, 복부제, 원헌, 공야장, 남궁괄, 공석애, 안무요, 상구, 고시, 칠조개, 공백료, 사마경, 번수, 유약, 공서적, 무마시 - 여기까지 논어에 기록이 있는 제자들이다.

이하 언급되는 제자들은 논어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이름만 언급되어 있다. 일부는 공자가어, 사기 공자세가 등에 짤막하게 일화가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공견정, 공량유, 공서여여, 공서잠, 공손룡, 공조구자, 공충, 공하수, 교선, 구정강, 방손, 백건, 보숙승, 상택, 석작촉, 숙중회, 시지상, 신당, 악해, 안고, 안조, 안지복, 안쾌, 안하, 안행, 양사적, 양전, 연급, 염결, 염계, 영기, 원항적, 임부제, 적흑, 정국, 조휼, 좌인영, 진비, 진상, 진염, 진조, 칠조도보, 칠조차, 한보흑, 해용잠, 현성, 후처 등이 있다.

6. 공자 관련 문헌

공자는 작가가 아니었다. 스스로도 전해져 오는 것을 정리했을 뿐, 스스로 만든 책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시경을 정리하고 주역에 해설을 달고 (계사전), 춘추를 지었다고 전해져 오지만, 이 중에서 분명히 공자의 손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춘추의 경문이며, 나머지는 후대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계사전도 공자가 저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주역은 공자의 영향력이 아주 큰 경전이다.) 이러한 경전들은 대부분 후대에 제국과 같은 거대한 권력체의 후원을 받아 경전화될 때 성립되기 마련이다. 논어도 공자의 책이 아니라, 공자와 그의 제자 또는 관련된 사람들의 언행을,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해 놓은 것이다. 공자는 이론보다는 행동을 한 사람이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인생에 대한 각종 일화와 기록의 일차적 소스로 가장 유명하고 진실성이 가장 높으면서도 내용이 풍부한 것은 당연히 논어. 그렇지만 예기에서도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공자와 관련된 일화를 상당히 많이 확인할 수 있다.(예: 가정맹어호) 그 외에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한나라 시기까지 구전되거나 기록에 남아 있던 각종 일화들을 모아 놓은 공자가어도 중요한 소스. 사마천사기의 '공자세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관련 자료들을 모아 한편의 완성된 전기로 만들어 놓은 현전하는 최초의 문헌이며, 당연히 위의 소스들을 이용한다. 이상의 자료들을 제외한 다른 자료들은 단편적이거나 위서이거나(예: 공총자) 실화라기 보다는 우화에 가깝거나(예: 장자) 위의 자료들을 이용한 이차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7.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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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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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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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념일

성균관대학교기원이 기원인지라 공자의 탄신일인 매년 9월 28일에 쉰다. 이 날을 공부자탄강일공탄절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춤 추고 노래 연주하고 술 마시는 일종의 공자 생일파티다. 진사식당에서 무료로 밥도 먹을 수 있고, 생일파티 때 공자에게 올린 술도 나누어준다. 종교단체로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문화적 영향력이 있어서인지 정계, 재계에서도 많이 참여하는 편. 팔일무(八佾舞)를 볼 수 있는데, 문무와 무무로 구성되어 있다. 춤이라고 하지만, 현재의 댄스와는 비교 불가. 아주 느리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일하게 공자 생일에 쉬는 학교. 행정실도 연구실도 교수도 모두 쉰다. 이 날 에버랜드에 있는 대학생은 전부 성대생이라는 소문이 있다. 또한 입학식을 자연과학캠퍼스에서, 졸업식을 인문사회캠퍼스에서 거행하는데, 박사 학위 취득자와 졸업생 대표들이 성균관 대성전에서 제사를 지낸다. 대만에서는 공부자탄강일이 스승의 날로 지정되어있다.

11. 사당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곡부)에 사당이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하는 공묘(孔廟)가 바로 그것. 여기서 廟는 '사당 묘'로 무덤을 뜻하는 묘(墓)와 한자가 다르다. 공자의 무덤은 공묘(孔墓)라고 쓰며, 공묘(孔墓)는 공자와 공자 직계 혈연들이 묻힌 공림(孔林)의 안에 놓여 있다. 중국에서 '수풀 림(林)' 자가 붙은 묘지는 성인(聖人)의 묘지에 붙이는 것으로 한정되는데, 유구한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이 호칭으로 일컬어지는 묘는 공자의 공림과 후한 말의 관우의 '관림(關林)' 외에는 전무하다.

