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6 13:59:15

함풍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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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px-Imperial_standard_of_the_Qing_Lord.svg.png 청 제9대 황제
文宗 咸豊帝
문종 함풍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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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문종(文宗)
시호 만주어: 일어투 후왕디(ᡳᠯᡝᡨᡠ ᡥᡡᠸᠠᠩᡩᡳ)
한자: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한호 굽치 얼옝어 한(ᡤᡠᠪᠴᡳ ᡝᠯᡤᡳᠶᡝᠩᡤᡝ ᡥᠠᠨ᠌)
칸호 투게멜 엘베그투 칸(ᠲᠦᠭᠡᠮᠡᠯ ᠡᠯᠪᠡᠭᠲᠦ ᠬᠠᠭᠠᠨ)[1]
연호 만주어: 굽치 얼옝어
한자: 함풍(咸豊)
만주어: 아이신기오로 이주(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ᡳ ᠵᡠ)
중국어: 아이신줴뤄 이주(愛新覺羅 奕詝)
한국식 독음: 애신각라 혁저
영문 Xianfeng Emperor
출생 음력 1831년 7월 17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원명원
사망 음력 1861년 8월 22일 청나라 열하성 승덕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재위기간 음력 1850년 3월 9일 ~ 1861년 8월 22일 (11년 166일)

1. 개요2. 즉위 이전3. 즉위 이후4. 평가

1. 개요

강제 퇴위를 당한 선통제를 제외하면 사실상 가장 재위가 짧은[2] 청 황제이며, 중국 역사상 자기 아들이 황위를 계승한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재위 11년간도 평안치 못하여 온갖 종류의 재난이라는 재난은 모두 일어나 이때부터 청나라는 국가 막장 테크를 타게 된다.

2. 즉위 이전

도광제의 넷째 아들이며, 생모는 효전성황후 뉴호록씨이다. 도광제가 사망할 시점에는 형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그가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그가 즉위하기 까지는 어느 정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도광제의 정실이었던 효목황후는 자녀가 없었고, 효신황후는 딸 1명을 낳았다. 도광제는 황자시절 시녀를 범해서[3] 의도치 않게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도광제의 장남인 혁위(奕緯)이다. 도광제는 신분이 낮은 시녀에게서 의도치 않게 아들을 얻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것으로 인해 자신의 평판에 흠이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가경제는 처음 얻은 손자를 기뻐하여 혁위를 패륵에 봉했으나, 도광제는 이를 싫어하여 자신이 즉위한 직후, 혁위에게서 패륵지위를 박탈하고 평범한 황자의 지위로 내려가게 하였다. 도광제는 황후가 낳은 적자를 원하였기 때문에 혁위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런 잘못없이 작위를 취소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청의 법제에 따르면 공이 있으면 작위를 올려주고, 죄가 있어야 작위를 강등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도광제가 혁위를 패륵으로 봉하면 제신(諸臣)들이 그를 후계자로 생각할까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도광제에게는 적자가 태어나지 않았고, 당시 총애하던 정비(靜妃)가 낳은 차남과 3남은 유아기 때 요절하고, 또다른 총비 전귀비(全貴妃) [4] 는 공주를 연이어서 낳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광제의 나이 50세가 가까워지면서 유일한 대안은 자신이 사랑하지 않은 아들인 장남 혁위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비로소, 혁위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그에 걸맞는 스승을 붙여주어 교육을 담당하게 하고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1831년 5월에 혁위가 23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사고> 등에는 전년부터 아팠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야사에서는 혁위가 공부에 신경쓰지 않고 방탕하게 놀다가 도광제가 분개하여 질책하다가 혁위의 중요부위를 걷어차서 갑작스레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혁위가 1831년 5월에 죽은 직후, 그해 7월에 전귀비(全貴妃)가 도광제의 넷째아들인 혁저를 낳았다. 도광제의 나이 50세에, 그 시점에서는 유일하게 얻은 아들이었다, 1833년 효신황후가 죽자, 전귀비는 황귀비가 되었고. 효신황후의 3년상 이후에 황후로 책봉됨으로서 혁저도 적자로 승격되었다. 1840년 효전황후가 죽었는데, 이 때 혁저의 나이 10세였고. 그의 양육은 정귀비에게 맡겨졌다.

