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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동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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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經
1642년 10월 25일 ~ 1681년 3월 17일

1. 개요2. 생애3. 여담4. 둘러보기

1. 개요

대만 동녕국(명정시기)의 제2대 왕으로 정성공과 동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정성공의 맏아들이었다. 동녕국의 역대 왕들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편으로 동녕 왕국의 역사는 사실상 이 사람의 재위기간이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이다. 시호는 조문왕, 작위는 연평(문)왕이다.

정금(鄭錦)이라고도 하며 일본인들은 정금사(鄭錦舍)라고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를 바탕으로 정금이나 정금사란 이름이 많이 나온다.#

2. 생애

푸젠성의 안하이(安海)에서 자라다가 부친인 정성공이 대만 섬을 공격하러 갈 때 1650년 샤먼으로 이주하여 샤먼과 진먼을 지켰으며, 정실에게서는 낳은 자식이 없었지만 중년의 여인들과 밀회를 하면서 유모 진씨와의 사이에서 정극장을 낳았다. 유모 진씨는 정성공의 자식을 양육하기 위해 들여온 여인이자 정성공의 측실로 엄연히 정경의 계모 신분이었다. 더구나 유모 진씨는 1626년생으로 1642년생인 정경에 비해 16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정경은 유모 진씨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은 사실을 감추었지만 정경의 처조부가 이 사실을 발설하여 정성공에게 알려졌다. 정성공은 장남인 정경의 난륜에 대단히 분노하여 정경, 유모 진씨,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정극장, 심지어 자신의 정실인 동씨까지 정경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죽이려 했지만 정성공이 먼저 승하하는 바람에 이 명령은 당연히 실행되지 않았다. 정성공 사후에 정경은 정성공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청나라에서 사신이 파견되어 복종, 명나라의 옥새, 변발 등을 요구하면서 사면과 함께 높은 벼슬을 내리겠다고 하자 그 조건으로 독립국과 동시에 조공국으로 설정할 것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정태에게 투옥된 주전빈을 석방하여 총사령관으로 임명[1]했으며, 또한 명나라 황실의 일족에 해당하는 주술계를 영정왕에 봉했다.

황소와 소공진 등이 정성공의 동생으로 정경의 숙부인 정습(정세습)을 지도자로 옹립하자 1662년 11월 16일에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주전빈과 함께 출병하여 27일에 이들을 제압했으며, 이들의 진지에서 발견된 서한을 통해 정태가 정습과 내통하여 선동했다는 내용을 알게되자 샤먼으로 돌아와서 정태를 체포했다가 그를 죽였다.(정습의 난) 정씨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국호를 동녕(東寧)이라 칭했으며, 1663년 11월에 네덜란드 세력과 청나라의 연합 공격으로 샤먼 및 진먼을 잃게 되자 1664년에 대만으로 철수했다.

뇌물을 통해 청나라 본토의 관리들과 교역을 했고, 1670년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무역 협정을 체결했으며, 이후 오삼계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청나라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면 병력을 동원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동녕 왕국의 주둔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평포족 원주민들의 토지를 침범했고, 그로 인한 영토 분쟁으로 인해 대만 원주민들과 갈등 및 충돌이 일어나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정경은 유국헌을 중심으로 병력을 모으고 전투 준비를 한 다음, 본인 역시 전투에 출전하여 다두 왕국의 원주민 부족 동맹에 대항한 끝에 승리했으며 그뒤에 수많은 원주민들을 본보기로 학살하고 내쫓은 다음, 그들의 마을을 불태우고 원주민들의 토지와 농장, 밭 등을 갈취했다.[2] 1673년 12월 28일에 오삼계의 반청 봉기를 시작으로 삼번의 난이 일어나면서 1674년 4월 21일에 경정충도 반란에 가담하자 사자를 파견해 반란에 협력하면 푸젠의 취안저우, 장저우 두 곳을 나눠주면서 샤먼과 진먼을 반환할 것을 제안하자 이를 합의했다.

그러나 삼번 등이 세력을 순조롭게 확대하면서 경정충이 일방적으로 약조를 파기하자 경정충의 영토인 푸젠성의 연안 지대를 공격했으며, 푸젠성 남부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러나 경정충이 청나라에 항복한 후 경정충과 청나라의 공격을 받아 점령한 땅을 대부분 잃었으며, 1678년에는 유국헌에게 해징을 점령하도록 지시했다. 1680년에 청나라가 샤먼, 진먼, 하이청 등을 공격하자 이들을 물리쳤지만 청나라의 계략으로 민심이 흔들리자 1681년 3월 27일에 대만으로 철수했으며, 청나라가 교섭을 시도하자 하이청을 교역 장소로 할 것을 요구했다가 거부되었다.

이후 자포자기하여 주색에 빠져들었다가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1681년 3월 17일 총관 풍석범 및 유국헌 등을 불러 장남 정극장을 후계자로 삼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했다.

그의 사후 정극상의 장인이었던 풍석범이 정극장을 죽이고(동녕의 변) 어린 정극상을 제3대 왕으로 옹립한 후 실권을 장악하면서 동녕 왕국은 쇠락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정성공의 옛 부하였던 청나라의 수사제독 시랑(施琅)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683년 펑후해전에서 패배하여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에게 항복함으로써 동녕 왕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3. 여담

  • 조선 숙종시기 북벌론이 한창일 때 삼번의 난이 터지자 윤휴가 해도로 사신을 보내 정금과 연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영의정 허적을 비롯하여 권대운, 류혁연 등등 다른 대신들이 현실성이 없고, 정금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며, 혹여 정금이 조선과 연합했다고 청나라에 사신을 자랑하거나 사자가 청나라에 잡히면 어떡하냐고 반발해 흐지부지 됐다.#,#
  • 조선왕조실록에서 윤휴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일본을 통해 정금과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그만큼 아쉬움이 컸던 모양이다.#
  • 한편 대마도주가 중국 상인의 말을 듣고 조선에 정금이 쳐들어올 수도 있다고 전달해 줘 조선 조정이 긴장한 적도 있다.##
  • 아버지처럼 일본 에도 막부에도 병사를 요청하려 숙부를 통해 사신을 보냈는데 에도 막부는 검토 끝에 거절하고 나가사키 번주를 오히려 꾸짖고 통교를 금했다.#
  • 대만에서는 아버지 정성공과 함께 반청복명의 상징으로 민족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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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성공이 샤먼 연안에 있을 때 그의 부하 장수 한 명이 청나라에 투항하려 한다는 사실을 듣고, 주전빈에게 그 부하 장수의 처벌과 동시에 정경, 정태, 동부인, 그 밖에 반기를 든 장수들을 참수하라는 서신을 보냈다가 정성공의 사촌형인 정태가 중간에 그 서신을 가로채서 주전빈을 투옥시켰다.[2] 이 사건을 사록사 전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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