한국에 있는 성균관이나 궐리사(厥里祠)[43]도 공자의 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3대 공자 사당중 하나인 허베이성(河北省) 청더(承德) 러허원먀오(열하원묘)가 호텔로 개조되었다. 중국인들은 문화유적 훼손이라며 비난하는 중.

타이베이에도 공자의 사당이 있는데, 타이베이 첩운 단수이신이선 위안산역 인근에 있다.
파일:72hxeDB.jpg
베트남 하노이 문묘(Văn Miếu, 文廟)내의 모습.
'만세사표萬世師表'를 써넣은 현판이 여기에 보인다.

일본 나가사키에도 존재한다.

12. 관련 문서

13. 외부 링크


[A] 魯 曲阜 昌平鄕 郰邑[A] [3] 곡부 공씨의 시조이다.[4] 키가 9척 6촌이라고 나오는데 척은 초창기에 19cm 정도였고 이후 점점 길어져 전한 대에 이르러 23cm가 되었으니 그 이전 시대 사람인 공자는 19cm를 적용해 계산하는게 비교적 정확할 것이다. 이리하면 182.4cm라는 현실적인 키가 나오는데 당시 남성들의 평균 신장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큰 키이고 현대 중국 남성들의 평균신장보다도 큰 편이다.[5] 공자는 기본적으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지켰으나, 이를 부득이 한 번 어긴 적이 있었다고 한다. 맹자(孟子)의 말에 따르면, 바로 《춘추》(春秋)를 일으킨 '作' 이었다. 《춘추》는 본래 사서(史書)의 일종인데, 예(禮)에 따르면 사서는 오직 천자(天子)의 명으로만 편찬, 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춘추전국(春秋戰國)의 혼란의 시대상에 천자가 힘을 잃고 도덕이 문란해졌으므로 제대로 된 사서가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공자가 기존의 노(魯)나라 《춘추》를 토대로 하여 유가적 도덕주의를 기준으로 한 포폄서(褒貶書)를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전해지는 《춘추》이다. 역시 맹자에 따르면, 공자는 자신의 《춘추》를 두고서 "나를 알게 하는 것이 《춘추》일 것이요, 나를 허물하는 것도 《춘추》일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맹자》, 〈등문공장구 하〉, 9장, 《주자집주》 기준.)[6] 공자는 기본적으로 오늘날 《시경》(時經)의 시를 외거나 다른 사람이 부른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즐겼으나, 공자가 죽기 7일 전 스스로 만들어 부른 노래라는 것이 전한다. "태산이 무너지누나! 대들보가 부러지누나! 철인(哲人)이 시드누나!(泰山壞乎!梁柱摧乎!哲人萎乎! , 《사기》, 〈공자세가〉.)"[7] 공자의 본명 공구의 중국식 발음을 로마식으로 바꾼 이름. 서양에서는 로마가 망하고 한참뒤인 뉴턴 시대 이후로도 상당기간 논문을 주로 라틴어로 작성했고 저자명은 물론 작성하는 모든 인명을 로마식으로 고쳐썼다. 데카르트를 카르테치우스라고 하는것이 예시. 데카르트같은 서양인들은 원래 쓰던 자국식 이름을 일상적으로 사용했으나 철학에 조예가 있지 않은 이상 공자의 원래 이름을 일반인들이 알수가 없었고 이미 그시대에 동아시아의 철학가로서 서양에 알려졌으므로 로마식으로 바꾼 ‘콘푸치우스’가 굳어졌다. 영어로도 같은 철자에 발음만 '컨퓨셔스' 라고 한다.[8] 물론 공자 본인이 상나라 후예라고 생각한 것일뿐 당시 혼란상에 실제 공자 가문이 상나라 심지어 왕족 가문과 직접적 연관이 있었는지는 정확히는 모를 일이다. 또 그럼에도 본인은 그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의 문물을 숭상한게 재미있는 부분. 상나라 문화라도 공자는 순장같은 비인격적 제도는 신랄하게 깠다.[9] 공자의 무덤[10] 만세토록 모범이 될 위대한 스승. 공자를 지칭하는 대표적 수식어 중 하나이다. 강희제(청 제4대 황제, 1661~1722 재위) 어필.[11] 천하의 모든 문화가 여기에 있다. 광서제(제11대, 1875~1908 재위) 어필.[12] 공자가 천하를 주유한 것이 소중한 보석을 옮기는 수레와 같다. 함풍제(제9대, 1850~1861 재위) 어필.[13] 공자가 모은 것으로써 그 도를 크게 이루었다. 가경제(제7대, 1796~1820 재위)어필.[14] 사람이 난 이래 그와 같은 성인은 없었다. 맹자 <공손추>편. 옹정제(제5대, 1722~1735 재위) 어필.[15] (詩) 등 공자 이전의 문헌에서 '인(仁)'이라는 글자는[44], 그 의미는 맥락상 도덕적,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적 '사람다움'보단 '남자다움', '사람 구실을 잘 함(유능함, 능력 있음, 다재다능함)', '사람 중의 사람(잘남, 빼어남, 잘생김)'에 가까웠다. 그 어원을 생각하면, (비유적인 의미로) '속빈 강정이 아닌', '알맹이가 있는'의 뜻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인'에 '휴머니즘'을 부여한 것은 공자가 최초이다. 《시경》(詩經)의 <숙우전(叔于田)>, <노령(盧令)> 참고. 