효전황후의 죽음에는 야사가 전해진다. 함풍제는 이미 황자 시절부터 혁흔에 비해 무능함이 드러나 후계자 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뉴호록씨는 자기 아들이 재위를 잇게하기 위해 공친왕이 먹을 생선요리에 독을 탔으나 고양이가 먹고 거품을 물고 죽자 추궁당하여 전모가 드러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고 한다. 물론, 야사일 뿐이다.

정귀비에 의해 양육된 혁저는 정귀비를 생모처럼 여기면서 효로서 섬겼고, 정귀비의 아들은 혁흔(도광제의 6남)도 친동생처럼 여겼으며 유년시절을 같이 보냈다. 도광제의 5남 혁종은 숙부인 돈친왕 면개의 양자로 입양되어서 후계경쟁에서 탈락하였고, 7남 혁현 이하는 아직 어려 후계가 될 수 없었다. 자연히 도광제의 말년은 혁저와 혁흔이 후계자 지위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혁저는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곰보자국이 있었으며, 또한 수렵사냥 중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 이후부터 다리가 불편한 점이 있었다. 혁흔은 문무에 능통하고 활달한 기개가 있어서 도광제가 총애하였다. 도광제는 혁저는 유일한 적자이기도 했고, 효전황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총애하였다면, 혁흔은 그 재능으로 인해 사랑하는 바가 컸다.

혁저가 도광제의 유일한 적자(공친왕 등은 서자)이긴 했지만, 사실 청나라는 중국사의 다른 흔한 한족왕조와 달리 능력있는 아들이 계승한 사례가 많았고 태자밀건법 같은 제도도 있어서 적자 함풍제가 너무 소질이 없어보인다면 얼마든지 그것을 뒤집고 다른 서자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무능했던 그가 어떻게 즉위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야사(野史)가 있다. 도광제가 죽기 얼마 되기 전에 함풍제와 공친왕을 같이 불렀는데, 공친왕은 여러 국정 현안에 대해서 막힘없이 답했지만 반면 두수전(杜受田) 등 스승들의 코치를 받은 함풍제는 황제의 병세가 이리도 악화되었으니 이는 다 자식인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눈물 감성팔이 작전이 먹혀서(…) 후계자는 함풍제가 되었다. 그래서 '공친왕이 후계자가 되었다면'이란 가정은 지금도 가끔씩 회자된다고 한다.

정사에는 도광제와 황친들이 수렵사냥을 나갔을 때, 혁저가 단 한 발의 화살도 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고, 도광제는 그가 생명을 중히 여기는 인효한 인품임을 크게 칭찬했다고 하며, 그로서 혁저를 후계자로 정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1846년의 일)

입태자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학자들 간에 논쟁이 많다. 함풍제가 즉위 이후 보여준 무능함으로 인해 공친왕이 후계자가 되었더라면 하는 가정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는 있으나, 현재 새롭게 득세하고 있는 학설은 함풍제가 황자시절 꽤나 능력이 있었던 인재로 각인이 되었으며, 인효 등 유교적 가치가 중시되던 사회에서 함풍제의 인품이 도광제와 조정중신들 사이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점도 연구도 있다. 함풍제에 대한 재평가를 둘러싸고 현재 대륙학계에서는 상당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3. 즉위 이후

즉위한 이듬해인 1851년, 중국 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무려 13년이나 계속되어 함풍제가 죽은 이후인 1864년에야 난징이 함락되어 끝났으며, 흡사 강희제 시절의 오삼계의 난처럼... 아니 그보다 더더욱 중국의 남쪽 절반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미 백련교도의 난(1796년 ~ 1805년)으로 재정을 소진했던 청은 또 없는 살림에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여 재정이 완전히 탕진되었고,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강남이 초토화되어 경제, 사회적으로 몹시 피폐해졌다.