하지만 공자도 원래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아서, 제 관중(管仲)의 업적을 칭찬할 때 이러한 느낌이 강한 '인'을 사용하기도 했다.[16] 즉 유교에선 예를 중심, 상하관계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관계상 아니라고도 보기도 한다.동중서(한)에 의해 유교가 상하 질서를 유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17] 참고 도서: 맹자, 마음의 정치학[18] '군자(君子)' 역시 '인(仁)'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휴머니즘'(humanism)의 색채가 별로 없던 용어였다. 시(詩) 등에서 쓰인 군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에 가까웠는데, 공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 됨의 필수조건이 바로 '인문 정신'(人文)과 '도덕성'을 갖춤, 즉 '인'함이라고 보았다. 공자가 이 같은 '인' 사상을 가진 채로 '군자'라는 용어를 쓰고, 공자가 유명해지며, 공자의 말이 확산되고, 공자의 말에 배어 있는 그의 사상이 알게 모르게 전파되면서, 공자의 '군자'가 종래의 '군자'를 압도함으로써 오늘날의 군자는 '도덕적 지성인'(道悳)의 의미가 강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의 현상이 맹자의 '대장부(大丈夫)'에서도 보이는데, 다만 백가쟁명(百家爭明) 시대의 맹자의 말의 파급력, 장악력은 공자보다 덜했으며, 그 자신부터가 자신의 '대장부' 보다는 공자의 '군자'를 쓰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맹자의 '대장부'는 종래의 '대장부'를 압도하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19] 유가(儒家), 유학(儒學), 혹은 유교(儒敎)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당시의 원시 유교에서부터 묵가(墨家), 도가(道家), 법가(法家), 종횡가(縱橫家), 농가(農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등 수많은 타 학파와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며(물론 꽤나 비우호적인 교류였지만) '생존'했다. 당연히 타 학파의 사상에서 온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그것을 자기 학파의 논리로 내재화해 오면서 명맥을 유지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맹자(孟子)는 공자의 최고 가치 '인(仁)'에 대항하기 위하여 묵자(墨子)가 내세운 최고 가치 '의(義)'를 오히려 공자식으로 강조해 '인의(仁義)'의 병칭어(竝稱語)를 유가적 개념어로 보편화시켰고, 순자(荀子)는 이에 더해 도가적 수양론(修養論)과 법가적 정체론(政體論), 명가적 명실론(名實論)을 비판적 수용하고 그것을 유가적 예치주의로 귀결시켰다. 중세 유교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性理學, 주자학(朱子學), 정주학(程朱學)}, 양명학(梁明學)도 그 당시의 경쟁 사상계(思想界)인 도교(道敎), 불교(佛敎)의 논리를 내재화하여 성립한 것이었다. 산 속에 박혀서 자기네들끼리 1대 2대 3대 하면서, 순수하게 후계자 머리에서 불현듯 새롭게 튀어나온 사상만 새로 추가되면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다.[20] 또한 이는 공자 사상이 역시 주축이 되되, 공자 이외의 옛 성현(聖賢)의 사상도 유가 사상이 적극적으로 수용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요(堯), 순(舜), 우(禹), 탕(湯), 이윤(伊尹),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태공망(太公望), 백이(伯夷) 등은 물론이요, 관중(管仲), 자산(子産), 유하혜(柳下惠), 안영(晏嬰), 섭공자고(葉公子高) 등도(물론 후자의 양반들은 공자보다 격이 떨어진다 여겨졌고, (비판할 땐 또 제대로 비판하긴 했지만) 후대 유가 사상가들이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가란 공자만 일종의 유일신마냥 받드는 종교가 아니었다. 맹자만 해도, 평소에 관중에 대해 심심하면 비판하더니, '하늘이 큰 일을 맡긴 사람'의 예를 꼽을 때 관중을 거론하고, 안영도 관중과 세트로 한 번 비판해놓고 제(齊)나라 선왕(宣王)을 계도할 때는 안영의 말을 인용하는 등 닫히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유하혜도 '조신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지만, '유하혜는 성인(聖人) 가운데 온화한 사람이었다.' 