이 상태가 현재 진행 중인 상황에서 1856년, 영국프랑스가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1858년 톈진 조약을 맺어 추가로 개항장을 지정했고, 러시아는 중개를 빌미로 아무르강 이북의 광대한 영토를 떼어먹었다. 1859년 ~ 1860년 사이 2차 아편 전쟁의 속편 격인 사건이 일어나 영프 연합군이 청군을 괴멸시키고 베이징을 점령했고 함풍제는 궁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유럽인들은 건륭제가 세운 원명원을 약탈하고 파괴한 뒤 불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로 이때 청의 막대한 문화 유산이 유럽에 반출도둑질당했다.[5]

아무튼 이때 함풍제는 앞서 말했듯 수도를 버리고 열하의 피서 산장으로 몽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중재에 나섰고,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그 중개료로 연해주를 차지했다(…). 조약은 체결되었지만 그는 외국 공사와 친견을 거부해 계속 열하에 있다가 병사하였다.

4. 평가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청나라 최악의 암군[6]으로 평가받지만 그래도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일부에서는 제위에 오른 것 자체가 왕조와 나라 모두에 재앙이라는 극악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7], 하는 짓과 그 결과만 놓고 보면 변명거리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함풍제는 너무 이른 31세의 나이에 사망해서 아들 동치제는 1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황제에 올라야 했고 이는 결국 자신의 후궁 서태후동치제의 어머니 자격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서태후의 실정이 청나라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켰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나비효과가 아닐 수 없다.[8] 이괄의 난이 청나라에 유리한 나비효과를 만들어냈다면 함풍제의 즉위는 청나라에 불리한 나비효과를 만들어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풍제가 죽고 딱 50년 뒤인 1911년에 청나라를 멸망시키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함풍제의 치세는 조선 철종(재위 1849년 ~ 1863년)의 재위 기간과 대략 일치한다. 자연 재해는 빗발쳤고, 민란은 연이어 일어났지만, 정작 왕은 무능하여 그냥 놀고 먹다가 가버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9] 반면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로 나라의 문을 열면서 일시적으로는 혼란해졌으나, 1867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1] Tügemel Elbegtü Qaɣan. 현대 몽골어로 투게멜 엘벡트 칸 Түгээмэл Элбэгт хаган (Tügeemel Elbegt Khaan)[2] 물론 초대 황제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도 10년밖에 재위하지 못했지만 이 사람은 즉위하기 30년전부터 이미 만주족의 군주였으며, 1626년 영원성(寧遠城) (지금의 랴오닝성) 후루다오시(葫蘆島市)에 속한 행정 구역, 싱청시(興城市). 전투에서 패한 뒤 부상 때문에 병들어 죽었으니 다르다. 지못미.[3] 화비 나라씨이다[4] 함풍제의 생모 뉴호록씨는 14세때 도광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명문가 출신에 미인에다 총명하고 성격도 온순해서 전부 뛰어나다 라는 의미로 '전귀비'라 불리었다. (이후 황후로 책봉)[5] 언젠가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제작된 옥새가 경매에 올라와서 중국 네티즌들을 격노케 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그 옥새 또한 이때 반출된 것이 아닌가 싶다.[6] 태조 누르하치부터 건륭제까지는 모두 명군이었고(물론 건륭제는 말년에 타락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가경제도광제는 각각 희미한 존재감과 아편전쟁으로 인해 좋은 평을 받지 못할지언정 암군은 아니었다. 동치제광서제는 모두 서태후의 꼭두각시의 불과했기에 망국의 책임을 온전히 그들에게 떠넘기기 어렵고, 어린 나이에 잠깐 즉위했다 망국으로 인해 퇴위했을 뿐인 선통제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7] 물론 이 인간은 한 영제나 당 의종, 송 휘종, 명 만력제같이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는 아니었기에 인간 취급은 해준다. 차라리 황위에 오르지 않고 일반 황족으로 평생을 보내거나 외세가 없었다면 청나라 최악의 암군 타이틀을 갖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8] 다만 함풍제는 도장을 두 개 만들어 어상은 동태후에게, 동도당은 후계자 재순(사실상 서태후에게 준것)에게 주었다. 성지에 두 개의 도장을 모두 찍어야 성지가 효력이 있게 함으로써 서태후에 대한 견제장치는 두었다.[9] 근데 철종 위에 있던 게 세도 가문들이었다. 뭘 해보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그럼에도 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철종은 오히려 광서제와 비교하는 게 적절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