하며 이윤, 백이와 같은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또 백이도 '결벽 떠는 게 심했다'며 비판해놓고서, '백이는 성인 가운데 청렴한 사람이었다.'면서 칭찬도 했다.[21] 공자가 당대부터 가지고 있던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는 본래 예악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의 이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 형식에만 갇혀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다만 옛것을 지키기에만 급급하거나 아니면 폐지해야하느냐로 전락하는 현상이었다. 이는 훨씬 나중에 나온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화이트헤드도 유기체 이론을 통해 진단했던 문제이기도 하다.[22] 대성(大成)이라 함은 맹자가 공자를 평가한 말 중 "공자께서는 여러 성현들의 도를 살피시어 학문을 집대성(集大成)하셨다."에서 따왔다. 지성(至聖)은 '지극한 경지에 이르신 성인(聖人)'을 뜻하고, 문선(文宣)은 '문화를 베풀었다'는 뜻이다. 이로써 후대에 왕(王)으로 추존되었다.[23] 비슷한 사례로 중국사에선 관우악비, 한국사에선 김유신이 있었다.[24] 서구 선교사들이 붙인 호칭이므로, 고전 라틴어가 아닌 교회 라틴어 독법을 따라 'ci'를 '키'가 아닌 '치'로 읽는 게 더 옳을 듯하다.[25] 현대 중국 보통화로는 'Kǒng Fūzǐ(쿵 푸쯔)'로 읽는다. 라틴어 이름이 붙었을 당시의 중국 발음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26] 맹자도 이런 스타일로 '멘치우스(Mencius)'라 칭한다. 단, 맹자는 '부(夫)' 자가 안 들어간다. 즉 서구권에서 공자와 맹자의 이름은 '공부자우스',' 맹자우스'가 된다. 영어로는 [kənˈfjuːʃəs(컨퓨셔스)\], [mɛnʃiəs(멘시어스)\]로 발음. 이 두 사람이 라틴어식 이름으로 널리 통용되는 두 명 뿐인 중국인이다. 그외 묵자(墨子)는 'Micius(미치우스)', 노자는 'Laocius(라오치우스)', 손무는 'Suncius(순치우스)'로 칭하기도 하나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 보통은 묵자, 노자, 손자는 표준 중국어 발음을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으로 표기한 "Mo Tzu", "Lao Tzu", "Sun Tzu"로 더 통용되는 편이다.[27] 애초에 글이나 책을 소리내지않고 읽는 묵독은 아직 이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음독을 했다.[28] 사실, 이 같은 교육 방식은 고대 사회에서는 흔했고, 지금도 원시적 부족 사회를 살아가는 세계 각지의 소수민족들이 이처럼 음률 중심의 활동을 많이 한다. 당장 아프리카뉴기니 등의 원시 생활을 하는 부족들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가 노동 등 활동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다. 각 잡히거나 엄숙하게 앉아서 묵묵히 집중해서 일을 하는 문화는 문명이 상당히 발전한 시점에서 등장한 것이다.[29] 뇌신경학적으로도 음악은 전전두피질, 거울 뉴런, DMN(default mode network) 등을 자극하며, 행동 개선을 위한 치료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전전두피질은 의사 결정에, 거울 뉴런은 공감에, DMN은 자기성찰에 관여하는 부위다.[30] 이 역시 공자가 살았던 시대가 고대 중국 사회였기 때문이다. 동서를 불문하고 문명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가 복잡해지고 각 분야가 나누어지면서 학문과 실용성이 점점 멀어진다. 태고적 인류 문명은 제정일치 사회였고, 사회 활동은 원시종합예술이었다. 따라서 학문 역시 이론과 실무가 세분화되지 않았으며, 분야도 훨씬 단순했다. 이는 서양도 다르지 않아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었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그저 세상에 대해 탐구하고 사유했을 뿐이지만, 복잡하게 분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온갖 분야에 이름을 날린 것처럼 보이고, 그렇기에 이들이 더욱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처럼 복잡화 전문화만 안 되었을 뿐이지 사물의 현상과 본질을 매우 직관적이고 명료하게 파악하고 이를 정리한 능력은 평범한 사람이 따를 수준이 아니다. 원래 진정한 학문은 살보다는 뼈를, 수사보다는 핵심에 있다.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화이트헤드도 서양의 거의 모든 철학자가 플라톤 영향 하에 있다고 언급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괜히 이들이 성현으로 추존받는 것이 아니다.[31] 일신에 뛰어난 학식을 가졌지만 경우에 따라 배 한 척 값의 수업료를 요구할 정도로 사익을 강하게 추구하던 그리스의 프로타고라스 등의 소피스트와 격이 다른 위대한 교육자인 것이다.[32] 논어 술이편에서: 我非生而知之者好古敏以求之者也[33] 중국의 현학이 공격받았던 것도 현학이 헛공부만 하고 정치에 힘쓰지 않는다. 학문은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고 하는 거고 학문을 익혔으면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고 그 밖의 다른 건 학문이 아니다는 논리 때문이었다.[34] 이 수치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후한 시대의 도량형으로 따지면 2미터가 넘지만…물론 이 시대에는 키를 정확히 재지 않았기 때문에 대충 느낌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5척이면 매우 작은 키고 8척은 꽤 큰 키, 9척부터는 거인급.[35] 자로는 본래 지독한 폭력배였는데, 공자의 학당에 뛰어들어서 행패를 부리다가 공자에게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고 나온다. 감화의 방법은 이야기마다 다르지만 공자가 직접 주먹으로 감화 시켰다는 이야기고 있고, 팽팽하게 맞붙던 도중 공자가 이런 필부의 만용은 부질없으며 진정한 군자의 강함을 가르쳐 주겠다고 설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6] 공자의 선조는 공보가(孔父嘉)로 정장공 시절에 송나라의 명장이었다.[37] 이런 제자백가 중 한 갈래인 묵가의 경우 지금으로 치면 용병단 비슷한 조직체제를 가졌고, 수성(守城)을 전문적으로 맡았다.[38] 고대 유명한 학자나 종교인들 중에서 무예와 관련된 자들은 상당히 많다. 애초에 전쟁이 흔히 일어나 무슨 일로 죽을지 모르는 시대였고 치안도 지금보다 훨씬 별로라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지켜야 하는 데다 노동의 강도가 높았던 시대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거구에 레슬링을 잘했고,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참전용사로 많은 전투에서 공훈을 세웠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본래 크샤트리아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남다른 재주를 보여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 무함마드도 하디자 가문의 대상단을 이끌면서 기본적인 호신술과 군사들을 부리는 능력을 익혔다. 예수의 경우는 젊은 시절에 각지에서 다양한 학문과 기술을 익혔고, 목수와 건설업자로 일했던 몸이라 예수의 성전 정화 당시 채찍을 들고 상판을 다 엎어버리는 등 약하지는 않았다.[39] 참고로 고대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재산과 지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무장은 개인돈, 또는 지휘관의 돈으로 구비하던게 근대 이전 이야기여서 덕분에 군대의 의장과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즉 돈 없으면 전쟁에 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후에 약탈하는 권리 또한 개인의 지위와 재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였다. 그 때문에 지휘관이나 피 정복민은 그를 막으려면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의 권리가 커져 고대 민주주의 체제로 발전한 것도, 그리스 군대가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 보병부대 위주로 구성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경제력과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된 결과이기도 하다.[40] 다만 최술은 수사고신록에서 이는 후세 사람들이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맹자가 공자의 제자는 70명이라고 한 이야기를 더 신봉한 것.[41] 논어 자한편에서: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42] 논어 자한편.[43] 공자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오산시논산시 노성면 2군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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